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서사 세계로의 초대
『종이동물원』, 켄 리우, 황금가지
“칸, 라오후.(봐, 호랑이야.)”
엄마가 접어서 숨을 불어넣은 종이호랑이가 집안에 뛰어다니고 종이로 만든 염소, 사슴, 물소, 상어도 눈앞에서 움직인다. 미국인 아빠와 중국인 엄마에게서 태어난 잭이 환상 세계를 경험하는 순간이다. 다문화 가족에 대한 차별과 소외를 겪는 어린 아들을 위로하고자 엄마가 만든 마법의 저자오저즈(종이접기) 장난감. 그러나 아들은 잘 풀어지는 종이 동물보다는 아빠가 사준 스타워즈 인형에 마음을 연다. 미숙한 영어에 중국 냄새 풍기는 엄마와 성장하면서 소원하게 지내던 아들이 엄마 사후에 종이 동물 상자와 편지를 발견하고 뒤늦게 엄마를 추억한다. 단순한 스토리의 이 단편소설은 2012년 SF 및 판타지 문학계 최고 권위를 지닌 휴고상,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을 사상 최초로 동시 석권한 수작이다.
무엇이 독자와 비평가를 움직이는가? 작가 캔 리우는 가족애의 보편성과 중국 문화의 특수성을 환상 세계로 끌고 와서 참신하고 흥미롭게 버무리는 발군의 재능을 발휘한다.
“내가 ‘사랑(love)’이라고 말할 때, 난 그 말을 여기서 느껴요.” 엄마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켰다. “하지만 ‘아이[愛]’라고 말하면, 여기서 느껴요.” 엄마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종이동물원」, 22-23쪽)
모국어의 고유한 정념에 공감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세월이 지난 후 아들은 낡은 종이호랑이 뒷면에 적힌 엄마 편지글 밑에 ‘아이[愛]’를 적어달라고 부탁하여 그 글자를 반복해서 따라 써본다. 종이접기로 유명한 쓰구루에서 태어나 문화대혁명의 환난을 겪다가 미국인과 결혼해 이민자로 살면서 잃어버린 언어와 고향의 종이접기 마법을 아들과 공유하기를 소망했던 엄마. 그를 외면했던 자식의 회환과 그리움은 뭉클한 가족 서사로 다가온다. 무거운 디아스포라 문학보다는 보편적 정서와 향수를 일깨우는 순수 문학의 질감으로 인해 울림이 증폭된다. 종이 동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마법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들기에 환상은 기괴하지 않고 아름답다.
켄 리우는 1976년 중국 란저우에서 태어나 11세에 미국에 온 이민자이다. 하버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마이크로소프트 프로그래머로 일한 후 하버드 법학 대학원을 나와 변호사가 된 전문 경력이 상상력, 창의력과 만나 뚜렷한 궤적을 그리며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이룬다. 그의 소재는 중국 문자, 책, 역사와 첨단과학기술이다. 과거의 동양적 정서에 미래의 서구적 SF로 정교하게 옷을 입히니 독자와 문단이 인정하고 열광한다.
2017년 단편소설집 『종이동물원』은 로커스상 최우수 선집상을 수상했다. 표제작 「종이동물원」 외에 13편의 단편소설이 실려있다. 내용상 세 갈래로 분류할 수 있겠다. 첨단과학기술과 우주 세계에 대한 ‘과학 SF’, 중국 민담 혹은 야사와 공상과학을 섞은 ‘민담 SF’, 아시아 근현대사와 환상을 엮은 ‘역사 SF’. 독자는 13편이 어떤 환상 터널을 통과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AI 기계에 침범당하는 미래상을 그린 「천생연분」, 영혼을 얼음, 소금, 담배 등 물질 형태로 소지하는 「상태변화」, 책을 쓰고 읽는 독자적 방법을 지닌 지적 생물종들을 묘사한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 인간 복제품 제작과 사용에 대한 갈등을 엮은 「시뮬라크럼」, 감정 통제 장치를 장착한 사람들의 이야기 「레귤러」, 생각와 기억의 기능체인 우주 지적 종들을 비교한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노화 혹은 영생을 선택한 우주인의 운명을 창세기에 빗댄 「파(波)」는 과학 SF에 자리를 차지한다.
여자로 변신하는 여우를 사냥하던 요괴 사냥꾼이 산업화에 따라 기관차 기술자가 되고 요괴를 도와 금속 여우로 만들어 주는 「즐거운 사냥을 하길」, 건륭황제 시절 원숭이 왕을 가상 친구로 둔 전호리가 민중을 도우다 희생되는 「송사와 원숭이 왕」은 중국 전래 민담과 SF를 섞은 작품이다.
한자를 파자하여 점을 쳐주던 간청화 노인이 공산당으로 고발되어 죽는 「파자점술사」, 일본인 히로토가 마지막 우주선에 탑승하여 수리 작업을 완료한 뒤 희생하는 「모노노아와레」, 상하이에서 시애틀까지 태평양 횡단 해저 터널을 뚫어 진공 튜브, 캡슐 배송관으로 이동하는 작업을 한 타이완 토목 기술자 이야기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 731 일본부대의 생체 실험 현장으로 시간 이동하여 진실을 목격하는 장치를 개발한 연구자 부부가 겪는 좌절과 각계각층의 반응을 기술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역사 SF에 놓아본다.
이 단편선의 우수성은 형식과 내용의 층위가 깊고 넓다는 데 있다. 민담, 편지, 인터뷰, 추리 등 다채로운 서술 형식은 읽는 재미를 더한다. 문자와 역사 인식, 첨단우주과학지식, 인물 심리, 윤리 등에 대해 숙고할 기회를 준다. 특히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에는 우리와도 유관한 일본 과거사 문제에 대해 다양한 입장과 견해가 전개되는데 세상은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구성되어 있고 선도 악도 명료하지 않음이 충격적이다. 발전하는 지성, 무한한 상상력, 미지의 미래상이 궁금한 이들에게 천재 이야기꾼 켄 리우의 환상 서사, 『종이동물원』을 추천한다. 그간 세월이 지나서 시의성은 약해도 훌륭한 SF 문학을 맛볼 수 있다. 장차 탁월한 한국 작가가 세계에 한국의 역사, 언어, 문화를 담은 SF 환상 문학을 발표할 ‘실현가능한 환상’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