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으로 가기
태백은 멀고 가기 힘든 곳이다. 현재 교통이 많이 좋아지고 터널이 뚫리고 도로가 직선화 되었어도 멀게 느껴진다. 이곳의 개발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철도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된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중앙선을 타고 제천을 거쳐 태백선으로 바뀌면 정암터널을 지나 태백에 도착하고 부산ㆍ울산ㆍ경주ㆍ대구지역에서는 중앙선을 이용해서 영주에서 영동선으로 백산에서 다시 태백선으로 갈아타면 태백에 도착한다.
도로는 35번 국도로 제천ㆍ영월을 통해 싸리재를 넘어오거나 강릉ㆍ동해에서 삼수령을 넘어오고, 31번 국도는 영월에서 화방재를 넘어오거나 봉화ㆍ영주에서 청옥산을 넘어오는 길이 있다. 그 외 삼척ㆍ울진에서 427번 지방도를 타고 넘어오는 길도 한적하고 때묻지 않은 자연을 가지고 있는 좋은 길이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태백으로 가는 방법은 역시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다.
나는 이 지역을 갈 때마다 눈 덮인 산과 탄광촌, 을씨년스런 산촌마을을 하얀 김서린 유리창으로 바라보면서 따뜻한 기차 안에 있는 안도감과 아늑함을 느끼는 것이 좋다. 막상 기차에서 내리면 이곳의 처한 환경을 바로 느낄 수 있는데 그 순간적인 환경의 차이에 대한 감각이 좋다.
삼척시에서 35번국도로 삼수동 으로 들어오는 길 |
백산에서의 영동선(왼쪽)과 태백선(오른쪽)의 분기점 | 태백은 태백산이다
우리 학생들에게 태백하면 생각나는 것을 물어보면 두 가지를 가장 많이 대답한다. 첫째는 석탄이고 둘째가 태백산이다. 산은 높을수록 인정받고 추앙 받는 경우가 많은데, 정상등반을 최고로 삼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서는 산은 역시 높이가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태백에서 가장 높은 산은 태백산이 아닌 함백산이다. 6m의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어째든 함백산이 가장 높다. 그러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머릿속에 남아있는 산은 가장 높은 함백산이 아닌 태백산이다. 이처럼 태백산이 더 높은 진가를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는 역사성이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닌 산은 고정되고있기 때문에 역사성은 없다. 그러나 태백산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단군 신앙에 의하면 "태초에 하느님(환인 : 桓因)의 아들인 환웅천황(桓雄天皇)이 태백산 신단수(神檀樹)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고 민족의 터전을 잡았다. 하느님의 아들이 내려온 그 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생기게 되고 신비하고 성스러운 신산(神山)을 태백산(太白山)이라 이름하여 성역으로 숭배하게 되는데 곧 백두산이다."라며 백두산을 중시했다.
그러나 남북의 분단으로 백두산을 잃은 우리에게 새로운 대상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대안으로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갈라지는 이곳을 태백산이라 칭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된다. 종교간의 갈등으로 단군에 대한 신앙이 어떻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태백산을 땀흘리며 오르고 그 위의 천왕단에서 주변을 굽어보면 마음이 평온해 지면서 마음속에서 무언가 서서히 올라오는 감정을 속일 순 없다. 태백산은 한라산처럼 높지도 않고 설악산처럼 기암절벽으로 치장하지 않았지만 표현하기 어려운 넉넉함과 부드러움이 어머니의 품처럼 안겨온다. 옛 사람들은 이 태백산이 우리나라 산신들 중에 가장 높은 산신이 머문다고 하며 태백산의 정기가 가장 강하고 신령스런 산으로 평가했다.
이번 답사에는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올라가 보지 못했지만 태백에서 보면 어느 산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느껴지는 이산을 꼭 올라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산이 온통 흰 자갈로 되어 바라보면 흰눈이 쌓인 것 같은데 태백이란 산 이름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라고 했듯이 눈이 소복이 덮혀있는 겨울에 오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
< 태백산 > | 생명수의 원천 태백
기독교에서 하느님의 은혜를 상징한다는 생명수(生命水)를 우리 땅에 생기와 활력을 넣어주는 것으로 대입해서 생각해 보면 태백에서 발원하는 한강과 낙동강이 바로 우리 민족에게 생명수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태백에서는 서해ㆍ남해ㆍ동해로 흘러가는 대표적인 하천이 발원하는 성스러움의 원천 같은 곳이다.
- 낙동강의 출발
낙동강은 길이 525km, 유역면적 23,860㎢로 북한의 압록강 다음가는 제2의 강이다. 이곳에서 발원하여 안동ㆍ상주ㆍ대구ㆍ삼랑진ㆍ부산을 거쳐 남해로 흘러가는 영남지방의 생명수이다.
태백을 방문하면 이곳이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알게 해주는 첫 번째 장소가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황지연못이다.
이곳에서 솟아난 물이 낙동강의 시작이라는 점과 연못 속에서 솟아나고 있는 소름끼치도록 청명하고 푸른 물의 색과 규모에 압도된다.
사실 이곳에서 솟아나기 전에 뒤에 위치한 함백산에서 시작된 수맥에 의해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지층을 어려움 없이 뚫고 나온 것으로 생각되지만 함백산의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발원지를 찾기보다는 함백산 전체의 수압을 받으며 내려온다는 그 의미만으로도 족하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황지시내 한복판에서 솟아난다는 것은 신비스러우면서도 친숙하다. 과거에는 100ㆍ50ㆍ30m 둘레의 3개의 못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50m둘레의 못이 남아있고 솟아난 물이 내려가는 오뚝이형의 연못이 다리를 건너 아래쪽에 위치하고 그 옆에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태백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하루 5,000톤의 물이 솟아나 이곳 주민들의 취수원으로 이용되었는데, 지금은 하루 2,400톤의 물을 퍼 올려 황지동 주민의 식수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출발한 물은 황지천을 따라 흐르다가 동점동에 이르러 철암천을 만나기 전에 거대한 산을 뚫고 지나가는 묘기를 부리는데 이곳이 구문소(求門沼)이다.
산을 물이 어떻게 뚫고 갈까 의문을 갖지만 이곳은 주변이 모두 물에 약한 석회암반으로 되어있어 이런 일이 가능하며 약1억5천만년에서 3억년 전에 형성된 높이 20~30m 넓이 30m의 거대한 동굴형태는 동양최대라고 하는 환선굴의 입구보다 몇 배나 크다.
구문소에는 마당소ㆍ자개문ㆍ용소ㆍ삼형제?포ㆍ여울목ㆍ통소ㆍ닯벼슬바위ㆍ인공굴 혹은 용천으로 불리는 구문팔경이 있으며 이곳은 옛날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구문소를 장성쪽에서 바라보면 3개의 굴이 보인다.
가장 오른쪽은 최근에 뚫은 터널이고 왼쪽은 구문소의 거대한 석굴이 보이는데 이것이 자개문(子開門)이다. 《정감록≫에 '낙동강의 최상류로 올라가면 더 이상 길이 막혀 갈 수 없는 곳에 커다란 석문이 나온다.
그석문은 자시(子時)에 열리고 축시(丑時)에 닫히는데 자시에 열릴 때 얼른 그 속으로 들어가면 사시사철 꽃이 피고 흉년이 없으며 병화가 없고 삼재가 들지 않는 오복동(五福洞)이라는 이상향이 나온다'라고 쓰여있다. 여기서 오복동은 지금의 태백시 일대인데 이상향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이곳 구문소였고 이곳을 문으로 비유한 것이 이채롭다.
처음 이곳을 보면 자개문을 가운데 있는 인공석굴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무주의 나제통문처럼 생긴 이 인공석굴은 35번 국도가 지나가면 일본인들이 장성의 석탄을 개발하면서 뚫은 것이다.
현재로는 구문소의 자개문보다는 사람들이 직접 지나가는 이곳이 어쩌면 영남에서 태백으로 들어오는 관문의 역할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교통소통이라는 명목으로 틈만 나면 길을 넓히고 터널을 뚫어대는 우리네 정서로 그 옆에 또다시 터널을 뚫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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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 발원 기념비 > < 현재의 황지연못1 > < 현재의 황지연못2 > < 1970년대의 황지연못(태백기록 사진집) > < 구문소 > < 삼형제 폭포 > < 인공석굴 > |
유럽의 오랜 된 도시에서 옛것을 보존하려고 좁은 문을 서로 교차통 행하면서 보존하는 마음이 부러운 데, 물론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석굴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태 백시에서는 이곳에 자연학습장을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있 으며 옛 동점동 사무소2층에 화석 전시관을 꾸며놓고 있다. 지역을 사랑하고 알리려는 태백인 의 세밀한 마음을 알 수 있어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장 지역적인 장소이다.
< 검룡소1 > < 검룡소2 > < 검룡소 아래 용이 꿈틀대면서 파놓은 용소 > < 한강발원 기념비 > < 골치천1 > < 골치천2 > |
한강은 우리민족의 중심이다. 강의 규모로는 우리나라에서 4번째이지만 역사성이나 효용성에 있어서 단연 으뜸이고 분단된 남한에서는 사실상 대표적인 하천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나누어져 경기도 양수리에서 합류하는데, 북한강은 강원도 금강군(북한)의 옥발봉에서 발원해 유역면적 10,834.8㎢, 유로연장 317.5㎞이며, 남한강은 강원도 태백시(太白市)의 금대봉 검용소에서 발원해 유역면적 12,514㎢, 유로연장 375㎞이다.
남한강을 본류로 보는데 남한강의 발원에 대해서는 4곳이 발원지로 서로 주장되고 있고 태백은 이중 2곳이 속해있다.
어째든 다수결로 따져도 결국 태백은 한강의 시작인 동네이다. 검룡소로 가는 길은 지금 한창 확포장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이 길은 그냥 옛모습을 나두는 것이 더좋을듯한데 한철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너무 과도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된다.
항상 여러곳을 다니다 보면 새로운 변화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가지는 것은 지리전공자로서의 편견일수도 있다.
큰길에서 혼란스런 비포장 공사 길을 7㎞정도 들어가면 주변에 옛모습이 남아있는 산촌의 낡은 가옥을 지나 입구 주차장에 도착한다.
이곳부터는 작은 소로길이 연결되어 걸어서 한시간 가까이 호젓한 산길을 올라가면 검룡소가 나온다. 이곳의 위에 위치한 금대봉의 제당굼샘과 주변의 작은 샘에서 솟은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이곳에서 다시 솟아 나와 한강이 시작된 것이다.
누군가 이곳은 발원지가 아니고 위의 제당굼샘이 발원지라고 주장했다는데 물론 정확성을 기한다면 가려볼일이지만 발원되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면 즉 지역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찾지않는 이곳은 쌀쌀한 날씨에 얇은 살얼음이 아래 하천에는 얼었지만 많은 양의 물이 콸콸 솟아오르고 있었다. 한강의 발원지로 손색이 없었고 생각보다는 규모가 컸다.
우리가 알고있는 대표적인 발원지는 오대산의 우통수가 있는데 도상실측결과 이곳이 더길어 국립지리원에서는 이곳을 발원지로인정하고 있다.
둘래 약20m로 석회암반을 뚫고 나오는 물이 하루 약 2,000톤이라고 하는데 검룡소를 벗어나자 20m의 낙차를 두로 아래로 떨어진다.
아래로 물에 의한 침식에 의해 구불구불한 물길이 형성되었는데 이것을 보고 옛날 이무기가 용이 되려고 몸부림친 흔적이라는 전설을 떠올려 본다.
이 정도의 모습을 갖춘 것은 86년에 태백문화원에서 연못을 준설하여 복원해서 모습을 갖춘 것이며 현재는 주변에 육각정을 짓고 관광지로 개발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이곳에 시작한 물은 골지천을 만나 한강으로 흘러간다. |
- 다양한 용천수
석회암 층이 발달한 태백은 주변의 높은 산이 위치하여 강한 수압에 의해 석회암을 뚫고 용출되는 샘이 많이 발달한다. 이러한 샘들은 주민들의 식수원이 되면서 한강이나 낙동강의 원류가 되는 것이다.
태백산 당골입구를 막 들어서면 넓게 확장된 길 오른쪽에 옛 당골로 들어가던 길의 흔적이 보인다. 지금의 넓은 길은 주변경관에 비해 너무 넓어 오히려 황량함 느껴지는데 태백을 처음 찾았을 때 당골가는 길은 참으로 운치 있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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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원사 용담 > | 너무 많은 눈이 내 려 길 양쪽에 쌓여있는 눈에 영화 러브스토리 의 흉내를 내며 넘어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입 구에 청원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그 절 대웅전 앞마당에 둘레 30m정도의 연못이 있는데 이 못이 용담이다. 소도지(所道池), 늪물, 늪못, 활래지(活來池)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황 지연못과 같은 물색에 강한 기운이 서린 듯한 느낌이다.
태백산에서 내려온 지하수가 용출한 것으로 생각되며 1967년에 청원사 주지스님이 늪지대로 남아있던 이곳을 준설하여 현재의 모 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병든 어머니를 모신 효 성이 지극한 아들이 꿈을 따라 용을 타고 어머 니를 모시고 가니 어머니가 연못 속에 뛰어들 어 인용(人龍)이 되었다는 전설을 가진 곳이다.
당골입구를 지나 화방재로 향하다 보면 1999년에 폐교된 함태초등학교 혈리분교가 있다. 우리나라 농촌이나 산촌지역을 모습을 보여주듯 폐교된 이곳은 동굴산장이라는 간판이 붙고 숙박업소로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된 듯이 보이는데 그 옆에 혈암사라는 작은 암자가 보인다.
암자 건물 사이로 눈에 들어오는 작은 동굴이 혈리동굴이다. 이 지역의 동네이름이 동굴의 이름을 따서 혈동(穴洞)이라 불리며 높이3m 넓이4m의 석회동굴이다. |
< 혈리분교 > |
전하는 말에 의하면 봄에는 굴속에서 나오는 물에 복사꽃잎이 떠내려오고 가을 이면 배추나 무우잎이 떠내려온다고 한다. 그래서 사 람들은 동굴 속에 이상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동굴에서 나오는 물은 상수원으로 이용하고 있 다. 아주 옛날에는 천두(泉竇:샘이 나오는 구멍)이라 불리면서 황지연못과 함께 낙동강의 4대 근원의 하나 로 알려져있는 샘이다.
< 혈암사 > |
< 혈리동굴 > | 백두대간의 갈림길 삼수령(피재)
백두산에서 출발해석 남쪽으로 깊은 선을 그리고 숨가쁘게 남해를 향해 내려오든 산맥이 태백에 와서 잠시 쉬면서 동쪽으로 치우친 방향을 수정해서 남해의 한가운데를 향하는데 그곳이 바로 삼수령이다. 해발920m로 35번 국도가 지나가며 옛날 황지지역이 피안(彼岸)의 도시로 알려져 시절이 어수선하면 삼척지방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이곳으로 피난(避難)을 올 때 넘었던 고개라 피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곳에서 백두대간은 매봉산-은대봉-함백산-태백산으로 향하며 낙동정맥이 통리재-백병산-면산을 거쳐 동해를 따라 내려가게 된다.
또한 이곳은 동해안 삼척으로 향하는 오십천이 발원하는 곳으로 동해ㆍ서해ㆍ남해의 3곳으로 향하는 하천의 분수령이 되는 곳이다.
한강의 시작부분인 골지천과 낙동강의 시작부분인 황지천은 뚜렷이 이곳에서 갈라지지만 오십천은 명확하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모든 바다로 향하는 점이라는 의미는 크다.
고개 위 가계를 지나 약간 올라간 곳에 정자가 서있고 그 앞에 3개의 강이 발원한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92년에 삼수령비가 건립되어있다. 그 옆에는 삼수정이 세워져 있고 이곳에 올라서 바라보는 삼척으로 향하는 조망이 시원스럽고 쾌청하다. |
< 삼수령비 > |
< 피재 > |
< 삼수령 비문 > | 고개로 둘러싸인 태백
태백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태백을 들어가려면 크던 작던 고개를 넘어야 한다. 태백시 자체가 높은 고도에 위치해서 주변의 높은 산을 넘어가는 고개가 크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태백인의 삶에서 고개를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
- 두문동재
일명 '싸리재'라고 잘못 불리기도 하는 이 고개는 정선군 고한읍에서 태백시 화전동으로 넘어오는 고개로 고려 말 경기도 개풍의 두문동에 있던 일곱 충신이 고개 넘어 고한 쪽에 두문동으로 이사오고 그 마을의 이름을 따서 두문동재라 한다.
해발 1,268m 이곳에서는 정선과 태백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매봉산과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갈라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사람이 다니지 않지만 화전동 싸리밭골에서 호명골로 넘어가는 싸리재 밑으로 싸리재 터널이 생겨 차량의 왕래가 없는 관광도로나 함백산을
오르는 등산도로의 성격으로 바뀌어 버렸지만 90년에 백두대간을 자전거 여행할 때 비오는 이 고개를 넘다가 지나가는 버스기사가 안되보였는지 손님이 가득한 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승객의 시선을 한눈에 받으면 넘던 생각이 난다.
차를 타고 고개를 넘을 때까지 한 대의차도 보기어려울정도로 한적한 길이지만 멀리 매봉산의 보이고 태백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을 정선 쪽에서 태백을 방문할 때 한번쯤은 넘아가볼만한 고개이다. |
< 고한읍 두문동에 본 두문동재와 두문동재 터널(싸리재 터널)의 갈림길 > |
< 두문동재 정상 > |
< 두문동재 정상에서 본 태백시 방향 > |
< 두문동재 터널1 > |
< 두문동재 터널2 > |
- 만항재
늦은목이(晩項)이라 불리는 이 고개는 고한리 목골과 정암사에서 태백시로 넘어오는 고개로 해발 1,330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고개이다.
함백산의 남쪽 낮은 산등으로 사람들이 넘어 다니는 고개라고 해서 늦은목이라고 불리는데 태백시ㆍ영월군ㆍ정선군의 경계가 된다. 이곳에서 함백산과 태백선수촌이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화방재로 내려가는 414번 도로는 멀리 태백산의 능선미를 바라보면서 산악도로의 느낌을 받을 수 있는 태백시에서 발행한 관광지도에 표현해놓았듯이 환상의 드라이브코스로 잠깐이지만 영월군과 정선군, 태백시를 가장 짧은 시간에 동시에 지나가는 길이기도 하다.
< 만항재 > - 화방재
당골입구를 지나 혈리를 통과해서 텅스텐의 고장 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31번 국도가 지나가며 해발 935m로 832m의 대관령보다 높지만 워낙 높은 지역이라 가까이 흔하게 있는 작은 언덕으로 느껴진다. 주변에 진달래와 철쭉이 무성하게 피어 화방재라고 하며 어평재, 정거리재라고도 불린다.
태백산으로 올라가는 최단거리 코스인 유일사가 가까이 있어 태백산 등산의 기점으로 이용되는 고개이다.
< 화방재 > - 통리재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와 태백시 황연동 통리를 연결하는 해발 680m의 고개로 과거에는 느릅령(유령:楡領)이라고 불렸다. 실제로는 느릅령의 정상은 지금의 통리고개보다는 서쪽으로 떨어져 있으며 고갯마루에는 산신각이 있어 |
< 인클라인 철도의 옛모습 (태백 문화원 사진) > |
< 통리재 > | 해마다 음력 4월16일이면 태백과 삼척지역사람들이 모여 천제를 지낸다고 한다. 이 고개를 중심으로 동해로 가는 오십천과 낙동강으로 가는 철암천의 최접경지이기도 하다. 고개 위에는 경부선 추풍령처럼 기차역인 통리역이 위치하며 큰 고개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통리역에서 도계로 내려가는 길은 태백 쪽보다 경사가 급해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Z자형의 스위치백(Switch-Back)철로가 개설되어있다. 나중에 삼척지역을 답사할 때 좀더 자세하게 답사하겠지만 1939년~1963년 사이에는 인클라인(Incline)이 설치되어 심포역에 도착한 기차를 쇠줄로 끌어올리고 승객들은 걸어 올라가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많은 차들이 끊임없이 통행하고 있어 화방재ㆍ두문동재와 함께 태백을 넘어가는 고개로는 차량이 비교적 많은 고개이다. 이곳에서 427번 도로를 이용해서 동해안의 삼척ㆍ울진으로 넘어가는 때묻지 않은 자연을 가진 길로 아름답다.
태백이 곧 석탄, 석탄이 곧 태백
태백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역시 석탄이다. 사실 산골마을 태백이 이만큼의 커다란 도시가 된 것도 석탄 때문이며 이만큼 자연환경이 훼손되고 경제적 변동을 겪는 것도 석탄 때문이며 앞으로 태백을 변화시키고 많은 사람들이 찾게 하는데 기본이 되는 관광자원도 석탄이다. 태백이 곧 석탄이고 석탄이 곧 태백이다.
< 석탄최초발견 기념탑(장성)-태백문화원 사진 > - 석탄이란?
석탄은 지각의 변동으로 식물이 흙이나 모래더미와 함께 물밑에 가라앉아 묻힌 후 그 위에 다시 퇴적층이 쌓이면서 오랜기간동안 열과 압력을 받은 후 수소와 산소는 날아가 버리고 탄소만 남아서 형성된다. 인류가 처음 발견하여 이용한 것은 약 3,000년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탄소와 휘발성 물질, 수분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구성비에 따라 무연탄ㆍ역청탄ㆍ갈탄으로 분류한다.
탄소성분이 60~70%인 갈탄은 공업용 원료와 액화가스발생용으로 사용되는데 대부분 북한에 매장되어있고 탄소성분이 75~90%인 역청탄(유연탄)은 제철공업의 원료로 사용되는데 우리나라는 매장되어있지 않아 전량을 오스트레일리아ㆍ미국ㆍ캐나다에서 수입한다. 탄소성분이 90%인 무연탄은 일반연료로 사용되며 고생대 평안계 지층에 매장되어있는데 우리나라에 북한에 약30억톤, 남한에 약15억톤이 매장되어있고 남한의 가채매장량은 약 7억톤으로 추정한다.
남한에서는 태백산지역에 주로 매장되어있으며 삼척ㆍ강릉ㆍ정선ㆍ태백ㆍ단양ㆍ문경ㆍ화순 등지에 매장되어있다. 우리가 석탄하면 구시대의 연료로 생각하고 있으나 인류가 석유를 대체할만한 경제성 있는 연료를 발견ㆍ개발하지 못하면 다시 우리 인류를 책임져줄 연료가 석탄이다. 채탄기술과 활용기술의 개발로 어쩌면 우리는 다시 석탄의 시대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태백은 다시 한번 옛 광산촌으로서의 영화를 누릴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 우리나라의 석탄 현황
석탄이 매장되어있는 탄층은 두께가 30㎝이상 되어야 경제성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탄층은 지각변동이 심해서 45~90°경사를 이루며 산맥 속에 매장되어있고 그나마 두께도 불규칙하게 굴곡을 이루고 있으며 압력을 심하게 받아 덩어리 형태가 아닌 가루형태로 묻혀있는 경우가 많아 채탄하기가 어렵고 탄맥을 따가 가다보면 해수면 아래로 내려갈 정도로 경제성과 채탄의 편리성이 떨어진다.
이런 심부채굴은 막대한 투자로 경제성이 떨어지고 안전성에도 문제가 있다. 매장지역도 소비지와 먼 거리에 있어 운반의 어려움이 있는 등 전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 현재 이곳에서 캐서 판매하는 석탄가격의 50%는 정부의 지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
< 석탄공사에서 얻은 무연탄 > | - 태백의 석탄개발
태백ㆍ고한ㆍ정선ㆍ사북ㆍ도계를 포함하는 태백탄전지대는 국내 무연탄 매장량의 56%(약9억톤)를 차지하고 그 중 50%이상이 태백시에 매장되어있다.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이 실행되기 이전에는 년 간 330여만 톤의 무연탄을 생산하여 전국무연탄 생산의 16.5%를 차지하였고 이것은 단일도시로는 국내최고의 생산량이다. 태백산 지역의 석탄개발은 1936년 일본인들에 의해 석탄품질이 우수하고 항구와 거리가 가까워 도계지역부터 개발되었다.
태백은 1년 늦은 1937년 4월 철암지역부터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곧 여건이 더좋은 장성 쪽이 본격적으로 개발하게 되었다. 장성에서 채굴된 석탄은 2.5㎞의 운반갱도를 통해 철암으로 보내져 기차로 묵호로 수송하여 철암에는 국내 최대규모의 저탄장을 갖추었다. 60년대 석탄수요의 증가로 민영탄광이 황지에 들어서기 시작하였으며 차차 장성을 능가하게 되었고, 황지의 석탄은 트럭으로 통리로 운반된 후 기차로 묵호로 운반하였는데 덕분에 통리는 번창하게 된다.
그 후 영동선 철도의 개통으로 철암의 석탄과 태백선 개통으로 황지의 석탄을 직접 수도권으로 운반하게 되었으며, 철도의 개통은 이 지역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된다. 계속 발전하던 석탄산업은 1966년 겨울의 연탄파동으로 우리나라의 에너지 구조를 석탄중심에서 석유중심으로 바꾸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서서히 하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70년대 초에 석유파동으로 잠시 호황을 맞지만 증산일변도의 정책으로 소규모 탄광이 난립하고 과잉생산을 하게되어 1986년에는 2,400만 톤을 생산하게 된다. 이에 외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1981년에 황지ㆍ장성ㆍ철암을 묶어 태백시로 승격하게 된다.
그러나 외국산무연탄의 수입과 수요의 감소로 석탄의 공급과잉현상이 나타나자 정부는 1989년 소규모 탄광의 폐광을 골자로 하는s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 산업전사 위령탑 > |
그에 따라 짧은 기간에 많은 탄광이 문을 닫아 43개에 달하던 탄광이 문을 닫아 현재는 3개의 탄광만 남아있고 2만여 명이던 탄광근로자도 현재는 3000명 이하로 감소하였다. |
< 위패 안치소 > |
< 장성 태백중앙병원 > |
< 장성 중심가 > |
< 철암역1 > |
< 철암역2 > |
< 철암 저탄장1 > |
< 철암 저탄장2 > |
-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90년대 초 태백지역을 답사하면서 장성광업소에 들렸었다. 당시 영동선 열차가 불통될 정도로 눈이 많이 온 겨울에 막장 즉 탄을 직접 캐는 현장을 들어가볼수있다는 기대감으로 교수님과 방문했었다. 지질학과를 나온 분이 장성광업소와 우리나라 석탄산업에 대해서 설명해주시고 사전에 약속된 대로 막장을 들어가려고 할 때 광산내 작은 문제로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이번 답사 때도 갑작스럽게 방문하느라고 사전에 협조를 하지 못해 그때보다 더많이 체험하고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학생을 위한다는 그분들의 생각에 어린아이 같은 질문에 답변해주신 관계자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석탄을 캐는 방법은 당골에 자리잡은 태백석탄박물관에 들리면 자세히 알 수 있는데 이곳의 지질반에서 개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지만 자세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장성광업소는 최심부가 해수면보다 375m아래 위치며 장성광업소 갱도를 모두다 이으면 서울-대전거리보다 먼 260㎞정도가 된다고 한다. 16개의 광구를 운영하고 있고 현재 약1,100명의 근로자가 근무하고 있는데 이중 직접 석탄을 캐는 직접부는 620명정도가 되는데 아침8시, 오후 5시에 2교대로 7시간씩 근무하고 있고 갱도내에선 4인1조로 탄을 캔다고 한다. 수평갱이 있고 수직갱이 아래 수평갱까지 연결되며 중간에 수평갱들은 다시 측면으로 난 사갱(斜坑)으로 연결되어있다고 한다.
79년에 최대 약220톤정도를 캤으나 지금은 한해 약75만톤정도를 캐어 생산량이 많이 감소하였다. 뿐만 아니라 탄질도 떨어지고 근로자의 수도 계속 감소하여 90년대 초에 방문했을 때보다 더욱 활기가 없고 침울해 보였다. 이곳에 채굴된 석탄은 철암역까지 터널로 만들어진 2.5㎞의 운탄갱도(運炭坑道)를 이용해서 운반된다.
이 운반 터널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장성에 거주하면서 석탄에 의한 탄가루가 날리지 않게하기위해서 터널을 만들었고 시끄러운 기차가 지나가지 않도록 철로도 건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관앞 잔디에 조성해놓은 상징물인 노란색 안전모가 인상적이었는데 늦은 시간이었고 대부분 직원이 교육에 참가하여 한번 들려본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나올 때 학생들 교육자료로 사용하라고 막장에서 캐온 석탄과 인근하천에서 나온 괴탄을 주어 너무나 고마웠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학생들을 인솔해서 막장체험을 한번 시켜보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 장성광업소 제2수갱 > |
< 장성광업소 > |
< 장성광업소 상징물 > |
- 광산촌 풍경
탄광은 주로 산지를 끼고 발달하였으며 탄광산업의 특성상 일시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산지가 많은 태백의 탄광은 주변산지에 발달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많은 노동자들을 위한 대규모의 주택이 필요하다. 주요 탄광에서는 근로자를 위한 대규모의 사택을 운영하였는데 이러한 사택은 짧은 시간에 급조된 것이 대부분이라 주택이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조건이 미비한 곳이 많았다.
좁은 공간의 이용과 건축의 효율성 때문에 군대의 막사처럼 병렬식으로 붙어있어 개인의 사생활은 물론 도시 미관상에도 많은 어려운 점이 있다. 이러한 광산촌이 지금은 광산의 폐광과 함께 대부분 사라지고 현대식 아파트로 변화하였지만 장성동일대에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데 특히 태백기계공고 뒤편과 호암동에서 옛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으며 석탄공사와 관련된 각종 아파트와 상가와 같은 편의시설 그리고 사고와 진폐증 환자를 위한 태백중앙병원등을 볼 수 있다.
장성동은 광업소를 중심으로 사택단지와 복지시설, 교육시설이 조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 이 지역이 일본인에 의해서 개발되어 일본식 건물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여러 사람을 만나 확인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철암지역은 하천을 중심으로 7,80년대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이곳을 건축물의 도시고 개발하고 특히 하천 변의 수상가옥도 철거하지 말고 잘 활용하여 과거의 문화유산으로 남기자는 운동이 있을 정도로 아주 특이하며 역전주변과 시장 등 좁은 공간에 서비스기능이 모여있는 역전취락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함태광업소가 있던 당골입구의 소도지구는 현재 과거의 주택은 거의 사라지고 지금은 탄광체험공원 공사와 현대식 숙박시설이 들어서 완전히 변해 가는 태백의 미래를 보여준다. |
< 화전동 어룡광업소 사택자리1 > < 화전동 어룡광업소 사택자리2 > < 소도동 구함태광업소의 광산체험촌 > |
< 소도동 구함태광업소의 현대식 숙박시설 > |
< 장성여고앞 옛 광산촌 > |
< 호암동광산촌1 > |
< 호암동광산촌2 > |
< 장성의 평화촌1 > |
< 장성의 평화촌2 > |
< 철암천변의 수상가옥1 > |
< 철암천변의 수상가옥2 > |
- 채광의 흔적
태백을 다니다 보면 어디서나 길가에 흔하게 석탄을 캐는 과정에 나온 폐광석이 쌓였던 곳에 나무를 심고 사방공사를 해서 정비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어떤곳은 그냥 스쳐지나가면 잘 모르지만 자세히 보면 부자연스럽고 위험해 보인다.
혹시 많은 비라도 와서 무너져 하천으로 들어간다면 더큰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것보다 더큰문제는 폐광된 광산에서 나오는 물인데 폐광구에 물이가득차면 물에 탄층이나 지층에 포함된 유황성분이 녹아 나와 철분이나 금속성분을 녹이고 철성분은 산화되어 붉게 물들이게 된다. 시내 곳곳에서 붉은 색으로 변한 하천을 쉽게 볼 수 있었다.
90년에 처음 태백을 방문했을 때 하천의 물이 검은색일 것이라고 들었는데 막상 보니 회색 빛이었다. 왜 그러냐는 물음에 현지 주민들은 가정에서 나오는 각종 오폐수와 분뇨가 섞여서 그렇다고 해서 놀랐는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큰길에서 벗어난 과거 탄광이 있던 지역 주변의 하천은 여전히 오염이 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태백이 환경 친화적인 관광도시로 발전하는데 가장큰 문제로 부각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곳곳에 방치되어있는 사택들도 과거를 보여준다. 집집마다 벽을 이룬 베니어판은 부서지고 천장도 내려앉고 골목에는 잡초와 쓰레기가 무성한 흉가와 같은 빈집들도 또하나의 문제들이다. 어룡탄광의 사택이 있던 화전동 지역은 과거 사택이 거의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고 간간이 새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장성동의 석탄공사의 당시 새로운 아파트도 이제는 대도시 같으면 재개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소도동의 함태광산에서 문곡역까지는 과거 석탄을 운반하기 위한 협궤철도가 놓여있었고 주변에는 많은 사택이 있었는데 지금 그 협궤철도가 지나가던 흔적은 사라지고 윤곽이 희미하게 남아있거나 작은 터널만 옛날을 보여주고 주변에는 현대식 숙박시설물이 들어서는 사이사이에 옛집들이 폐허처럼 방치되어있다.
이 협궤철로는 문곡역에서 끝나며 문곡역에서 석탄이 집하되어 다른 곳으로 운반되었다고 한다. 문곡역에 근무하는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과거의 흔적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며 과거를 찾아온 필자가 싫지 않은 눈치인지 아주 친절하다.
< 폐광석 처리 > |
< 광산폐수처리 > |
< 하천의 오염 > |
< 함태광업소와 문곡역 사이의 협궤철로 흔적 > |
< 협궤철로 굴에서 본 문곡역 > |
< 문곡역 구 저탄장 > |
태백에서만 할 수 있는 산업
- 고랭지 농업
해발 650m에서 1,560m사이에 위치한 태백은 같은 위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독특한 기후가 나타난다. 한여름 8월의 평균기온은 20.8℃로 최고 25.3℃, 최저 17.1℃를 나타낸다. 이곳은 전체적으로 기온이 낮고 겨울에 적설량이 많으며 일조시간은 비교적 길다.
한여름의 서늘한 기후는 병충해의 발생이 낮고 채소재배에 유리하다. 배추는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식물로 초기에는 20℃정도가 적당하지만 배추의 속이 찰 무렵에는 15~18℃가 유지되어야 한다.
이때 온도가 너무 높으면 배추의 성장이 멈추고 속도 차지 않는다. 따라서 태백은 다른 지역에서는 기온이 높아 여름철에 하기 어려운 배추농업이 가능하며 생산된 배추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배추농사를 하려면 경작이 가능한 땅이 있어야 하는데 백두대간의 정상부가 지나가는 이곳은 신생대 제3기에 지반의 융기작용에 의해 과거 평탄한 면이 그대로 상승해서 평탄화된 고위평탄면이 곳곳에 남아있고, 그곳에서 대규모로 고랭지 채소농업을 할 수 있다.
태백의 고랭지 농업은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는데, 그전에는 엊갈이라는 방법으로 소규모로 생산되어 문곡ㆍ통리ㆍ황지에서 기차로 대도시로 판매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방법에 의한 배추의 생산은 전국에서도 많이 행하여 져 큰 소득이 없다가 소득의향상과 재배기술의 발달로 높은 소득이 보장되는 고랭지 여름 배추 재배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여름 배추의 농가는 태백시 전역에 분포하는데 특히 지대가 높은 해발 1,200m의 매봉산 단지가 약 40만평으로 단일면적으로는 가장 크고 생산량도 많다. 삼수령 고개에서 서쪽으로 난 작은 포장된 언덕길을 약 2㎞정도 올라가면 넓은 면적의 고랭지 밭이 나타나는데 파란 하늘과 넓은 들판이 주변경치와 어울려 유럽의 알프스 산지의 목초지를 여행하는 듯한 생각을 가지게 한다.
이곳에서 생산된 배추는 '매봉산 배추'라고 하여 최상품의 배추로 전국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일교차가 크고 석회암질의 토질에서 자란 이곳 배추는 몸이 단단하고 짙은 청녹색을 띠어 싱싱하며 당도가 높고 섬유질이 연하여 쌈을 사서 먹으면 파삭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태백을 방문하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풍경이다.
- 태백선수촌
전문적인 운동선수는 일반인보다는 우수한 신체적 조건을 요구하며 그런 신체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자신을 단련한다. 1968년 해발 2,240m에서 열린 멕시코 올림픽 이후 인간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고지대 적응훈련이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태백은 여름철에 서늘하고 고지대에 위치하여 선수들의 심폐기능 향상과 경기력의 강화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인정받아 대한체육회에서는 1998년에 함백산에 대한체육회선수촌 태백분촌을 1,390m의 고지대에 설치하였다. 지하1층에 지상2층의 건물에 선수숙소와 120평의 간이실내체육관, 400m의 우레탄 트랙과 운동장, 체력단련실, 물리치료실을 갖추었다.
태백문화원에서 초전촌쪽으로 잘 포장된 길을 따라 함백산을 오르다보면 과거에 축산단지였던 초전촌이 나타나며 그곳에서 경사가 심한 길을 따라 오르면 멀리 태백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 능선 위에 선수촌이 위치한다. 방문했던 날은 주변의 도로 공사로 선추촌을 표시하는 돌이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강한 바람 속에 아담한 규모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것은 보통 건물은 현관이 그럴 듯 하게 있는데 이곳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현관문이라고 생각되는 문이 보이지 않아 가운데 작은 문을 들어서니 그 안에 현관문이 있었다.
관리하는 분의 말에 의하면 워낙 바람이 세고 눈보라가 쳐 이중으로 문을 하고 문을 작게 만들지 않으면 많은 눈이 안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이곳의 지역성을 단번에 알 수 있는 모습이다.
현재 훈련하는 선수들은 없었으며 곧 일부 들어올 예정이라고 하고 겨울에 눈이 많이 올 경우에는 며 칠씩 이곳에서 갇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방이 눈으로 덮여 오도가지도 못하는 이곳에서 혈기왕성한 대표급 선수들이 어떻게 지낼지 궁금하다.
인근 함백산으로 크로스컨트리 코스도 있고 일출도 보고 선수들에게는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된다. 태백시로서도 이러한 시설은 경제적 이득 외에 지역성을 바탕으로 도시가 발전해나가는데 좋은 요소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
< 초전동 축산단지1 > < 초전동 축산단지2 > |
< 함백산 정상부근의 태백선수촌 > |
< 태백선수촌1 > |
< 태백선수촌2 > |
< 태백선수촌3 > | 전국에서 최고를 가진 태백시
태백의 태(太)자는 크다는 뜻이 담겨있는데 글자에 걸맞게 태백은 전국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것이 많다. 앞에서 언급한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도 전국에서 최고라는 것에 부합되는 것이며 전국에서 제일 높은 고개인 만항재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작은 도시인 태백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전국최고가 많다.
- 전국에서 제일 높은 기차역 추전역
태백선을 타고 고한에서 정암터널을 지나면 만나는 역이 추전역이다. 해발 855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역으로 연평균 기온이 국내역 가운데 최저를 기록하고 적설량이 가장 많아 9월이면 난로를 피우고 5월초까지도 난로를 피우는 곳이다.
1973년 태백선 개통과 함께 설치되었으며 무연탄수송을 많이 담당하여 역옆에 넓은 저탄장과 화물열차가 정차할 수 있는 철로선도 많았다. 하루에 2번 아침 9시와 저녁 8시23분 통일호 열차가 정차하는 한적한 역이지만 석탄은 월평균 10만 톤을 전국 수송한다. 이역을 이용하는 승객은 전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닌데 그런데도 이역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98년 철도청에서 운영하기 시작한 환상선 순환 눈꽃열차가 정차하면서 부터이고 지금은 전국최고(最高)라는 말을 듣고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대합실에는 산골 작은 역을 지키는 역무원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작은 분수와 금붕어 연못이 놓여있고 앙증맞은 열차 시간표가 붙어있다. 이곳에 들리면 꼭 받아 가는 기념 스템프가 있으며 눈꽃열차가 운행되면 찰옥수수를 파는 간이장터와 소규모 눈썰매장 등이 운영된다.
정동진 역이 TV드라마에 의해 전국의 명소가 되듯이 이곳도 앞으로 많은 사람이 찾을 듯 한데 제발 정동진처럼 너무 많이 변하지 말고 지금의 애틋함을 간직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 추전역 > |
< 저탄장과 선로 > |
< 대합실의 기차시간표 > |
< 역사무실 내부 > |
< 역에 전시중인 탄광의 광차 > |
< 추전역 기념 스템프 > | - 한때 전국에서 가장긴 기차굴 정암터널
추전역에서 서쪽으로 500m가면 기차 굴인 정암터널이 있다. 총 4,505m로 전국에서 가장긴 터널로 인정받았으나 전라선에 죽림온천-관촌간의 슬치터널(6,128m)이 완공되면서 최장의 기록은 넘겨주었지만 지금도 기차를 타고 지나가면 5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는 긴 터널이다. 뚫는데 만 4년이 소요된 이 터널은 고한읍 함백산 서쪽에 위치한 정암사의 이름을 따서 정암터널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전국에서 가장 많은 기차역을 보유한 도시
태백시에는 추전역을 포함해서 8개의 기차역을 보유한 도시이다. 추전역ㆍ태백역ㆍ문곡역ㆍ통리역ㆍ백산역ㆍ동백산역ㆍ철암역ㆍ동점역 인데 시(市)단위의 도시에서는 태백시가 가장 많다. 역은 이용하는 승객에 의해서 설립되지만 태백은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보다는 석탄을 운반하는 역으로서 설치되었기에 태백을 주민을 위한 도시라기 보다는 석탄을 위한 도시로 탄생되었음을 알려주는 지표이다.
태백역(구 황지역)이나 철암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담한 크기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규모지만 모두들 친절하고 사명감에 근무하는 역의 근무자를 만나보면 놀라게 된다. 대도시의 화려함보다 소박함이 느껴지는 역들을 찾아가 봄도 좋을듯하다.
-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도로
전국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태백은 도시자체의 고도가 높아 도로도 높은 곳에 위치한 편이다. 태백시를 다니다 보면 고원의 분지형 도시이지만 비교적 도로의 굴곡이 심하고 작은 고개지만 실제로는 700m이상의 고도를 가진다. 특히 1,330m의 만항재에서 정선 땅을 약간 통과해 함백산이나 선수촌 태백분촌으로 향하는 도로는 고산지대의 풍광과 빙판의 스릴이 느껴지는 도로이다. 눈 덮인 겨울에는 위험성이 있지만 그 외 계절에는 태백을 찾는다면 꼭 들려보아야 할 도로이다.
-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샘 용정(龍井)
태백에서 용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샘은 통리에도 있는데 태백은 물론 우리나라의 샘 중에는 용이 들어간 샘들이 유난히 많다. 샘이라는 신성함이 용과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런 의미를 또 하나의 샘이 있는데 태백산 꼭대기 천제단 바로 아래 해발 1,470m의 높이에 있다. 남한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연 샘물로 용정(龍井)이라 불린다.
바다나 깊은 산 속의 폭포, 소(沼)가 아닌 산 정상에 용의 이름을 가진 샘이라는 것이 신선하다. 일설에 의하면 이물은 동해바다의 용왕국과 통한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옆에 용왕각이 세워져있고 산 정상에서 용왕에게 제를 올린다. 해마다 개천절에는 이물로 천제를 지내는 제수로 사용하는 신성함이 깃든 물이다.
- 남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 망경사
1300년전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이 절은 남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이다. 높이는 1,500m쯤 되며 소실되었다가 1979년 중건하였다. 무속행위가 허용되는 곳이라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 망경사 >
용연동굴
해발 920m의 백두대간의 주봉인 금대봉 능선 하부에 위치한 동굴로 약3억년 내지 1억5천만 전부터 생성된 석회동굴로 길이는 843m이다.
내부에는 산호, 종유석, 석순 등 다양한 석회동굴지형과 이름도 생소한 초동굴성갑층, 긴다리장님딱정벌레가 동양에서는 최초로 발견되었고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옛새우와 장님톡톡이등 6종의 신종이 발견된 곳이다.
강원도 기념물 제 39호인 이 동굴은 태백을 들어서면 곳곳에 널려있는 안내깃발과 광고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심하다고 할 정도로 붙어있는 안내판을 보면서 도착해보면 입구에 서울대공원의 코끼리 열차와 같은 용연열차를 타고 관람하게 되어 아이들은 좋아한다.
워낙 동굴이 높은 곳에 위치하여 삼척의 환선굴처럼 동굴입구를 올라가다 진이 빠질까봐 배려된 것인지 약1.1㎞의 산길을 올라가는데 아무튼 편하고 색다른 경험이라 좋다. 관람에 약 40분 정도 소요된다. |
< 용연동굴 > |
< 용연기차 > |
< 두문동재에 본 용연동굴 지역 > |
태백의 전통가옥 너와집
옛날에 가옥을 지을 때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건축하게 되며 특히 지붕의 재료는 더욱 그 지역의 환경을 반영한다. 태백시가 위치한 지역은 깊은 산악에 벼농사를 거의 하지 않는 지역이라 예부터 전형적인 산촌(山村)의 가옥형태가 나타난다.
산촌의 가옥은 집을 지을 장소가 협소하고 기온이 낮은 관계로 대부분 ―자형 가옥이 아닌 田자형 가옥의 집을 짓는데 이를 겹집이라고 한다. 이런 가옥은 추위에 강하고 좁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가옥의 재료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를 사용하게 되며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쌓아 올려서 벽을 만들고 지붕은 너와를 얹는데 너와는 보통 직경 30㎝정도의 소나무나 전나무를 도끼나 톱으로 길이 60~70㎝로 잘라 두께 5㎝정도 되게 도끼로 쪼개서 두텁고 넓은 판자를 만들어 지붕의 아래에서부터 위로 포개오 올리면서 덮는 것을 말한다.
황지에 있는 너와집에는 5,000장의 너와가 올라갔다고 한다. 황지의 태백소방서에서 철길을 건너면 왼쪽에 너와집을 한 채 볼 수 있다. 물론 이곳에 원래 있던 것이 아니고 조용일이란 분이 태백시 전역의 60여 너와집을 발굴하여 그중 상태가 가장 양호한 백산 큰번지골의 정가 댁을 해체해서 이전해온것이라고 한다.
비록 원형그대로 복원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음식점으로 사용하고 있고 약간은 변형되고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라 가치는 떨어지나 이 지역의 전통적인 가옥을 살펴보는데는 좋은 자료가 된다.
< 황지의 너와집 > |
< 너와지붕 > | 태백의 5일장
태백은 일찍 대규모의 거주단지가 계획적으로 조성되어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5일장이 없는 도시로 이것 역시 태백의 지역적 특징을 설명해 준다. 다른 지역보다 일찍 상설시장이 건설되어 황지 자유시장, 장성 중앙시장, 철암시장 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또한 한정된 상권 안에 외지의 5일장 상인들이 들어오면 지역의 상인들이 피해를 본다는 생각에 5일장이 서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경제침체로 주민들이 지역경제의 회생과 생존권수호라는 요구로 시에서 1998년 12월에 5일장이 10일마다 열리는 격장제형태로 운영된다. 다른 지역과는 좀다른 형태지만 지역의 특성을 살리려는 주민과 행정당국의 합의에 의해 운영되며 통리는 매월 5일ㆍ15일ㆍ25일, 철암은 매월 10일ㆍ20일ㆍ30일 열리고 있으며 또하나의 관광상품으로서 기대된다.
< 황지 자유시장 > |
< 철암시장 > |
< 통리 5일장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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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애잔함이 묻어있는 태백...더욱발전하길 ...꿈을 쌓아온 그곳... 많이 사랑합니다
몇일전에 갔다 왔는데 올라 오기 싫어서 어기적 어기적 대다가 정말 아쉽게 올라왔습니다.
학창시절 그때가 아련하게 떠 오르면서 가슴이 뭉클 해 지네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새록새록 마음의 고향이 그립습니다. 무궁발전하길...
사진잘봤습니다 . 생각이 아련하고 그립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