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은 외아문 관직에서 물러난지 3개월 뒤에 보빙사(報聘使)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가게 됩니다. 보빙사는 조선과 미국이 수교하고 미국이 공사를 파견한 데에 대한 답례로 조선이 최초로 미국에 파견한 사절단이었습니다. 전체 일행은 정사 민영익, 부사 홍영식, 서기관 서광범, 수행원으로서 유길준, 변수 등이었고, 외국인으로는 중국인, 미국인, 일본인이 있었습니다. 유길준이 수행원이 된 것은 그 능력도 출중하지만, 정사 민영익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일행은 1883년 9월 워싱턴 DC에 도착하여 대통령을 예방하고 국서를 봉정하였습니다. 그 뒤 여러 도시와 공공기관을 시찰하고 10월 대통령과의 작별회견을 끝으로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정사 민영익 팀은 미군 군함을 타고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을 방문하고 1994년 5월 인천에 입항합니다. 미국 해군 소위 포크(George C. Foulk)가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유길준은 미국에 남습니다. 미국 유학을 결심한 것입니다. 역시 민영익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길준은 개화기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습니다. 그의 지도교수로는 모스(Edward S. Morse)가 추천되었습니다. 모스 교수는 일찍이 일본 동경대학에 초청되어 일본에 진화론을 최초로 강의한 학자이며, 또 일본의 고고학 등 일본 문화를 연구하여 서구 최초로 일본학을 개척한 학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유길준의 일본 유학 시절과 모스의 일본 체류 시절이 겹치기도 합니다(우남숙, “유길준과 에드워드 모스 연구”, 동양정치사상사 제9권 제2호,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10, 162쪽). 그리고 모스는 유길준의 일본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와도 교분이 있었습니다. 유길준은 일본에 있으면서 이미 모스 박사에 대하여 알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이광린은 일본에서 이미 유길준과 모스의 만남이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광린, 유길준, 40쪽).
유길준 도미 당시 모스는 보스턴 근처 세일럼(Salem)의 피보디 박물관(Peabody Museum) 관장으로 있었습니다. 초기 6개월 유길준은 모스 박사 집에 기거하며 배움을 받았습니다. 모스 박사의 집에서 나와서도 추가 4개월은 계속하여 모스 박사의 개인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Salem 시에서 멀지않은 Byfield에 위치한 덤머 아카데미(Dummer Academy)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시 덤머 아카데미는 명문 사립 기숙학교로서 학생 수는 40명이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14-15세로서 대학 진학을 준비하였습니다. 당시 유길준은 29세로 참으로 만학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유길준의 목적의식은 뚜렷했습니다. 그는 배움에 절실했고, 또 열심이었습니다. 유길준의 성취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유길준은 6개월 체류 후 벌써 준수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모스 박사 집에서 나와 처음으로 모스 박사에 보낸 안부 편지는 간단하지만, 흠 잡을 데 없는 영어 문장이었습니다. 또한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부한 덤머 아카데미에서 유길준의 성적은 발군이었습니다. 덤머 아카데미는 신입 외국인 학생 유길준에게 시험을 면제해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길준은 같이 시험을 칠 것을 요청하였고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어제 오후 시험을 치러 87점을 맞았습니다. 이것은 다른 학생들보다 16점이나 높은 점수였습니다. 물론 100점보다 13점이나 낮기는 합니다.”(유길준의 편지, [4] 금요일 바이필드에서, 이광린, 개화파와 개화사상 연구, 일조각, 1989, 221쪽)
“화산과 지진 그리고 분천(噴泉: 이광린 교수는 墳泉이라고 쓰고 있음)에 관한 이론 및 영향 또 대륙의 생성과정에 대한 시험을 치러 저는 94점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20문항에 달하는 수학 시험은 100점을 맞았습니다.”(유길준의 편지 [6] 1884. 11. 3., 이광린, 개화파와 개화사상 연구, 223쪽)
아, 이렇게 명석하고 배움에 빨랐던 유길준이 미국에 오래 남아 큰 학문을 이루고 귀국하였다면, 우리 민족 지성에 얼마나 큰 혜택을 주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나 유길준의 미국 유학은 중단됩니다. 덤머 아카데미 입학 4개월만에 갑신정변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주지하듯이 갑신정변은 1884년 12월4일에서 6일까지 김옥균 등 개화파가 일본 공사의 협조를 얻어 무력 쿠데타를 꾀한 사변이었습니다. 정변의 주역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은 모두 유길준과 함께 교유했던 개화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변이 목표로 한 제1의 타격 목표는 민영익, 즉 유길준의 후원자였습니다. 민영익은 원래 김옥균 등 개화파의 후원자이기도 하였고, 보빙사로서 유길준과 같이 미국에 왔던 정권의 중핵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영익은 귀국 후에 개화파와 절연하고 수구당에 기울었던 것입니다. 민영익은 개화파 정변 세력에 난도질 당했으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변도 결국 3일을 가지 못하고 실패하였고 김옥균 등은 일본에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소식을 접한 유길준은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는 바로 교실에서 나와 기숙사로 돌아가 고뇌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유길준 자신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학생이 신문 쪽지를 들고 말하기를 ‘그대 나라에 변란이 일어났다’라고 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얼굴빛이 바뀐 채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 때 큰 눈이 정원 소나무 위에 쌓이고 음산한 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려 밤이 다하도록 침상 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유길준, 허경진 역, 서유견문, 서해문집, 초판 2쇄, 2005, 24쪽)
유길준은 변란 소식을 듣는 순간 무슨 일인지 직감했던 것입니다. 개화파의 거사를 알아챘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었을까? 유길준 역시 원래 김옥균 등 개화파와 국가변혁의 행동에 의기투합하였던 것입니다.
“이윽고 유학을 위해 북미의 미국으로 향하려고 할 적에 홍영식 공과 김옥균 공을 일본 도쿄에서 만나서 개혁의 대의를 의정(議定)했다. 김 공은 외국에서 군대 양성을 주관하고, 홍 공은 국내에서 경성에 주둔한 두 나라(청과 일본) 군대의 철군을 권고하는 일을 주관해서 5년 뒤에 거사하기로 약속했다. 나는 일개 서생으로 계획을 도울 순 없었고, 단지 청임(聽任)에 관여하고 만국의 정형(情形)을 관찰하는 일만 허락받았다”(유길준, “서조충정공”, 유길준전서, 일조각, 1971, 263-265쪽; 김종학,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일조각, 제1판 2쇄, 2023, 252쪽 재인용)
이렇듯 원래는 5년의 계획이었는데, 김옥균 등은 1년 만에 거사에 돌입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유길준으로서는 참으로 비통하고 난감하였을 것입니다.
모스 박사는 동요치 말고 학업을 계속하라고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학비가 문제였습니다. 유길준은 방학을 맞아 뉴욕 주재 명예조선총영사 프레이져(Everett Frazer)를 찾아갔습니다. 유길준은 그 만남을 통해 조선 정부가 유학 경비를 계속 제공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존에 보내 온 돈으로 한 학기는 더 공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길준은 1885년 6월 학기를 마치고 바로 귀로에 오릅니다.
유길준은 귀국에만 급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귀국하면서 유럽 등 세계 각지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유길준은 미국에서 아일랜드, 영국 런던, 프랑스, 독일, 이어서 포르투갈, 지브롤터, 지중해, 수에즈 운하, 홍해 그리고 동남 아시아의 싱가포르, 홍콩, 끝으로 일본을 거쳐 귀국하게 됩니다. 이러한 귀국 여행의 체험이 이후 그의 <서유 견문록>의 바탕이 됩니다.
서유견문 초입의 세계 지리에 대한 부분을 조금 인용해 봅니다.
“적도 북쪽의 하지는 적도 남쪽의 동지이며, 적도 남쪽의 춘분은 적도 북쪽의 추분이다. 그래서 적도 남쪽과 북쪽의 기후는 서로 바뀌어진다. 기후가 춥고 더운 것은 태양이 가깝고 먼 것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태양 광선이 곧바로 비출 때에는 따뜻하고, 비스듬히 비출 때는 서늘한 것이다.”(유길준, 허경진 역, 서유견문, 39쪽)
영국 런던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 나라 국민들이 세계의 부를 다 거둬들여 이와 같이 번화하고 웅장한 역사상 세계 최대의 도시를 세웠지만, 시내에 빈민이 많아서 길가에 누더기를 걸친 자들이 흔히 자취를 나타내며 호사스러운 부자들과 뒤섞여 있다. .... 그러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상에서 런던처럼 부유한 곳도 없고, 런던처럼 가난한 곳도 없다”라고 한다.(유길준, 허경진 역, 서유견문, 534쪽)
프랑스 파리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 시내에는 누대와 시장이 바둑판처럼 즐비하고, 연못과 공언이 별자리처럼 흩어져 있는데, 도로의 청초함과 가옥의 화려함이 세계에 으뜸이다... 파리는 옛날 로마국의 대장 시저가 정복하였던 지방인데, 그 때 이곳에 성곽을 쌓았다. 그 뒤 차례로 증축하면서 어느새 대도시가 되었는데, 나폴레옹의 공으로 더욱 장대한 도시가 되었다. 서양 여러 나라의 사물이 거의 파리의 제도를 본뜨기 때문에 음식도 새로 나온 것은 반드시 파리의 시체(時體: 유행)라고 하며.... 그러므로 프랑스 사람들이 자랑하며 말하기를 ’파리는 천하 만국의 서울 가운데 서울이다‘라고 하니,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심성과 자만하는 의기가 아주 심하다.”(유길준, 허경진 역, 서유견문, 551, 553쪽)
유길준은 마침내 일본에 다다랐습니다. 유길준은 조선으로 바로 향하지 않고, 일본에 일주일 간 머물면서 일본인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는 물론이고, 김옥균, 박영효 등을 만났습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해 있던 그들 개화파는 대역죄인으로서 목에 현상금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길준은 그들을 만난 것입니다. 유길준의 용기있는 결단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유길준은 안전장치도 구비해 놓았습니다. 귀국하기 전에 부모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에 정변의 주동자들은 역적이라고 규정하였던 것입니다. 아래는 유길준이 모스 교수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확실히 저는 그와 같은 일이 있을 것으로 믿고, 저의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혁명가들이 국왕과 나라에 충성을 다할 때에는 저의 좋은 친구라고 할 수 있으나, 지금에는 저에게 큰 원수가 되는데, 그 까닭은 그들은 역적들이고, 우리나라에 대해 큰 해를 끼쳤기 때문이라는 내용을 써서 보낸 바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한국 정부로부터 저에 대한 의심을 제거할 수 있었고, 또 국왕과 저의 부모님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유길준 편지 [15], 1885. 12. 2., 이광린, 개화파와 개화사상연구, 231쪽).
그러나 유길준이 김옥균 등과 같이 개화당이었고 또 귀국하면서 또 그들을 직접 찾아가 만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족히 중죄로 다스려질 수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유길준은 자신의 후원자인 정권의 실세 민영익을 믿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민영익은 갑신정변으로 심한 부상을 입고, 치료 후에는 조선을 떠나 중국에 망명해 있었습니다. 유길준의 귀국은 분명 목숨을 담보로 한 결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