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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초의 일곱, 지혜의 용의 첫 일곱 대숨결들이 차례로 그들의 회전하는 신성한 숨결에서 불의 회오리바람을 만든다 (a).
(a) 아마도 이것이 모든 스탠저 중에서 설명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그 언어는 동양의 우화와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한 구절에 완전히 정통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확실히 물을 것이다: “오컬티스트들은 이 모든 ‘건설자들,’ ‘리피카’ 그리고 ‘빛의 아들들’을 실체로 믿는가, 아니면 그들은 단지 상상의 산물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명확하게 주어진다: “인격화된 힘들이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마땅히 고려한 후, 만약 우리가 육체 인류 속에 영적인 인류의 존재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런 실체들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빛의 아들들과 미지의 전체(UNKNOWN ALL)의 최초 현현한 광선의 “마인드에서 태어난 아들들”이 바로 영적 인간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마다 특별히 창조된 혼—“아담” 이후,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이런 신선한 혼의 공급—이라는 비철학적 도그마를 믿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오컬트 가르침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적당한 곳에서 설명될 것이다. 그러면 이 스탠저의 오컬트 의미가 무엇인지 보자.
씨크릿 독트린에서는 신성하고 온전하게 의식을 지닌 신이 되기 위하여—심지어 최고의 신이 되기 위해서도—태초의 영적인 대지성(INTELLIGENCES)은 인간 단계를 지나가야만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지상의 인류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에 거주하는 인간들, 즉 이제 4라운드 네 번째 근원인종의 중간 지점을 지나갔기에, 지금 우리가 도달한 물질과 영 사이에 적절한 균형에 도달한 “지성들”을 말하는 것이다. 각각의 실체는 자기 경험을 통하여 신성하게 되는 권리를 스스로 얻어야만 한다. 독일의 위대한 사상가 헤겔은 무의식자(Unconscious)가 “명확한 자의식을 성취하려는 희망에서,” 즉 인간(MAN)이 되기 위하여, 우주를 진화시켰다고 말할 때, 이 진리를 직관적으로 알았거나 감지하였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것이 브라흐마가 “창조하려는 욕망으로 꾸준히 움직였다”고 푸라나에서 보통 나오는 구절의 비밀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다음 격언에 숨겨진 카발라적 의미를 설명해준다: “대숨결(Breath)이 돌이 된다; 돌은 식물이 된다; 식물은 동물이 된다; 동물은 인간이 된다; 인간은 영이 된다; 영은 신이 된다.” 마인드에서 태어난 아들들, 리쉬들, 건설자들 등등—그 형태와 형상이 어떻건 간에—은 다른 세계와 이전 만반타라에서 모두 인간이었다.
이 주제는 너무 신비한 것이므로 그 모든 세부 사항과 관계를 설명하기가 가장 어렵다; 왜냐하면 그 속에 진화상의 창조에 대한 전체 신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푸라나에 나오는 한 두 문장을 읽어보면 카발라와 시편 (civ.) 구절에 있는 유사한 구절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준다. 즉 카발라와 시편에서 신에 대하여 말할 때, 신이 바람을 메신저로 삼고 그의 “사역자를 활활 타오르는 불로 삼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의 가르침에서는 그것은 비유적으로 사용된다. “불의 바람”은, 마치 쇠줄 밥이 자석을 따라 가듯이, “창조적 힘들”의 지시하는 생각을 자성석으로 따라가기만 하는 눈부신 백열광을 발하는 우주 먼지이다. 그러나 이 우주 먼지는 그 이상의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는 그 속에 자의식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처럼, 그 자체로 그리고 자체를 위한 하나의 우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원자이자 천사이다.
이런 연결관계에서 근대 진화론학파의 권위자들 중 한 사람인 A. R. 왈라스 씨는 육체적 인간의 발전에서 “자연도태”를 유일한 인자로 보는 것의 부적절성을 논의할 때, 여기서 논의된 전체 요점을 실질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인류의 진화는 더 높은 지성체들에 의해서 안내되고 심화되며, 그들의 작용은 대자연의 계획에서 필요한 인자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한번 이런 지성적 실체들의 활동이 어느 한 곳에서 인정되면, 그것을 확장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추론일 뿐이다. 어떤 명확한 선을 그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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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들은 그를 의지의 메신저로 만든다 (a). 드지유가 포하트로 된다; 신성한 아들들의 날쌘 아들, 그들의 아들들이 리피카이며[1] 순환하는 심부름을 수행한다. 그는 말이고, 생각이 기수이다 (즉, 그는 그들을 지시하는 생각에 영향받는다). 그는 번개처럼 불의 구름 (우주 안개)을 뚫고 지나간다 (b); 세 걸음, 다섯 걸음, 일곱 걸음을 걸어서, 위로 7개 영역과 아래로 7개 영역 (존재하게 될 세계)을 지나간다. 그는 목소리 높여서, 무수한 불꽃들 (원자들)을 불러서 결합시킨다 (c).
(a) 여기서 “원초의 일곱”이 그들의 바한 (탈것 혹은 그것을 지시하는 힘(Power)의 상징으로 되는 현현된 주체)으로 포하트를 사용하고, 결과적으로, 포하트를 “그들 의지의 메신저”—불의 회오리바람—로 부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드지유(Dzyu)가 포하트로 된다”ㅡ이 표현 자체가 그것을 보여준다. 드지유는 하나의 실재적 (마법의) 지식 혹은 오컬트 지혜이다; 그것은 영원한 진리와 원시의(primal) 원인을 다루며 올바른 방향으로 적용될 때 거의 전능하게 된다. 그것의 정반대는 드지유-미(Dzyu-mi)로, 근대과학처럼 환영과 허상들을 다루는 것이다. 이 경우에 드지유는 디야니-붓다들의 집합적인 지혜의 표현이다.
(b) 독자가 디야니-붓다들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먼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동양학자들에 따르면, “천상의” 붓다들인 다섯 디야니가 있으며, 인간 붓다들은 형태와 물질계에서 그들의 현현이다. 하지만 비의적으로, 디야니-붓다들은 일곱이 있고, 지금까지 다섯 만이 현현하였으며,[2] 두 분의 디야니-붓다는 앞으로 제6 그리고 7근원인종에서 나타날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 지구에 나타나는 붓다들의 영원한 원형들이고, 그들 각각은 특정의 신성한 원형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아미타바는 고타마 석가모니의 디야니-붓다이며, 이 위대한 혼이 쯔온-카-파 속에서 그랬듯이 지상에 화신할 때마다 그를 통해서 현현한다.[3] 일곱 디야니-붓다의 통합으로써 아발로키테스바라가 최초의 붓다 (로고스)이듯이, 아미타바는 고타마의 내면의 “신(God)”으로, 중국에서는 아미타-붓다로 부른다. 리스 데이비스가 올바르게 말하듯이, 디야니 붓다들은 지상의 모든 유한한 붓다—해방된 마누쉬 붓다들은 이번 라운드에 지구를 다스리기 위하여 임명된다—의 “이런 저하시키는 물질적 삶의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운, 신비 세계에 있는 영광스러운 붓다들”이다. 그들은 “선정불”이며, 모두가 아누파다카 (어버이가 없는), 즉 신성한 에센스에서 스스로 태어난 분들이다. 모든 디야니-붓다은 마누쉬 (인간) 붓다 사후에 인간 붓다의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 마찬가지의 천상의 아들—디야니-보디삿트바—을 자신으로부터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대중적 가르침은 다음의 사실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즉 “붓다의 영(Spirit of Buddha)”—동양학자들이 다섯의 디야니-붓다들을 창조하였다고 하는 분—이 그림자를 드리운 하나에 의해서 수행된 최고의 입문 때문에, 지원자가 고위 입문주재자(High Initiator)가 창조한 사실상 보디사트바로 된다.
(c) 포하트는 비의 우주발생론에서 가장 중요한 성격이 아니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이기에 자세하게 설명되어야 한다. 후대 신화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 우주발생론에 나오는 것처럼, 에로스(Eros)는 태초 삼위일체의 세 번째이다: 카오스(Chaos), 가이아(Gaea), 에로스(Eros): 이 셋은 카발라 아인-소프 (왜냐하면 카오스는 공간, [카이노(χαὶνο)], “공(void)”이기 때문이다), 무궁한 전체(Boundless All), 쉐키나와 옛날부터 계신 분, 혹은 성령에 상응한다; 그래서 포하트는 아직 미현현한 우주와 현상적 우주 세계에서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다. 현상의 우주 세계에서, 포하트는 저 오컬트적, 전기적 활력으로, 창조 로고스의 대의지의 영향 아래에서, 모든 형태들을 결합시키고, 시간이 지나서 법칙으로 되는 최초의 충동을 그것들에게 준다. 그러나 미현현한 우주에서, 마치 에로스가 후세에 빛나는 날개를 가진 큐피드 혹은 사랑이 아닌 것처럼, 포하트도 이런 것이 아니다. 우주가 태어나지 않았고, 신들도 여전히 “아버지-어머니”의 가슴 속에서 잠자고 있기 때문에, 포하트는 우주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는 추상적 철학 개념이다. 그는 아직 스스로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잠재적 창조력으로 그의 작용에 의해서 미래 모든 현상의 본체가 말하자면 나누어지지만, 신비적이고 초감각적 활동 속에서 재결합하여, 창조 광선을 발산한다. “신성한 아들(Divine Son)”이 갑자기 나올 때, 그때 포하트는 추진력, 즉 하나(ONE)가 둘(TWO)과 셋(THREE)—현현의 우주계에서—으로 되게 하는 활동력으로 된다. 삼중의 하나(triple One)가 분화해서 다수로 되면, 포하트가 엘리멘탈 원자들을 함께 모아서 그것들을 합치고 조합하는 그런 힘으로 변형된다. 우리는 초기의 그리스 신화에서 이 태고의 가르침의 메아리를 발견한다. 에레보스와 넉스(Nux)는 카오스에서 태어나고, 에로스의 활동 하에서, 다음으로 그들이 각각 아에테르(AEther)와 헤메라(Hemera), 상위 영역의 빛과 하위 영역 혹은 지상계의 빛을 낳는다. 암흑이 빛을 발생한다. 푸라나에서 브라흐마의 “의지” 혹은 창조하려는 욕망을 본다; 산초니아톤이 쓴 페니키아인의 우주발생론에서 욕망(Desire), [포토스(πόθος)]가 창조의 원리라는 가르침을 보라.
포하트는 “하나의 대생명(ONE LIFE)”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미지의 하나(Unknown One), 무한한 전체성(Infinite totality)으로부터, 현현된 하나 혹은 주기적인 만반타라의 신성이 발산하여 나온다; 그리고 이것이 보편 마인드(Universal Mind)이고, 이것이 분수-원(Fountain-Source)과 분리되어, 서구 카발리스트들의 창조 로고스 혹은 데미우르고스(Demiurgos) 그리고 힌두교의 네 개 얼굴의 브라흐마이다. 비의 가르침에서 현현된 신성한 생각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의 전체로 그것은 더 높은 창조적 디얀-초한들의 무리를 나타낸다. 보편 마인드의 진화와 동시에, 아디-붓다(Adi-Buddha)—지고의 영원한 하나—의 숨겨진 지혜가 아발로키테쉬와라 (혹은 현현한 이쉬바라)로써 자신을 현현하고, 이것은 이집트인의 오시리스,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마즈다, 헤르메스 철학자의 천상의 인간, 플라톤 학파의 로고스, 그리고 베단타의 아트만이다.[4] 대우주 속에 있는 이런 무수히 많은 영적인 에너지 센터들로 나타나는 마하트 혹은 현현된 대지혜의 작용으로, 우주적 개념작용이자 그 작용을 수반되는 지성적인 힘인 보편 마인드의 반영이 객관적으로 불교 비의 철학자의 포하트로 된다. 포하트가 아카샤의 일곱 원리들을 따라서 흐르면서 위에서 언급했듯이 현현한 질료 혹은 하나의 대원소(One Element)에 작용하고, 그리고 그것을 다양한 에너지의 센터들 속으로 분화시킴으로써, 우주 진화의 법칙을 시작하게 만들며, 이것이 보편 마인드의 개념작용에 따라서 현현된 태양계에 있는 모든 다양한 존재의 상태들을 존재하게 한다.
이런 다양한 에너지 센터들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태양계는 이 센터들 속에 있는 모든 다른 것처럼 일곱 원리로 구성된다. 이것이 히말라야 너머 비의학파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모든 철학은 이 원리를 나누는 나름대로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포하트는 현현계나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의인화된 전기적 활력, 모든 우주 에너지를 묶는 초월적 통일성으로, 그것의 작용—광대한 규모로—은 외견상 주관적인 것이 외견상 객관적인 것에 작용해서 그것을 활동하도록 몰아붙이는 그런 현상들 속에서, 의지로 창조된 살아있는 힘의 작용과 닮았다. 포하트는 그 힘의 살아있는 상징이자 수용기일뿐만 아니라, 오컬티스트들이 그것을 하나의 실체로 보고 있다—그가 영향을 주는 힘은 우주 차원, 인간 차원, 그리고 지상 차원이고, 모든 계 각각에 그들의 영향을 미친다. 지상계에서, 포하트 영향은 자성적인 사람이나 사물의 강력한 욕망으로 발생된 자기력과 활동력 속에서 느껴진다. 우주계에서, 그것은 사물들—행성 체계부터 개똥벌레와 단순한 데이지에 이르기까지—을 형성하는 데 그 특별한 사물의 계발과 성장에 관하여 신성한 생각(Divine Thought) 속에 있는 혹은 자연의 마인드 속에 있는 계획을 실행하는 건설적인 힘 속에 실재한다. 형이상학적으로, 포하트는 신들의 객관화된 생각이다; 더 낮은 단계에서, 그는 “육화된 말씀”이고, 우주적 그리고 인간적 개념작용의 메신저이다: 보편 대생명 속에 있는 활동력이다. 이차적인 측면에서 볼 때, 포하트는 태양 에너지(Solar Energy), 전기적 활력 유액(vital fluid)이고,[5] 보존하는 네 번째 원리이며, 대자연의 동물 혼으로, 말하자면 전기이다. 인도에서, 포하트는 (최초) 신의 초기 성격에서 비쉬누 그리고 수리야와 연결된다; 왜냐하면 리그 베다에서 비쉬누가 높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쉬누 이름은 “스며들다(pervade)”라는 뜻의 어근 vish에서 왔으며, 포하트가 “충만자(Pervader)”와 제조자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가 천연 그대로의 물질에서 온 원자들을 만들기 때문이다.[6] 리그 베다의 신성한 구절에서, 비쉬누는 또한 “태양 에너지의 현현”이며, 그가 우주의 일곱 영역을 세 걸음으로 지나간다고 묘사되고 있다. 베다의 신은 후세의 비쉬누와 거의 공통점이 없다. 그러므로 둘이 이 특별한 특징에서 동일하며, 하나가 다른 것의 복사판이다.
“셋과 일곱 걸음”은 지구의 일곱 영역뿐만 아니라 비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인간이 거주하는 일곱 구체를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칭 동양학자들이 빈번한 이의를 제기하지만, 우리 행성 체인의 일곱 세계 혹은 구체들이 힌두교 대중의 성전에서 뚜렷하게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숫자들이 다른 우주발생론에 있는 비슷한 숫자들 그리고 그것의 상징과 얼마나 신기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고대 종교의 학생들이 한 비교와 병행해서 볼 수 있다. 리그 베다에서 “비쉬누의 세 걸음”으로 “우주의 일곱 영역”을 지나간다는 것이 여러 주석가들에 의해서 우주적으로, “불, 번개와 태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그리고 지구, 대기와 하늘의 의미로; 또한 (비쉬누의 화신) 난쟁이의 “세 걸음”이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더 철학적으로—그리고 매우 정확하게 천문학적 의미에서—태양의 다양한 위치, 즉, 일출, 정오, 일몰로 아우르나바바가 설명한다. 비의 철학만이 그것을 분명히 설명하며, 조하르는 그것을 매우 철학적으로 그리고 포괄적으로 규정하였다. 거기에서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설명되었다: 처음에 엘로힘 혹은 엘힘(Elhim)은 에코드(Echod), “하나(one)”로 불렸고, 혹은 “신이 많은 것 속의 하나”로, 범신론적 개념에서 매우 단순한 개념이다 (물론 철학적 의미에서). 그리고 변화가 생겼다. 즉 “여호와는 엘로힘이다,” 이렇게 다양성을 통일시켜서, 일신교로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이제 “어떻게 여호와가 엘로힘인가?”라는 질문이 나온다. 그 대답은 아래로부터 “세 걸음으로”이다.
그 의미가 분명하다.[7] 그것들은 모두 상징들이고, 상호적으로 그리고 상관 관계적으로 영, 혼 그리고 체 (인간)를 상징한다; 즉, 원이 영, 세계의 혼 그리고 그것의 체 (지구)로 변형된 것을 나타낸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무한의 원(Circle of Infinity)에서 나오면서, 아인-소프 (파라브라흠, 배화교의 제로아나 아케르네, 혹은 다른 곳에서 “불가지자”에 해당하는 카발라 동의어)는 “하나(One)”—에코드(Echod), 에카(Eka), 아후(Ahu)—로 된다. 그리고 그는 (혹은 그것은) 진화에 의해서 많은 것 속의 하나(One in many), 즉 디야니-붓다 혹은 엘로힘 혹은 암샤스펜드로 변형되며, 그의 세 번째 걸음이 “인간” 혹은 육체의 발생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혹은 야-호바(Jah-Hova), “남성 여성”으로부터, 내면의 신성한 실체가 형이상학 계에서 또 다시 엘로힘이 된다.
이런 카발라의 개념은 태고 시대의 비의 가르침과 동일하다. 이 비의 가르침은 모두의 공동 재산이며, 다섯 번째 아리안 인종 것도 아니고, 그에 속한 수많은 아인종들 것도 아니다. 그것을 우랄 알타이족, 이집트인, 중국인, 칼데아인들이나 다섯 번째 근원인종의 일곱 아인종 누구도 자신들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실제로 그것은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근원인종에 속하고, 우리는 그들의 자손들을 다섯 번째 근원인종 씨앗, 가장 초기 아리안들 속에서 발견한다. 원(Circle)은 모든 나라에서 미지자(Unknown)—“무궁한 공간(Boundless Space),” 언제나 영원히 실재하는 추상성의 추상적인 옷—인식 불가한 신성(Incognizable Deity)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영원 속에 있는 무한한 시간을 나타낸다. 제로아나 아케르네도 “미지의 시간의 무궁한 원”이며, 그 원에서 찬란한 빛—보편 태양, 오르마즈드(Ormazd)[8]—이 나오고 오르마즈드는 아이올리안 형태, 원의 형태로 크로노스(Kronos)와 동일하다. 왜냐하면 원은 사르(Sar), 그리고 사로스(Saros) 혹은 주기이고, 바빌로니아의 신으로 그 신의 원형의 수평선이 볼 수 없는 것의 가시적인 상징이었다. 반면에 태양은 하나의 원(One Circle)으로 그것에서 우주의 구체들이 나왔으며, 그리고 그가 그것들의 지도자로 간주되었다. 제로-아나(Zero-ana)는 “차크라” 혹은 비쉬누의 원이며, 어느 신비가 정의에 따르면, 그것은 신비스러운 상징으로 “어떤 부분에 관하여, 심지어 그것의 가능한 가장 작은 부분도, 곡선이 어느 한 쪽으로 길게 연장하게 된다면, 그것이 계속 나아갈 것이고 결국에는 자체로 다시 들어가서 하나의 똑같은 곡선—우리가 원이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하는 그런 성질의 곡선이다.” 신에 대한 명확한 성질이자 자연스러운 상징에 대하여 더 나은 정의를 제시할 수가 없다. 즉, 신의 원주(둘레)는 모든 곳에 있고 (무궁하고), 그러므로 그 중심점도 또한 모든 곳에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우주 모든 지점에 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신은 또한 디얀 초한, 혹은 리쉬, 원초의 일곱 그리고 그것들의 통합적인 단위 없이 아홉 그리고 그것을 포함하면 열이다; 거기에서 그것(IT)이 인간 속으로 들어간다. 스탠저 IV 주석 (4)로 되돌아가면, 히말라야 너머에서 차크라는 그 안에 (삼각형, 첫 번째 선, 입방체, 두 번째 선, 중심에 점이 있는 별 그리고 다른 변형들)이 그려져 있지만, 엘로힘의 카발라 원은 단어 (알힘 혹은 엘로힘)의 글자들을 숫자로 읽을 때, 그 유명한 13514, 혹은 숫자 위치를 바꾸면 31415를 나타내는지 이해할 것이다—이것이 천문학의 파이(π)이고, 디야니-붓다, 게베르(Gebers), 게보림(Geborim), 카베이리(Kabeiri) 그리고 엘로힘에 대한 숨겨진 의미이며, 모두가 “거대한 인간,” “타이탄,” “천상의 인간” 그리고 지상에서 “거인”을 나타낸다.
일곱(7)은 모든 국가에서 성스러운 숫자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유대인만큼 그것을 더 생리적으로 물질적인 용도로 적용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7은 탁월하게 생식의 숫자였고, 9는 남성 원인의 수였으며, 카발리스트들이 보여준 것처럼, 오쯔(otz) 혹은 —“에덴 동산의 나무,”[9] 제4 근원인종의 “이중의 자웅동체 막대”—를 형성한다. 반면에 힌두인과 아리안들에게 일반적으로 그 의미는 여러 가지이며, 거의 순전히 형이상학적 그리고 천문학적 진리와 관계가 있다.[10] 그들의 리쉬들과 신들, 악마들과 영웅들은 역사적 윤리적 의미를 가지며, 아리안들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했던 것처럼, 결코 그들 종교를 순전히 생리학적 상징에 토대를 두지 않았다. 힌두교 대중 성전에서 이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런 설명들이 블라인드라는 것은 그것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고, 서로 다른 구조가 거의 모든 푸라나와 서사시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비의적으로 읽으면, 그것들 모두 같은 의미를 줄 것이다. 이렇게 한 가지 설명이 그 수가 역시 일곱인 지하 세계들을 배제한 일곱 세계를 열거한다; 이 14개의 상위계와 하위계는 칠중 체인의 분류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순전히 정묘한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다. 다른 곳에서도 이 세계들을 볼 것이다. 마치 그것들이 체인에 속하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현재는 충분하다. “또 다른 열거법은 일곱 세계를 땅, 하늘, 천국, 중간계, 탄생 장소, 축복의 저택, 그리고 진리의 거처로 부른다; 그리고 ‘브라흐마 아들들’을 여섯 번째 구분에 놓고, 다섯 번째 세계인 자나-로카를 거대한 화재에서 파괴된 동물들이 다시 태어나는 곳이라고 말한다.” (힌두 고전 사전 참조) 어떤 진정한 비의 가르침이 “상징론”에서 주어진다. 그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그 숨겨진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추가 예정
[1] 건설자, 행성영 그리고 리피카 사이의 차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 (본 주석 5, 6번 참고)
[2] A.P. 씨넷트의 “에소테릭 붓디즘,” 171-173 참조.
[3] “노랑모자,” 갤룩파를 창립한 최초이자 가장 위대한 개혁가. 그는 기원후 1355년에 암도에서 태어났으며, 고타마 붓다의 천상의 이름, 아미타바의 아바타이다.
[4] 수바 로우 씨는 그것을 로고스와 동일하게 봐서 로고스(Logos)라고 부르는 것처럼 보인다. (“신지학자”에 발표된 “바가바드 기타”에 관한 네 강연 참조.)
[5] 1882년에 신지학회 회장인 올콧트 대령이 그의 강연 하나에서 전기는 물질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오컬트 가르침이다. 유럽의 과학은 전기의 진정한 성질에 대하여 거의 모르기 때문에, “힘,” “에너지”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의 더 좋은 이름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에테르가 원자로부터 몇 겹 떨어져 있지만, 원자처럼 물질인만큼, 전기도 물질이다. 어떤 사물이 과학적으로 잴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물질로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 같다. 전기의 분자들이 지각과 실험될 수도 없다는 의미로서 전기는 “비물질적”이다; 하지만, 그것은—그리고 오컬티즘에서는 그렇다고 말한다—원자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물질이다. 그러나 심지어 전기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비과학적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일단 전기가 과학에서 에너지의 근원, 단순히 에너지, 그리고 어떤 힘이라고 불리어지면, 물질을 말하지 않은 채, 생각할 수 있는 그 에너지, 혹은 그 힘은 어디에 있는가? 수학자이며 전기와 그 현상에 대해서 대권위자인 맥스웰은 여러 해 전에, 전기는 단순히 운동이 아니라, 물질이라고 말했다. “만약 우리가 원소적 질료들이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전기가, 음전기뿐만 아니라 양전기가, 뚜렷한 원자적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이것들이 전기의 원자들처럼 움직인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헬륨홀츠, 페러데이 강의, 1881). 한걸음 더 나아가, 전기는 질료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카르마의 법칙에 따라서 우리 세계를 다스리고 안내하는 무수히 많은 실체들의 하나, 즉,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닌, 어떤 실체로부터의 발산이라고 주장한다. (S.D, 1권 3부 16장 참조)
[6] 진동하는 금속 판 위에 모래가 놓이면, 일련의 규칙적인 다양한 모양의 곡선 형태를 띤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과학이 이러한 사실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7] “아이시스 언베일드”에서 보여준 대로, 숫자 3, 5, 7은 추론적인 프리메이슨에서 두드러진다. 어느 메이슨이 다음과 같이 썼다: “원의 걸음을 보여주는, 3보, 5보, 7보가 있다. 3, 3; 5, 3; 7, 3의 세 가지 면 등등. 때로는 그것이 이런 형태로 온다—즉, 753/2=376.5 그리고 7635/2=3817.5 그리고 입방체 측정을 위한 20612/6561 피트의 비율이 이집트 대피라미드의 측정치를 준다” 등등. 3, 5, 7은 신비한 숫자들이고, 7과 3은 조로아스터교도와 프리메이슨에서 대단히 소중히 여겼던 숫자들이다. 삼각형은 모든 곳에서 신의 상징이다. (메이슨 백과사전과 올리버가 지은 “피타고라스 삼각형” 참조.) 당연한 일이지만, 예를 들면 카셀 같은 신학 학자들은 조하르가 기독교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지지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기독교 삼위일체는 오히려 고대 오컬티즘과 상징학에서, 이교도 삼각형( )에서 그 기원을 가졌다. 세 걸음은 형이상학적으로 영이 물질 속으로 하강하는 것을 말하며, 즉 로고스가 하나의 광선으로써 영 속으로, 그리고 혼 속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육체 형태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 속에서 그것은 생명(Life)이 된다.
[8] 오르마즈드는 “로고스”이며, “최초 태어난 자”이고, “태양”이다.
[9] 이것은 “지성소(Holy of Holies)”의 상징이었으며, 성의 분리인 3과 4였다. 거의 모든 히브리어 22글자는 단순한 남근 상징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두 개 글자 중 하나, 아인(ayin)은 음의 여성 글자로, 상징적으로 눈(eye)다; 다른 남성 글자 짜(tza)는 물고기-바늘 또는 화살을 나타낸다.
[10] 아직 출간되지 않았지만 카발라와 조하르를 아리안들의 비의 가르침과 대조한 한 카발리스트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명확하고 짧고 간결하며 정확한 히브리식 표현 방식이 아장아장 걷는 아기처럼 지향점 없이 단어를 열거하는 힌두식 표현 양식 보다는 훨씬 낫다. 시편 작가가 댓구법으로, ‘나의 입은 나의 혀를 가지고 말하지만, 나는 당신의 숫자들을 모릅니다’ (시편 71편 15절)라고 말한 것처럼 ... 힌두 (상형) 문자에는 부수적인 측면을 크게 혼합해서 그것의 불충분함으로 (거짓말하는) 그리스인들이 가졌던, 그리고 프리메이슨이 가진, 똑같은 빌려온 공들인 옷을 보여준다: 한편 유대인의 거친 단음절의 (겉보기에) 결핍 속에서, 다른 어떤 언어보다 훨씬 더 먼 고대로부터 전해져 왔으며, 어떤 다른 것보다 오래된 기원에 더 가깝거나 혹은 근원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전적으로 틀린 것이다. 우리의 박식한 형제이자 통신원이 힌두교 종교체계를 그들의 샤스트라스와 푸라나로, 아마도 후자로 그리고 동양학자들에 의해서 모두 알아보지 못하게 왜곡한 근대 번역판으로 겉보기에 판단한다. 만약 비교점을 만들려면, 그들의 철학 체계에, 그들의 비의적 가르침에 의존해야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모세 오경과 심지어 신약성서의 상징조차도 똑같은 근원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꾸푸의 피라미나가 피아지 스미스 교수에 의해서 그것의 모든 치수들이 솔로몬이 지었다고 주장하는 신화상의 사원에서 반복되는 것이 발견되는데, 이것이 모세경보다 후대가 아닌가? 그래서 만약 주장한 것처럼 그런 어떤 유사성이 있다면, 그것은 이집트인들이 아닌, 유대인들의 독창성 없는 모방에 기인한 것이 틀림없다. 유대인의 상형문자—그리고 심지어 그들의 언어, 히브리어도—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집트인한테서 차용한 것이며, 모세가 그의 지혜를 그들로부터 얻었다; 옛 페니키아인의 부모는 아니지만 아마 친척인, 콥트인으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조상이라는 힉소스인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조세프스가 그의 저서 “아피온에 반대하며” 1권 25페이지에서 보여준다. 그렇다; 그러나 힉소스 유목민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누구 이집트인들인가? 역사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역사 학자 개개인의 각자 의식에서 추론하고 이론화한다. (아이시스 언베일드, 2권, 430~438페이지 참조) “카미즘(Khamism) 혹은 고대 콥트인은 서아시아에서 왔고, 셈족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렇게 아리안들과 셈족들의 원초적 같은 조상이라는 증거이다” 라고 분센이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에서의 거대한 사건을 기원전 9,000년으로 본다. 사실은 태고의 비의 가르침과 아리안 사상에서 우리는 웅대한 철학을 발견하지만, 반면에 히브리 기록에서는 남근 숭배와 성적인 신통기를 신격화하는 가장 놀라운 창의력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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