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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원리와 안식의 원리(창 2:1-3)
‘몸과 영혼의 에너지 발전소’라는 책의 저자 행동심리학자 짐 로허(Jim Loehr)박사는 재미있는 관찰을 했다. 세계 톱 랭킹의 프로테니스 선수그룹과 하위그룹의 선수들에게 어떤 차이를 연구했다. 오랜 시간 세계적인 프로들의 경기장면의 테잎과, 일반인들의 경기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실망스럽게도 경기 중 선수들은 별 차이가 없었는데 게임과 게임 사이에 두 그룹들은 뚜렷하게 차이가 있었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지만 최고의 프로들은 게임과 게임 사이에 독특한 행동을 했다. 고개나 어깨를 추수르거나, 눈을 지그시 뜨고 한 곳에 집중하거나, 숨을 고르거나 혼잣말을 했다. 성적이 낮은 선수들은 전혀 이런 것이 없었다. 짐 로허 박사는 최고의 프로들에게 원격 심전도 측정 장치를 달고 실험하니 심박 수는 놀라웠다. 경기 중 16-20초에 심박 수가 분당 20회 정도로 급속히 떨어졌다. 아주 짧은 시간에 탁월하게 에너지 충전을 했다. 성적이 낮은 선수들은 습관이나, 심박 수도 경기 내내 높았다. 프로들은 효과적 휴식과 다음 게임에 잘 대비하는 비결이 있었다. 쉼이 없으면 선수는 피곤하고, 분노나 화 같은 부정적 감정에 빠진다. 심박동수가 늘고 긴장도 더해서 경직된다. 집중력이 떨어지면 좋은 경기를 할 수 없다. 쉼은 회복이며, 자신을 돌보고, 일을 생각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원동력이다.
‘안식’이란? 일 않고, 노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평안과 몸과 맘이 안식함이다. 쉬는데 불안과 걱정은 안식이 아니다. ‘Joshua Liebman’(조슈아 리브만)의 작품에서 어느 젊은이에게 “그대가 가장 원하는 게 뭐냐?”고 했다. 첫째, 건강 둘째, 사랑 셋째, 재물 넷째, 아름다움 다섯째, 재능 여섯째, 권력 일곱째, 명예 등을 원했다. 그의 말을 다 들은 지혜로운 신앙인은 충고하길 “친구여 마음의 평화 없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없다”
평안과 안식을 잃으면(Garden Macdonald’의 말처럼)
1)자기를 절제하지 못한다.
2) 전인적 인격에 관심 없다.
3) 대인관계가 미숙하다.
4) 쉽게 분노하고 참지 못한다. 현대인은 마음에 안식이 없어 분노한다. 하나님께서 안식을 누리게 주셨다.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천지”(하쇠마임 웨하아레츠) '쇠마임'(하늘) '하늘'의 단수 명사'솨메'의 복수형으로 인간의 눈으로 식별하는 '창공'을 넘어 '우주'를 뜻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하늘'은 은하계까지 '온 우주'다. '에레츠'(땅) '견고하다'에서 파생된 협의적 '토지' '땅 자체'지만 광의적으로 '온 세상'인데 본 절은 후자 의미다.
“만물”(콜 체바암) 기본형 '차바'는 '무리' '군대'을 뜻하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로 왕상22:19 '하늘의 만군' 즉'천사들' 느9:6 '일월성신' '천체'의 의미로 1차적으로 그것들의 수효가 많고, 2차적으로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다 이루니라”(칼라) '끝나다'와 '완전케 되다'는 뜻.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중단하심이 아니라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온전히 성취시키셨다.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마치신 날 제 6일이었는가 7일인가 이견이 있다. 70인 역, 사마리아 사본 제 6일째로 번역, 영역본(KJV, NIV, RSV)은 제 7일째로 번역했다. 이는 히 '예칼'(마치니)의 시제 및 어법이 불투명한데서 비롯 이를 다음과 같이 조화시킨다.
(1)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에 대한 창조 사역을 마치신 날은 제 6일째다.
(2) 창조 사역의 완성은 이를 기념, 축복하여 안식하신 제 7일째 온전히 성취된다.
“안식하시니라”(쇠바트) 일에 지쳐 쓰러짐이 아니라, 일을 마친 후 새 활동을 잠시 '휴식'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무 행동도 하시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1) 이후로 하나님께선 더 이상 새 피조물을 만들지 않으셨음과 (2) 피조 된 만물의 운행을 주관하시며, 그것들을 보고 기뻐하셨다(1:31) 하나님의 안식에 근거 훗날 선민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것이 안식일이다. X 안에서 새 창조의 날을 주일로 안식의 원뜻을 좇아 그 날을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
<안식은 노동의 완성이다>
1절 ‘이룬다’는 ‘칼라’는 ‘성취하다 마치다’로 어떤 일을 완전히 마침이다.
3절에서도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는 일이 다하므로”는 단어가 반복 되는 이유 “하나님께서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안식하셨다” 안식하면 피곤해서 쉰다고 생각하는데 히 칼라는 피곤하고 지치다라는 개념이 없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모든 일을 마치셨기 때문에 쉬셨다. 안식은 노동을 마친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지며, 노동 없는 사람에게는 참 안식이 없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쉼과 축복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안식을 말씀하시기 위해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실 일을 다 마치셨음을 강조한다. 노동의 의미다. 노동은 안식과의 관계를 떠나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일하시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며 좋았더라고 하셨다. ‘보다’의 ‘라아’는 단순히 보는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인 목적으로 ‘감찰하다, 진찰하다, 방문하다’는 뜻.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살펴보시고 ‘좋다’는 ‘토브’는 감정적으로 ‘좋다’라는 의미에서 “선하다 충실하다 아름답다”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의도가 충분히 이루어진 것을 만족하셨고, 기뻐하셨다. 주께서 삶속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목적을 살피시고, 하나님의 소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하루를 살기 원하신다. 인간이 타락 후 노동은 인간을 고통스런 개념으로 바뀌어졌다. 일이 싫다. 노는 게 좋다. 땀 흘리는 것이 싫지만 성경적인 노동은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스리라는 주님의 명령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함이다. 기독교인의 소명은 공간을 정복하고 시간을 성화하는데 있다. 일상의 시간을 의미 있는 시간 즉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꾸라. 요 5:27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다. 살전 3:10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매일의 삶속에 얼마나 주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신 일을 이루었는지 돌아보며 일해라. 그 일이 이루어진 다음 참 안식을 주셨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하루를 잘 보낸 사람이 평안한 침상을 맞이할 수 있는 것처럼 평안한 일생을 보낸 사람만이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한 자가 안식을 누린다.
<노동은 기독교의 창조 정신이다>
노동은 생존을 위해, 하나님의 과업을 위해 필요하다.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모든 직업의 성직사상과 근면한 노동정신, 금욕 정신이 자본주의적 복지사회를 만들었다.(막스 베버) 노동이 안식과 균형의 리듬을 잃을 때 일 중독자로 삶의 의미를 잃는다. 가장 불쌍한 인생은 죽도록 일하다 죽는 사람이다. 노동의 의미와 보람을 돌아보는 쉼표가 필요하다.
<안식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무리하면서 소감을 "좋았다"고 기록했다. 히 좋았다는 "토프"는 우리말에 "좋다"와 유사한데 맘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감격으로 "좋구나!"의 의미다. 하나님께서 안식을 엿새 동안 창조를 보시며 즐거워하셨다. 하나님의 자축의 시간 celebration이었다. X인들에게 안식은 즐거움과 감사다. 자기 일을 즐기지 못하는 인생들이 많다. X인들도 바쁘고 서둘면서 쫓기는 삶을 산다. 왜?
한 기독교문화 신학자는 X인들조차 시대를 지배하는 세속적 가치관에 설득되었거나 영향을 받았다. 시대의 중요한 가치관은 실용주의이다. 기능주의적 가치관. 움직이는 시간이 생산하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움직이지 않으면 시간 낭비한다는 생각에 수지 못한다. 실용주의적 가치관이 나쁘지 않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보는 여유가 중요하다. 휘튼 대 교수 라이켄(Leland Ryken)은 하나님은 만물을 실용주의적 관점과 심미주의적 관점에서 지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추격하는 바로의 군대 앞에서와 홍해 앞에서 아우성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만히 있어 당황치 말고 가만있어라! 하나님의 역사를 보라! 하나님 되심을 바라보라.” 주님은 공중 나는 새와 들에 백합화를 보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인간을 위한 안식임에도 강제 규정처럼 이해 하나님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한다.
“거룩하게 하셨으니”(카다쉬)'성결하다고 선언하다' '거룩한 것으로 간주하다' 뜻. 일곱째 날이 거룩하지 않고, 하나님이 거룩한 날로 간주하셨다. '거룩하다'는 세상 연락보다 하나님의 뜻을 좇으라.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안식만 한다면 어리석다.
<안식은 재충전이다>
활동과 휴식을 적절히 함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둔다는 개념은 인류최초로 운동선수 훈련 매뉴얼을 쓴 그리스의 플라비우스 필로스트라투스(A.D.170-245) 러시아 스포츠 과학자들이 1960대에 개념을 올림픽 선수들에게 적용시켜 성공했다. 신체가 특정한 활동을 하면 반드시 생화학적인 에너지를 보충해줘야 소비된 에너지가 회복된다. 처음에 소개한 몸과 영혼의 에너지발전소에서 저자는 ‘신체적, 감정적, 정신적, 영적 에너지를 잘 관리해야 새 삶에 효과적이며, 창조적으로 살 수 있다. 영적인 것을 충전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힘들고 어려우면 기도하며 말씀 안에서 돌아보고 살피는 일에만 관심 갖는다. 그러나 신체적, 감정적, 정신적, 영적으로 에너지를 회복 않으면 창조적으로 임할 수 없다. 신경을 과도하게 쓰면 창조적 생각을 할 수 없다. 예민하고 민감해서 분노가 쌓여 작은 일에도 표현 안 될 때가 많지만 마음이 끓을 때 생각이 중단 된다.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시면서 쉬게 하시고 육체적, 정서적으로, 영적 회복될 때 새 사명을 맡기셨다.
<안식은 인간에게 주시는 축복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우리 유익과 행복을 위해서다. 출 31:17절 안식일에 누릴 행복을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 "쉬었다"는 대부분 영어성경 "God refreshed himself"라 했다. 히 "뱌인나파쉬"-곧 성령(네페쉬)이 임하셨다(뱌인-들어 오셨다) 하나님이 쉬실 때 성령 안에서 새롭게 하셨다. 안식일의 축복은 성령으로 새롭게 충전한다. 안식일은 안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안식 후 평일이 기다린다. 안식 한 주간의 사역들을 생각하고 계획하는 새 창조의 시간이다. 라이켄 교수는 안식일의 축복을 영 단어 3R로 설명한다. 안식일은 과거를 돌아보는 reflection, 현재를 충전하는 refreshment,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창조하는 recreation의 선물이다. 만일 안식일의 목적이 안식만 이라면 성경은 창2:3로 끝나야 했지만 안식일을 통해 새 비전을 안고 일터로 가라. 역사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일에 쓰임 받으라.
<안식을 통해(=하나님을 만남으로) 기쁨을 회복한다>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신 삶의 원리를 지켜야 한다. 쉬지 않고 열심히 살면서 하나님께서 복주신 모든 것을 잃고 누리지 못했다. 가족이 무너진다. 건강이 상한다. 삶의 여유와, 웃음을 잃었다. 영국 옥스퍼드대 의대 연구팀이 어린아이와 어른의 웃음에 대해 어린아이는 하루 400-500번 웃는다. 장년은 하루 15-20번 웃는다. 돈과 탐욕 때문에 인간은 복을 잃었다. 인간이 걱정에 대한 것을 사람의 걱정 중 발생하지 않을 것 40% 이미 일어난 것 30% 신경 쓰지 않을 일 22% 바꿀 수 없는 것 4% 우리들이 해결 할 사건 4% 인간은 96%의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기쁨도 웃음도 마음의 평화도 잃은 채 살아간다.
이 날이 복되게 하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하나님을 볼 때 죄 짐에서 놓임 받는다. 하나님의 공급하심. 참 안식의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린다. 어거스틴 ‘우리 영혼이 당신의 품안에 돌아가 쉴 때까지 나에게 결코 평안이 없었나이다’ 참된 안식은 주님을 예배할 때다. 타락한 인간은 쉴 줄 모르고, 참 안식을 모른다. 삶에 하나님 주신 축복을 깨닫고, 바쁜 삶을 내려놓고 참 안식 할 때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삶이 참 기쁨과 삶의 의미가 있다.
<결론>
안식은 미래를 계획한다. 미래를 계획하는 영감을 얻는다. 안식은 낭비가 아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괄호”다. 창조적 괄호. 잠시의 쉼. 그 쉼 속에 미래를 새롭게 만든다. 같은 저자의 책 “인류의 문화의 발전은 뜨거운 폭염에 태양이 내려 쪼이는 노동 현장에서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비 오는 날 동굴 속은 문화의 산실이었다.” 비 오는 날 동굴 속의 원시인들이 동굴에 앉아 비를 보다가 갑자기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문화와 창조의 불꽃이었다. 건강한 미래를 만들지 못할까? 생각 없이 서둘기 때문에 한국사회 진통과 아픔은? 졸속과 서두름이다.
쉼 없는 현대인들이 본래 급하지 않았다. 옛 어머니들이 밥 지으실 때 뜸과 식탁 교제의 시간들. 이어령 씨 한국인들이 언제 바빠졌느냐? 라면 나온 때부터 소위 인스턴트 문화에서 급해졌다. 느긋하면서 하나님의 간섭을 기대하라. 인생은 짧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안식을 잃은 원인이 죄 때문이다. 욕심이 죄고, 죄는 평안이 없다. 죄가 맘속에 여유를 빼앗았다. 죄가 맘속에 독기서린 한을 우리 속에 심었다. 죄가 긴장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죄 많은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주셨다. 왜? 어느 날 팔레스타인 피곤하고 지친 군중들 앞에서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쉼을 주신다. 그 분을 삶의 주인으로 모실 때 사죄와 평안이 있다. 그는 안식의 주인이시다. 안식을 잃었는가? 그 분께 와 그 분을 삶의 주인으로 모셔라. 그분의 은혜 안에 거하라. 풍성하신 은혜와 넓은 평안 안에 거하라. 주 안에서 안식이 회복될 것이다. 회복되는 안식에서 인생을 위해 예비하신 놀라운 미래를 향해 손짓하는 하나님의 손길의 인도를 경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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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구 자료의 깊이가 남다릅니다. 범접할 수없는 깊은 연구와 제공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