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의미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4:7)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8~11)
육의 양식과 더불어 영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도 같이 먹어야 합니다. 건강식을 꼭꼭 잘 씹어서 먹어서 우리 몸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세포가 재생하듯이, 마음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도 잘 받아 먹어야 합니다. 잘 받아 먹으면 순종을 또 잘 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5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9절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이 날은 안식일이니" 그러시면서 "나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이 지구를 창조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맞습니까?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1)" 그랬습니다. 이 지구인 자기 땅에 창조주가 오셨습니다. 만든 분이 주인입니다. 그럼 안식일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안식일도 예수님이 만드셨어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천지만물을 다 이루시고 일곱째 되는 날은 안식일을 세우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창조과정과 함께 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주님이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만물도 주님이 만드시고 안식일도 주님이 만드시고. 전부 다 주님이 관리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나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런 말씀을 하시고 안식일에 환자도 고쳐주시고 이 날을 안식일이라고 성경에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누가 만들었어요? 당연히 예수님이 만드셨죠. 그럼 내 주인도 누가 돼야 합니까? 예수님이 내 주인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교제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우리의 사사로운 말을 금하고 모든 사사로운 일들을 다 접어두고 금요일인 예비일이 되면 철저하게 다 준비를 해서 금요일 해지는 시간부터 안식일이 돌아오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거룩한 시간이라고 그랬죠? 주님이 임하시는 시간이 거룩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 안식일은 거룩한 날입니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피조물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와 맺은 언약이 있는데, 너희의 모든 필요는 내가 다 줄 것이다. 내게 와서 받아라." 이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쉼을 주고 그 분이 일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 안식일 복음 속에는 완전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담겨져 있습니다. 안식일은 우리에게 복음으로 왔습니다. "내가 너를 창조했으니 내가 너를 고쳐줄 것이다. 너희의 필요를 내가 다 줄 것이다." 그래서 이 안식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피조물이 예수님을 만나는 거룩한 관계가 이루어질 때에 우리에게 재창조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어떤 세상의 학문을 접하는 날이 아니고 그 날은 창조주를 만나기 위하여 구별해 주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 천지 만물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안식일도 그대로 있어야 될까요? 그대로 있어야 됩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지만물이 설 때에 안식일도 같이 섰거든요. 천지만물이 살아있고 내가 숨 쉬고 있는 동안에는 안식일은 없어지지 않는 거예요. 자, 그럼 우리가 매번 안식일을 통하여 누구를 기억하게 되냐하면 창조주를 기억하게 되며 그 창조주를 기억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어떻게 만드셨나 보니까 "말씀으로" "가라사대"로 있어라 하니까 있었다 이 말이에요. 천지만물을 만드신 그 하나님이 말씀을 발하시므로 만물이 이루어 나왔으니까 그 창조주를 믿는 신앙은 그분의 말씀을 믿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 그 말씀으로 모든 일이 그대로 되더라 이 말입니다. 없는 것도 부르면 나오게 하시고, 명하시매 견고히 서게 되는 창조가 말씀을 통해서 되었습니다. 자, 그 말씀이 만물을 창조한 말씀이요, 만세 전부터 존재하셨던 하나님과 함께 하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시고 성령님과 함께 역사하셔서 삼위 하나님이 창조와 구속을 이루시는 그 말씀이다 이 말입니다.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회복시키고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사람을 통하여 전달되고 성경으로 기록되어서 우리가 받는 이 모든 메세지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1~2)" 라는 그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요1:3)"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이제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 죄인인 인간을 찾아오시는 이야기가 요한복음 5장 이야기입니다. 스스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고, 나뭇가지가 나무에서부터 잘라지니까 그 나뭇가지가 아무 생명도 없이 죽어가게 되는 것처럼 이 베데스다 연못가의 누워있는 중풍병자는 그런 죄인을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스스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인성을 입고 이 땅에 오셨어도 "내가 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 내 안의 아버지가 하시노라" 그러면서 이적을 행하시고 살아가셨잖아요. 예수님이 인간 앞에 걸어가시고 나를 본받으라고 하시면서,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해야 살수있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하여 산다는 것.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늘로부터 나서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처럼 너는 나로 인하여 거듭나고 나로 인하여 살아라"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핵심 진리 아니겠습니까? 믿음과 받음, 믿음으로 받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입니다. 이 안식일이라고 하는 진리 속에는 바로 그런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 쪽에서 할 일이 없다. 스스로 수고하려고 하지 말고 그동안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다 내게 와서 내려놓고 내가 주는 멍에를 받아라" 멍에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율법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가 오늘날의 나 자신이라고 적용을 하셔야 합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 만났던 중풍병자네'하고 끝나버리면 성경말씀이 왜 오늘날 우리에게 생명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상관이 없지요. 이 성경의 이야기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다 적용되고,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그분이 역사하시는 가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읽으십시오.
창조주를 믿는 신앙은 말씀을 믿는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 안에 그분의 일이 다 들어있고 창조의 능력이 들어있으며 그분의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고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신앙입니다. 안식일 신앙은 자기 일을 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이며 말씀에 순종할 때에 자기 일을 쉬기 때문에 자기 걱정과 불안과 초조가 없다 이 말이에요. 말씀 하신 분의 일을 할 때에 말씀 하신 분이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쉼이 있다 이 말이에요. 그 안에 재창조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엄청난 복음을 여러분이 이해하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시던 일이 다 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1)" 그리고 히브리서 3장부터 4장까지 보면 "안식일은 자기 일을 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거든요. 참된 쉼은 자기 일을 놓아버릴 때 옵니다. 자기 일을 하는 동안에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다 힘이 듭니다. 이 안식일 신앙은 "내가 너를 창조했으니 내가 네 주인이지 않느냐. 네게 필요한 것은 내게 다 있다. 그러니 내게 와서 받아라." 전부 은혜고 선물입니다. 내가 주는 것을 네가 받으면 "보아라. 내가 말로써 만물을 다 창조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지금 내가 네가 말을 하겠는데 내가 네게 명하는 말을 청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고 내 규례와 법도를 잘 행하면 내가 너를 위해 치료도 해 주고 다 해주겠다. 누가? 내가 하겠다. 너희들이 범죄하고 죽게 되었을 때도 내가 너를 재창조 해주겠다." 창조보다 재창조가 어렵긴 합니다. 창조는 하나님이 명하시면 되지만 재창조는 내가 받아들여줘야 그분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만 받아만 들이면 그분이 이뤄 주실 건데 그게 안식일 제도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과 우리와 맺은 언약입니다. "내가 너를 지었으니 내가 너를 구속하겠다." 그래서 예수님 보내주셨잖아요. 죄가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있더라 이 말이에요. 이것은 만세 전부터 계획하신 구속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죄를 짓고 넘어지면 그 자리에 바로 예수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 몸에 사고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몸 안에 복구할 수 있는 대책이 서 있듯이 말입니다. 병균이 들어오기 이 전에 면역성이 지키고 있다가 병균이 들어오면 활동하는 것처럼,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분이 지키고 계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그분의 말씀과 함께 그분을 내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유의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활용하세요.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의 분신으로 가장 신묘막측하게 창조한 하나님의 자식이에요. 우리와의 영원한 사랑관계를 맺기 위해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스스로 원해서 선택해서 누리는 것, 그 상관계.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랑의 극치의 표현이 우리에게 허락된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너희들이 스스로 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주는 것을 받아라. 내 말에는 창조의 역사가 다 일어나지 않느냐. 그러니 내 말을 믿어라. 그러면 내가 말한 대로 내가 이룰 것이다."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쉬운 겁니다. 그래서 안식일 신앙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똑바로 세워주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하실 일을 인간이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이루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 안식일이고 그 안식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맺은 언약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를 창조했으니 네가 필요한 것은 내가 다 줄거다. 내게 와서 받아라." 그게 완전한 쉼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 안에서 재창조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일이 말씀으로 주어진다 이 말이에요. 말씀으로.......말씀으로 창조된 것처럼 재창조도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천사가 물을 움직일 때 먼저 뛰어 들어간 자가 낫는다는 것은 하나의 전설, 유전이자 미신이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6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병이 오래된 줄 아셨어요. 그러시면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셨는데 그 물음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내가 너를 고쳐주랴?" 그런 얘깁니다. 이 중풍병자는 38년 동안 연못가에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지만 걷지도 못하는 처지라 들어가기를 매번 실패하니 얼마나 소외감을 느꼈겠습니까? 그래서 하는 대답이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인데 그 말은 “나를 빨리 저 연못에 넣어달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꼭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도움도 그런 식으로 구합니다. 내가 원하는 쪽으로 해 주십시오 하면서 소원하는 일이 있을 때 뭐가 조금 보이면 기도하고 무슨 기미가 보이면 "아, 이렇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구나" 이런 식으로 자기 생각, 자기 기대, 자기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만약에 찾아오셔서 "뭘 도와주기를 원하느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도와달라고 그럴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하는 자가 원하는 쪽으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쪽에서 이 중풍병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다 이 말이에요. 예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으니까 우리의 필요를 아실 것 아니겠어요? 이 중풍병자는 "옳거니, 나를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생겼구나. 나를 넣어주겠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기까지 이 환자가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이렇게 간절할 때에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붙잡으면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주시는데 이때의 우리의 반응이 참 중요하고 우리가 알아야 할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셨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38년이 된 못 걷는 환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그러면 우리 같으면 뭐라고 그러겠어요? 내 계획과 내 소원과 내가 기다리는 것이 있는데 다른 쪽으로 하나님이 말씀을 주실 때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의 말씀일 뿐이고 하나님의 방법이지 나한테는 안 맞고요. 나는 이런 방법으로 하고 싶어요." 이런 식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더라 이 말입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하면 "예수님, 나 원수를 사랑 못하겠어요."하고 운단 말이에요. "미워 죽겠는데 어쩝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환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면 "나 못해요. 38년이나 오랫동안 누워서 못 일어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일어납니까? 당신이 내 손 붙잡고 나를 좀 일으켜서 걸어가라고 하든지, 물에 들어갔다 나와서 고친 다음에 걸어가라고 하든지 하세요"하고 기다리고 있을거라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 환자가 다른 말 한마디도 안하고 일어나서 걸어갔다고 하는 것은 "아멘,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바로 이것을 했다 이 말이에요. "걸어가라구요? 예, 가겠습니다." 자신이 완전히 포기될 때 그분이 말씀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대로 가지 않을 때에 그것은 산이고 길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막고 있습니다. 그때에 아니라는 것을 절박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이게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깨닫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이 회개가 일어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명을 받고 일어날 수 있는 다음 기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내가 계획하고 구상한 대로 그것을 추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얼마나 매달리고 기도를 하고 있는지 몰라요. 하나님이 여러분 수명 다 되었다고 무덤에 묻히라 하면 감사히 가야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임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주 안에서는 잠자는 자가 더 편합니다. 푹 자고 깨면 예수님 재림이고 하늘로 직행하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살려고 스트레스 받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이게 좋은가 저게 좋은가 찾아다니지 말고 그냥 예수님께 굴복하고 그분의 말씀 받고 일어나면 그 말씀이 우리를 일으켜 줄 텐데. 그것을 우리가 못 믿고 자꾸 자기 식대로 행하면서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비니까 그게 행해져요? 중풍병자처럼 못 일어나죠.
이 중풍병자가 예수님 말씀 듣고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그 말씀을 받아들인 증거입니다. 그것은 확실한 믿음의 증거에요. 믿음에는 행함이 함께 임한다고 했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그랬거든요. 이 환자의 믿음은 그 말씀을 믿는 것 아닙니까! 일단은 그 말씀을 믿었다 이 말이에요. 그 말씀을! 그 말씀을 믿었고 증거는 일어났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환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걸어간 것은 창조의 생명이 이 사람에게 들어와서 이 사람을 통하여 나타났는데 반드시 이 사람이 해야 될 몫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말씀을 받고 그대로 행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되는 겁니다. 우리가......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활용해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을 수 있고 내 안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없는 것도 있게 하시는 능력, 죽은 나사로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서 걷게 하시는 그 믿음, 베드로를 물위로 걷게 하는 그 능력은 전부 하나님께 있는 능력입니다. 이 의미는, 그 초능력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하고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피조물인 인간하고 관계를 회복하고 서로 협력하라는 뜻입니다. "서로 의논하고 서로 변론하자. 우리가 서로 만나서 교제하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하고 인간이 관계를 회복하면 우리에게 초능력이 오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관계회복은 떨어진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거절하고 생명적인 관계가 끊어진 우리 인간이 그분의 말씀을 받고 또 다시 생명적인 관계를 회복하도록 예수님이 이 땅에 중보자 역할을 하고 계신다 이 말입니다.
죄인 스스로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관계를 맺어주시려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로서 우리를 재창조 해주겠다고 하는 구속의 언약이 들어있습니다. 그분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창조주이므로 그분에게만 경배하라 그게 안식일 예배 아닙니까! 심지어는 하늘님 우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 우상. 그래서 날마다 교회 가서 하늘님께 빌고 아무 생명도 한방울도 못 얻고 그냥 또 돌아오고....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을 그 어떤 단어 속에서 받는 게 아닙니다. 하늘님 우상을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지 몰라요. 창조주를 믿어야 합니다. 창조주를 믿는 신앙은 동시에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그분이 말씀으로 계시지 않습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으로 만물이 창조되고 그 말씀으로 모든 것을 관리하시고 우리 인간도 말씀으로 걷게도 하시고 말씀으로 앉게도 하시고 쉬게도 하시고 말씀으로 이 지구 역사를 이루어 오신 하나님.
다니엘 예언서를 보면 이 지구 역사를 이루신 분도 하나님이세요. 무엇으로? 말씀으로. 미리 예언하셨잖아요. 그 말씀하신 때가 되니까 그 말씀으로 이루어져 나온 게 역사입니다. 그 말씀으로 또한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말씀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떨어졌는가를 짚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분신으로서 영원히 함께 살텐데 어디서부터 떨어졌는가! 그게 죄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이 생명적인 관계인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다 이 말입니다. 거기서부터 우리가 끊어져서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그 "말씀이 육신(요1:14)"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과 접촉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주셔서 우리의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예수님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면 말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말씀을 받아들일 때에 이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히4:12)"하면서 나를 움직이게도 하고 웃게도 하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우리의 모든 동기까지도 그 말씀이 역사해 주겠다 이 말입니다. 그 말씀 안에 창조의 생명이 있다는 말이에요. 38년 된 환자에게 창조주이시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걷게 하셨습니다. 그 말씀 속에는 있으라 하면 있어지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걸어가라 했고 그 말씀을 받고 걸어가면 그 생명이 역동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살지만 또 하나님의 말씀을 놓으면 다시 죽어간단 말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이해하시면 너무 쉽습니다. 이 은혜의 때고 구원의 때에 우리가 말씀을 받고 살수도 있고 우리 스스로 말씀을 버리고 죽을 수도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선택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계속 보고 일하고 내일 또 예수님 말씀 받고 순종하면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내 안의 주인이 예수님이 돼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이에요. 예수님을 구주로만 인정하지 말고 동시에 개인적인 주인으로 영접해야 나를 지속시켜줍니다. 구주로만 영접하면 잠시 그냥 죄 용서 받은 칭의 경험이 일어나지만 그분을 내 주인으로 모시고 계속 그분에 의하여 살 때에 지속되면서 점점 성화가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화를 통하여 영광에 들어가는 것 아니겠어요?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롬8:30)"신다고 했으니까 그대로 하실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만나는, 곧 말씀을 받아먹어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 다음 그 말씀의 사역에 따라서 살아가는 경험까지 하려면 여러분의 의지가 거기에 동의를 해 주어야 됩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선택으로, 선택으로 우리 인생이 꼴 지워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직 "기록되었으되"로 살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이 이렇습니다. 저는 하나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 안에서 살면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를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재창조가 일어납니다. 이게 하나님이 세우신 법칙입니다.
● 우선 창조 초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실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 외에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지 않았을까요? 아닐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번식하고 충만할 때 이런 이런 일을 하라, 하지 말라하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4장 1절부터 3절까지 보시면 아담의 아들들 가인과 아벨이 제사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3절에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말은 번역이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영어번역에는 'at the end of days'라고 바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날들의 끝이 언제지요? 바로 제칠일 안식일이며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쫓겨난 후에도 계속 그 아들들까지 제칠일 안식일에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 제칠일 안식일에 대해서는 이미 긴 설명으로 말씀하셨고 하늘의 율법은 계속 유효한 것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창조 이후로 수많은 역사가 있었지만 모세가 태어나기 전에는 하나님은 그것을 다 기록하지 않으시고 강조하고자 하는 것만 말씀하셨습니다. 에녹에 대해서는 300년 동안 동행했다는 것을 강조하셨고 아브라함 시대에 와서는 대부분이 목적이 그 족보의 형성에 대한 진술을 강조하기 위하여 기록하셨습니다. 그 당시를 설명하는 성경말씀에 안식일이 없다고 하여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성경은 B.C1500년경부터 AD100년경까지 기록되었습니다. B.C1500년경에는 6천년 전부터 있던 일들을 간략하게 적으시고 출애굽하면서 세세히 기록을 하신 겁니다. 간략하게 적었다고 노아도,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법 없이 살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AD100년부터 2004년까지 긴 공백기간 동안의 성경말씀이 없다고 계명이 무효한 것일까요? B.C400년부터 AD60년까지 성경이 기록되지 않은 것을 아실 겁니다. 그 기간에는 선지자도 계시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에 하나님 믿는 사람도 없고 율법도 없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창14:20에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처음 있고 모세 이야기까지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십일조 제도가 없어진 것일까요? 수천 년 역사 중에 그 때 한 번 나왔다고 해서 그 때 당시만 지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 현 시대에 어느 그리스도인 중에는 성경에 담배피지 말라는 말씀이 없다고 하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피는 분들을 봅니다. 그럼 허락하신 걸까요?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고전3, 6, 7, 10장 등에서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니 먹든지 마시든지 온갖 더러운 것을 피하라고 권면하시며, 그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멸한다고 경고까지 하시며 마지막 시대의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언급이 안 되었다고 해서,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말일 성도들은 1부 다처제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1부 1처제의 말씀이 없다고 하여 다처제를 허락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남자 한명에 여자 한명을 창조하셨지 남자 한명에 여자 여럿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인을 여럿 두었던 아브라함도 솔로몬도 하나님은 그에 상응하는 죄 값을 치르게 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안식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창조 때에 만들어진 안식일은 계속 지켜온 것입니다. 그것이 출애굽하면서 성문화가 된 것이지요.
① ‘기억하여’라는 말씀 속에는 “내가 창조 때에 이미 안식일을 주지 않았느냐”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② 노아 때는 “또 칠일을 기다려”(창8장)라는 말씀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③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창26:5)에서 보듯이 십계명이 주어지기 전에 아브라함이 안식일을 지킨 것도 알 수 있습니다.
● 다음은 십계명이 주어지기 전에도 안식일을 지킨 더욱 확실한 증거의 말씀입니다. 역사(役事)는 ‘일’의 의미입니다. 모세가 안식일 회복 운동하는 것을 바로가 저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역사(役事)를 쉬게 하느냐 가서 너희의 역사(役事)나 하라 또 가로되 이제 나라에 이 백성이 많거늘 너희가 그들로 역사(役事)를 쉬게 하는도다 하고" (출5:4-5)
●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이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5:26)
십계명을 반포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안식일은 율법이기도 하고 규례며 전통적으로 지켜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신약의 히브리서에서 확증하고 계십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히4:3)
● 히4:7절에 보면 다윗도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히브리서 3~4장까지 “안식”이란 말이 열두 번 나옵니다. 열한 번은 창2:2절과 같은 원어인 ‘카타파우시스’로 되어있고, 한 번은 4:9절에 ‘사바티스모스’로서 안식일 준수를 의미하는 ‘안식일의 안식’입니다. 창세기부터 마지막 때까지 계속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구약)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4:4-10)
11. 십계명은 범죄 이후에 성립된 것이고 하늘에서는 율법의 정신으로 나온 것뿐입니다. 다음은 화잇 선지자의 글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이 창조되기 전부터 있었다. 천사들은 이 율법의 통치를 받았다. 사단은 하나님의 정부의 원칙들을 범하였으므로 타락하였다. 아담과 하와가 창조된 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그들에게 알려주셨다. 그 당시에는 율법을 기록해 두지 않았고 다만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으로 반복해 주셨다. 넷째 계명인 안식일은 에덴동산에서 제정되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지상에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을 제정하셨다. 아담이 범죄하고 타락한 후에도 하나님의 율법에서 삭제된 것은 없다. 십계명의 원칙은 타락하기 전에도 있었으며 또한 그 특성은 거룩한 지위에 있는 무리와 상태와 부합되었다. 타락한 후에도 이 계명의 원칙은 변개되지 않았으나 타락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적합하도록 하기 위하여 추가해 주셨다.” (살아남는 이들 p139)
구약에서의 안식일
1. 창조 때
․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 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느니라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창2:2)
【안식일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인가? 아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하나님의 창조 기념일이다. ▶노아 시대의 7일 제도- 아담 이래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지켜야 할 법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 법도 중에는 인간의 행복과 창조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설정된 안식일도 분명히 있었다. 노아 시대에도 7일 제도가 유지되었던 사실 (창7:4, 10 8:10,12)을 보면 안식일 제도가 이어져 내려 왔음을 알 수 있다..】
2. 광야에서
․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제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출16:4-5)
【만나를 통해서 안식일 준수 교육을 받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광야의 음식, 만나를 먹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만나를 통하여 안식일을 교육하셨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동안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안식일을 다시 철저하게 지키도록 훈련하신 것이다. 만나는 6일 동안 내렸고 일곱째날 안식일에는 내리지 않았다.】
3. 시내산에서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제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20:8-11)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는 그분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예배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서만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물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가장 정당하고 합리적인 시간은 창조의 기념일로 제정된 제칠일 안식일이다.】
․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출31:13-17)
【결혼제도와 안식일 제도는 사람이 범죄하기 전에 제정된 것이다. 성경에서 안식일이 제정된 경위나 시기를 볼 때에 안식일이 유대인들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안식일 준수를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요구하신 것이지(지금의 우리처럼) 어떤 특수성 때문이 아니었다.】
․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 거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레23:32)
【제칠일이 나라마다 틀리지 않느냐는 반문을 할 줄 아시고 미리 말씀을 해 두셨다.】
․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레23:32)
【창조 때처럼 하나님의 하루는 저녁부터 저녁인 것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이교가 자정 12시에서 자정 12시로 바꿔 놓은 역사가 있다.】
․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사58:13)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사66:22-23)
【여기서의 월삭은 매달 초하루에 드리는 예배를 가리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지 절기와는 다름을 밝혀둔다. 전통적으로 지키는 하나의 규례 (건강법규, 사회법 등)이다. 구약시대 토요일, 신약시대 일요일, 천국에서 토요일?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영원하듯이 율법도 영원하며 그 중의 하나인 안식일도 영원하다】
4. 비벨론 포로 이후
․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겔20:12, 20)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때 저들은 번영하였고, 안식일을 무시하며 존귀히 여기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채찍으로 삼아 저들을 징계하셨다. 안식일은 구약시대 전체를 통하여 거룩하고 존귀한 날로 지켜지도록 요구하였다..】
신약에서의 안식일
1. 예수께서 친히 지키심
․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4:16)
【창조주께서 안식일을 지키심- 안식일을 제정하셨던 창조주, 그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안식일에 자기의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시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고 감동적이다. 예수님께서 유대 관원들과 안식일 논쟁을 여러 차례 하셨지만. 그 논쟁의 내용은 ‘안식일을 어느 날 지킬 것이냐‘ ’안식일을 지켜야 되느냐 마느냐’가 아니고 안식일을 지키는 정신에 관한 것이었다. (마12장 참조)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에 일곱째 날 안식일을 지키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5:17-19)
․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하시고 (마12:12)
․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15:7-9)
․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막7:9)
․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눅6:5)
【주일은 ‘주의 날’ 그러므로 주일=토요일 안식일】
․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니라 (눅16:17)
․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24:44)
【예수님이 안식일에 예배드리면서 읽으신 ‘성경’은 ‘구약성경’이며 이 성경을 항상 상고하라 하셨으며 이 구약성경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라 하셨다. 이제는 구약과 신약 전부이지만.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말씀이라는 말로 안식일을 부인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5:39)
․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38-39)
․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로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6:45)
․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요9:14)
【안식일은 복 주시는 날이며 거룩한 날】
․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15:10)
2. 예수님 십자가 직후
․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눅23:54-56)
【안식일이 거의 된 예비일은 금요일 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은 금요일 오후 3시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는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이 있었다. 금요일 저녁 해가 넘어가기 전에 예수의 시체는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무덤에 넣어졌고, 그 이후의 여자들이 행동에 대해서 위와 같이 기록되었다. 십자가 직후에도 계명을 좇아 안식일을 준수한 명백한 기록이다.】
․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마28:1)
【예수님은 일요일에 부활하셨으므로 ‘안식 후 첫날’의 안식일은 토요일임을 모든 기독교인들은 인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계명을 지키며 불순종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단 한 가지 불순종으로 인하여 쫒겨 났음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온전한 순종을 원하신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할 과제가 있다. 】
․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막16:9)
3. 예수님 부활 이후
․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행13:14)
【예수님 제자들도 아버지의 계명을 지킨 예수님의 계명을 그대로 지킴】
․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행13:27)
․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행17:2)
【회당이 없는 곳에서도 안식일을 준수한 사도 바울-“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행16:13)】
․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행13:42, 44)
․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행18:4)
․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히3:11-12)
․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히3:18)
․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히4:4)
․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4:9-11)
․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2:14)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2:17)
․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약2:20)
․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2:22)
․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요일2:7-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에서 새 계명은 십계명임. 곧,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 백성 되리라는 약속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언약을 버렸음. 그래도 그들을 예수님은 구원하시고자 다시 그들에게 의미를 재부여 해주심. 사도 요한은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고 권면한 후, 곧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요이1:5-6)고 말한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이미 신명기 6:5, 레위기19:18에 나왔던 계명이다. 그것은 결코 새 계명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사랑 없이 율법의 문자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는 계명을 재차 반복해 주신 것이다. 더구나 사랑만 하면 된다는 것은 전혀 예수님의 의도하신 바가 아니다. 요한복음14:15에서는‘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다. “다락방에서 제자들과만 같이 계실 때에 예수님의 처음 명령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계명이 제자들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새로운 이념과 충동이 그들을 지배하여야 하였으며 새로운 원칙이 그들로 말미암아 실행되어야 하였으며 그분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그들이 사랑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여야 된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아셨다....” (시대의 소망 p677~678) 】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4:2-3)
4. 예수께서 예언으로 언급
․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24:20)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는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이다. 예수님 돌아가시고 안식일이 부활절 기념일로 바뀌었다면 이 말씀은 설명이 불가능한 것.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 세상 멸망의 표징이니 설명이 불필요하다.】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14:12)
왜 하나님께서 기억하라고 말씀하셨나요?
권위 있는 조사와 앙케이트를 통해서 한가지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것은 많은 현대인들이 성경에 나오는 창조를 부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보고서에서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조사에 응한 목사들 중의 72% 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에 대해서 여러가지 모양으로 의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창조론과 같은 기독교의 기본 신조에 대한 불신은 동정녀의 잉태나 영원한 생명과 같은 기독교의 다른 기본적인 교리들까지도 부인하도록 유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기록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천연계들을 단순히“있으라”고 명하심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성경의 기록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과 회의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창조론을 믿었던 아담의 후손들 조차도 창조 후에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수백만의 가짜 신들의 혼돈시키는 영향으로 인하여 창조의 기적을 잊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창조의 놀라운 역사에 대한 지식을 보존하시기 위해서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말씀으로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과 잡신들을 확실하게 구분시켜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기적과 창조주가 영원토록 기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창조에 대한 진리를 끈질기게 공격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권위를 영원히 확고하게 만든 태초의 창조 주일의 기적들을 인류가 계속해서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셔야만 하였습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를 영원토록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분께서는 무엇을 만드셨을까요?
창조 -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표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일의 일곱째 날을 거룩한 날로서 떼어 놓으셔서 쉬고 기억하게 하심으로서 당신의 창조의 능력을 기념토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고 인정하도록 하기 위한 강력한 안전장치가 될 것이며, 동시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지 않은 모든 잡신들의 정체를 샅샅이 폭로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기록은 하나님의 창조의 특별한 능력을 기억하는 찬미를 자주 불렀습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예레미아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요 ...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예레미아 10:10-12.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의 진리를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신다는 사실을 인류의 눈으로 확인하기를 원하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도덕율인 십계명을 돌비에 기록하셔서 모든 영혼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고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십계명이라는 영원한 원칙들 위에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를 세우셨으며, 그분 자신의 완전한 품성을 나타내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아무일도 하지말라 이는 엿새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들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애굽기 20:8-12.
창조의 놀라운 역사를 기념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경이로운 지혜와 빛을 인류에게 제공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마치 지구가 지구축을 중심으로 하여 회전하듯이, 안식일을 기억하는 자들은 지구 위의 여러 곳을 다니며 모든 남녀노소를 만날 때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에 창조하셨다는 기별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안식일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식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창조주를 잊어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태초 이래로 모든 인류가 안식일을 정확하게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왔다면, 이 세상에 거짓 신들이나 무신론주의자들이 이처럼 세상을 뒤덮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회개 - 창조적인 능력의 역사
물리적인 물질들을 창조하신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기록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질의 창조와 마음의 재창조는 두개의 별개의 과정이지만, 동일한 근원으로부터 생성된 과정입니다. 회개나 마음의 재창조에도 물질을 창조하는 것과 동일한 정도의 능력이 요구됩니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creat)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4. 사도 바울은, 참 하나님과 모든 가짜 신들을 구분짓는 것이 창조의 능력이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의해서 거듭난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만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창조의 기념일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표(sign)가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sign)을 삼았노라” 에스겔 20:12.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하게 된다는 표징이라는 사실을 부디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안식일을“거룩하게 하라”라는 말은 거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따로 구분하여 놓으라는 말이며, 또한 하나님의 재창조 능력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의미도 됩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마귀가 왜 제칠일 안식일을에 대항하여 그렇게도 끈질기고 필사적인 전투를 감행해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거의 육천년 동안, 그는 하나님의 권위의 특별한 표시인 안식일의 존엄성을 파괴히기 위해서, 전통과 잘못된 지식 및 종교적인 편견을 통하여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권위의 표인 안식일은 창조주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단의 기만과 계략을 온 천하에 드러냅니다. 사단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이사야 14:13,14. 사단은 자신이 경배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사단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위와 그분의 주장을 무효화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그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것을 근거로 이루어지는데, 안식일은 바로 그 권위의 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진짜 안식일을 파괴하고 가짜 예배일을 만들어 냄으로써,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하고 이것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정부를 세울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권위를 중심으로 한 전쟁
과거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치루어진 대쟁투를 되돌아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 투쟁의 촛점은 항상 권위 문제에 맞추어졌습니다. 마귀는 창조주 하나님께 대항하기 위해서 두가지의 예리한 공격을 가해 왔습니다. 첫번째는 진화론이며, 두번째는 창조주의 표인 제칠일 안식일의 파괴입니다. 사단은 오랜 세월동안에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점차적이면서도 끈질긴 시도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려는 사단의 시도가 상상 이외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다윈의 유기적 진화론의 영향으로 인하여 종교적인 회의주의자나 불가지론자들로 변해 버렸습니다. 타락한 사람에게는 자신을 죄에서 구원해 줄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성경의 진리를 반박하는 진화론은 창조의 사실 뿐만 아니라 구속의 계획에도 치명타를 남겼습니다. 또한 참 안식일에 대한 사단의 공격은, 하나님께서 모든 율법에 대한 특별한 순종의 표로서 주신 안식일을 왜곡시킴으로써, 십계명 중에서 한가지 계명을 불순종하거나 무시하도록 수백만의 사람을 미혹시키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사단은 매우 교묘하고 노련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서히 성취되는 전략입니다. 또한 여러 시대에 걸쳐서 사람들의 마음을 기만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단의 전략에는, 하나님을 섬기다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사단을 섬기기로 돌아서는 따위의 극적인 일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모든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기만과 속임수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기만 가운데는 종교적인 속임수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단은 바울이 로마서 6:16을 기록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그 원칙을 이해했습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순종은 충성과 경배의 대상을 결정하는 최고의 표입니다. 만일 사단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불순종하게 할 문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순종하도록 만드는 기회를 갖지 않았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법을 전복시키기 위한 결정적인 도전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파괴시키고, 사람들의순종을 자신에게 돌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서 어떤 계명을 공격하는 것이 가장 결정적이고 효과적인 것이 될까요? 하나님의 창조력과 그분의 다스리시는 권위을 나타내는 4째 계명을 공격하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공격이 되지 않겠습니까? 안식일은 누가 참 하나님인가를 말해 주는 표임을 알고 있는 사단은 태초 이래로 계속해서 안식일을 증오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당신의 백성이 그분의 율법에 충성하고 있는지를 시험하는 표로서 안식일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애굽기 16:4.
율법을 시험하는 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모든 십계명을 준행하는지 안하는지에 대한 표로 삼으셨기 때문에, 사단은 안식일을 모든 시대를 통하여 커다란 문제거리로 삼기로 결심했습니다. 안식일을 파괴하고 가짜 경배일을 만드는 사단의 어마어마한 계획은 오래 전부터 진행되었습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이 죽은 이후에, 사단은 이교의 영향을 서서히 받아들인 타협한 그리스도 교회의 연약함을 이용하였습니다. 사단은 자신이 만든 가짜 예배 제도를 강요하기 위해서 세계적인 종교 국가를 설립했습니다.
이교 로마의 황제인 콘스탄틴의 정치적인 회개로부터 시작하여 1000년 이상 계속된 배도의 검은 역사 가운데에서 안식일에 대한 사단의 계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공언하는 콘스탄틴 황제가 첫번째로 취한 조치는, 주일 중의 일곱째 날인 안식일 준수를 반대하는 법을 제정하고, 이방 종교의 태양 숭배날로 준수되던 주일 중의 첫째 날에 쉬도록 하는 법을 공포하는 것이었습니다. 황제는 태양 숭배자들과 그리스도 교인들을 종교적으로 교묘하게 연합시킴으로써,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정직한 양심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교의 일요일을 준수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사형시키겠다고 공포한 이교 협의회의 결정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역사적인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4-5세기 동안에, 주일 중 첫째날은 이교의 활발하고 강압적인 선교(?) 덕분에, 성경이 증거하는 참 안식일을 대신하여 높여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실은, 기독교회 지도자들의 편견과 잘못된 지식으로 인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 준수가 일요일 준수로 변경된 것을 증명하는 역사적 증거들을 정확하게 볼 수 없는 현재의 상황입니다. 그들이 가진 편견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생기게 되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단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자신의 공작을 펼쳐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식일에 대한 역사를 자연스럽고 쉽게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시대를 통하여서, 그는 자신의 위조 경배일에 대한 순종을 강화하기 위하여 미묘한 거짓 논조들을 세우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참 하나님을 가리키는 참 안식일을 미워합니다.
우리는 제칠일 안식일에 대한 사단의 공격을 노출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성경에서 한번도 지지하지 않은 날인 주일 중 첫째 날을 예배일로 지키게 된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친히 쓰신 율법의 의미를 잘못 해석할 수 없습니다.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아무일도 하지 말라.” 그러나 수백만의 사람들은 그 계명을 순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일요일이 이교제도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반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백만의 사람들은 십계명에 명백하게 지시된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듭해서 말씀드리지만, 그 이유는 여호와의 거룩한 안식일을 대항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사단의 교묘한 논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논조들 가운데 몇가지 궤변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주장 : “안식일은 오직 유대인들만을 위해서 제정되었다”
이러한 거짓말은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을“유대인의 안식일”이라고 부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표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곱째 날을“여호와의 안식일”(출애굽기 20:10)이라고 불렀지, 결코“유대인의 안식일”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가장 훌륭한 전도자로서 가장 많은 신약 성경을 기록하였는데, 종종 유대인들에게만 특별히 관련이 되는 기록을 했습니다. 그는“유대 온 족속”(사도행전 10:22),“유대백성”(사도행전), “유대인의 땅”(사도행전 10:39), 그리고 “유대인의 회당”(사도행전 14:1)이라는 말은 했지만, 결코“유대인의 안식일”이란 말은 하지 않았던 사실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그가 안식일에 대해서 여러번 언급했지만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마가복음 2:27)라고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실 당시에는 이 세상에 오직 아담부부만이 살고 있었습니다. 창조 이후에 적어도 2,000년이 지나기까지 이 세상에는 한명의 유대인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 주일 당시에 안식일이 유대인만을 위해서 제정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태초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처럼, 결혼제도 역시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결혼하였다고 해서, 결혼 제도가 유대인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태초에 제정된 두가지의 아름다운 제도인 결혼과 안식일 제도는 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 자신이 세우신 것입니다. 두 제도 모두 사람을 위해서 제정되었고, 두 제도 모두 창조주의 특별한 축복을 받았으며, 두 제도 모두 에덴 동산에서 거룩한 것으로 제정되었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거룩한 제도입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에덴 동산에서 안식일을 만드셨던 분은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 입니다. 그분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시는데에는 한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마가복음 2:28). 만일 그분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면 안식일은 주님의 날 즉,주의 날이라고 불리워질 수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0에서, 사도 요한은“주의 날”에 계시를 보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를 보았던 날은 주의 날 즉,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은 성경 가운데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고안되고 주장된 유일한 날입니다. 십계명을 기록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여호와의 안식일”(출애굽기 20:10)이라고 부르셨으며, 이사야서에서는“나의 거룩한 안식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이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3,14.
바울은 예수님을 창조주로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 그의 사랑의 아들, ....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더라 ....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고” 골로새서 1:13-16.
예수님을 안식일로부터 분리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큰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창시자요, 창조자시며,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며, 안식일의 제정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안식일에 부여하신 축복을 소흘히 여기는 것은 그분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만의 것이다”라는 논리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안식일이 창조 이후 어떤 한정된 기간 동안에만 존재했었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실입니까? 제칠일 안식일은 결코 없어지거나 폐하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인간 가족이 죄를 범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의 표상이나 그림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어떤 그림자들이나 의식들은 죄의 결과로서 제정된 것이며, 죄로부터의 구원을 설명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제정된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 중에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표상하기 위한 그림자로서 제정된 희생제사 제도가 있습니다. 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동물을 잡아서 제사드리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제사제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에 폐지되었는데, 왜냐하면 표상으로 사용되었던 제사나 의식이, 그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이루어짐으로써, 그 맡은 바 목적을 마치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칠일 안식일은 표상이나 그림자를 의미하는 의문의 율법에는 포함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장래일의 그림자란 무엇인가?
바울은 골로새서 2:14-16에서,“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것으로서 임시로 존재했던 제도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제도를 먹고 마시는 제사와 의식법에 명시된 연중 절기들이라고 설명하면서, 그것이“폐지”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성경절에 보면 안식일들(sabbaths)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그 안식일들을“장래 일의 그림자”인“안식일들(sabbaths)”이라고 부른 것을 주의 깊이 보시기 바랍니다.
2가지의 안식일이 성경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그렇다면 도데체 어떤 안식일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는 말입니까?”라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네, 적어도 1년에 4번의 절기 안식일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 절기 안식일들이 폐지되었다는 말입니다. 절기 안식일로서 일정하게 지정된 날이 있었는데, 바로 그 절기 안식일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폐지된 안식일인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림자들이었며, 특정하게 지정된 희생제물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 모든 연중 절기 안식일들은 레위기 23:24-36에 묘사되어 있으며, 36절과 38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삼고 번제와 소제와 희생과 증제를 각각 그날에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성경은 매년 있는 그림자로서의 절기 안식일들과 매주마다 있는“여호와의 안식일”을 명백하게 구분짓고 있습니다. 의문의 율법에 명시된 절기 안식일들은 십자가에서 폐지되었습니다. 그 안식일들은 죄의 결과로서 첨가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들을 위한 희생을 단번에 치루시자, 그러한 것들은 더 이상의 희생 제물와 절기 안식일과 같은 제사 의식들이 필요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에 명시된 제칠일 안식일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거룩하게 되었고, 후에 하나님께서 친히 손가락으로 쓰신 위대한 도덕율 중의 하나로 선정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특성 그대로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확실하게 믿어지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다음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이라” 마태복음 5:17-18.
두번째 주장 : “일곱날 중 그저 아무 날이나 지키지”
이같은 논리를 통하여, 사단은 온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안식일을 대치할 어떤 날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돌비 위에 시대를 통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 위대한 법을 기록하셨습니다. 모든 말들은 엄숙하고 의미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단 하나의 문장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양면성을 띄었거나 모호하고 신비한 것이 없었습니다. 죄인들과 그리스도인들, 배웠거나 배우지 못했거나를 막론하고 십계명의 단순하고 명백한 말들을 이해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를 의도하는 것이며, 아무도 그 율법이 너무 복잡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모른척 하거나 무효화 시키려고 애쓸 수 없습니다.
십계명의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희는)하지 말찌니라.” 그러나 십계명의 중심부에 있는 네째 계명은“(안식일을)기억하라”는 말로 끝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계명을 다른 계명들과 다르게 표현하셨을까요? 그것은 전에는 존재했었지만 잊혀지게 된 어떤 것을 기억하라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에 잊어버렸던 안식일을 기억해서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창세기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안식일의 기원을 묘사합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였음이니라” 창세기 2:1-3.
어떤 날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까? 일곱째 날입니다. 그 날을 어떻게 거룩하게 지킵니까? 쉼(안식함)으로서, 그러면 그 외의 다른 여섯날은 거룩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아니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여섯날 동안은 쉬지 말고 일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축복하시면, 거기에는 분명한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부모들은 하나님께 자기 자녀들을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어떤 중요한 차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일곱째날은 다른 여섯 날과는 다른 날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 속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몇가지 질문을 더 해 봅시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 날을 축복하셨습니까?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엿새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며, 일곱째 날은 이 세상의 생일이요, 그분의 능하신 행위를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기념일인 안식일이 변경될 수 있습니까?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념일은 어떤 일이 성취된 사실을 그날의 근본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8월 15일은 광복절 입니다. 그날이 변경될 수 있습니까? 아니오. 왜냐하면 우리나라가 일본에게서 해방된 날이 1`945년 8월 15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일도 변경될 수 없습니다. 그날은 여러분이 태어난 어떤 일정한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지나간 역사가 여러분의 생일과 광복절과 안식일을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서서히 변경시켰다면, 우리는 기만 가운데서 어떤 다른 날을 광복절이라 부르고, 또 다른 날을 안식일이라 부를 수는 있지만, 우리가 부르는 그 다른 날이 참 광복절이나 참 안식일이 될 수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기 마음대로 쉬는 날을 선택하도록 하는 특권을 주신 적이 있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사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당신 자신의 선택으로 정하셨고 인치셨으며, 아무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확증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나오는 만나를 주시는 사건에 관련된 이야기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인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날이 거룩한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매주마다 세가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1) 안식일인 일곱째날에는 만나가 전혀 내리지 않았습니다. (2) 주중의 평일에는 그들이 만나를 보관한채 밤을 지새고 나면 그 만나가 썩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3) 여섯째 날에는 만나를 평상시보다 두배로 거두어서 일곱째 날인 안식일 동안에 만나를 먹을지라도, 만나는 여전히 달콤하고 신선한 채로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동일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일곱날 중 아무날이나 거룩하게 지켜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일곱째 날인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려고 했습니다. “제칠일에 백성중 더러가 (만나를)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출애굽기 16:27,28.
위에 기록한 장면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어떤 백성들은 다른 날을 일곱째 날과 마찬가지로 지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들이 첫째날이나 자기들이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다른 날을 지키려고 계획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일곱째 날에 일하러 나감으로써 당신의 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실까요? 네, 그렇습니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는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느낌과 전통과 습관에 따라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사람들 정죄하실 것입니다. 야고보는 십계명 중 단지 한가지만 범해도 죄를 짓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되느니라.” 야고보서 2:10,11.
세번째 주장 : “어느 날이 진짜 일곱째 날인지를 알 수 없다”
이 논리는, 넷째 계명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궤변 입니다. 참 안식일을 알 수 있는 네가지 확실한 증거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겠습니다.
1. 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금요일에 돌아가셨고, 주일 중 첫째날인 일요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사실상, 모든 교회들은 이 사실을 부활절 일요일과 거룩한 금요일(부활절 전의 금요일)을 지킴으로써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기 성경의 증거가 있습니다.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여 이를 내려서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누가복음 23:52-53.
여기에 예수님께서 안식일 전날에 돌아가셨다는 증거가 나와 있습니다. 그날은 “예비일”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그날이 안식일을 위하여 예비하는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절들을 읽어보십시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55절, 56절.
여자들이“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는 말을 잘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계명은“일곱째날은.... 안식일이니”라고 말하므로, 우리는 그들이 토요일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안식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러 옮기운 것을 보고”누가복음 24:1,2.
연속된 이 세 날에 대한 누가복음의 설명은, 우리에게 얼마나 명백하게 안식일이 무슨 요일인지를 밝혀주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일반적으로 성 금요일이라 불리워지는 예비일인 금요일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좇아”일곱째 날인 안식일에 무덤에서 쉬셨는데, 그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 다음, 많은 사람들이 부활절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주일 중 첫째날에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성 금요일이나 부활절 일요일을 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참 안식일을 정확하게 정할 수 있습니다.
2. 일주일의 요일들을 혼돈케 할 정도로 달력이 변경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토요일이 예수께서 이 땅에서 지키셨던 날과 동일한 일곱째 날인 것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을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들이 세계적으로 사용하는 달력은 그레고리 달력이라고 불리우는데, 교황 그레고리 8세가 1582년에 달력을 약간 변경한 이후부터 그의 이름을 따라서 그레고리 달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레고리 교황이 달력을 어떻게 변경했습니까? 1582년 이전에는 주전 약 46년에 쥬리우스 씨이저가 만든 쥬리안 달력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쥬리안 달력은 일년을 365와 1/4일로 산정을 했는데, 일년은 실제로 365와 1/4 보다 11분이 모자랍니다. 그 11분들을 1582년에 이르기까지 계산해 보니까 태양계와 10일의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레고리는 요일은 변경하지 않은채, 단순히 그 열흘을 달력에서 제하여 버렸습니다. 1582년 10월 4일은 목요일이었고, 그 다음날인 금요일은 10월 5일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레고리는 10월 5일 대신에 10월 15일을 사용함으로써 하늘 전체와의 조화를 꾀했던 것입니다.
일주일의 요일들에 어떤 혼동이 생겼습니까? 아니오, 금요일은 여전히 목요일 다음에 오고, 토요일은 여전히 금요일 다음에 왔습니다. 일곱째날은 그대로 제 위치에 남아 있게 되었고, 주일의 순환은 한치의 방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토요일을 일곱째날로 지킬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16에서 지키셨던 그 동일한 날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according to his custom)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3. 참 안식일에 대한 세번째 증거는 너무도 확실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시대때부터 일곱째 날을 지켜왔으며, 오늘날도 그 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수천년 동안 달력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매주마다 아주 신중하게 요일을 세면서 안식일을 지켜왔습니다. 그들이 요일 세는 일에 있어서 어떤 착오를 범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하루를 잃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온 민족이 한꺼번에 24시간 동안 잠을 자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에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래로 안식일이 변경되었다거나 빠저버린 일은 없습니다.
주일의 기원은 창조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7일의 주기는 어떤 과학적
인 연구 결과나 천문학적인 이유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독단적인 계획이며, 거룩한 안식일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세상과 인간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주권의 표이며, 창조와 구속의 표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안식일 준수를 보존하시는 이유가 아닐까요? 우리는 이사야 66:22,23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네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안식일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너무도 귀중한 것이기에, 그분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아름다운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안식일을 영원히 지키도록 하실 것입니다. 만일 그 날이 그분에게 있어서 그렇게 귀중하다면 우리에게도 귀중한 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만일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그날을 지키게 된다면 지금도 그날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지금처럼 거짓 신들, 무신론적 진화론, 사람의 전통으로 가득찬 시대에, 참 그리스도인들은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충성의 표와, 그분의 능력으로 인간을 성화시키는 증표인 안식일을 어느 때보다도 정확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4. 네번째 증거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100가지 이상의 언어가 토요일을 “Sabbath”(안식일)이라는 단어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토요일에 해당되는 서반아어는 안식일을 의미하는 단어로 “Sabado”라는 말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이들 백여개의 언어가 증명하듯이 이미 오래 전부터 토요일이 안식일로서 준수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네번째 주장 : “안식일은 단지 애굽에서의 구원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이 이상한 논리는 구약 성경의 한 귀절에서부터 이끌어낸 사상인데, 안식일의 기원을 반박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논조입니다.
그들이 잘못 오용하는 성경절은 신명기 5:14,15입니다. “제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에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절로부터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도록 주신 것이라는 이론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제정하신 창세기의 이야기(창세기 2:1-3)와 하나님 자신이 친히 쓰신 넷째 계명(출애급기 20:11)은 안식일을 창조의 기념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두 성경절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종”이라는 낱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바로 앞에 있는 문장에서, 하나님께서는“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의를 주십니다. 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애굽에서 종으로서 있었던 그들의 경험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의 종들에게도 안식일에 쉬도록 함으로써 종들을 공정하게 잘 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유사하게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명령도 하셨습니다.“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들을 학대하지 말고 ...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레위기 19:33,3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계명을 순종할 것을 권면하시면서, 애굽에서의 구원의 사건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신명기 24:17-18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말며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을 포로 상태에서 해방시키신 그분의 선하심을 본받아 그들도 안식일에 종들을 친절하게 대하고, 나그네와 과부들을 공정하게 대하도록 권면하시기 위해서 신명기 5장 14절을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출애굽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제칠일 안식일과
첫째날 일요일에 관한 51개 사항 대비
제칠일 안식일 |
첫째날 일요일 |
1.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의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심으로 시작된 창조의 기념일 (창2:1~3, 출20:11) |
1.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심으로 일을 하신 날이다. 그러므로 안식할 날이 아니라 일하는 날 (창1:3~5, 겔46:1, 출20:9) |
2. 하나님께서 다른 여섯 날과 구별하여 기록하게 하신 날 (창2:3, 출20:11) |
2. 첫째 날이 다른 여섯 날과 구별된 거룩한 날이라는 언급은 한 마디도 없다. |
3. 하나님께서 다른 여섯 날과 달리 특별히 축복하신 날 (창2:3, 출20:11) |
3. 첫째 날에 축복이 약속된 기록이나 암시가 일체 없다.
|
4. 죄짓기 전 하나님에 의하여 에덴동산에서 제정된 날이므로 인간의 범죄 이전부터 존재한 날 (창2;3, 출20:11) |
4. 하나님의 의도나 구속의 역사에 관계없이 인간의 자의적으로 제정한 순수한 인간적 전통에 불과 |
5. 여섯째 날에 창조된 아담이 뒤늦게 창조된 하와와 가정을 이룬 뒤 맞이한 첫날로 인간 역사가 시작된 날 (창1:26~31, 2:1) |
5.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물질의 창조가 시작된 날에 불과
|
6. 범죄 전의 인류를 위하여 제정된 날로, “사람을 위하여” 있는 날이지 한낱 유대인을 위한 안식일이 아니다. (막2:27) |
6. 인류나 유대인을 위하여 제정된 아무 제도도 포함되지 않은 평범한 하루
|
7. “여호와의 안식일”로 불리워, 그날이 하나님께 속한 날임을 명시 (출20:10) |
7. “여호와의 첫째 날”은 상상할 수 없는 개념이다. |
8. 범죄 전에 제정되었기 때문에 범죄 이후 마련된 의식제도에 속한 그림자가 아니다. (히10:1) |
8. 인간이 구속에 관련된 하등의 상징이나 의의가 일체 주어진 바 없는 날 |
9. 창조의 범위와 고통당하는 계급과 심지어 동물의 복지까지도 고려한 범세계적, 범인류적, 범동물계적인 특별한 의미를 가진 날 (출20:10~11) |
9. 안식일이 지닌 범세계적, 범인류적, 범동물계적인 의의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물리적인 하루에 불과
|
10.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발해진 것 (출20:1, 신4:12~13) |
10. 기억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주어진 바 없는 날
|
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친히 손가락으로 쓰신 내용 (출31:18) |
11. 지켜야 할 하등의 이유가 주어진 바 없는 날
|
12.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은 새 언약에 포함되어 마음에 기록하신 내용 (렘31;33, 히8:10) |
12. 옛 언약이나 새 언약에 아무 관계가 없는 날
|
13.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은 불변의 도덕 법칙인 십계명에 포함되어 가장 거룩한 지성소의 법궤 속에 보관함으로써 그 신성성이 극도로 강조되었다. (신10;1~5, 계11:19) |
13. 도덕률이나 십계명에 부여된 신성성이나 영속성에 아무 관련이 없다.
|
14. 안식일 계명의 위치나 내용은 그것이 언약체결 형식인 종주조약에서 종주이신 하나님의 인의 역할임이 분명 (출31:13, 17) |
14. 하나님의 신분이나 권위나 영광에 일체 상관이 없는 날
|
15. 농사철 등 바쁜 때에도 지키도록 명하신 절대적인 명령 (출34:21) |
15. 구태여 일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
16.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멸망당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안식일 모독 (겔20:12~13) |
16. 범한데 대한 아무 징책이 언급된 바 없는 날
|
17.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안식일을 범한 것 (느17:27) |
17. 이스라엘의 역사와는 상관이 없는 날
|
18. 안식일이 바르게 지켜졌더라면 예루살렘은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보증이 포함 (느17:24~25) |
18. 첫째날의 준수를 근거로 어떤 보증도 주어진 바가 없다.
|
19. 유대인이 바벨론에 포로돼 간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안식일 모독 (느13:17~18) |
19. 첫째날을 범한 결과로 징벌이 실시된 사례가 일체 없다.
|
20.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함으로써 다른 거짓 신들과 구별하는 기준 (겔20:20)
|
20. 일요일 준수된 역사적 기원에는 분명히 태양신 숭배의 전통이 포함
|
21. 하나님을 죄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신 구속주로 인정하는 날 (신5:15, 출20:1) |
21. 창조의 기념이 아닌 것처럼 구속의 의의도 포함된 바 없는 날 |
22.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실 뿐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날 (출31:13, 겔20:12) |
22. 성화의 아무런 의의가 주어진 바 없다.
|
23.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이방인들도 준수의 의무와 축복이 약속된 날 (사56:6~8) |
23. 이방인이나 유대인을 포함시켜야 할 명령이나 약속이 주어진 바 없다. |
24. 안식일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이 존귀하게 하시겠다고 보증하신 날 (사58:3~5) |
24. 하나님께서 친히 첫째날에 대해 언급하시거나 관심을 표명한 경우가 한 번도 없다. |
25. 육신적으로 희망 없는 불구자까지도 준수함으로 축복이 약속된 날 (사56:3~5) |
25. 인류에게 어떤 미래의 축복을 가져다 줄 날로 언급된 바가 없는 날 |
26. 하늘의 영원한 즐거움과 안식을 약속받은 날 (사56:6, 58:14, 66:22~23) |
26. 장차 있을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되어 기록된 바가 없다.
|
27. 오랫동안 짓밟힌 후에라도 다시 회복될 것이 약속된 날 (사58:12~13) |
27. 짓밟히거나 회복되어야 할 의의가 주어진 바가 없는 날
|
28. 안식일을 속되게 가르친 종교 지도자들에게 엄중한 책임이 부과된 날 (겔20:26) |
28. 첫째날을 속되게 가르쳤다고 죄책을 지게 될 종교지도자는 아무도 없는 날 |
29. “인자는 안식의 주인”임을 선언하신 전정한 의미의 “주의 날[主日]”이다 (막2:28, 마12:8)
|
29. 인자는 첫째날의 주인이란 의미의 주일[主日]을 예수님께서 전혀 의중에 두신 여지가 없는 날 |
30.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안식을 체험하는 날 (마11:28, 히4:10) |
30. 첫째날에 연관된 안식의 개념은 일체 없다.
|
31. 이 날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지상생애 동안 습관적으로 준수하신 날 (눅4:16) |
31. 예수님 자신은 한 번도 첫째날에 대하여 언급하시거나 관심을 표명하신 바가 일체 없다. |
32. 예수께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친히 올바른 준수의 방법을 보여주신 날 (마12:1~15, 요5:10~18) |
32. 첫째날을 어떻게 준수해야할지 언급도, 모본도 주신 바가 없다.
|
33. 적어도 일곱 번 불치의 병을 고치신 날로, 인식일의 본래 목적을 메시야의 사명과 연결시킨 날 (눅4:16~19, 마12:10~13) |
33. 첫째날에 관련하여 아무런 영적 교훈을 주시거나 행적을 남기신 바가 없다.
|
34.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도 계속 준수되어야 할 날임을 천명 (마24:20)
|
34. 첫째날이 부활의 기념이 되어야 한다는 일체의 언급을 예수님 자신이나 사도들이 하신 바가 없다. |
35. 십자가 때문에 단절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눅23:56)
|
35. 신약성경에 8번 기록된 첫째날의 기사 가운데, 성만찬 등 성례를 이 날에 행해야 할 아무런 지시도 주어진 바 없다. |
36. 부활 후 30여년 지난 후에 쓰여진 사도행전에도 여전히 안식일로 불리웠다. (행13:44) |
36. 복음서나 사도행전에 “안식 후 첫째날”로 기록된 것 밖에 다른 명칭이 없다. |
37.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기별을 전파한 날 (행13:14, 30, 42~43) |
37. 첫째날에 연관시켜 부활의 기별이 전파된 기록이 성경에는 전혀 없다. |
38.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평생을 습관적으로 지킨 날 (행 17:2)
|
38. 첫째 날을 그리스도인의 예배일로 준수한 확고한 사례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유사 성구에 대해서는 비평 내용 참조) |
39. 서기 49년에 열린 예루살렘 총회에서도 준수 자체를 기정 사실로 한 날로 언급 (행15:21) |
39. 첫째날 준수 여부에 대해 논란하거나 결의한 일체의 기록초자도 없다. |
40. 사도 바울이 회당이 없는 이방 지역에서도 이방인과 함께 예배한 날 (행16:13~14)
|
40.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일요일에 관하여 친히 언급하거나 특별한 관심을 보인 사례가 없다. |
41. 사도행전에만 적어도 84회의 준수 기록이 있는 초대 교회의 예배일 (행13;14, 44, 16:13, 17:2, 18:4, 11) |
41. 첫째날이 사도행전에 언급된 것은 한 번 (20:7) 뿐인데 여행 중에 밤늦게 송별을 겸한 애찬의 자리에 불과 |
42. 사도 바울이 할례 등 유대인의 의식을 폐했다는 이유로 일일이 고소당했으나 안식일 문제는 거론도 되지 않았다. 철저히 준수했기 때문이다. (행25:8) |
42. 첫째날이 안식일을 대신해야 할 하등의 근거나 이유가 성경에 전혀 언급된 바가 없다.
|
43.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 (행20:27)다고 말한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은 안식일이 일요일로 변경되었음에 대해 일체 언급한 바가 없다. |
43. 첫째날이 이방인과 관계된 특별한 의의를 지녔다는 일체의 암시나 가르침이나 행적이 기록된 바가 없다.
|
44. 신약 성경에만 59회 언급된 안식일은 항상 존중되어야 할 날의 의의를 지닌 구약의 명칭으로서 안식일-the Sabbath day 를 그대로 쓰고 있다. (막2:28....) |
44. 신구약 전체에서 “첫째날”이란 명칭 이외의 어떤 명칭도 부여된 바가 없다. (계1:10은 비평 본문 참조)
|
45. 성경 어디에도 안식일에 일해도 된다는 허용이 누구에게도 주어진 바가 없다.
|
45. 성경은 오히려 첫째 날을 “힘써 일해야”할 날들 가운데 포함시키고 있어 휴식은 비성서적인 개념 |
46. 부활 이전은 불론 부활 이후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에 평일처럼 일했다는 기록이 없다. |
46. 부활을 매 주일 기념한다는 것은 기념의 논리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부활의 개념은 침례이다. |
47.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사이에 안식일 준수 여부로 논란을 일으킨 예가 없다. |
47. 첫째날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구분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
4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구속을 “다 이루”시고 안식일에 무덤에서 안식하심으로 구속의 기념이 되게 하신 날 (요19:30) |
48. 첫째날인 일요일 준수는 창조와도 무관하고 구속과도 무관한 날로서 인위적으로 의미가 부여된 일반 축제일에 불과 |
49. 가정을 안식일에 포함시킴으로써 (출20:10) 범죄 이전 에덴의 진정한 안식과 행복을 지금 경험하게 하는 복락원으 표상 |
49. 첫째날에는 과거에 뿌리는 둔 역사적 의의도 없고 미래에 대한 약속을 간직한 소망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평범한 하루 |
50. 안식일은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아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시험하는 척도와 시금석으로 제시되었다. (출16:28) |
50. 첫째날의 준수는 하나님에 의하여 명령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준수 여부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시금석이 되지 않는다. |
51. 무엇보다도 창조의 기념일인 안식일은 창조의 목적(사43:7)과 인간의 본분인 예배를 합리적ㅇ로 결부시킴으로써 이 날에 드리는 지성적인 예배는 창조의 이상을 실현하는 인간의 가장 고상한 표현 (계14:7) |
51. 창조와 무관한 첫째날의 자의적인 예배는 진정한 예배를 구성하는 성경적인 근거와 신학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이교(異敎)적이요 비성서적인 예배일
|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158~164, 신계훈, 1991, 빛과 소리사]
안식일 변경의 역사
주일예배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려고 하는 많은 시도가 있었고 또 몇 성경 절들을 주일 예배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으나 모두 성경의 원 뜻을 벗어난 것들이며 사실상 일요일 예배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없으므로 그 기원을 역사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 일요일 예배의 기초
1.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레26:30)” “너희 제단이 황무하고 태양상이 휘파될 것이며 (겔6:4)” ▶ 일요일에 예배는 드리지 않았지만 일요일 예배의 기초는 창조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곧, 일요일 예배의 노선으로서 구약에는 태양신을 섬겼다.
2.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겔8:16-17)” ▶ 성전 안에 가증한 것들을 세움 (민11:16, 겔6:1-6, 겔8:1-7)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며 우상숭배의 장소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사실은 백성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3. “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으며 (겔22:8)”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겔22:26)”
○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될 무렵
▶ 미트라 종교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파생된 종교로 기원전 1세기 경에 로마로 들어왔다. 태양신 미트라는 주로 군인 층에서 열렬히 신봉하였는데 이후 귀족과 황실에서 받아들여 제국과 황제의 수호신으로 격상되었다.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될 무렵에는 이 미트라교가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되어 있었다.
○ 로마 교회의 시작
▶ 기원전 61년의 폼페이에 의한 전쟁 포로로서 로마에 끌려갔던 유대인들의 후손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 포로들은 그 후에 석방되어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강력한 구성원들을 이루고 있었다.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쓸 당시인 기원후 57년경에는 이미 상당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은 여전히 로마의 속국이었다.
○ 종교 갈등의 발단
1. 바울은 로마에 복음증거하기를 원했는데 길은 모두 로마로 통하기 때문이었다. 로마에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갔으며 사도행전 후반부에 배타고 로마로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황실에까지 복음을 전했다.
2. 하지만 로마의 궁전 안에서는 이교도 제사를 매일 드리고 있었는데 황실의 여자들이 복음을 받은 후 제사를 드리지 않자 곧 로마제국과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3. 복음이 군대에까지 들어갔다. 고넬료를 비롯해서 군인이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후로 총을 버리고 제대하는 일이 생겨났다. 그러자 군대는 약해지기 시작했고 로마제국과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4. 이 미움이 유대인들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대인은 원래부터 속국으로서 로마와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 로마 황제의 핍박
1. 기원후 64년 7월에 네로황제는 신도시를 개발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을 시민들이 반대했다.
2. 로마시에 큰 불이 나서 시 전반을 태우자 시민들 사이에 “우리가 신도시 개발을 반대해서 네로황제가 불을 일부러 놓았다“라고 소문이 나자 네로 황제는 이것을 다시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웠다.
3. 이 때부터 네로황제의 핍박이 시작. 그 때 바울이 죽고 베드로가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4. 기원후 66년에 유대인들이 독립반항운동의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는 칼과 철로 대항했고 이 때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 하지만 이 반란에 기독교인들은 참여하지 않았었다.
5.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짐.
○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정책
1.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는 유능한 정치가였고 많은 속국들과 화친 정책을 펴서 매우 안정된 정치를 했다. 그 당시 반란이 삼하던 유대인들과 화친 조약을 맺기 위해 소원을 따라서 기원후 130년경에 예루살렘 성전 재건 허가를 해 주었다. 유대인들은 막대한 건축 자금을 거두었다.
2.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① 황제를 숭배하라 ②토라(모세오경) 사용금지 ③ 안식일 예배 금지
3. 얼마 후, 황제는 모든 속국들에게 자신을 신의 아들로 부르도록 하는 황제 숭배를 강요하자 유대인들이 반발하였고 황제는 보복으로 할례의식을 금지시켰다. 유대 랍비들의 항의가 일어나자 황제는 분노하여 성전 재건령을 취소하였다.
4. 기원후 132~135년 사이에 유대인들의 대규모 반란이 있었다. 황제는 로마 군대로 초토화시키면서 유대인의 마을 985개를 전멸, 약 80만 명이 죽었다.
5. 이미 내세웠던 세 가지 금지령을 내리고 어기면 사형으로 다스렸다.
○ 기독교인에게 문제발생
1. 이 결과로 기독교인들에게까지 문제가 생겼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공존하고 있었고 모두가 다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 반란으로 인한 금지령 속에 포함된 안식일 준수 문제는 기독교인들에까지 해당되는 칙령이었다. ①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 ② 구약성경을 사용한다는 점 ③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는 점
2. 로마제국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동일시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면 박해를 했다. 왜냐하면 아래의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 교부들의 변증서
1. 그래서 당시 교부들은 “우리는 반항도 안했고 감정도 없으니 핍박 말라”면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다르게 취급해 달라고 변증서를 내면서 계속 요청했으나 황제는 이를 거절하고 박해는 계속되었다.
2. 결국, 교부들은 유대인들과의 차별화와 로마의 이교도들과의 동질화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대인과의 차별화와 이교도와의 동질화를 위해서 안식일 대신 당시 태양신을 섬기는 이교도들의 예배일인 일요일 예배를 교회에 도입하게 된 것이고 교회 내부에 분란이 일어났다. ① 안식일을 계속 지키려는 무리들 ② 안식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려는 무리들 ③ 두 날을 모두 지키려는 무리들
3. 일요일 준수가 즉시로 안식일 준수를 대신하지 않았고, 기독교인들은 계속 두 날을 같이 지켰다.
○ 변증적 교부들의 타협에 의한 배도
1.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하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일요일을 지킨 역사상의 증거는 '바나바의 서신'(15장)과 '저스틴 마터'의 "첫 변증서"(First Apolozy, 67장)에 나오는데, 이것들은 기원후 150년경의 것이다. 두 경우에 있어서 다 같이 안식일 준수를 비난하고 일요일 준수를 권장하고 있다.
2. 일요일을 "주의 날"이라고 일컬은 최초의 믿을 만한 증거는 경외서인 "베드로의 복음"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Miscellanies, V. 14)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모두 제2세기 말경의 것이다.
3. 약200년 동안 핍박을 당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목숨을 걸고 안식일을 주장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시대에는 유대인의 모든 풍습을 회피하고 경멸하며 학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과 다르다고 열심히 황제에게 변증하는 글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려는 무리가 발생하고 그리스도인들도 점차 정치상황에 맞춰 안식일도 지키고 또 일요일에도 모임을 가졌던 습관이 있었음을 바나바의 서신, 저스틴 마터의 글, 도마의 복음서, 폴리캅의 순교 등에 나타난다.
4. 기독교 교회 지도자 두 명이 핍박에 못 이겨 이교도와 타협에 의한 배도에 이른 과정을 보자. 첫 변증의 내용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과 다르므로, 다르게 취급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로마황제는 그 변증을 거부했고, 그러자 그 후 변증의 내용이 바꾸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5. 저스틴 마터의 변증 (기원후 100-165년)
①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시84:11)”
②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5)”
③ 빛은 예수님이요, 어두움은 이 세상이다.
④ 영광 중에 재림하시므로 일요일에 재림하실 것이다.
⑤ 그러므로 일요일이 주의 날이다.
⑥ 일요일을 신성시해야 핍박이 없어지므로 일요일에 성도들을 모이게 하고 태양을 향해 기도하게 함. "소위 태양의 날이라고 부르는 날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회집합니다!" <저스틴 마터 변증서>
6. 마르시온의 변증 (기원후85-160년)
① 안식일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던 날이다. 이토록 슬픈 날에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 하면서 금식일로 지정.
② 안식일에는 성만찬도 폐지하고 우울하게 보내다가
③ 일요일에 만찬을 벌이고 축제의 날로 지정해서 일요일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④ 나중에 이단시 되어 로마교에서 쫓겨났는데 (기원후 144년) 이는 영지주의의 창시자이다.
7. 초대교회 이후부터는 무시무시한 핍박이 있었던 서머나 교회 (AD100-313년까지)시대에 초대교회 이른 비 성령으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 후, 사단은 그냥 놔 둘 수 없어 이때부터 황제 6명이상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핍박으로 다스리던 시대였다. (트라얀, 아우렐리우스, 막시미누스, 데시우스, 발렐리안, 디오클레시안 황제로서 ,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온건정책을 쓴 콘스탄틴 황제 전 까지) 이때 많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당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박해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감소되지 않았다. 계시록 2장의 서머나 교회의 상황이 그것을 증거 해준다. ※ 요한계시록 2장의 에베소, 서머나 교회 참조
○ 로마황제의 기독교 공인
1. 로마제국의 정치지도자이면서도 디오클레티아누스(기원후 284-305)는 기독교에 대한 "인종청소"를 실시할 정도로 심한 박해를 가했지만, 뒤를 이은 황제인 콘스탄티누스(기원후 304-337)는 기독교와 타협(내지 유착)을 시도한다. 이는 기독교를 권력유지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 콘스탄티누스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병상에서 갈레리우스 황제는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려고 했더니 국고만 바닥나고 나라만 분열되었으니 차라리 그들을 포용하라”
2. 당시에 로마는 동서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콘스탄티누스가 유명한 십자가 환상 (성당 강대상에 새겨져 있는 십자가)을 보고 제국을 통일하였다. 그 후 기원후 313년 2월에 칙령을 내리면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였으나 아직 기독교에 대한 전면적 수용이나 국교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단지 제국의 다른 종교들에 비해 동등한 법적 지위, 곧 양심의 자유를 인정한 수준이었다.
○ 일요일 예배의 법제화
1. 밀라노 칙령 (321. 3. 7)
① 200여년 이상 그리스도인들을 무섭게 핍박하던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를 힘으로 박멸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으며 기독교를 제국을 통일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으로 여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마침내 밀라노에서 최초로 일요일을 공식적인 휴일로 선포하게 되면서 신교 자유를 허락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밀라노 칙령 The Edict of Milan)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태양을 존경하는 날에 모든 관공리들과 각 도시의 주민과 제조 공장의 종업원들은 휴업하라. 그러나 농촌에서 경작에 종사하는 농민은 자유로이 노동할 수 있다. 이는 씨를 뿌리고 포도를 심는데 불리할까 염려됨이라” (단 7:24 ⑤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
②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교도들과 기독교들을 일요일로 묶어서 단일 종교로 융합해 보려는 야심적인 종교 정책을 시도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 자신이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선포했으나 이것은 세상을 기만하는 전략상의 개종이었다. (대세계의 역사 3권 p211)
③ 바벨론 시대부터 휴일을 일요일로 쓰고 있었는데 바벨로니아의 점성술에서 따온 요일제도도 오늘날의 요일제도로 바꾸었다. 그 날에 따라 해당되는 행성이 지배한다고 생각. 원래 태양신을 숭배하였으므로 첫째날을 일요일(日, Sunday)로 지정했다.(2003. 12. 1. 월. 한국일보)
④ 하나님의 시간은 해질 무렵이 하루의 시작인 것을 자정부터를 하루 시작으로 바꾼 것도 로마. 1년, 1달, 하루는 행성주기에 의한 것이지만 1주일은 성서로부터 왔다.
⑤ 모세 5경 때부터 이집트-바벨론-페르시아-헬라-로마-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우상들이 태양신과 관련이 있다.
⑥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걸고 반대했다.
2. 니케아 종교 회의 (325. 6. 19~ 8. 25)
① 콘스탄티누스가 참석한 가운데 니케아의 황제의 궁에서 8월25일 폐회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② 태양의 날 일요일을 부활절로 성수 하도록 결의함.
③ “금번 소집된 총회에서 지극히 성스러운 부활절 일자에 관한 문제가 토의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참석자 전원의 연합 일치된 판정으로 잘 해결되었다. 즉 이 부활절은 각처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한 날에 반드시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④ 이 해에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고 게르만민족이 서쪽에서 대 이동으로 침입하여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소아시아(터키)의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했다.
3. 로마교회 감독의 영향력 강화
▶모든 면에서 하나의 로마를 지향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다양하게 난립해 있던 교회와 경전을 정리하여 하나의 교회, 하나의 성경으로 국가 공인화를 실시한다. 하지만, 정정이 어지러웠던 로마는 결국은 동서로 갈라진다. 거기에 따라 교회도 AD440년경부터 동서로 갈라진다. 연대적으로 AD312(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집권)~476(서로마제국의 멸망)의 기간이다.
① 로마에는 기독교의 5개 합회가 라틴어 계열의 서로마에, 그리스어 계열의 동로마의 도시 콘스탄티노플,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에 각각 있었다.
② 이방인들의 침입 때문에 서로마를 중심으로 합치려는 경향이 생기며 지도자의 필요성을 느낌. 왕들이 없었기 때문에 라틴파의 대주교가 맡아서 물리침. (이때 서로마는 라틴어를 쓰는 라틴파, 동로마는 그리스어를 쓰는 그리스파) 갑자기 황제가 떠나감으로써 공백이 된 서로마의 정치 환경에서 당시 서방의 유일한 정신적 지도자인 로마교회 감독의 입지와 영향력이 막강해졌다. (국왕의 일을 맡으면서 교회를 지도함. 대주교가 후에 교황이 되고 왕과 황제를 폐위시킨다.)
③ 이때 당시 라틴어 계열의 서로마에서는 게르만족이 북서쪽에서 대 이동으로 침입이 잦았고 이를 모두 서로마가 막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이 서로마 주교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3. 사르디카 회의 (343)
▶ 태양의 날 일요일을 ‘부활의 날’이란 미명아래 일요일 신성론으로 부각시키면서 “주의 날”로 개칭하고 교역자가 여행으로 “주의 날‘을 세 번 범하면 제명시킬 것을 종교 제11조에 명시하도록 의결했다.
4. 라오디게아 총회 (364)
▶ 일요일을 거룩한 날로 성별하는 법규를 의결하였다.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을 준수하도록 결의 하였다. 총회에 의결된 종규 제 29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화하거나 토요일 안식일에 게을러서는 안되고 이 날에 일을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날을 특별히 존중히 여기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이 날에 일하지 말 것이다. 만일 그들이 유대인화(안식일 준수)한 사실이 판명되면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질 것이다.”
○ 가톨릭 교리서에서 확인
▶ 1910. 1. 25 교황 피우스 10세로부터 “사도적인 축복”을 받은 ‘회심자를 위한 가톨릭 교리 문답서’에서 아래와 같이 확인되고 있다.
문 : 어느 날이 안식일인가?
답 : 토요일이 안식일이다.
문 : 우리는 왜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는가?
답 : 가톨릭 교회가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에서 그 존엄성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옮겼기 때문이다.
○ 일요일 신성론에 관한 역사의 평가
1. "교회는 일요일을 거룩한 날로 성별했다. …전승에 따라, 대중들로부터 추앙받던 우상숭배자들의 축제일 들을 그리스도교가 물려받고, 그 우상숭배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준 것은 명백히 교회의 모략이었다." (Arthur E.P. Wei gall, The Paganism in the Our Christianity, p. 145. Copyright, 1928. by G.P. Put nams's Son, New york. Used with their permission. in SDABC, vol. 9, p. 972; cf. Fran H. yost, p. 45).
2 "고대 태양신에게 부단한 충성심을 바친 자들이 그들의 종교 의식 자취를(오늘날까지) 남겨 놓았다. … 지극히 거룩하며, 우주적인 이 그리스도교단에까지 흔적을 남겼다. 고대 우상 숭배자들이 명명한 '태양의 날',(dies solis)이라는 칭호의 존속은, 대개 우상숭배교와 그리스도교의 절개가 서로 연합함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이 법령은 제국 내에 불일치한 종교들을 공통의 제도 아래서 하나 의 조화를 이루어 보려는 의도였었다." (Arthur P. Stanley, Lectures On the History of the Eastern Church, 1884, p. 184. in Fran H. yost., p. 45).
○ 중세 암흑시대
1. 서기 476년 서로마가 게르만민족의 침입으로 망함으로써(계시록 8장 참조) 황제가 없어진 로마는 이미 막강해진 로마교회 감독을 최고의 지도자로 받아들였으며, "아버지"를 뜻하는 일반 명칭인 "포우프"(pope)를 로마교회 감독에게만 적용시켜 오늘날의 "교황"의 명칭이 되게 하였다.
2.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안(Justinian)은 통치권을 상실한 서로마에서 정치력을 회복하기 위해 막강해진 로마교회 감독의 영향력을 이용하고자 서기 533년 로마교회 감독을 "전세계 교회의 머리"라고 선언했으며 그 이듬해 이 사실을 로마법전에 수록하여 법제화하였다.
3. 그러나 종교적 신조와 정치적 이해를 달리하면서 교황과 동로마 황제의 계획을 위협해 온 게르만족의 세 부족들을 제거하기 위해, 유스티니안 황제는 군사를 일으켜 493년에 헤룰리를 제거했으며, 534년에 명장 벨리사리우스(Belisarius)를 보내 반달을 정복하고, 538년에 동고트를 마지막으로 정복함으로써 교황을 따르지 않는 지상의 반대파를 모두 멸망시켰고 중세기를 시작하는 로마교황의 지상권 확립의 기틀을 놓았다. (다니엘7:24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
4. 열나라 중 프랑크의 페핀이 반란을 일으킴. 이것을 교황에게 도움 요청함. 그러자 왕으로 임명조건으로 교회를 도와달라는 긴밀한 협정을 맺음. (프랑크와 로마 주교는 성상숭배 때문에 동로마의 기독교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었음) 이리하여 세계 교회의 머리가 된 로마교황은, 그 이전에 자신이 섬기던 프랑크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찬달자 페핀(Pepin)에게 752년 대주교 보니파스 (Bo-niface)를 통해 왕관을 씌어줌으로써 이해관계를 통한 정치적 유대를 공고히 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756년 페핀(Pepin)은 자신이 롬바르드에게서 빼앗은 동로마제국 총독의 영지를 교황에게 하사함으로써 이제 로마교회는 종교 황제격인 교황과 작지만 영토까지 가진 종교 국가로 탄생했다.
5. 교황 그레고리 7세가 두 가지 개혁을 함 ① 황제의 성직자 임명 반대 ② 황제의 권리가 교황에게
6. 1017년 독일의 하인리히가 반대하자 그레고리후스 7세를 폐위시킬 것을 결의. 이후 하인리히를 폐위시킬 것을 결의. 맨발로 알프스 산맥을 넘어 3일을 성문 앞에서 기다림. 이것이 그 유명한 카놋사의 굴욕이다. 이때부터 교황은 국가정치권력을 능가하는 최고의 권력으로 유럽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유럽은 서쪽 끝 아일랜드에서 동쪽 끝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세상으로 변한다.
7. 1512년 라테란 종교회의 : 삼위일체, 교황은 하나님의 대리자 그러므로 율법을 수정하거나 해석가능. 지상의 하나님, 그리스도의 명칭도 교황에게로.
8. 바오로 6세 등극 대관식 : 삼층 면류관을 씌워주면서 (옥타비아 기도문)
○ 각 시대의 선악간의 대 쟁투
1. 가톨릭교회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핍박했다.
2. 그러나 모든 교회가 다 따른 것이 아니다.
3. 기원후 538년부터 1517년까지 긴 기간 동안 로마 교권 밑에서 복음의 원칙에서 떠나 이교의 사상과 예배의식에 강요당하며 핍박을 당하였으나 신자들은 서로가 성경을 연구하여 주의 진리를 밝히며 로마교를 요한계시록에 기록한바 된 바벨론(교회가 이교의 습관과 세속에 물들어 순결성을 잃었음을 의미함)이라 선언하고 피차 권면하며 악형에서도 죽도록 충성했다. 그 같은 위대한 일들을 하도록 선두에 나선 이들은 산중에 살던 왈덴스와 알비젠스의 무리들이었으며 위크립, 허쓰, 쩨롬, 루터 같은 종교개혁자들이었다. 그리하여 현재의 개신교들이 부흥을 이룩하도록 터를 마련하게 하였던 것이다.
4. 왈덴스인 들 : 영국의 청교도인 중에서 제칠일 침례교가 탄생 (1617년) 독실한 이 그리스도인들은 로마교 법왕의 부패와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를 반대하다가 로마 교권의 핍박을 만나 이태리와 불란서의 알프스 산중으로 피하여 살면서 성경 연구와 기도에 힘쓰며 안식일을 지켰다. 또한 저들은 자기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하여 가졌으며 또 여러 유익된 성경 구절들을 베껴 옷 속에 숨겨 가지고 다니면서 비밀히 전도하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을 왈덴스 교도라 불렀다.
5. 루터 : 루터의 스승이 ‘구원의 문제만 개혁하지 말고 안식일도 개혁하라’고 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6. 칼빈의 친구인 파렐도 종교개혁시 안식일도 개혁할 것을 제의했으나 미처 못했다.
※ 538년부터 시작된 중세 암흑시대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운동들은 요한계시록을 공부하시면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43장에서, 우리는 다윗이 드렸던 가장 아름다운 기도를 발견할 수 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시편 43:3.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열심과 소원이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서 언제나 불타오르고 있어야 한다. 진리가 무엇인지 찾는 것과, 찾은 진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성령에 의해서 인도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성이 될 것이다. 이러한 성도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태복음 5:6.
하나님께서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는데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 속에 진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심과 소원이 없다면, 진리를 구하는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베푸실 수 있는 가장 큰 은혜는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다. 가장 위선적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달라고 기도한 후, 그분의 응답이 내가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르러 왔을 경우에,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고 있는 죄는, 성경의 진리가 요구하는 바대로 그들의 경험을 끌어올리는 대신에, 성경의 진리를 그들이 경험하는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어떤 가르침도 검증할 수 있는 위대한 표준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 말씀이다. 모든 종교적 사상, 모든 설교, 모든 충고들이 성경 말씀에 의해서 정확하게 판단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진리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숫자나 경향이나 느낌이나 전통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표준이 되기에는 너무너 미약하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것에 대해서 신실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실함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종종 잘못된 가르침을 신실하게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몇년 전에, 나는 플로리다 주에 있는 웨스트팜이라는 도시를 향하여 운전하여 간적이 있다. 밤시간에 운전을 하였기 때문에 도로 표시와 길 이름을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벨리 그레이드라고 쓰여진 커다란 도로 표시가 잘 보이는 위치에 나타났다. 그 순간 나는 지난 몇 시간 동안 엉뚱한 방향으로 운전하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잘못된 길을 신실하고 열심히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운전하였던 것이다. 그 길이 웨스트팜을 향하여 가는 길이라고 믿고 갔지만, 실제에 있어서 나는 정반대 방향의 길을 운전하였던 것이다.
그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되는가? “계속가면 결국에는 웨스트팜이 나올거야”라고 말하면서 잘못된 길을 고집해야 되는가? 아니면 빨리 자동차를 돌려서 웨스트팜 쪽으로 가는 길을 달려가야 하는가? 지혜있고, 상식적인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못을 깨닫는 즉시 차를 올바른 방향으로 돌릴 것이다.
귀와 눈을 막고 다수결의 원칙을 고집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잘못을 교정하라고 촉구한다. 가장 비극적인 일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통적인 견해와는 크게 다른 진실을 제시할 때에 저항한다. 그들의 마음에 한번 자리를 잡은 견해는, 아무리 논리적이고 성경적으로 설명한다고 할지라도 바뀌지 않는 경향이 있다. 특히, 안식일에 관한 진리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한 경향을 나타낸다. 어떤 사람들은“안식일”이라는 말만 들어도 경계하며 피하려고 애쓴다. 왜 그러한 반응을 나타낼까?
수많은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에 관한 지식을 오랜 세월동안 아무런 검증없이 물려받아 왔다. 그러므로 그러한 입장에서는 예배일에 대한 진리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고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십계명 중의 하나가 일곱째 날을 기억하여 예배일로 준수하라는 계명인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일곱째 날이 토요일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하는 날과는 다른 날을 예배일로 준수하는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들은 비성경적인 예배일인 일요일을 준수하기로 고집한다.
그들은 왜 그러한 결정을 할까? 일요일을 준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침 받아 왔으며, 또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일요일에 교회에 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일 중 첫째날인 일요일을 자신들의 예배일로 준수하게 되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군중 속에서 안전감을 느끼는데, 그리스도인들도 다수가 믿는 가르침을 아무런 생각이나 판단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안전감을 얻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세와 태도는 정말 안전한 것인가? 종교적인 문제나 진리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다수결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진리와 오류를 구분하는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도, 민주주의 표결 원칙이 적용된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하게“No”(아니요) 라고 대답한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모든 기록들을 살펴 볼 때, 적어도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다수가 항상 틀려왔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오류와 진리의 투쟁이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졌을 때마다, 항상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었다는 것이 성경과 세상 역사가 증거하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도“노아의 때에 된 것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마지막 시대에 진리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거절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셨다(누가복음 17:26). 오직 8명만이 홍수 때에 방주 안으로 들어갔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에도 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3-14.
이 말씀은 오늘날 기독교계를 볼 때에 얼마나 정확한 말씀인가! 매우 유명한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제칠일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을 예배일로 지키고 있는 현실을 보라! 이 말은, 유명한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일요일을 준수하고 있기 때문에 일요일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준수하는 일요일을 성경에서 나오는 빛으로 비추어 보았더니 너무나 형편없는 오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를 통해서 진리는 항상 대다수의 군중에게 인기없는 것으로 취급받아 왔다.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대다수의 군중들은 부드럽고, 쉬우며, 안락한 종교를 추구함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칠일인 토요일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빛에 비추어 봄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교회에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연구한 경험이 전혀 없다. 나는 이번 기회에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날로 지키고 있는 일요일이 정말 거룩한 날인지를 시험해 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만일 일요일이 성경적으로 구별된 거룩한 예배일이라면, 나뿐만 아니라 제칠일 안식일인 토요일을 예배일로 지키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올바르게 교정하여 일요일을 신실하게 준수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을 진리로 인정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예배일로 안수하시고 인치신 날에 대해서 진지하게 연구해야만 한다.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가장 정직한 방법은, 성경이 주일 중 첫째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모든 말씀들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약 성경에서, 일요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성경절은 모두 합해서 8개에 불과하다. 이 8개의 성경절을 주의 깊게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찾고 있는 진리에 대한 확신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도 이 8개 이외의 다른 성경절에서 일요일 준수에 관한 성경절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8개의 성경절만이 주일 중 첫째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밝히는 밝히는 바이다.
지금, 우리가 찾고자 하는 진리가 어떤 것이 되든지 간에, 우리는 그것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전통이 무엇이든지 간에 진리를 선택할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가? 진리가 요구하는 희생과 댓가가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는 끝까지 진리의 길을 걸을 것인가? 이 성경 연구를 통하여, 어떤 새로운 진리가 우리 앞에 드러날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받기 위하여 자신의 편견과 사사로운 견해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매우 중요한 질문들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가운데 여기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성경 연구가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지라도, 새롭게 깨달은 진리와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계속해서 걸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안식일이 어떤 날이 되든지 간에 즉, 그것이 월요일이나 수요일이나 금요일이 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날을 안식일로 구별하여 준수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을 것이다. 오래 전에,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하였을 때, 나는 나의 감정이나 견해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따를 것을 결심하였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라면, 안식일이 어떤 날이든지 간에 거룩하게 지키겠다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지금부터 신약 성경에 나오는 일요일에 관한 기록을 살펴볼 때에, 부디 참된 그리스도인다운 자세와 마음을 유지하기를 바란다.
일요일에 부활하심
복음서 중에서 첫번에 나오는 마태복음부터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dawn)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태복음 28:1.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안식일이 주일 중 첫째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안식일이 끝나가는 시간에 첫째날이 시작되며, 안식일과 첫째날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날이다. 성경의 이같은 말씀을 근거로 해서 볼 때, 누구도 첫째날을 안식일이라고 불러서는 않된다. 그렇게 부르는 것은 사람들을 혼동시키는 것이며, 또한 비성서적인 것이다.
여기서, 사도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욧점은, 안식일이 끝나고 이어지는 날인“안식 후 첫날”에 여인들이 무덤에 왔는데, 그때는 이미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라는 것이다. 사도 마태가 기록한 말씀과 완전하게 일치할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자세한 장면이 두번째 복음서인 마가복음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 마가는 마태가 말한“미명(dawn)”을“해 돋은 때(the rising of the sun)”로 설명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마가복음 16:1-3
이 성경절은 앞서 마태가 말한“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오해를 깨끗하게 해소시켜 준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토요일 저녁에 해가 지기 직전이라고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히브리 사람들의 주일 계산법에 따라서, 안식일 저녁에 해가 지면서 한 주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안식일 저녁에 해가 지기 직전에 즉, 첫째날이 시작되기 직전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왔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여인들이 무덤으로 토요일 밤에 왔다는 일부의 주장을 물리칠 수 있다. 우리는, 마태가 말한“미명”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일요일 이른 아침을 뜻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첫째날에 관해서 신약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세번째 성경절은 마가복음 16:9에 나와있는 그대로이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약간의 설명을 곁들이자면, 신약 성경에는 부활과 주일 중 첫날을 직접적으로 함께 설명하는 두개의 성경절이 있는데, 이 성경절이 그 두개 중의 하나이다. 또한 한가지 주목해야 될 사실은, 일요일 새벽에 이루어진 부활을 이야기하는 어떤 성경절에서도 첫째날을 거룩한 날로 취급하지 않는 점이다. 부활을 기념하여 거룩하게 준수하라는 어떠한 암시적인 기록도 신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주일 중 어떤 날이 참 안식일인가?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중요한 장면을 보게 되는데, 다음에 나오는 4개의 성경절을 주의 깊이 읽어보자. “(아리마데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누가복음 23:52-54. 나머지 두개의 성경절을 읽기 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던 날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십자가의 죽음 사건이“거룩한 금요일(Good Friday)”이라고 불리우는 날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그 날을“예비일(preparation day)”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 날은 안식일을 준수하기 위한 특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54절에 나오는“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라는 말의 의미는, 이제 곧 안식일이 시작될 것이라는 뜻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예비일에 무슨 다른 일이 있었는가?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55-56
예수께서 돌아가셨던 금요일에, 신실한 여인들은 일요일 아침에 예수님의 시신이 있는 무덤으로 돌아와서 사용할 향품과 향료를 준비하였다. 그런 다음, 해가 지자 안식일이 되었고, 여인들은“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십계명에 나오는 제칠일 안식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해서 준수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유월절과 같은 절기 안식일을 십계명에 기록된 제칠일 안식일과 혼돈하는데, 절기 안식일은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폐지되었으나, 제칠일 안식일은 그리스도 교회에 배도가 들어와서 안식일이 사람에 의해서 변경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준수되었다. 절기 안식일은 해마다 그 준수하는 날이 변경되지만, 제칠일 안식일은 언제나 제칠일인 토요일에 준수되었다.
다음에 이어지는 성경절에서는, 여인들이 안식일이 지난 일요일 아침에 무엇을 하였는지가 기록되어 있다. “안식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누가복음 24:1-2
여기서, 우리는 여인들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에 교회에 가지 않고 무덤에 찾아와서 일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들은 주일 중 첫째날을 부활절 일요일로서 성별하고 있다. 예수께서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다. 여인들 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인물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거룩한 날로 성별하였었다는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십자가 주말에 대한 누가의 설명 덕분에, 오늘날에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진짜 안식일이 정확하게 어느 날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은 예비일인 금요일이었으며, 안식일인 토요일에는 여인들이“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었을 뿐 아니라 예수께서도 무덤에서 쉬셨다. 그리고 일요일 새벽에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사실로 볼 때, 금요일,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로 이어지는 이 놀라운 사건에 대한 기록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안식일이 어느 날이라는 사실을 정확한 음성으로 말해주고 있다. 예수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토요일이 안식일이라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십계명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제칠일 안식일은“여호와의 안식일”인데, 그 날은 토요일 임에 틀림없다(출애굽기 20:10).
매우 흥미있는 사실은 예수께서 창조 사업을 마치신 후 안식일에 쉬셨던 것처럼, 모든 구속 사업을 마치실 때도 안식일에 무덤에서 쉬셨다는 것이다.
안식일 다음 날에, 예수께서는 부활하셨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부활절 일요일이라고 부름으로써 특별한 의미를 일요일에 부여하려고 하지만, 성경은 그날을“주일 중 첫날”이라고 부름으로써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인정하는 이러한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어떤 사람도 안식일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겨도 된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 안식일은 성 금요일(Good Friday)과 부활절 일요일 사이에 존재한다. 사도 누가가 3일 동안에 걸쳐서 일어난 사건을 시간적으로 정확하고 단순하게 기록하였기 때문에,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성경에서 말하는 제칠일 안식일이 달력에서 어떤 날을 가르키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자, 이제 일요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5번째 성경절을 살펴보자.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여기서도 요한은 다른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주일 중 첫째 날이 거룩하거나 특별하게 지정된 날이라는 암시조차 주지 않은채, 일요일을 평범한 날로 표현하고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사도들의 모든 기록들에 있어서, 우리는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된다고 표현하는 기록을 찾는 일에 실패하였다.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도 요한은 20장에서“첫날”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일요일 예배를 입증하는 성경절로 잘못 인용되고 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평강이 있을찌어다.”요한복음 20:19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에 문을 걸어 잠그고 모인 이 모임이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특별한 예배 모임이었는가? 요한은 그들이 그때 거기에 모였던 이유를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무덤이 비게되자, 유대 지도자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고소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은 제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주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변명하기 어려운 입장으로 몰릴 것을 알고 두려워 떨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보호하며,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방에 모인 다음에 문을 굳게 닫었던 것이다.
사실, 그때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사도 마가는, 예수의 부활을 실제로 보았다는 마리아의 증언을 제자들이 믿지 않았었음을 기록하였다.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저희 중에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더라.”마가복음 16:10-14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서, 우리는 제자들이 일요일 오후에 한 방에 모여서 문을 굳게 잠그고 숨어있던 광경을 짐작할 수 있다. 문을 잠근 방에서 가진 그들의 모임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기쁜과 환희에 가득찬 분위기가 아니었다. 사실, 그때 그들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모임은 무섭고 두려우며, 낙망과 불신의 분위기였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분께서는 제자들의 불신과 마리아와 동료들의 말까지도 거절하였던 것에 대해서 심하게 책망하셨다. 어떻게 이러한 모임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즐겁고 기쁨에 넘치는 예배 모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8개 중에서 6개의 성경절을 면밀하게 살펴보았지만, 일요일을 거룩하게 준수해야 된다는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성경절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에 있어서, 6개 성경절은 모두 일요일을,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기도와 찬미와 휴식의 날로 지정하는 대신에,“주일 중 첫날”로 평범하게 묘사하고 있다. 부활이 있은 후 몇 해가 지난 다음에 복음서들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성령께서 복음서를 기록한 사도들에게 주일 중 첫날인 일요일에 부활을 거룩하게 기념 예배를 정기적으로 드리라는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성령이 하는 일을“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으로 정의하셨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6:13). 만일 주일 중 첫째날을 준수하는 것이 진리에 속한 것이라면, 성령께서는 그 진리를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과 같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드러냈을 것이다.
이제, 총 8개의 성경절 중에서 두개의 성경절만이 남아있다. 만일 우리가 나머지 두개의 성경절에서도 일요일 신성성에 대한 진리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일요일 예배에 대한 연구 조사의 결론을 매우 깨끗하고도 분명하게 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더 이상 찾아보아야 할 성경절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주일 중 첫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성경절이 오직 8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주일 중 첫날에 대해서 언급하였던 마지막 사도는 바울과 누가인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 두 사도가 말했던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고린도 교회의 일요일 모임
고린도전서 16:1-2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는대로 저축하여 두어서(lay something aside, storing up),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을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성경절이 말하는 바를, 고린도 교인들이 교회에 모여서 어떤 종교적인 예배 모임을 가졌으며, 그때 헌금을 거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경절에는 그러한 의미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이 성경절에는 단지 주일 중 첫날에 어떤 것들을 저축하여 모아두라는 바울의 부탁이 있을 뿐이다. 바울은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게 특별 호소를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 지방이 기근으로 인하여 음식물과 일용품이 부족하여 크게 고통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구제물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을 자신이 보낼 때까지 음식물과 옷 등을 각자 집에 모아서 보관해 줄 것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저축하여 두어서(lay something aside, storing up)”의 헬라어 원어에는“집에 보관한다”는 의미가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다. 일요일 예배를 주장하는 신학자들 역시 이러한 헬라어 해석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문제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일 중 첫날에 정기적인 예배가 개최되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이 성경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단지 주일 중 첫날에 구제품을 모아서 저축하는 일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안식일에는 예배를 드렸으며, 다음 날인 주일 중 첫날에는 각자가 구제품을 모아두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예루살렘에 심한 기근이 내렸었다는 사도 누가의 기록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사도행전 11:28-30
가장 길었던 바울의 설교
이제, 일요일 신성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증거로서 제시하는 마지막 성경절을 살펴보자. 사도 누가는 바울이 드로아에서 신자들과 함께 보낸 매우 극적인 송별 모임에 대해서 사도행전에 서술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이 성경절을 하나님의 십계명에 대한 불순종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구차한 핑계거리로 사용하고 있다. 드로아 신자들이 베푼 이 송별 모임은 신약 성경에서“주일 중 첫날”에 이루어진 유일한 종교 모임이므로, 우리 모두는 매우 특별한 관심과 주의를 가지고 이 성경절을 살펴보아야 한다.
전체적인 문맥을 볼 때, 송별 모임은 밤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잇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 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자고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사도행전 20:6-13
드로아에서 개최된 밤샘 모임에서 몇가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첫째로, 이 모임은 바울 자신이나 신자들에게 매우 엄숙하고도 애절한 모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장 25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예언적 발언을 하였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줄 아노라.”
분명한 사실은, 이 송별 모임이 밤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방에 불이 켜져 있었으며, 바울이 밤중까지 설교를 계속하였다. 여기서 유대인들이 시간을 계산하는 방식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성경에서 하루는 저녁에 시작된다. 창세기에서 창조 주일의 날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날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둘째날 ...” 즉, 하루를 계산하는데 있어서 항상 저녁이 시작점이 되었다.
레위기가 묘사하고 있는 안식일 시간대를 보라.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레위기 23:32. 그런데 성경에서 저녁은 어느 시간을 말하는가?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마가복음 1:32.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을 하는 것을 금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다. 그래서 그들은“저물어 해질 때에”병자과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께 데리고 온 것이다. 모세는“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질 때에 드리고(sacrifice the passover ... at the going down of the sun)”이라고 기록하였다.
느헤미야서에서, 우리는 안식일의 시작에 대한 또 하나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에 내가 명하여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내 종자 두어 사람을 성문마다 세워서 안식일에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매.”느헤미야 13:19. 이 성경절은 안식일의 시작점이 해가 져서 어두워지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성경 원칙을 바울이 드로아에서 개최한 첫째날 모임에 적용시켜보자. 안타깝게도, 이 모임이 이루어진 밤은 토요일 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안식일 예배를 마친 다음,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기 위한 송별 모임을 그날 저녁에 계속해서 가졌던 것이다. 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끝나고, 안식 후 첫날이 시작되었다. 7일동안 드로아에서 머물렀던 바울은 안식일에 드로아 신자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날 저녁에 배로 떠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신자들에게 밤새 강론한 다음, 일요일 아침에 약 20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앗소에 도착하여 배를 탐으로서 그의 동료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마지막이 될 자신의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에 드로아 신자들과 함께 안식일을 보내고, 이어서 안식일 저녁부터 밤중까지 계속해서 송별 집회를 가졌던 것이다.
누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
새 영어 성경(New English Bible)에는, 사도행전 20:7에 나오는 송별 집회가 열린 시간을“토요일 밤”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집회에 관한 이야기에서, 사도 누가는 가장 중요한 촛점을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서 떨어져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실에 집중시키고 있다. 지칠줄 모르는 바울은 안식일과 토요일 밤중까지 계속해서 집회를 인도한 다음, 일요일 아침에 20마일을 걸어서 앗소에 가서 그의 동료들과 합류하였다. 그의 동료들은 안식일이 끝나는 토요일 저녁에 먼저 배를 탔으며, 그들이 탄 배가 밤새 운행하여서 앗소에 도착하였을 때, 바울이 승선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일요일 아침에 먼거리를 도보로 여행하였는데, 만일 일요일이 부활절로 신성하게 지켜지는 날이었다면, 바울은 일요일 아침에 그러한 도보 여행을 함으로써 거룩한 날을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떡을 떼었”다는 사실로 미루어서 그날 집회는 성찬식(communion service)이었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그러한 견해는 성경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사도 누가는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이 날마다 떡을 떼었던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사도행전 2:46
바울이 드로아 신자들과 함께 윗다락에서 성찬식을 하였다는 주장은 성경에 의해서 뒷받침될 수 없다. 그들이 함께 나눈 떡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식사였음을 문맥에서 알 수 있다. “다시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When he therefore was come up again, and had broken bread, and eaten).”여기서 우리는 떡을 떼는 것이 그들이 먹는 식사와 관련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일 그것이 성찬식이었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요일 준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비록 그 환송 모임에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기념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모임은 일요일을 정기적으로 준수해야 된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어떤 사람도 드로아에서 열렸던 집회가 정기적으로 열리는 주말 예배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다. 그 집회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유두고라는 젊은 청년이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난 일과, 드로아 신자들과 바울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가장 강조하여 기록했던 것은 유두고라는 청년이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누가는 토요일 밤중까지 계속되었던 바울의 설교 내용에 대해서 조차 언급하지 않았으며, 토요일 밤 즉“주일 중 첫날”이 영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에 관한 어떤 암시도 주지 않았다. 누가가 말하고자 하였던 것은 밤중에 집회하다가 떨어진 유두고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이었지, 그 밤중 집회의 중요성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일 중 첫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신약 성경의 모든 성경절들을 살펴보았다. 8개의 성경절 모두, 일요일이 하나님이나 제자들에 의해서 거룩한 날로 지정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어떠한 지지나 동의도 보내지 않았다. 하나님의 위대한 책인 성경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리 대신에 인간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밝혀주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방 종교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날을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일요일 준수 전통에 대한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한 예화를 생각나게 한다. 그 예화는 제정 러시아 시대에 궁전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하루는 거대한 궁전 안에서 황제가 산보하고 있었는데, 한 병사가 어깨에 총을 멘채 아무 것도 없는 황폐한 땅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병사의 임무에 대해서 궁금해진 황제는 그 보초병에게 왜 여기서 보초를 서고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 병사는 대답하기를,“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앞 사람에게 임무를 인수인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보초를 서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궁금해진 황제는 그 보초의 상급 지휘관을 호출하여서 그 보초의 임무를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 지휘관 역시 이유를 몰랐다. 이에 호기심이 동한 황제는 궁전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대장을 불러서 물어보았지만, 그에게서도 적당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마침내 황제는 대장에게 명령하기를, 수많은 군대 기록들을 조사하여서 그 병사가 왜 그 자리에서 보초를 서게 되었는가를 밝히라고 하였다. 드디어 보초의 임무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신비가 밝혀지게 되었다. 여러해 전에 한 왕비가 왕궁 한쪽에 장미밭을 가꾸었는데, 어느날 왕비는 병사에게 장미밭에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잘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세월이 흘러서 왕비는 죽고, 장미꽃밭은 없어지게 되었지만, 그 왕비의 명령은 철회되지 않은채 계속해서 수행되었다. 날마다 병사가 정해진 보초 계획에 따라서 그 자리에 파견되었으며, 임무를 하달받은 병사는 총을 어깨에 메고 아무 것도 없는 그 장소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서성거리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지켜야 할 어떤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명령에 어떤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채, 일요일만 되면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고 있다. 왕궁의 장미밭이 결국 황폐하여 사라진 것처럼, 일요일 역시 최후의 심판날에 황폐하게 사라질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내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태복음 15:13
신약시대에 지켜졌던 날
일요일 준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든 성경절들을 살펴본 결과, 우리는 일요일이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주장의 허상을 보게 되었다. 이제,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성경 속에서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어떤 날을 예배일로 준수하였는지를 확인해보자. 제자들과 신자들이 그 당시 일요일을 예배일로 준수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떤 날을 거룩하게 준수하였는가? 사도행전은 그들이 제칠일 안식일을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켰음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종교 집회를 부탁받았던 이야기를 읽어보자.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사도행전 42,44
이 성경절에서, 우리는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안식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를 하였는데,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바울에게“다음 안식일에”는 그들에게 설교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안식일에 오직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들만에게 설교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성경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은“다음 안식일”에 이방인들에게 설교하였다. 43절에는, 안식일 예배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개종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라고 권면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식일에 설교를 듣고 개종한 사람들에게“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고 격려하였는데, 현대 비평가들은 안식일 준수자들에게 율법주의자라는 딱지를 붙혀줌으로써, 마치 안식일 준수자들은 복음의 은혜를 거절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다. 성경을 기록한 모든 저자들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생애를 살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사도행전 16:13에서,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도 없고, 유대인도 없는 곳에서 안식일을 준수하였던 확실한 증거를 볼 수 있다. 이 때, 바울은 그리스에서 전도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오직 소수의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있었을 뿐이며, 더구나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은 전혀 없었다. 그가 거기서 안식일에 무엇을 하였는지 살펴보자.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안식일에 참석할 교회가 없자, 사도들은 예배를 드릴만한 장소인 강 가 기도처를 발견하였는데, 그곳에 모여 있던 여자들에게 설교를 하였다. 안식일에 이루어진 이러한 전도 활동을 보면서, 우리는 바울의 헌신과 열심을 볼 수 있다. 만약 바울의 이러한 전도 활동이 주일 중 첫날에 이루어졌다고 가정해보자. 아마 일요일 예배를 주장하는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은 이 성경절을 일요일 예배를 위한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할 것인데, 이런 경우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안식일을 준수하였던 바울의 모본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단 하나의 성경절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안식일에 대한 성경적 진리를 더욱 더 분명하게 해준다.
안식일 준수에 관한 또 하나의 증거가 나온다. 바울이 규칙적으로 안식일을 지켰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여기에 있다. “바울이 자기 규례대로(according to his customs)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사도행전 17:2. “안식일마다(every Sabbath)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사도행전 18:4
이제, 우리는 바울이 그의 생애 동안에 단 한번도 일요일을 거룩한 날로 준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성경절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다음과 같은 말을 유대 지도자들에게 남겼다. “바울이 유대인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customs, 규례)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바 되었으니.”사도행전 28:17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자. 만일 바울이 고의로 안식일을 범하거나 안식일 이외의 다른 날을 준수했다면, 어떻게 그가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규례를 범한적이 없다고 외칠 수 있었겠는가! 바울이 언급한“조상의 규례”에는 유대인들이 중요시 여겼던 안식일이 물론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조상의 규례를 배척한 일이 없”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바울이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 앞에서 외친 마지막 호소에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생애를 끝마치는 순간까지 철저한 안식일 준수자였음을 볼 수 있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바울의 강력한 호소는 우리로 하여금 일요일 준수가 성경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허상이라는 결론의 정확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만일 일요일이 성경적으로 거룩한 예배일이라면, 우리의 종교적 의무는 훨씬 쉬워질 것이다. 거의 모든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지지 속에서 일요일을 거룩한 예배일로 준수하는 것은, 율법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채 참된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인기있는 길이나 가장 편리한 방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는 길을 단순하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걷는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는 정직한 마음으로 진실을 인정해야할 시간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 돌비에 친히 손가락으로 기록하셨던 제칠일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을 준수하는 전통이 온 세상을 점령하고 있다. 마지막 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심판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기의 정도나 어떤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성경의 분명한 증거인“주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폐할 수 없다. 안식일 문제에 관하여, 우리 모두는 오직 성경의 권위에만 의존해야 한다.
지금도 창조주 하나님께서는“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아무 일도 하지 말라”라고 선포하고 계신다(출애굽기 20:10). 하나님께서 최고의 권위로 선포하신 도덕률을 당신 자신이 스스로 철회하지 않은한, 우리 모두는 십계명을 오늘날에도 구속력이 있는 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한번 말씀하신 것에는 반드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안식일 계명인 4번째 계명을 제하여 주셨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들의 주장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너무나 경쟁이 심하고 산업화되어 있기 때문에 제칠일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의심할여지 없이, 오늘날 이 사회를 조종함으로써 안식일을 준수하기 어렵게 만든 장본인은 사단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에 대한 적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회사에서는 토요일에 일해야 한답니다. 우리 가족을 굶길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대답이 오래 전에 산상수훈에서 주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답변을 들어보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여기에 나오는“이 모든 것”에는 음식과 옷과 직장도 포함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말씀과 회사의 규칙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지 않겠는가! 물질에 대한 염려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보다 우위를 차지해서는 않된다.
자신의 직장을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안식일을 지키기로 결심하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높히 평가하실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준수자들에게 기적을 행해 오셨다. 어떤 경우에는, 당신의 자녀들이 직장을 잃어버리는 것을 통하여 진리가 드러남으로써, 그분께서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간구하는 기도와 그들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보다 나은 길을 열어주신다. 물질은, 우리가 환경에 상관없이 그분을 신뢰하고 순종할 때에 언제나 더해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여호와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는 참된 비결은 우리의 마음에 안식일의 주인인 주님을 모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께서 명하신 단 하나의 계명에 불순종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것은 사랑의 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 계속해서 사도 요한은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요한일서 5:3
그러므로 안식일에 관한 문제는 날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사랑을 통하여 순종하는 것과 사랑의 결핍으로 인하여 불순종하게 되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이 두 성경절 아래에 줄을 긋고, 계속해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보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마음 속에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생애를 기계적이고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순종할 때, 모든 계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즐겁고 가벼운 것이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한일서 5:3. 이러한 사랑을 안식일 준수의 기본 정신으로 삼는다면, 안식일은 여러분의 여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기쁜 날이 될 것이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그리스도께서 제사장들과 관원들에게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8)고 하신 말씀을 그들의 마음을 공포로 사로잡히게 하였다. 이 말씀을 그들은 무관심한 체하였으나 저희 마음 가운데는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에 관한 의문이 계속 떠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이 그들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민족의 영광인 이 장엄한 성전이 곧 폐허의 무더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 불길한 전조는 제자들도 함께 느끼게 되었으며 제자들은 예수님의 더욱 분명한 말씀을 고대하였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성전을 나갈 때에 그들은 성전의 견고함과 아름다움에 예수님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성전의 돌들은 순백색의 순수한 대리석이었으며 그 중 어떤 돌들은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어떤 부분의 벽은 느부갓네살 군대의 공격에도 끄떡없었다. 완전한 석조 건축물인 성전은 마치 한 견고한 돌을 채석장에서 통째로 떠내온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이 견고한 벽들이 무너질 수 있을지 제자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성전의 장대함에 그리스도의 주목이 이끌렸을 때에 거절 받으신 분의 말로 표현되지 않은 생각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예수님 앞에 전개된 광경은 참으로 아름다웠으나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아노라고 슬프게 말씀하셨다. 건물들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너희는 이 벽들이 분명히 파괴될 수 없는 것으로 가리키나 내 말을 들으라. 날이 오리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백성들이 듣는 가운데서 말씀하셨었다. 그러나 그분이 홀로 감람산에 계실 때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가 예수님께 나왔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당신의 재림의 큰 날을 따로 분리하여 제자들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이 두 사건을 섞어서 말씀하셨다. 만일 예수께서 당신께서 보신 대로 장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제자들에게 공개하셨다면 그들은 그 광경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분은 두 큰 위기를 섞어서 설명하시고 제자들이 스스로 그 뜻을 연구하도록 하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언급하셨을 때 그분의 예언의 말씀은 그 사건을 넘어 주께서 일어나사 세상의 죄를 심판하셔서 땅이 더 이상 죽임을 당한 자들의 피를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내 놓을 수밖에 없는 그 최후의 날에 일어날 대재화의 사건에까지 미쳤다. 이 모든 말씀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장면에 살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서도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돌아보시면서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거짓 메시야들이 나타나 이적을 보이며 유대 민족의 구원의 때가 왔다고 선언할 것이다. 이런 일들이 많은 사람을 잘못 인도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예루살렘이 포위된 그 사이에 많은 거짓 메시야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경고는 또한 오늘날 이 시대에 사는 자들에게 주어진 바 되었다. 예루살렘의 멸망 이전에 성행하던 것과 같은 기만이 각 시대를 통하여 행하여졌고 또다시 행하여질 것이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예루살렘의 멸망 전에 사람들은 주권을 잡으려고 서로 다투었다. 황제들은 살해를 당하였고 보좌를 잇기로 예상되는 자들도 죽임을 당하였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들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유대민족이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랍비들이 이 징조들을 보고 그것들은 하나님의 선민들을 압박하고 있는 나라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선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 징조들이 메시야 강림의 표적이라고 선언할 것이다.
그러나 속지 말라. 이 징조들은 그분의 심판의 시작이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그들을 치료하여 줄 만큼 그들은 회개하지도 않고 거듭나지도 않았다. 그들이 속박에서 해방되는 표라고 말하는 그 징조는 바로 그들의 멸망의 징조이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고통을 당하였다. 부모들은 저희 자녀들을 속였고 친구들은 저희 친구들을 산헤드린에 넘겨주었다. 박해자들은 스데반과 야고보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하여 저희 목적을 성취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유대 백성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증인들이 체포되고 심문을 받으며 옥에 갇히는 경우들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재판관들은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죽임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와 같이 다시 이 일은 반복될 것이다. 당국자들은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들을 만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권리를 횡령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만 지배하실 수 있는 양심을 강제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막 그들은 착수하고 있으며 저희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경계선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적으로 이 일을 전진시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당신의 충성스러운 백성을 위하여 개입하실 것이다. 박해가 일어날 경우에는 언제든지 그것을 목격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서느냐 흑은 그분을 반대하느냐를 결정한다. 부당하게 정죄당하는 자들에 대하여 동정심을 나타내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애착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진리의 원칙이 저희 행동을 직접 부당하다고 선을 긋기 때문에 기분이 상한다. 한때 그들이 옹호하던 신앙을 배반하고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자들이 많다. 시련의 때에 배교하는 자들은 저희 자신의 안전을 얻기 위하여 거짓 증언을 하고 저희 형제들을 배반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빛을 거절하는 자들의 몰인정하고 잔인한 행동을 보고 우리들이 놀라지 않도록 이 일을 우리에게 경고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다가올 예루살렘의 멸망의 징조를 보여 주시면서 그들에게 피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이 경고는 40년 후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에 유의하도록 주어진 바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경고에 순종하였으며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은 도성이 함락될 때에 함께 멸망하였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그리스도는 안식일을 폐지하지 않으셨으며 이것을 십자가에 못박지도 않으셨다. 안식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폐지되거나 무효가 되도록 제정되지 않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지 40년 후에도 안식일은 여전히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40년 동안 제자들은 그들의 도망하는 일이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속히 예루살렘의 멸망으로부터 그보다 더 큰 사건, 이 세상 역사의 사슬의 마지막 고리인 위엄과 영광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재림으로 옮기셨다. 이 두 사건 사이에 긴 흑암의 세기들 즉 그분의 교회를 피와 눈물과 고통으로 특징지은 세기들이 그리스도의 눈앞에 전개되었다. 그 당시 제자들은 이 장면들을 바라보고 견딜 수 없었을 것이므로 예수께서는 한 짤막한 말씀으로 그 장면을 지나치셨다. 예수께서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날을 감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천년 이상 계속될 미증유의 박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를 것이었다. 수백 수천만 명의 예수의 충실한 증인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었다. 만일 당신의 백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손길이 펼쳐지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멸망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시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제 분명한 말로써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재림을 말씀하시며 당신의 재림 전에 세상에 임할 위험을 경고하신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예루살렘의 멸망의 징조 중의 하나로 그리스도께서는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과연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백성들을 속이며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광야에 나아갔다. 마술사들과 요술사들은 놀랄 만한 능력을 보이며 백성들을 끌고 한적한 산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 예언은 또한 말세를 위하여 예언되었다. 이 징조는 재림의 징조로 주신 것이다. 지금도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유혹하려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고 있다.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는 부르짖음을 우리는 듣고 있지 않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찾으려는 희망으로 광야에 나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죽은 영혼들과 교제한다고 공언하는 자들이 “보라 그리스도가 골방에 있다”고 부르짖는 소리를 지금 듣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강신술이 제시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구주께서는 당신의 재림의 징조들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징조들 가운데 첫째 징조가 나타날 시간을 정하셨다.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법 왕권의 큰 박해 끝에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리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선언하셨다. 그 다음에는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2, 33)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재림에 관한 징조를 주셨다. 그분이 가까이 문 앞에 이른 때를 우리가 알 수 있다고 그분은 선언하신다. 이 징조들을 보는 자들에게 그분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징조들은 나타났다. 이제 우리는 주의 재림이 박두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 예수께서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구름을 타고 큰 영광으로 오신다. 수많은 빛나는 천사들이 그분을 수행할 것이다. 그분은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고 살아있는 성도들을 변화시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하시려고 오실 것이다.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킨 자들을 높이시고 그들을 당신께로 데려가시려고 오실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잊지도 않으셨고 당신의 약속도 잊지 않고 계신다. 가족이란 고리가 다시 연결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죽은 자를 볼 때에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나고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는 부활의 아침에 대하여 생각할 것이다 (고전 15:52). 조금 후에 우리는 아름답게 단장한 왕을 볼 것이다. 조금 후에 그분은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조금 후에 그분은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우리를 서게 하실 것이다(유 24). 그런고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의 징조를 주실 때에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재림의 날과 시간은 밝히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신이 다시 나타나실 날이나 시간은 자신이 알게 할 수 없다고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만일 그분이 이것을 자유로 나타내실 수 있었다면 왜 항상 기다리는 태도를 가지도록 그들을 권유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 주님께서 나타나실 그날과 시간을 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매우 열심히 그들은 미래의 시간표를 상세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근거에 대하여 그들을 경고하신다. 인자의 재림의 정확한 시간은 하나님의 오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재림하실 때의 세상의 형편을 지적하시면서 계속 말씀하신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천년 기간이 모든 사람이 내세를 위하여 준비할 수 있는 현세적 천년기라는 견해를 제시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가 다시 오시는 때에도 그럴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노아의 때의 형편은 어떠하였는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홍수 이전 세상의 주민들은 여호와를 떠나고 그분의 거룩한 뜻을 행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거룩하지 못한 상상과 악한 생각을 따라 행하였다. 그들이 멸망당한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는바 오늘날 세상도 같은 길을 따라가고 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천년기적 영광으로 돋보이는 징조들이 없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들이 세상을 죄악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그들의 노름, 경마, 도박, 방탕, 음란한 행위, 억제할 수 없는 정욕들은 이 세상을 신속하게 난폭한 행위로 가득 채우고 있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예언은 다시 성취될 것이다. 그 시대의 차고 넘치던 그와 똑같은 죄악을 현대에서 본다. 복음 전파에 관한 예언도 그와 같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바울의 기록에는 복음이 “천하 만민에게”(골 1:23) 전파된 바라고 선언하였다. 그와 같이 인자가 오시기 전에 이제 영원한 복음이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계 14:6, 14) 전파되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행 17:31)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날이 언제 이르게 될는지 우리에게 알리신다. 그분은 온 세계가 다 회개할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함으로 우리 주의 강림을 촉진시킬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시는 날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그날을 재촉해야 한다. (벧후 3:12 상단 참조). 만일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께서 명하신 바와 같이 맡겨진 사업을 이루었다면 온 세계는 벌써 경고를 받았을 것이며 우리 주 예수께서는 능력과 큰 영광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것이다.
당신의 재림의 징조를 주신 다음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주의하라 깨어 있어 기도하라”(영문 성경 참조)고 말씀하셨다. 항상 하나님께서는 다가오는 심판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셨다. 저희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기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중에 믿음으로 행한 자들은 불순종하고 불신하는 자들에게 내린 심판을 면하였다. 노아에게 “너와 네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는 말이 전하여졌다. 노아는 순종하여 구원을 얻었다. 롯에게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는 기별이 임하였다(창 7:1; 19:14). 롯은 자신을 하늘의 사자의 보호에 맡겨 구원을 얻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경고를 받았다. 다가오는 멸망의 징조를 바라보고 그 도성을 피한 자들은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와 같이 이제 우리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에 임할 멸망에 대한 경고가 주어진 바 되었다. 따라서 경고에 주의하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시간을 알지 못하므로 깨어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눅 12:37). 주의 오심을 바라는 자들은 한가하게 기다리고 있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를 두려워하게 하며 죄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하게 한다. 이것은 주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를 거절하는 큰 죄에서 그들을 일깨워 준다. 주를 기다리는 자들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저희 영혼을 순결하게 하고 있다. 깨어 기다리는 한편 열심히 일한다. 주께서 문 앞에 이르신 줄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열심을 내어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업에 거룩한 지혜자들과 협력한다. 이들은 주의 식구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눅 12:42) 신실하고 지혜있는 종들이다. 그들은 오늘날을 위하여 가장 적절한 진리를 전파하고 있다.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이 각각 저희 시대에 알맞는 진리를 전파한 것처럼 지금 그리스도의 종들은 이 시대에 대한 특별한 경고를 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신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주객으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리라.” 악한 종은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견해를 비웃지도 않았다. 그러나 행동과 말로써 또는 마음속으로 주의 오심이 지체되리라고 선언한다. 그는 주께서 빨리 오시리라는 확신을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라지게 한다. 그의 영향으로 사람들을 외람되게 하고 부주의하게 하며 지체하도록 한다. 그들은 세속적인 무감각 속에 굳어져 있다. 세상 정욕과 부패된 사상이 저희 심령을 점령하고 있다. 악한 종이 주객과 같이 먹고 마시며 향락을 추구하는 일에 세상과 연합하고 있다. 그는 그의 동료 종들을 때리며 저희 주님께 충성스러운 자들을 비난하며 정죄한다. 그는 세상과 섞인다. 범죄에 있어서 같은 사람은 같은 사람끼리 자란다. 이것은 무서운 융합이다. 그는 세상과 같이 함정에 빠져 있다.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히리라”(계 3:3). 그리스도의 재림은 거짓 교사들에게 불시에 이를 것이다. 그들은 “평화와 안전”을 말한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이전의 제사장들과 교사들처럼 그들은 교회가 세속적 번영과 영광을 누리기를 바란다. 그들은 시대의 징조를 이 일의 전조인 것처럼 해석한다. 그러나 영감의 말씀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하리”(살전 5:3)라. 온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날은 덫과 같이 임할 것이다. 주의 날은 그들에게 노리는 도둑처럼 올 것이다. 방탕함과 불경건한 향락으로 가득찬 세상은 잠들어 있으며 육적인 안전에 마비되어 있다. 사람들은 주의 오심이 먼 훗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경고를 비웃는다.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고 거만하게 자랑한다(벧후 3:4; 사 56:12). 우리는 향락을 사랑하는데 더 깊이 빠져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계 16:15)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이 조롱하면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하고 묻는 바로 그 때에 징조는 성취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이 “평화와 안전”을 부르짖을 때에 홀연히 멸망이 이른다. 진리를 경멸하고 거절하는 자가 뻔뻔스럽게 될 때에, 여러 가지 영리적 사업에 있어서 원칙을 무시하고 일과를 수행할 때에, 학생이 그의 성경은 연구하지 않고 각 방면의 지식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도적과 같이 임하신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흥분 상태에 있다. 때의 징조는 불길하다. 다가오는 사건들은 그 앞에 그늘을 드리운다. 하나님의 성령은 세상에서 떠나고 있으며 바다와 육지에서 재난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태풍, 지진, 화재, 훙수 그리고 온갖 부류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누가 미래를 알 수 있는가? 어느 곳에 안전이 있는가? 인생에게나 이 세상에 있어서 아무 곳에도 안전의 보증은 없다. 사람들은 그들이 선택한 깃발 아래로 신속하게 정렬하고 있다. 그들은 들뜬 기분으로 그 지도자들의 움직임을 기다리며 바라보고 있다. 거기에 우리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바라보며 일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 다른 계급의 사람들은 첫 대반역자가 지도하는 대열로 전락(轉落)하고 있다. 지옥을 피하고 하늘을 얻어야 한다고 마음과 심령으로 믿는 사람들은 드물다.
위기는 서서히 우리에게 덮쳐 오고 있다. 태양은 하늘에서 비취며 여전히 궤도를 따라 돌며 하늘은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고 심고 짓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있다. 상인들은 여전히 사고 팔고 있으며 사람들은 서로 밀면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싸운다.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은 여전히 극장과 경마장과 도박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최고조의 흥분이 편만해 있는 반면 은혜의 시간은 속히 마쳐지려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운명이 영원히 결정되려고 한다. 사단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안다. 사단은 은혜의 때가 끝날 때까지 사람들을 속이고 현혹시키고, 마음을 사로잡아 도취시키려고 그의 온 힘을 기울여 일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우리 주의 경고의 말씀이 감람산으로부터 수세기를 통하여 엄숙하게 우리에게 전하여 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The Desire of Ages, 627~636) - 이 글은 Ellen. G. White 선지자의 영감의 글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에게 임하신 성령님이나 150년 전에 임하신 성령님이나 같은 성령님입니다.
안식일 준수와 율법주의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신계훈, 빛과 소리사, 1991, p62~)
비평 박영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는 한 마디로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따르고 있으며 토요일을 안식일로 고수 하는 것은 성경해석의 잘못에서 왔다.”
안식일의 역사적 기원과 성경적 근거는 앞서 밝혔거니와,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은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따르는 것이라는 비평을 따로 떼어 변증하는 것이 좋겠다.
사람을 위한 안식일
변증 이상과 같은 비평은, 안식일은 유대인의 안식일이고, 일요일은 그리스도인의 성일이라는 잘못된 전제에 기초한 것이다. 안식일은 창조와 동시에 제정되어, 아담 때부터 존속된 제도이므로, 범죄와 상관이 없고, 의식적인 율법이나 십계명과도 시대적으로 상관이 없어, 안식일을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 국한시키려는 시도는 비성서적이다.
“안식일에도 주인” (막2:28)이신 예수께서도, 안식일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 (막2:27)이라고 천명하셨다. 창조와 동시에 안식일과 함께 제정된 결혼제도가 (창2:21-24) 유대인만을 제도가 아닌 것과 같다. 결혼제도가 안식의 공간인 가정을, 제칠일이 안식의 시간인 안식일을 제공함으로 이 시간과 공간의 만남 속에서 인간이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하나님께 의존하며, 사람끼리 함께 사는 행복을 경험하게 하신 창조의 기본 질서인 것이다. (출20:8-11)
이미 구약 성경에도 안식일을 유대인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만민의 안식일, 이방인의 안식일, 심지어 육신적인 미래가 없는 불구자의 안식일 등으로 규정하여 안식일의 시대성이나 민족적 제한을 철폐하였다. (사56:3-7) “안식일을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리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사 56:2) 그리하여 이방인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유대인만을 위한 의식법인 할례는 폐지시켜 결코 요구되지 않았지만, 안식일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 이의 없이 공유했음을 사도행전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율법주의에 대한 오해
박영관 씨의 비평이 사실이라면, 유대인이 지킨 안식일을 준수한 사람은 모두 율법주의자가 되는 셈이다. 그 가운데는 어린 시절부터 돌아가시기까지 평생을 “자기 규례대로 안식일”을 지킨 예수님 (눅4:16)을 비롯하여, 역시 유대교 모태교인으로 “자기의 규례대로” (행17:2) 평생 안식일을 지킨 사도 바울도 율법주의자이고, 안식일을 준수하고 강조한 모든 노독들과 선지자들도 모두 율법주의자가 된다는 빗나간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단정은, 두 개의 전제로부터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추리논법인 삼단논법을 잘못 적용한 착각의 결과일 수 있다. 즉,
대전제 : 그리스도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율법주의자였다.
소전제 : 바리새인들은 모두 철저한 안식일 준수자였다.
결 론 : 그러므로 오늘날 안식일을 철저히 준수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주의자이다.
만약 이와 같은 잘못된 논리 전개가 사실이라면 걷잡을 수 없는 엉뚱한 결론들이 속출하게 된다. 복음서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이외에도 십일조, 헌금, 구제, 금식기도 등에도 철저한 사람들이었다. (눅18:11-12),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할 수 있을까?
대전제 : 그리스도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였다.
소전제 :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십일조와 헌금, 구제, 금식기도를 실천했다.
결 론 : 그러므로 오늘날도 십일조와 헌금 및 구제와 금식기도에 철저한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주의자이다.
십일조와 헌금, 구제와 기도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당연한 의무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가? 추리의 착각이다. 안식일이나 십일조, 헌금, 구제가 사람을 율법주의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 대답이 있다. 곧,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진상이 뚜렷해졌다. 십일조와 헌금, 안식일 등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를 삼을 때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거절하게 됨으로 결국 행함으로 구원 받으려는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율법을 준수하되 율법의 정신에 어긋나게 지키는 사람들은 율법주의자가 되지만, 의의 표준인 율법을 무시하고 고의로 범하는 사람들은“무법한 자”(벧후2:7, 3:17), 혹은“불법을 행하는 자”(마7:23, 13:41, 딤전1:8-9)가 되어 심판을 받게 된다. 편견 때문에 판단의 논리가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율법주의와 무법주의
비 평 탁명환 “안식일교는 토요 안식일 성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개신교가 주일을 안식일로 지킨 것은 예수의 부활 사건과 관련지어 율법적인 토요 안식일 대신에 안식 후 첫날 예수의 부활의 날을 기념하여 지키게 된 것이다.”
탁명환 씨는 오늘날의 토요일에 해당하는 성경상의 제칠일 안식일을 율법주의적인 안식일로 규정하고, 안식일교회가 안식일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다고 비평하고 있다. 그리고 일요일은 부활을 기념하는 그리스도인의 주일(主日)로 옹호하고 있다.
율법주의와 무법주의
변증 앞에서 밝힌 대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율법주의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섯째 계명에 따라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 여덟째 계명대로 도적질하지 않는 사람, 둘째 계명을 범하지 않으려고 신사참배를 거절함으로 목숨까지 빼앗긴 순교자들을 율법주의자라고 비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넷째 계명에 따라 성경적인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사람들만 율법주의자가 되는가?
율법주의자란 율법을 지킨 자신의 선행을 의로 삼아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만큼이나, “무법(無法)한 자”나 “불법(不法)을 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 역시 율법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없다. (마7:23, 벧후3:17, 살후2:3, 7-8)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나,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행위도 결국 율법을 준수하려는 일임에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안식일 준수와 구원
안식일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운다는 비평 역시 옳지 않다.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가? 이러한 질문은 구태여 안식일에만 국한시킬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구원을 얻는가?” “도적질을 하지 말아야 구원을 얻는가?” 모두 같은 성질의 질문이다. 이런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고 도적질을 하지 않았어도 구원받지 못할 많은 사람이 있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하기를 망설인다. 마찬가지로 무법한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 (갈5:19-21, 딤후3:2-5)임을 명시한 성경 말씀을 기억할 때, 우리는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꺼린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고 대답은 무엇인가?
앞에서 밝힌 대로 안식일은 창조와 구속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서 개천절과 광복절의 의미가 포개진 경우이다(신5:12-15). 그러므로 “안식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가?”라는 질문은, “광복절을 지켜야 해방되는가?”라는 질문과 같아진다. 논리적으로 틀린 질문에는 바른 대답이 있을 수가 없다. 태어난 사람에게는 생일이 있고, 해방된 민족에게는 광복절이 있듯이 창조와 구속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에게는 안식일의 존재와 필요가 절실해진다.
창조 때부터 존재한 안식일이 실제로 도덕의 법칙인 십계명과 함께 성문화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후인 시내 산에서였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포함한 십계명이 구원의 근거가 아닌 것은 틀림없다. 구원의 근거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상징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곧 십자가이다(고전5:7). 하나님께서도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로라”(출20:2)고 전제하신 후 안식일을 포함한 십계명을 지키도록 명하셨다. 안식일의 경우는 이 사실이 강조되었다(신5:15).
구원의 결과인 안식일
분명해졌듯이, 십계명이나 안식일 준수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 명시되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받은 바 구원을 보존하고 경험하는 방편이다. 한국에 살면서 미국의 헌법을 준수하고 독립기념일을 철저히 지켰다고 미국에 영주 이민을 허락받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런 것들을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 않았어도 미국이 호의로 발급한 사증(비자)을 근거로 이민 자격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다. (엡2:8-9) 그러나 일단 자격을 얻어 이민하면, 미국의 법을 준수해야 한다. 이민의 조건으로가 아니라, 시민의 자격과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영주권자나 시민권자가 되고도 고의로 법을 범하거나 무시하면 추방되거나 시민의 권리를 법에 따라 제한당한다. 천국시민의 특성과 자격을 선포한 산상설교에서 예수께서도 십계명의 중요성과 의의를 확대하셨음을 주목할 것이다 (마5:7-48, 7:12-27).
현재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성실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면서도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은 사람들이 허다하지 않은가? 그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비롯한 노독들이 일부다처의 관습을 따랐음을 본다. 그랬기 때문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축첩이 죄가 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이혼 등 이러한 도덕적 표준들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그 세대의 완악함과 어두움을 지적하신 후 성경의 원칙을 제시하시고,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마19:3-10)고 단언하셨다.
성경은 각 시대의 각 사람이 처한 환경과 받은 빛이나 특권에 대하여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마11:20-24, 25:24-28, 요9:39-41, 롬2:12-23). 사도 바울도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음을 상기시키고, “이제는 어디든지”라는 표현을 통하여 심판의 시의성을 강조했다(행17:30-31). 그것이 또한 계시록에 나타난 심판의 시대적 배경이기도 하며 (계14:6-12), 로마서에 제시된 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을 강조한 심판의 문화적 배경이기도 하다. (롬2:1-11)
심판의 표준인 십계명
여하튼 안식일을 포함한 십계명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은혜로 거저 베푸신 구원에 대한 인간의 반응인 믿음의 진실한 여부를 드러내는 열매, 곧 행실(마7:16-21)을 심판하는 표준임에는 틀림없다(약2:8-13).
십계명의 기능은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일이 아니라(롬3:20), 십자가의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을 죄로부터 보존하여 거룩하게 하는 성화의 방편이요, 표준이 된다(롬7:7, 13). 특별히,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겔20:12)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심판에서(계14:6-11), 의롭게 서게 될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특성이,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계14:12)라고 명시된 것도 그 까닭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심판은 믿음의 결과인 행실을 판별하는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마16:27, 계22:12).
그러므로 안식일을 비롯한 십계명의 권위를 비평하려 할 때에는, “자유의 율법(십계명)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2:12)는 권면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약2:9)는 기능과 불변의 권위를 여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롬3:31)운다는 사실을 복음의 구조에서 이해해야 한다.
부활의 기념과 일요일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신계훈, 빛과 소리사, 1991, p68~)
비평에 나타난 대로, 오늘날 일반 교회들이 제칠일 안식일 대신 첫째 날인 일요일을 준수하는 이유로, 부활의 기념일을 강조하고 있다. 일요일을 부활의 기념으로 지키는데 대한 성경적은 어떤 근거가 있는가?
가. 실제의 날짜는 아니지만, 성탄절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여 지키고, 부활절은 부활을 기념하여 지킨다. 일년에 한번씩 부활절로 부활을 기념한다면 왜 또 일요일을 지켜 부활을 이중으로 기념하는가? 창조는 엿새 동안에 이루어졌음으로 제칠일마다 안식일을 지켜 창조를 기념하는 것은 기념일로서 논리가 서지만, 부활이 일요일에 있었다고 매 일요일을 부활의 기념일로 삼는 것은 논리가 부당하다. 만약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 월요일이라 해서, 성탄절과 함께 매 월요일을 탄생기념일로 지킨다면 얼마나 이상한 기념방법이 되겠는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나. 첫째 날인 일요일에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날을 기념하여 거룩히 지킨다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돌아가신 여섯째 날인 금요일도 기념할 만한 날이 아닌가? 실제로 십자가와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가 되는 역사적 사건이므로 기념해야 할 가치가 있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두 사건을 기념하는 특별한 방법을 친히 제정하시고 준수하도록 명령하셨다. 십자가에 죽으심을 재림하실 때까지 기념하라고 제정하신 의식이 성만찬 예식이다. (고전11:23~24, 마26:26~29) 돌아가신 여섯째 날인 금요일이나, 성력 1월 14일 유월절을 날짜로 기념하라고 아니하시고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나를 기념하라”고 하셨다. (고전11:25~26) 십자가에 죽으심을 언제나 어디서나 성만찬 예식을 통함으로 기념하게 된다.
다. 부활은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3:21)”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6:4~5)”
예수께서 친히 받으심으로 모본을 보이신 침례(마3:13~17)가 곧 부활을 기념하는 예식이 된 것이다.
라. 그런데 중생과 부활의 기념인 침례를 성만찬처럼 자주 기념할 수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예수께서 성만찬을 집전하시기 전, 이미 침례를 받음으로 “중생의 씻음(딛3:5, 행22:16, 히10:22)”을 경험한 제자들에게,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13:10)”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침례를 반복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발을 씻기는 세족(洗足)예식으로 대신하신 후, “내가 주와 선생으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느니라(요13:14~15)”고 하셨다. 이처럼 세족예식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할뿐더러 행하도록 모본까지 보이시며 명하셨는데, 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 예식을 등한히 하면서, 명하시지도 않은 일요일 준수로 중생과 부활을 기념하려고 하는가?
이처럼 십자가의 죽으심을 성만찬으로, 부활과 중생은 침례와 세족예식으로 기념하도록 예수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또 준수하도록 명하셨다. 이리하여 세족예식을 겸한 성만찬과 침례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가 되는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하는 두 성례전(聖禮典)으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는 것이다. 부활의 기념으로 일요일을 성수하는 것은 성경에 아무 근거가 없을뿐더러 논리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시간 곧 날짜와 연관시켜 기념하도록 명하신 것은 창조와 구속의 기념일인 제칠일 안식일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십계명의 날과 일요일 휴업령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미리 알려주시지 아니하고는 아무 일도 행하시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아모스 3:7)
참으로 그러하다. 우리는 이 지구 역사상 가장 밝고 맑은 양의 빛을 받은 백성들이다. 우리들이 현 시대의 징조에 대하여 알지 못하여 졸고 있다면 전혀 핑계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다 하나님의 예언을 이해하거나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자기를 죄로부터 정결케 하며 성령의 지혜를 가진 자들만 예언에 관심을 가지며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의 다니엘서에 있는 말씀이 우리에게 그 사실을 말하여 주고 있다.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기다려서 일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업을 누릴 것임이니라” (단12:10~13)
마지막 날 사건의 예언들을 이해하는 자들이 따로 있다. 우리 주위에서 현재 중요한 예언들이 성취되어 가고 있는 와중에도 영원한 일들에 관해 관심이 없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세상일에 빠져서 시집가고 장가들며 집을 짓고 돈을 버는 일에만 치중하고 있다.
다니엘은 자기가 할 일을 한 후에 쉬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이 나중에 자기가 한 일의 업을 누리게 될 것이니 지금은 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기가 감聆?몫에 대한 보상을 마지막에 가서 얻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 자신도 채 이해하지 못한 채 잠을 자고 있는 바고 그 예언을 이해하고 그 예언들의 성취를 보고 깨달으며, 세상에 나가 외칠 자들이 마지막 시대에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결의 경험을 하는, 그래서 예수의 믿음을 가지고 계명을 지키는 경험을 하는 자들이다.
미국은 준비가 다 되어있다!
지금 미국에서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미국 사회의 타락한 도덕을 십계명의 표준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보수주의 성향의 기독교인들의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미국 캔사스 주 의회에서는 공립학교에서 창조설을 가르치라는 의제를 표결하였다. 그리고 죠지아 주 의회에서는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쳐도 좋다고 인정하였다. 현재 미국 복음주의 파들은 공공장소에 십계명을 새긴 돌비들을 부착하자는 주장으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는 마침내 2006년 올해 5월 7일을 십계명의 날로 제정하고 와싱톤 디씨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큰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미리 말씀해 주시지 않으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음 한 선지자의 영감의 말씀을 읽어보자.
[오늘날 미국에서는 교회의 제도와 관습에 있어서 국가의 지지를 받으려는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바, 그것은 개신교가 로마교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일이다. 그뿐 아니라 개신교도들은 로마교가 유럽에서 잃어버린 최상권을 개신교 미국에서 회복하도록 문을 열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운동에 더욱 큰 의미를 주는 것은 일요일 준수, 곧 로마교가 만들어서 그의 권위의 표라고 주장하는 관습의 강요를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는 사실이다. 오늘날 개신교회들에 침투되어 그들로 하여금 일찍이 로마교가 그들 앞에서 한 그대로 일요일을 존중하는 동일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은 로마교의 정신, 곧 세속적 관습과 일치되고,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유전을 존중하는 정신이다. 미구에 전개될 투쟁에 있어서 어떤 기관들이 이용될 것인지 이해하려면 로마교가 그와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과거에 어떤 수단을 이용했는지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된다. 법왕교와 개신교가 연합하여 그들의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지 알고자 하면 로마교가 안식일과 안식일 옹호자들에 대하여 나타냈던 정신을 알아보아야 한다.] (The Controversy between Christ and Satan, 573)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이 불신에 대하여, 강신술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심의 거룩한 율법을 멸시하는 일에 대하여 문울 열어 놓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계에 있는 죄악에 대한 무서운 책임이 지도자들에게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급속히 퍼져가는 타락적 풍조가 소위 그리스도인 안식일(일요일을 가리킴)을 모독하는데서 기인된다는 것과 일요일 준수를 강요함으로 사회의 도덕이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참된 안식일의 교리가 가장 널리 전파된 미국에서 특별히 강조된다.] (The Controversy between Christ and Satan, 587)
[성경상 안식일을 옹호하는 자들에게 “성경에 이렇게 말했다”는 주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부족을 채우기 위하여 압제적인 법령을 의지할 것이다. 인기와 후원을 얻기 위하여 입법자들은 일요일 법령을 제정하라는 요구에 굴복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십계명의 조항들을 깨뜨리는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싸움터에서 진리와 오류간의 대쟁투의 마지막 큰 싸움이 전개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싸움의 결과에 대하여 확실히 모르도록 버려져 있지 않다. 모르드개의 시대에서처럼 이제 주님께서는 그분의 진리와 그분의 백성들을 옹호하실 것이다.......로마 군대의 접근이 제자들에게 있어서 임박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징조가 되었던 것처럼 이 배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한계가 이르렀고, 미국의 죄악의 잔이 찼고, 자비의 천사가 바야흐로 날아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징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때에 선지자들이 야곱의 환난의 때로 묘사한 그 고통과 난관의 장면으로 돌입할 것이다.] (교회증언 5권, 450)
일요일 휴업령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세력은 이미 사회의 관습이 되어버린 휴일제도인 일요일에 시민들을 쉬게 하자는 제의를 아주 쉽게 달성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국가의 헌법의 지지를 받아 강요하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옛날 콘스탄틴 황제 때에 내린 일요일 휴업령도 그 당시 이교도들의 휴일이었던 일요일을 쉬게 하는 법령을 내림으로 아주 손쉽게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옛날의 헌법은 국가의 왕이나 황제의 명령이었다. 또한 일요일 법령이 내린 이후에 거짓 소문들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일요일에 떡 방앗간에서 일하던 한 사람이 그 반죽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는 등의 괴 소문들이 퍼지며 일요일을 지키게 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게 해 주었고, 더 나아가서는 죽은 영들이 꿈에 나타나 일요일을 신성시해야 한다는 이상한 거짓 기적들도 꼬리를 물고 발생하면서 일요일 휴업령은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영감의 책은 그러한 일들이 우리 시대에도 반복되며 지구의 역사를 마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단은 두 큰 오류, 영혼 불멸설과 일요일 신성설을 통하여 사람들을 그의 기만 아래 들어오게 할 것이다. 영혼 불멸설은 강신술의 기초가 되고 일요일 신성설은 로마교회에 대한 공명심을 일으킨다. 미국의 개신교도들은 솔선하여 강신술과 손을 잡기 위하여 심연(深淵)을 넘어 그들의 손을 내밀고 또 그들은 큰 구렁텅이를 넘어서 로마교회의 세력과 악수하기 위하여 손을 뻗칠 것이다. 그와 같은 삼중 연합의 세력 아래 이 나라는 양심의 권리를 유린하는 일에 로마의 발차취를 따르게 될 것이다. 강신술이 오늘날의 유명 무실한 그리스도교를 더욱 잘 모방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큰 기만과 유혹의 세력을 갖게 된다. 사단은 현대의 감각에 맞추어서 스스로 변장한다. 그는 빛나는 천사의 모양으로 나타날 것이다. 강신술의 매개체를 통하여 이적들이 행해지고 병 고침을 받게 되고 부인할 수 없는 많은 기사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 영들은 성경을 믿는 그들의 믿음을 고백하고 교회의 제도들에 대한 존중심을 표명할 것이므로 그들의 활동은 마치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처럼 인정될 것이다. 오늘날의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과 불신자들과의 한계를 거의 구별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교회의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있고 그들과 연합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사단은 그들을 하나의 단체로 연합시켜 강신술의 대열에 쓸어 넣음으로써 그의 사업을 강화시키고자 결심하고 있다. 이적이 참 교회의 분명한 표라고 자랑하는 법왕교도들은 이적을 행하는 이 능력에 쉽게 기만당할 것이며 진리의 방패를 버린 개신교도들 역시 미혹당할 것이다. 법왕 교도들과 개신교도들과 세속인들은 한결같이 경건의 능은 버리고 경건의 모양만 받아들일 것이다. 그들은 이 연합을 온 세계를 교화시키는 큰 운동이요, 오랫동안 고대했던 복천년을 도래케 하는 운동이라고 볼 것이다. 사단은 강신술을 통하여 인류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처럼 나타나서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 주고 새롭고 더욱 고상한 종교적 신앙을 제시해 주는 것처럼 공언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파괴자로서 활동하게 된다. 그의 유혹은 무수한 무리를 멸망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부절제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켜 버리고 방종과 투쟁과 유혈이 따르게 된다. 사단은 전쟁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전쟁은 사람의 가장 악한 감정을 자극하며 전쟁의 희생자들을 죄악과 유혈 속으로 영원히 쓸어 넣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라가 다른 나라를 대적하여 싸우도록 자극하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날에 설 준비를 갖추는 사업에서 떠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The Controversy between Christ and Satan, 588)
[미구에 하늘에는 이적을 행하는 마귀의 능력을 알려 주는 증거로서 초자연적인 무서운 광경이 나타날 것이다. 마귀의 영은 땅의 왕들과 온 세상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속임수로 그들을 얽어매어 하늘 정부를 대적하는 그의 마지막 투쟁에 사단과 연합하도록 그들을 강요할 것이다. 그 악한 영들로 말미암아 통치자들과 백성들은 다 같이 속을 것이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리스도라고 자칭할 것이며 구주께 속한 칭호와 예배를 요구할 것이다. 그들은 병을 고치는 놀라운 이적을 행하고 성경의 증거와 반대되는 계시를 하늘로부터 받았노라고 공언할 것이다.] (The Controversy between Christ and Satan, 623)
2006년 5월 7일, 십계명의 날
미국의 복음주의파 기독교인들이 우리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한가지 일을 최근에 행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의 뒤통수를 친 일인데, 십계명을 기념하자는 “십계명의 날”을 제정한 일이다. 미국의 사회의 도덕을 개선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막자는 의도에서 기인된 운동으로서 마치 영감의 책에 기록된 장면들을 영화의 한편처럼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데 흥미 있는 일은, 하나님의 계명 중 하나를 로마교회의 제시에 따라 변경하여 지켜오던 개신교회는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계명의 권위를 지킬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일에 있어서 천주교회를 따라왔는데, 성경의 진리에 대한 서로의 차이들은 제쳐놓고 연합하자는 천주교회의 제의에 어떻게 대항할 수 있단 말인가?
십계명의 날! 정말로 기가막한 아이디어다. 누가 감히 그 좋은 제안에 반대할 수 있겠는가?
미국의 도덕의 타락과 낙태의 죄와, 십계명을 공공장소에 걸지 못하게 하는 자유주의자들을 향한 미국 복음주의파 기독교인들의 반기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국가를 위한 이 경건한 도덕 운동을 누가 감히 정죄할 것인가? 개신교회와 천주교인들이 연합한 이 운동에 유대교회도 감히 반대하지 못하고 연합하였다. 미국의 유명한 모든 목사들이 다 연합되어 있는데 어떻게 평신도들이 반대할 수 있겠는가? 물론 십계명을 지키케 하자는 데는 하자가 없다. 너무나 당연하고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운동의 목표가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일을 국가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안식일을 바꾼 사람들이 헌법의 힘으로 넷째 계명을 범국민적으로 바꾸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그들은 십계명의 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어떤 외형적인 표와 수단을 만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형적인 수단이란 결국은 일요일에 모든 국민을 쉬게 하자는 일요일 휴업령으로 바뀔 것이 자명하다.
십계명의 말을 5월 7일로 제정한 이유는 오순절과 가장 가까운 일요일이기 때문인데, 오순절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이기도 하다. 첫 번째 기념일은 미국에서 거행하지만 이제 곧 세계적인 십계명의 날을 선포하겠다고 그들은 포부를 밝히고 있다.
십계명의 날을 선포하는 목적을 주최 측은 다음과 같이 발표하고 있다.
1. 십계명 속에 들어있는 원칙들과 법칙들, 그리고 그 내용들의 최고적인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2. 십계명 가운데서 발견되는 가치관에 우리의 굴복과 헌신을 나타내는 상징을 제공하기 위하여.
3. 법을 어기는 일 없이 평화적으로 사회의 모든 전반에 걸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게 만드는 하나의 구조장치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4. 최고의 권위인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명에 충성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견해를 나타내는 기회를 주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해야 할 사업이 있다. 밖으로는 각 교파에 속해있는 신실한 백성들에게 진리를 온전히 전하며 안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우는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내적으로는 다가오는 환란을 준비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환란을 준비하라
하나님의 종 선지자는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의 준비는 다음과 같은 경험이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의 때가 곧 우리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경험하고 있지 못한 경험 즉 사람들이 얻기를 너무도 게을리 하고 있는 한 가지 경험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 실제로 당하는 환난이 가벼운 것이 상례이지만 우리 앞에 있는 위기는 그렇지 않다. 가장 자세하게 묘사하여도 그 시련의 크기를 여실하게 표현할 수 없다. 그 환난의 때에 각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겔 14:20).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고 계시는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여지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비록 생각으로라도 유혹의 힘에 굴복당하지 않으셨다. 사단은 사람의 마음 가운데 그가 발을 붙일 어떤 곳이 있는지 찾는다. 그러던 중 어떤 죄된 욕망을 품게 되면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유혹의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 14:30)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셨다. 그러므로 그분에게는 사단이 이용할 수 있는 죄가 전혀 없었다. 그것은 환난의 때에 서게 될 사람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상태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죄와 분리되어야 한다. 우리의 귀하신 구주께서는 우리 자신을 당신께 연합시키도록 초청하시되 우리의 연약함을 당신의 능력에, 우리의 무지를 당신의 지혜에, 우리의 무가치함을 당신의 공로에 연합시키기를 간청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경험들은 우리가 마땅히 배워야 할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가르쳐 주는 학교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앞에 더욱 안이하고 즐거워 보이는 길, 곧 우리가 택하기를 좋아할 그런 길이 아니라 생애의 진정한 목적이 되는 길을 제시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품성을 그 거룩하신 모본을 따라 이루는 사업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대리자들과 협력하는 일이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다. 이 일을 게을리 하거나 지연시키는 자들은 누구나 그들의 영혼을 가장 무서운 위험에 빠뜨릴 수밖에 없다. 사도 요한은 계시 중에 하늘에서 큰 음성으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 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계 12:12)고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하늘의 음성으로 이와 같이 크게 부르짖는 장면은 얼마나 두려운가. 사단의 분노는 그의 시간이 단축되어 감에 따라 격렬해진다. 그리하여 그의 기만과 파괴 행위는 환란의 때에 그 절정에 이를 것이다.] (The Controversy between Christ and Satan, 622~623)
[주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하고 계신다. 온 하늘은 움직이고 있다. 온 땅의 재판장께서는 미구에 일어나셔서 그분의 모욕당한 권위를 옹호하실 것이다. 구원의 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율법을 존중하는 자들과 짐승의 표나 그의 우상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찍혀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을 보여 주시므로 그분의 백성들이 반대와 분노의 폭풍을 대항하여 설 준비를 갖출 수 있게 하신다.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사건들에 대하여 경고를 받은 자들은 다가오는 폭풍을 조용히 기다리면서 주님께서 환란의 날에 그분의 성실한 백성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게으르게 기다림으로써가 아니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열렬히 활동함으로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 지금은 우리의 마음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얽히도록 허용할 때가 아니다. 사람들이 자고 있는 동안, 사단은 주님의 백성들이 자비나 공의를 입지 못하도록 일들을 그렇게 추진하고 있다. 일요일 운동은, 오늘날 암암리에 그 길을 마련하고 있다. 지도자들은 문제의 진상을 숨기고 있으며, 그 운동에 연합하는 많은 사람들은 저류(低流)가 어디로 향해 흐르고 있는지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그 공언은 부드럽고 그리스도인답게 보이지만 그것을 말할 때는 용의 정신이 나타날 것이다. 그 무서운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여 일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사람들은 그들 앞에 중요한 사업이 있다. 지금은 우리의 능력의 팔을 붙들 때이다. 다윗의 기도는 목사들과 평신도들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시 119:126). 주님의 종들은 낭실과 단 사이에서 울며,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으로 욕되게 하여 열국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욜 2:17)라고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멸망을 피할 희망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일 때, 그들의 가장 심한 곤경에서 언제나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역사하셨다...... ”시편 기자는,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시험하는 진리가 모욕을 통해서 일지라도 앞에 제시되어 검토와 논의의 대상이 되도록 의도하신다. 사람들의 마음은 동요되어야 한다. 모든 투쟁과 모든 비방과, 모든 중상은 의문을 일으키고 달리는 깨울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는 하나님의 수단이 될 것이다.] (교회증언 5권, 451~453)
말씀을 암기하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마12:50)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라 그 곳에 있지 아니하되” (요일2:3~4)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119:10~11)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 (시119:60)
“주의 계명은 신실하니이다 저희가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니 나를 도우소서” (시119:86)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시119:126~127)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4:6)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잠28:9)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 (렘6:19)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의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게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화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행24:14~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티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10:16)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마15:13)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히3:18)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셨으며” (히4:4)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이 백성에게 남아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8~10)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5:8~9)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지어다” (마24:15~16)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5:48)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