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영화평 - 렛미인(Let me in)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손 스웨덴
인간이란 짐승과 초인 사이에 걸쳐놓은 하나의 줄이다.
- 심연(深淵)위에 걸쳐놓은 하나의 줄이다.
그 위를 뛰어넘는 것은 위험하며, 그 위를 지나가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며, 떨며 멈추어 있는 것도
위험하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2살의 오스칼은 순박한 12세 소년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유독 그를 괴롭히는 또래 아이들이 있다.
집단 괴롭힘과 폭력의 나날이다. 저항할 힘도 저항할 의지
마저도 없이 폭력의 정당함만이 있다.
하얀 눈밭을 타고 소녀 이엘리가 이웃으로 이사 온다.
흡혈귀인 그녀에게는 그녀를 사랑하는 중년의 남자가
있다. 호칸이라는 인물은 영화에서 이엘리의 나이가
최소한 얼마인지를 알게 해주는 역할이다.
그는 이엘리를 위해 사람을 죽여서 그 피를 뽑은 후
이엘리에게 제공하는 역할이다. 헌신적인..... 연쇄살인...
생존을 위한 폭력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엘리와 오스칼은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로서
마주하는 것이다.
생존을 행한 이유 있는 폭력과 살인...설원위의 시뻘건 피....
단지 밉다는 이유로 당하는 오스칼의 피도 흰 눈 위에선
선혈이 낭자하다.
이 영화의 원제는 Let the Right one In 이다. “올바른 사람과 함께
하게 해줘〃 혹은 “옳은 사람이 될거야” 등으로 번역 가능하다.
영화번역자는 렛미인(Let me in)으로 제목을 수정해버렸다.
“함께하자” “동참하게 해줘” 등으로 번역되는데......
뱀파이어를 옳은 인간으로 설정하는 제목이 싫었나보다.
그러나 원제목을 우리말로 번역했을 때 소위 반전(反轉)의 묘미가
살아난다는 걸 놓쳤다. 나 개인적으로는 아쉽다.
이 영화는 과연 옳은 자는 누구인가를 끝까지 묻게 만든다.
이엘리는 오스칼과의 우정과 사랑 속에서 그가 당하는 집단폭력을
보고 용기를 주고 대항할 수 있게 해준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대한 도전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는 설원의 스케이트장에서
위대한(?) 폭력을 행사하며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심연위의
줄에 올라탄다. 응징의 폭력이 펼쳐진 얼어붙은 강-스케이트장.
그리고 발견되는 처참한 시신.... 호칸이 이엘리를 위해 죽인
시신.... 살인과 폭력이 마치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건 감독이 보여주는 카메라앵글의 놀라움이기도 하다.
이제 오스칼의 정당한 복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경찰의 추적으로 호칸은 붙잡히고 이엘리의 위기가
온다.
인간은 언어로 소통을 한다. 언어가 없다면 인류의 문명도 없다고
단언하며 인간과 동물의 차이라고까지 학자들은 말한다.
독일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언어를 통해 존재가 소통한다..... 그러나 한번 뒤집어보면
과연 우리는 소통할까?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가식과 거짓을
덮어쓰고 있는지 아는가.... 웃고 떠들고 웃으며 사실 한 순간도
소통하지 않는다. 다만 친분을 위한 돈벌이를 위한 도구로 변해
있을 뿐..... 입으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여자나 다른 남자를
향하는 눈길..... 맘으로 온갖 상상과 욕망에 시달리면서
난 순수하고 욕망도 없고 성욕도 없어 라고 말하는 이중성......
언어는 상대를 속이고 현혹해서 이용하고자하는 도구로 전락한지가
수만 년은 되었을 거다.
속이지 않는 언어는 뭔가? 몸으로 하는 언어다.
그런 점에서 동물과 식물의 몸언어야말로 가식 없는 말이다.
오스칼과 리엘리는 이웃으로서 벽을 사이에 두고 손가락으로 벽을
두드리며 의사소통을 한다. 안부를 묻고 위기를 전해주는 동물들의
간단한 몇 가지 언어들처럼 그들에겐 복잡한 언어는 필요없다.
인간의 위대함이란 그가 하나의 다리이지 결코 어떤
목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의 사랑스러움은 그가
하나의 이행(移行)이요, 또한 몰락(沒落)이라는 점이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이엘리의 신분을 숨기기위해 호칸은 염산을 얼굴에 붇고
손가락에 부어 자신의 신분을 숨긴다. 얼굴에 뼈가 들어날
정도의 고통을 감수하며 이엘리를 숨겨주려는 호칸.
굶주림에 살인을 거듭하던 이엘리는 정신이 돌아온 호칸을
찾아온다. 그리고 그 둘은 눈빛만으로 수십 년 세월을 같이
해왔으며 호칸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보여준다.
자신의 피를 송두리째 바치며 호칸은 이엘리를 향한
사랑의 정점을 찍는다.
고층의 창문 밖에 박쥐처럼 붙어있는 이엘리에게 창문을 열어
피를 다주고 1층으로 추락하는 장면.... 이엘리의 눈물....
겉으로 들어나는 소녀와 50대 늙은이의 이상한 언밸런스는
그 늙은이의 눈빛연기에서 사랑이란 뭔가를 물어보게 한다.
이엘리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혼자 남은 오스칼은 폭력에 복수했던 그 동료가 이번에 그의
형을 복수를 위해 데려오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집단폭력을 행사하던 한 무리는 죄책감 없이 또 다른 권력을
빌어 자기권위를 지키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집단폭력의 자기소통과 그것에 방치되는 한 개인.....
이건 비단 오스칼의 문제만은 아니리라.....
10대 후반인 새로운 권력은 칼로서 생명을 위협하며
오스칼을 수영장 물속에서 못나오게 한다.
수영중 익사한 것으로 만들려는 속셈이다. 집단 폭력에 동조했던
또 그 권력을 복수심에 불렀던 초기폭력의 주범조차 살인이라는
상황에 어쩔줄 몰라한다......
목숨이 임박한 순간 수영장 물위로 피가 난무하며
찢어진 팔다리가 춤을 추며 허공을 나른다.....
마치 도축장의 소나 돼지의 사지가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수영장 밖에 나온 오스칼은 찢어진 시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집단폭력의 졸개(구경꾼으로서만 행동)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뒤로하고 이엘리와의 행복한 조우(遭遇)를 한다.
마지막 장면은 기차.... 나무로 만든 짐을 발 앞에 둔 오스칼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들긴다. “괜찮니? ”
답으로 두들기는 한번... “응 괜찮아”
언어를 버리고 오스칼과 이엘리는 눈과 손으로 소통을 한다.
진정한 소통에는 오히려 언어가 장애가 되고 방해가 되는 건
아닌가?
어떻게 느끼는가는 영화를 보는 당신의 몫이다.
그런데 문득 몇 십년 후 오스칼도 호칸과 같은 운명은 되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해본다. 여전히 어린 소녀 이엘리, 이미
늙어 중년이나 노년이 된 오스칼..............
사랑의 강물은 어디로 흘러갈까?
누군가는 말한다.
진실하다고 ....매사에 진실하다고....
그러면서 사람의 감정을 희롱한다.
자신에게 빠지게 하고는 너 혼자 일방적으로 좋아한 거지
난 그냥 예의를 갖추었을 뿐이라며 ......
상처받는 여자들 남자들......
언어는 항상 속임수이다. 그리고 정치가들이 쓰면 더 놀라운
사기극이 벌어진다.....
그냥 손가락으로 소통하고, 모스 부호로 대화하고, 눈빛으로
말하고 싶다. 그렇게 꿈꾼다. 부질없지만....
이 영화를 인터넷으로 다운받아 본 게 벌써 2달째이다.
오늘 문득 회상하며 평을 써본다.
인간의 언어 사랑에 회의를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붙들고 가야하는 광대 같은 인생이기에....
그래도 즐겁고 행복해지고 , 사랑하고 싶기에
그거야말로 Let the Right one In 이 아닐까?
그래서 오늘도 난 소년처럼 사랑을 꿈꾼다.
이엘리처럼 영원한 절망의 소년을 꿈꾼다.
니이체의 짜라투스트라의 한 구절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착하고 올바른 사람을 보라!
그들은 누구를 가장 증오하는가?
그들이 가장 증오하는 자는 그들의 가치목록을 찢어버리는 자,
파괴자, 범죄자이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창조자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2009년 4월 23일 목요일 自由 ... 紫霞仙人 遊於世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