1. 갓 임명된 신출관리 - "대간 전원을 파직하소서!"
경기 용인.
<심곡서원(深谷書院)> 조광조의 위패가 모셔진 사액서원이다.
조광조는
조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정치가로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정암(靜庵)이다.
조선 개국공신 조현의 손자로 14살에 무오사화(戊午士禍)로 귀양 가 있는 김굉필의 제자가 된다.
사화(士禍) 이후
사림과 성리학이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상황에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에만 몰두하는 조광조를 주위에선 '광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시묘살이를 하며
주위에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를 심어
공부의 터전으로 닦았다고 한다.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연산군의 폭정에 불만을 가진 훈구 세력이
배다른 동생 진성대군을 추대한 것이다.
조선 11대 중종이다.
조선 9대 성종 (1469~1494) - 10대 연산군 (1494~1506)
- 11대 중종 (1506~1544)
1510년(중종 5년).
29세에 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고
5년후 34세에
임금이 직접 실시하는 알성시 문과에 응시하여
'옛 성인의 이상적인 정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한가?"란
중종의 물음에
"임금이 마음으로 백성을 감화시켜야 하며
대신을 믿고 함께 국사 처리하면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답안을 제출해서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급제했다고 한다.
임명 이틀후
조광조를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전북 순창 '삼인대'의 상소 사건.
군수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유옥 세사람이 상소를 작성하여
중종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거창 신씨(愼氏) 단경왕후(端敬王后) 복위를 주장한 것으로
반정공신들의 독단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글이었다.
그랬다.
반정공신들은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누이를 연산군에게 시집 보내고
좌의정을 지낸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죽음으로 몰고 간 후,
신씨의 보복을 염두에 두고
반정 일주일만에
중종을 압박하여 신씨마저 폐위케 했던 것이다.
"국모를 내쫓기를 병아리 새끼 팽겨치듯 하였으니
앞으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지금 내정의 주인이 비었으니
쾌히 결단하셔서 신씨를 중전의 자리에 앉히셔야 합니다."
- <중종실록 10년 8월 임술 >
조광지처를 버리는 것은 유교 윤리에 어긋나고,
신하들이 왕을 위협해 왕의 부인을 내쫓게 한 것도 부도(不道)하다는 지적으로,
훈구 반정공신에 맞서는 사림의 결집 구도가 되어버렸으나
결국 조정은 훈구파의 편을 들어
상소를 올린 자들을 유배시켰는데
임용된 지 이틀밖에 안된
신출내기 말단 언관이었던 조광조가
상소를 올려 이의를 제기하고
대간 전원의 파직을 요청한 것이다.
"언로를 열기 위한 왕의 뜻을 받을어야 할 대간들이
박상과 김정의 언로를 처벌하여 유배했다면
그것은 대간답지 못한 것이니
그들 모두를 파직하소서"
- 조광조 상소
<사헌부> 대사헌 - 집의 - 장령 - 지평
<사간원> 대사간 - 사간 - 헌납 - 정언(조광조)
조광조가 올린 상소는
몇 달간의 논쟁을 불러왔고
마침내 대간 모두 사퇴, 교체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 일로 조광조는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고
조정의 중심 인물로 부각한다.
2. 중종은..왜..조광조가 필요했나?
과거에 급제해서
정 6품에서 정 3품 당상관까지 오르는데
보통 10년이 걸리지만,
조광조는 3년만에
종 2품 사헌부 대사헌으로 초고속 승진을 한다.
중종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헌부 대사헌(종2품)
홍문간 부제학(정3품)
승정원 동부승지(정3품)
홍문관 응교(정4품)
홍문관 부교리(종5품)
사간원 정언(정6품)
조지서 사지(종6품)
조광조가 거친 관직은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는 자리,
즉 관리의 비리를 감시하고
왕에게 자문하거나 직언, 간쟁을 하는
언관직이었다.
중종은
조선 역사에 첫 반정으로 오른 왕이었다.
자신이 원하거나 반정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연산군의 폭정에 시달리던 훈구파들에 선택되어 왕이 된 것이다.
그것은 신하들의 쿠데타!
세조때부터 키워진 훈구파세력은 점점 거대해져 갔고
이제 조선 성리학 사회는 왕의 독주를 허용치 않는
신하들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고
중종 즉위 8년까지 옥사가 이어졌다. .
김공저, 조광보의 옥사(중종 2년)
이과의 옥사(중종 2년)
신복의의 옥사(중종 3년)
이석손. 이복종. 이윤의 옥사(중종 4년)
박영문. 신윤무의 옥사(중종 8년)
"내가 왕위에 오른 것은
내가 원한 게 아니라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간사한 무리들이
왕을 바꿔야 한다는 말을 퍼뜨리고 있으니
내 마음이 답답할 뿐이다." - <중종실록>
중종의 왕권은 미약하고 불안했고
반정 삼공신이 득세하여 주도하였다.
"삼공신인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에게
중종이 예우하기를 보통과 달리하여
조회가 끝나고 물러갈 때면 일어났다가
문을 나간 후에 자리에 앉았다." - <연려실기술 제9권>
그러나 반정 8년.
3공신들이 모두 사망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풍속을 개량하고 국가를 유지하는데는
청렴한 관리와 절의 있는 선비를 본받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조정 사대부와 초야에 있는 사람 가운데
어찌 마땅한 사람이 없겠는가?
그들을 뽑아 쓰는 방도를 구하라!" - <중종실록 8년>
중종은 마침내 훈구파를 견제하고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세력으로 사림파를 대거 등용시킨다.
사림파는 중종 12년부터 급증하여
주로 3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포진하는데
홍문관 의 84%, 사간원의 60%, 사헌부의 69.2%를 차지하며
훈구파를 압박하게 된다.
이들 사람들은 중종의 비호를 받으며 고속 승진을 하여
보통 20년 걸릴 승진을 4~5년만에 오른다.
그것은 중종의 왕권 강화를 위한 배려책이자 의도였고
그 사림파의 한가운데 조광조가 있었다.
3. 조광조! 그가 이루려던 개혁은 무엇인가?
조광조와 사림파가 꿈꾸는 세상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하는 사회였다.
수평이 아닌 수직적인 신분제도를 고수하며
왕이 "수신(修身)"하여
더 나은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이루는 것, 도학정치였다.
사림파의 이상 사회를 이루기 위해
왕의 자질 향상과 더불어
먼저 훈구파로 인한 폐단, 독주를 막아야 하고,
이를 목적으로 조광조와 사림들은
현량과(賢良科, 인재 천거제) 실시를 주장한다.
전국에서 학식과 인품이 갖춘 뛰어난 인재를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사림 - "나라는 작은데 관직은 많아서 요즘 하는 일없이 녹을 받는 자 많습니다."
조광조 - "각 기관에서 한 가지 일을 두세사람이 맡고 있으니
한 사람이 병으로 여러 달 나오지 않으면 파직해야 함에도
자리를 그대로 보존하는 일도 있습니다."
중종 - "관직의 수는 경국대전에서 정하고 있으니 내 함부로 고칠 수 있겠소?
다만 이제부터 긴급하지 않은 자리는 채울지 않을 수 있을 것이오."
조광조 - "도태한 관리들의 재임용도 막아야 합니다.
인물이 없다보니 뻔히 알면서도 다시 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중종 - "인물을 죄다 알 수 없으니 자연 사람 쓰는데 실수할 수 있지 않겠소."
조광조 - "인물을 쓸 때 인물의 현명함을 먼저 파악하시고
대신들에게 물으면 그런 실수는 없을 것입니다."
조광조 - "조정에 인물이 부족하다는 걱정이 있으니 이것이 괴이한 일입니다.
지금 천거에 대한 태도를 분명하게 하여
재행(재행)이 뛰어난 사람을 뽑을 수 없겠습니까?"
- <중종실록 13년>
중종 14년 3월.
정국공신 김우증 모반 음보 사건이 일어난다.
사림파의 진출에 불만과 위기를 느낀 훈구파들이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기 위한 모반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 사건은 오히려 사림파에게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어
중종 14년 4월. 마침내 현랑과가 실시된다.
이때 28명이 등용되는데
대부분 사림파였고
이들은 요직에 배치되어 고위직 관리로 성장한다.
여전히 반정의 정국공신(靖國功臣)들이
여전히 6조 등 요직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사림의 중심인물 조광조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중종의 정치적 선택이었고
그것이 곧 그 자신의 왕권 강화와 연결될 것을 의도였다.
경연(經筵)은
왕에게 유학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는 일 또는 그 자리로,
왕에게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케 하기 위한 교육과 더불어
왕과 신하들이 함께 국가 중대한 현안을 토로하는 제도로,
고려에서 조선까지 정통적으로 이어지는 것이었으나
임금에게는 왕의 자질과 왕권에 제한을 가하는 상당히 곤란한 제도였으므로
태종은 왕권을 제도적으로 속박한다하여 등한시했고
세조 수양대군과 연산군은 아예 폐지하기도 했다.
조광조와 사림들은
경연을 통해
중종의 자질을 높이고자 했다.
조강, 주강, 석강, 야대까지 하루 네번까지 행하면서
중종에게 현군의 자질을 요구했다.
사실 왕이 될 후계자 왕세자는
어릴 때부터 철저한 교육을 따로 받았다.
이른바 서연(書筵)이었다.
서연은
하루 세 번 왕세자가 대신에게 받아야 하는 교육으로
세자의 나이에 맞게 교육과정이 편성되었는데
천자문부터 역사책, 소학, 유교경전을 망라하는 것이었고,
왕도 정기적으로 참가해야 하고
영의정과 우의정이 총감독을 하며
강의를 담당하는 스승은 열명,
여름방학과 겨울방학도 있는
세자 한 명을 위한 궁안의 학교였다.
1일과 15일에는
세 스승을 모시고
서연관들 앞에서 복습 및 테스트를 받는
'회강(會講)'도 열리었다.
조광조와 사림들이 중종에게 경연을 강조한 것은
중종은 반정에 의해 추대되었으므로
서연, 즉 왕세자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것은 그만큼 왕의 자질이 부족한 왕이라는 뜻으로 보고
조광조와 사림들이 추구하는 도학정치,
이상적인 성리학적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왕이 끊임없이 자기 수양과 학문을 넓혀
사회 개혁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강론을 시작하면 해가 기울어서야 파함으로
임금이 피로하고 괴로워서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펴고 고쳐 앉기도 하고
때로는 용상에서 퉁하는 소리를 냈다."
- <연려실기술 중종조 고사본말>
강도높은 경연은
중종을 점점 지쳐가게 했다.
그러나 조광조와 사림들은 중종을 계속 압박했고
심지어 중종앞에서 신랄한 비판도 서슴치 않아
중종은 궁지에 몰리곤 했다.
그것은 훈구파를 견제하고
사림파와의 세력 균형을 통해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꾀하려 했던
중종의 의도와 점점 멀어지는 과정이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은 해가 없었습니다.
이는 하늘에 닿으려는 전하의 정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재변은 하늘이 전하의 잘못을 꾸짖고 훈계하기 위한 것이니
지난 잘못을 반성하시고 더욱 덕을 쌓는 일에 매진하십시오."
조광조와 사림의 개혁은 계속 되었다.
소격서(昭格暑) 폐지였다.
소격서란
도교 사당으로서 태조 5년(1396년) 경복궁 옆에 건립되어
연산군과 중종때 일시 폐지되었다가
임진란때 완전히 폐지되는
조선 200년 동안 유지된 국가적인 행사였다.
도교는
중국의 대표적 민족 종교로서
황제와 노자를 교주로 하는 토착 신앙으로
불로장생, 연단술, 현세구복과 영생을 추구하는 것으로
고려때 민간 신앙와 융화하며 조선까지 이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옥황상제와 노자, 염라대왕을 모셨다고 한다.
성리학자 조광조에게
성리학 이외에 불교, 도교, 민간 신앙은 모두 이단이었다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위해 그 나머지 종교와 사상은 근절해야 하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소격서는 백성들에게 미신을 가르치는 것으로
도교에서 하는 말은 허황되고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폐지해야 합니다."고 주장하고,
중종은 "국초부터 있던 것을 어찌 내가 맘대로 하겠소?" 한다.
조광조 5번,
홍문관이 7번 철폐 상소를 올리고
전원이 사직서를 제출하며 중종에게 강경히 맞섬으로서
결국 중종은 소격서 폐지를 명령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종의 왕으로서의 권위는 물론
조광조와 사림에 대한 중종의 배려와 신뢰에 금이 가게 하는 계기가 되고 만다.
다음으로 조광조와 사림은
전국에 향약(鄕藥) 실시를 건의한다.
향약은
중국 주자의 <여씨향약>을 표본으로 하는 것으로,
중앙의 훈구파와 결탁한 지방 수령들의 부정부패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고, 지방 자치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나,
지방 향촌 지배 세력인 사림(향반)은
따로 향약청을 설치하여 수령의 권한을 벗어나
향촌 자체의 법과 규율을 마련해
지방민에 대한 유교적 풍속, 감화를 주도할 수 있었으니,
서원과 더불어
15세기 조선 건국 이래 지방에 정착했던
사림의 정치 기반이기도 했다.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 (덕업상권 -德業相勸)
나쁜 일은 서로 규제하고 (과실상규 - 過失相規)
예의와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 (예속상교 - 禮俗相交)
어려울 때 서로 돕는다 (환난상휼 -患難相恤)
- 향약 4대 덕목
당시 조선 사회의 빈부격차는 심각했다.
"부호한 자는 토지가 천맥(천맥)을 연하고
가난한 자는 송곳을 세울 땅도 없어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짐이
이때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 <중종실록 13년>
조광조는 토지 개혁을 주장한다.
토지를 국유화해서
농민들에게 토지를 균등 분배하자는
균전제(均田制)와,
특정 세력의 토지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토지 소유 상한제인
한전제(限田制)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조광조와 사림은
훈구파의 물적 기반 확대와 그와 맞물리는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백성들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이제 조광조와 사림파의 칼날은
훈구파를 향해 직접 겨누어진다.
이른바 '위훈삭제(僞勳削除)'였다.
중종반정에 공신은 너무 많았다.
태조때 개국공신은 52명.
단종때 수양대군이 황보인과 김종서를 제거하고 세운 정난공신 43명,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도운 좌익공신 41명,
예종의 아들을 물리치고 추존 덕종의 둘째 아들 성종을 즉위시킨 좌리공신 75명...
그런데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은
보통 공신 책정의 두배가 넘는 117명이었다.
문제는 이들의 다수가
재상이나 공신들에게 뇌물을 바쳐서 공신 대열에 들어가거나
아예 공신들이 자기의 아들이나 가까운 친인척을 집어넣는 부당한 행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4등 공신에 책봉된 최유정은 재상에게 뇌물을 줬으며
4등 공신 유흥은 공신 유순정의 아들,
심지어 2등 공신 김감은 연산군에 아첨했던 관리였음에도 중정반정에 공신 대열에 낄 수 있었다.
훈구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대하고자
공신 책정을 자의로 극대화한 것이었다.
공신 반열에 든 세력들은
엄청난 호의호식을 누릴 수 있었다.
작호와 토지와 노비와 음지에 죄의 면책까지 주어졌다.
1등 공신의 경우
자신은 물론 자식의 벼슬도 3단계 올라가고
병졸 10인, 노비 20인, 논밭 150결, 은 50냥, 옷감 1단, 말 1필을 받았다.
이것은 자손 대대로 부귀영화와 권력을 주는 것이었다.
"무릇 공신을 중히 여기면
공을 탐내고 사사로운 이익을 탐내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 다 여기서 말미암으니,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먼저 사사로운 이익의 근원을 막아야 합니다."
반정초부터 이것은 문제시 되었으나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그것은 자칫 반정으로 오른
중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광조와 사림은 위훈삭제를 강력하게 청했고
위세에 눌린 중종에겐 이 안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결국 정국공신의 76명 전체의 약 70%가 삭제되어
파직과 토지, 노비 등 내놓아야 했다.
이것은 누가봐도 사림의 승리였다.
이제 훈구파의 기세는 한순간 무너지는 듯 했고
조광조는 사림뿐아니라 조정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것은 후폭풍을 몰고 왔다.
훈구파의 반격이었다.
중종의 입지가 점점 약해진 상황에서
나뭇잎에 꿀을 발라 벌레가 글자 모양대로 갉아먹도록 조작해 낸 훈구파의 모략.
조씨가 왕이 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 '음모는
중종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급기야 그는
자신의 개혁 파트너였던
조광조를 제거하기로 맘먹는다.
<희빈 송씨와 훈구파의 자작극 - '주초위왕'>
4. 중종, 개혁파트너 조광조를 왜 버렸나?
"조광조 일파가 정국공신을 삭제후 자신(중종)을 노릴 것이니
훈구파가 그를 제거하고 자신에게 보고하라."
이번엔 '왕의 쿠데타'였다.
중종은 더 이상 자신의 왕권 강화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현량과, 경연, 토지 개혁, 향약 실시, 소격서 폐지까지
점점 왕권을 압박하고
나아가 자신의 반정 자체를 부정한다고도 볼 수 있는 위훈삭제까지,
그는 결국 조광조와 그 일파 사림을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떠한 왕도 한 신료를 처단하는데
한밤중에 그것도 정상적인 처결 과정없이,
정상적인 정치 운영 과정에 있지 않는 인물들을 동원하여
처단한 유례를 없었습니다."
- 김 돈 교수 (서울산업대 교양학부)
1519년 11월 15일.
위훈삭제 3일후,
중종은 홍경주, 남곤, 심정 등 훈구파 대신을 불러 어명을 발표케 했다.
"대사헌 조광조와 그 측근을 불러 들이라."
다음날 새벽 조광조는 의금부에 투옥되었고
'붕당죄'의 죄목을 얻어
전남 화순으로 유배되었다.
"서로 붕당을 맺고서
저희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저희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명성과 위세로 서로 의지하여 권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위를 속이고 거리낌없이 사사롭게 행동하였다."
- <중종실록 14년 11월 을사>
조광조는
유배를 간 후에도
중종이 자신을 다시 부르기를
매일 기다렸다고 한다.
날마다
북쪽을 향한 문을 열어두고
중종을 향해 절을 올리고
사립문도 열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이
조광조에게 보내온 것은
사약이었다.
1519년 12월 16일.
38세의 조광조는
훈구파를 견제하고
반정의 지지를 굳히려 했던 중종에 의해
전격 발탁되어 초고속 승진을 하면서
현량과를 통한 인재 등용부터
도교 의식을 거행하는 소격서 폐지,
지방 자치적인 향약의 전국적인 시행,
균전제와 한전제의 토지 개혁 주장,
그리고 그의 개혁에 막을 내리게 했던 위훈삭제까지!...
새로운 사회,
성리학적인 이상 사회를 향한 그의 꿈과 노력은
숨가쁘게 몰아갔던 그의 개혁은
4년만에
개혁 파트너 중종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여기 조광조의 마지막 절명시가 있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나의 붉은 마음 환히 비추리."
(위군여애부 爲君如愛父
우국여우가 憂國如憂家
백일임하토 白日臨下土
소소조단리 昭昭照丹裏)
<조광조의 글씨>
< 조광조의 묘 - 경기도 용인시 >
< 심곡서원 [深谷書院] - 효종 원년(1605년) 설립,
조광조와 양팽손 위패 모심. 경기 용인시 >
5. 조광조와 노무현을 되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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