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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연못을 회상하며(1) - 대신사의 차녀 최완과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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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2017. 11. 24. 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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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현대사 사건과 인물
내 고향 연못을 회상하며(1)
- 대신사의 차녀 최완과 후손들
가혜당 이영혜_송탄교구
이 글은 수운 대신사의 차녀 최완과 외손 허균과 그 자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수운대신사의 외손자 허균(許均,1891~1959)은 대신사의 차녀 최완(崔婉, 1857~1926)의 큰 아들이며, 허균의 셋째 딸 허현은 이 글의 필자 가혜당의 모친이다. 필자 가혜당은 십여 년 전부터 집안 내력을 틈틈이 기록하여 본지에 기고하였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집실에서 『도원기서』 등 여러 기록과 대조하여 각주로 처리하였고 가혜당이 제공한 사진을 첨부하였다./ 편집자 주
최완 가족 사진. 1916년 최완의 환갑 무렵 청주 서주면 사창리 50번지에서 찍은 사진 설명 -최완의 외손자 김동수(뒷줄 왼쪽 두루마기, 최완의 큰 딸이 낳은 손자로 큰딸은 김동수를 낳고 일찍 죽었다고 한다), 허균(뒷줄 가운데, 큰 아들), 허곤(뒷줄 오른쪽, 작은 아들), 이봉화(앞줄 왼쪽, 허균의 처_큰며느리. 안고 있는 아기는 장손녀 貞), 최완(가운데, 앞의 아기는 장손 허진), 홍민(앞줄 오른쪽, 허곤의 처_작은 며느리)
막상 글을 쓰려하니 선조 여러분께 누가 될까 조심스러우나 실어주고 덮어준 금수강산, 낙원을 누리게 해주신 동학의 후예로, 제가 지내온 과정을 회상합니다. 제 외조부님 형제분(허균, 허곤)은 한일합방 무렵 수원농림 6회1), 광무학교2)를 각각 나오시고 누이 두 분은 순탄치 못한 혼인과정이 있었다네요.
1)대한제국은 1904년 6월 8일에 농과를 증설하여 농상공학교가 창건. 농학교육 태동의 기반이 된 동시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모체. 농과 실습을 위해 1905년 12월 29일 칙령 제60호로 농상공학교 부속농사시험장관제를 발포하고, 그 실습농장을 뚝섬에 설치하였다. [농업사연구 제9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2010.6)]. 수원농림 6회(1909~1912년 본과) 졸업생은 곽인호 서병철 김명섭 김석원 민영학 김교현 양대환 엄창섭 이기하 이만실 이종오 정한표 이진성 장기현 장남식 정계열 이택영 조인행 최익배 허균 21명이다[졸업생명단은 가혜당제공].
2)광무(鑛務)학교는 수업연한은 3년이었으며, 견학·견습을 위해 광산이 설치된 각 지역에 지교(支校)를 설치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으나, 광공업을 천시한 당시의 풍조로 부진을 면하지 못하다가 1907년에 폐교되었다. 이후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내에 광산과가 설치되었고, 1923년 경성고등공업학교로 개편.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흡수되었다. 이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광무학교는 경성공업전문학교의 광산과로 추정된다.
김 구암님3)은 산속에서 사가 식솔 돌보아주셨다는 역사기록4)처럼 허균님은 1912년 서울 뚝섬에서 개교 후 수원에 이전한 농림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이때 교인 자제들 함께 다녔다고 합니다.
졸업 전 1910년에 광주 교인 댁에서 이봉화(1892~1979)님을 맞이하시고, 청주에서 교편생활5) 중 진(鎭), 정(貞) 남매 낳으신 때, 청주군 서주면 사창리 50번지에서 완 노인 회갑을 맞았고, 1917년 갑(鉀) 출산 후 일제 치하에서 처신이 곤란하여 고향 인제 땅에 은둔하려 3남매와 원주 문막에서 잠시 사셨다 합니다6).
정(貞) 큰이모님은 문막에서 올챙이국수와 메밀 총떡을 먹던 맛을 못잊어 늘 기억하셨지요. 균께서는 퇴직금으로 마련한 농토를 몽땅 사기당하여 황씨 둘째 자형과 소원해졌다네요.
3) 김 구암은 김연국(1857 ~1944).인제 출생. 1872.3.25. 동학 입도. 1905년 천도교 대도주로 있다가, 1908년 이용구의 시천교로 옮겨 대례사가 되었다. 시천교를 떠나 1913년 서울 가회동에서 ‘제세교’라는 이름으로 종단을 창설하였다가 다시 시천교라고 명명.
4) “구암 김연국 씨 내외가 설날이면 꼭 우리집(검암 최익환, 해월의 손자)에 세배를 하였습니다. 설날 의암성사 댁에는 가지 않았지만, 이분이 해월신사의 사위가 되는 분이고 또 해월신사의 종통을 자신이 이어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승이요 처가인 우리 집에는 꼭 세배를 왔습니다. 또 이분은 대신사의 따님(최완)을 봉양하고 계셨는데, 설날이면 그 아드님(대신사의 외손)인 허균, 허곤 두분과 같이 세배를 오시지요”/최익환,「상춘원 이야기」, 신인간(포덕124년 1월호p65)
5)수원농림학교는 수업료가 무료였고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었고 학비보조까지 받았을 수 있었으며 졸업 후 의무규정에 따라 교원으로 발령받아 근무하였다.
6) 허균-이봉화는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다. 鎭(1913~1997), 貞(1915~2005女), 鉀(1917~2000), 鏡(1921~2016女), 鉉(1924~1993女), 鍾(1927 ~199?女),璿(선, 1933~ 생존. 화성시 장안5리 거주) (가혜당기록)
2002년 경, 10월 17일(음) 이봉화님 기일에 내 고향 연못, 선영 참례하고 보니 칡으로 덮인 연못, 대나무 밭이 된 안마당, 그 옛날(1925~1959) ‘무극대도 총부’였던 곳, 청수 물 뜨러 오르내리던 샘가는 쉬 떠나올 수 없었지요.
1960년대 허원, 허장7) 따라 개암 따먹던 뒷숲에서 질근 밟아 놓으면 산꼭대기인데도 물이 고여 샘이 쏟아나던 신기한 내 고향. 아산 배방면 수철리 860번지에 완 할머니 묘역이 있습니다. 구암 댁서 1921년에 태어나신 신유(辛酉) 생 경(鏡) 이모님 쪽 비녀 머리 사진 찍어드린다고 천안으로 찾아뵈니 말씀하셨습니다.
에그 그 큰 연못은 내가 시집온 뒤에 가보니 생겼어. 네 엄마 현은 사직동 7번지 구암댁 사랑채서 1924년 그믐 태어났어. 허찬8)께서 곤(坤, 1895~1955)을 11월 21일(음) 낳으셨고, 곤은 갑오띠지만 1895년생이지. 그리고 허찬 님은 아들 곤이 태어난 지 한 달 지난 12월 20일(음) 곧 돌아가셨으니, 완 할머니 혼자 4남매 키운다고 고생이 크셨다네. 1920년 후에는 교당 분립한 시천교서 균 아버님이 도우셨데. 시국이 엄중하여 네 엄마는 등에 업혀 아산 깊은 산속에 정착했지.
7) 허원은 균의 장남 허진의 막내, 허진의 장남은 허순(순복)으로 광명시 거주. 허장은 균의 둘째 아들 허갑의 막내(가혜당기록)
8) 허찬(許燦, ?~1895) 대신사의 차녀 최완의 남편. 1872년 1월 22일경 대신사의 장남 최세정이 관에 체포될 때, 대신사 둘째 딸 최완과 세정의 처 강릉 김씨도 체포되어 인제 옥에 수감되었다. 1873년 대신사의 부인 박씨 사모가 49세로 요절하였고, 이후 인제 아전이었던 허찬과 최완은 부부의 연을 맺는다. 박씨 사모 사후 3년 뒤인 1876년 박씨 사모와 세청의 묘를 이장할 때 대신사의 사위들이 힘을 모았다고 한다. 허찬은 1877년 10월 16일, 정선 유시헌 집에서 구성제를 지낼 때 집사로 참여한다.(『도원기서』 등) 1924년까지 허찬 집안은 인제에 본적을 두었다. 허균의 호적등본에는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248번지를 떠나, 1925년4월6일 아산군 배방면 수철리 860번지로 입적한 것으로 되어있다.
허균의 호적 ; 허균의 모친 최완의 부(父)로 대신사의 이름 ‘최제우(崔濟愚)’가 호적부에 기록되어있다.
최완께서 생전에 늘 한곡리 사시던 말씀을 하셨고 둘째 곤의 출생지도 인제가 아닌 청산 한곡리라네요. 해월신사께서 총기포령을 내린 곳에 있는 저수지 아래 공원이 조성되고 볕 좋은 아주 평화로운 감나무 많은 곳에, 아직도 해월신사께서 거주하셨다는 데에는 돌무더기 담이 남아 있데요. 거기서 “부짓갱이라도 들고 나서야지”란 해월신사의 말씀이 총 기포령이 되었다지요. 1894년 완께서는 만삭의 몸으로 김구암 식솔따라 이사 다니며 대단한 인파 속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겠지요. 곤 태어나고 한 달 만에 허찬 님도 환원하셨고 묘소는 알 수 없다네요.
허균 외조부님은 1925년 아산에 정착하셨지요. 9)
제수씨 되는 홍민 님 조상은 강원도 출신인데 당시 그 집안사람들이 천안, 배방에 거주하였기에 아산 배방에 정착하신 것이라네요. 완께서는 자손없이 둘째 곤이 미국(하와이)으로 가버렸으니, 생이별하고 혼자 지내는 며느리 홍민 님이 집안의 일이며 육아에, 고생하는 작은 며느리를 늘 딱하게 여겼지요.
미국 간 곤이 매달 부쳐오는 돈으로 대가족을 지탱했지요. 균께서 구암장 밑에서 경리일을 거들었기에 시천교 돈으로 정착한 거라고 더러 오해하는데 아니지요. 그때는 이미 곤께서 하와이로 가셔서 번 돈을 부쳐주셔서 그걸로 정착하신 것이지요. 구암장께서 완 노인과 헤어진 뒤에 완 노인 생각해서 작은 밥상-개다리 소반을 주셨다네요. 완께서 밥 드시다가 말씀하셨다지요.
외할아버지 균께서는 기역(ㄱ)자 집은 지어져 있던 것을 사고, 아래 일(一)자 사랑채는 훗날 지어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무극대도총부’란 간판도 붙이셨지요.10) 부친(허찬) 일찍 가시어 홀로 되신 최 어머님 밑에서 청주 교편 접으신 뒤, 수철리 산 속 깊이 파묻혀 ‘무극대도 총부’로 수운의 외손주 역할을 돕는데는 이봉화, 홍민11) 두 분의 뒷받침이 크셨고, 조용히 아산 인근의 인재 교육에 힘쓰느라 따님들 시중도 갸륵했지요.
9) 1925년 허균이 인제에서 아산으로 본적을 옮긴 것은, 시천교가 1925년 서울에서 계룡산 신도안으로 본부를 옮긴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허균은 1919년 교직을 그만두고 1921~1924년 간에 서울 사직동 김연국의 집에 기거하며 시천교에 종사했는데(가혜당 기록), 이 시기는 시천교가 1920년부터 4년간의 준비 작업을 거쳐 1925년에 교단본부를 계룡산 신도안으로 이전하던 때였다.
10) 사랑채 기둥에 ‘무극대도총부’라는 글을 새겼다고 한다.(가혜당기록)
11) 홍민(1899~1991), 최완의 차남 허곤의 부인. 남편 허곤이 밖으로 나돌면서 시아주버니 허균의 옷 수발과 잔치때 음식, 옷바느질, 동네 일에 노고가 많았고, 완 시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인품좋고 솜씨가 훌륭하였다.(가혜당 기록)
<무극대도총부 개략도>
허균 님의 큰 딸 정(貞) 이모님는 1931년 공주 접장 중매로 15세에 시집갔습니다. 기구한 삶의 시작이었지요. 마실갈 때 완 노인은 지팡이 짚고, 정 이모는 열 살 때 동생 현을 노상 업고 가고, 완 노인은 지팡이 끝으로 새 집에 알이 들었나 살피셨다고 합니다.
산중에 단백질이 하도 귀했으니...1926년 돌아가시도록 하와이 간 지 7년 되는 곤(坤) 아들을 돌담 아래 돗자리 깔고 기다리셨다네요.
젊은 시절의 허균_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외손
1933년 3남 선(璿)을 베어 만삭 때는, 오씨 며느리12) 보기 민망해서 늘 앞치마 아래 손으로 가렸다는 외할머님, 이봉화님. 기역(ㄱ) 자 집이 비좁아 돌 축대 쌓고 사랑채 증축 후 인근 학생들에게 주로 수학을 가르치신 균께서는 동경서 책을 주문했고 순사가 못하게 해도 계속 모이니, 머리 깎여 짧은 옷고름의 죄수복 차림으로 유치장 옥고를 치르시고.
1930년대 일제치하 금융조합 일 보시고 귀가할 때 취중에 호령하시면, 쌀 씻던 며느리, 방아 찧던 이씨, 아궁이 불 때 던 손녀 딸, 온 가족 모두 달려 나가 동구 밖 감나무 아래 논둑길 연못가 비탈길 돌담 옆에 아내까지 곳곳에 서서 맞이했다던 그 시절이었답니다.
무극대도 주인 균, 어머님 용서하세요! 오늘 술이 좀 과했습니다! 하고 사죄했다지요.
1926년 당시 모친 환원하셨을 때 완 홀어머니 애환에 3년 상 크게 치르면서, 집 뒤 완 님 묘소까지 눈이 오면 늘 손수 쓸며 홀어머님의 지극한 효자였다지요. 모두가 곤 아우, 형 가족을 부모 받들 듯 우선으로 섬긴 옛 미풍양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요
이봉화 님 늘 죄스러이 한숨지으며 이사 올 때 천도교 책들이 소중하다고 하셨고요. 허씨 족보를 어느 풀 속에 버리고 와서, 완께서 백(栢)님 잊지 말라고 늘 노래하셨답니다.
“술 잘하는 허백
말 잘하는 앵무새”
완 노인은 이렇게 두 구절을 노래로 읊으시며 각인시켰다지요. 허씨 족보에 후손들 꼭 올리라며. 허백13)은 홀로 되신 시어버지 허백님이었답니다. 말 잘하는 앵무새는 완 노인 당신이었고요. 허선의 아내 한 씨께서 얘기해 주셨지요. 균 외할아버님은 1957년 시집 온 막내 며느리(선의 처, 한씨, 생존)에게 새벽, 저녁이며 청수 모셔오라고 한결같이 한 뒤 그만하면 안심된다 하셨다네요. 한 씨 명석하여 백(栢)의 후손으로 허 씨 시향에 가을마다 찾아뵙고 고향 문중 족보에도 올렸으니 할머니, 어머니께 늦둥이 염치가 서게 되었다고.
12)오순근(吳順根 1912~2000), 허균의 큰 아들 허진의 부인(가혜당 기록).
13) 허백(許栢), 허찬의 부친으로 4 형제의 막내였다고 한다(가혜당 기록).
1952년 허균의 부인 이봉화님 환갑기념 사진. 사랑채의 ‘천단’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천단 문을 열면 수운대신사의 존영, 청수기, 촛대 등이 보이고 양 옆으로 강령주문(至氣今至願爲大降)과 본주문(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이 적혀있다.
지혜로우신 허현 어머님 말씀하셨습니다. 일꾼 방 추녀가엔 그네와 절구가 있고 청수 모시는 천단 안에 향, 초, 나무그릇. 나무그릇에는 외조모님 일곱 번 찧어 온전한 쌀이 소북이 놓였는데, 모았다가 가끔 떡도 해 먹었다고. 어려서 새벽마다 온 가족을 깨워 연못가에서 씻고 기도하는 습관에 힘든 집안 일로 피곤했던 선 외삼촌은 괴로웠답니다.
못 배운 막내 외삼촌 선이 두 형네 식솔과 두 분 어머니 조카를 부양했노라 원망이 자심하셨지요. 선 외삼촌 너무 원망마세요. 일본 앞잡이 된 오명(汚名)보다 산속에서 후세 양성하신 게 낫지요. 가르쳐서 두 아들 장, 차자는 배웠다고 출세하니 도시에 살다보니, 향처 가족 부모 곁에 두고 두 집 살게 되고, 두 며느리 생과부로 지켜보신 게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1935년 외할아버지 균님의 제자 이상진과 경 이모 혼인하셨고, 1941년 우리 부모님 혼인하셨답니다. 몹시 가문 흉년에 마을 사람 품삯 베풀어 아래 샘가에 폭약 3개 터트리고 축대 높이 쌓으니 동네 계단 논 농사에, 마을 사람 빨래터요 기념식 때 묵어가던 동덕들 씻을 곳이라. 어릴 때 초등학교 때 여름방학에 가보니 연못 돌 틈 사이에 김치항아리(냉장고대용)있고, 어찌나 차가운지 뼈가 시린 샘이라. 겨울엔 징금다리에 언 걸레를 놓고 빨다보면 스스로 녹아 손시럽지 않은 연못. 지금은 서쪽 돌산이 반쯤 없어졌으나 옛날 마을 고개 넘어 지게로 나무로 날라다 온양장에 팔 때는 아이들도 치마입고 마차까지 나르고...
균 경당14)께서는 미국서 곤의 돈이 오면 청수 상에 올리고 엄숙히 기도부터 올리셨고, 이봉화 외조모님은 자주 큰소리로 주문을 현송하시어 모임을 뜻있게 이끄셨지요. 곤의 부인 홍 씨는 14세 혼인하여 친정 근처 온 곳이 매곡리나, 곤 슬하에 아이가 없어 늘 완 노인과 한 방에 주무시어 정이 독특하셨고, 자신의 유언대로 완 노인 무덤 발치에 묘를 썼다네요. 세월이 흘러 균 어른 의복 수발과 대소사, 동네 잔치, 음식 옷 육아에 헌신하시며 늘 두 동서(이봉화, 홍민)가 조화롭게 사셨다네요.
곤 아우는 미국서 돈 많이 벌어와 온양 인근에 형이 땅 사놓은 것을 계속 팔아다 인천 조선기계부사장(사장은 일본인)으로 일에 전념하실 때, 온양 사람들 취직도 여러 명 시켰다네요. 해방 후 나라에서 몰수하여 모두 빼앗기고 너무 화병이 나 폐가 나빠져 형보다 4년 먼저 1955년 환원하셨답니다.
(다음호에 계속)
14) 허균의 일본식 이름은 동천(東川)이며, 경당은 자로 여겨진다.(가혜당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