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동마을(寺洞, 고절동, 古寺洞) 남면 절산1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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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설명 |
절동마을(寺洞, 고절동, 古寺洞) |
●지명유래 절산리(節山里) 의 지명은 절동(節洞, 古寺洞, 古節洞)의 절(節) 자와 산(山) 자를 더하여 절산리라 하였다. 절산리는 절동마을, 방축골 마을, 장선마을 등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절동마을의 뜻은 예전에 마을에 절이 있었다 하여 고절동, 절동이라 부른다. 마을을 세분하면 골모실, 새암골, 가운데똠, 뒷질, 아랫똠, 모롱지로 구분된다. 1789년 호구총수 및 1840년 창원정씨 호구단자에는 동복현(同福縣) 내남면(內南面) 고절동(高節洞)으로 기록되어 있고, 1867년 대동지지에는 동복현 내남면, 1895년에는 나주부(羅州府) 동복군(同福郡) 내남면,1896에는 전라남도(全羅南道) 동복군 내남면,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동복군 내남면 고사리(古寺里=고절동)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시화순군(和順郡) 내남면 절산리(節山里)( 古寺里, 장선리, 송암리, 외남면 사평리 각 일부)로 편입되었다. 1932년 행정구역개편으로 화순군 남면(南面) 절산리에 편입되었다. 현재 절산1리이며 방축골과 함께 3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산물(쌀, 보리), 특산물(밤, 감), 주소득원(쌀, 보리)
●성씨 : 광산金(45), 창원丁(3), 장흥高(2), 김해金(1), 충주石(1), 여산宋(1), 죽산安(1),
●마을형성 절동마을은 동쪽으로 가사등, 동남쪽으로 매봉, 서쪽으로 할미당, 청석강, 남쪽으로 서당굴, 방축굴재, 북쪽으로 토끼봉이 있다. 마을의 방향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처음에 설씨와 손씨가 입향 거주하였다고 전해오는데 마을 뒤산에 설씨와 손씨 고총 및 설씨묘 수기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1597년경 함양박씨 朴承尹(1580 ~ ? ) 이 보성 미력 반암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 1600년경 광산김씨 金宗智(1581 ~ ? ) 가 삼거마을(현 남계2리)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 1646년경 광산김씨 金世寶(1638 ~ 1696) 가 함평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 1840년경 창원정씨 丁文玉(1784 ~ 1849) 이 동복현 읍내면 구암마을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 1890년경 진주강씨 姜興會(1858 ~ 1914), 姜仁會(1868 ~ 1920) 가 내남면 유마리 수청마을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 1930년경 장흥고씨 고정진(1880 ~ 1946) 이 외남면 운산리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 1970년경 충주석씨 石만석(1937 ~ ) 이 동면 구암리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 동쪽으로는 모후산, 서쪽으로는 장선마을, 남쪽으로는 방죽굴마을, 북쪽으로는 다산리 송암마을이 있다.
●유물. 유적. 고문서 내남면사무소터(558-1번지, 도정공장 자리), 환취루(環翠樓, 1958년 주민건립), 반학정(伴 學亭, 노인당, 1970년 건립), 절산사(節山祠, 335번지, 曉堂 金文鈺 향사, 1973년 건립), 석헌정(石軒亭, 1979년 건립), 入節洞光山金氏先祖參議公諱世寶遺庄碑(1966년 건립), 金銓紀績碑(1978년건립), 奬學契案(1908년), 道南齋
●민속놀이. 전설. 민담 ⊙공동세배 : 6.25 이후 매년 설이 되면 마을회관에서 공동세배를 행한다. ⊙당산제 : 음력 정월 12일부터 선정된 제관들은 3일간 목욕재계하고 14일 밤 10시경 마을 뒷산에서 천륭제를 지내고 15일 자정이 되면 당산에서 제를 지낸다. 이때 온 주민이 평온무사하고 오곡이 풍년이 들며 牛羊鷄犬이 畜殖하기를 기원하는 축문을 낭독하고 이와함께 농악을 울린다. 6.25후 천륭제는 폐하고 당산제만 생식으로 간소하게 지낸다. ⊙정월 대보름 전후로 어린이들은 쥐불놀이와 연날리기를 한다. ⊙백중 : 온마을 농부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세대의 영농작황을 평가하며 그해 작황이 제일 좋은 집을 선택하여 그집 고용인을 황소에 태우고 대문에 들어가면 주인은 주육을 준비하여 포식케 하였다. 지금은 하지 않는다. ⊙디딜방아 액막이 : 마을에 전염병이 오지 말라고 송암마을에서 몰래 디딜방아를 가져다가 마을입구에 세워 고쟁이를 씌워 놓고 액막이를 하였다. ⊙농악 : 1990년경 소멸됐는데 상쇠로 김점수가 잘쳤다. ⊙줄다리기 : 광복후 소멸되었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서당골 : 마을의 정남방에 위치한다. 정조때 金源輔가 서당을 신축하여 후학을 가르쳤는데 이로인해 이곳을 서당골이라 한다. ⊙피야골(避也골) : 마을의 정남방에 위치한다. 순조초에 金源奎가 서당을 짓고 강학하던 곳이다. ⊙조산등 :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의 외백호등은 뱀형, 안산은 伏蛙形인데 뱀이 개구리를 바라보는 것을 막기 위하여 또는 마을의 水口를 막아 주민의 재물이 밖으로 흐르지 않도록 축조한 것이다. ⊙갈음들(渴陰) : 지형이 갈마음수형이라 한다. ⊙산, 등 : 조산등, 매봉, 백록봉, 토끼봉, 가사등, 화전등 ⊙들 : 선창들, 갈음들, 중매들, 돌정지들, 할미당께, 참새암께, 모롱지 ⊙고개 : 방죽굴재, 매봉재, 질등재 ⊙골짝 : 서당골, 피야골, 한두박골, 가는골, 산태골, 큰골, 통정골, 톳골, 새암골, 모개나무골, 사기정골, 초장골 ⊙바위 : 쌍바위, 비락바위 ⊙쏘, 내 : 청석강, 비락쏘 ⊙샘 : 참샘, 모롱지샘, 통샘, 새암굴샘 ⊙터 : 할미당터, 독삼굿터, 물방아터, 면사무소터, 벼락방아터, 할미당께주막터, 지와점터 ⊙보 : 행기보, 당산보, 조산보, 큰보, 인보안보 ⊙길 : 방아실, 소죽굴, 첨소굴, 통새암거리
화순군 남면 절산리1구 절동마을 도자기 골 소개 | 스토리1 |
2006/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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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순군 남면 절동마을 도자기골 소개 하면서 먼저 필자 부모님 김 영 우 (92세) 김순례 (91세) 양친이 현제 거주하고 계신 절산리 163 번지는 3.1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 생가터라 전에온 이마을은 100 여호가 살아온 절동마을 촌가로써는 적은마을은 아니였으며 생명수인 샘이 웃돔 주민이 이용는 시양골 옹달샘 과 골모실 옹달샘 가운대 돔 주민이 이용하는 통시암 돌샘 아랫돔 주민이 이용하는 아르댐 옹달샘 과 모롱지 옹달샘 있는대 유일하게도 서재필 박사 생가터라는 이터 마당 가운대 샘 깊이가 60척이 넘는 조약돌로 축조한 돌샘이 있어 여름철에는 영상 4.5도가 되는 시원한 샘물 또하나는 깊이가 50 쎈지도 않되는 시양골 옹달샘도 시원하기로 소문난샘 온마을 사람들 하절기에 즐겨 찾는 냉수로 이용한 옹달샘이다 이마을에는 공동샘 5 개와 장비도 없는 옛 시대산물 60척이 넘은 깊은 돌샘을 어떻게 조약돌로 쌓아 올렸을까 옛날 선조들의 축조 기술을 연구 가치가 있는 돌샘을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지혜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으로 이렇게 조약돌로 축조한 돌샘을 앞으로는 찾아 볼수 없기에 군예산을 투입하여 덮어 놓은 상판을 걷어내고 주변환경을 정비하여 영구 보존관리 하였으면 한다 현제는 샘이 깊어 위험하여 상판을 세맨트로 덮어 모타로 물을 품어 사용하고 있는 이돌샘 1 개와 공동 옹달샘5 개를 포함 마을에는 모두 6 개의 샘으로 식수를 사용해 왔는대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전환하면서 주변환경이 오염 상수도 시설에 의존해야 하므로 공동샘 5 개는 폐기되였으며 그나마도 현제 샘터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 샘은 시양골 옹달샘 과 모롱지 옹달샘터 2개가 남아있다
2. 도자기골 소개
사기정골 과 도룡골에서는 백자 분청사기 청자를 구워온 터 3개소가 있고 짚풍골에서는 옹기터 1개소가 있다
절동마을 리정표를 보고 들어서면 5개 농가가 살고 있는 방축골 서남간 도로변 마을 모퉁이가 사기정골 점토는 사평휴양림 입구 천다랑이 천수답 옆 점토(진흙.광구등록)를 재료로 사용 하고 주변이 참나무 (상솔이. 도톨이) 가 빽빽이 있는산 참나무로 가마에 불을칲혀 백자 분청사기 청자를 구웠다 지금은 6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마을길을 확장 도로를 넓히고 산은 깎아 밭을 이루워 그 주위에 파편만 보인다
동편에 짚풍골은 옹기터 이곳 옹기터는 양조장에 술을 빚은 용기로 사용한 대형 옹기 재래식 변기로 사용하는 가정용 과 공중용 대형 소변기통 과 대변기통으로 쓰이는 옹기를 구웠으며 옹기터에 쓰인 재료는 사기정골 산 등성이가 질이 좋은 황토이므로 좋은 옹기를 구웠으며 50년대 까지만보드라도 변기로 사용한 소변통 대변통에 분뇨가 가득 채워지면 농가에서 장군을 이용 논밭으로 퍼내여 농작물 가꾸는대 질소 비료 대용으로 사용 하여 왔으며 대 농가에서는 가족의 분뇨로는 부족하므로 사람이 많이 왕래 하는 골목길이나 휴식공간 유선각 주변 마을입구 등에 공중변소 시설내에 대변통 대형 옹기를 1개 묻어 놓고 그위에 두꺼운 널판자를 올려놓고 그위에 용변을 보도록 하여 모아진 분뇨로 농사물 경작 해왔다 그시절은 분뇨릉 사용하여 체소를 경작 하므로써 날 체소 쌈밥을 좋아하기 때문에 채독균 구충약을 국가에서 의무적으로 복용 하도록 하였으며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학교에서 구충약을 복용토록 하는한편(요즘 독감 예방주사를 국가에서 맛도록 권장 하는 차원과 동일하다) 체독 은 회충 요충 십이장충 같은 균이 인체 내에 있어 구충약을 1년에 1회 복용토록 하여 건강을 유지 하고 농사를 경작 하면서 살아온 선조들의 지혜다 요즘 식약청에서 수입 수출 김치에 벌래알이 있다는 화재로 김치 공장이 한때 된서리를 맞어 수출길이 막히고 국내소비도 줄어 김치공장이 부도로 도산 김치공장은 문을 닫아야 하고 체소농가는 팔리지 않는 체소를 농기계로 로타리 치고 우리의 식탁은 주 김치 인대 식약청 은 채독균은도 심각한것도 아닌대 벌래알이 사람의 채내의 온도에 들어 가거나 짠소금으로 간을 하면 벌레알이 인체에 어느정도 영양을 끼치는 수치도 모른 상태에서 식약청 무책임한 발표로 온 사회가 시끄러워 지자 뒤늦게 참여 정부는 김치먹기 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또한 오리는 동이보감에 신경통에 특효라 했는대도 오리에 대한 식약청 발표로 오리 농장이 부도로 도산하고 수출 길이 막히고 자살 소동도 일어 났었다 오리 사육농가가 어려움을 격으고 오리공장이 문을 닫고 오리요리 전문 음식점이 문을닫고 사회가 시끄러워지자 참여 정부에서는 식약청 무책임한 발표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고 식약청 발표를 해명 차원에서 수정 발표하는가 하면 오라고기 먹기 홍보에 주력하고 노대통령도 각료들과 오리 요리를 먹으면서 오리는 인체에 해가없다 오리먹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식약청도 책임있는 감식에 심사숙고 해야한다 전국에서 매년 장티브스로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인지 알기나 하는지 장티브스에 비하면 황우 일모인대도 식약청 감식 결과 발표에 엄청난 피해가 에상됨을 집고 가기 바란다 변기로 사용하는 대형 옹기터 를 소개 하다보니 분료로 농작물 경작하는 선조들의 지혜를 거론하게 되다
3. 절동 마을에 들어서면 서편 산 자락이 도룡골이다 도룡골에 조그마한 밭떼가 하나가 있는대 이곳이 백자 분청사기 청자 가마터다 고령토는 건너편 토골 입구 산 자락에고령토가 있는대 (광구등록)이 고령토를 재료로 쓰여온것으로 추정되며 절동마을은 한옥 주택의 외벽 흰색 미장용 석회석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가마터는 없어지고 파편만 남아 있다
도룡골 에서 7백여미터 동복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산리 송암마을 입구에 고령토 광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매장량이 많아 지상에 노출되여 고령토를 육안으로 확인 할수 있으며 도자기 공장 경영자와 타일 업자들이 고령토를 욕심을 내 찾아들고 있다
송암마을은 모후산 자락 유마리 마을에 역사가 깊은 유마사 불교사찰 진입로다 5백미터쯤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면 송암 저수지 ( 저수지는 절동마을 농업용수다 )좌측 중간지점 산자락이 사기정골 이다 이곳에서 송암 마을 입구 고령토를 이용 백자 분청사기 청자를 구워내 소나무밑에 파편이 많이 쌓여 있는대 파편을 보면 질이 매우 좋은 분청사기 와 청자를 구워 왔든 것으로 추정되며 다산리 다산마을과 송암마을 이은 길이 노장재가 가로 막혀 있고 송암마을 농가는 다산 마을권 들녁에 농업용수 및 농경작은 예나 현제나 무관이나 송얌마을 들녁이 절동마을권에 연계되여 있으며 같은 농업용수로 농사를 경작 한걸로 보아 송암마을은 절동마을에 예속된 마을로 보여지므로 송암마을 사기정골 도자기 터도 절동마을권의 도자기 고을로 보아야 할것갔다 60 년대 이전에는 송암마을 농업용수는 노장재 때문에 다산들력을 사용할수 없었다 새마을 운동으로 다산리 노장재를 깍아 도로를 넓이고 송암저수지 농업용수로를 개설하여 다산 들녁일부 농업용수로 사용 농사를 경작하고 있다
절동마을 도자기골 ( 도자기 와 옹기 터 )를 마을유래에 추가 등제코져 소개하니 역사및 도자기 문화에 연구 자료 가치가 있을것으로 판단되니 현지 답사를 원한다면 연락을주면 기거히 응하겠다
필자: 김 수 H/D 016-648-4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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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김종지(金宗智, ? ~ ? , 1637 병자호란 창의), ⊙김문옥(金文鈺, 1901生 ~ 1960歿, 문장가, 曉堂文集 16권), ⊙김영창(金永昌, 1910生 ~1991歿, 1988 ~ 1991 동복향교전교) | |
| 화순군청 홈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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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김기중 정말감격이다 .어디서 그런 자료가 있니? 한동네 인데 그렇게 모르고 살았다는게 정말 부끄럽다 . 그리운 고향에 향수를 맘껏 마신것 같은 느낌이다 .덕분에 많이 알게되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