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정아 2020120227
<옥자>
논제1. 자본주의 문제는 자본으로 모두 해결 가능한가?
논제2. 각 개인의 가치관에 윤리적 우월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인간은 먹는다. 먹는 행위는 곧 어떤 생명체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죽은 존재, 그것을 죽인 존재, 그리고 죽은 것을 먹는 존재가 발생한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인간의 먹는 행위가 가볍게 느껴지지 만은 않을 것이다. 영화 <옥자>는 바로 이 지점을 다루고 있다. 슈퍼돼지 옥자와 산골소녀 미자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공장식 축산산업의 이면에 대한 고발과 함께 생명윤리에 대한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지고 있다. <옥자>를 보고 인간이 평소에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돌아보았다. 그리고 영화에서 보여준 자본주의와 단면을 비추는 미디어의 세상 속 인간이 가지는 여러 모순들이 빠져나갈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느껴졌다.
<옥자>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근본적 시작은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더 많이 더 싸게 더 많은 이익’을 위해서 글로벌 기업 미란도는 슈퍼돼지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 미자가 옥자를 구하기 위해 미란도의 도축 공장에 가서 그곳의 현실을 마주했을 때 강력한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생명체가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여기서도 모순적인 상황이 펼쳐진다. 미란도에 끌려간 옥자를 구하기 위해 미자는 동물해방전선(AFL)과 함께 고군분투하지만 원하는 대로 잘 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옥자를 구한 건 미자가 가지고 있던 황금돼지, 즉 자본이었다. 자신의 재산이기 때문에 옥자를 풀어줄 수 없다고 말하는 미란도의 CEO 낸시에게 미자는 돼지 모양의 금덩어리를 내밀며 자신이 옥자를 사겠다고 한다. 그러자 낸시는 아주 쉽게 계약 성립을 선언하며 옥자를 미자에게 내어준다. 자본에서 비롯된 문제가 결국 그에 상응하는 또다른 자본으로 해결된 것이다. ‘돈 때문에 발생한 문제는 그냥 돈으로 해결하면 되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무척이나 단순하고 명료해 보인다. 하지만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졌다는 찝찝함은 지울 수 없다.
<옥자>는 동물 생명의 윤리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관객들에게 ‘채식이 옳습니다’라는 주장을 전달하려는 영화는 아니다. 극 중 미자를 돕는 동물해방전선(AFL) 내부에서 의견이 대립하거나 그들 역시 모순을 보이는 장면에서 이를 느낄 수 있었다. 영화의 감독인 봉준호 감독 역시 채식주의를 강요하는 영화는 아니라고 말했다. 다만, 영화를 통해서 동물을 대량생산 라인의 일부로 만든 공장식 축산에 대해 되짚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옥자>가 다루고 있는 문제의식은 그 중심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흑백논리의 우월성 대결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 현실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삶의 방식에 맞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윤리적 우월의 문제로 가져는 오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도덕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용인되기 어려운 가치관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을 채식과 육식의 논쟁에 적용시켜 보면 과연 서로를 우월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꼭 채식과 육식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요즘 사회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너무 쉽고 극명하게 우월을 주장하고 상대에게는 열등의 프레임을 부여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옥자>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각 입장 모두에서 이해할 수 없는 모순과 혼란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사회적 논쟁에서 발생하는 가치관들의 대립을 어떤 태도로 마주하고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고 생각한다.
<리플리>
논제1. 한 인간의 ‘진짜’ 모습을 정의할 수 있는가?
논제2. 평범함은 초라한가?
사람이 타인을 동경하거나, 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꿈꾸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허구의 세계만을 진실로 믿으며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일삼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가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리플리 증후군이다. 영화 <리플리>는 이 병의 이름을 탄생시킨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톰 리플리가 자신과 다르게 원하는 건 뭐든 가지고 즐길 수 있는 삶을 사는 디키를 만나면서 점점 그의 삶에 빠져들게 된다. 종국에는 극단적인 자기부정의 단계 이르러 파국을 맞는다. 영화 속 톰의 모습이 극단적인 측면이 있지만 타인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되는 자기혐오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SNS나 다른 여러 매체들을 통해서 타인의 삶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요즘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허물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리플리>는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였다.
나는 누구인가. 흔한 철학적 질문이면서도 한결같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톰 리플리는 피아니스트인 척을 하고, 프리스턴대 졸업생인 척을 하고 나중에는 아예 다른 사람(디키)의 행세를 하는 등 본래의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톰의 장기가 목소리 모사하기, 싸인 모방하기인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톰은 영화에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으로서 존재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톰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애초에 한 인간의 진짜 모습이라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람은 기본적으로 사회 속에서 여러 모습을 보인다. 학교에서 내 모습, 직장에서 내 모습, 가족 앞에서 내 모습, 친구들 속에서 내 모습, 연인 앞에서 내 모습.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하는지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어느 하나가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톰은 디키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함께할 때의 자신만을 인정했다. 그래서 평범하고 보통의 모습인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어했다. “과거를 지하창고에 숨겨두고, 잠궈두고는 거기엔 절대 들어가지 않는.... 그런 적 있어? 난 그래. 그런 다음에 소중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열쇠를 주고 싶어지지. 문을 열고 들어가보라고, 하지만 그럴 수 없어. 너무 어둡고 더러우니까.” 한없는 자기부정을 보여주는 톰의 모습을 보면서 그게 어떤 모습이든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진정한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한쪽 면에 매몰되기 보다는 존재하는 여러 면들을 아낄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톰 리플리는 자신을 둘러싼 의혹에서 벗어나 떠난다. 하지만 그는 절대 행복하지 않다. 자신이 해온 수많은 거짓들이 스스로를 삼켜버린 것이다. 톰 리플리가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인 이유가 궁금했다. 톰에게는 분명 중간중간 그만 멈출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더 큰 거짓을 선택했다. 개인적으로 결말이 충격적이었다. 배에서 메러디스를 만난 후 톰 리플리는 자신과 함께하고자 했던 피터마저 죽여버린다. 메러디스는 톰을 디키 그린리프로 알고 있는 사람이고 피터는 톰을 톰 리플리 그 자체로 아는 사람이었다. 톰은 끝까지 자기를 부정하고 거짓을 선택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평범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디키를 통해 경험해본 상류층의 삶은 뺏기고 싶지 않은 현재였을 것이다. 톰 리플리를 보면서 평범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았다. 빛나지 않고 초라하다는 의미인가. 디키가 가졌던 부유한 삶의 옆에서 본다면 확실히 평범한 사람은 작아질 수 있다. 한편으로는 평범의 대열에 들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톰 리플리가 그토록 자신을 감추고자 했던 것은 평범함 그 자체의 초라함의 문제이기 보다는 톰의 어긋난 욕망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은연중에 무시와 소외의 제스처를 취하는 디키의 거만한 태도도 톰의 열등감에 불 지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