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기자(箕子)라는 사람이 고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기자조선 (BC1046 ~ BC194)이다. 기자조선의 명칭이 ‘기자(箕子)’라는 중국 인물과 ‘조선(朝鮮)’이라는 한국 지역이 복합됨으로써 이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많은 혼란을 가져온다.
기자는 중국에서 추앙받는 중국인이지만 한족 출신은 아니다. 기자가 동이족이 세웠다는 은(= 상)나라 왕실의 후손이라고 하니 기자는 한국인과 같은 동이족 출신이다. 그렇다고 기자가 동이족 출신이라고 해서 고조선 계열의 우리의 먼 조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 당시에 사용된 동이족이란 말은 현재 중국의 산동성, 하북성 일대에 살던 이민족을 구분 없이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었다. 동이족 국가인 은나라가 망하고 한족 국가인 주나라가 들어서게 된다. 동이족인 기자가 한족 국가인 주나라에 거부감을 가졌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기자를 접근할 필요가 있다.
기자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 기자동래설 (箕子東來說)인데 이는 주나라의 시각에서 보는 입장이다. 주나라는 중국 서쪽 내륙에 위치한 오늘날 서안(Xian)으로 불리는 호경(鎬京)을 도읍지로 삼았다. 서안 기준에서 볼 경우 기자가 간 곳이 동쪽이므로 기자동래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자가 몸 담고 있던 나라인 상나라 (은나라라고도 불린다)는 그 위치가 산동성, 하남성 그리고 호북성 일대이다.
상나라 기준에서 보자면 기자가 간 곳은 북쪽이므로 기자북래설(箕子北來說)이라고 보아야 한다. 기자가 서안에 있는 주나라 무왕을 만나 조선왕으로 책봉을 받고 떠났다면 기자동래설이 맞다. 그러나 만약 기자가 주 무왕을 만나지 않고 고향인 산동성과 하남성의 접경 지역에서 조선으로 바로 떠났다면 그 방향이 북쪽이니 기자북래설(箕子北來說)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동래(東來)란 뜻은 동쪽으로 갔다는 뜻이 아니라 동쪽으로 왔다는 뜻이다.
이하에서는 기자(箕子)를 아래와 같은 접근 방법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기자라는 사람은 과연 실존 인물이었을까?
(2) 실존 인물이었다면 실제로 단군조선 영역에 들어온 것은 맞는가?
(3) 만약 그렇다면 기자가 단군조선 영역에서 통치자로 군림한 것이 맞는가?
(4) 이런 내용도 사실이라면 기자가 단군조선 영역 전체를 통치하였는지 아니면 일부 영역만을 통치하였는지?
(3)부터 (4)까지는 기자동래설과 관련하여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어 조선 영역의 전체 혹은 일부를 지배하였다는 내용이다.
(5)는 기자가 고조선의 통치자가 되지 않았다는 가설로 기자가 피난민 신분으로 고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을 보좌하며 일시적으로 체류하였는지 그것이 아니라면 고조선 인근 지역에 작은 나라를 설립하고 왕이 되었는지에 관한 접근이다.
(6) 상기 (2)에서 (5)까지의 접근으로는 기자에 대한 설명이 어려우니 판을 다시 짜서(?) 새롭게 접근을 해보자는 새로운 시각의 해석이다.
(1)과 관련하여 기자는 실존 인물이 맞다. 기자는 중국 상나라 29대 왕인 문정(文丁)의 아들로 왕족이다. 성은 자(子), 이름은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이며 기자는 작위 명인 동시에 별칭이다.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에는 『진조통기(震朝通紀)』라는 작자 미상의 서적을 인용하여 기자가 BC1083년(무오년)에 93세로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근거로 하자면 기자는 BC1175년에 태어나 BC1083년에 사망한다. 상(=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서는 시점이 BC1122년이니 이때 기자의 나이는 54세가 된다.
그런데 오늘날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에 의하면 상(=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서는 시점이 BC1046년이므로 은말주초(殷末周初) 시기가 예전의 예상치보다 76년 후퇴한다. 그렇게 되면 기자의 생몰년은 BC1175 ~ BC1083 이 될 수 없게 된다. 은말주초 시기에 기자가 50대 중반이었고 93세에 사망하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기자의 생몰년을 BC1099년 ~ BC1007년으로 수정해야 한다.
(2) 기자가 단군조선 영역에 들어온 것이 맞는가? 와 관련하여 단군조선의 영역이 어디까지였는지에 관한 학계의 규명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요녕성 조양市는 물론 내몽골 적봉市에서 나온 유물(도기에 箕란 글씨가 새겨있음)에서 기자의 흔적이 발견된다. 만약 이것이 기자와 관련된 유물이라고 단정 짓게 된다면 기자 내지는 기자세력이 중국 동북부 지역에 진출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기자세력이 진출했다는 중국의 동북부 지역은 재야사학계에서 주장하는 고조선의 강역에 속하므로 재야사학계 입장에서는 기자가 단군조선 영역에 들어왔다고 본다. 주류사학 입장에서는 고조선의 강역이 한반도 내에 갇혀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기자 내지는 기자세력이 요녕성이나 내몽골 지역에까지만 진출했다고 단정 짓게 되면 기자는 고조선과 무관한 인물로 전락한다.
(3) 기자가 단군조선 영역에서 통치자로 군림한 것이 맞는가? 와 관련하여 우선 기자는 실존 인물이며 은말주초 시기인 BC1046년에 무리를 이끌고 동쪽 혹은 북쪽으로 이동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요녕성과 내몽골 지역에서 출토된 유적의 내용이 기자와 관련된 것으로 단정 짓게 된다면 이들이 요녕성 너머 내몽골 지역인 적봉市까지 진출한 것도 사실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다만 그 지역을 점유한 기간이 짧았는지 아니면 길었는지에 관해서는 정보가 없다. (1),(2)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무리 없이 넘어갔다고 본다. 문제는 (3)이다. 만약 기자가 단군조선 영역에서 통치자로 군림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 말은 기자조선의 등장으로 단군조선이 기자조선과 공존했거나 아니면 종말을 고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중국의 사서에는 기자가 단군조선과 전쟁을 벌여 단군조선을 정복 내지는 정벌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단지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였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이는 주 무왕이 기자를 먼 지역의 지방관으로 발령해 내보내었다는 뜻과 별 차이가 없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는 고조선 쪽 상황이다. 중앙정부에서 어느 지역에 새로운 지방관을 파견하면 해당 지역은 그 지방관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주군현 제도의 기본 원칙이다.
그런데 중앙정부가 본국 정부가 아니고 다른 나라 정부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는 중국 정부가 중국 고위 관료를 경기도지사로 임명하여 파견했다는 것과 같다. 단군조선이 은나라나 주나라와 대등한 관계에 있었다면 단군조선은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 왕으로 봉했다고 해서 이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이것은 외교적 결례이고 내정간섭이라고 하면서 중국에 엄중히 항의해야 할 중대한 사안이다. 만약 단군조선이 주 무왕의 조치를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면 현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단군조선은 당시 중국왕조의 제후국과 다름없다고 보아야 한다.
기자의 동래와 관련한 삼국유사의 내용을 살펴보자. 『古記』에 이르기를 「단군왕검이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니 이름하여 궁홀산이라고도 하고 또 금미달이라고도 하여 1천5백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책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은거하여 산신이 되었으니 향년 1천9백8세였다」라 하였다.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출처로 삼은 것이 『古記』이다. 누가 언제 『古記』를 편찬하였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다만 1145년에 편찬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도 『古記』가 사료로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 초기 아니면 신라 말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여기서 나말여초(羅末麗初) 기득권 계층으로 대표되는 학계의 사상이나 학문적 동향을 잠시 언급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는 최치원이 활약하던 9세기 末을 뜻하는데 그 이전부터 신라의 유학자들은 중국을 숭상하는 사대주의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것은 낮추어 보고 중국 것은 높게 보는 것을 당연지사로 여겼고 그렇지 않으면 불경하다고까지 생각했다. 이런 풍토가 만연된 상황에서 이름 모를 유학자에 의해 『古記』가 편찬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고려가 건국한 후에도 크게 바뀌지 않는다. 숭상하는 대상이 唐나라에서 宋나라를 거쳐 金나라로 바뀌었을 뿐이다. 따라서 『古記』가 『삼국사기』가 편찬되기 얼마 전에 출간되었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古記』가 8세기에 편찬되었건 12세기 초에 편찬되었건 간에 『古記』의 기록이 중국을 숭상하는 내용으로 편찬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삼국유사』의 내용을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삼국유사』 기록을 『古記』 편찬자 입장에 맞추어 글의 문맥을 해석하자면 “주 나라 무왕이 현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기자를 조선왕에 책봉하니 이에 감격한 단군이 권좌를 기자에게 기꺼이 양보하고 자신은 장당경으로 떠났다”가 된다.
한편 당시의 시대 상황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넘어가는 BC12세기 내지는 BC11세기에는 민족이란 개념도 없었고 국가라는 개념도 희박한 시절이었다. 『古記』에서 전하는 내용이 당시의 시대상(時代相)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필자 역시 『古記』의 내용이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지만 이해가 안 되는 이유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3000년 전의 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아무튼 『古記』에 의하면 기자는 기묘년인 BC1122년에 조선의 왕이 되고 단군은 장당경으로 낙향(?)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古記』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음과 같은 상상도 가능해진다.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자가 단군조선의 모든 영역을 차지하지 못하였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기자가 단군조선 영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되 일부 영역인 장당경을 단군의 통치지역으로 남겼다고 추정할 수 있다. 아니면 기자가 단군조선 영역 모두를 차지하게 되니 단군은 고조선 영역 밖에 있는 장당경이란 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느 경우이든 간에 기자와 단군은 시기적으로 같은 시기에 서로 이웃에 있으면서 통치자로 군림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시기적으로 병존하였음을 의미하며 기자조선이 등장함으로써 단군조선이 멸망했다는 기존의 통설을 뒤집는 새로운 학설의 단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필자의 상상력이 최대한으로 동원된 억측에 불과할 수 있다. 『古記』에서 전하는 통상적 의미는 기자가 단군조선의 모든 영역을 차지하고 그 영역 내에 있는 장당경이란 곳에 단군을 이주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古記』를 인용하면서 기자가 조선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음을 인정한다. 다만 기자라는 존재를 가볍게 언급하여 새로운 왕조의 시조로 보지는 않고 단군조선의 역사에 포함 시킨다. 따라서 일연은 고조선을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으로 분류하여 2조선 론으로 본 반면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단군조선을 前朝鮮, 기자조선을 後朝鮮이라고 규정하여 기자조선이 고조선의 한 왕조임을 부각시킨다. 이승휴의 주장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그리고 위만조선으로 분류되어 3조선 론이 된다.
이제 기자와 관련된 중국의 역사 서술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진(秦)나라 이전의 문헌을 선진문헌(先秦文獻)이라고 하는데 그것에 해당하는 『죽서기년(竹書紀年)』·『상서(尙書)』·『논어(論語)』에서는 기자가 은(殷)나라 말기의 현인(賢人)으로만 표현되어 있지 기자가 조선에 갔다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한(漢)나라 초기의 문헌인『상서대전(尙書大傳)』<은전(殷傳)> 과 한나라 중기의 문헌인 『사기(史記)』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그리고 후한 중엽 시기의 문헌인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 등에서 기자는 은나라의 충신으로서 은나라의 멸망을 전후해 조선으로 망명해 백성을 교화시켰으며 이에 주(周)나라 무왕은 기자를 조선의 왕에 봉했다고 하였다. 한나라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기자와 조선이 연결된 것이다.
기자가 조선에 가 왕이 되었다는 내용을 전하는 최초의 문헌은 『상서대전』과 『사기』<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이다. 모두 전한(前漢) 시기에 나온 문헌이다. 『상서대전』은 중국 최초의 역사서로 평가되는 『상서』에 주석과 본문을 추가한 주해서로 한나라 초창기에 복생 및 복생의 제자들이 진시황 시절에 단행된 분서갱유로 소실된 『상서』의 일부분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편집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주목할 점은 『상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기자동래설이 『상서대전』에는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상서』는 중국 유교의 5경(五經) 가운데 하나인 『서경(書經)』의 한 부분으로 중국 고대국가들의 정사(政事)에 관한 문서를 공자(BC551~BC479)가 편찬한 것이라고 한다. 서경은 크게 『우서(虞書)』·『하서(夏書)』·『상서(商書)』·『주서(周書)』의 4부로 나뉘는데 각각 요순시대 · 하나라 · 은나라(상나라) · 주나라에 관련된 내용을 싣고 있다. 따라서 『상서』는 은나라 역사와 관련된 내용을 전한다.
『상서대전』에 따르면 기자는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주나라 무왕은 이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한다. 한편 『사기』〈송미자세가〉에도 기자가 조선의 군주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상서대전》과는 반대로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기자가 조선에 가서 나라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러한 두 문헌의 차이는 『상서대전』에서는 기자가 주나라에 남기 싫어서 자발적으로 조선에 갔다는 점이고 『사기』〈송미자세가〉에서는 기자가 처음부터 주나라 무왕의 명을 받아 조선으로 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문헌 내용의 공통점은 기자가 조선의 군주가 되었다는 점이다.
반면 서기 82년경에 반고에 의해 편찬된 『한서』와 『한서지리지』는 기자가 피난민 신분으로 고조선에 망명한 것으로 기록한다. 중국 사서의 특징은 기자를 선진문물의 전수자라고 묘사한다. 조선에 온 망명객 기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8조 금법을 베풀어 나라를 다스렸다. 조선 사람들에게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고‘예의와 농사짓기, 누에치기, 천 짜기 등을 가르쳐 주어 백성들이 기뻐했으며 백성들로부터 큰 신망을 받게 되었다고까지 윤색한다. 후대에 올수록 중국의 역대 사가들은 기자동래설을 더욱 요란하게 각색했는데 명나라 말기에 왕기가 편찬한 『삼재도회』에서는 기자가 수천명의 기술자들을 대동하고 조선에 가서 조선을 문명국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말까지 꾸며내었다.
기자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인데 그것이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 중국 특유의 중화의식이 거론된다. 중국은 주변 이민족들의 기원을 기록할 때 항상 중국의 고대 인물의 후손이라 기록하였다. 『사기』<흉노열전> 에 “흉노는 그 선조가 하후씨의 후손으로 순유라 한다” 고 써 놓아 마치 흉노족의 선조가 중국 하 왕조 걸왕의 후손이듯이 써놓았다. 이처럼 흉노의 시조는 하나라의 후손이고 서융은 하나라 말기에 이주해간 사람들이며 선비족의 조상은 유웅씨의 후손이고 서강의 조상은 유우씨의 후손이며 바다 건너 지금의 일본인 왜의 조상은 오나라 태백의 후손이라고 조작하였다. 이처럼 중국 주변국 사람들이 마치 중국에서 퍼져나간 종족이듯이 왜곡시켜 놓았다.
기자동래설이 등장하게 된 또 다른 배경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자. 기자동래설이 위만조선을 침략한 한 무제 시기에 특별히 부각 되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시각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위만조선이 침탈하여 점유한 고조선의 땅은 본래 기자조선의 땅이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응징하여 정복하고자 한 이유는 중국의 고토수복(古土收復)에 있다.” 이렇게 되면 한나라는 고토수복이란 미명 하에 위만조선의 정복을 정당화 내지는 합리화시킬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된다. 그러려면 위만조선의 옛 자리에 기자조선이란 나라가 존재해야 한다.
‘기자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조선의 통치와 교화가 그 목적이라는 취지가 중국 사서의 주된 내용인데 『상서대전』은 기자가 주나라의 지배받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니 주나라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였다는 것이고 『사기』〈송미자세가〉는 기자가 처음부터 주나라 무왕의 조선왕 책봉을 받고 조선으로 갔다는 것이고 『한서』와 『한서지리지』는 기자가 피난민 신분으로 고조선에 망명하였다는 것이 그 차이이다. 다만 『상서대전』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상서』에서는 기자의 이동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공자가 편찬한 『상서』에 의하면 기자는 평생 고향에서 살다 여생을 마친 것으로 되어있는데 한 고조 시기에 편찬된 『상서대전』과 한 무제 시기에 편찬된 『사기』〈송미자세가〉에 이르러서는 기자가 고조선의 왕으로 부상(둔갑?)한다. 이런 내용이 후대로 이어져 『古記』에 전달되었고 마침내 『삼국유사』에까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기자가 후조선의 시조라는 근거를 『제왕운기』에서는 『상서대전』에서 찾았고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그 근거를 『사기』〈송미자세가>에서 찾았다.
기자의 행적에 대해서는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기자의 무덤이라고 추정되는 곳이 산동성 서남쪽 끝에 위치한 조현(曺縣)에 있다. 이 일대는 은나라의 본거지이자 기자의 고향이기도 하다. 산동성과 하남성의 접경 지역으로 북경에서 직선거리로 600여 km 남쪽에 있다. 『사기』 <송미자 세가> 주석에는 양국(梁國) 몽현(蒙縣)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하남성 상구(商邱) 지역에 해당한다. 기자 묘가 있는 조현은 하남성 상구(商丘)시와 위아래로 붙어있다.
기자의 비석 뒷면에는 기자의 일생이 적혀 있는데 이상하게도 한국 쪽 기록들을 인용하고 있다. 한치윤의 『해동역사』를 인용하여 기자가 일족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갔고 홍범구주와 8개 법 조항으로 조선을 다스리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고 써놓았다. 기자가 조선을 다스리다가 중국으로 복귀해 이곳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면 당시 시대 정황으로 보아 조선의 치소를 대동강 평양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기자의 고향인 산동성과 하남성의 접경 지역에서부터 평양까지의 거리는 육로로 1500km 정도가 된다. 기자가 평양까지 왔다 갔다는 주장은 자연스럽지도 않고 사리에 맞지도 않으며 지리적 여건과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다. 개인적인 추측인데 기자가 체류했다는 고조선의 지역은 현재의 북경市, 천진市 그리고 당산市 일대를 아우르는 영정하나 난하 지역이 아니었을까? 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그 일파가 더 북상하여 오늘날 진황도市, 호로도市, 그리고 금주市 너머 서북쪽의 조양과 적봉 지역까지 갔을 수 있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으나 금주市 너머 동쪽인 대릉하나 요하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한반도는 물론 요동지역에서도 은말주초(殷末周初) 시기의 중국 유물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자가 고조선에 정착한 후 오늘날 북경市, 천진市 , 당산市 혹은 더 북쪽인 진황도市, 호로도市, 금주市 등에서 생을 마감하였다면 기자동래설의 내용은 자연스러워진다. 문제는 기자가 고향에 돌아와서 생을 마감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는 기자가 조선의 왕으로 군림하다가 그 자리를 누군가에게 넘겨주고 양위(讓位)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자는 왕위를 누구에게 양위하였을까? 은말주초(殷末周初) 시절에 기자는 나이가 50대 중반이었으므로 양위했을 시점은 60대나 70대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들은 물론 손자에게도 양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접근은 부자상속제 기준에서 본 일반적인 왕위계승방식이다. 설령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직계후손에게 왕 자리를 넘겨주고 후손을 먼 곳에 남겨둔 채 본인만 홀연 단신 귀향한다는 것은 모양새가 이상하다.
현자(賢者)로 널리 칭송받는 기자가 “이제 이곳에서 내 할 일은 다 끝났으니”라고 하면서 고조선 계열의 왕족에게 선양(禪讓)하고 왕위를 퇴위할 수도 있다. 아니면 기자가 주나라 무왕으로부터 조선왕으로 봉해졌다는 뜻이 주 무왕으로부터 지방관 개념으로 파견되었다는 뜻으로 간주 될 수도 있다. 주 무왕이 새로운 왕 (제후로 볼 수도 있고 지방관으로 볼 수도 있음)을 파견하니 기자가 근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복귀하였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기자의 귀향으로 인해 기자조선에 대한 접근이 무척 어려워졌다고 본다. ① 기자가 만약 고조선 계열의 왕족에게 선양하였다면 기자의 귀향으로 인해 단군조선은 부활했다고 보아야 한다. ② 기자가 자신의 후손에게 양위하였다면 기자의 귀향과 상관없이 기자조선은 존속하게 되는 것이고 ③ 주나라에서 새로운 사람을 보내 기자가 귀향하게 되었다면 고조선은 단군조선도 기자조선도 아닌 주나라의 한 부분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기』〈송미자세가〉에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지만 그를 신하의 신분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사기』의 이런 기록은 조선이 주나라 무왕의 지배를 받는 제후국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나라의 제후국 이름을 보면 한결같이 진·한·위·노·제·송·채 같은 단명(單名)인 반면 조선(朝鮮)은 복명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자기 영역 밖의 종족이나 나라에 대해서는 조선, 선우, 중산, 흉노, 선비, 오환의 명칭에서 보듯이 복명을 썼다.
이런 맥락에서 주나라는 기자조선을 외국에 있는 나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기자와 관련된 기록을 『기자세가』가 아니라 『송미자세가』에서 아주 자세하게 담았다. 만약 기자조선을 중국의 역사로 쳤다면 『기자세가(箕子世家)』라 해서 별도의 꼭지로 처리했을 것이다. 따라서 가설 ③ 은 후보군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본다.
(4) 우리나라의 사서인 『삼국유사』나 『제왕운기』 그리고 기자조선(1편)에서 언급된 대부분의 중국 사서에서는 기자가 고조선의 왕이었다고만 묘사한다. 사서에서는 기자가 고조선 영역의 전체를 통치했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기자가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뜻 자체가 고조선의 모든 영역을 내포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고 본다. 이와 아울러 기자가 고조선의 옛 영역 일부를 단군에게 때어주었다는 기록도 없고 기자가 고조선의 일부 영역만 통치하였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전편인 《고조선의 기원과 왕조 구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할 경우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공존은 가능해지고 ‘기자의 고향 복귀’를 근거로 단군조선의 부활 내지는 복원이라는 가능성도 열려 있다.
단재 신채호는 자신의 3 조선說에서 大단군인 진한이 중앙의 진조선을 다스렸고 副단군인 마한과 변한이 각각 변방인 막조선과 번조선을 다스렸다고 했다. 막조선의 영역은 만주 남부와 한반도이며 번조선의 영역은 난하 일대에서 요동까지 그리고 진조선은 하얼빈을 포함한 북만주 일대라고 했다. 신채호는 기자조선을 번조선의 왕조로 보았으며 위만조선 역시 기자조선을 잇는 번조선의 한 왕조로 보았다. 신채호의 3 조선설은 『환단고기』의 3한관경제(三韓管境制)와 거의 같은 개념이다.
그렇다면 『환단고기』에서는 기자조선을 어떻게 보았을까? 『환단고기』에서는 기자란 인물이 역사 속에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이미 그 시절에 고조선은 은나라나 주나라로부터 조공과 신년인사를 받는 형님의 나라로 통하는 상국(上國) 이었다. 고조선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제일 강한 나라였는데 기자가 어떻게 주나라 무왕의 책봉을 받아 고조선의 왕이 될 수 있었겠는가? 다만 기자의 35대손인 기후(箕詡)라는 인물이 고조선의 제후로 등장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부분은 후술하기로 한다.
기자가 조선왕으로 봉해졌다는 BC1046년 무렵의 고조선 강역과 관련해 현재까지 우리에게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다. 주류사학 입장에서 고조선은 이 시기에 와서야 겨우 국가라는 것이 성립하는 단계이다. 만약 고조선의 도읍지가 오늘날 대동강 평양시 일대로 추정된다고 하면 그 시기의 고조선의 강역은 넓어봤자 평안도 지역에 국한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만약 기자가 고조선 영역 전체를 통치하였다고 한다면 기자가 배를 타고 서해를 넘어와 평안도 지역을 지배했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부터 3000년 전에 기자가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선박을 이용해 서해안을 건너 대동강 쪽으로 넘어온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기자가 고조선의 전체 지역이라고 비정할 수 있는 평안도 지역을 다스렸다는 말은 평안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오늘날의 하북성과 요녕성 지역도 함께 다스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도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BC11세기에 기자가 고조선을 다스렸다면 고조선의 위치는 한반도에 있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기자가 출발했다고 전해지는 고향이란 지역 혹은 주나라의 도읍지인 호경으로부터 한반도가 너무 멀기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고향인 산동성과 하남성의 접경지 부근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지는데 기자가 목적지로 삼은 곳 중 가장 적절한 지역은 오늘날의 하북성 자리이며 요녕성을 벗어나 요동지역에는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이제 재야사학자들의 입장을 살펴보자. 민족사학 진영은 고조선이 한반도 너머 요녕성 심양 지역에서 태동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전성기에는 한반도와 동북 3성 그리고 연해주는 물론 하북성 전체와 산서성 동북부 지역을 영역 혹은 영향권에 두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고조선의 전성기는 기자가 등장하는 BC11세기가 아닌 한참 후의 일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은말주초(殷末周初) 시기인 BC11세기에 고조선의 영역은 요녕성과 하북성 일부 그리고 한반도 북부지역에 국한해서 보는 것이 타당할 수 있으며 그 이외의 지역은 몇백 년 후에 차지한 영토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은말주초(殷末周初) 시기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지금의 금주市 일대인 대릉하나 소릉하 유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일부 견해에 의하면 고조선이 난하가 흐르는 진황도市 일대까지 진출했다고 본다.
재야사학 입장에서 추정하는 고조선의 강역을 기준으로 살펴보자면 기자조선이 차지한 고조선의 영역은 난하에서 한반도 북부지역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영역을 모두 지배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이유는 기자조선의 영역을 최대치로 보아도 영정하에서 대릉하 사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근거는 기자와 관련된 유물이 대릉하 동부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5)는 기자가 고조선의 통치자가 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으로 오늘날 학계의 일반 입장이다. 기자동래설은 삼국시대 이래 오랫동안 사실로 여겨져 왔으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많은 부분이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공자가 편찬한『상서』에는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 전혀 없는데 300여 년 후에 나온『상서대전』에 그런 내용이 느닷없이 추가되었다는 것은 의심이 갈만한 사안이다. 『상서대전』이 나온 시기가 한나라 시절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자가 조선의 통치자가 되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면 공자가 『상서』에 기록을 안 했을 리가 만무하다. 기자의 동쪽 이동과 관련하여 『상서』에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기자가 설령 동쪽으로 갔을지언정 도착한 곳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기자가 고조선의 통치자가 되지 않았다는 학설은 다음과 같이 3가지 방향으로 나누어서 접근할 수 있다.
① 첫 번째 가설은 기자가 피난민이나 망명객의 신분으로 고조선에 와서 정착했거나 일시 체류한 것은 사실이나 통치자의 신분은 아니었다.
② 두 번째 가설은 기자가 피난민이나 망명객의 신분으로 동북쪽으로 옮겨간 것은 사실이나 고조선 영역에는 이르지 못했고 고조선 인근에 작은 나라를 설립하였을 뿐이다.
③ 마지막 세 번째 가설은 기자는 동북쪽으로 이동하지 않고 계속 고향에서 살다 생을 마감하였다.
①가설은 기존 학설의 절충안이다. 기자가 고조선에 간 것은 맞지만 한편으론 통치자가 아닌 망명객 신분으로 체류하였다는 내용이다. 기자는 주나라 무왕이 싫어서 무작정 피난을 갔는데 가다 보니 고조선에 이르렀고 자신의 명성 덕택에 단군조선(= 군주)의 신임을 받아 그곳에서 왕을 보좌하며 머무르다가 노년에 이르러 고향으로 귀환하였다는 내용으로 가장 무난한 가설이다.
②가설은 기자가 고조선 인근 지역에 작은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가설을 지지하는 분이 윤내현 교수이다. 尹교수의 주장을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尹교수는 기자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난하 서부 연안에 정착해 기자국 (箕子國)을 세웠다고 보았다. 수백 년 후인 진한(秦漢)교체기에 중국 세력이 난하 서안을 차지하자 기자국은 고조선의 영내인 난하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 지역이 낙랑군 조선현 혹은 수성현으로 불리는 고조선 서부 변경 지역이다. BC195년 위만이 패수를 넘어 준왕에게 투항하고 얼마 안 있어 준왕의 영토를 점령하여 그곳에 위만조선을 세우는데 여기서 위만이 정복한 나라는 고조선이 아니라 고조선의 서남변 국경 영내에 있던 고조선의 작은 제후국이었던 기자국이다. 준왕은 기자의 40대손인 기준(箕準)이다.
이것과 유사한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 『환단고기』가 전하는 내용이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고조선은 단군왕검 시절부터 나라를 3등 분하여 만주 일대인 진조선은 단군이 직접통치하고 막조선인 한반도 지역과 번조선인 지금의 하북성 일대는 副단군을 두어 관리토록 하였다. 이것을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라고 한다. 진조선의 단군 입장에서 보면 막조선과 번조선은 진조선의 커다란 제후국인 셈이다.
『환단고기』에서 묘사한 기자 후손 관련 내용을 잠시 언급해보자. BC339년에 번조선은 연나라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몰리게 되는데 수유(須臾)지역 출신인 ‘기후(箕詡)’라는 인물이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등장하여 주력군인 진조선 지원군과 함께 연나라의 침략을 격퇴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다. 여기서 수유(須臾)라는 지역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보자. 『환단고기』에 의하면 은나라가 망하자 기자의 일족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번조선의 서쪽인 북경과 하북성 난하 일대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우니 나라 이름이 수유국(須臾國)이다. 수유국은 후에 번조선에 흡수되어 단군조선의 작은 제후국이 되었다. 따라서 수유는 기자의 후예가 세운 나라로 추정할 수 있다. 尹교수의 기자국과 명칭만 다르지 같은 나라라고 볼 수 있다.
BC323년에 번조선의 왕인 ‘수한’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기자의 35대 후손인 기후란 인물이 정변을 일으켜 번조선 궁을 장악한 후 진조선 단군의 윤허를 받아 번조선의 왕위에 오르고 그 지위가 기후(箕詡, BC323) → 기욱(箕煜, BC315) → 기석(箕釋, BC290) → 기윤(箕潤, BC251) → 기비(箕丕, BC232) → 기준(箕準, BC221~BC194) 이렇게 6대에 걸쳐 번조선의 마지막 왕이라는 기준(= 준왕)에게까지 이어진다. 『환단고기』의 내용은 기자의 먼 후손이 고조선을 구성하는 세 나라 중 하나인 번조선의 왕이 된다는 내용이다.
③가설을 살펴보자. 기자는 은말주초(殷末周初)기에 특별한 이동 없이 고향에서 계속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는 내용이다. 공자의 『상서』에는 기자에 관한 기사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기자동래설에 관한 내용은 없다. 대신 주나라 무왕 13년에 무왕이 기자를 방문해 정치에 관해 질문하자 기자가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상세히 강론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참고로 ‘홍범구주’는 천하를 다스리는 정도(正道)와 묘법(妙法)이 기록된 문서로서 주역에도 없는 매우 심오한 철리를 토대로 확립된 정치지침서다. 따라서 홍범(洪範)이 유교의 철학과 정치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아무튼 주 무왕이 재위 13년에 기자를 방문했다면 주 무왕 원년에 기자를 조선 왕으로 봉했다는 기자동래설은 성립될 수 없다. 『죽서기년』에는‘무왕 16년 기자가 조정에 들었다’는 기록이 적혀 있어 기자가 주 왕실과 내왕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시』<외전 3권 무 왕조> 에는 기자가 서주(西周, BC1046 ~ BC 771) 영역 내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상서대전』이전의 중국 선진문헌(先秦文獻)에서는 기자동래설이 전혀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자가 주나라 왕실과 지속적인 내왕이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기자가 주 무왕으로부터 인근 지역의 봉지를 하사받고 그 지역에 기국(箕國)이란 제후국을 세워 제후로 그곳에서 평생 살았다고 본 것이다. 기자는 조선에 간 것이 아니라 주나라 땅에 속하는 기국(箕國)의 제후로 살다가 그곳에서 여생을 마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환단고기』에서는 기자가 상나라가 망한 후 인사를 사절하고 서화에서 조용히 살다 생을 마감했다고 했으며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은 기자라는 명칭은 '기(箕)'국 이라는 봉지를 받은 제후의 명칭일 뿐이고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해 왔다는 것은 후대에 조작된 전설이라고 보았다.
김종서 박사의 주장도 ③에 해당하나 접근이 좀 다르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전한 시대의 문헌을 다음과 같이 접근한다. 주 무왕이 기자를 회유할 목적으로 '조선'이라는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한 것은 사실이고 기자가 그곳에 간 것도 맞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지역은 단군조선의 영역을 의미하지 않고 기자의 고향 지역인 하남성 일대를 말한다. 여기서 조선이라는 지명은 황하 이남에 존재하였다. 그런 까닭에 기자가 단군조선을 멸하고 그곳에 기자조선이란 왕조를 세운 것이 아니고 조선이라고 불리는 하남성의 한 지역에서 기국(箕國)의 제후로 평생을 살았을 뿐이다.
김종서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기자가 조선(朝鮮)에 가 왕이 되었다는 내용을 전하는 최초의 문헌은 『상서대전』과 『사기』<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조선(朝鮮)이란 지역은 단군조선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기자의 고향인 하남성 상구市 서쪽에 있는 몽현(蒙縣)이란 지역이다. 조선(朝鮮)이란 지역을 단군조선의 영역과 결부시킨 최초의 문헌은 후한 시기의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지리지>이다. 단군조선과 연결된 기자동래설의 최초의 문헌은 바로 『한서』이며 반고는 조선이란 지역을 하남성에서 고조선 영역으로 임의로 바꿔치기하여 역사를 날조한 것이다.
『상서대전』과 『사기』<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서는 은나라가 망한 후 기자가 조선으로 떠났다고 기록하였는데 『한서』에서는 은나라 주왕(紂王)의 폭정이 심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떠났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서경』은 물론『상서대전』과 『사기』에 기자가 조선을 교화하였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데 『한서』에 느닷없이 기자가 미개한 조선을 개화시켰다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볼 때 반고의 기록은 자기 마음대로 역사를 날조한 것이 틀림없다고 본다.
(6) 상기 (2)에서 (5)까지의 접근으로는 기자조선에 대한 규명이 어려우니 새로운 판을 짜서(?) 처음부터 다시 접근을 해보자는 새로운 시각의 방법론이다.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사료보다 우선 時 되는 것이 유적과 그곳에서 출토되는 유물이다. 기자와 관련이 있다는 유물에 대해 우선 살펴보기로 하자. 1973년 요령성 대릉하 유역의 조양市 객좌현에서 기후(㠱侯)와 고죽(孤竹)으로 해석되는 상말주초(商末周初) 시기의 청동예기(靑銅禮器)가 발견되었다. 특히 객좌현 북동(北洞) 2호 유적에서 기자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후방정(㠱侯方鼎)이 발견 되어 이 유물을 근거로 기자가 상말주초에 이미 요서 지역으로 동래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그곳 유물에서 기자조선과 관련이 있다고 발견된 글자는 ‘箕’가 아니고 ‘㠱’이다. ‘㠱’가 ‘箕’로 확실히 판정이 나는 경우 그곳 유물은 기자조선과 관련이 있게 된다. 문제는 ‘㠱’자가 새겨진 청동기가 하북성과 요녕성은 물론 섬서성, 하남성, 산동성 등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고조선의 강역권 이라고 추정되는 지역인 요녕성 조양市와 내몽골 적봉市에서 출토된 유물이 기자와 관련된 유적이라고 확정하게 된다면 기자조선은 그곳에 존재하였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유적과 유물이 기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것 일 수도 있다. 예컨대 기자의 먼 후손과 관련된 내용일 수도 있고 기자나 기자 후손과는 무관한 별개의 箕氏 세력의 유적과 유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요녕성 조양市와 내몽골 적봉市에서 출토된 유물이 기자와 무관하다거나 기자 후손의 유물이라거나 아니면 기자와 관련이 없는 별개의 箕氏 세력의 것이라고 판정이 난다면 기자동래설을 역사 왜곡으로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예컨대 그 유물이 기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그 후손 혹은 기자와 관련이 없는 箕氏 세력의 것으로 판명이 나면 기자는 동쪽으로 이동하지 않은 채 평생 고향에서 살았다는 (5)③가설이 유지됨과 동시에 요녕성의 유물을 다른 시각에서 접근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학문적 동향은 기자와 관련이 없는 별개의 箕氏 세력이 존재하였다고 보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요녕성에서 출토된 유물을 기자의 후손과 연계시키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기자는 평생을 고향인 산동성과 하남성 접경 지역에서 살다 생을 마감했고 그 후손들이 주나라의 동진 정책으로 북쪽으로 떠밀려 처음에는 하북성 난하 하류에 정착하다가 점차 요녕성에 이르게 되었고 그 지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의 지배계층을 대체하거나 아니면 그들과 합쳐졌을 것이다. 기자 후손들이 새로운 정착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시조인 기자를 내세웠을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기자조선이라는 전설로 발전했을 것이다.
이런 학설은 고조선의 강역으로 인식되어 온 하북성과 요녕성 일대가 箕氏 세력의 영향권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기자 후손들의 장시간에 걸친 이런 이동 과정이 결국에는 요동 너머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학설로까지 연결되는데 이런 견해를 밝힌 이는 천관우이다. 반면 이형구 교수는 기자 후손들의 이동 과정이 요하를 넘어서지는 못했다고 본다.
글을 마치며
(1)부터 (5)까지에 관한 내용을 대략 적으로 살펴보았다. 기자가 실존 인물이었다(1)는 것 외에 나머지 (2),(3),(4),(5)에 대해서는 결론을 도출할 수가 없다. 요녕성 조양市와 내몽골 적봉市에서 기자와 관련된 유적이 출토되었다고 하니 기자의 동래(東來)를 안 믿을 수도 없고 또 한편으로는 한나라 이전의 사서에서는 기자가 고향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기자의 실제 묘라고 추정되는 곳이 고향에 있다고 하니 기자의 동래(東來)를 믿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6)이라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다.
기자동래설을 긍정해서 기자가 고조선에 왔다고 인정하더라도 그 지역은 한반도가 될 수 없다. 기자가 목적지로 삼은 곳 중 가장 적절한 지역은 현재의 북경市와 천진市가 위치한 하북성 자리라고 생각되며 요녕성 금주市를 벗어나 대릉하나 소릉하 동쪽으로 이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요동 지역과 한반도에서 기자와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 동래 시기에 고조선의 강역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자가 고조선의 통치자인 왕의 신분으로 갔다면 그곳은 분명 고조선 땅에 간 것이고 그곳은 하북성 일대가 유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자동래설은 은말주초(殷末周初) 시기인 BC11세기의 고조선 서남쪽 경계가 북경市와 천진市시 남쪽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기자가 만약 좀 더 멀리 가서 진황도市와 호로도市 근처에 치소를 두고 나라를 다스렸다면 고조선의 서남변 경계가 난하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기자동래설을 긍정할 경우 3000년 전 기자의 행동반경을 근거로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어디인지를 유추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되는데 주류사학 입장인 고조선의 한반도 존재說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주류사학 입장에서는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는다) 기자가 다스렸다는 고조선의 영역이 오늘날 천진市-북경市-안산市-진황도市-호로도市-금주市 일대의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곳은 고조선 영토의 서쪽 부분에 불과하다. 고조선의 주된 터전은 요하 동쪽인 요동반도 지역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기자와 관련된 유적/유물이 발굴되지 않고 있다. 이를 근거로 기자가 고조선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지 못하였다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그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현자로 고향에서 살다간 기자라는 인물이 기자동래설로 말미암아 기자는 중국보다 한국에서 더 유명한 인물로 부각 되었고 유교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공자만큼 칭송을 받으면서 우리나라 역사책 곳곳에 시대별로 등장한다. 만약 기자동래설이 한나라 시기에 만들어낸 역사조작이라면 우리 조상들이 속아 살아온 것에 대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