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경주성당의 설립과 카다르 신부님(한국명 강달순 姜達淳)
카다르 조제프 프랑수아
프랑스에서 1878년 9월 27일 출생하여 1905년 사제품을 받고 1907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조선대목구로 발령받고 1909년 전라남도 나주군 노안면 계량리에 상주하는 첫 번째 선교사로 파견되어 성당을 지었다.
1914년 세계 1차 대전에 프랑스 군인으로 출전하여 무공 훈장을 받아 성모당에 봉헌한 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루이뷔카 신부 후임으로 대구대목구의 서북부인 완주군 화산면 되재성당을 거쳐 1923년 나바위로 옮겨 성당을 지은 뒤 1929년 왜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1931년 경주로 발령을 받았는데, 사제관을 신축하고, 목재로 된 소 성당을 고딕 양식의 본격적인 성당으로 개축하였다. 이 지역은 불교의 막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14년간 경주성당 주임 신부로 재직하면서 432명에게 세례를 줄 수 있었다.
1945년 4월 그는 대구대목구의 다른 선교사들 대부분과 함께 일본 경찰에 의해 대구신학교에 연금되었으나 그해 8월 일본이 항복하자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49년 그는 대전으로 이동했고 캐나다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관리자’가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남한을 침공한 북한군은 그를 수도원에서 체포하여 대전형무소에 수감하였다. 서울로 압송되어 다른 포로자들과 함께 평양, 만포로 끌려갔는데, 이때부터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중강진까지 추위 속에서 눈 덮인 산길과 압록강변의 벼랑가 길을 걸으며 희생자가 속출했고, 억류자들 모두는 굶주렸고 기진했으며 병에 걸렸고 추위는 끔찍했다. 그는 병사로 하창리에 묻혔다.
2차 시복시성 근,현대 신앙의 증인 홍용호 프란치스코 브르지아 주교와 동료 순교자 80위 속하여 있다.
1950년대 죽도 성당에서 코요스 신부님(한국명 구인덕)의 증언. 문충리의 유만준 요한 형제님은 카다르 신부님이 굶어 옥사하셨다는 증언을 구 신부님으로부터 듣고 평생을 근검과 절약정신을 생활화 하신 포항지역의 원로 신앙인이다.
9. 포항 지역의 세례자들
1950년 이전 포항의 세례자들
1886년 한불 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국이 된 조선의 말기 산속 교우촌에서 새로운 도시 지역으로 나오는 것이 힘들었던 시절 미국을 중심으로 들어온 개신교는 항구에서 도시지역으로 급속히 세를 확장하였고 1900년대 초 포항과 흥해 지역에 개신 교회가 세워져 복음 전파를 하고 있을 때 가톨릭은 아직도 산내면의 골짜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1926년 경주성당이 세워져 8년이 지난 1934년 경주읍내 신자는 93명 산내 지역이 226명 기타 지역 35명으로 경주성당 50년사 128쪽 지역별 공소 현황에 나타나고 있다.
공소 통계표에 의하면 경주성당 설립 이전에 있었던 공소는 비지, 진목, 범곡, 중말, 와항, 무과, 경주이며 1931년 영일 문충과 신원이 공소등록이 되고 1937년 흥해와 샛길, 1940년 포항과 희곡이 공소로 기록되며 공소에서 세례를 거행한 기록이 세례 대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근거로 포항 지역 세례자들의 모습을 유추하며 재구성해 본다
경주에 성당이 세워진 소문은 주변에 살던 교우들에게 알려 지고 멀리 있던 교우들도 다시 성당을 찾게 되며 이들의 신앙 생활을 주변에서 본 외인들도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입교를 희망 할 때 이들을 인도하고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받게 해 준다. 이들 중 대부모는 경주지역 신자일 수도 있으나 구교우로서 지역에 함께 살았던 신자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 1903년 11월 29일에 태어난 흥해 사람 정 빈첸시오는 일본 도쿄의 예수회 학교 경당에서 헤르만 호프만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1928년 12월 24일 경주성당 초대 이성인 야고보 신부님의 확인으로 포항 지역에서 처음으로 세례 대장에 기록된 사실이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세례를 받고 흥해에 돌아와 신앙생활을 하기위해 경주성당 까지 찾아가 세례 사실을 증언하고 신앙생활을 한 신앙 선조로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포항 지방의 첫 공소는 문충이며 공소와 교우촌의 구별은 교우들이 모여 살던 곳은 교우촌이고 교우촌에 사제가 방문하여 성사가 집행되고 이어서 공소로서 집회가 이루어 질 때 공소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는데 1929년 초 경주성당 초대 이성인 야고보 신부님이 문충을 방문하시어 유치수 필립보의 셋째아들 진규에게 김 야고보 회장님을 대부로 하여 방지거라는 이름으로 유아 세례를 받은 날을 문충공소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이후 1931년도 9명의 세례자를 시작으로 포항 죽도성당 설립 이전까지 35명의 세례자를 있게 한 포항 지방의 첫 공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으나 본당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포항 성당의 설립으로 흡수되었다
2) 흥해 용천리 공소 설립과 매산리 박 시몬의 신앙생활
흥해 매산리에 사는 46세의 박순택은 의성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으로 누구의 인도로 세례를 받았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세례 대장에 기록된 상황을 근거로 정리하여 보면
① 1937년 5월 27일 경주성당에서 맏딸인 1928년생 루갈다와 둘째인 31년생 분다에게 세례를 받게 하였는데 부모는 민간인과 어머니 이씨라고 표현함
② 5개월간 준비 과정을 거친 1937년 시몬의 축일인 10월 28일 흥해에서 시몬이라는 세례명으로 김경호 야고보 회장님을 대부로 하여 카다르 신부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흥해에서의 첫 세례자가 되며 흥해 공소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어 맏아들인 37년생 박태용을 같은 김 야고보 회장을 대부로 하여 요안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며 셋째 딸 35년생 말다에게도 세례를 받게 하였다. 야고보 회장님은 김종륜 루카 복자의 증손자 되시며 카다르 신부님의 공소 순방에 늘 함께 하셨으며 문충의 첫 세례자 유 방지거의 대부도 김 야고보로 기록되어 있어 신부님과 함께 흥해를 방문하시고 흥해 지역 세례에 대부로 처음 참여하셨으며 이날을 흥해 공소 설립일로 보는 것이다.(경주 성당 50년사 127쪽 공소 교세 현황표에서 1937년 흥해공소 교세 3명 - 장소는 용천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곡강면의 중심지이며 1946년 세례가 이루어진 장소이다. )
③ 1939년 12월 24일 경주에서 바오로의 유아 세례에 아버지는 시몬, 주소는 흥해 매산동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바오로는 1969년 성사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나 2017년 대구 교구 교적 조사에서는 소재를 알 수 없었다.
이처럼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하여 신앙 가족으로 흥해 공소의 기초를 마련하신 분으로 지역 교회사에서는 기억해야 할 신앙 선조이시다.
최초의 흥해 공소는 1941년 포항 공소로 통합되고 죽도성당으로 발전하였다.
3) 신광 냉수리의 손 요세피나의 세례
1939년 10월 2일 경주 성당에서 23세의 손 요세피나가 안 마리아를 대모로 세례를 받은 기록을 통해 신광 지역 신앙생활 모습을 추정해 본다
지금도 신광 냉수리에서 경주로 가는 대중교통이 없는 상황에서 요세피나는 어떻게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23세의 여자의 몸으로 안강까지 걸어가 기차를 타고 경주성당에서 성사를 보고 집에 오면 밤늦은 시간이었을 텐데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 되어 주변의 상황을 정리하여 보면
① 구교우 신앙인 남편이 있다면 가장 편안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며
② 도음산 너머 4km 에 있는 매산리 박 시몬의 도움
③ 북쪽 3km 토성리에 있는 조 가브리엘 부부의 도움 등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면 냉수리에서의 신앙생활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세례 대장에 나타난 흥해 지역 마을 이름이 냉수, 토성, 매산, 용천리가 있는데 전체 거리가 10km 이내로 2시간 정도면 걸어 갈 수 있으며 포항이나 안강역까지는 3시간 이내 갈 수 있어 경주성당에서 성사 생활은 가능 할 것으로 생각된다.
4) 조 가브리엘과 김 마리아의 신앙생활
경주성당 2대 카다르 신부님은 프랑스에서 갖고 오신 자전거를 타고 공소 사목 활동을 하셨다는 문충의 유만준 요한 형제님의 증언과 1929년 문충에서 첫 세례가 있었던 기록이 있으며 1937년 흥해 공소에서 세례에 이어 1939년 포항에서 조 세실리아에게 첫 세례가 이루어졌고 1940년 포항 공소가 21명의 교세로 기록 되어 있으며 - 동생 조 베드로의 기록에 동빈동 158번지가 나오므로 포항 공소의 장소로 추정됨
조 다두의 부모인 가브리엘과 김 마리아 는 1946년 둘째 아들이 태어난 지 열흘째 되는 날 흥해 용천리에서 경주성당 3대 정행만 프란치스코 신부님에게 유아 세례를 받게 한다. 당시의 주소지가 신광면 토성리에서 첫 칠이 지난 아기를 안고 10km거리에 있는 용천리까지 걸어와 유아 세례를 받게 한 신앙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주님의 은총과 성령의 인도로 이들을 이끌어 주시기에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가브리엘 부부는 포항에서 신광으로 이주한 것인지 아니면 신광 토성리에 거주하면서 포항 공소에 딸과 아들을 데리고 나가 유아 세례를 받게 한 것인지 확실 하지는 않지만 어린 자녀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여 신앙인의 기본자세를 보인 것은 우리들이 본 받아야 할 것이다.
5) 포항 공소와 세례자
죽도 50년사에서는 경주성당 3대 정행만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회고사를 근거로 1947년 포항 공소 설립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가경자이신 경주성당 2대 카다르 신부님 사목 말기인 1944년 신부님은 일본에 의해 연금 상태가 되고 성당 건물은 일본 군인들에게 징발 당하고 신자들은 신사 참배 강요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던 시절 정 신부님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나 경주성당 50년사 128쪽 공소 교세 통계표에는 1940년 교우 수 21명의 포항 공소가 기록으로 나타나며 1939년 포항에서 첫 세례가 이루어지고 세례 대장에는 포항을 주소지로 1947년 까지 유아 세례자만 6명으로 다른 지역에서 세례를 받은 구 교우들이 포항으로 이주하여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증거가 되며 1941년에는 흥해와 합하여 35명의 교우수가 기록되어 있다 . 문충은 별도 24명으로 기록됨.
1939년 11월 22일 조 가브리엘과 김 마리아의 딸 세실리아는 포항에서 처음으로 카다르 신부님으로부터 유아 세례를 받게 된다. 이후 1941년 아들 다두에게 포항에서 세례는 이어지고 세례 대장에 나타난 동빈동 158번지는 포항 지역 첫 공소 자리라 생각된다.
10. 루이 델랑드 신부님과 포항 지방
(예수성심시녀회 자료제공)
루이 델랑드 신부(1895~1972)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95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1921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함과 동시에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편입하였고, 이듬해 부산항에 도착하여 한국 땅에 첫발을 내디뎠고 곧바로 한국어와 풍습을 배우며 한국의 관습을 따랐다. 또한 남대영(南大榮)이라는 한국이름까지 받아서 한국인으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1923년 칠곡군 가실본당에 처음으로 파견되었고 1924년 부산진본당에 파견, ‘노동자의 집’을 설립했다.
1935년 6명의 처녀들이 일생 동안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기로 서약하였다. 그들은 ‘삼덕당’(三德堂)이라 칭하는데 바로 오늘날 ‘예수성심시녀회’의 모체이다. 그 해 양로원과 보육원도 시작되었는데 바로 ‘성모자애원’이다.
1950년 3월 델랑드 신부 일행은 영천본당에서 포항으로 이사를 마쳤으나, 그 직후 6·25 전쟁의 시련을 맞게 된다. 8월이 되자 북한군이 포항시까지 침입을 시도했고, 국군으로부터 피신 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지체가 부자유한 노인, 장애인들이 많은 데다, 어린이를 포함해 120명이 넘는 대가족이 피난을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델랑드 신부는 성체조배와 기도를 이어가면서 모두의 안전을 간구했다. 이 과정에서 델랑드 신부는 폭격에 건물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인명 피해가 단 한 명도 없는, 기적에 가까운 체험을 하게 된다.
전쟁 직후 300여 명까지 늘어났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성녀 데레사 보육원이, 노인과 장애인들을 위해 성 요아킴(백합) 양로원이 설립됐다.
또한 델랑드 신부는 미국의 원조기관인 가톨릭구제회로부터 지급받은 양곡, 밀가루, 분유 등의 구호물자로 지역민들을 위해 포항시 죽도동에 무료급식소와 구제원을 운영했다. 구제원에는 하루 50여 명 가량의 장애인과 피난민들이 찾아와 숙박을 했고, 무료급식소에는 하루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송정리에서는 500여 명의 이재민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기도 했다.
성모자애원에 의탁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많아졌고, 1960년대에 들어서자 35개 이상의 건물에 700여 명이 머물게 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부터는 많은 한센병 환자가 무료진료소를 찾았던 터라, 델랑드 신부는 메리놀회 스위니 신부와 의사 최시룡 박사와 함께 한센병 치료 사업을 시작했다. 1957년 5월 송정리에 한센병 진료소를 설치한 델랑드 신부는 1958년에는 형산강변 송내동에 부지를 매입, 15채의 집을 지은 다음 60여 명 한센병 환자들을 정착시키고 그곳을 ‘베타니아 마을’이라고 이름지었다.
1962년 8월 15일 ‘대한민국 문화 훈장’을, 1969년 11월 3일 프랑스 정부가 내리는 ‘레종 도뇌르(Legion d‘ Honneur) 최고 훈장’을 수상하는 등 델랑드 신부는 50년에 걸친 사제 생활 전부를 사회 복지 사업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영광을 뒤로한 채, 그의 나이 77세 때인 1972년 11월 17일 심장 마비로 선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