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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十年春王正月庚申에 曹伯終生卒하다
[經]夏五月에 葬曹桓公하다
[經]秋에 公會衛侯于桃丘나 弗遇하다
[經]冬十有二月丙午에 齊侯衛侯鄭伯이 來戰于郎하다
[경전] 10년 봄 주왕 정월 경신일에 조백(曹伯) 종생(終生)이 죽었다.
[경전] 여름 5월에 조환공(曹桓公)을 장사지냈다.
[경전] 가을에 노환공(魯桓公)이 위후(衛侯)와 회합하기 위해 도구(桃丘)로 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경전] 겨울 12월 병오일에 제후(齊侯)‧위후(衛侯)‧정백(鄭伯)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노(魯)나라와 낭(郎)에서 전쟁하였다.
[傳] 十年春에 曹桓公卒하다
[左丘明의 설명] 10년 봄에 조환공(曹桓公)이 죽었다
[傳] 虢仲譖其大夫詹父於王하다 詹父有辭일새 以王師伐虢하다 夏에 虢公 出奔虞하다
[左丘明의 설명] 괵중(虢仲)이 그 대부 첨보(詹父)를 주왕(周王)에게 참소하였다. 첨보가 정당하였으므로 주왕(周王)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괵나라를 쳤다. 여름에 괵공(虢公)이 우(虞)나라로 도망갔다.
[傳]秋에 秦人納芮伯萬於芮하다
[左丘明의 설명] 가을에 진(秦)나라 사람이 예백만(芮伯萬)을 예국(芮國)으로 들여보냈다.
[傳] 初에 虞叔有玉이러니 虞公求旃한대 弗獻이라가 旣而悔之曰 周諺有之하니 曰 匹夫無罪라 懷璧其罪라 하니 吾焉用此리오 其以賈害也라 하고 乃獻之하다 又求其寶劍이어늘 叔曰 是無厭也라 無厭이면 將及我라하고 遂伐虞公하다 故虞公出奔共池하다
[左丘明의 설명] 당초에 우숙(虞叔)이 좋은 옥(玉)을 갖고 있었는데, 우공(虞公)이 그 옥을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주지 않았다가 오래지 않아 후회하며 말하기를 “주(周)나라 속담에 ‘필부(匹夫)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옥벽(玉璧)을 가진 것이 죄이다.’라고 하였으니, 내게 이 옥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옥 때문에 해(害)를 사게 될 것이다.”라 하고서, 그 옥을 우공(虞公)에게 바쳤다. 우공이 또 보검(寶劍)을 요구하자, 우숙(虞叔)은 “이 사람은 욕심이 끝이 없어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다. 만족할 줄 모르면 화(禍)가 장차 나에게 미칠 것이다.”라 하고서, 드디어 우공(虞公)을 쳤다. 그러므로 우공이 공지(共池)로 도망간 것이다.
[傳] 冬에 齊衛鄭來戰于郞하니 我有辭也라 初에 北戎病齊하니 諸侯救之에 鄭公子忽有功焉하다 齊人餼諸侯하며 使魯次之한대 魯以周班後鄭하니 鄭人怒하야 請師於齊하니 齊人以衛師助之라 故不稱侵伐하다 先書齊衛는 王爵也라
[左丘明의 설명] 겨울에 제(齊)‧위(衛)‧정(鄭)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노(魯)나라와 낭(郎)에서 전쟁하였는데, 우리 노나라의 행위는 정당하여 할 말이 있었다. 당초에 북융(北戎)이 제(齊)나라를 괴롭히니 제후(諸侯)가 군대를 보내어 제(齊)나라를 구원할 적에 정공자(鄭公子) 홀(忽)이 공(功)이 있었다. 제(齊)나라 사람이 제후(諸侯)의 군대에 음식을 보내면서 노나라에게 차례를 정하게 하니, 노나라가 주왕(周王)이 내린 작위의 서열에 따라 차례를 정하여 정나라의 차례를 맨 뒤로 정하였다. 이로 인해 정(鄭)나라 사람이 노하여 제(齊)나라에 군대를 요청하니, 제(齊)나라 사람이 위(衛)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정나라를 도왔다. 그러므로 침벌(侵伐)이라고 칭(稱)하지 않았다. 제(齊)나라와 위(衛)나라를 먼저 기록한 것은 주왕(周王)이 내린 작위의 서열을 따른 것이다.
[經]十有一年春正月에 齊人衛人鄭人盟于惡曹하다
[經]夏五月癸未에 鄭伯寤生卒하다
[經]秋七月에 葬鄭莊公하다
[經]九月에 宋人執鄭祭仲하다 突歸于鄭하다 鄭忽出奔衛하다
[經]柔會宋公陳侯蔡叔하야 盟于折하다
[經]公 會宋公于夫鍾하다
[經]冬十有二月에 公會宋公于闞하다
[경전] 11년 봄 정월에 제(齊)나라 사람‧위(衛)나라 사람‧정(鄭)나라 사람이 오조(惡曹)에서 맹약하였다.
[경전] 여름 5월 계미 일에 정백(鄭伯) 오생(寤生)이 죽었다.
[경전] 가을 7월에 정장공(鄭莊公)을 장사지냈다.
[경전] 9월에 송(宋)나라 사람이 정(鄭)나라 제중(祭仲)을 잡았다. 돌(突)이 정(鄭)나라로 돌아갔다. 정홀(鄭忽)이 위(衛)나라로 도망하였다.
[경전] 유(柔)가 송공(宋公)‧진후(陳侯)‧채숙(蔡叔)과 회합하여 절(折)에서 결맹하였다.
[경전] 노환공(魯桓公)이 송공(宋公)과 부종(夫鍾)에서 회합하였다.
[경전] 겨울 12월에 노환공이 송공과 감(闞)에서 회합하였다.
[傳] 十一年春에 齊衛鄭宋이 盟于惡曹하다
[左丘明의 설명] 11년 봄에 제(齊)‧위(衛)‧정(鄭)‧송(宋)이 오조(惡曹)에서 결맹하였다.
[傳] 楚屈瑕將盟貳軫할새 鄖人軍於蒲騷하야 將與隨絞州蓼伐楚師하니 莫敖患之한대 鬪廉曰 鄖人軍其郊하니 必不誡오 且日虞四邑之至也리니 君次於郊郢하야 以禦四邑하소서 我以銳師宵加於鄖하리이다 鄖有虞心하고 而恃其城注+하야 莫有鬪志하리니 若敗鄖師면 四邑必離하리이다
[左丘明의 설명] 초(楚)나라 굴하(屈瑕)가 이(貳)‧진(軫)과 결맹하려할 때 운(鄖) 사람이 포소(蒲騷)에 주둔하여 수국(隨國)‧교국(絞國)‧주국(州國)‧요국(蓼國) 등 네 나라와 연합해서 초군(楚軍)을 공격하려 하니, 막오(莫敖)가 이를 근심하자, 투렴(鬪廉)이 말하기를 “운(鄖) 사람은 자기 나라 근교에 주둔하였으므로 반드시 경계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고, 또 날마다 네 읍의 군대가 오기를 바랄 것이니, 군(君)께서는 교영(郊郢)에 주둔하여 네 읍의 군대를 막으십시오. 나는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가서 밤에 운(鄖) 나라를 공격하겠습니다. 운(鄖)나라는 네 읍의 군대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고 또 그 성(城)을 믿고서 싸우려는 뜻이 없을 것이니, 만약 운(隕) 나라의 군대를 패배시킨다면 네 나라의 군대도 반드시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傳] 莫敖曰 盍請濟師於王고 對曰 師克在和요 不在衆이라 商周之不敵은 君之所聞也라 成軍以出하니 又何濟焉이리오 莫敖曰 卜之하라 對曰 卜以決疑하나니 不疑何卜고하고 遂敗鄖師於蒲騷하고 卒盟而還하다
[左丘明의 설명] 막오(莫敖)가 말하기를 “어찌 초왕(楚王)에게 증원군을 요청하지 않는가?”라고 하니, 투렴(鬪廉)이 대답하기를 “전쟁의 승리는 군대의 화합에 있지, 군대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군대가 많았던 상(商)나라가 군대가 적었던 주(周)나라의 대적(對敵)이 되지 못했던 것은 군(君)께서도 들어 아실 것입니다. 충분한 군대를 편성하여 나왔는데, 또 군대를 증원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막오(莫敖)가 “점을 쳐보라.”라고 하니, 투렴이 대답하기를 “점은 의심스러운 일을 결정하기 위해 치는 것이니, 의심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점을 치겠습니까?”라고 하고는 드디어 포소(蒲騷)에서 운군(鄖軍)을 패배시키고서 예정대로 이(貳)‧진(軫) 양국(兩國)과 결맹하고 환국하였다.
[傳] 鄭昭公之敗北戎也에 齊人將妻之하니 昭公辭하다 祭仲曰 必取之하소서 君多內寵하니 子無大援이면 將不立이요 三公子 皆君也리이다 弗從하다
[左丘明의 설명] 정소공(鄭昭公)이 북융(北戎)의 군대를 패배시켰을 때 제(齊)나라 사람이 딸을 그의 아내로 주고자 하니, 정소공은 사양하였다. 그러자 제중(祭仲)이 정소공에게 말하기를 “반드시 취하십시오. 현재 임금께는 사랑하는 여자가 많으니 세자(昭公)께 강력한 바깥 원군이 없으면 임금이 될 수 없을 것이고, 세 공자가 모두 임금이 될 가망이 있습니다.”고 하였으나 정소공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傳] 夏에 鄭莊公卒하다 初에 祭封人仲足有寵於莊公하야 莊公使爲卿하니 爲公娶鄧曼하야 生昭公하다 故祭仲立之하다 宋雍氏女於鄭莊公하니 曰雍姞이라 生厲公하다 雍氏宗이 有寵於宋莊公이라 故誘祭仲而執之하고 曰 不立突하면 將死라 하고 亦執厲公而求賂焉하다 祭仲與宋人盟하고 以厲公歸而立之하다. 秋九月丁亥에 昭公奔衛하니 己亥에 厲公立하다
[左丘明의 설명] 여름에 정장공(鄭莊公)이 죽었다. 당초에 제(祭)의 봉인(封人) 중족(仲足)이 정장공(鄭莊公)에게 총애을 받아 정장공이 그를 경(卿)으로 삼았다. 제중(祭仲)이 장공을 위해 등만(鄧曼)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하였는데 등만이 소공(昭公)을 낳았다. 그러므로 장공이 죽은 뒤에 제중(祭仲)이 소공(昭公)을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 송(宋)나라 옹씨(雍氏)도 딸 옹길(雍姞)을 정장공(鄭莊公)에게 시집보내어 여공(厲公)을 낳았다. 옹씨(雍氏)의 종족이 송장공(宋莊公)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므로 제중(祭仲)을 송(宋)나라로 유인하여 억류하고서 “돌(突)을 임금으로 세우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또 여공(厲公)까지 억류하고 뇌물을 요구하였다. 제중(祭仲)이 송(宋)나라 사람과 맹약하고서 여공(厲公)을 데리고 돌아가서 임금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가을 9월 정해 일에 소공이 위(衛)나라로 도망가니 기해 일에 여공(厲公)이 즉위하였다.
[經] 十有二年春正月이라
[經] 夏 六月壬寅에 公會紀侯莒子하야 盟于曲池하다
[經] 秋七月丁亥에 公會宋公燕人하야 盟于穀丘하다
[經] 八月壬辰에 陳侯躍卒하다
[經] 公會宋公于虛하다
[經] 冬十有一月에 公會宋公于龜하다
[經] 丙戌에 公會鄭伯盟于武父하다
[經] 丙戌에 衛侯晉卒하다
[經] 十有二月에 及鄭師伐宋하고 丁未에 戰于宋하다
[경전] 12년 봄 정월이다.
[경전] 여름 6월 임인 일에 노환공(魯桓公)이 기후(紀侯)‧거자(莒子)와 회합하여 곡지(曲池)에서 결맹하였다.
[경전] 가을 7월 정해 일에 노환공(魯桓公)이 송공(宋公)‧연(燕)나라 사람과 회합하여 곡구(穀丘)에서 결맹하였다.
[경전] 8월 임진 일에 진후(陳侯) 약(躍)이 죽었다.
[경전] 노환공(魯桓公)이 송공(宋公)과 허(虛)에서 회합하였다.
[경전] 겨울 11월에 노환공(魯桓公)이 송공(宋公)과 구(龜)에서 회합하였다.
[경전] 병술일에 노환공(魯桓公)이 정백(鄭伯)과 회합하여 무부(武父)에서 결맹하였다.
[경전] 병술 일에 위후(衛侯) 진(晉)이 죽었다.
[경전] 12월에 노(魯)나라가 정(鄭)나라 군대와 연합해 송나라를 토벌하고, 정미 일에 송(宋)나라에서 전쟁하였다.
[傳] 十二年夏에 盟于曲池하니 平杞莒也라
[左丘明의 설명] 12년 여름에 곡지(曲池)에서 결맹하였으니 이는 기(杞)나라와 거(莒)나라를 화평시키기 위함이었다.
[傳] 公欲平宋鄭하야 秋에 公及宋公盟于句瀆之丘하다 宋成未可知也라 故又會于虛하고 冬에 又會于龜하다 宋公辭平하다 故與鄭伯盟于武父하고 遂帥師而伐宋하야 戰焉하니 宋無信也라
[左丘明의 설명] 노환공(魯桓公)이 송(宋)나라와 정(鄭)나라를 화평시키고자 하여, 가을에 송공(宋公)과 구독(句瀆)의 언덕에서 맹약하였다. 그러나 송(宋)나라가 진정으로 정(鄭)나라와 강화할는지 알 수 없으므로 또 송(宋)나라와 허(虛)에서 회합하고 겨울에 또 구(龜)에서 회합하였다. 그런데도 송공(宋公)이 끝내 화평을 거절하였다. 그러므로 노환공(魯桓公)은 정백(鄭伯)과 무부(武父)에서 결맹하고 드디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송나라를 토벌하고 전쟁하였으니, 이는 송나라가 신의가 없기 때문이었다.
[傳] 君子曰 苟信不繼면 盟無益也라 詩云 君子屢盟이라 亂是用長이라하니 無信也라
[左丘明의 설명] 이에 대해 군자(君子)는 다음과 같이 평론하였다. “만약 신의가 계속되지 않는다면 결맹은 아무 소용이 없다. <시경(詩經)>에 ‘군자(君子)가 자주 맹약을 맺기 때문에 난리가 점점 늘어난다.’고 하였으니, 이는 신의가 없음을 이른 것이다.”
[傳]楚伐絞하야 軍其南門하다 莫敖屈瑕曰 絞小而輕하니 輕則寡謀니이다 請無扞采樵者以誘之하소서 從之하니 絞人獲三十人하다 明日에 絞人爭出하야 驅楚役徒於山中이어늘 楚人坐其北門하고 而覆諸山下하야 大敗之하고 爲城下之盟而還하다
[左丘明의 설명] 초(楚)나라가 교(絞) 나라를 토벌하기 위해 교나라의 남문(南門)에 주둔하였다. 막오(莫敖) 굴하(屈瑕)가 말하기를 “교(絞) 나라는 국토가 작고 사람들이 경박하니, 경박하면 지모가 부족합니다. 그러니 나무하는 채초병(采樵兵;나무꾼)에게 호위병을 붙이지 말고 내보내어 저들을 유인하소서.”라고 하였다. 초자(楚子;초나라 군주)가 그의 말에 따라 그대로 하니, 교(絞) 나라 사람이 초(楚)나라의 채초병(采樵兵) 30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튿날에는 교(絞)나라 사람이 앞다투어 나와서 초(楚)나라의 채초병을 산중까지 추격하였다. 그러자 초(楚)나라 사람은 교국의 북문을 지키고 산밑에 군대를 매복시켜 교(絞) 나라 군사를 대패시키고서 성하지맹(城下之盟;항복)을 맺고 돌아왔다.
[傳] 伐絞之役에 楚師分涉於彭하니 羅人欲伐之하야 使伯嘉諜之하니 三巡數之하다
[左丘明의 설명] 초군(楚軍)이 교(絞) 나라를 치는 전쟁을 할 때 군대를 나누어 팽수(彭水)를 건너니, 나인(羅人)이 초군을 치고자 하여 백가(伯嘉)에게 가서 정탐하게 하니, 백가가 초군의 인원수를 세 차례 세었다.
[經] 十有三年春二月에 公會紀侯鄭伯하야 己巳에 及齊侯宋公衛侯燕人戰하니 齊師宋師衛師燕師敗績하다
[經] 三月에 葬衛宣公하다
[經] 夏에 大水하다.
[經] 秋七月이라
[經] 冬十月이라
[경전] 13년 봄 2월에 환공이 기후(紀侯)‧정백(鄭伯)과 연합하여 기사 일에 제후(齊侯)‧송공(宋公)‧위후(衛侯)‧연인(燕人)과 전쟁하니, 제(齊)‧송(宋)‧위(衛)‧연(燕)의 군대가 크게 패배하였다.
[경전] 3월에 위선공(衛宣公)을 장사 지냈다.
[경전] 여름에 큰물이 졌다.
[경전] 가을 7월이다.
[경전] 겨울 10월이다.
[傳] 十三年春에 楚屈瑕伐羅에 鬪伯比 送之하고 還하야 謂其御曰 莫敖必敗리라 擧趾高하니 心不固矣라 遂見楚子曰 必濟師하소서 楚子辭焉하고 入告夫人鄧曼한대 鄧曼曰 大夫其非衆之謂라 其謂君撫小民以信하고 訓諸司以德하고 而威莫敖以刑也니이다 莫敖狃於蒲騷之役하야 將自用也하고 必小羅하리니 君若不鎭撫면 其不設備乎ᄂ저 夫固謂君訓衆而好鎭撫之하고 召諸司而勸之以令德하야 見莫敖而告諸天之不假易也로소이다 不然이면 夫豈不知楚師之盡行也릿가 楚子使賴人追之나 不及하다
[左丘明의 설명] 13년 봄에 초(楚)나라 굴하(屈瑕)가 나국(羅國)을 토벌하기 위해 떠날 때 투백비(鬪伯比)가 그를 전송하고 돌아와서 자기의 어(御;수레를 모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막오(莫敖)는 반드시 패전할 것이다. 그가 발을 높이 들어 걸음을 걸으니 마음이 견고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다.”고 하고서, 초자(楚子)를 뵙고 “반드시 군대를 더 보내 주소서.”라고 하였다. 초자(楚子)가 사절하고 내전으로 들어가 부인 등만(鄧曼)에게 그 사실을 고하자 등만이 말하기를 “대부(鬪伯比)의 말은 군대를 더 보내라는 뜻이 아니라 군(君)께서 신의로 백성을 어루만지고 덕(德)으로 백관(百官)을 훈계하고 형벌로 막오(莫敖)에게 위엄을 보이라는 뜻입니다. 막오(莫敖)는 포소(蒲騷)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에 젖어서 장차 자기 뜻대로 하고 반드시 나국(羅國)을 경시할 것이니, 군(君)께서 그를 억제하여 위무(慰撫)하지 않으시면 아마도 대비책을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저 투백비(鬪伯比)의 말은 군(君)께서 대중을 훈계하여 잘 억제해 어루만지고 벡관(百官)을 불러 아름다운 덕으로 권면(勸勉)하여서 그들이 막오를 만나거든 ‘하늘은 남을 경시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고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 투백비가 어찌 초나라 군대가 다 간 것을 모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초자(楚子)가 뇌(賴)나라 사람을 시켜 막오를 뒤쫒게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傳] 莫敖使徇于師曰 諫者有刑하리라 及鄢하야 亂次以濟하니 遂無次하고 且不設備하다 及羅하니 羅與盧戎兩軍之하야 大敗之하다 莫敖縊于荒谷하고 羣帥 囚于冶父하야 以聽刑이어늘 楚子曰 孤之罪也라하고 皆免之하다
[左丘明의 설명] 막오는 사람을 시켜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리기를 “간(諫)하는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다.”라 하고서, 군대를 거느리고 언수(鄢水)에 이르러 무질서하게 물을 건너고, 물을 건넌 뒤에도 대열을 정돈하지 않고 또 대비책도 세우지 않았다. 나국(羅國)에 이르니, 나군(羅軍)과 노융(盧戎)의 군대가 양쪽에서 협공하여 초군(楚軍)을 대패시켰다. 막오는 황곡(荒谷)에서 목매어 죽고, 장수들은 야부(冶父)에서 스스로 갇혀 초왕(楚王)의 처벌을 기다리니, 초자(楚子 ; 초왕)가 “이는 나의 죄이다.”고 하고서 장수들을 모두 사면하였다.
[傳] 宋多責賂於鄭하니 鄭不堪命이라 故以紀魯及齊與宋衛燕戰하다 不書所戰은 後也일새니라
[左丘明의 설명] 송(宋)나라가 정나라에 여러 차례 뇌물을 요구하니, 정나라는 송나라의 명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므로 기(紀)‧노(魯)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제(齊)‧송(宋)‧위(衛)‧연(燕)의 군대와 전쟁한 것이다. 경(經)에 전쟁한 곳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노나라가 뒤늦게 갔기 때문이다.
[傳] 鄭人來請脩好하다
[左丘明의 설명] 정(鄭)나라 사람이 노(魯)나라로 와서 수호하기를 청하였다.
[經] 十有四年春正月에 公會鄭伯于曹하다
[經] 無冰하다
[經] 夏五라
[經] 鄭伯이 使其弟語來盟하다
[經] 秋八月壬申에 御廩災하다 乙亥에 嘗하다
[經] 冬十有二月丁巳에 齊侯祿父卒하다
[經] 宋人以齊人蔡人衛人陳人伐鄭하다
[경전] 14년 봄 정월에 노환공(魯桓公)이 정백(鄭伯)과 조(曹)에서 회합하였다.
[경전] 얼음이 얼지 않았다.
[경전] 여름 5이다.
[경전] 정백이 그 아우 어(語)를 노(魯)나라에 보내어 결맹하였다.
[경전] 가을 8월 임신 일에 나라 창고에 불이 났다. 을해 일에 상제(嘗祭 ; 가을 제사)를 지냈다.
[경전] 겨울 12월 정사 일에 제후(齊侯) 녹보(祿父)가 죽었다.
[경전] 송인(宋人)이 제인(齊人)‧채인(蔡人)‧위인(衛人)‧진인(陳人)을 거느리고 가서 정(鄭)나라를 쳤다.
[傳] 十四年春에 會于曹할새 曹人致餼하니 禮也라
[左丘明의 설명] 14년 봄에 조(曹)에서 회합할 때 조인(曹人)이 음식을을 보냈으니 예에 맞는 처사였다.
[傳] 夏에 鄭子人來尋盟하고 且修曹之會하다
[左丘明의 설명] 여름에 정(鄭)나라 자인(子人 ; 정백의 동생 語의 자)이 와서 노환공(魯桓公) 12년에 무부(武父)에서 맺은 맹약을 거듭 다지고, 또 조(曹)의 회합에서 맺은 우호를 손질하여 고쳤다.
[傳] 秋八月壬申에 御廩災하고 乙亥 嘗하니 書는 不害也라
[左丘明의 설명] 가을 8월 임신 일에 나라 창고에 불이 났고, 을해 일에 가을 제사를 지냈으니, 이를 기록한 것은 가곡(嘉穀 ; 좋은 곡식, 벼)에 피해가 없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傳] 冬에 宋人以諸侯伐鄭하니 報宋之戰也라 焚渠門하고 入하야 及大逵하고 伐東郊하야 取牛首하고 以大宮之椽歸하야 爲盧門之椽하다
[左丘明의 설명] 겨울에 송인(宋人)이 제후(諸侯)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정(鄭)나라를 토벌하였으니, 이는 정나라가 송나라를 친 전쟁을 보복하기 위함이었다. 거문(渠門 ; 정나라의 성문)을 불태우고 성안으로 진입하여 큰 거리에까지 미치고, 동교(東郊 ; 동쪽 들)를 공격하여 우수(牛首 ; 소머리)를 탈취하고, 대궁(大宮)의 서까래를 뽑아가지고 돌아가서 송(宋)나라 노문(盧門)의 서까래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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