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로 일천리 <08> 물금(황산) 가는 길
양산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조선시대 대동여지도 상의 옛길은 양산을 기점으로 물금(황산)~밀양~청도~대구 방면의 영남대로 외에도 언양~자인~대구 길과 울산~경주~대구길이 있었다. 양산에서는 또 기장길, 김해길, 감동(구포)길이 갈라져 동래방면의 영남대로를 합치면 모두 일곱 방면의 길이 뻗어 있다.
그만큼 양산지방은 조선시대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 길 상에 16개 역을 관리하던 황산찰방(대동지지)이 양산군내 물금 지방에 있었던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 영남대로가 낙동강의 범람으로 물에 잠기면 언양~자인~경산길이 한양으로 통하는 대체통로 구실을 했다.
동래에서 올라온 영남대로는 현재의 양산시내 중앙동(조선시대 양산읍 성안 지역)을 비켜, 영대교를 지난 다음 서편 물금지역으로 향하게 되며 대동여지도 상 영남대로의 양산지역 첫 번째 역인 윤산역(輪山驛)이 나온다.
1872년 양산군에서 그린 읍지도는 동래에서 올라온 옛길은 조선시대 양산 읍성 남문(현 양산노인회관 앞 네거리 부근)을 비켜서 읍성 서문(현 시외버스 정류장 부근) 앞에서 직선으로 연결된 당시의 구읍포교(현재의 영대교, 국개다리)를 지나 윤산역으로 연결된다.
구읍포교 아래를 흘렀던 북천(현 양산천)은 양산 시내를 관통하는 낙동강의 지류로 일제가 제방공사를 하기 전까지는 제방 뒤쪽 양산시 종합운동장 과 인근 수만 평의 논밭 대부분이 뻘이었고 지금도 1m를 채 파지 않아도 뻘이 나오는 곳이 많은 실정이다.
그래서 양산지방의 역사는 예부터 낙동강 범람으로 인한 피해의 역사였고, 이로 인해 양산 주민들은 낙동강에 한을 지니고 있다. 농사지을 땅은 적고 강물은 범람하니 뻘을 등지고 고향을 떠나는 사람이 많았으며 양산의 가난은 지금의 유산공단이 들어설 때까지 계속됐다.
1832년 편찬된 양산읍지 후지에 조선시대 최해라는 사람이 써놓은 글을 보면 "전답이 모두 저습하여 비가 많아 수해를 입게 되니 지세가 그러한 것이라. 집집마다 죽재를 다루어 용구를 만들어 생활용구와 교역하니, 의식과 조세를 오직 죽물(죽세품)로써 의존하며 거상과 부민이 없다.
공무로 왕래하는 관인이 있을 때는 접대가 곤란해 죽림(대나무 밭)가운 데 달아나 숨는 사람까지 있었다"라고 하여 조선시대 관도(國道)였던 영남대로를 지나가는 관리들의 접대로 빈궁한 주민들에게 끼치는 민폐가 대단했음을 반영하고 있다.
김두성 씨(82. 양산노인회 회장)는 "양산지방은 살기는 곤궁한데 관리의 행차는 많아 군수도 이곳에 오는 것을 귀양살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고 전하고 있다.
1862년 제작된 대동여지도 상에는 양산읍성을 지나 윤산역(輪山驛)으로 가는 통로에 쌍벽루(雙壁樓)와 계원연(鷄源淵)이라는 지명이 눈에 띈다. 1872년에 제작된 양산군 읍지도에도 나와 있는 쌍벽루는 조선시대 양산읍의 자랑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왜구의 침입으로 세 차례 소실되었다가 효종 7년(1656년)에 군수 김주가 중건하였으나 현재에는 사라지고 지금의 중앙동 386 양산LG주유소 인근이 그 위치임을 향토사학자들로부터 확인했다. 계원연은 쌍벽루 밑을 흐르는 시냇물이었다는 문헌상의 기록만 전해질 따름이다.
영남대로는 영대교(옛 구읍포교, 국개다리)를 지나 지금의 양산시 교동 양산향교 앞에서 좌측으로 물금길과 우측으로 언양 기장길로 갈라진다.
영대교를 지나 밀양으로 향하는 영남대로 상의 윤산역은 현재 양산시 유산동 유산공단 내의 주화승화학이 들어선 자리 일대이다. 양산읍 성내(현 양산시 중앙동)에서 서문을 나와 구읍포교(현 영대교)를 지나 서북쪽으로 2km 위쪽이다.
오봉환 씨(80. 양산시 어곡동)는 '지난 78년 유산공단이 들어서면서 윤산역이 있던 유산리에 살던 역마을 후손들은 대부분 어곡리 동리 마을로 집단 이주했다'며 '윤산은 지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유산으로 지명이 변경됐다'고 말했다.
오씨는 "현재의 유산공단 화승화학 인근 땅이 유산역터였으며 근처에 역 관리의 생계를 유지하게 해 주던 마구뜰(屯田)이 있었고 그곳을 구터라고 했다"고 밝혔다.
이 일대는 김정호의 대동지지 상에는 '양산군 서쪽 5리 밖에 떨어져 있다' (郡西五里)라고 표현돼 있을 뿐이다.
양산군의 향토사학자인 성병달 씨(76)는 이곳에 대해 "10여 마리의 말을 키우는 마구뜰이 있었으며 양산군의 9개 사창 중(곡창 8개)의 하나로 황산찰방의 병기창이 있던 곳이었다" 고 말했다. 당시 윤산역은 황산강(낙동강) 변 물금지역에 위치한 황산역찰방에 소속되었다.
윤산역에서 황산역찰방(현 물금취수장)까지의 영남대로는 구읍포교를 지나 양산향교 앞에서부터는 지난 83년 포장된 1022호 지방도와 거의 일치 하고 있다. 영남대로는 1022호 지방도를 따라가다 현재의 물금읍 물금리 물금시장부근에서 경부선 철도 건널목을 지나면서 지방도와는 관계가 없어진다.
여기서부터 지방도는 경부선 철도 오른쪽 절벽 위를 달리게 되고, 영남대로는 낙동강 강변을 끼고 절벽 밑으로 경부선 철도 왼쪽(강 우안)으로 물금취수장(조선시대 황산역터)을 향하여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양산군 원동면까지 내닫고 있다.
이 길이 바로 대동여지도 상의 황산도(黃山道)이자 길이 험해 동래부사도 피해갔다는 황산잔도(棧道)의 시작으로, 현재에도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옛 황산(물금)나루터인 물금취수장 입구 쪽에는 옛날 나룻배 대신 늘어선 횟집들의 고깃배가 묶여져 있다.
황산나루는 황산강(낙동강)을 건너 옛 가야의 중심지인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를 연결시켜 주던 곳으로 황산장이 번창해 가물치 뱀장어 등 민물고기가 거래됐으며 현재는 물금시장으로 남아있다. 황산나루는 신라 탈해왕 21년(77년) 아찬(阿찬) 길문(吉門)이 이곳에 이르러 가야와 싸워 1천여 명의 군사를 무찌르고 그 공으로 파진찬(波珍찬)의 벼슬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영철 박천학 기자
1997-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