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부산,담배장사
부산에서의 피난생활이 시작된다.
부산에는 먼저 피난온 큰아버님댁이 있다.
부평동 근처, 한 적산가옥을 빌려 살고 있다.
이 가옥에는 여러가구가 함께 살고 있었고
우리도 이집의 방 하나를 빌렸다.
뒷 산에는 판자촌이 꽉 들어 차 있었는데 이 곳이 피난민 촌이다.
근처에는 국제시장이 있고 광복동 남포동이 있으며
바닷가로 자갈치 시장이 있다.
지금은 자갈치 시장이 큰 건물로 되여있는데, 당시에는
바다가에 큰 광장을 만들어 좌판에 생선을 팔고 ,
맨 바닷가에는 판자로 식탁을 쭉 차려놓고 백반을 팔고 있었다.
그때 사먹은 식사가 지금까지 먹어본 식사중 가장 맛 있었다고 생각된다.
후일 부산에 근무할때 그때 추억으로 자갈치 시장을 찾곤 했는데
그때의 맛은 아닌것 같았다.
큰집에는 형이 둘 있었다.
그 형들과 광복동,남포동에서 놀곤 했는데
형들은 담배 장사를 하고 있었다.
접어서 들고 다니게 만든 좌판에 담배를 진열하고
일대에 밀집 되여 있는 다방을 다니면서 담배를 파는 것이다.
카멜,아까다먀,팔말,말보로(?) 지금은 기억이 잘 안나지만
양담배의 종류가 상당히 많았다.
나도 같이 하라고 형이 담배통을 만들어 주었다.
담배 행상이 되였다.
처음에 들고 나가니 잘 팔리지가 않는다.
형들은 기차게 잘 팔고 매상이 나보다 몇배나 된다.
담배장사의 노하우를 배운다.
다방에 가서 담배통을 열고 "담배 사세요" 하면
대게는 고개를 젓거나." 안사" 하고 외면한다. 다음 손님에게로 간다.
안산다고 신경질을 낸다. 또 다음 손님에게로 간다.
이렇게 하니 담배가 팔릴리가 없다.
노하우는 간단하다. 눌러 붙는 것이다. 안산다고 해도 사라고 조른다.
욕을 해도 팔아 달라고 조른다.
어차피 담배는 피우는 사람이라서 대개는 사 준다. 매상이 오른다.
장사가 별것 아니다. 재미가 있다.
돈을 버니 돈을 쓸수가 있다. 그 맛있는 자갈치 시장의 백반도
사 먹을 수가 있다. 점심때만 기다려 진다.
그런데 장사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가 않다.
동네 깡패들에게 돈을 뺐기기도 하고, 얻어 터지기도 한다.
또 그당시에는 구루마에 프리즘을 만들어 돈 내고
만화 같은 것을 보는 것이 있었다.
그 재미도 좋다. 돈이 있으니 보게 된다.
길 거리의 거렁뱅이가 별거 아니다. 나의 꼴이 그렇다.
이 모습을 아버지가 보게 된다.어차피 가족을 만나려면
부산에 있으면 안된다. 나를 학교도 못 보내고 있는데
꼴이 말이 아니다. 부산을 떠날 계획을 세운다. <계속>
첫댓글 껌팔이가 아니고 담배팔이를 했다고?
담배 팔아 남는 돈으로 자갈치 시장에서 백반을 사먹는 재미?
영화에나 나오는 장면인거 같다.
몇년전에 가 봤더니 백반자판은 안뵈구 지글지글 낙동강 꼼쟁이구이는 몇군데 남아 있읍데다. 그렇케 좋아하던 "고래괴기" 장사나 카바이뜨 구루마두 다 없어졌읍디다. 추억(?), 좋아하시네 올씨다. 길에 그렇케많튼 멍기, 해삼구루마는 워떡하구----.
우리는 대구로 피난 갔는데 나 역시 담배좌판을 메고 양담배를 팔았던 기억이 생각나는구나. 어려운 시절이었던 것 같다.
부산 피난민 시절 나는 남부민 국민학교를 다녔다. 자갈치시장이 남부민동에 있고 학교가 바로 자갈치시장에 바로 붙어있었다. 그렇게 보면 피난때 명홍이 하고는 같은 곳에 살았었구나.
부평동이믄 족보에있는 부자촌에 살앗구나. 우린 영도 피난민수용소, 용두산 판자촌 출씬인데 왜 부평동 모르겠냐? 국민학교1,2학년을 한해에 띄는 발군에 실력은 어릴때나타난 수재썽이었으믄 좋았을텐데 그게아니라--, 교실은 미군들주고 바닷가에나가 지나가는 배들쳐다보는 자갈밭수업에서 바로 그월반(?)의 기적을 낳았다. 영도국민 & 덕수분교출씬, 덕분에 44년생 딱지는 대광6년동안 거머리처럼 붙어다녔꾸 중학교입학시험땐 50meter뛰는 수모를, 남들(43, 42생 형들이)100meter 뛸때 말이여,,,
멍구야 나도 영도 피난민 출신 그래도너는 높은 용두산에 살고 나는 그밑에 대청동 에 살았지
나도 1.4 후퇴때 되어서야 부산으로 피난갔었다.
동네이름은 모르지만 언덕길이 있는 한국 고아원입구근처 였다.
학교는 서울 사대부속 소학교 분실(용두산 산속)이 잠시다니다
일본으로 피난갔었다. 그때 정식 피난민은 아마 우리가 처음(?)
이었던 같았다. 대판항구에 신문기자들이 우리를 향해 후렛시를
터트리고 있었다.(약 3시간 대기/입국 비자때문에)
너는 참으로 고생 많이 했었구나......
난 이적지 수보긴 일본서 낳은 Made in Japan인줄 알앗더니 피난때 너무 쎄게 퉤서 일본꺼정 퉤 간 경우구나. 무슨 왕족에 집안이든가 왜정때부터 대물림해온 재벌집 손잔줄 알앗지.
수복이는 전주 이씨 아녀? 전주 이씨면 왕족 집안 일텐데...
정인아 ! 나는 그저 흔해빠진(ㅋㅋㅋ) 전주있가아니다.
"한산 이씨"다.(이백/목은, 이토정)의 21대손이다.
손이 아주 귀해 서울에서 택씨를타도 같은 한산이씨이면
택시요금을 안받드라. 이 곤구가 우리 아버지뻘이다.
이 곤구의 소식이 궁굼하다.
왕족은 아니지만 이씨태조를 친구로대하고
왕이라고 부르지않고 "자네"라고 호칭한걸로안다.
곤구하구 대학국가고시 같은방에서 시험봤는데, 효자동께어딘가 도상이든가에, 갸하구 윤삼이하구 멍구는 연,서,고대루 갈라졌구, 곤구는 그후 소식두 모르고 50년이,
부산 피난 출신들이 많구나 나는 동신국민학교 다니다 4학년때 서울로 왔는데.부산 친구들 이곳에서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 당시 나는 "고래고기" 소금 찍어 먹던 그 맛의 추억 잊을 수가 없어서 오래전에 먹어 보았는데,,,,,,,옛 맛이,최고.그리고 명홍이 머리가 남보다 크다고 생각 했는데 너의 글을 보며서 알게 되었다. 그 많은 추억들을 쌓아 둘려면 창고가 커야 한다는 진리????? 감탄할 뿐이다 계속 추억의 좋은 글 부탁한다
나도 부산 보수동 산에있는 남일국민학교 다녔는데 김치명이가 같이다녔다고 이야기 해서 놀랬지 어떡게 기억하는지
나는 피난촌에 잠시 있다가 제주도로 토깠지,
명홍아! 가난 만한 교육은 없다고 하더라.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에 학교생활 성실이 하고
대기업 임원으로 일할수 있었겠지. 뿌린대로 거두니까.
영도에서 아버지와 함께 자갈치 시장에 리어카를 끌구 가서 생선 대가리며 내장 같은 생선 쓰레기를 반 드럼통에 담아 와서
가성소다( 양잿물)를 넣어 끓이면 냄새가 삼삼하게 나는데 거기에 소금을 뿌리면 위에 글리세린이 떠서 그걸 헌병에 담아 손발이 터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채로 걸러내어 식히면 바닷물에도 세탁이 가능한 물비누가 되어 아침 마다 세숫대를 들고 오는 아주머니들 한테 한삽씩 떠드리던 생각이 남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구제와 봉사 정신은 아무리 애써도 못 따라가고 그냥 반만큼 이라도 따랐으면 하는 마음이 자갈치 시장 이야기 속에서 나오네요. 감사합니다.
무허가 chemical lab.을 운영하셨구나. 요새같았으면 KBS특보깜이구 1950년대에 그냥 치약이나 구리무공장으루 계속하셨어두 세광화학으루 발전하실뻔 했었구나.
맞아, 그뿐 아니구 그당시 도민증 이나 사진을 비안맞게 보관할수 있는 Purse가 없는 때라 세르로이드 판을 사다가 나무판에 각을 짜서 맞추고 뽀죡한 공구를 만들어 부치고 그어서 접을수 있게 한 다음 신나를 발라서 붙이면 비가 새지 않는 Purse 가 되어 시장에 내다 팔구 또 접착제를 만들어 헌 활명수 병에 넣어 팔기도 해서 먹구 사는데는 그리 부족함 없이 살은 기억이 지금도 난다. 공기중에 떠 다니는 질소를 잡아다 파는 사업을 한다구 해서 어머니는 정신 나간 사람이라구 맨날 야단을 쳤는데 국민 학교 때 아버지가 원소 주기율표를 틈만 나면 써보이고 플레밍의 우수, 좌수 법칙을 그때 배웠는데 그땐 무슨 말인가 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