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교회 김치현 목사님 빌립보서 강해
7. 부활의 능력을 알고자 하여
(빌립보서 3장 9~16)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베드로가 본 부활 바울이 본 부활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하였다.
고린도전서 15장 5-6절에는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셔서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기에게도 보이셨다며 바울은 베드로가 부활은 본 것과 같이 보았다고 하였다.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전한 복음의 요체다.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빼면 기독교가 성립이 안될 정도로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것을 여러 사람이 보았다고 하는데 성경에서 예수의 부활을 보았다고 말한 사람이 많지만 그것이 다 같지 않다. 베드로는 무덤을 찾아가서 무덤이 열린 것을 보았고 도마는 예수님의 옆구리와 손의 못자국을 보고 부활을 알게 되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생선을 구워놓고 식사를 같이 했다. 그런 제자들과 같이 바울은 자기에도 보이셨다고 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바울이 부활을 경험했다고 한 때는 예수께서 승천한지 5년이 지난 후에 일어난 일이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의 일이다. 오늘날에는 삼일만 지나도 장례가 끝나서 다시 볼 수 없고 옛날에는 하루를 넘기지 않고 무덤에 넣었는데 5년이 지났으면 모든 상황이 종료된 때였는데 그때도 예수의 부활을 보았다면, 그런 방식이라면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바울이 본 방식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다.
베드로처럼 열린 무덤을 볼 수 없고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생선을 구워먹었다고 할 수 없지만 바울이 보았다는 예수의 부활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누구라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도 부활의 경험을 가능케 한 것이다. 바울이 “나도 보았다.”고 한다면 우리도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베드로의 경험도 있어야 하고 열두 제자들의 경험도 있어야 하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바울의 경험한 부활은 모든 사람이 경험하고, 참여하고, 증거할 수 있는 부활이다.
복음서들은 부활을 말했지만 부활이 어떤 상태인지를 복음서를 읽어보고 정확하게 감을 잡기 어렵다.
누가복음에는 두 제자가 낙담하고 엠마오로 가는 중에 어떤 사람이 동행하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을 자세히 풀어주고 가려는 것을 제자들이 같이 머물기를 청하여 제자들과 함께 머물게 되었는데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인 줄 알아보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였다. 누가복음을 보아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떤 모양인지 알기 어렵다.
요한복음에는 무덤에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동산지기인 줄 착각했다가 알아보게 되자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라고 하셨다고 하였다. 성경의 증언만으로는 이분이 어떤 분인지, 어떤 형체인지 부활하신 예수님의 형태를 감을 잡을 수 없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도 보았다고 사라졌다고 했고, 알아보았는데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고 했다. 어떤 제자는 의심하니까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고 하셨다고 하였다. 어떤 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해야 될지 어려운 문제다. 부활의 문제는 2천 년 전에 일어난 일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한 문제라기보다 오늘날 우리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부활을 말할 때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사실이냐 아니냐 하고 따지려고 하면 성경으로는 알 수 없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는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어떻게 경험할 것인가, 어떻게 그를 다시 만날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관심이 되면 성경의 부활을 이해하기 쉽다.
예수의 부활을 물리적으로, 열두 제자들처럼 우리의 맨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영적인 눈으로 부활의 실재를 경험하는 축복의 관문이 될 수 있다. 이천 년 전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직접 만났으니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오히려 그 실재는 우리만큼 몰랐을 수도 있다. 눈으로 본 것이 너무 생생하면 그가 누구인지 알기 어려운데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의 실재가 무엇인지 더 깊이 알게 되고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다.
죽음과 부활에 대한 재고
성경의 언어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객관적 과학적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체험된 것을 고백하는 언어이다. 그런 관점에서 죽음과 부활이라는 문제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죽는다는 말은 여러가지 관점에서 쓰였다. 창세기 2장에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거기서 정녕 죽는다고 하신 것이 무엇인가? 3장에서 선악과를 먹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모든 생물체가 겪는 자연현상으로써의 죽음, 육체의 죽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2장에서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그 죽음의 결과는 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하나님과의 단절인 것이다. 그 후로 아담은 수백 년을 더 살고 죽었는데 그 죽음을 가리켜 “정녕 죽으리라.” 하신 것이 아니다.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선악과를 먹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생노병사의 길을 가게 되어 있다. 선악과를 먹지 않은 생명체들과 선악과를 모르는 식물조차도 생명은 유한하다. 다른 개체를 통해서, 후손을 통해서 생명을 이어가게 되어 있다. 육신의 생명의 유한함을 두고 “정녕 죽으리라.” 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죽음이라 하였다(고전15:26). 우리를 괴롭게 하는 원수는 사망인데 이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관계의 끊어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이 저주인지 축복인지는 다른 문제다. 성경에서 “정녕 죽으리라.”,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 한 죽음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다.
에베소서 4장 18-19절에는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어서 감각없는 자가 되었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 그래서 감각없는 자가 된 것, 이것이 죽음이다. 생명이 끝나면 감각이 없게 된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꿈인지 생시인지 알려면 꼬집어보듯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났는지 아닌지를 알려면 감각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일에 아무 감각이 없다면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근심에 대해서 아무런 근심이 없다면 죽은 것이다. 이것이 죽음이라고 안다면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었다고 하신 것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것을 말씀한 것이라고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부활은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는 것이다. 죽음이 생물학적으로 심장이 멎거나 뇌가 멎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멈춘 것이라면 부활은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에 대해서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처음 이 목사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이라는 제목 자체만으로도 설레었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 말을 했다. 나는 가슴이 설레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을 말했는데 냉랭하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식이었다.
한번은 무신론자를 만나서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궁금하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전혀 궁금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사느냐고 물으니까 등산을 하면서 높은 곳에 오르면 쾌감을 느끼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즐겁고 재미있는 일을 해도 즐겁지 않느냐면서 꼭 이유가 있어서 사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세상은 천차만별이다. 내가 살아있는데 다른 사람은 전혀 감각이 없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기뻐서 날뛰는데 나는 무감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에 대해서인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다.
바울은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롬6:10)라고 하였다. 부활을 말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 있는 것이 부활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몸이 죽었다가 어떻게 사는지 모르지만 바울이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라고 말한 것이 부활이라면 누구라도 부활에 참여하고 경험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많은 밀알들이 되고 밀밭이 되는 것, 한 알의 밀의 죽음을 통해서 많은 밀알이 나오는 것, 이것이 부활이다. 같은 밀이지만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져서, 자신에 죽고 해체되어서 나온 것이 부활이다.
구약의 절기 중에 3대 절기가 유월절과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이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한 구원의 날을 기념하는 절기다. 그 날에 양고기와 쓴나물과 누룩없는 떡을 먹고 애굽으로부터 나온 것을 기념한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유월절 전날에 제자들과 함께 성찬을 하셨고 그날 밤에 잡혀서 유월절 제물로 죽으셨다고 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구약의 절기인 유월절에 겹쳐서 이해하도록 했다.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이 지나서 보리를 추수하는 절기다. 기독교에서는 맥추절이라고 하는데 그날이 오순절이다. 사도행전에는 교회의 탄생을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고 교회가 탄생했다고 하여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50일이 지나 교회가 탄생한 것을 오순절에 겹쳐서 이해하도록 배열했다.
바울은 ‘유월절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라 했는데 유월절이 우리 구원의 성질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것을 밭떼기로 추수하는 날이 오순절이 되는 셈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밭으로 추수하는 것과 같다.
오순절 교회라 해서 특별히 어떤 운동을 하는 교회라는 말이 아니라 교회의 성질이 오순절이라는 말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그 밀이 밭이 되어 추수하는 것, 이것이 교회다.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를 어린양 고기와 누룩없는 떡과 쓴나물을 단체로 추수해서 매일 잔치하고 누리는 곳이 교회다. 어린양을 서로 나누면서 즐거워하고 서로 쓴나물 먹은 이야기를 하면서 잔치를 하고 누룩없는 떡을 먹으면서 그것을 즐거워하는 이상한 잔치가 유월절이고 오순절이다.
자세히 보면 지금 우리 교회에서 하는 일들이 그런 일이다. 우리는 순모임에서 직장에서 승진했다거나 자녀가 잘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하려면 돈을 내고 자랑해야 한다. 오히려 쓴나물을 먹은 이야기, 누룩이 빠져나간 이야기, 그리고 어린양으로서 죽임당한 이야기들이 우리를 배부르게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이고 단체적인 부활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성질이 오늘 우리에게서 살아나서 그를 먹고 마시고 누리고 잔치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왜 성찬을 안하느냐고 묻는데 우리는 진짜 성찬을 하고 있다. 순모임 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피와 살을 나누면서, 서로의 생명을 나누면서 교제를 하고 있다. 이것이 부활의 잔치고 부활생명의 누림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교회가 탄생하고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있고, 교회가 있으면 그분의 부활이 증거되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이천 년 전에 예수의 몸이 어떻게 살아났다는 말은 안하지만 죽임당한 것이 어떻게 살림 받는가 하는 것을 날마다 이야기하면서 교제를 하고 있다. 우리는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라고 하였다.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한다.
거듭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거듭남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다시 살아났다는 말과 부활했다는 말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고 하고 우리는 거듭났다고 하면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거듭났다는 말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다. 거듭났다고 하면 사람들은 행위에 치중해서 생활이 바뀌었다든지 흉악범이 개과천선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본질은 다시 살아난 것이고 바울의 말대로 하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 거듭났다고 하고 다시 살아났다고 하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는 말의 실재는 부활이다. 그러므로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고 하기 전에 우리가 부활을 살고, 부활을 누리고, 부활을 간증하고 있다고 알아야 할 문제다. 다른 생명으로 사는 것, 다른 이유로 사는 것, 이것이 부활이다.
전에는 나를 보존하고 지키고, 내 이름을 내고,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는 본성의 욕구를 가지고 사는 삶이었다면 이제는 내 속에 다른 이유가 있어서, 내가 사는 것보다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낫기 때문에, 나는 죽고 그가 사는데 이것이 내 인생의 최대의 축복이기 때문에 사는 삶이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극대화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내 몸에서 확장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부분에서도 다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거창하게 ‘되었느냐 안되었느냐?’ 할 필요없이 우리에게는 부분적으로는 다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자리가 다 있다. 그 향기를 맡을 줄 알아서 그 향기를 말하다 보면 우리가 어디에 가도 향기나는 사람이고 누구에겐가는 우리가 빛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살고 있었지만 바울은 자기 속에서 더 확대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존귀케 된다는 말은 확대된다는 뜻이다. 내 속에서 극대화 되어서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어떤 일, 어떤 문제에서든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은 다른 생명으로, 다른 이유로, 내 생명의 가장 깊은 동기와 이유가 다른 데서 시작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옛 사람은 죽고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 죽고 다시 사심같이 우리의 옛사람은 죽고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이 부활 생명을 사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죽었다가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사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이 표현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우리를 표현하고 싶어 한다. 내가 나의 욕구와 본성, 나의 갈망을 표현하고 싶어 하니까 하나님이 갇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흙이라는 것을 깨닫고 철저한 하나님의 제한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해방되어 나온다.
부활은 내가 죽어 무덤 속에 들어갔다가 내가 다시 기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 거기서, 나의 육체 안에서 하나님이 해방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부활이다. 이것이 부활이라면 우리는 누구에게나 부활을 증거하고, 부활을 믿게 하고, 부활을 소망하게 할 수 있다.
썩을 육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부활이고 바울이 말한 부활이다.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알고 싶다고 하였다. ‘안다(그노시스)’는 말은 이야기를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깨달아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남자와 여자가 육체적으로 상관하는 것을 관용적으로 ‘안다’고 말했다. “내가 어떤 자매를 알았다.”고 잘못 말하면 안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학교에서 배워서 안다는 말이 아니라 깨달아 알고, 체험해서 알고, 나로서 알고,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갖듯이, 결혼해서 알듯이 안다는 뜻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알고 싶어 했다.
들은 것으로는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었다. 부활을 제자들에게 들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알았다. 그가 예수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 싶다고 한 것은 예수께서 부활한 상태가 어떤 것인지 체험하고 싶다고 한 것이다. 바울이 경험하고 알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 베드로가 보았고 열두 제자가 보았고 그 후에 많은 형제들이 보았고 바울도 본 그 부활이 무엇인가?
이것을 설명하면서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2-45)라고 하였다. 이렇게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속에 썩을 것을 경험하고 욕된 것, 약한 것을 경험하는데 그 속에서 다른 것이 살아난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어떤 형제의 부끄러움 속에 부끄러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작고하신 김용달 형님이 토론토 집회에서 간증을 하면서 지난 날의 부끄러움을 다 내놓으셨다. ‘저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다 내놓으셔서 듣는 형제들이 ‘어떻게 저렇게 적나라하게 까발릴 수 있나!’ 했는데 목사님이 화답을 하시면서 “용달 형제가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자리를 떠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짊어지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저런 말을 하겠는가. 전혀 그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지나간 이야기를 부끄러움 없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때 우리는 ‘아, 그것이 부활이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전혀 다른 자리에서 자기의 부끄러움을 내놓는데 듣는 사람에게는 이미 그 사람이 다른 세계에 있다는 것이 보여진 것이다. 다른 세계를 설명하지 않아도 그렇게 알아지는 것이다.
이현래 목사님이 처음 대구 CCC에 오셨을 때 이전 간사가 브리핑을 하듯이 상황을 설명해 주면서 “대구 CCC 사정은 어떻고, 어떤 사람은 어떻고…….” 하면서 정치적인 역학구조나 문제를 소상히 말해주는 것을 들으면서 무슨 말인지 다 알겠는데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말로 들렸다고 하셨다. 그때 고린도전서 2장의 말씀이 깨달아지면서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알지만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졌다고 하셨다.
다른 세계에 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마음으로 하는지 다 알지만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자리에 있는 것, 이것이 세계가 바뀐 경험이고 이것이 부활생명을 가지고 사는 삶이다.
부활이라는 말이 생물학적인 개념으로 국한되어 있어서 “맞느냐 틀리느냐, 사실이냐 아니냐?” 하고 있지만 죽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식하듯이 부활도 관계라고 생각하면 우리의 거듭남은 세계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세계가 바뀔 때 이전에 살던 세계에서 중요했고 문제 되었던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계가 바뀌니까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다른 생명으로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삶을 부활생명을 산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수요집회에서 류시형 형님이 간증을 했는데 남을 등쳐먹고 남의 것을 가지고 살던 사람인데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는 성경 말씀을 몰라도 내 손으로 수고해서 남의 필요까지 채우려고 하고, 누구에게도 누가 되지 않으려고 하고 형제들을 섬기고 사는데 ‘떠돌이 생활을 하고 교도소 생활을 하다가 내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내 집에 오는 모든 형제들을 섬기며 살겠다.’ 이런 마음이 나와서 살게 되었다고 하셨다.
대전교회의 박은주 자매님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의식이 돌아오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말밖에 안나왔다고 하셨다. 평소에는 모르지만 이 자리에 가니까 마치 꽃몽우리가 터지듯이, 씨에서 싹이 터져 나오듯이 다른 것이 터져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그런 경험은 다른 교회에도 다 있다고 하실 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생명이라야 가능한 일임을 알기에 우리는 다르게 보는 것이다.
내가 알던 어느 목사님 사모는 50대에 암으로 죽었는데 일생을 헌신적으로 남편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했는데 왜 그런 일이 자기에게 닥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칩니까. 내가 뭔가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찾아갔다. 그 사모의 “대구교회에서는 이런 경우에 어떤 말씀을 하며 어떻게 합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무엇을 잘하고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누구라도 그런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꼭 무엇을 잘하고 못해서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을 해롭게 하고 산 사람,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산 사람들은 속에 쌓인 것이 없어서 암도 잘 안걸립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도 못해서 착하게 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암에 잘 걸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으로 산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알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가니까 형제들에게서 다 감사가 나옵니다. 충만한 형제든 교회에서 한번도 간증을 안하던 형제든 그 자리에 가니까 ‘인생이 감사합니다. 내가 산 것이 감사합니다.’라는 말밖에 안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찬송이 되는 것, 이것이 승리가 아닙니까.” 이것은 새 생명으로 살 때 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활생명, 다른 생명을 주셔서 이 삶을 살게 하신다.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하였다.
이것이 부활한 사람의 양면적 형태다. 답답한 일을 당하는데 낙심하지 않는 그 사람이 나타나고 박해를 받는데 버린 바 되지 않는 그 사람이 우리에게서 드러난다. 이렇게 죽음의 고난과 부활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죽음은 있는데 왜 부활은 말하지 않느냐고 할 것이 아니다. 죽음이 확실하면 그 안에 부활이 함께 있다. 낙심하고 답답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죽음을 짊어지고 사는 그 사람에게서 부활생명을 보게 되는 것이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고 한 것처럼 똑같은 자리에서 사망이 드러나는데 어떤 사람은 거기서 생명을 보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신 자리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준 자리다. 그것을 보고 백부장은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 가장 명백하게 보게 된 것이다. 죽음과 부활은 3일간의 시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인격 안에서 보면 죽음과 부활은 한 실체의 양면이다.
선악과를 먹은 것도 물리적으로 생각하면 어느 정도 시차가 있는 것 같다. 선악과를 보니까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고 그래서 따먹은 것 같다. 좋게 보인 것과 먹은 것 사이에는 어느 정도 시차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인격적으로 보면 좋아 보이면 이미 내 속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죽음과 부활도 예수의 죽음 안에서 내가 발견되었는데 그 사람 안에서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 보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부활이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죽음을 표방하고 예수의 죽음 안에 동일시 된 사람이 바로 부활을 사는 사람이다.
이 사람으로 살 때 이름 없는 사람 같지만 유명한 사람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이런 수많은 간증들이 우리에게서 나오게 된다.
지성소는 네 겹의 휘장으로 덮여 있어서 비바람과 빛과 먼지 같은 외부의 모든 것이 차단된 곳이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거기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덮개로 덮여진 그곳으로 죽음을 가지고 들어가면 세상에서 아프고 괴롭고 즐겁던 모든 것들이 차단되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안에서 보여지는 것으로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반응하는 사람으로 살게 된다. 전에 무엇 때문에 괴롭고 누구 때문에 괴롭다 하는 것들이 우리에게서 잠잠해지고 다른 것으로 즐거워하고 근심하게 된다. 이 사람이 부활 안에 있는 사람이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부활 안에 있는 그 사람, 이 사람이 바울의 푯대였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하였다.
이 한 목표, 이 한 가지 일이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만큼 분명한 푯대가 되니까 바울은 예수의 고난과 죽으심까지 본받고 싶어 한 것이다. 본받는다는 말을 행위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본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를 인생의 원형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저것이 원래 나구나.’라고 알고 산다는 것이다.
정말 좋은 것, 탁월한 것을 만나면 다른 사람이 고통스럽다 하는 것까지도 고통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 요한계시록 21장에는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신다. 하나님과 연합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고 하였다.
전에 나는 이것이 주님이 다시 오시면 일어날 먼 미래의 일로 알았는데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가 탁월해지면 살고 죽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고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 비천과 존귀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픔이나 울부짖음이나 고통이 더 이상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다른 이유로 사는 사람이 될 때다. 다른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될 때 ‘이것 때문에 괴롭다.’고 하는 것이 떠난다.
푯대가 분명한 사람이 되면 고통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고통스럽기로는 차려 놓은 밥을 먹기도 힘든 사람이 있다. 그런데 부모는 자식을 위해 밥을 차리면서 더 많은 일을 해도 수고롭지 않고 즐겁게 할 수 있다. 쉽고 어려운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얼마나 밝히 보이고 분명하게 보이느냐의 문제다. 이것만 밝히 보이면 다른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는 일이다.
그러나 푯대가 없으면 이래도 괴롭고 저래도 괴롭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히고 침례되어서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고 확대된다면 얼마나 설레는 푯대이고 축복인가!
우리에게서 다른 모든 것이 문제되지 않을 만큼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에 귀한 목표로 제시되어서 그가 아니면 사는 이유가 없는 사람이 된다면 그가 나의 생명이 되어 그분 때문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사람이 된다.
사람의 원형, 사람의 목표 사람의 완성은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16절에는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하였다. 우리가 달음질해서 현재 이른 자리는 모두 다르다. 조금 맛보았을 수도 있고 풍성히 맛보아서 내 인생이 뒤집어졌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이른 곳은 다 다르지만 각자대로 행하면 된다는 말을 한 것이다.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다 다르지만 우리는 한 목표 안에 살고 있고 그리스도를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은 일반이다. 우리만큼 한 목표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있겠는가. 우리는 일생 예수의 죽으심 외에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 분 안에서 한 양식을 먹고 살았다. 우리가 이른 곳은 다 다를지라도 한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부활의 누림, 이 부활이 우리에게서 확대되고 극대화되어서 나의 전 존재가 예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살게 되기를 원한다.
[ 기 도 ]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열두 제자처럼 예수의 부활을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바울이 내게도 보이셨다고 한 것처럼 그렇게 경험할 수 있게 하시고 그렇게 경험한 우리 삶을 부활의 증거, 부활의 증인으로서 나타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주님이 살아계심을 간증하는 사람으로, 새 생명을 사는 사람으로 세상 앞에 다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나타내어 다시는 눈물이 없고 근심이 없고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 없는 새로운 세계 안에 모든 사람을 불러들일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부활의 증인으로서, 그 삶의 증거물로서 부르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