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분석
작가:유치진(1905년11월19일~1974년2월10일 통영)
경상남도 통영출생.향리에서중학을마치고도일,도쿄 릿쿄대학영문과를졸업하였다
1931년 홍해성.서항석등과 극영동호회를 창립하고,이어 이단체를발전시켜 이현구 ,이하윤등의 참여를얻어 극예술연구회로 발족시킴.
1931년 희곡 토막을 문예월간지에 발표하고,계속해서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장막희곡 소 등을 발표함.
그후 사회성을 배제하고 인간의 애정문제를 다룬 제사.자매.부부 등 발표.
중일 전쟁이 발발한 이휴에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국민 연극 운동을 별여 자신이 친일작품으로 인정하는 흑룡강 인일의 선봉 이용구를 찬양한 북진대등의 희곡을쓰고 공연하기도함.
8.15광복 후에는 자명고 ,원술랑등의 역사극과 반공을 주제로한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의 역작을 발표.
국립극장장.반공통일 연맹 이사. 동국대교스등역임.두라마센터 소장으로 후진양성에 힘씀.
근대극 연극사의 거목(巨木)으로 인정받는 유치진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근대 연극사 1세기동안에 부침했던 어떤 인물보다도 출중했다. 그가 출중했던 것은 역시 연극에 미친 영향이 광범위한데 있다. 대체론 앞서 간 연극인들이 어느 한 장르에 걸쳐서 활동한데 반해서 그는 극단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극작(劇作), 극 이론, 극장 경영, 연출, 연극 교육 등 전 장르에 걸쳐서 손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극연창단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서 본격적인 신극운동의 단초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 극연이 해방 이후 극협과 신협으로 이어져서 우리나라 정통신극의 맥을 이은 것이다. 다음으로 희곡 창작만 하더라도 처녀작 <토막>을 쓴 이래 40여 편을 발표하여 소위 리얼리즘의 기초를 닦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은 함세덕, 김진수, 차범석 등도 모두 리얼리즘의 줄기를 형성한 후학들이다. 오늘날 그나마의 창작극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도 어느 면에서 보면 유치진이 1930년대에 닦아놓은 데서 연유한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지나치게 계몽적 민족주의에 기울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 현대 희곡이 예술적으로 격조가 높지 못한 결과도 낳았다고 볼 수가 있다. 그는 또한 연극이론에도 손을 댔는데, 그것은 연극비평 부재로 인해서 타락한 상업극이 대중 의식을 좀먹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연출 솜씨도 극작 못지 않았다. 30년대 극연에서 홍해성이 동양극장으로 떠난 뒤에 연출을 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60년대까지 이어져서 리얼리즘 연출의 예법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커다란 업적중의 하나는 역시 극장 경영이었다. 1950년 초대 국립극장장을 필두로 해서 60년대의 드라마센터 건립, 운영은 우리 나라 극장사의 빛나는 업적이다. 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드라마센타를 통해서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했는데, 한 가지가 인재 양성이라고 한다면 다른 한 가지는 전통극의 현대 전승이다. 즉 그는 60년대 초에 연극아카데미를 시작하여 작가와 배우를 길러냈는데, 그것은 뒷날 서울예술전문대로 이어져서 연극, 영화, 방송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오늘날 연극계와 방송드라마 연기자중에 상당수가 드라마센타 출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그가 우리 나라 문화 예술계에 끼친 영향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그는 60년대 중반 드라마센타에 전통 연극부를 두고 우리 나라 가면극과 꼭둑각시극의 전승에도 힘쓴 바 있다.
이상과 같이 동랑 유치진은 매우 다면극 마스크를 지녔던 대표적 근대극의 선구자였다.
한국 근대 희곡의 새로운 장을 연 동랑 유치진은 1905년에 태어나 청년기에는 식민지 시대, 중년기에는 민족분열과 갈등의 시대, 노년기에는 혁명의 시대를 겪으며 우리 민족의 질곡과 격동의 시기를 살았다. 작가와 시대상황은 필연적인 관계로 맞물려지게 되는 바 우리의 비극적인 현대사는 곧 동랑의 정신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기치며, 그의 작품세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드러난다. 그런 까닭에 그의 작품 속에는 불안, 죽음, 니힐, 아나키즘, 현실 고발 의식 등이 깔려 있는데, 니힐리즘과 아나키즘은 아일랜드의 작가 숀 오케이시와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유치진은 일제 총독부가 제창하는 소위 ‘국민연극’ 이념의 수립에 이론과 창작 양면에서 기여했다. 그는 1941년 <국민연극 수립에 대한 제언>과 <신체제하의 연극> 등의 평론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극단 [현대극장]을 발족시켜 총독부의 만주이민정책에 호응하는 내용의 <흑룡강>(유치진 작)을 공연했고 이듬해에는 <북진대>를 발표했다. 친일파 이용구를 주인공으로 한 <북진대>에는 작가가 다음과 같이 창작 의도를 밝히고 있다.
“…한일합방에 의연히 매진함으로써 조선이 나아갈 길을 명시한 것으로, 금일의 내선일체는 명일의 대동아 건설의 초석이 된다는 선구자적 기개를 그려낸 군중극이다.…”
<대추나무> 역시 만주를 미화한 작품인데, 해방 후 이 작품이 주인공만 독립투사로 바뀐 채 <왜 싸워라>는 제목으로 대학극 경연대회에 출품되어 유명한 ‘왜 싸워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약력
1940년 조선극작가동호회 회장, 조선연극협회 이사
1941년 현대극장 대표. 조선문인협회 상무간사
1943년 8월 25일 대동아문학자대회 2차대회 참가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극문학부 회장
1945년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친일 작품 목록
1940. 7 <대륙인식>(인문평론)
1941. 1. 3 <국민연극 수립에 대한 제언>(매일신보)
1941. 2 <신체제하의 연극>(춘추)
1941. 3 <아름다운 도시>(신시대)
1941. 12 <연극계의 회고>(춘추)
1942. 2. 19 <축 싱가폴 함락>(매일신보)
1942. 6 <북진대 여화>(국민문학)
1942. 7. 30-8. 5 <개척과 희망>(매일신보)
1942. 9 <극장은 연극을 결정한다>(신시대)
1942. 9 <만주분산개척민촌을 보고>(춘추)
1942. 11-43. 1 <대추나무>(희곡)(신시대)
1943. 6 <싸우는 국민의 자세>(국민문학)
유치진의 장막극 『마의태자』는 신라가 고려로부터 멸망당하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을 재구성해낸 작품이다. 작중 주인공은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김부 즉, 경순왕, 그의 아들이다. 태자는 강직하고 나라를 위해 몸 받쳐 희생할 결의를 가진 인물이다. 실제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의 인물됨은 희곡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희곡은 신라가 멸망하게 된 계기를 각색한다. 고려의 왕권이 책략과 술수를 써 그 꼬임에 빠지게 되는 인물들로서 극이 전개되며, 그 속에서 쇠약해지는 신라의 모습과 무능력한 왕의 모습, 질투와 시기를 가진 인물의 갈등 속에서 결론에 치닫게 된다.
희곡은 흥미 있게 잘 짜여진 5단 구성을 취하고 있다. 신라의 상황과 그 속에서 나라가 쇠약해지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잘 묘사해냈다. 왕건이 신라를 삼키기 위한 계략을 수행하는 모습도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 인물됨은 역사적 사실과는 사뭇 다르다. 고려의 왕인 왕건은 상당히 능글스러운 면모를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남자다운 기백이나 맹장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책략과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지략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인물상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이에 비해 신라의 경순왕의 모습과 그를 호위하는 신하들의 모습은 비교적 사실과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라가 극도로 쇠약해지고, 왕건의 선물에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신라의 신하들은 현실적으로 잘 묘사된 듯하다. 경순왕 김부의 우유부단함, 무능력함 역시 희곡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자신의 아들인 태자에게 의지하려는 모습 등을 살펴볼 때,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과연 이런 왕이 있었기에 신라는 멸망하게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극중 주인공인 태자는 신라의 위인으로 그려진다. 역사적으로 그는 신라가 멸망하고 나서 개골산으로 들어가 풀을 뜯어 먹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시대 분석
978년
38대 경순왕
경애왕의 뒤를이어 신라 56대왕으로 927년에 즉위하였다. 왕의 이름은 부(傅)로 문성왕의 6대손이고 이찬 효종의 아들이며 모는 헌강왕의 따님 계아태후이고 비는 죽방부인 박씨와 왕건의 딸인 낙랑궁주 왕씨이다.
가뜩이나 국력이 쇠약한데다 경애왕은 비빈 및 종친과 더불어 포석정에서 놀고 있을 때 견휜이 침입하여 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했다. 왕은 전왕의 시체를 서당에 모시고 군신과 더불어 통곡하며, 경애라 시호하고 남산해목령(경주)에 장사하니 고려 태조는 사신을 파견하여 조제하였다
- 5년(931) 2월고려 태조는 50여기를 거느리고 경기에 이르러 배알할 것을청하므로 왕은 백관으로 더불어 교외로 그를 맞고 들어와 극진한 마음으로 대접하고 임해전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술을 권하였다. 왕은 말하기를
“나는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하여 환란이 일어나게 하고 견훤이 불행을 자행하여 우리 국가를 침해하니 얼마나 분통한지 모르겠다.”
하며 눈물을 흘리니 좌우에서는 흐느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태조도 또한 울면서 왕을 위로하였다.
그로부터 태조는 수십일 동안 머물러 있다가 돌아가니 왕은 혈성까지 이르러 전송하고 당제 유렴을 인질로 삼아 태조를 따라가게 하였다.
그런데 태조휘하의 군사들은 군기가 바르므로 민가를 조금도 침해하지 않았다. 이에 도인사녀(都人士女)들은 서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전일에 견훤이 왔을 때는 표호(豹虎)를 만난 것 같더니 지금은 왕공(태조)이 이르렀을 때는 부모를 보는 것과 같다.”
고 하였다.
8월에 태조는 사신을 신라로 파견하여 왕에게는 금채안마(錦綵鞍馬)를 보내고 관료와 장병들에게는 포백(布帛)을 보내왔다.
신라의 국가 성립
신라는 처음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기원전 57년 건국되었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 이사금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내물 이사금 때에는 해안가에 나타나던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
신라의 정치적 발전
신라는 내물 마립간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였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지방의 지배 세력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갔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신라의 팽창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삼국 통일
고구려가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신흥 귀족인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서서히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려 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다시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더구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결국 고구려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668년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하지만 670년 옛 고구려의 영토인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를 차지하지 못하고 발해가 들어서면서 불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였다.
신라의 발전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는 그 영역의 확대와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도 크게 증대되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도 안정되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이 전제화되었다는 점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로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정치 변동과 호족 세력의 성장
8세기 후반 신라에서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다.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무거워졌다.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도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졌다.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다. 호족들은 농민 봉기를 배경으로 각처에서 일어나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반(半)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자기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 혹은 장군이라고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 지배력도 행사하였다.
한편,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후삼국의 성립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의 혼란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일대로 축소되어 다시 삼국이 정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신라의 멸망
고려 태조는 실각한 전(前) 임금인 궁예와는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과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받아내어 신라를 무혈 정복할 수 있었다.
통치 제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중앙 관제는 집사성를 중심으로 그 아래에 13부를 두었다. 이때 집사성은 원래 집사부로 다른 13부와 동급이었으나 전제화된 국왕의 권력에 맞추어 국가 기밀과 정무(政務)를 맡아보던 최고의 행정 관아로서 집사성으로 승격하였다. 또한 국립 대학인 국학(國學)도 설치하였다.
아울러 백제의 영토와 고구려의 일부 영토를 합병하여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지방 행정 조직도 개편하였는데, 흔히 9주 5소경이라 일컬어진다. 이는 서울인 경주가 지나치게 동쪽에 치우쳐 있음을 보완하는 조치이기도 하다. 또한 지방관을 감찰할 목적으로 외사정(外司正)을 파견하고, 호족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상수리 제도를 시행하기도 했다.
사회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한 시기가 늦은 편이었다. 그런 만큼 신라는 여러 부족의 대표들이 함께 모여 화백회의를 통하여 왕권을 견제하면서 정치를 운영하고 사회를 이끌어갔다. 특히 최고 신분층인 진골 귀족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그들은 중앙 관청의 장관직을 독점하였다. 6두품 출신은 학문적 식견과 실무능력을 바탕으로 국왕을 보좌하면서 정치적 진출을 활발히 하였다. 그렇지만 신분의 제약 때문에 중앙관청의 우두머리나 지방의 장관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다.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제도가 있었다. 골품은 신라 사회에서 개인의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히 제한하였다. 관등 승진의 상한선이 골품에 따라 정해져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골품제도는 가옥의 규모와 장식물은 물론, 복색이나 수레 등 신라 사람들의 일상생활까지 규제하는 기준으로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귀족들은 금일택이라 불린 저택에서 많은 노비와 사병을 거느리고 살았으며, 불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지방에 소유한 영지와 목장 등에서 나온 수입으로 충당하였다. 귀족들은 국제 무역을 통하여 수입한 진기한 사치품을 선호하였다.
신라 청소년들은 화랑 활동을 통하여 전통적 사회 규범을 배우고 여러 계층이 같은 조직 속에서 일체감을 갖도록 하여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완화하는 구실을 하였다. 이들은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펀의식을 행하고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몸과 마음을 연마하였다. 화랑은 신라가 정복 활동을 강화하던 진흥황 때에 국가 차원에서 그 활동을 장려하여 조직이 확대되었다.
낙랑공주와 마의태자
왕건은 경순왕(신라 마지막 왕)이 항복하자 자기의 첫째 딸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시집보내면서 경순왕을 자신의 부마로 삼습니다
그렇지만 경순왕이 나이가 나이인지라 낙랑공주는 경순왕보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를 좋아하게 된답니다.
하지만, 마의 태자는 낙랑공주와의 사랑보다는, 신라의 천년사직이 너무 허무하게 망한 것에 대해, 한탄하면서, 신선이 되고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주제 파악
통일신라의 멸망과 사랑
줄거리 파악
제1막 : 고려의 왕건이 신라를 복속시키고자 찾아왔다. 그는 성 밖에 오천대군을 잠입시키고 겉으로는 선물 공세로 신라조정을 회유한다. 왕 김부는 낙랑공주의 미색에 빠져 있고, 태자는 이를 통분해 한다. 겸용, 선필, 상보 등은 왕건과 야합하여 신라를 배반하고, 이유, 김비, 김곤 등은 이를 비웃는다. 태자 등과 이들은 술시에 왕건을 살해하고자 일을 꾸민다.
제2막 : 김부는 낙랑공주에게 빠져 자신의 팔찌까지 주고 만다. 태자는 어리석은 왕을 질타한다. 그러나 낙랑공주는 의기가 넘치는 태자를 사랑하게 되고 자객으로 들어온 그를 구하기까지 한다.
제3막 : 태자는 낙랑공주에게 마음이 가게 되나 역으로 미움을 표하며 피하고자 한다. 한편 왕건으로 위장한 신하를 태자가 살해하게 되는데, 태자를 공격하던 선필을 공주가 죽이게 된다.
제4막 : 왕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려 군사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게 한다. 그리고 김부로 하여금 항서에 수결하라고 강요한다. 마의태자는 백화와의 언약 때문에 괴로와하면서도 공주를 사랑하게 된다. 둘이 포옹하고 있는데, 김부는 이 장면을 목격하고 질투심에 불탄다. 결국 그는 홧김에 수결을 하고 만다.
제5막 : 태자는 일개 초민이 되어 개골산을 헤매고, 굶주린 백성과 공주가 그를 뒤따른다.
인물간의 관계
왕건(낙랑공주의 아버지)
↓
김부→낙랑공주↔태자←백화(태자의 옛여자)
(짝사랑)
↓ ↑
→→→→부자→
인물분석
김부-67세.165cm74kg
작은키에 허리가 구부정하다.옷은 화려한 옷차림을 좋아하고.
몸에좋다는건 다 먹으면서 운동은하지않아 뚱뚱하다.
왕답게 위엄있게 생겼으나 얼굴엔 심술이그득그득하고. 볼에도 심술이 가득하다.
눈은 눈꼬리가 쫙 올라가있고.코는 주먹코다.이마에는 큰주름 두개가있고.
책임감이 별로없다. 어린여자를좋아하고 철이없다.
왕건-55세 175cm.65kg
얼굴이깔끔하며 약간 뭔지모를 사기꾼같이생겼다. 위엄있어보이기는하나 그속은 알수가없다.
화려한 금색 빨간색이런 옷을즐겨입고.똑똑하다.딸을 팔아먹는..좀 그런인물.
게임을좋아하며, 태연한척하는걸 즐긴다.
태자-20세.179cm.68kg
아버지를 닮지 않고 엄마를 닮았다.
영리하고 불같은 포부를 지니고있다.대담한성격을지니고있고,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는걸 싫어한다.책임감이강하다. 하지만 아버지를 닮아
여자에 약한면이있다. 여자관리를잘못하는편이고 얼굴은 또랑또랑 총명하게생겼다
눈은 아버지를닮아 눈꼬리가 올라가있지만. 코는 엄마를닮아 오똑하니 이쁘다.
낙랑공주
-18세164cm 48kg
백화-19세160cm48kg
아주똑똑하다. 천상여자의 성격이며.고전적인얼굴을가지고있다.
맏며느리감처럼생겼다.말이 별로없고 남자를 귀찮게 하지않는다.
남자가 편하게 쉴수있는 여자라고 할까. 믿을수있는 성격을가지고있다.
충고와 조언을 해줄수있는 여자이다.
영화(마의태자)
마의태자-낙랑공주
(이를 바드득 갈며) 두고 보라 여자의 마음을 이토록 짓밟고서!
원수의 자식이라 하야 미워하였으니 그 원수의 매서움을 보여 주리라!
고려 계집아이의 차디찬 맛을 보여주리라.아바마마를 모시고 오라.
싫소이다.모두가 귀치 않소이다!(뿌리치며)놓아 주오소서.
소녀의 품은 뜻은 이칼로 태자를 해하고 이 몸마저 죽을 작정이오이다.
낙랑2
무대 중앙에서 발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본다. 아무것도 발견 못한다.
(실망하여)아아.여기에도 역시 아니 오신 모양!(조용히 흐느끼며)태자님,
산을 타고 하늘로 오르시었소? 흙을 쓰고 땅으로 드시었소? 개골산 수많은 계곡.
주름잡아 헤매어도 앞서느니 첩첩 태산! 길을 물을 짐승조차 없으니 어이된 일이시오?
(눈물을 씻으며)태자님, 이 땅에 사신 이 태자 한 분이 아니어든
무엇때문에 홀로 그 죄를 지시어 산꼭대기에세 세찬바람, 찬이슬에 여위시고
뼈를 깎으시며 이렇게 참혹하게 그 육실을 괴롭히지 아니하시어도 될 일이오,
이리 내려오시어서 법당이나 암자로 가소서. 거기서 불전에 향불을 올려 편안히 앉으셔서
기도를 올리시오. 자, 어서 내려오소서.
어서! 어서! 어서!(거센 바람 소리만 들리고 태자는 꼼짝도 않고 앉았을 뿐이다) 아,어이하여
말이 없으시오?
낙랑3
그러면 이 몸도 태자님과 같이 돌이 되겠소.
그래서 태자님의 곁에 앉아 낮이면 감싸 도는 구름 이불 함께덥고
밤이 오면 반짝이는 별의 빛을 같이 받아 말없는 산과 같이 천만년 살터이오.
(태자가 앉은 바위 아래 도사리고 앉는다)
(아랫입술을 깨물며)아,야속하여라.태자님만 뵈오면 다정히 맞으시어
이름이라도 불러주실줄알고 십수년의 긴 세월을 하루같이 헤매이었는데(흐느낀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