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조 : 송 주은 [宋 柱殷] 시조 : 송 대원 [宋 大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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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및 시조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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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은진(恩津)은 충청남도 논산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德恩, 市津 두현의 合名으로서 그 古來傳說上 德恩, 市津 2고을이 있었을 뿐, 고치고 고려조 초에 德恩으로 개칭하였는데 現 논산군 가야곡면 일대이고 고려 현종 9, 1018년에 덕은 및 속현 시진을 모두 公州의 속현으로 둘다 조선 태조 6, 1397년에 덕은,시진을 합쳐 德恩감무를 두다 世宗元年때 恩津으로 1419년 개명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전하고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제시대 '가지내'를 한문음차해 加知奈, 乫奈, 新浦라 해서 錦江지류의 뜻지닌 支川으로 市津이었다. 즉 德恩 길목으로 통하는 나루터 시장가란 유래라 할 수 있는데 오늘날 山川變遷한 채 본위치람 바로 華枝山, 華山아래 나루터인즉 江景浦口위 論山市 花枝洞과 半月洞 일원, 그 곳 論山 시외정거장서 江景邑쪽 뚫린 국도좌측연변 작은山下 登華洞 촌마을중심일대가 我恩津 옛 땅 ! ㅇ 恩津宋씨는 中國 경조 출신으로 唐나라에서 호부상서를 지낸 송 주은 (宋 柱殷)의 후예로 전하며,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막내 아들 문익(文翊)은 서산 송씨(瑞山 宋氏) 시조가 된다고 전해진다.
우리 은진 송씨는 불행히도 天翊시조이후 大原까지의 세계가 실전하여 사실상 그 동안 고로 礪山 宋氏와의 이야기되는 대로 은진송씨는 작은 집으로 같은 할아버지 밑에서 갈라진 한 집안들 '!
ㅇ그러므로 先繼를 고증할 문헌이 없어 고려조에서 판원사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세워 恩津君에 전하고 있다. 그후 大原시조 증손 명의(明誼)가 경상도 안렴사를 거쳐 사헌부 집단에 이르렀으며 高麗가 亡하자 不事二君의 충절로 충남 대덕군 동면 신촌리에 낙향하여 절의를 지켰다. 그의 아들 극기(克己)는 젊은 나이에 성균관 進士에 선발되어 開城에서 살았는데 단명하였다. 의 부모들이 그녀의 뜻을 빼앗아 개가시키려 하자 부인은 죽음을 맹세하 고 아들 유(愉)를 업고 開京송도에서 회덕까지 5백여리를 걸어서내려 왔다.
것은 三從의 義가 아니다" 라고 나무라니, 그 녀가 울면서 말하기를 "저의 三從의 道는 지금 이 아이에게 뜻있지 않겠습니까" 다. 그리하여 靑孀高節의 되었는데, 년 아들 유마저 훌륭하게 길러 대송가문
기상과 도량이 높고 强해호방하였고 학행이 순비하고 효심 또한 지극하였다.
副司正 從七品 이 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그 때 마침 돌아가신 계비 신덕왕후 강시 위패를 太廟에 모시지 못하는 지금의 大田 宋村洞인 懷德 백달촌에 귀향했다. 마침내 꿈에 그리는 고향에 돌아온 지조높고 강직한 젊은 선비 에 힘썼다 봉양하고 조상제사는 정결에 힘쓰고 儀節은 古制로 따랐으며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기에 백달촌 宋氏族은 인총으로나 학문과 덕행으로나 날로 크게 번창하여 忠淸道 宋村은 유래 드문 恩津宋氏 本家集姓村이 되어 드디어 宋村 혹은 宋宅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쌍청당 할아버지는 예서 20년간 3번 집자리를 옮긴끝에 비로소 지금의 대종손 宗家에 정착하였 는데 壬子(1432年) 公의 春秋 44세때 일이라. 朴 堧에게 청하여 편액을 받으니 이것이 지금의 雙淸堂이다.
간 處士와 仙人으로 筆硯과 琴棋로 살다가 정통 병인 世宗 28년에 下世하시니 향년 58세 셨다. 百世淸風 三韓正氣 등의 어귀로 世生標現하였다. 즉, 옛 처사와 같이 정절을 지켜 세상을 등지고 어지럼을 멀리 하였으나 스스로 편안하고 백세에 길이 맑은 기풍과 바른 기상을 끝없이 품어내는 자품심성을 지닌채 일생을 살았 었던 것이다. 바로 맑은 바람, 밝은 달이 곧 雙淸의 온전기상이라 할 것이다. 2남으로다 장자 계사(繼祀)는 상주판관을 지냈고 증직이 사헌부지평이며차 자 계중(繼中)은 오위의 사과였고 사직공이아 부른다.
ㅇ사실상 雙淸堂 할아버지가 우리 大宋家門 恩津宋氏의 中始祖 할아버지 시고 우리 모두는 한 子孫 ! 人脈을 살펴보면 쌍청당 유(愉)의 증손 여해(汝諧)가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 하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成宗의 자문에 응했고, 그의 맏아들 세충(世忠)은 군수와 장령을 지냈으며 명망이 높았다 세충(世忠)의 아들 기수(麒壽)는 4조(朝)의 임금을 섬기며 대사헌, 이조 판서를 역임했다. 으며, 대사헌과 이조참판을 거쳐 한성부 좌윤에 올랐으나 윤원형의 미움을 받아 을사사화에 사사 되었다. 가 유적에 삭제되었고, 조선조에서 주자학의 거유로 당대에 명망이 높았다 시열(時烈)은 평소 강직한 성품으로 정적이 많앗으나 뛰어난 학문으로 문하에서 많은 학자를 길렀고, 13촌 숙질 간인 준길(浚吉)과 함께 동문 수학하여 뛰어난 학문으로 노론(老論)의 쌍벽을 이루었다.
성리학자로 예학에 밝았으며, 율곡 이이의 학설을 따랐다. 그밖의 인물로는 우암,·동춘당 과 함께 [삼송]으로 일컬어졌던 규렴(奎濂) 이 유명했으며, 시열의 손자 주석(疇錫)은 [향동문답]을 저술하여 정조때 이조판서를 지낸 덕상(德相)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ㅇ 三源一堂 : 恩津, 礪山, 瑞山宋氏는 同姓同本 一氏族. 礪山군에 俸해진 惟翊을 麗王祖 元宗때 門下侍中으로 礪良(礪山古名)부원군에 봉해진 松禮가 그리고 4대는 郎山府院君에 봉해진 琰의 혈통을 면면히 이어받아 礪山을 本籍 (本貫의 籍地란 뜻으로서, 본관 대신 官籍 또는 籍이라고도 한다) 1985년 한국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恩津 宋氏는 남한에 총 44,939 가구 187,3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현재 50만 종원이라 칭한다. | |
집성의 촌 대전시 대덕구 중리동 송촌리 충남 대덕군 산내면 일원 | |
충남 대덕군 신탄진읍 평촌리 |
경남 남해군 삼동면 난음리 |
전남 진도군 조도면 관사도리 |
경남 남해군 남면 덕월리 |
경남 마산시 내서면 감천리 |
경남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
경남 거제군 장목면 유호리 |
경남 합천군 대병면 유전리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