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분명히 밝혀 둘 것은 당쟁이 꼭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만은 아니며, 전세계적
으로 드문 문치주의에 입각한 독특한 권력 투쟁형태였다는 것이다.
당쟁에 의해 망국이 된 것이 아니고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인해 국가기강이 피폐해진
것이 더 문제이면 문제일 것이다.
역사란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배울 점은 배우고 그렇게 하지 말아야 했었던 것은 그
렇게 하지 않을려고 노력하는 데에 큰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 당쟁·정쟁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만 해 본다.
(조선시대 당쟁사(이성무)의 내용 중심으로)
Ⅰ.당쟁이 일어난 원인
여러 학자들 견해가 많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조·병조 전
랑의 자대권自代權과 정 3품이하의 당하낭관을 추천할수 있는 당하통청권堂下通淸權
때문에 정쟁·당쟁이 일어났다고 본다.
자대권이란 이조 ·병조 전랑銓郞(정랑,정5품 및 좌랑,정6품을 일컬음)에게는 자기의
후임을 선택하는 관례가 있었고, 특히 대간을 비롯한 당하낭관堂下郎官(정3품 당하관
에서 6품까지의 관료)을 추천하는 통청권이 있었다. 전랑, 특히 이조 전랑(정랑및좌랑)
은 이들에 대한 추천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를 차지하고자 하는 다툼이 영조때(1741년)까지, 이 제도가 폐지될 때 까지 지속
되었다.
Ⅱ.조선시대 정치의 흐름(당쟁)
여러 가지 단락으로 구분을 하지만 여기서는 권신정치기 ·사림정치기(당쟁시기)·외척
세도기로만 구분해 본다.
1.권신정치기 (중종말 ~ 명종)
조광조등의 사림세력의 과도한 개력주장에 염증을 느낀 중종이 등을 돌림으로서
정권은 외척 권신들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인종·명종시절 윤임尹任· 윤원형尹元衡
등이 대윤·소윤으로 분리되었지만 이들은 집권의 명분도 뚜렷한 정치이념도 없었다.
이는 세조이래 펼쳐온 훈신정치의 연장선상이었다.
2.사림정치기(본격적인 당쟁시기) (선조 ~ 정조) 영·정조 탕평시기
-동인·서인의 분열
선조 8년(1575년)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추천된것을 심의겸이 반대한 것에서 사람
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었다. 김효원을 편든 사람이 동인, 심의겸의 편에 선
사람을 서인이라 불리었다. 김효원의 집이 한양 동쪽에 있어서 동인이라 불리었고,
심의겸의 집의 한양의 서쪽에 있는 정릉동에 있어서 서인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동인 - 허엽,유성룡,김성일,남이공,이발,이산해,이원익,이덕형 (이황과 조식의 문인)
서인 - 박순,정철,송익필,윤두수,이산보 (이이와 성혼의 제자가 많았음)
-동인내 남인·북인의 분열
정여립의 난을 다루는 과정에서, 동인을 해친 서인 정철과 서인을 엄하게 다스려
야 한다는 이발 ·정인홍등의 강경파가 북인, 온건파가 남인으로 분리된다.
이발의 집이 북악산 아래에 살고 있어서 북인이라 불렀고, 우성전은 남산아래 살
고 있어서 남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북인 : 이발,이산해,정인홍 (조식·서경덕 문인)
남인 : 유성룡,김성일,우성전 (퇴계문인)
-북인내 대북·소북의 분열
광해군이 즉위하기까지 광해군을 지지한 세력이 대북으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이 소북으로 분리가 된다.
-인조
동기를 살해하고 모후를 폐한 반 인륜적인 행동과 明에 대한 임진왜란때의 은혜를
저버리고 오랑캐(청)와 교분을 맺었다는 명분인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된다.
-효종조에는 특별한 당쟁이 없이 송시열 계열의 산림세력과 김육을 필두로 하는 청
풍김씨 외척 세력이 경쟁하는 정도였다.
-현종조에도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세력이 정권을 주도했다. 하지만 인조조 이래로
기회를 엿 보고 있던 남인세력이 있었는데 이들간에 두 차례의 예송이 일어난다.
'기해예송(1659년)'-효종이 죽자 인조의 후비인 조대비가 기년복(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한 송시열의 서인들과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윤휴 ·허목등의 남인들의 논쟁
이 일어난다. 서인들의 승리로 귀결된다.
'갑인예송(1674년)'-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죽자 인조의 후비(자의대비)의 복제가
새롭게 논의가 된다. 서인의 기해혜송의 연장선상에서 次子婦로 다루어 대공복(9개
월복)을 주장하고, 남인은 장자부로 다루어 기년(1년)을 주장한다. 현종은 외척 김석
주의 도움을 받아 서인을 숙청하고 기년복을 확정지었다.
-노·소의 분열
송시열(주자를 신앙적 차원에서 숭앙)과 윤휴(주자만을 절대시 하지 않는학계의 자
유주의자)와의 논쟁에서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주자학을 문란하게 만든 도적.
유교 사상에 어긋난 말이나 행동으로 교리를 어지럽히는 사람)으로 매도했다.
같은 서인이던 윤선거가 윤휴를 두둔하였다. 윤선거 사후 윤선거의 아들이자, 송시
열의 제자이던 '윤증'이 송시열의 윤선거에 대한 혹독한 비난으로 두 사람간에는 감
정이 골이 너무 깊게 되고 이 이 사태는 겉 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노·소로 분열이
일어난다.
-시파·벽파의 분열
시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면서 정조의 정국운영에 동조한 세력, 즉 친 정조
세력이며,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면서 정조의 정국에 동조하지 않은
세력을 말한다.
노론에도 시파 ·벽파가 있었으며 소론에도 있었고 남인에도 시파 ·벽파가 있었지만
어떤 정파나 당파로 보기에 애매한 부분이 많다.
3.외척세도 정치기
-순조조 초기, 즉 정조의 죽음은 탕평의 종말인 동시에 벽파 정권의 시작이었다. 하
지만 6년만에 정국의 주도권은 '김조순(순조의 장인)'으로 안동김씨 중심의 외척세
력에게로 이양되어 외척 세도정치기가 시작되었다.
김조순은 반남박씨(박준원)가문과 풍양조씨(조득영)가문의 도움을 받아 벽파세력을
제거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효명세자(익종,순조의 아들)대리청정시 세자의 장인인 '풍양조씨'조만영이 안동김씨
세력을 견제하게 하였다. 세자의 죽음으로 풍양조씨 세력은 일시 와해 조짐을 보인
다.
-헌종은 어린 나이 즉위로 순원왕후(순조의 비,김조순의 딸)가 수렴청정을 시작하게
되고 이로 인해 안동김씨 세력이 재 집권하게 된다.
-철종
헌종이 1849년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실의 가장 어른인 순원왕후가 왕위
계통권을 강화도령 이원범(철종)에게 계승하게 한다. 이로 인해 순원왕후가 다시
섭정을 하게 되고 안동김씨 세력을 계속 집권하게 된다.
안동김씨는 철종을 무리하게 순원왕후의 아들로 입적시키면서까지 세력을 연장하
며 철종의 비를 김문근의 딸로 간택하게 하여 세도는 더욱 굳어졌다.
-고종
철종은 여러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후사가 없이 1863년 죽자, 대왕
대비 조씨(신정왕후/효명세자의 비,조만영의 딸)가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고종으로 삼았다.
흥선 대원군(왕이 후사 없이 죽을때 새로운 왕의 아버지. 살아서 대원군이 된 유
일한 사람이 흥선대원군)의 섭정으로 안동김씨의 권한이 대원군의 세도로 바뀌게
된다.
1866년 외척세력의 집권을 몸서리 치던 대원군은 자신의 부인의 '여흥민씨' 세력
중에서도 가장 미약한 가문으로 고아나 다름없는 민치록의 외동딸인 민비를 선택
하게 된다.
고종이 궁인 이씨와의 사이에 완화군을 낳게 되고 이를 귀하게 여기는 대원군과
민비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된다.
민승호,민겸호형제(대원군의 처남,특히 민승호는 아들이 없는 민치록의 양자가 되
어 민비의 양 오라버니가 됨)와 민규호,민태호형제들의 외척세력이 성장하게 된다.
최익현의 탄핵으로 대원군이 1873년 물러나게 되고 여흥 민씨의 세도정치가 새로
이 시작된다. 1882년 민겸호가 군대 급료를 썩은 곡식이나 모래가 절반인 곡식을
나눠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되고 민비가 쫒겨나게 된다.
새로이 대원군이 등장하였으나 청의 대원군 납치로 민씨 정권이 새롭게 서게 된다.
1884년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당 세력의 갑신정변은 민비세력을 제거하고 근대민
족국가를 수립할려는 계획은 새롭게 청의 개입을 받게 된다.
1885년 일본의 요구로 대원군이 환국하지만 민씨정권과의 잡음은 계속된다. 1895
년 민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됨으로써 민씨정권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이와같이 외척의 세도정치는 시대의 흐름을 부정한 체 자신들만의 권력욕만을 앞
세우고 있었다. 우리 어느 누구도 믿기 힘든 말기현상들이 연이어 졌다.
안타까운 잊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다.
2008.11.07. 강민구
※참고문헌
1.조선시대 당쟁사1·2 (이성무)
2.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이덕일)
3.조선을 뒤흔든 최대역모사건 (신정일)
4.왕의 투쟁 (함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