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모든 근심을 초월한 내면의 빛을 응시하는 것으로도 집중 상태에 이를 수 있다.
고대의 요기들은 배와 목 사이에 영적인 의식 센터가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그것을 '가슴의 연꽃'이라고 불렀는데, 깊은 명상 속에서 그 의식 센터를 각성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의식 센터는 밝게 빛나는 연꽃 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의식 센터가 각성되면 초월적인 평화와 기쁨이 솟아나기 때문에, ‘모든 근심을 초월한 내면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요가의 스승들은 이 영적인 의식 센터에 마음을 모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누이 강조해 왔다. 카이발랴-우파니샤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자는 들어가리라. 홀로 떨어져, 깨끗한 자리에서 머리와 목과 등이 일직선이 되도록 곧은 자세로 앉아라. 그리고 모든 감각 기관을 제어하라. 그런 다음 그대의 스승에게 깊은 헌신의 절을 올리고 가슴의 연꽃 속으로 들어가, 순수하고 무한하고 희열이 넘치는 브라흐만의 현존現存을 명상하라."
찬도가-우파니샤드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몸은 브라흐만의 도성都城이다. 몸에는 가슴이 있으며, 가슴속에 밝게 빛나 는 연꽃 모양의 작은 집이 있다. 그 집안에 찾고 구하고 실현해야 할 그 무엇이 거한다. 이 작은 집, 즉 가슴의 연꽃 속에 거하는 자는 누구인가? 무엇을 찾고 구하고 실현해야 할까? 밖에 있는 우주가 아무리 크다 해도 모든 것이 다 가슴의 연꽃 속에 있다. 가슴의 연꽃 속에는 하늘과 땅과 해와 달 그리고 밤하늘에 반짝이는 모든 별이 다 들어 있다. 거대한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미세한 우주 속에도 들어 있는 것이다. 브라흐만의 도성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있다. 심지어는 욕망들까지도 그 안에 있다. 그러면 그것들은 늙거나 죽어서 육 체가 해체된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가슴의 연꽃은 육체가 늙어도 시들지 않는다. 몸이 죽어도 죽지 않는다. 브라흐만이 찬란한 영광 중에 가슴의 연꽃 속에 거한다. 가슴의 연꽃은 육체의 일부분이 아니다. 가슴의 연꽃 속에 거하는 브라흐만은 인간의 행위, 나이, 죽음, 슬픔, 배고픔, 목마름 등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영원한 자유자이다. 그는 옳은 것만을 바라고, 그의 소원은 (인간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성취된다."
문다카-우파니샤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바큇살이 축에서 만나는 것처럼 모든 신경이 만나는 가슴의 연꽃 속에 거한다. 옴OM인 그에 대해 명상하는 자는 어둠의 바다를 쉽게 건널 수 있으리라. 찬란하게 빛나는 가슴의 연꽃 속에 욕망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나누어질 수도 없는 브라흐만이 거한다. 그는 순수하다. 그는 모든 빛의 빛이다. 그를 아는 자들만이 그에게 도달한다."
가슴의 연꽃에 집중하는 명상은 큰 효과가 있다. 그것은 영적인 의식의 상상력을 우리가 투쟁하고 있는 상대인 육체의 한 부분에 모으는 훈련이기 때문이다. 육체를 바쁘고 소란한 도시이며, 이 바쁘고 소란한 도시 한 가운데에 우리의 진정한 본성인 아트만[主人空]이 거하는 작은 사원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작은 사원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 바로 이 명상이다. 밖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지, 우리는 언제라도 이 사원 안으로 들어가 예배할 수가 있다. 이 사원의 문은 항상 열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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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깨달은 영혼에 대해 명상하는 것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붓다, 그리스도, 라마크리슈나 같은 성자들의 마음 상태를 헤아려, 그들의 심정을 느껴 보라는 말이다. 그들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감각의 대상에 흔들리지 않는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마음이 고요해질 것이다. 브라흐만을 깨달은 성자들의 가슴이 지금 그대의 몸 속에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심정으로 느껴 보는 훈련은 큰 도움이 된다. 이런 식의 수행은 힌두 교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하는 훈련이다. 수행자들은 가슴만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성자들의 손이나 발 또는 그의 몸 전체에 대해 이런 훈련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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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꿈속에서 경험한 일이나 깊은 잠 속에서 경험한 것에 대해 명상을 해도 마음이 고요해진다.
여기서 파탄잘리가 말하고 있는 '꿈속에서 경험한 일'이란 깨달은 성자나 신성한 상징을 꿈속에서 본 것을 가리킨다. 그런 계시적인 꿈은 기쁨을 가져다주고, 깨어난 후에도 그 기쁨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의 영적인 문헌들 속에는 수행자가 꿈속에서 거룩한 스승으로부터 만트람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들은 꿈속에서 받은 만트람을 깨어 있는 동안에 스승으로부터 받는 만트람과 똑같이 신성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평생을 그 만트람을 외고 명상하는데 바친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잠에서 깨어난 후 꿈도 없는 깊은 잠에서 경험했던 평화로운 행복감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다. 베단타 철학에 의하면 아트만[主人空] 위에 세 겹의 껍질이 씌워져 있다고 한다. 밖에 있는 껍질은 거친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라는 덮개이다. 그 밑에는 물질의 내적 본질을 구성하는 힘이 하나의 껍질을 구성하고 있고, 그 밑으로 최고 심층부에는 카르마의 껍질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인격과 삶의 양태를 결정하는 인과因果의 껍질이 있다. 인과의 껍질은 다른 말로 에고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 자신 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는 동시에 우주의 삼라만상을 각각 독립된 실체로 보게 하는 힘이 바로 인과의 껍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단타 철학은 말하기를, 꿈도 없는 깊은 잠의 상태에서는 밖에 있는 두 겹의 껍질이 벗겨지고 에고의식인 인과의 껍질만이 남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꿈도 없는 깊은 잠 속에서 는 일상적인 의식 상태보다는 상대적으로 아트만[主人空]에 더 가까운 것이다. 물론 무지의 근원이 되는 인과의 껍질은 밖의 두 껍질 보다 훨씬 더 단단하다. 깊은 잠이나 죽음도 이 껍질을 벗겨 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껍질 은 벗겨지고 인과의 껍질만 남아 있는 꿈도 없는 깊은 잠 속으로 아트만[主人空]의 평화가 어렴풋이 비쳐 들어오는 것이다. 그 어렴풋한 빛은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꿈도 없는 잠 속의 기억을 되살려 그 빛의 근원으로 들어가는 노력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꿈도 없는 잠 속에서 경험한 어렴풋한 평화의 빛은 온전한 깨달음의 전조前兆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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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자기 마음에 끌리는 신적인 형상이나 상징에 집중하는 훈련으로도 마음 의 고요를 얻을 수 있다.
파탄잘리 철학의 가장 큰 매력은 보편성, 즉 넓은 수용성에 있다. 그는 어떤 특정한 종파의 수행법을 강요하지 않는다. 신[主人空]은 우리들 내면에 있다. 비록 우리의 무지로 인해 희미해져 있기는 해도, 우리들 내면에서는 신[主人空]의 빛이 비쳐 나오고 있다. 우리는 우리들 나름대로 그 빛의 형상을 규정하고, 그에 걸맞는 상징을 채택할 수가 있다. 그렇게 규정되고 채택된 형상이나 상징이나 개념은, 진실한 신심信心이 있는 한 거룩한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 보기엔 유치하고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형상이나 상징에 대한 우리의 자세이다. 무엇이 됐든지 순수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예배한다면 다 신성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종교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독선과 완고함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종교 행위를 인정할 수 있어 야 한다. 그대는 물론 그대가 선택한 길만 가야 한다. 1-32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러 개의 길을 다 가 보려고 하다가는 '눈요기'를 하는데 힘을 다 써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깊은 헌신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여러 사원을 순례해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깊은 헌신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가 선택한 수행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어떤 외적인 수행을 하든지 신[主人空]은 그대의 마음속에서만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궁극적인 실재는 우주 속에 편만하게 깃들이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에서는 그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힌두교의 위대한 성자 까비르는 이런 노래를 불렀다.
"물 속의 고기가 목말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웃었다.
그대는 신[主人空]이 그대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이 숲 저 숲으로 쉬지 않고 방황한다.
진리는 바로 여기 있다!
가라, 가고 싶은 대로 가 보라.
베나레스로, 마투라로,
그러나 그대 영혼 속에서 신[主人空]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세계 전체가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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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요기의 마음은 아주 미세한 것부터 엄청나게 큰 것까지 통제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요기'는 단순한 요가 수행자가 아니라, 마음이 흩어지지 않은 상태로 어느 한 점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이미 얻은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힘은 완전한 자기 통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수행자가 집중하는 훈련을 시작하면 온갖 장애물이 나타난다. 청소를 시작하기 전에는 다락이나 창고에 얼마나 많은 잡동사니와 먼지가 쌓여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모으는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대의 意識下意識 속에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쌓여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수행을 시작하면서 기가 꺾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 들은 생각한다.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런 대로 평안했는데, 이제는 온갖 잡생각들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더러운 생각들로 가득찬 나 자신이 싫어진다. 내 가 이렇게 더러운 인간인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 이러다간 더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지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렇지 않다. 점점 더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청소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잠자고 있던 묵은 때와 먼지가 일어난 것뿐이다. 청소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런대로 평안했다고 하는 것은, 쌓여 있는 쓰레기 더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평안했노라고 상상하는 것일 뿐이지 실제로 평안했던 것은 아니다. 바닥에는 온갖 오물과 진흙이 찌들어 있어도 호수 표면은 잔잔한 것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실제로 평안하려면 잔잔할 뿐만 아니라 바닥까지 맑아야 한다. 피상적인 관찰자에게는 타마스의 성질인 나태함과 사트바의 성질인 평온함이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타마스의 나태함에서 사트바의 평온함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격렬하게 뒤흔드는 라자스의 활동을 통과해야만 한다. 수행에 몸을 던지지 않은 사람들은 수행자의 격렬한 투쟁을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좀 더 쉬 운 길이 있을 텐데, 저 사람 왜 저렇게 어렵게 살려고 하는지 모르겠군. 저 사람에게 지금 저 방법이 잘 안 맞는 것 같애." 그대는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내뱉는 이런 말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아무리 사람들이 비웃더라도, 자신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투쟁의 몸짓을 멈추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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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마치 투명한 보석이 곁에 있는 꽃의 빛깔에 의해 물들듯이, 생각의 흐름이 멈추면 마음은 집중하고 있는 대상과 하나가 된다. 알려지는 대상, 아는 과정, 아는 자[자아의식]에 대한 집중과 하나 됨이 다 가능하다. 이렇게 집중하고 있는 대상과 하나가 된 상태를 삼매라고 한다.
여기에 언급된 집중과 하나 됨의 대상에 대해서는 1-17에 대한 해설에서 자세히 다룬 바가 있다. 요가 상태(파탄잘리가 쓰는 용어로 '삼매')는 외적인 사물에 대한 집중으로부터 점점 더 내적인 힘이나 의식에 대해 집중하는 상태를 향해 단계적으로 성취된다. 따라서 바로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집중하는 대상에 따라 서로 다른 종류의 삼매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마음의 집중력이 생기기 전까지는 어떤 삼매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생각의 흐름은 1-5 항목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커다란 생각의 흐름이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의 흐름들을 삼킨 이후에 라야 멈춰진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파니샤드에는 생각의 흐름을 멈추고 삼매 상태에 들어가기 위한 비교적 단순한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우파니샤드는 어떤 대상이든지 내재하는 神性인 아트 만[主人空]의 나타남으로 여기고 거기에 집중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에 따라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모든 대상을 아트만[主人空]의 나타남으로 여기는 집중 훈련을 한다면, 분명히 대상의 외적인 현상을 초월하여 본질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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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마음이 어떤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대상과 하나 되는 힘이 생겼을 때, 대 상을 가리키는 말[이름]과 그 대상의 형태와 질, 그리고 대상에 대한 앎이 별개로 작용하는 상태는 사비타르카savitarka 삼매[분별심이 있는 삼매]라고 한다.
파탄잘리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 수준에서는 '이름', '형태와 질', '앎을 얻음'이 동시에 일어난다. 예를 들어 책상을 보고 있다고 하자. 책상을 보는 순간 그대에게는 (1) 보고 있는 대상의 이름('책상')에 대한 생각 (2) 보고 있는 대상의 형태와 질(크기, 모양, 색깔, 재질 등등)에 대한 생각 (3) 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앎을 얻는 과정이 혼합되어 동시에 일어난다.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는 훈련을 통해 마음과 책상이 하나 될 수 있지만, 그 처음 단계에서는 아직 '이름'과 '형태와 질'과 '앎'이 따로따로 존재한다. 이 낮은 단계의 삼매를 사비타르카 삼매[分別三昧]라고 한다. '분별심'이라는 뜻의 '사비타르카'는 외적인 현상 세계의 사물을 대상으로 할 경우에만 사용하는 용어다.
s: 파탄잘리는 이제부터 여러 종류의 삼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有想三昧의 종류에 대해 생각해 보자. 1-17에서는 4종류의 有想三昧가 언급되었다. 分別三昧, 超-分別三昧, 觀照三昧, 超-觀照三昧가 바로 그것이다. 이 구절은 그 중에서 '分別三昧'에 대한 설명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소리를 들을 때, 세 가지 현상이 동시에 일어난다. 소리를 듣는 일과(sabda), 그 소리가 가리키는 대상이 무엇인지 이해하고자 하는 일과 (artha), 그 대상에 대해 앎을 얻음(jnana)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나 사비타르카 삼매 즉 분별심이 있는 삼매 상태에서는 세 가지 현상이 분리되어 따로따로 일어나며, 원한다면 그 진행 과정을 멈추게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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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깊은 기억이 깨끗하게 비워져서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름]과 그 대상의 형태와 질에 대한 분별심이 사라지고 앎만이 홀로 빛나는 상태는 니르비타르카nirvitarka 삼매[超-分別三昧]라고 한다.
분별심이 사라진 니르비타르카 삼매는 보다 더 고차원적인 삼매이다. 니르비타르카 삼매에서는 '이름'과 '질'을 구별하는 마음이 사라진 상태에서 집중하고 있는 대상과 하나가 된다. 즉 대상에 대한 반응인 생각의 흐름이 정지하고 대상 그 자체, 칸트가 사용한 용어인 '物 自體'에 대한 앎만이 남는다. 칸트는 오관과 이성을 통해서는 物 自體를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옳은 말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의 감관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대상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는 대상을 받아들이는 우리들 나름의 독특한 방식에 따라 아는 것 말고는 대상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오관이나 이성을 통한 앎 외에는 다른 아는 방식을 일체 인정하지 않았던 칸트로서는 物 自體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파탄잘리는 칸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파탄잘리는 物 自體를 알 수 있는 고차원적이고 초월적인 앎의 방식이 있다고 말하는데, 모든 종교의 실천적인 신비가들은 그의 견해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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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현상의 원인이나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힘과 같이 미묘한 것을 대상으로 집중할 경우에도 두 종류의 삼매 상태에 도달한다. 즉 대상을 관조하는 상태인 사비카라savichara 삼매와 관조함마저도 넘어선 니르비카라nirvichara 삼매에 도달한다.
현상의 본질 내지는 원인을 집중의 대상으로 삼을 때 도달하는 삼매에도 높고 낮은 두 종류가 있다. 사비카라 삼매[觀照三昧]는 관조하는 대상에 대한 '이름'과 '질'과 '앎'이 별개로 존재하는 상태의 삼매이다. 그러나 니르비카라 삼매[超-觀照三昧]에서는 '이름'과 '질'이 사라지고 '앎'만이 홀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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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모든 미묘한 대상에 대한 명상은 만물의 근본 원인인 프라크리티에 가서 끝난다.
앞서 살펴본 파탄잘리의 우주관에 의하면, 프라크리티는 미분화 상태의 질료 즉 모든 현상이 파생되어 나오는 근원이었다. 명상하는 사람의 마음은 거친 물질에서 물질의 미묘한 본질 차원으로, 그리고 미묘한 본질에서 그 본질의 원인인 프라크리티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프라크리티가 궁극적인 실재는 아니다.
프라크리티의 배후에는 브라흐만이 있다. 지금까지 언급된 4종류의 삼매는 현상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브라흐만과 직접 결합하는 궁극적인 삼매를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스리라마크리슈나는 아름다운 비유를 들려주고 있다.
신[主人空]에 대해 명상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제자가 스승에게 왔다. 스승은 제자에게 명상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제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와서, 명상을 시작하면 자꾸 자기가 사랑하는 황소 생각이 나서 명상을 계속 할 수가 없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음, 그러나. 그럼 네가 사랑하는 황소에 대해 명상하거라." 제자는 돌아가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명상 을 시작했다. 정신을 집중하여 오직 황소만을 생각했다. 몇 일이 지난 후 스승이 제자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제자가 대답했다. "선생님, 선생님을 맞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문이 너무 작아서 제 뿔이 걸릴 것 같아요." 이에 스승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놀라운 일이다! 너는 이제 네가 집중하는 대상과 하나가 되었구나. 그럼 이제 신[主人空]에 대해 집중해 보거라. 쉽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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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지금까지 언급한 삼매는 '씨 있는 삼매'[有種三昧]라고 한다.
현상 세계에 대한 완벽한 집중을 통해 삼매에 도달해도 욕망과 집착의 씨는 남아 있을 수 있다. 1-19에서 보았듯이 집착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한 사람이 집중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은 위험하다. 이전보다 더 큰 욕망과 집착의 굴레를 뒤집어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욕망과 집착의 씨는 이처럼 위험하다. 하지만 有種三昧에 도달한 사람은 완전한 자유에 그만큼 가까이 접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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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니르비카라 삼매[超-觀照三昧]에 도달하면 마음이 순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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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이 상태에서는 마음이 진리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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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추론과 경전 연구를 통해 얻는 앎도 앎은 앎이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앎이 있으니, 곧 삼매 상태에서 얻는 (직관적인)앎이 그것이다. 삼매 상태에서 얻는 앎은 추론과 경전의 가르침을 넘어선다.
파탄잘리는 여기서 두 종류의 앎에 대해 언급한다. 첫째는 감각과 이성을 통해 얻는 일반적인 의미의 앎이고, 둘째는 감각과 이성을 통하지 않고 직접 얻는 초의식적인 앎이다. 일반적인 앎은 감각이 받아들인 것을 이성이 해석함으로써 형성된다. 그런데 감각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상은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앎은 제한적인 앎일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앎을 초일상적인 문제에 적용시키려 하면, 그 앎이 얼마나 제한된 것인지가 금방 드러난다.
예를 들어보자. 그대는 신[主人空]의 존재에 대해 말하는 수많은 경전과 글을 읽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으리라. 하지만 신[主人空]의 존재를 인정하는 글을 읽고 그 내용을 믿을 만하다고 여겼다고 해서 신[主人空]을 안 것은 아니다. 그대가 정직하다면, 신[主人空]을 알았다고 천명하는 사람이 그런 글을 썼다고 밖에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무슨 근거로 그들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거기에는 분명히 그대 의 이성의 판단이 있다. 그대는 경전을 기록한 사람들이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며 정직하고 믿을 만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그대가 직접 체험하기까지 임시로 그렇게 믿기로한 잠정적인 믿음일 뿐이다. 이런 믿음은 진정한 앎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단계의 깨달음을 해오解悟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解悟는 지적인 동의일 뿐 깨달음이라고 볼 수 없다. 譯註)
앎은 감각과 이성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모든 경전의 가르침에 대해 영원한 불가지론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다 높은 수준의 초감각적인 앎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직접 체험을 통해 경전의 가르침이 진리임 을 알게 될 것이다. 삼매를 통해 얻는 앎이 바로 이런 앎이다.(이 단계의 깨달음을 증오證悟라 한다. 譯註)
스와미 비베카난다는 이런 말을 했다. "깨달음 또는 실현(realization)이 진정한 종교(real religion)다. 그 나머지 것들은 모두 준비에 지나지 않는다. 설교를 듣고, 경전을 읽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토대를 마련하는 준비 작업일 뿐이다. 그런 것은 종교가 아니다. 머리로 동의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 종교란 지극히 실제적인 것이고, 엄밀히 말해 경험에 의존하는 일종의 과학적인 실험 방식이다. 스스로 체험하기 전까지는 아무 것에도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말라. 그대가 실제 체험한 것만을 받아들여라. 전인미답의 밀림을 탐험하는 사람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찾아 나가라. 파탄잘리나 그 외에 그 누구의 말이라도, 그것은 모두 그대의 탐험을 격려하고 부추기는 말일뿐이다. 그 들의 가르침은 그대의 탐험을 돕는 일반적인 암시와 경고일 뿐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말 그대로 가르침일 뿐, 그 자체가 진리는 아니다. 진리를 확증할 수 있는 것은 그대의 체험뿐이라는 점을 명심하라.
파탄잘리는 1-47에서 니르비카라 삼매에 이르면 마음이 '순수'해진다고 말한다.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잡다한 생각의 흐름들이 정지한 상태가 바로 니르비카라 삼매이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는 마음이 순수해진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상태에 도달해도 집착의 씨는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씨는 활동이 일시 정지된 상태이기 때문에, 다시 활성화되기 전에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 씨가 다시 활성화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미 상당한 영적인 진보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씨가 다시 활성화되는 것보다는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기 가 훨씬 더 쉬운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1-48에서는 니르비카라 삼매에 이르면 '마음이 진리로 채워진다'고 말한다. 니르비카라 삼매 상태에서는 경험을 통해 직접 초감각적인 앎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대가 理想으로 삼고 있는 인물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고 그의 인격에 마음을 집중한다면, 그에 대한 그대의 주관적인 상상과는 다른 객관적인 그의 인격 자체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크리슈나나 그리스도나 라마크리슈나 같은 영적인 스승을 머리 속으로 그리며 명상을 해 나가다 보면, 그들에 대해 상상하던 것이 살아 있는 그들의 객관적인 현존現存 속으로 녹아 들어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들의 현존現存을 체험을 통해 알게 될 때, 그대는 그대가 지금까지 상상해 왔던 것들이 얼마나 불완전했는 지를 깨닫게 된다. 그들의 현존現存을 체험을 통 해 알게 되는 과정은 마치 쇠붙이가 자석에 끌려가는 현상과 비슷하다.
명상의 처음 단계에서는 오직 자신의 노력으로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처럼 느낀다.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집중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러나 직접적인 앎을 얻게 되는 시점에 이르면,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당기듯이 밖에서 자기를 잡아당기는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것이 소위 은총이라는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자기의 노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신[主人空]의 은총에 끌려가는 것이 다.
니르비카라 삼매 상태에서 얻는 앎은 일종의 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계시가 자기 최면이나 환상이 아니라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 근거로 첫째, 그 앎의 내용이 이미 그 단계에 도달한 다른 사람들의 앎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진리는 하나이지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많은 법이다. 그렇게 먼저 도달한 사람들의 깨달음과 자신이 삼매 상태에서 얻은 앎이 일치한다면 참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둘째, 삼매 상태에서 깨닫게 되는 앎은 다른 방법 즉 일상적인 감각이나 이성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매 상태에서 얻는 앎은 마음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인격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진정한 앎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템플 대주교는 말한다. "기도가 우위를 차지하고 행위가 그 뒤를 따라오는 것이 기도와 행위의 올바른 관계이다. 행위가 우위를 차지하고 기도가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올바른 관계라고 볼 수 없다." 이런 관계는 수행의 초보 단계에서는 물론 수행에 큰 진전이 있어서 영적으로 성숙한 상태에서 도 지켜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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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니르비카라 삼매 상태에서 마음속에 생기는 인상은 과거에 쌓인 모든 삼스카라[潛在印象]를 지워 버린다.
s: 이 단계에 도달하면 그대는 깨달음을 얻은 성자인 지반묵타jivanmukta가 된다. jivan은 살아 있는 사람을 뜻하고, mukta는 자유로움을 뜻한다. 그러므로 지반묵타는 ‘자유롭게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바쁘게 살아가지만, 지반묵타는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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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니르비카라 삼매 상태에서 생긴 인상마저도 지워지면 모든 생각의 흐름이 사라진다. 그런 상태를 '씨 없는 삼매'[無種三昧]라고 한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생각의 큰 흐름으로 삼스카라 즉 과거에 쌓인 모든 潛在印象을 지울 수 있다. 그러나 집중이라는 생각의 흐름은 여전히 남아 있다. 집중이라는 생각의 흐름마저도 사라질 때[主人空마저도 놓아 버릴 때], 베단타 철학에서 니르비칼파nirvikalpa 삼매라고 부르는 궁극적인 삼매 상태에 들어간다. 니르비칼파 삼매는 현상계의 인상은 물론 욕망이나 집착의 씨 마저도 소멸된 상태이기 때문에 '씨 없는 삼매'[無種三昧]라고 부른다. 브라흐만은 집중의 대상이 아니다. 브라흐만 속에서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이 구별되지 않는다. 브라흐만은 분화되지 않은 지극히 순수한 의식이다. 그러므로 미분화 의식인 브라흐만과 하나 되는 니르비칼파 삼매에 들어가면 그대는 더 이상 그대가 아니다. 브라흐만 속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온 우주의 근원, 즉 본질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파탄잘리의 이러한 가르침은, 이론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정도까지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해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논의해 온 파탄잘리의 가르침의 요점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수행은 마음을 집중하는 훈련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그러나 파탄잘리가 경고하고 있는 바, 집중 훈련에는 반드시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위험과 혼란에 빠진다. 현상계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으면 일심으로 집중하기가 어렵다. 운 좋게 집중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집중을 통해 얻은 힘으로 인해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된다. 현실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 힘을 분명히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가 그 사실을 극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20세기 인류는 과학과 기술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집중한 만큼 많은 비밀을 캐냈고 힘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국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과학과 기술의 힘은 대단히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 과학과 기술의 힘 자체는 해로운 것이 아니다. 올바른 정신으로 사용한다면 오히려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현시대의 인류가 소유하고 있는 과학과 기술의 힘은 인류를 파괴할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이다. 생각 있는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 위험이란 핵폭발의 위험이 아니다. 그 위험이란 집중을 통해 얻은 과학과 기술의 힘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데 따른 인간 정신의 파괴라는 위험이다.
이 세상에 대한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 그대는 먼저 그대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대상인 신[主人空]을 갈망하는 마음을 키워야만 한다. 이 일은 현상 세계의 낮은 차원부터 시작할 수 있다. 먼저 그리스도나 라마크리슈나 같은 위대한 영적인 스승을 선택하라. 어떤 나라, 어떤 종교의 성자를 선택해도 좋다. 그들은 이 땅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살았던 실존 인물이다. 그대는 그들에 대해 기록한 책을 읽을 수 있으며, 같은 인간으로써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 그들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그들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품고, 그들을 섬기고, 그대의 삶을 통해 그들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섬김과 사랑이 커지면 외적인 대상에 집착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외적인 대상에 대한 집착이 줄어든다는 것은 이웃이나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무관심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理 想으로 선택한 스승을 향한 섬김과 사랑이 커지면,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사랑이 자신이 理想으로 선택한 존재에 대한 사랑 속에 통합된 다는 말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대가 사랑하는 영적인 스승을 섬기는 자세로 하게 되고, 그러면 그대가 하는 일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이 전에는 결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정열이 불일듯 일어나리라. 이것이 첫 번째 단 계이다.
그대는 영적인 스승에 대한 헌신과 그들의 삶에 대한 지속적인 명상을 통해, 그들 속에 깃들이어 있던 정신을 점차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들과 관련된 외적인 현상에 대한 집중을 떠나 그들이 품고 있던 정신 자체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그러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갇힌 인간 그리스도나 인간 라마크리슈나가 아니라, 영원한 영적인 그리스도 영적인 라마크리슈나를 섬기게 될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이제 브라흐만과 하나 되는 마지막 단계가 있다. 그리스도나 라마크리슈나나 기타 어떤 신적인 인물이라도 그 배후에는 궁극적인 실재인 브라흐만이 있다. 神性을 구현한 영적인 스승들은 모두 브라흐만의 투영投影일 뿐이다. 브라흐만과 하나 되는 것은 그리스도 속에 나타난 神性과 하나 되는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기는 해도, 神性은 우리들 모두 속에 현존하고 있다. 그 神性과 하나 된 상태가 바로 수행의 마지막 단계인 니르비칼파 삼매이다.
낮은 단계의 삼매에는 이원성二元性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내가' 명상하고 있다는 느낌이나, '나는' 그리스도를 나의 理想으로 선택했다는 생각이 어렴풋이라도 남아 있다면 아직 이원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인격을 초월한 브라흐만과의 합일을 위해 자기가 섬기는 신적인 스승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기란 성자들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스리라마크리슈나는 니르비칼파 삼매에 도달할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음을 집중할 때마다, 나는 신성한 어머니[영원한 神性의 현현인 '깔리'여신]의 자애로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의식에서 마음을 떼어 내 자유로워지고자 무던히 애를 쓰면서도,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쉽게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의지의 힘을 총동원하여, 식별력의 칼로 어머니의 모습을 완전히 조각 냈다. 그 순간 나의 마음은 '씨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니르비칼파에 도달한 것이다. 니르비칼파 삼매에 대해서는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샹카라는 니르비칼파 삼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니르비칼파 삼매 상태에는 아트만[主人空]과 브라흐만의 합일에 대한 지속적 인 의식이 존재한다. 아트만[主人空]이 더 이상 외적인 형상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너와 나의 구별에 대한 느낌도 없다. 오직 순수하고 통일된 의식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의식 상태를 이룬 사람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한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계속 영위할지라도 자유인이다. 그의 희열은 끝이 없다. 그는 현상 세계를 거의 잊고 산다.
그의 마음이 브라흐만에 녹아들었다고 해서 의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통 사람들이 깨어 있다고 착각하는 상태의 무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의식을 가진다. 깨달은 자는 온전한 의식을 갖고 있다. 다만 어떤 갈망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깨닫지 못한 자와 차이가 난다. 그래서 깨달은 자를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깨달은 자에게는 더 이상 이 세 상의 슬픔이 없다. 그는 제한된 육체를 갖고 있으면서도 무한자와 하나 된 상태 에 머문다. 그의 마음속엔 아무런 갈망도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사람을 일러 이 생에서 자유를 성취한 성자[살아서 열반에 이른 자]라고 한다." 일단 니르비칼파 삼매를 성취한 사람은, 그 상태에 들어가고 나오고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스리라마크리슈나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니르비칼파 상태에서는 인격을 초월한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일상적인 의식 상태로 되돌아 온 다음에는, 자신이 理想으로 선택한 신성한 어머니를 통해 나타난 主人 空에 대해 말했다. 그가 브라흐만을 알았다고 해서 신성한 어머니의 실재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는 '실재'라는 말이 상당히 광범위하고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사용할 때 자칫 혼란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브라흐만만이 유일한 실재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외에 다른 모든 것은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 보다는 만물 속에 두루 깃들이어 있는 브라흐만이 만물의 궁극적인 토대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유물론자들은 비실재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각 경험의 차원에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달은 자들은 감각 차원은 물론 본질 차원, 그리고 궁극적인 절대 차원까지를 두루 망라한 세계에서 산다. 그들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이 우주를 알고, 말 그대로 실재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담아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