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만국의 로봇이여 단결하라!
클릭 당하는 기분이 어때?
게임 속의 세상을 내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이 '대리만족'을 주지만, 게임에 익숙해지는 어느 순간에는 그것이 내 생각을 지배하게 되어 결국 게임이 창조한 세계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노예'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전쟁은 게임 속에서도 계속된다.
SF는 공상과학이 아니다.
반지의 제왕이나 헤리포터처럼 마술사,요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판타지는 SF와 전혀 다른 장르입니다. 이러한 오해의 배경에는 공상과학이라는 잘못된 이름 뿐만 아니라 스타워즈 따위의 영화들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입니다.
SF는 과학적 사실들을 언급하거나 소재로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과학적 이론의 토대 아래 상상의 나래를 펴고 해석하려는 문학 장르를 말합니다.일반인이 과학적인 지식 없이도 읽을 수 있는 쉬운 SF를 소프트SF라고 하지만, 많은 하드SF 팬들이 소프트SF를 SF로 분류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토마스 모어의 <유터피아>를 근대 SF 문학의 최초 작품으로 본다는 사실을 아는 분은 참 드뭅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16세기 당시 유럽의 계급제도,소유제도와 정치체제를 비판하면서 맹아적 형태의 공산주의 사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계급을 철폐하고, 사적 소유를 폐지한다면 모든 사람이 하루 6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의 교양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사회가 펼쳐질 것임을 설득력 있게이야기하고 있습니다. H.G.웰즈는 <해저 2만리>를 썼던 쥘베른과 더불어 19세기말 SF를 본격적인 장르로 발전시켰던 대표적인 SF작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는 <타임머신><투명인간><우주전쟁>등 많은 소설을 남겼는데, <타임머신>은 처음으로 시간여행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많은 아류 소설과 영화를 낳고 있는 대표작입니다.
1980년대 말에 국내에 소개되어 '소설 자본론'이라는 별명까지 들었던 <강철군화>는 SF계에서도 사회과학 SF의 초고봉으로 인정받는 소설입니다.자,이제 SF가 펼쳐놓은 색다른 사회과학의 세계를 경험해보면 어떨까요?
만국의 로봇이여 단결하라!
인간이 로봇을 더 많이 착취할수록,더 많은 노동을 부여할수록, 더 많은 로봇을 생산할수록 착취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종말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인간이 로봇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에서 시작한 이 모순은 로봇 노동의 착취와차별을 중단하지 않는 이상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자본의 노예가 된 로봇
앞서 로봇이라는 단어가 <로숨의 만능 로봇>이라는 희곡에서 비롯했으며,본래 노동을 의미한다는 사실, '로봇의 반란'은 '노동계급'의 혁명'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맑스는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곧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했습니다.
해커도 운동한다!
해커들의 운동 핵티비즘, 핵티비스트 이야기 입니다.
자본과 국가체제로부터 일탈을 꿈꾸던 무정부주의적인 히피 문화는 이들 강령의 이데올로기적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는 해킹이 비공개적이고 음모적으로 이루어졌지만, 핵티비즘을 선언한 이후에는 사회운동과 연계하여 공개적으로 진행한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2부 파시스트가 되느니 차라리 돼지가 되겠다.
바그너-히틀러가 사랑했던 바그너
베트남전의 광기를 표현한 영화'지옥의 묵시록'영화에서 커다란 스피커를 달고 웅장하게 틀어대던 그 음악이 바로 바그너의 <리벨룽겐의 반지>중 '발퀴레의 기행'입니다.
바그너 스스로 반유태주의자였고,히틀러와 나치가 가장 사랑한 음악가였습니다. 괴벨스는 나치가 가두 행진을 할때 중앙에 히틀러를 세워놓고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을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히틀러가 자살하고 제3제국이 몰락하자 전 유럽인의 항의로 바그너 전용극장도 문을 닫고 히틀러 치하에서 바그너 음악을 지휘했던 지휘자들도 전범으로 처벌받거나 활동을 중지당합니다. 카라얀은 사기에 가까운 처세술로 난국을 빠져나와 정치적 잡음이 끊이지 않는 세계적인 지휘자로 행세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의 곡은 들을 수 없습니다.
소스타코비치-천재 음악가로 비참하게 사는 법
그는 구소련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재능 있고, 유명했기에 이땅에서는 한동안 엄격한 금지곡이었습니다. 일생동안 레닌 훈장을 세 번 수상했고, 스탈린상을 13번 받았습니다만 정치적 압박에 시달렸고 그가 사망하자 음악 가문을 이어가던 아들 막심과 손자 드미트리는 서방으로 망명하고 맙니다. 막심은 망명 뒤에"나의 부친은 확신을 가지고 공산주의를 신봉한 일은 평생 한번도 없었던 것으로 안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조지오웰-1884년, 좌우파시즘에 대한 경고
'예술이 정치와 관계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입장은 그것 자체가 정치적인 태도이다.'
그가 1936년 스페인 혁명 당시 좌파 민병대에 지원해 참전한 경력과 <동물농장><1984년>은 사회주의 비난이 아니라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썼다는 사실은 교육과 언론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조작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군사독재와 악법에 저항할 때마다 진리라도 되는 양 떠들어 대던 역시 소크라테스가 말한 바 없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조지 오웰은 1906년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태어나 평범한 영국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남긴 글에서 "나는 단지 제국주의로부터 탈출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모든 형태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꼈다. 나는 억압받는 사람들 속으로 다가가 그들 편에 서서 억압자들에 맞서 싸우고 싶었다"거 썼습니다.1936년 발생한 스페인 내전의 참전 경험은 그를 평생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에 맞서는 사회주의 전사로 살게 했습니다. 2월, 좌파연합 '인민전선'은 아나키스트 정치그룹, 아나키스트 노조의 지지 아래 총선에서 승리하며 집권합니다. 7월, 프랑코는 파시스트 반군을 이끌고 우익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탈리아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가 프랑코를 지원하고, 전세계 좌파진영이 인민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달려가면서 이는 2차대전 이전 최초의반파시즘 전쟁이자, 아나키스트가 주도하는 아나키 햑명전쟁이라는 기록으로 남습니다.
빅 브라더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전쟁은 평화다. 자유는 굴종이다.무지는 힘이다. <동물농장>에서
1998년영국에 본부를 둔 프라이버시 인터내셔널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감시하는 국가 정부와 기업,제도에 '빅 브라더'상을 수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미,영,독,일,프,덴마크,헝가리,네덜란드,스페인,핀란드,벨기에,체코,불가리아,스위스,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 16개국에서 같은 행사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2005년 조직위원회가 구성되어 가장 끔찍한 프로젝트상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전국민적 통제제도인 주민등록번호가 꼽혔으며, 가장 가증스러운 정부상에는 정통부, 가장 탐욕스러운 기업상은 핸드폰을 이용해 해고자들 위치를 추적하며 감시했던 삼성 SDI,...가 수상했습니다.
구소련이 무너지고 스탈린 주의가 비판 받고 있는 지금, 조지 오웰의 스탈 주의 비판이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현재 진보 진영 내 원칙의 왜곡과 권위주의,부패,비민주적 관행들을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더 늦기 전에.
존 레논-민중에게 권력을 ! 민중에게 상상력을 !
<민중에게 권력을>은 존 레논이 말하고자 했던 정치적 구호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노래입니다.이 노래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 존 레논은 6개월 뒤 <imagine>라는 곡을 발표합니다. '천국''국가''소유'가 없어진 세상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존 레논은 "imagine은 반종교적,반민족주의적,반인습적,반자본주의적인 노래"라고 했습니다.
<평화에 기회를>은 베트남전 당시 전쟁에 지친 세상에 반전 평화를 외치는 명곡중 하나로 모든 '주의'들을 부정하면서 반자본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 성향을 강하게 풍깁니다.
영국에 있을 때는 아일랜드 헤방을 지지하며 아일랜드 공화군 석방을 외치며 미국으로 건너가 반전운동과 양심수 석방운동에 동참하며 전국순회공연도 가집니다. 1970년대 후반에는 '가정주부가 될 것을 선언하고 육아와 요꼬에 대한 내조를 하며 보내다 1980년대 초 레이건 대통령 당선으로 대표되는 보수주의적 흐름에 반대하여<Just Like starting over><어려운 시기는 끝났어>라는 곡을 발표하며 복귀할 즈음,12월 암살사건으로 생을 마칩니다. 아직도 진보진영 일부는 그의 죽음에 관해 FBI개입설 등 '음모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피카소-미술은 적에 맞서는 무기이다
예술가는 정치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끊임없이 마음을 찢기고,열정을 느끼고, 행복하게 만드는 모든 일들에 반응하는 존재이다.-피카소,1945년
막걸리 보안법 시절 다방 이름을 '피카소'라 지었다가 구속된 사례도 있고, "피카소'크레파스 회사는 영문 모르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치도곤을 치른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 국가보안법이 아직 남아 썩은 막걸리 냄새를 풍기는 지금 우리 현실이 씁쓸한 코미디 같기만 합니다.
FBI는 피카소에 대해 1944년 이후 1973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발언과 저술,서명활동 등 모든 행적을 낱낱이 추적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공산주의자로 분류하고 러시아 첩자로까지 기록했습니다. 피카소는 미국 정부의 입국금지자 명단에 올려져 있어 평생 한번도 미국에 가지 못했는데 말입니다.본격적인 정치활동은 <게르니카>와 시작합니다. 1936년 프랑코의 우익 쿠데타에 맞선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자 파시스트 프랑코를 격렬히 비판합니다.당시 좌파 '인민전선'에 많은 돈을 보내기도 합니다.
<게르니카>로 인해 프랑코 정부와 독일 히틀러로부터 혐오스럽고 타락한 에술가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그의 모든 작품들은 스페인과 독일 전지역에서 전시를 금지 당했습니다. 나치 치하에서 당시 레지스탕스들과 맺은 관계는 해방 후 피카소가 공산당에 가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환영했던 공산당 안에서도 피카소 그림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소련에서 사회주의자들의 공식 예술론으로 선언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피카소의 '입체주의'와 충돌했던 것입니다.
'사회주의적 예술사조"는 그 문제의식과 표현방식의 힘이 대단한 것이었고 예술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에게 상당히 의미있는 에술적 실험이었지만 '정치적 도덕교과서'가 되었을 때 정말 피곤해지기 시작한 거지요.
피카소는 "나는 내가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것을 그린다" " 나는 자연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자연과 함께 간다"며 미술관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혁명이 잘못되는 것보다는 미술이 잘못되는 게 낫다"는 발언에서도 드러나듯 혁명에 대한 그의 신념은 매우 깊었습니다. 1949년 나토협약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반미시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자금을 지원합니다. 파리 평화대회에 대표로 참석하여 포스터<평화의 비둘기>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미국무성은 1917년부터 나온 모든 유화의 전시를 금지하려 시도하는데, 이는 그그림을 공산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앞세워 민주적 자유를 억압하는 미국은 인민의 해방을 위해 인민을 억압한 스탈린주의를 쑥 빼닮았습니다.
피카소는 평생 좌우에 다 이해받지 못했지만, 평화와 평등,자유가 공산주의 실체라고 믿었으며, 그 실천을 죽는 날까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아사오-"파시스트가 되느니 차라리 돼지가 되겠다."
평론가들은 <미래소년 코난>은 하야오의 '공산주의적 사상'을 진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대적 배경을 핵전쟁 이후의 폐허가 된 세상으로 삼과 있는데, 군국주의적인 '인더스트리아' 제국과 맞서는 공산주의적 공동체 '하이하버'가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으며 결국 하이하버의 승리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2002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금곰상)을 수상해 대중성을 넘어 작품성까지 공인받게 되었습니다. 처음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해 토메이사에 입사할 때 그 동기를 "미 제국주의자들의 디즈니에 대항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밝혔던 꿈을 이룬 것이지요.
하야오와 이사오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영화를 꼽으라면, <붉은 돼지><평성 너구리 대전쟁 폼포코><반딧불의 묘>등이 주목할만 합니다.
<평성 너구리 대전쟁 폼포코>는 이사오 감독의 영화로, 하야오는 연출로 참여했습니다. 인간의 환경파괴에 맞선 너구리들의 투쟁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 학생운동 전공투 투쟁의 역사와 몰락을 담고 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처절한 결말 떄문에 패배주의적이라는 비판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제는 노조활동가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자본이 되어버린 지브라와 하야오, 그들의 행로에 대해 애정뿐만 아니라 비판을 함께 놓고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첨바왐바-우리는 계급전사들이다
1980년대, 영국 한 구석에서는 댄스뮤직으로 혁명을 노래하는 한 아나키스트 밴드가 서서히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이 땅의 노동계급이 신자유주의에 맞서 총파업을 선언한 1907년에는 국내에까지 그들의 생기 충만한 전복의 노래들이 소개되었습니다. 그 노래가 바로 첨바왐바의 텁서핑입니다. 그 신나는 댄스 뮤직의 실체는 "지금은 힘들어도 다시 일어나서 이 잘못된 자분주의 세상을 뒤집고, 술이나 한잔하며 놀자"는 이야기였던 것이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Top of the world(Ole Ole Ole)라는 멋진 응원곡을 발표합니다. 1980년 대처 수상의 석탄 산업 해체에 맞서 장기간 총파업 투쟁을 전개했던 탄광 노동자들,1994년 신자유주의에 맞서 무장봉기한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리버폴의 부두 노동자와 정치적인 이유로 감금된 양심수 등 이 응원곡을 통해 소외 당하고 힘들게 투쟁하는 모든 이들이 승리자가 될것이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첨바왐바는 멤버를 뽑을 때 연주 실력을 전혀 따지지 않고 시간을 잘 지키는 능력, 권위에 대한 증오, 착한 마음씨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1985년 첫 음반 표지에 '우리의 음악이 단지 즐거움만을 주고, 행동을 고무시키지 못한다면 우리의 음악은 실패한 것이다'라고 새겨 놓았는데, 자본주의와 계급문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여성해방을 찬양하고, 동성애 차별과 인종 차별에 대해서도 노래의 칼날을 치켜듭니다.
그들의 음악은 파티음악으로, 응원곡으로, 집회에서 민중가요로 폭넓게 불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처럼 대중과 함께 신나게 부르고 춤출 수 있는 민중가요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첨바왐바는 첫 음반을 내놓기 전에 존 레논과 음반업체인 EMI를 비난하는 팜플렛을 배포한 적이 있습니다."EMI는 존 레논을 평화적인 투사의 상징으로 만들면서 한편으로 폭탄과 무기를 제조했다. <평화에 기회를>음반을 살 때마다 무기 제조업체에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매진>에서 소유가 없어진 세상을 상상해 보라고 노래하면서 그 뮤직비디오는 거대한 저택에서 모피 코트를 입고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치며 만들었다. 영화 <간디> 역시 EMI가 만들고 배급했다.음반 하나를 구입할 때도 그 행동의 결과를 고려하라고 알려내겠다"고 했습니다. 오로지 상품으로서 음악을 생산하는 음반업계들을 욕했습니다.
그런데!그랬던 그들이! 1997년 EMI와 계약을 해버립니다. 첫 곡이 첨바왐바의 대표곡인 <텁서핑>입니다.이에 대해 팬들에게 메일과 인터부 등을 통해 이야기합니다."우린 처음 순진하게도 One little indian을 믿고 계약했는데 오히려 그들은 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우리를 통제하고, 정치적 신념까지 좌지우지하려 했다. EMI는 음반만 판매해주면 우리에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다. 이제 무기산업에서 손을 뗐다. 우리의 일은 선동을 퍼뜨리고,논쟁을 던지고, 문제를 만들고, 이 천박한 시대에 맞서는 음악을 만드는 일이다."
첨바왐바는 이제 혁명가였던 비주류에서 혁명을 팔아먹는 주류로 변한 것일까요? 대중을 만나기 위해 자본을 이용하는 것일까요?
첨바왐바가 유명해지자 여러 업체들이 이들의 음악을 광고 배경음악으로 사용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논의 끝에 음악 사용료를 받는 대신 그 돈들을 반세계화 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독립미디어센터와 거대 기업에 맞선 반 세계화, 기업 감시 운동을 전개하는 시민단체들에 기증하기로 합니다. 두 단체는 이 돈을 제너럴 모터스에 대한 반대운동에만 사용하기로 합니다. 이 사건으로 제너럴 모터스는 자신을 반대하는 단체에 7만 파운드를 기증한 바보기업으로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너럴 일렉트릭사에서 광고 음악 사용비용으로 약 10억을 제안했을 때는 GE가 군용 비행기의 엔진을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거절했으며 나이키가 1998년 월드컵용 광고에 첨바왐바의 음악을 사용하려 했을 때에는 아동착취 문제로 거절한 일이 있습니다.
3부 "힘내라 바퀴벌레"
체 게바라는 너희의 상품이 아니다.
미국의 미디어 활동가 샤샤 콘스탄자 초크는"자본가 놈들은 돈되는 일이라면 '혁명전술'도 팔아먹을 놈들이다."라며 "체 게바라 좀 봐라.그의 혁명정신은 다 어디 가고 이미지는 상품이 돼서 팔려나간다"고 투덜거린 적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20세기의 상징물'로 꼽히는 체 게바라의 사진은 쿠바의 알베르또 꼬르다라는 사진기자가 찍었습니다.꼬르다는 널리 퍼지는 사진에 대해 단 한번도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진이 담긴 깃발과 포스터가 퍼져가는 것을 보며 체 게바라의 혁명 정신이 퍼져나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행복해 했다고 합니다. 2000년 영국의 한 보드카 회사에서 체 게바라의사진을 광고에 쓰자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재판에서 이긴 꼬르다는 회사에서 받은 5만 달러를 쿠바의 의료지원 기구에 기증합니다.
이번에는 한국 맥주회사 하이트가 2005년 2월,겁도 없이 체 게바라를 광고 모델로사용하고 '진한 남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하네요. 도대체 체게바라가 언제 세상을 지배하고 싶다고 했는지.이건 초상권,저작권 침해를 넘어 인격모독이자 혁명에 대한 모욕입니다.
라 쿠카라차-힘내라 바퀴벌레!
La Cucaracha는 스페인어로 바퀴벌레인 것은 사실입니다. 박정희,전두환때 음악 책에서 배운 노래는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자료가사입니다.
라 쿠카라차,라 쿠카라차/이제 다시 걸을 수 없어/더 이상 쓸 돈이 없기 때문에/어떤 것이 나에게 미소를 가져다주네/그것은 바로 셔츠를 입지 않은 판쵸 비야/이미 까란사의 군대들은 가버렸네/판쵸비야의 군대들이 오고 있기 때문에
당시 혁명군의 비참한 모슴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하고, 농민군을 돕기 위해 여인네들이 줄줄이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바퀴벌레들이 줄줄이 걸어가는 것 같아서 라고도 합니다.
<라 쿠카라차>는 당시 판쵸 비야와 농민군의 혁명을 찬양하는 노래였던 것입니다.우리나라 동학혁명을 노래한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같은 거죠. 판쵸 비야는 20세기 초 멕시코 혁명이 발발하자 3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혁명군에 가담하면서 '북부군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멕시코 북부가 판쵸 비야를 대표로 한 농민군들의 활동 무대였다면, 멕시코 남부에서는 농민군들이 '에밀리아노 사파타'를 대표로 내세웠습니다. 이 둘은연대 전선을 구축하고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 입성하여 농민군의 깃발을 꽂습니다.
혁명 멕시코 정책을 펴보기도 전에 두 사람 모두 동지의 배신으로 암살 당하고 맙니다. 판쵸 비야 추모행렬이 30킬로에 이르렀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파타가 주장했던 공동체 자치주의는 현재 멕시코 무장 혁명군인 '사파티스타'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판쵸 비야의 전설은 <라 쿠카라차>노래에 녹아 있지요.
관따나메라-관따나모 아가씨는 잘 살고 있을까?
'관따나메라'는쿠바의 비공식 국가로 불리는 대표적 혁명가요이며, 가사를 쓴 이는 쿠바 시인으로서 '쿠바 독립의 아버지,라틴의 위대한 혁명가, 근대주의 문학의 선구자'등의 명칭이 따라다니는 호세 마르띠 입니다.쿠바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호세 마르띠 공항에 내려 그의 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호세 마르띠의 <관따나메라>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된 것은 미국의 대표적인 민중가수이자 포크송 가수인 피트 시거 덕택입니다. 피트 시거는 1060년대 밥 딜런, 조안 바에즈 등과 함께 통키타 음률에 저항 정신을 실어 나르며 포크 시대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인물입니다.
호세 마르띠가 사망 한 직후 1898년, 미국은 아바나 항에서 미 군함 폭발사건을 조작하여 스페인에 뒤집어 씌우고는 전쟁을 선포해 관따나모 기지를 건설하고 쿠바를 삼킵니다. 1903년부터 미국은 관따나모 기지를 매년 약 4,085달로의 사용료 지불 조건으로 강제적인 영구 임대를 합니다. 약 460만원 정도의 푼돈을 던져주고 강화도 같은 섬을 '합법적으로 임대한 내 땅이다'며 강탈하고 있는 셈이지요.
현재는 9.11사건 이후 체포된 용의자들과 아프간 침공시 체포한 포로들을 몰아 넣어 놓고 고립시킨 후 온갖 고문을 자행하고 있는 지옥의 공간이 되어 있습니다.
민중불교-계급 없는 사회가 불국정토다
이 땅의 불교에는 '민중불교'가 있으며 우익의 '호국불교'에 맞서 커다란 줄기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현재의 민중불교 운동은 1970년대 민중신학의 영향과 1980년대 민중 운동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흐름으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입니다. 그간 불교계를 짓누르던 '운명론적인 業 사상과 기복신앙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깨고 변혁을 위한 새로운 세계관에 부합하도록 부처의 말씀을 재해석하기 시작합니다.
'민중'이란 불교에서 구제의 대상이 되는 추상적인 '중생'과 달리 구 체적이고 시대적인 개념이라고 해석하고, 이 민중이 바로 정토를 실현하는 주체세력이며 민중이 실현할 계급 없는 사회가 바로 정토라고 이야기 합니다.민중불교운동이란 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삶과 역사발전의 주인공임을 자각하여 그들 스스로 사회변혁을 통해 해방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집단적 인간해방운동이라고 정의 합니다.
불교 기득권 세력은 불교종단 중앙을 차지하고 앉아 조직폭력배들을 옆에 끼고 독재정권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1990년대 들어서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한 민중불교 진영과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1994년 조계종 종단개혁운동이 그것입니다.
맑스의 종교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종교를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종교라는 환상에 기댈 수밖에 없는 힘든 상황에 몰아넣고 있는 이 '착취상황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것'에 있다는 점입니다.
조선혁명선언-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기미독립선언문>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 받은 것이라고 배웠습니다.<기미독립선언서>와 33인은 시작부터 끝까지 항일 운동이라고 부르기에 참으로 민망한 행태를 보여줍니다.종교단체 33인(손병희 등 천도교 15명, 이승훈 등 기독교 16명. 한용운 등 불교 2명)은 당시 민중들의 요구와 전혀 다른 길을 갔습니다. 1918년 김좌진, 신채호,안창호 등 독립 운동가 39인의 <대한독립선언문>이나 1919년 동경에서 채택한 <2.8독립선언>과도 다른 길이었으며 만세운동과도 다른 길이었습니다.그들은 당시 국내의 민중단체들과 의병단체들이 수년간 준비해 온 항일 투쟁 계획을 거부하고,오히려 윌슨의 '정의감'과 '민족자결주의'를 믿으며 비폭력적이고 퍙화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독립을 일본에 '청원'할 것을 선택했습니다.
미국은 19세기부터 하와이 군도등을 침략하며 식민지로 삼고 19세기 말에는 스페인 제국과 전쟁을 치러 쿠바,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 등을 장악하면서 신생제국주의 국가로서 위치를 굳혀 가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필리핀을 안전하게 차지하기 위해 1905년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보장하는 '가쓰라-테프트 밀약'이라는 빅딜을 맺으며 일본이 한반도 점령을 국제적으로 공인한 바 있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과 평등사상, 레닌의 민죽자결주의 역시 한국에 광범위하게 퍼졌는데 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만 알려졌을까? 많은 단체나 활동가들이 제국주의 국가들을 행한 굴종적 청원으로는 독립이 불가능하며,오로지 조선인의 투쟁을 통해서만 해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종교단체 33인은 그런 주장과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무시하고 거부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특히 <2.8독립선언문>에서 미국과 영국의 책임을 추궁하고 러시아 혁명을 지지하는 부분이 왜 교과서에는 실려 있지 않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19년 논의 때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33인은 3월3일의 고종 장례식에는 '폭동'의 우려가 있으며 3워2일은 안식일이라 기독교 계열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3월1일을 거사일로 결정합니다. 3월1일, 학생과 민중들이 집결하기 시작하자 유혈충돌이 예상된다며 탑골공원으로 가지 않고 기생집인 인사동 태화관에 모입니다. 이완용의 별장으로유명하며 손병희의 단골 기생집이었기 때문입니다.
탑골공원에서 기다리던 학생들은 33인이 나타나지 않자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합니다. 이과정에서 화가 난 학생들이 33인을 찾아나서는데,3인은 태화관에앉아 요리를 시켜 유명한 기생들의 접대를 받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합니다.
이들이 일본경찰에 투항하고 난 뒤 심문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는 더 가관입니다. 손병희는 "나는 한일 합병에 대하여 찬성도 불찬성도 하지 않았다" 정춘수는"나는 한일 합병에 반대하지 않았다" 홍병기는"총독부에 독립건의서를 제출하고 회답을 기다리며 선언서를 배포할 목적으로 태화관에 갔다"고 대답합니다.
종교단체들이 주도한 평화적인 만세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 조직력이 강한 도시에 퍼집니다.하지만 3월 하순부터 비밀결사조직과 학생단체들,농민,의병들이 투쟁을 주도하면서 '무장봉기'와 '폭력적'투쟁 형태가 주요하게 나타납니다.
3월 초순 이후 33인과 분리한 독립 투쟁은 돌멩이,몽둥이,낫,죽창,곡갱이,삽을 들고 경찰서,헌병대,면사무소,우편소,소학교,공립보통학교,금융조합,일본인의 집등을 파괴.소각하는 무력투쟁으로 전개되고 자연발생적인 봉기에서 투쟁목표가 구체화되고 조직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져 갑니다.
33인은 재판과정에서 한결같이 "우리의 취지를 이해못해서"라면서 "폭동은 우리의독립선언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책임은 없다"고 증언 합니다.비민중적이고,대리주이적이며,엘리트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투항주의를 선택한 33인은 그 뒤에도 그 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자신들의 선언문조차 배신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지식인 중심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민중은 단지 계몽의 대상일 뿐이었지만 투쟁을 통해 각성한 민중은 이제 독립운동의 주체로 떠오르게 됩니다.3.1운동 이전에는계몽주의적인 민족노선이 독립운동을 주도했으나 만세시위 뒤에는 민중운동에 힘을 얻은 공산주의,무정부주의 계열 등이 급부상하면서 독립운동 진영 내부에 격렬한 노선투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고무된 운동가들은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합니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고 국무총리가 이끄는 내각책임제하의 내각을 구성합니다. 신채호는 격분해서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으려 하질 않소! 그런데 우리의 대표로 나설 수 있단 말이오? 라며 회의장을 박차고 퇴장합니다. 이승만은 이미 1919년 2월에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의 조선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서신을 보낸 일이있기 때문입니다. 단재는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이승만정부 타도 투쟁에 돌입합니다.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를 버려둔 채 미국에 체류하며 독립자금 등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결국 외교론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임시정부조차 이승만을 배척하면서 1925년 탄핵을 당하게 됩니다.
그 후 임시정부는 박은식을 선출합니다. 이때 단재는 의열단의 의백인 약산 김원봉을 만나서 의열단의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게 됩니다. 의열단은 흔히 무정부주의라고 알고 있는데 실은 전투적인 항일 투쟁노선에 동의한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무정부주의자가 섞여 있던 단체였습니다. 의열단이 무엇보다 일본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사건은 1921년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였습니다. 김익상은1922년 상해에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까를 암살하려다 폭탄이 불발되어 체포됩니다.
김원봉은 암살과 파괴만으로는 의열단 투쟁의 사상과 이념을 민중들에게 전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신채호를 만나 이념의 지표가 될 선언문을 요청합니다.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합니다.
1장에서는 혁명수단으로 강도 일본을 살벌함이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합니다.
2장에서는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나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합니다.
3장에서는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을 비판하며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합니다.
4장에서는 민중의 직접 폭력 혁명만이 대안이며 이를 위해 선도적인 투쟁을 내세웁니다.
5장은 고유적 조선의,자유적 조선민중의,민중적 경제의,민중적 사회의,민중적 문화의 건설을 위해 민중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 지니라 외치고 있습니다.
이 선언문을 집필하던 당시 신채호는 전투적 민족주의에서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해 가던 시기였는데 1928년 자금조달을 위해 위조화폐를 들고 대만에 입국했다가 체포되어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옥사했습니다.1926년 김원봉과 동지들은 황포군관사관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습니다. 3년 뒤 현재에 있어서는 본 단 존재의 의의가 소멸한 것이라는 마지막 성명을 남기고 해체합니다.
김원봉은 일경들이 그를 잡기 위해 거미줄 같은 수사망으로 체포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해방될 때까지 털끝하나 건들지 못했습니다. 8.15광복을 맞아 해방투쟁의 영웅이 되어 고행 밀양으로 귀국합니다. 전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총파업을 계기로 남한 정부는 좌익들 에 대한 탄압을 시작합니다. 김원봉도 체포되는에, 그를 체포한 경찰이 일제시대 악질적인 일본 앞잡이 경찰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이었습니다. 끝내 체포 당하지 않고 일본 경찰을 우롱했던 약산 김원봉이, 해방된 조국 에서 일제 앞잡이에게 체포된 것입니다.노덕술은 김원봉의 뺨을 때리는 등 온갖 모욕을 주었다고 합니다. 여론이 들끓어 석방되었지만 김원봉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1948년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한 그는 다시 남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1958년 환갑을 맞아 훈장을 수여 받은 뒤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때 제거되어 이후 북한의 역사에서 지워지고 말았습니다.
의열단과 김원봉,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그토록 파괴하고자 했던 특권세력, 자본주의 약탈제도, 사회 불평등과 노예적 문화사상이 판치는이상 아직까지 우리의 광복절은 오지 않았으며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소리높이고 있습니다.
노래 검열-의심나면 검열하고,수상하면 족쳐라
1970-80년대 검열주의자들의 후손들이 살아남아 지금까지도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분야에서 엽기적인 검열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1956년 대선에서 이승만에 맞서던 신익희 민주당 후보가 호남지역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급사한 사건이 발생하고 <비 내리는 호남선>이란 노래가 난데없이 금지곡이 되어버립니다. 신 후보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노래로 포장되어 전국에서 불려졌기 때문입니다. 작곡가 박춘석,작사가 손로원,가수 손인호는 이승만 정권에 줄줄이 소환되어 조사 받았다고 합니다.1960년대 말부터 인기를 끌던 신중현에게 박정희가 찬가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하다가 발표한 곡이 <아름다운 강산>입니다. 정권의 괘씸죄에 걸린 신중현은 발표한 노래들이 줄줄이 금지곡 판정을 받았고 <미인>은 학생들이 시위를 하며 박정희 장기집권 야욕을 빗대어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바꿔 불렀다는 것이 금지 사유가 되어 버렸습니다.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불신 풍조 조장으로,그녀의 춤은 간첩 수신호라는 참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서 그녀를 끌고 갔습니다. 그뒤 그녀는 대인기피증이 심해져 아직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1965년 '방송윤리위원회'를 앞세워 시작된 박정희 정권의 검열은 1968년 '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음반 사전 심의로 이어지더니 1970년대에는 '긴급조치'와 '공연활동정화대책'으로 대중가요를 콩가루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에 나왔던 <고래사냥>작사가 최인호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노래 가사중의'고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궁당했다고 합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저주받은 명작의 하길종 감독이 개떡 같은 세상에 스스로를 바보라 부른 이 영화는 1983년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으로 이어지고, 1984년 직계자손인 <고래사냥>을 낳습니다.
그렇다고 당하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981년 제5회 대학가요제에서 광주에서 죽어간 전사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대상을 차지해 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정오차'의 <바윗돌>입니다. '정오차'씨는 TV가요 프로그램에서 그 사실을 자수해 보립니다. "이 노래는 광주에서 죽어간 친구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맍든 곡입니다. 바윗돌은 그 친구의 묘비를 의미합니다" 그 다음날부터 이 노래는 대학가요제 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광주 출신의 '김원중'이란 가수가 부른 <바위섬>은 광주 학살 뒤 새들도 찾아오지 않는 무인도처럼 희망을 잃어버린 광주를 위로하기 위한 노래였습니다. '가요톱10' 에서 한동안 1등을 놓치지 않았는데, 나중에 통일을 노래한 <직녀에게>라는 노래까지 히트시키게 됩니다.
한 친구는 카페에서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항상 '아침이슬'을 마지막 노래로 연주했더니 경찰에서 조사를 나오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었던 경험도 했고, 한 친구는 중국집에서 친구들과 아침이슬을 부르다가 경찰의 급습을 받고 2층 창문으로 달아났던 일도 있었습니다. 정태춘씨를 주축으로 사전 검열을 무효화 하기 위한 투쟁이 승리한 후에도 지금까지 방송에서, 영화에서,인터넷에서 우리는 숫한 검열에 막혀있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갈 길은 멀기만 합니다.
4부 "인터넷 광장"
2002년, 광화문에서
조직된 대중이 아닌 무차별 개인들이 익명의 한 개인의 제안으로 한날한시에 모여 집회를 연 것은 세계 초유의 사건이었습니다. 2002년 6월,효순 미선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는 사건이 발생했을때 조선일보는 보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초기에는 월드컵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었으니,월드컵이 끝나자 인테넷의 새로운 뉴스 초점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한 네티즌은 집회의 주최가 없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경찰 등에서 문제가 되었을 경우 쪼아댈 수 있는 단체가 없다는 것....모든 참가자들이 공통된 정서로 개인적으로 모인다면 이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미군부대에 던져넣은 화염병,돌멩이보다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네티즌들은 깃발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데, 자발적 추모제가 깃발을 든 단체들이 소집한 집회처럼 되거나 깃발을 든 단체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경계했기 따문입니다.
집회의 선전선동의 대상,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범대위는 계속 기존의 방식을 고집했고, 그건 집회 당시 대중과 무대를 분리시켜 버렸습니다.
여론 형성 과정에서 일방적인 수용자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의견을 올리고,글을 퍼다 뿌리는 일부의 이용자들을 '네티즌'이라고 부른다면 큰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게시판 토론이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보안법,선거법,각종 정보통신 검열관련법 등 시대에 맞지 않는사법제도와 관리자의 자의적인 검열로 인한 토론의 왜곡, 익명성을 이용한 게시판 도배 등은 생산적인 토론과 여론형성을 막는 방해물이 되고 있습니다. 인터넷 매체를 이용한 대중조작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늘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통신공간에서는 '주장'보다 '설명'이많은 이용자의 공감을 받을 수 있고 '감정적인 반박'보다는 '설득', 논리적인 글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저 막강한 조선일보나 TV뉴스까지도 몇 년 사이에 영향력을 잃고 있는데,아직도 우리는 80년대의 선전,교육,집회,조직 방식을 바꾸지 않고 있습니다.솔직히 전 진보진영의 정보통신 역량은 동아리인 노사모나 븕은 악마보다도 못합니다.
만일 진보운동단체들이 현재의 변화하는 시대와 대중을 보지 못하고 이러한 변화를 무시하거나 새로운 시도가 실패하게 된다면 그건 곧 수년 내에 운동 자체의 위기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인터넷이평등하다는 편견을 버려
2004년 엘지정유 칼텍스 노조 파업 당시 인터넷 이용자들은 "파업을 중단하고 일터로 복귀하지 않으면 징계하겠다"는 난데없는 광고를 봐야했습니다. 노동조건에 상관없이 무조건 시키는 대로 일만 해야 한다면 그것은 '노동자'가 아니고 '노예'라 불러야 할 것입니다. '파업권'은 헌법에서 기본적인 인권으로 노동3권의 하나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도 노동자들의 파업은 잘못인 것처럼 취급 당하고 있으며,'파업권'을 침해하고 노동자를 협박하는 행위는 떳떳하게 보장되고 있습니다. 대중매체가 노동자보다는 자본에 편향적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일 뿐입니다.
영화는 미국 등 제1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의 문화를 세계화하는 이데올로기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라디오와 텔레비젼은 대중을 일방적으로 세뇌하는 일방향 커뮤니케이션의 대표주자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광고료를 많이 낸 기업일수록 자신의 의견을 이용자들에게 전달할 기회가 많아지므로 그만큼 많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 자본은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이용자를 차별하고 이용자의 정보,소비,커뮤니케이션 광장을 통해 그 차별은 확대 재생산됩니다. 정보의 빈부격차를 바탕으로 인터넷 자본이 만들어 가는 커뮤니케이션의 생산구조는 다시 왜곡된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 하고, 왜곡된 이데올로기는 이 사회의 의식을 조작합니다.
인터넷 커뮤니케이션구조를 사회화하기 위해서는 하드웨어 시스템과 인터넷의 운영원칙인 인터넷 거버넌스를 사회화하고, 정보 내용물 공공성 획득, 기술의 사회화와 그 운영의 민주화가 필수적입니다. 또한 이러한 지향을 가진 대안 미디어의 구축을 병행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