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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송파스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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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삶을찾아서(전공) 스크랩 생태적 삶을 찾아서 요점정리 종합 (내용이 많음)
김추경(10기) 추천 0 조회 107 17.03.24 00: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출처-문화교양과 잠실스터디

생태자료 모음|생태적삶을찾아서(전공)

정계란(09서울) | 조회 191 |추천 0 |2011.05.06. 00:09

http://cafe.daum.net/aonestudy/RHwD/3

생태자료를 올립니다. 보충자료로 사용하셔요.

(1)첨부파일 생태단원요약.hwp (2)첨부파일 생태적삶을찾아서(종합).hwp

(3)첨부파일 생태적삶을찾아서[1]짧은것.hwp


첨부- ① 편집 -생태적삶을찾아서(종합).hwp



생태적 삶을 찾아서 1. 생태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요즈음 우리사회에서 유행하는 용어 중의 하나가 웰빙이다. 웰빙이란 단어에서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은 농약을 치지 않은 좋은 음식을 먹고,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적은 집에서 살고,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적당한 운동을 하면서 사는 삶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삶에 대한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웰빙은 자기자신이 중심이다. 다시 말하면 웰빙은 그 웰빙의 주체인 자기자신 또는 자기주변의 가까운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 자기 주위의 동네 사람, 같은나라 사람, 더 나아가서는 인류를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시장에서 유기농 식품을 사먹고, 휘발성 유기물질이 제거된 집에서 살고, 집에는 방마다 공기정화기를 달고, 헬스클럽에 가서 적당한 운동을 하는 삶, 그 삶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이고,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능력만 있으면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웰빙은 타인, 더 나아가서는 다른 생물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어찌 되든, 다른 생물은 곤경에 처하든 말든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자기가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을 수만 있으면 되고, 황토를 바른 건강주택에서 살 수 있으면 그만이고, 바깥 공기가 조금 오염되었더라도 방에다 공기정화기를 달고 살 수만 있다면, 그리고 가끔 맑은 공기를 쐬러 국내외의 산이나 바다로 나들이를 갈 수 있다면 그런대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웰빙이라고 생각하고, 각종 매체에서 이러한 생각을 사람들에게 퍼뜨리고 있는 형편이다.


어찌보면 웰빙은 생태적인 것과 연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기농과 황토와 정화된 공기가 모두 생태적인 생활과 분리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가 아니라 산골에 사는 사람은 생활방식에 조금만 신경쓰면 이런 것들을 어렵지 않게 향유할 수 있다. 산골에 사는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생태적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웰빙을 추구하는 삶 또는 웰빙하는 삶을 생태적인 삶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생태적이라는 것은 자연속의 유기적인 연결망을 고려하는 것이다. 지구생태계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의 연관관계를 따지고 이 연관에 의한 연결을 가능한 한 파괴하지 않으려는 것이 생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생태적인 삶을 산다고 한다면 그는 고립된 한 인간이 아니라 넓은 연결망 속의 인간으로서 각종 생태적 연관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산골에서 유기농을 하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이 생태적인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그 삶이 바로 이러한 연결망 속에 어느정도 조화롭게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웰빙적인 삶은 고립적인 것이다. 지구 생태계의 다른 존재들과 조화를 이루며 연결망을 구성한다고 보기 어렵다. 웰빙을 사는 사람에게 유기농 식품은 유기농 식품이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중국에서 온 것이든 미국에서 온 것이든 브라질에서 온 것이든 상관이 없다. 그가 쇠고기를 좋아하는데 진정으로 유기농 쇠고기를 먹고 싶으면서 웰빙의 삶을 살고 싶다면, 예를 들어서 브라질의 넓은 목장에서 깨끗한 풀만 가지고 생산했다고 선전하는 쇠고기를 찾아 먹으면 된다. 이 좋은 쇠고기는 비좁은 축사에서 살만 찌우는 사료만 먹고 자란 소의 고기와는 맛과 영양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식품이 바로 웰빙적인 삶에 적합한 것이다. 그렇지만 브라질에서 수입된 이 쇠고기는 아마존강 유역의 거대한 삼림을 파괴하고 건설된 목장에서 나온 것이다.

1990년까지 브라질에서 생산된 쇠고기는 브라질 자체의 쇠고기 소비를 충족시킬 정도였다. 그후 브라질에서는 소의 숫자가 5천만 마리로 늘어났고, 세계 최대의 쇠고기 수출국이 되었다. 브라질이 이렇게 최대 쇠고기 수출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존의 일부가 목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2004년 아마존의 26,000제곱킬로미터나 되는 삼림이 대부분 목장조성을 위해 불태워졌다. 남한 면적의 4분의 1도 더되는 땅이다. 2005년에는 더 많은 땅이 불태워졌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사정이라면 맛좋고 영양만점의 유기농 수입 쇠고기를 먹는 웰빙이 생태적인 것은 결코 될 수 없고 오히려 반생태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


중국이나 미국에서 온 다른 유기농산물을 먹는 것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생태적인 것이라 하기 어렵다. 그곳의 유기농이란 것이 진정 생태적인 방식으로 수행되는 것인지도 의문이고 농산물이 수입될 때 수송을 위해 많은 양의 석유가 소비되면서 생태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석유는 타는 동안 대기로 오염물질을 방출하고 사고가 나면 바다를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전쟁 같은 국제적인 분쟁을 조장하기까지 한다. 웰빙을 위해 집안에 들여놓은 공기청정기도 조금만 따져보면 생태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상당한 양의 전기를 사용하는데, 이 전기는 석탄을 태우거나 원자력발전을 통해서 생산된 것이다. 이때 생태계가 훼손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웰빙을 그 자체로서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쾌적한 삶을 영위하려는 욕구는 인간의 본능에 속하는 것이고, 누구나 이러한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웰빙이 환경친화적이고 더 나아가서 생태적인 것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생태계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파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자기만 쾌적하고 건강하면 된다는 웰빙의 핵심생각이 더 많은 삼림을 파괴하고 더 많은 석유를 소비하게 함으로써 전체 생태계에는 큰 손상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웰빙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경제능력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는 것은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우리가 처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별히 웰빙을 생각하지 않아도 우리가 농약으로 오염된 식품을 먹지 않고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 수만 있다면 웰빙에 대해 사회 전체가 크게 떠드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진정한 웰빙이란 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삶이 바로 생태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생태적인 삶이란 한마디로 지구생태계를 생각하면서 사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이 삶은 자기자신도 생각하지만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삶이 지구생태계 속의 연관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그 속에서 어느정도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갈 때가 가장 제대로 된 삶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삶이란 무릇 자기존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자기자신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게는 자기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살아가는 것이 일차적인 중요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연결망 속의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연결망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이 연결망이 가족과 친지 정도만을 포함하는 아주 좁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이 지구생태계까지 나아가는 아주 넓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은 자신이 작든 크든 연결망 속에서 있음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웰빙적인 삶은 이 연결망을 상당히 좁게 본다. 자기 가족과 친지 정도의 연결망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아마존의 삼림이 파괴되는 일이나 석유가 고갈되고 전지구적인 기후변화가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반면에 생태적인 삶에서의 연결망은 지구 생태계 전체이다. 이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조금이라도 지구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그는 유기농 식품을 먹지만 이 식품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산된 것인지를 생각한다. 쇠고기를 먹는 것이 산업축산을 조장하고 아마존을 파괴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는 쇠고기 먹는 것을 중단하려 한다. 육고기 먹는 것 자체가 생태계에 좋지 않다면 그는 가능한 한 채식을 하려 한다. 석유 같은 에너지 소비가 기후변화와 세계적인 분쟁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에너지 소비를 가능한 한 줄이고 기후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재생가능 에너지 생산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같은 시대에 사는 다른 사람들(동시대인), 자기가 죽은 다음에 살게 될 사람들(후손), 그리고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이들이 자신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이들과 가능한 한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려 한다. 바로 이러한 삶이 생태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2.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생태적인 삶

 

우리사회에서 양극화는 보편적인 용어가 되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을 만큼 양극화는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양극화란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격차가 아주 심하게 벌어진다는 것이다. 10여년 몇몇 식자들과 정부 관계자들이 세계화나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그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정부에서 세계화에 대해서 정의를 내려주는 이상한 일도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 낯선 말이었지만 지금 세계화는 물론이고 신자유주의까지도 꽤 널리 쓰이는 용어가 되었다. 바로 양극화 현상 때문이다. 사람들이 양극화를 피부 깊숙이 실감하고 있고, 그것이 언론과 식자들의 입으로부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과라는 말을 듣게 됨에 따라 어느정도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때는 1998년이다. 이때 우리사회에는 금융위기로 인한 경제공황 상태에서 IMF(국제금융기구)의 지시에 따라 대대적인 경제구조 변화가 일어났다. 이 변화를 통해 IMF가 의도했던 것은 한국의 시장을 전지구의 시장에 통합시키겠다는 것이었다. IMF의 지시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정부가 공사형태로 운영하거나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장악하고 있던 금융기관이나 공사를 민영화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여러 금융기관이 민간 또는 해외자본에 매각되었고, 정부산하의 여러 공사들도 민영화되었다. 물론 민영화에 대한 반발도 많았다. 가장 큰 것은 한국전력의 민영화에 대한 전력노조의 저항이었다. 민영화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노조의 노조원들은 2003년 거의 두달에 걸쳐서 대대적인 파업을 벌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양극화는 분명히 보이는 현상이다. 노숙자와 개인파산이 늘어나고 많은 중소기업이 쓰러지고 생활고로 인한 자살이 늘어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서울 강남의 타워팰리스 같은 호화아파트, 고가아파트가 늘어나고 그 소유가 소수의 부유층에게 집중되는 일이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많이 가진자들은 점점 더 많은 것을 갖게 되고, 없는 자들은 가지고 있던 것까지 조금씩 잃어가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물론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없는 자들의 상황이 아주 나쁜 것은 아니다. 40년전의 1960년대와 비교할 때 지금 노숙자들의 삶이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보다 더 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사람들이 대부분 가난했고, 그 가난을 대다수가 현실로 받아들이고 살아갔다. 대다수가 가난했기 때문에 소위 양극화는 없었다. 가난한대로 삶의 애환을 가지고 살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체인구 10-20%의 부자와 가난한자의 빈부격차가 너무 크고 이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에, 양극화가 우리사회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로 되었다.


우리사회에서 양극화가 이렇게 심해진 이유는 한마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때문이다. 1990년대 초 냉전이 끝난 후 거의 모든 국가가 자본주의 단일시장체제로 편입되고 국가간 경계를 넘어 상품이 전세계에서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도록 하자는 신자유주의가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는 전세계적 경쟁이 격화되었고, 탈락자들은 가차없이 도태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에 실업의 증가, 비정규직의 증가, 등이 일어났다.


이제 우리는 전지구적 시장이 전부라고 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서 생태적인 삶이란 무엇일까? 라는 물음을 던져야 할 때가 되었다. 무엇일까에 앞서서 생태적인 삶이 가능할까?라는 물음부터 던져야 할지 모른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체제는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긴다. 자본이 아무런 외부의 제재를 받지 않고 시장 속에서 자기확대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자본은 자기 속성상 다른 것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증식만을 꾀한다. 자기증식의 자원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동원한다.


그것이 자연자원이든, 아름다운 경관이든, 전통문화든, 인간 자체든 상관없다. 돈만 가져올 수 있다면 무엇이든 동원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은 장기간에 걸친 확대에 대해서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50100년이란 시간표는 자본에게는 아주 낯선 것이다. 3, 5, 길어야 10, 15년 정도가 자본의 시간표이다. 이 기간동안 많은 이윤을 남기고 크게 자기확대를 하는 것이 자본의 목표이지, 50년 후나 100년 후에도 살아남아서 조금씩 이윤을 남기면서 살아가는 것을 자본은 생각하지 않는다.


자본이 50100년 뒤를 생각하지 않고 단기간의 이윤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환경파괴와 직결된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멀리 가지 않고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만 가지고도 그렇다는 것은 금방 확인할 수 있다. 골프장 건설과 각종 건축공사가 바로 그것이다. 삼림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면서 수십수백개의 골프장을 건설하고, 숲과 농격지를 파괴하면서 아파트와 도로를 건설하는 것은 자본이 단기간의 이윤에 집착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정치적인 계산이 깊이 개입된 것이고 정부가 수행하는 것이지만 새만금 간척사업도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골프장이 어째서 단기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것인지 살펴보자. 골프장은 건설하고나면 바로 돈이 들어온다. 손해가 나더라도 한국의 상황에서는 10여년 후 개발붐이 일어나면 그 땅에 다른 건물을 건설해서라도 이윤을 남길 수 있다. 그런데 골프장이 들어서기 전 산에 울창한 숲이 있었다면, 그 숲을 만드는 데는 5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는 골프장을 다시 그 전의 숲으로 돌리려면 50년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림은 돈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다양한 기능을 한다. 물을 품는 녹색댐으로서의 기능, 공기정화의 기능, 생태계의 생물 다양성유지의 기능, 사람들에게 주는 심리적인 안정감, 삼림욕, 심리치료의 기능 등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계산이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잘 관리하기만 하면 작지만 아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금전적인 이익을 가져다준다. 산림경제를 잘 영위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데 이 돈은 오랫동안 쌓이면 아주 크지만 당장 보기에는 액수가 적다. 골프장에서 짧은 기간동안 들어오는 돈보다 훨씬 적은 것이다.


자본이 누구나 자기증식의 자원으로 동원한다는 것은 생명공학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황우석 사태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황우석 교수의 체세포 배아복제가 한창 찬양받을 때 많이 나온 이야기는 그 기술이 수십조 이상의 아주 많은 돈을 벌어다 준다는 것이었다. 자본이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는 기술인데, 그런데 이 기술은 인간의 난자라는 원료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도 자본은 아무 상관없이 난자를 이용하는데, 이는 자본이 자기증식 원료가 어떤 것인가를 구분을 짓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세계자본주의의 속성은 생태계를 고려하지 않는다. 생태적인 삶도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자원으로 동원하기 때문에 생태계 파괴는 전보다 더욱 빠르게 진행된다. 전에는 국지적으로 환경파괴가 심각하게 일어났지만 지금은 전지구적으로 생태계 파괴가 진행되고 있고, 이는 전지구차원에서 국지적인 환경파괴보다 훨씬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시기에 생태적인 삶은 가능한 것인가? 어떤 것인가? 예전, 수십년 전 인도의 보팔에서 화학공장이 폭발하고, 체르노빌에서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고, 우리나라의 온산공단 같은 공단지역이 환경오염으로 찌들어 사람살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다르다. 국지적으로 보면 지금은 사정이 훨씬 나은 경우가 많다.


지금은 대형 폭발사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공단지역의 환경오염도도 아주 좋아졌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환경이 좋아졌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지구 차원에서 생태계는 수십년전과 비교해서 크게 나빠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와 원시림 파괴와 사막의 계속된 팽창이다. 지구온난화는 수십년전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아마존 유역 등의 삼림은 계속해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고, 사막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그렇다면 현 시점,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의 생태적인 삶이란 이 시대의 속성에 대한 인식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다시말하면 전지구의 생태계를 파탄으로 몰고가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바꾸려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 노력은 단순하게 대중교통을 타고, 자전거를 즐겨타고, 지역에서 생산된 유기농 식품을 먹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생태적인 삶으로 연결될 수 있으려면 신자유주의 세계 자본주의의 속성에 대한 이해라는 바탕 위에서 그러한 실천이 바로 이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작은 몸짓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단순하게 오염이 싫고 자동차가 싫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인식만 가지고는 궁극적으로 지구생태계를 살리기는 어렵다. 민영화를 찬성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 노숙자나 양극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3강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지구온난화가 아직도 인간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들도 지구의 평균기온이 상승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까지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그들을 거론할 이유도 없다. 어느 누구도 그들의 말을 믿지 않을 터이니 애야기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150년 전부터 기상관측소에서 측정된 데이터들을 이들도 부정할 수는 없다. 지난 10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지구 평균기온은 거의 1도 가량 올라갔다. 상승속도는 시간이 갈수록, 최근에 올수록 빨라지고 있다.


지난 1000년 이래 지구평균기온이 최고를 기록한 연도는 계속 갱신되고 있다. 지역적으로, 계절적으로 기온이 이상하게 춤추는 일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2003년 여름에 유럽에서는 3주 이상 지속된 이상고온으로 수만명이 사망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남태평양의 섬나라 투발루는 기후변화로 상승하는 해수면 때문에 나라 전체가 물에 잠길 위험에 처해 있다. 투발루 정부로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위험을 돌파할 방도가 없다. 그래서 급기야는 전 국민을 이웃 여러 나라로 분산해서 이민을 보내기로 했고, 해마다 뉴질랜드, 통가,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 국민들이 이사가고 있다.

 

2005년부터는 기후변화가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왔다는 경고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이 지점을 넘으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가 닥치는 소위 한계점(tipping point) 가까이 도달했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한탄의 소리도 들린다. 미래에 대한 어두운 그림이 자꾸 모습을 드러내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후변화가 인간 때문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은 어떤 근거로 그러는 것인가? 이들은 기후변화는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기후란 원래 변동이 잦은 것인데, 100년간 기껏해야 1도도 채 안되는 기온상승 가지고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냐는 것이다.


지구의 절반이 빙하로 덮인 적도 있고, 시베리아나 몽골에서 공룡이나 대형 코끼리뼈가 서식할 정도로 더웠던 적이 있듯이 지구 기온이란 원래 변동이 심하다는 것이 이들이 내세우는 기후변화 자연발생설의 근거이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전세계에서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 소수의 다수가 한국에 몰려있는 것 같다. 기후변화 이야기만 나오면 그거 과학적으로 근거있는 이야기냐는 점잖은 반응부터, 미국 같은 나라도 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했으니 미국을 믿어야 하지 않겠냐는 미국맹신 반응, 그리고 기후변화 담론이란 것이 한국같은 후발 산업국을 내리누르기 위한 도구라는 꽤 그럴듯한 음모론까지 기후변화를 무시하려는 다양한 설()들이 튀어나오는 곳이 한국이다. 혹자는 전세계의 개미가 내뿜는 메탄이 인간이 내놓는 온실가스보다 더 많다는, 과학적으로 들리는 주장도 한다.

 

전세계의 개미를 다 합하면 그 무게나 부피가 전세계 인간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개미 연구자들의 정설이다. 개미는 지구상에 아주 오래 전에 등장해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번식한 대단히 생명력이 강한 동물이다. 그런데 개미가 모두 온실가스를 뿜어대는 것은 아니다. 개미라고 이름붙여진 것 중에서 메탄이라는 온실가스를 내놓는 개미는 흰개미이다. (그런데 흰개미는 사실 개미 종에 속하지 않는다!) 흰개미는 소와 마찬가지로 온갖 종류의 셀룰로즈를 먹어치워 소화시키는 과정에서 메탄가스를 내뿜기 때문이다. 하지만 흰개미는 전체 개미와 비교하면 무시할 만큼 적다.

 

기후변화 자연발생설자들이 내놓는 근거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것은 태양활동 변화론이다. 태양의 활동이 활발하면 지구 기온이 올라가고 주춤하면 당연히 기온이 떨어진다. 그런데 지금이 바로 태양 활동이 활발한 시기라는 것이 그들의 기후변화 자연발생설의 유력한 논거이다. 기후변화가 태양의 활동과 같은 자연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면 기후변화를 억제하기 위한 노력이 무의미해진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자연발생설자들의 주장이 정말 타당하다면 태양의 활동이 계속 활발해져야 하고, 그 활동이 장기간에 걸친 관측과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기후학자들은 태양활동 변화론의 타당성을 약간 인정할 뿐이다. 기후학자들이 지난 100여년 간의 지구평균기온이 어떤 영향에 의해서 상승한 것인지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연구한 바에 따르면, 태양활동의 영향이 약 30%, 인간활동의 영향이 약 70%쯤 되는 것으로 나왔다. 최근의 기온상승에 태양의 활동과 같은 자연적인 현상이 미치는 영향보다 인간이 내뿜는 온실가스의 영향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기후변화의 원인이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근거를 찾아다니는 대신 인간이 내놓는 이산화탄소가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과장되었다는 주장을 펴는 부류가 있다. <회의적 환경주의자>라는 책을 쓴 비요른 롬보르가 대표격인데, 그는 중요한 것은 인간이 배출하는 이산화탄소가 지구기온에 영향을 미치는가 여부가 아니라 인간이 배출하는 이산화탄소가 지구 기온에 과연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기후변화의 주요 원인이 인간의 활동이라는 것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엄청난 돈을 들이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후변화가 인간의 활동에 의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화석연료를 가지고 사업하는 기업체들이다. 특히 세계 최대의 석유자본 엑손-모빌은 화석연료 사용이 기후변화를 유발한다는 견해를 상당히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최근에는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대해서 인정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1999년의 연례보고서에서는 기후변화의 결과를 보여주는 시나리오가 사변적인 가정과 증명되지 않은 모델에 의한 것라고 비난하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현재의 과학적 이해가 화석연료의 강제적 사용제한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엑손모빌은 그러므로 기후변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연구가 아직 더욱 많이 쌓여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결국 복잡한 기후변화 현상을 인간의 활동에 의한 것으로 돌리기는 아직 시기상조이고, 따라서 화석연료 사용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 때이른 것이라는 점이 엑손모빌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이는 석유를 많이 팔아야 하는 기업으로서는 최선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기후변화를 부정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인간이 기후변화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정하면 화석연료 사용을 줄여야 한다는 환경단체의 손을 들어주는 셈이 되기 때문에 기업활동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후변화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아직 더 많은 연구를 해서 충분한 이해가 가능할 때에 대응방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들이 사업할 수 있는 기간을 가능한 한 늘리려 하는 것이다. 엑손모빌은 당연히 기후변화에 관한 교토의정서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아주 복잡한 기후변화를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해결하려는 시도가 너무 단순하다는 것이다.

 

기후변화가 인간의 활동에 의한 것이라는 이론에 대한 비판이 아무리 끈질기게 전개된다 하더라도, 국제연합의 기치아래 모인 전세계의 많은 기상학자들은 인간의 활동이 기후변화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해가 갈수록 강조하고 있다. 국제연합 기구 중에 IPCC(기후변화 정부간패널)이라는 기구가 있다. 1988년에 유엔환경기구와 기상기구에서 설립한 이 기구에서는 몇 년에 한번씩 기후 자료를 종합하여 기후변화에 관한 진단을 내린다. 이 기구의 1996년 보고서에는 여러 증거를 검토했을 때 인간의 활동이 지구 기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분명하다고 나와 있는데, 5년 후인 2001년 보고서에는 지난 50년 동안 관찰된 지구온난화 현상 대부분은 인간의 활동에 의한 것으로 간주된다라고 더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전세계 대부분의 기상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엑슨모빌 같은 석유자본과 소수의 기후학자들의 주장을 믿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단순하게 1860대 이후의 세계 평균기온의 변화와 이산화탄소 농도의 변화를 비교해 봐도 기후변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인간이 화석연료를 사용하기 시작한 1860년대부터 대기중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계속 증가하고 있고, 평균기온도 계속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150년 이상 이산화탄소 농도와 지구평균기온이 지속적으로 증가한 적이 없다.

 

150년 전 대기중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약 280ppm이었다. 100만개의 공기알갱이 중에서 280개가 이산화탄소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2000년에는 이 알갱이의 수가 370개로 증가했다. 32% 이상 증가한 것이다. 2005년 말에는 380ppm으로 증가했다. 그동안 지구평균 기온은 약 섭씨 0.6도 상승했다. 이산화탄소의 농도만 증가한 것이 아니다. 다른 온실가스도 크게 증가했는데, 이산화탄소보다 23배나 강한 온실가스인 메탄은 산업화 이전의 농도는 700ppb였지만, 2000년에는 농도가 그 2.5배인 1753ppb로 증가했다. 이에 더해서 온실효과가 이산화탄소보다 4600배나 더 많이 내는 염화불화탄소 계열 화합물은 산업화 이전에는 전혀 없었지만 2000년에는 265ppt로 증가했다. 이러한 온실가스의 지속적인 증가와 수천년 간 전례없던 지속적 기온상승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비상식적인 태도일 것이다.

 

대부분의 기후학자들은 인류가 지금과 같이 온실가스를 계속 내뿜는다면 기후변화가 점점 더 빠르게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100년 후에는 지구평균기온이 최대 섭씨 5.8도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해수면도 경우에 따라서는 1미터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경고한다. 2004년 초에 발표된 미국 국방부의 보고서는 20년만 지나면 벌써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기후변화가 자연현상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별로 대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후변화의 엄청난 결과를 속수무책으로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기후변화가 정말 인간의 활동에 의한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내버려 두는 것은 파멸로 것인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후변화가 인간활동에 의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4강 현대문명과 석유

현대문명은 에너지 중독증을 앓고 있다. 에너지 중에서도 특히 석유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은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도 인정한 바다. 현대문명이 석유에 얼마나 중독되어 있는지는 석유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미국, 중국, 일본 같은 큰 나라는 물론이고 한국 같은 나라까지도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전세계적인 석유중독이 심각하다는 증거이다.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미국의 활동은 중동지역에 막대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을 비롯해서 이라크 침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라크 침공으로 미국은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입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미국의 석유중독이 심각함을 반증한다.

 

인류는 전체 에너지 소비의 36% 가량을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 석유는 현재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에너지원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에너지다. 그것은 거의 모든 에너지 사용처에서 아주 편리하게 이용될 수 있다. 석유는 발전용, 난방용, 운송용, 조리용 어디든지 투입될 수 있다. 투입 방식도 아주 간단하다. 통에 저장되어 있는 액체로 된 석유를 붓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사용처가 다양하고 다루기가 편리하다는 점이 석유를 다른 어떤 에너지원보다 더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만든다. 요즈음 사용량이 늘어나는 가스도 석유와 마찬가지로 다양하게 이용될 수 있지만 다루기는 아주 까다롭다. 가스 상태여서 저장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공급해야 하고, 운송용으로 사용하는 것도 간단치 않다. 최근에 기후변화와 에너지고갈에 기대어서 다시 부상하는 원자력도 사용방식은 크게 제한되어 있다. 기껏해야 전기생산을 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현대문명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점은 빠른 이동과 빠른 정보전달이다. 지금 전세계에서는 사람과 물자가 아주 빠르게 이동하고 있고, 엄청나게 많은 정보가 거의 순식간에 전세계를 돌아다닌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에너지이다. 사람과 물자의 빠른 이동은 석유라는 에너지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엄청난 양의 정보전달은 바로 전기라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수송에 들어가는 에너지의 약 80%는 석유로부터 공급된다. 그리고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석유의 상당량은 수송용으로 소비된다. 한국의 경우 석유 소비의 절반 가량이 교통용으로 투입된다. 그렇다면 석유가 없으면 교통은 거의 마비된다. 석유공급이 끊어진 서울을 상상해보라. 거리에서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택시 연료로 사용되는 LPG도 석유에서 얻어지는 것이니 택시들도 모두 사라진다. 거리에는 오직 천연가스 버스만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기가 끊어진 서울을 상상해보라. 전철이 멈추고, 고층아파트와 빌딩의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것과은 물론 우리가 숨쉬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온갖 일들이 정지상태에 돌입할 것이다. 텔레비전, 컴퓨터, 전화, 인터넷, 냉장고, 세탁기가 모두 고철 덩어리가 되어 정보의 빠른 전달이 완전히 멈추는 것이다. 현대문명에서 에너지는 이토록 중요하다.

 

2006년 초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미국을 석유중독에서 해방시키겠다고 공언한 것은 석유라는 에너지에 계속 의존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인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20062월 스웨덴 정부가 2020년까지 석유사용을 제로로 만들겠다고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석유가 한정된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석유의존을 지속할수록 나중에 석유가 바닥날 때 입을 타격이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다. 15년 후 스웨덴이 계획하는 제로의존 상태는 아니더라도 점차 벗어나야만 이러한 타격을 완화할 수 있는 것은 명백하다. 이미 지금 석유가 고갈되고 있고, 그 결과 전세계적으로 혼란이 시작되는 조짐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석유고갈은 증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오히려 한쪽에서는 석유가 100년 후까지도 계속해서 더 많이 쏟아져나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당장 고갈에 대해서 염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땅속에 매장되어 있는 사용가능한 석유의 양에 대한 추정도 다양하다. 비관적인 추정은 매장량을 약 1조 배럴로 잡는다. 낙관적인 추정의 경우에는 매장량이 3조 배럴이 넘는다. 석유가 고갈될 시점을 40년 후로 보는 것은 매장량을 1조 배럴로 잡기 때문이다. 1조 배럴을 전세계 인류가 1년 동안 소비하는 270억 배럴의 석유로 나오면 약 40년이 나온다. 그렇지만 3조 배럴로 볼 경우에는 100년은 넉넉하게 석유를 쓸 수 있다는 계산이 얻어진다.

 

사용가능한 석유의 매장량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꽤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매장량이 많다고 주장하는 쪽은 주로 석유메이저와 그 주변의 연구자들이다. 반면에 매장량이 1조배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주로 독립적인 연구자들이다. 둘 중에서 어느 쪽이 맞는지 일반인이 제대로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판단을 하지 않고 관심없이 지내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대하다. 잘 되겠지 하고 마음 편하게 지내다가는 나중에 큰 충격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관적인 견해를 수용해서 어느정도 준비는 해야 한다.

 

석유매장량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와 낙관적인 견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단순하면서도 유용한 도구는 석유가격의 변화이다. 인류가 본격적으로 석유를 사용하기 시작한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석유가격의 변화를 살펴보면 석유가격이 인위적인 조작에 의해서 갑자기 상승한 경우는 여러번 있었어도 수년동안 지속적으로 상승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갑작스러운 상승은 잘 알려져 있는 제1, 2차 오일쇼크와 1991년 이라크-쿠웨이트 전쟁 때 있었다.


이때는 전쟁이 끝나거나 정상적인 석유생산이 재개됨으로써 상승의 원인이 사라지자 석유가격이 하락했다. 지속적인 상승은 단 한번 일어났는데 이 일이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다. 석유가격은 2002년부터 계속 올라가고 있다. 2002년 초 미국 서부텍사스유의 가격은 배럴당 20달러 선이었다. 그런데 2006년 초 배럴당 가격은 62달러였다. 4년동안 세배나 오른 것이다. 지속적으로 가격이 상승했다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추세라면 앞으로 석유가격은 배럴당 100달러, 150달러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석유가 100여년간은 풍부하게 공급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보다는 비관적인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2002년부터 석유 가격이 올라간 이유는 석유가 급격하게 고갈되어서 석유 생산량이 감소한 탓은 결코 아니다. 석유생산량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도 석유가격이 올라가는 이유는 소비도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유의 수요는 일정하지 않다. 미대륙의 겨울이 평상시보다 추우면 석유소비는 증가한다. 중국과 인도의 석유 소비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 모든 소비증가를 제때 맞추어주기 위해서는 산유국들이 잉여의 석유생산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에 비해 산유국들의 잉여 석유생산능력은 빠르게 늘어나지 않는다.


 석유생산은 지금 겨우겨우 수요를 맞추어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석유공급 부족에 대한 상시적인 우려가 존재하고 이로 인해 가격이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간혹 뉴올리언즈의 허리케인 재난 같은 일이 발생하여 석유생산시설이 파괴되면 석유가격이 단기적으로 크게 뛰어오르는 일이 일어난다. 앞으로 석유가격의 단기적인 급격한 상승은 더 자주 일어날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지속적으로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수요는 계속 가파르게 늘어나기 때문에 언젠가는 석유생산이 감소하기 시작하고 이로 인해 수요를 맞추어주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것이다.

 

그때 인류문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석유가격이 엄청나게 상승하고 전사회적인 혼란이 벌어질 것이다. 생태적인 삶이란 이러한 점도 고려하면서 새로운, 석유로부터 해방된 문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5. 석유정점과 그 문명적 결과

석유생산이 정점에 도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10년이든 2050년이든 언젠가는 생산량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2050년부터 줄어든다면 우리에게 대비할 시간은 충분하다. 2010년이라면 석유정점에 대비하기는 아주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유생산 정점이 2050년에 오든 2010년에 오든 이에 대비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은 우리가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050년에 석유생산량이 최대값에 도달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고 대비하지 않는다면 남은 시간이 의미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0년에 석유생산 정점이 온다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가 절박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고통을 수반하긴 하겠지만 적절한 대응책이 세워질 것이다. 그러나 석유정점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어떤 대비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이는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석유정점이 2010년 경에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또 한가지 근거는 석유의 발견량과 석유 생산량의 격차이다. 석유의 발견량은 1960년대 초부터 지속적으로 감소해왔다. 그 결과 1980년대 초부터는 소비되는 양이 발견량을 추월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소비량과 발견량의 격차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소비량은 계속 늘어나는 반면 발견량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석유회사나 언론에서는 종종 대형 유전이 발견되었다는 발표나 보도를 하고, 그 결과 사람들은 많은 양의 석유가 발견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동안 석유탐사 기술이 전보다 크게 발달하고 탐사회수가 늘어나고 탐사 장소가 바다와 극지방으로까지 넓혀졌어도 석유 발견량은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러한 추세의 결과 2005년에는 45억 배럴의 석유가 발견되었는데, 소비량은 약 300억 배럴에 달했다. 1배럴의 석유를 발견하고 6배럴의 석유를 뽑아쓰는 셈인 것이다. 석유 탐사 후 가장 많은 양의 석유가 발견된 1960년대 초의 석유 발견량은 600억 배럴에 달했다. 현재의 석유 발견량 45억 배럴은 그것의 15분의 1 정도밖에 안되는 양이다. 인류는 이미 오래전에 발견한 석유를 새로 채워넣지는 못하고 계속 뽑아쓰기만 하는 것이다.


새로 발견되는 석유의 양이 소비량의 15% 정도밖에 안된다는 사실은 석유고갈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석유생산량 자체가 줄어드는 시점이 곧 다가오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석유정점이 머지않아 닥치리라는 것은 이러한 정황을 모두 고려한 가운데 나온 것이다. 석유정점론자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그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상당히 어두운 어쩌면 종말론과 비슷한 예견도 나오기도 한다. 석유가격이 폭등할 것이고, 곳곳에서 석유를 차지하려는 전쟁이 벌어질 것이고, 에너지 인프라가 무너져서 결국은 엄청난 실업, 식량배급, 노숙자의 급증 등을 수반하는 산업문명의 파국적 종말이 오리라는 전망을 내놓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러한 어두운 전망에 대해 인류의 역사적 전개, 에너지가격과 수요의 상관관계, 인간의 적응능력 등을 고려하지 않은 파국적 종말론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들 비판자들은 석유고갈에 대한 예언은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항상 적중하지 않았고, 에너지가 고갈되었을 때 인간은 항상 다른 에너지로 넘어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석탄에서 석유로, 그리고 가스로 넘어가듯이 석유가 귀해지고 가격이 올라가면 다른 에너지원이 등장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유정점이 문명의 파탄을 가져오리라는 생각은 의미없고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석유정점론자들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일면 타당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석유정점이 가져올 결과가 과장되었다고 해서 석유정점 이후 인류문명이 맞게 될 상황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인지 면밀히 따져보고 대비할 것은 대비하는 것이 긴요하지 석유정점론을 종말론적 과장이라고 비판하고 끝내버리는 것은 더 큰 위험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제1차 오일쇼크와 제2차 오일쇼크 때 어떤 상태에 처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위험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세상은 그때보다 훨씬 크게 전지구가 하나로 묶여 있다. 서로서로 깊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1973년과 1980년의 두차례 오일쇼크 때보다 훨씬 큰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는 많은 문명이 붕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명은 붕괴할 수 있는 것이고, 이 붕괴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역사상의 문명은 서로 고립되어 여러개가 동시에 존재했고, 그 중에서 하나의 문명이 붕괴해도 다른 문명은 건재했다. 그러나 현대문명은 전지구가 하나의 문명이라 할 수 있다. 전세계가 석유에 크게 의존해 있기 때문에, 석유정점은 전체 문명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석유정점의 비극적 결과는 우리 생활 구석구석까지 미칠 것이다. 교통, 식량, 난방과 전력용 에너지 수급, 산업생산 등이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교통은 크게 위축되고, 식량생산도 침체될 것이고, 국가에 따라서는 식량난이 올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에너지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산업생산도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고, 경제가 침체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식량생산이 석유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현대의 식량생산은 전적으로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 이 점을 조금 분명하게 보이기 위해서 한국에서 쇠고기라는 식량생산을 목적으로 축사를 짓고 수십마리의 소를 사육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현대의 축산은 대부분 사료를 먹여서 키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가장 흔하게 먹는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모두 사료를 투입해서 생산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사료생산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료용으로 만들 곡물을 한국에서 생산하는 것은 매우 비싸기 때문이다. 가축사육용 사료는 대부분 미국에서 수입된다. 미국산 사료는 넓은 농장에서 트랙터와 콤바인 같은 각종 농기계와 비료, 농약, 제초제를 이용해서 생산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 농기계와 비료 등은 모두 석유 없이는 작동이 안되거나 생산이 안된다. 그리고 여기서 생산된 사료곡물이 한국으로 수송되기 위해서는 또다시 석유에 의존한다.


석유를 태우면서 바다를 달리는 화물선에 실려서 오기 때문이다. 쇠고기를 생산하는 것은 소의 사료생산 단계부터 철저하게 석유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료를 이용해서 소를 키울 때도 석유라는 에너지는 반드시 필요하다. 전기를 이용해서 축사의 각종 설비를 작동하고, 축사에 난방하는 데도 석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석유와 큰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식량생산조차도 철저하게 석유에 의존하고 있다면 교통이나 산업생산 같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토록 현대문명은 석유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석유생산량이 정점을 지나 줄어들기 시작해서 전세계적인 석유부족 상황이 도래하면 큰 혼란이 도래할 수밖에 없다. 지금 몇몇 나라는 이러한 상황이 올것을 예상하고 대비하려는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대표적인 국가가 스웨덴, 덴마크, 독일 등의 유럽국가이다. 이들 국가 중에서 스웨덴은 20052월에 2020년까지 석유의존률을 제로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는 석유정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중의 하나가 한국이다. 한국은 필요한 석유를 모두 수입하지만 석유생산량이 정점을 지나 감소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하다. 정부에서는 가격이 올라가더라도 곧 떨어질 것이라거나 그래도 석유공급은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국민들은 정부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고 정부만 쳐다보고 있다.

석유가 사라져가는 시대의 생태적인 삶이란 어떤 것일까? 석유를 적게 쓰는 것은 물론 에너지 전체를 적게 쓰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석유 대신 석탄이 공급된다고 해서 석탄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쓴다면 생태적인 삶이 되기 어렵다. 석탄 결국 에너지를 적게 쓰는 쪽으로 생활방식을 바꾸는 삶이야말로 생태적인 삶일 터인데, 어떻게 하면 에너지를 줄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아무리 생태적으로 산다고 해도 에너지를 안쓰고는 살 수 없을 터인데 어떻게?

6. 생태적인 에너지수급: 효율향상

석유고갈 시대의 생태적인 삶이란 에너지를 적게 쓰는 삶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에너지를 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에너지는 생태적인 삶이든 그렇지 않은 삶이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생태적인 에너지수급을 위한 중요한 요소는 같은 양의 에너지를 가지고 더 많은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백열등을 켜서 절전형 등을 켤 때와 똑같은 밝기를 얻으려면 전기를 4배 가까이 더 소모해야 한다. 할로겐 램프도 마찬가지로 절전형보다 훨씬 많은 전기를 써야 같은 밝기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등으로 조명을 하는 것은 에너지를 아주 비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이고,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이다. 집을 지을 때 돈이 조금 더 든다고 해서 단열재를 넣지 않거나 적게 넣으면 나중에 난방 에너지와 냉방 에너지가 아주 많이 들어간다. 단열을 제대로만 하면 에너지 소모량이 훨씬 줄어들 텐데 대강 집을 지은 탓에 수십년 이상 에너지를 낭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도 아주 비효율적인 에너지 이용의 대표적 사례이다. 화력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도 효율적인 것과 비효율적인 것이 있다.


 멀리 떨어진 바닷가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화력발전소들은 대부분 에너지의 70% 가량을 공중이나 바다로 날려보낸다. 나머지 30% 정도가 소비자에게 전기의 형태로 보내진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공중으로 날라가는 열을 난방용으로 이용한다면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전기를 생산할 때 나오는 열까지 이용하는 발전방식을 열병합 발전이라고 한다. 열병합 발전시설은 작은 도시 전체에 전기와 열을 공급할 수 있는 커다란 것부터 작은 건물 하나에 전기와 열을 공급하는 마이크로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가 나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역난방 시설에서 주로 가스를 이용하여 열병합발전을 한다.


 가스 복합화력발전소에서도 열병합발전을 한다. 열병합 발전을 하면 투입한 연료에 들어 있는 에너지 중에서 90% 가량을 이용할 수 있다. 보통의 화력발전과 비교하면 효율이 세배 정도 높은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발전시설은 외딴 곳에 세우지는 못한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 세워야 하는데, 생산한 열을 이용할 수 있는 주택이나 공장이 근처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비효율적으로 이용하면 재생가능 에너지의 이용을 크게 늘려도 소용이 없다. 낭비로 새어나가는 에너지를 재생가능 에너지로 채워주는 꼴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너지 전환을 쉽게 달성하려면 에너지 소비도 줄여야 한다. 에너지의 효율적인 이용을 통해서 전체 에너지 소비가 줄어들어야만 재생가능 에너지의 개발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너지 전환이 이룩되기 위해서는 에너지의 효율적인 이용과 절약을 통해서 전체 에너지 소비가 줄어들고, 이와 동시에 재생가능 에너지의 이용이 늘어나야 한다.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가장 빠르게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대기전력을 줄이는 것이다. 대기전력이란 가전기기가 꺼져있는 상태에서도 전선과 연결된 콘센트에 코드가 꽂혀 있으면 흐르는 약간의 전기를 말한다. 소량이긴 하지만 코드가 꽂혀있는 상태에서 24시간 내내 흘러간 것을 합하면 꽤 많은 양이 된다. 아무것도 안하는데 전기는 그냥 새나가는 것이다. 대기전력은 우리나라 전체 전기소비의 5% 이상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원자력발전소 3개에서 생산되는 전기에 해당하는 아주 많은 양이다. 돈으로 따져도 수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다. 그렇다고 전기제품을 끌 때마다 코드를 빼서 전기를 차단하는 것은 너무 번거롭다. 이를 해결 하는 방법이 바로 멀티탭을 쓰는 것이다.



텔레비전, 오디오, 컴퓨터, 휴대전화 충전기 등 각종 가전기기를 멀티탭에 연결하고, 사용하지 않을 때는 멀티탭 스위치만 누르면 상당한 양의 전기 소비를 줄일 수 있다. 이것도 귀찮으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고 대기전력이 아주 적게 들어가는 제품을 새로 사서 쓰면 되지만, 이것은 경제적으로나 전체 에너지 소비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쓰던 것을 새 것으로 바꾸어야 할 때는 대기전력 사용량을 꼼꼼히 따져서 구입하는 것이 좋다.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대기전력이 적게 들어가는 것이라 해도 크기가 늘어나면 전기 소비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전제품을 바꿀 때 그 전 것보다 더 큰 것을 선호한다. 냉장고와 텔레비전도 10년 전에 비해 훨씬 커졌고, 이것들이 점점 더 많이 팔리고 있다. 결과는 전체적으로는 전기 소비가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생활이 자꾸 큰 것을 쫓아가는 식으로 나아가면 에너지 전환은 점점 어려워진다.

심야전력 난방도 가스나 석유 난방으로 바꾸면 많은 양의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 심야전력은 원래 24시간 돌아가는 원자력발전소나 대형 석탄화력발전소에서 밤에 생산되는 전기 중에서 남아도는 것을 소비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다. 그렇지만 요즈음에는 심야전력 이용자가 크게 늘어나서 원자력발전소 전기만으로는 심야전력 수요를 전부 채우지 못한다. 그렇다고 심야전력 공급이 끊어지게 만들 수는 없다. 이때 모자라는 심야전력을 만들기 위해서 뛰어드는 것이 화력발전이다. 가스화력 발전소를 돌리는 것이다. 그런데 가스나 석유로 먼저 전기를 만든 다음에 이것으로 다시 난방을 하는 것은 아주 비효율적인 에너지 이용방식이다.


가스를 가지고 전기를 만들어서 난방을 하면 가스에 들어 있는 에너지 중에서 최대 25%밖에는 쓰지 못한다. 전기를 만들 때 에너지 손실이 60% 가량 일어나고, 전기를 수송할 때 또다시 10% 가량 손실이 발생하고, 최종적으로 주택에서 심야전력으로 물을 데울 때 또다시 손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스로 직접 난방을 하면 가스에 들어있는 에너지의 85% 이상을 난방용으로 쓸 수 있다. 그러므로 심야전력 난방은 가스로 직접 난방하는 보다 에너지 효율이 3분의 1도 안되는 아주 비효율적인 방식이다.

 

전기는 고급에너지이기 때문에, 만드는 데 에너지를 많이 투입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기는 가능한 한 반드시 필요한 부분에만 투입하는 것이 좋다. 예를들어서 조명, 가전기기, 전동기 등 석유나 가스로 대체하기 어려운 곳에서만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쓰기 편리하다고 해서 전기를 난방용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한국의 전체 전기소비에서 심야전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5%가 넘는다. 이것을 모두 가스나 석유난방으로 바꾸면 전기소비와 에너지 소비를 3-4% 줄일 수 있다. 건물을 밝히는 데도 절전형 조명기기를 이용하면 전체 전기소비의 3% 가량을 줄일 수 있다. 냉방에 들어가는 전기도 집을 지을 때 조금만 신경쓰면 크게 줄일 수 있다. 집을 지을 때 단열을 적게 하거나 벽면을 유리로 둘러 싸면, 여름철에 비치는 햇빛의 열이 모두 건물 안으로 들어와서 내부가 뜨거워진다. 이것을 식히려면 엄청난 양의 냉방 에너지가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외부단열을 보강하고 햇빛을 차단할 수 있도록 설계해서 집을 지으면 난방은 물론이고, 냉방용 에너지 소비도 크게 줄일 수 있다.

 

7. 생태적인 에너지수급: 건물과 에너지

생태적인 삶이 에너지 소비와 분리 불가능한 관계라면, 생태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에너지 이용에 대해서 철저한 점검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점검 대상은 먹고, 입고, 거주하고, 이동하는 것을 포함하는 모든 생활방식이 될 것이다. 그 중에서 생태적인 삶을 살려 할 때 개인으로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큰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 거주 방식이다. 우리는 대부분 주택이나 아파트에서 살고, 건물 속에서 일을 한다. 이들 건축물에서는 조명, 난방, 온수, 냉방, 공기공급 등을 위해서 끊임없이 에너지가 소비된다. 그런데 어떤 건축물은 이러한 일을 위한 에너지 소비가 대단히 많고, 어떤 건축물은 얼마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기가 살 집을 선택할 때 건물의 에너지소비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경제적 능력에 맞추어서 집을 선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뿐이다. 그렇지만 집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종종 그 집에서 소비되는 에너지, 특히 에너지 비용으로 인해 골치를 썩게 된다.


건물에서 소비되는 에너지의 양이 전체 에너지 소비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꽤 높다. 유럽 선진국의 경우 전체 에너지의 약 25% 가까운 양이 건축물의 냉난방이나 조명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에는 이에 관한 정확한 통계가 나와 있지는 않은데, 정부에서 발표한 에너지통계 중에서 가정상업 부문(2004. 3480toe)과 공공부문의 에너지(2004. 360toe) 소비를 일반 건축물에서의 에너지 소비(3840toe)로 보면 대략 전체 에너지 소비(2004. 16600toe)23% 정도 되는 것으로 나온다(에너지경제연구원, 2005 에너지통계연보. 에너지관리공단 자료에도 건물에서의 에너지소비가 전체 에너지소비의 23%에 달하는 것으로 나옴). 여기서 가정상업 부문과 공공부문의 에너지 소비를 건축물의 에너지소비로 잡은 이유는 이 두 부문에서 소비되는 에너지가 대부분 건물의 조명, 난방, 냉방, 온수, 환기 등을 위해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건물에서는 그밖에 각종 가전기기, 사무용기기, 실험용 기기를 위해서도 에너지가 소비된다. 그러나 이 에너지의 비중은 건물 자체의 유지를 위해서 들어가는 에너지의 양에 비해서 매우 적은 양이고, 또한 여기서 고려되지 않은 산업부문에서의 건물 냉난방을 위해서 들어가는 에너지와 충분히 상쇄될 수 있는 양이기 때문에 무시될 수 있는 것으로 놓았다. 건물에 들어가는 에너지의 양이 전체 에너지소비 중에서 이토록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면, 이 에너지의 소비를 줄이지 않고는 에너지의 효율적인 이용이란 불가능해진다.

주거용 건물의 경우 에너지소비를 정확하게 나타내거나 외국의 경우와 비교하려면 단위면적당 에너지소비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단위면적당 에너지소비가 많으면 건물의 에너지 효율이 낮은 것이고, 적으면 효율이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유럽의 경우 건물의 에너지 효율은 신축 건물일수록 높아지는 것으로 나온다. 50년 전에 지은 건물과 2000년대에 지은 건물의 에너지 효율은 거의 3-5배 정도 차이가 난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50년 전에 지은 건물과 2000년대에 지은 건물의 에너지 효율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는 유럽처럼 크지 않을 것이다. 유럽 독일의 경우 30-50년 전에 지은 집의 에너지소비는 제곱미터당 약 250kWh이다. 2000년대에 지은 집의 에너지소비는 약 70kWh이다. 한국의 경우 30년 전에 지은 집의 에너지소비는 제곱미터당 약 300kWh가 넘을 것이다. 2000년대에 지은 집의 경우 단위면적당 에너지소비는 그 전보다 적을 것이다.

대형 사무실 건물의 경우 일부 건물을 대상으로 조사결과가 나와 있다. 에너지관리공단에서 1990년대에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이들 건물은 제곱미터당 연간 약 200kWh 이상의 에너지를 사용한다. 아파트의 경우에도 여름철의 냉방과 겨울철의 난방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모두 합하면 제곱미터당 연간 200kWh의 에너지가 소비될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대 말에 이루어진 에너지조사에 따르면 주거부문의 에너지소비가 전체 에너지소비의 약 15%에 달하는데, 이는 우리의 주거생활에서 소비하는 에너지도 우리사회 전체를 생태적인 삶으로 만들어가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거부문에서의 에너지소비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 주거용 건물에서 냉난방으로 들어가는 에너지의 비율은 대략 70%를 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머지가 조명, 가전기기, 온수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냉난방을 위해 투입되는 에너지가 가장 많은 셈인데, 이 에너지를 줄이는 방법은 건물을 겨울에는 안쪽의 에너지가 가능한 한 빠져나가지 않고, 여름에는 바깥쪽의 에너지가 가능한 한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짓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한 단열이다. 단열을 철저히 하면 보통 벽이나 창을 통해서 빠져나가는 에너지가 최소로 유지되는데, 이런 집에서는 난방을 많이 할 필요가 없어진다.


보통 집은 30년 전에 지은 집의 경우 주택이든 아파트든 단열을 하지 않았다. 창문도 한겹 유리창이거나 한겹짜리 유리창을 이중으로 댄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집에서는 벽과 창문을 통해서 많은 양의 열이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그뿐 아니라 지붕과 바닥도 거의 단열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와 아래로도 많은 양의 열 손실이 일어난다. 당연히 겨울철에 실내 공간을 춥지 않을 정도로 유지하려면 석탄이나 석유를 많이 때야만 했다. 그래도 지금 도시가스를 때는 아파트의 실내온도만큼 온도를 올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불을 많이 때도 지붕, 바닥, , 창문, 문을 통해서 에너지가 달아나버리기 때문이다.


20년 전만 해도 집을 지을 때는 벽에 약간의 단열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바닥은 온수보일러 장치를 하는데, 온수관 밑으로 단열재를 제대로 대는 경우는 없었다. 지붕에도 단열재를 거의 설치하지 않았다. 그런데 방바닥밑의 온수관에서 흐르는 뜨거운 물 속의 에너지는 위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사방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당연히 밑으로도 전달된다. 밑으로 빠져나가는 것인데, 그렇다면 온수 속 에너지의 절반은 손실되는 셈이다. 이렇게 절반의 에너지가 빠져나가고 남은 에너지 중에서 다시 천정, , 창문으로 사라지는 것을 제외하면 실내에 남는 에너지는 20% 정도밖에 안될 것이다.


그러니 불을 많이 때도 추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열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사례는 판자집의 겨울이다. 판자집은 말 그대로 벽과 지붕을 판자로 만들어서 바람만 막은 집이다. 이런 집에서도 구들은 놓고 겨울철에 난방을 했다. 보통 방바닥이 금방 식기 때문에 바닥에는 이불을 깔아놓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실내공기는 매우 차가왔다. 낮에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야만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추운 곳이 판자집이었다. 특히 바깥 기온이 크게 떨어지는 밤중에는 실내기온도 낮아졌고, 밤중에 방안의 물이 얼어붙곤 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판자집을 사방을 단열재로 두른다고 가정해보자. 지붕, , 창문, 바닥을 제대로 단열재로 덮으면 에너지손실은 10분의 1 이하로 크게 줄어들 것이다. 건물에서의 에너지 효율향상은 바로 이러한 식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단열을 할 경우 여름철에는 에너지가 얼마나 들어갈까? 에어컨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지금은 아파트나 주택에서도 여름철에 에어컨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냉방용 에너지 소비도 급증하게 되었다. 단열을 제대로 하는 것이 난방에너지 투입은 크게 줄이지만 냉방에너지는 오히려 더 늘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생각과는 정반대로 실제로 단열재는 냉방에너지 투입도 크게 줄여준다. 전통 가옥인 기와 한옥이나 초가집은 겨울철에는 춥기는 했지만 여름철에는 꽤 시원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앞뒤로 커다란 창이 나 있어서 바람이 통할 뿐만 아니라 지붕에 흙이 두텁게 덮여 있어서 위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벽도 뜨거워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처마가 해를 가려주어서 벽체가 햇빛을 받아 달구어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벽이 햇빛을 받지 않고 지붕이 단열되어 있으며 바람이 통하게 해서 여름철에도 어느정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한 것이 전통가옥이었다.


그런데 70년대에 많이 지어진 슬라브집, 80년대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아파트의 경우 슬라브집에서는 지붕으로 뜨거운 햇빛이 쏟아져들어오고, 발코니를 없앤 아파트에서도 햇빛이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온다. 여름에 더울 수밖에 없고, 에어컨을 틀어야 살 만할 것이다. 당연히 에너지 소비는 크게 높아진다. 전기요금이 누진제기 때문에 요금도 아주 많이 나온다. 화석연료와 우라늄이 더 많이 소비되고 그 결과 기후변화가 더 빠르게 진행되고, 핵폐기물이 더 많이 나온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단열이나 건물의 에너지를 제대로 고려하는 것이 생태적인 삶을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8강 생태적 에너지 태양

태양열 조리기

 

태양열로는 요리도 할 수 있다. 뜨거운 한낮에 철판에 햇빛을 쬐어도 온도가 섭씨 80도 정도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조금만 더 강화하면 온도가 섭씨 100까지 올라가서 요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태양열 조리기의 종류도 꽤 다양한다.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상자형 조리기이고, 그밖에 파라볼 조리기, 셰플러(Scheffler) 파라볼 조리기 등이 있다.

 

상자형 조리기는 평판형 집열판과 같은 온실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조금 깊은 상자를 위는 투명 판으로 덮고 옆과 아래는 단열재로 덮으면 상당한 온실효과가 나타나고 상자 속의 온도는 100도까지 올라간다. 이 상자 속에 밥솥이나 냄비를 넣으면 물이 끓게 되어 밥이나 국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상자형 조리기로는 온도를 100도 이상 올리기 어렵기 때문에 다양한 요리를 하기는 어렵다. 예를들어서 굽는 요리나 튀기는 요리는 불가능하다.

 

파라볼 조리기로는 상자형보다 훨씬 높은 온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상자형 조리기에서는 할 수 없는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다. 온도가 높이 올라가는 이유는 파라볼을 이용해서 햇빛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조리기의 핵심 장치는 파라볼 형태로 된 반사판이다. 반사판에서 반사된 빛은 초점으로 모이는데, 초점에는 요리 용기를 올려놓을 수 있게 장치되어 있다. 파라볼 조리기로 얻을 수 있는 온도는 250도 이상이나 된다. 그러므로 튀기거나 굽는 요리도 모두 할 수 있다. 단점은 직광만이 반사판에서 반사되어 초점에 모이기 때문에 흐린날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점과 요리 중에 해를 따라 움직여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상자형은 집열판과 마찬가지로 직광과 간접광 모두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약간 흐린 날에도 밥을 할 수는 있다.

 

셰플러 조리기는 파라볼 조리기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곡면이 완전한 파라볼은 아니다. 모양도 파라볼 조리기가 원형인 것에 비해 약간 길쭉하게 겼는데, 셰플러라는 사람이 개발했다고 해서 셰플러 조리기라고 부른다. 셰플러 조리기도 햇빛을 집중시켜서 높은 온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해만 잘 나면 모든 요리를 할 수 있다. 곡면이 완만하고 꽤 크기 때문에 초점이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생긴다. 이 곳에다 부엌을 만들면 파라볼 조리기나 상자형 조리기와 달리 집 안에서도 요리를 할 수 있다. 인도에서 사용되는 셰플러 조리기는 지름이 4미터 가까이 되는 것으로 초점이 생긴 곳에 작은 반사판이 설치되어 있다. 반사판 위에는 두터운 철판이 놓여 있고, 반사판에 집중된 햇빛은 위쪽으로 반사되어 철판을 가열한다. 요리는 이 철판 위에서 이루어진다. 지름 6미터의 셰플러 조리기로는 60명분 이상의 요리를 할 수 있고, 온도는 섭씨 500도까지 얻을 수 있다.

 

인도에서는 셰플러 조리기를 100개 정도 연결하여 공장이나 명상센터에서 1만명분 요리를 하는 시스템도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장치로는 먼저 증기를 만들고나서 이 증기를 이용해서 요리를 한다. 인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는 전통이 있는데, 보통 나무를 태워서 화장 의식을 치른다. 그런데 화장에 들어가는 나무도 인도 전체로 보면 적은 양이 아니다. 돈많은 부자의 경우 화장하는 데 들어가는 나무의 양이 약 500kg이나 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화장하는 데 소비되는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셰플러 조리기를 변형해서 화장 장치를 개발했다. 이것은 면적이 50제곱미터나 되는 커다란 것으로 햇빛이 집중되면 강력한 화력을 내놓기 때문에, 깨끗하게 화장하는 데 충분한 열이 나온다.

 

태양열 조리기는 해가 많이 나는 아프리카나 인도 등지에서 유용하게 사용된다. 특히 이 지역에서는 보통 나무를 때서 요리를 하기 때문에, 태양열 조리기는 숲을 보호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숲이 황폐화되고 나무가 사라져서 여성들이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가서 나무를 해와야만 밥을 지을 수 있는데, 태양열 조리기는 여성들의 이러한 수고도 덜어준다. 아프리카에서 6-7인용 파라볼 조리기 하나가 절약하는 나무를 이산화탄소로 환산하면 연간 약 5톤이나 된다.

 

 

태양열 이용 장치: 난방.온수용 집열판

 

태양에너지를 난방.온수에 이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기술은 전기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기술보다 훨씬 간단하다. 이러한 장치는 보통 태양열 장치(solarthermal facility)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태양열을 붙잡아두는 집열장치(collector). 집열장치는 말 그대로 태양으로부터 오는 에너지를 열로 바꾸어 모아두는 장치로, 아주 다양한 형태로 만들 수 있다. 집열장치도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핵심 부분은 빛을 흡수하는 장치인데, 모든 집열장치에는 흡수장치(absorber)가 반드시 들어 있다. 집열장치 중에서 가장 널리 퍼진 것은 평판형 집열장치(집열판)이다. 이것은 빛을 투과하는 윗부분의 투명판(유리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이 빛을 빨아들이는 내부의 흡수장치를 덮고 있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빛이 들어오면 그 속에서 온실효과가 일어나서 뜨거운 열이 생성된다. 집열판의 아랫부분과 옆 부분은 열 손실을 가능한 한 줄이기 위해 두터운 단열재로 둘러싼다

 

집열판 내부의 온실효과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다. 우선 투명층을 통과한 빛 - 직광 또는 간접광 - 이 내부의 흡수판에 부딪치면 빛의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반사된다. 빛의 흡수율은 흡수판의 색이나 표면 구조에 따라 달라지는데, 색이 어둡고 표면에 미세하게 굴곡이 있으면 흡수율이 높아진다. 밝고 매끄러운 표면은 빛을 많이 반사하기 때문이다. 반사된 빛은 밖으로 빠져나가지만, 흡수된 빛은 유리나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투명층을 통과하지 못하는 열선인 적외선으로 바뀐다. 외부에서 빛이 계속해서 집열판으로 들어와서 흡수되어 적외선으로 변환되면 이것은 빠져나가지 못하고 내부에는 계속 에너지가 축적되게 되므로, 집열판 내부는 점점 더 뜨거워져서 온실효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때 집열판 내부에서 얻어질 수 있는 흡수장치의 온도는 섭씨 약 200도에 달하고, 그 속을 흐르는 열매체의 온도는 90도 이상 올라갈 수 있다.

 

집열판으로 들어온 빛에너지의 양과 집열판 속에서 빛이 변환되어서 축적되는 열의 양 사이의 비례관계는 집열판의 효율로 나타난다. 집열판의 효율이 높을수록 집열판으로 들어오는 전체 빛 중에서 열로 변환되는 빛의 비율이 높다. 집열판 속에는 보통 열매체가 흐르는데, 흡수장치에 축적된 열은 열매체로 전해지고 열매체는 열교환기 속으로 통과하면서 난방용이나 온수용 물을 가열한다. 그러므로 집열판이 제대로 작동하여 난방열이나 온수생산이 잘 이루어지려면, 흡수장치가 가능한 한 많은 양의 열을 흡수할 수 있고 또한 이 열을 열매체로 전해주는 능력(열전도율)이 뛰어나야 한다.

 

집열판을 둘러싼 아래와 옆의 부분은 흡수장치를 외부의 풍화작용으로부터 보호하고 흡수장치로부터의 열 방출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으로, 단열성이 뛰어난 재료를 사용한다. 보통 건축 단열재로 사용하는 스티로폼은 햇빛이나 열에 약하기 때문에, 집열판에는 섭씨 160도까지도 견디는 5-8센티미터 두께의 암면, 유리면 또는 폴리우레탄폼을 사용한다. 집열판에서 햇빛을 통과시키는 투명덮개는 풍화작용에 강하고, 가능한 한 많은 햇빛을 통과시키면서 적외선의 방출은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재료로는 유리나 플라스틱이 적당한데, 이것들을 이중으로 붙여서 사용하기도 하고 유리판에 열에 강한 플라스틱 막을 씌운 것을 사용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효율을 더 높이기 위해서 반사방지 유리를 사용하기도 한다.

 

집열판의 흡수장치가 햇빛을 열로 변환하는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이 효율이 집열판 전체의 효율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집열판 전체에서 어떤 형태로든 열손실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열손실은 대류, 열전도, 열복사의 형태로 일어난다. 대류는 뜨거워진 흡수판 위에서 이것과 똑같이 뜨거워진 공기가 위로 올라가면서 차가운 공기를 밑으로 밀어내리는 것을 말하는데, 이 차가운 공기가 흡수판과 접촉하면 열의 일부를 빼앗고 이것을 밖으로 내보낸다. 열전도를 통한 손실은 집열판 속의 공기나 밖으로 이어진 관을 통해서 열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말한다. 열전도는 진공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단열을 하면 대부분 막을 수 있다. 집열판은 아래와 옆은 단열을 충분히 하지만 위의 유리는 단열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열전도로 인한 손실은 대부분 유리를 통해서 일어난다. 집열판 속의 흡수장치도 뜨거워지면 열을 복사한다. 복사는 뜨거운 물체의 경우에는 무엇이든 일어나기 때문에, 흡수판에서도 복사가 일어난다. 선택적 코팅은 열 복사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코팅은 들어오는 광선과 나가는 열선의 파장이 다르다는 점을 이용한 것인데, 즉 이 경우 짧은 파장의 광선은 흡수하고 긴 파장의 열선은 내뿜지 않는 것이다.

 

집열판 중에서 열손실이 가장 적게 일어나는 것은 진공관형 집열판이다. 진공관형 집열판에서는 대류나 열전도로 인한 손실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흡수장치가 진공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공기로 인한 대류나 열전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열복사로 인한 손실만 일어날 뿐이다. 진공관형 집열판은 빛 흡수판과 열매체관이 담긴 진공관이 여러개 합쳐져서 이루어진다. 진공광 집열판에서는 유리로 된 진공관이 흡수판을 보호해주고 열매체관과 진공관이 접촉하는 끝부분에서만 아주 적은 열손실이 일어나기 때문에, 다른 단열재료를 가지고 집열판을 싸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진공관형 집열판은 제작비용이 많이 들고, 따라서 가격이 평판형 집열판에 비해 비싸다는 흠이 있다. 또한 흡수판이 하나하나의 진공관 속에 들어 있어 설치면적 대비 흡수판 면적이 평판형 집열판에 비해 크게 줄어든다는 단점도 있다. 평판형의 경우는 흡수판의 면적이 집열판 전체 면적의 85% 이상을 차지하지만, 진공관형에서는 60% 정도밖에 안된다. 진공관형에서는 빛의 변환효율은 높지만 흡수할 수 있는 면적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집열판 속에서 데워진 열매체는 축열조 속에 설치되어 있는 열교환기로 이동하여 축열조 속의 물을 가열한다. 축열조 속에서는 밑으로부터 찬물이 유입되기 때문에, 열교환기는 이 물을 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축열조 아래 부분에 설치된다. 축열조에는 햇빛이 오랫동안 비치지 않을 경우 물을 데우기 위해 가스나 석유 또는 전기를 사용하는 보조 가열장치가 설치되기도 한다. 축열조는 열손실이 가능한 한 적게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두터운 단열재로 둘러씌운다. 축열조는 보통 부식에 강한 강철이나 특수강으로 제작한다. 그 속에는 금속에 대한 부식성이 높은 뜨거운 물이 들어 있고, 이 물 속에 또한 염소 이온과 산소 등 금속을 부식할 수 있는 물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태양열 난방은 가능한가

 

한국의 경우 지붕 위에 물통과 집열판이 일체형으로 올려진 태양열 온수장치는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태양열 난방장치의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겨울이 너무 추워서 집열판의 열이 밖으로 너무 많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태양열 난방을 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난방을 하려면 진공관형 집열판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것은 너무 비싸서 경제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집열판을 이용하면 난방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여기서 물론 전제되어야 할 것은 집을 잘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을 부실하게 지어서 열이 밖으로 많이 빠져나가면 태양열 난방설비를 아무리 잘 해도 소용이 없다. 태양열 난방은 단열 시공을 제대로 한 상태에서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열 집열판은 일반적으로 주택의 지붕에 설치되어서 한 가정에서 필요한 난방용이나 온수용 열을 생산하여 공급한다. 그러나 그 용도가 독립된 주택용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아파트의 벽이나 지붕에 집열판을 넓게 설치해서 아파트 전체에서 필요한 열의 일부 또는 전부를 공급할 수도 있고, 여러개의 주택을 하나로 묶어 이들 주택 지붕 위에서 만들어진 열을 한군데에 모았다가 대단위 난방을 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 필요한 것은 집열판의 규모에 맞는 커다란 축열조와 비교적 정밀한 열 조절시설이다. 태양열을 이용해서 대단위로 난방열이나 온수열을 공급하는 일은 스웨덴에서 이미 20년 전부터 시행되어 왔고, 독일 등지에서도 퍼져나가고 있다. 독일에는 낡은 아파트를 보수하면서 남쪽 벽 한면을 모두 집열판으로 덮은 경우도 있다. 아파트에서는 이 집열판을 통해서 필요한 난방열의 절반 가량을 얻는다.

 

태양열 난방.온수장치는 기후변화를 억제하는 데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집열판의 크기가 6제곱미터인 태양열 장치를 사용해서 일년 동안 얻을 수 있는 2000kWh의 에너지를 석유를 때서 얻으려면 석유 250리터가 필요하다. 석유 1리터에 들어있는 에너지의 양은 약 10kWh가 되지만 태울 때 손실이 일어나기 때문에 2000kWh를 얻는 데 250리터가 들어가는 것이다. 석유 1리터를 태울 때 방출되는 이산화탄소의 양은 352g이다. 태양열 장치로 석유 250리터를 절약하면 이산화탄소 방출도 650kg 줄이게 되는 셈이다. 2000kWh의 에너지는 가스로 환산하면 193m3에 해당하고, 1m3의 가스는 이산화탄소를 251g 배출한다. 가스 대신 태양열 난방을 하면 줄어드는 이산화탄소의 양은 366kg이 된다. 태양열 집열장치를 만들 때 방출되는 이산화황 같은 대기오염물질의 양(1kWh0.04g)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적다.

 

 

태양광발전: 태양전지

 

태양광 발전은 반도체(semiconductor)로 만들어진 태양전지(photovoltaic cell)에 빛에너지(광자)가 투입되면 전자의 이동이 일어나서 전류가 흐르고 전기가 발생하는 원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태양전지는 하나의 크기가 대략 10*10 cm2로 빛을 받으면 0.6볼트의 전압이 생기고, 최대 1.5와트(W)의 용량을 갖게 된다. 전류의 세기는 태양전지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태양전지는 다양한 물질로 만들 수 있지만, 가장 널리 쓰이는 태양전지는 규소로 이루어져 있다. 규소는 순수한 상태에 극히 소량의 다른 원자들이 섞여들어가면 전기적으로 다른 원소에서 볼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 현상을 응용하는 것이 바로 반도체와 태양전지이다.

 

태양전지를 이용한 태양광 발전기는 대체로 독립형과 계통 연계형으로 나뉜다. 독립형은 생산된 전기를 전선망에 연결하지 않고 생산된 장소에서 사용하는 것을 가리키고, 계통연계형은 전선을 통해 전기를 받아들이거나 전기를 내보낼 수 있는 형태를 가리킨다. 독립형은 자가발전 시스템과 같은 것으로, 전기를 만들어내는 장치, 전기를 저장하는 장치, 충전 상태를 조정하는 장치, 배전 장치 및 전기 소비장치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전기 생산장치는 당연히 태양전지가 되고, 저장장치로는 일반적으로 축전지가 사용된다. 축전지는 햇빛이 비칠 때 태양전지에서 생산된 전기를 저장했다가 햇빛이 비치지 않을 때 내놓는 일을 반복하는 역할을 하는데, 니켈-카드뮴 축전지, 니켈-수소 축전지, 니켈-나트륨 축전지, 납축전지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조정장치는 축전지와 태양전지 사이에 설치되는 것으로, 축전지가 가득 충전되었을 때 태양전지로부터 전기가 축전지로 더 이상 오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거나 축전지로부터 모듈 쪽으로 전기가 방전되는 것을 방지하는 작용을 한다. 이로써 축전지의 수명을 가능한 한 오래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독립형 시스템에서는 축전지가 전체 설비 비용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0-30%에 달하기 때문에 적절한 조정장치를 설치하여 축전지의 수명을 늘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독립형 태양광발전기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전기를 저장하는 축전지이다. 축전지는 비쌀 뿐만 아니라 자리도 아주 많이 차지한다. 게다가 축전지의 수명이 길지 않다는 점도 문제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납축전지는 아무리 조심스럽게 사용해도 5년을 쓰기가 어렵다. 다른 축전지는 수명이 더 길지만 가격이 훨씬 비싸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면 설치비가 크게 높아진다.

 

배전장치는 생산된 전기를 축전지로부터 또는 축전지를 거치지 않고 태양전지로부터 직접 전기 사용장치로 전달해주는 장치이다. 태양전지에서는 항상 직류전기가 생산되고, 축전지에도 직류전기가 저장된다. 그러나 가정에서 사용하는 조명기구나 가전제품은 일반적으로 교류전기에 맞도록 제작되었기 때문에 태양전기를 이들 기구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직류를 교류로 바꾸어주어야 한다. 이 장치를 변환기(inverter)라 부르는데, 독립형의 경우도 대부분 이 장치를 설치한다. 변환기는 태양광발전 시스템의 심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한 장치이다. 이 장치에서 태양전지의 전기를 받아서 전달해주는 일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면 전기가 아무리 많이 생산되어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계통연계형 태양광 발전기는 모듈에서 생산된 전기를 전선망을 통해서 전력공급회사로 보낼 수 있게 설계된 것을 말한다. 이 경우 태양전기 생산자는 보통 자신이 쓰고 남은 전기를 전선망으로 보내고, 태양전기로 자기에게 필요한 전기를 충당하지 못할 때는 전선망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게 된다. 이 시스템에서는 전기가 남을 때는 내보내고 모자랄 때는 전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독립형과 달리 전기 저장장치가 필요없게 되고, 이에 따라 비용도 적게 든다. 주요 구성장치는 태양광 발전기와 생산된 전기를 전선망으로 보내는 역송전장치(인버터)이다. 발전기에서 생산된 직류의 태양전기는 우선 계통연계형 인버터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전선망에 맞는 교류로 변환된다. 그후 이 전기는 가정에서 전기를 쓸 경우에는 가정에 설비되어 있는 전선을 통해 일부 또는 전부가 자체 소비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전선망으로 보내진다. 이때 역송전된 전기와 전기회사로부터 공급받은 전기를 계산하기 위해 두 개의 계량기가 설치된다. 계통연계형 시스템은 독립형에 비해 여러가지 설비가 필요없게 되고 따라서 유지비가 적게 들어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크게 유리하다. 계통연계형 인버터는 독립형 인버터와 약간 다른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정전되어 전선망에 전기가 흐르지 않을 때 자동적으로 인버터가 정지되도록 하는 장치가 들어 있다. 그 이유는 정전이 일어났을 때 전선망으로 전기가 흘러나가면 감전사고나 고장을 일으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태양전지를 이용한 발전은 전기 동력장치나 조명장치, 가전제품 등 전기가 필요한 곳에는 모두 적용될 수 있다. 가장 흔하게 퍼진 태양광 발전시설은 주택 지붕에 올려진 것이지만, 주택이나 아파트 바깥 벽의 소재 또는 유리창 대신 설치될 용도로 개발된 것도 나와 있다. 자동차나 요트 또는 하늘을 나는 소형 비행기에 부착되어서 필요한 모든 동력을 제공해주는 것도 있다.

   

 

 

태양광발전: 전기 생산 잠재량

 

태양광발전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은 흔히 태양광발전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전기를 생산하려면 아주 넓은 땅이 태양전지로 뒤덮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들어 서울에서 소비되는 전기를 공급하려면 남한 전역을 태양전지로 뒤덮어도 모자란다고 말한다. 한국의 일인당 전기 생산량이 7285kWh 이므로 서울에서 일년에 필요한 전기는 약 728kWh가 된다. 태양전지 1kW를 설치하는 데 필요한 면적은 약 10제곱미터이다. 한국의 경우 태양광발전기 1kW에서 연평균 1000kWh의 전기가 생산된다. 그러므로 728kWh의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태양전지의 면적은 72800만 제곱미터이다. 이것은 728제곱킬로미터로 가로, 세로 약 27킬로미터의 넓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넓기는 하지만 남한 전체 면적만큼 넓지는 않고, 그것의 14분의 1 정도이다. 물론 이것도 매우 넓은 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남한 땅에 세워진 건물이 차지한 면적, 즉 건물의 지붕면적은 약 700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건물 지붕에만 태양광발전기를 설치해도 서울에서 필요한 전기는 모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유휴지에 설치하는 것까지 고려하면 더 많은 전기가 얻어질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유휴지와 건물 지붕 전체에 태양광발전기를 설치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전기의 양은 2003년 전기 생산량의 약 40%에 달한다. 앞으로 태양전지 기술이 더 발달해서 효율이 지금보다 두배 가량 높아지면, 같은 면적에서 생산할 수 있는 전기의 양은 두배로 늘어난다. 2030년 경에 효율이 25% 되는 태양전지가 보급된다면, 건물 지붕에만 태양전지를 설치해도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전기의 대부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태양광발전사업을 하려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대규모 발전소만 봐와서인지 건물 지붕에 태양전지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넓은 땅에다 태양전지를 설치하는 것만 생각한다. 경제성만 따지면 맨 땅 수만평 위에다 수천 킬로와트의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그러나 맨 땅에 설치하는 것은 그 땅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환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버려진 황폐한 땅에 태양광발전기를 세우고 그 밑에는 풀을 심어서 목장을 만드는 등 환경친화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먼저 건물 지붕과 벽, 경기장 지붕, 고속도로 방음벽, 주차장 지붕 등 기존의 각종 시설에 먼저 설치하고 나서 시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9. 풍력

 

* 한국인의 에너지소비

 

현재 한국의 일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일인당 국민소득이 한국의 3배나 되는 일본이나 독일보다 더 많다. 일인당 전기 소비량도 독일, 영국, 덴마크 등보다 더 많다. BP(영국석유)에서 20037월에 발표한 세계 에너지통계에 따르면 2002년 한국의 일인당 연간 일차에너지 소비는 석유로 환산했을 때 4,5톤이었다. 이것은 미국과 북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보다 많은 양이다. 산업에서 화학공업과 기계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세계에서 높은 편에 속하는 독일이나 일본의 경우 2002년 일인당 연간 에너지 소비는 독일이 4,0, 일본이 4,0톤이었다. 다른 G7 국가들 중에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도 각각 3,7, 4,4, 3,1톤으로 모두 우리나라보다 낮았다. 이들 나라에서는 에너지 소비가 증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에너지소비가 계속 증가하기 때문에 2005년에는 격차가 더 크게 벌어졌을 것이다. 2004년 한국사람 일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석유로 환산했을 때 4.58톤이었다.


BP의 에너지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일인당 전기 소비도 OECD 국가 중에서 높은 편에 속한다. 2003BP 에너지통계에 따라 각 나라의 2002년 일인당 전기생산량을 계산하면, 한국은 7285kWh로 독일(7083kWh), 영국(6515kWh), 이탈리아(4984kWh)보다 더 높았다. 지금처럼 에너지를 많이 쓰는 추세가 지속되면 앞으로 15년 후에 한국은 세계 최고의 에너지 소비국인 미국처럼 된다.

 

한국의 에너지수급체계를 생태적으로 전환하는 전략은 장기적인 시간표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 50년에서 60년의 장기 계획을 짜고 차분하게 실행해나가야만 전환이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 전략은 에너지 효율향상보다는 재생가능 에너지의 확대에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에너지 효율향상은 20-30년 정도의 중기 안에도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기존발전시설을 열병합발전시설로 교체하고 주택단열의 강화하는 것 등은 20여년 안에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생가능 에너지의 확대는 50년 이상의 긴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기는 어렵다. 그러나 50년 동안 꾸준히 차근차근 추진한다고 하는 기본계획, 의지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한국의 에너지소비는 현재도 여전히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증가를 완화하거나 뒤로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고 짧은 시간 안에 이 추세를 바꿀 수는 없다. 장기적으로 에너지소비를 현재 수준의 얼마 정도로 줄인다는 목표를 세우고 실천해가는 것이 필요하다.

 

 

유럽연합과 독일은 재생가능 에너지의 비율을 늘리면서 원자력발전을 줄이는 전략을 택한다. 독일은 2020년에서 2030년 사이에 원자력발전을 완전히 없애기로 결정했다. 유럽연합도 연도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원자력발전을 줄여나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한국의 경우 원자력발전은 지금도 전체 전력생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앞으로도 수십년간 계속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원자력발전은 방사능과 방사성폐기물 문제로 이해 사회적 갈등을 끊임없이 유발할 것이고, 재생가능 에너지의 확대에 걸림돌이 될 것이기 때문에 서서히 줄여나가는 것이 좋다. 이렇게 줄여나가면 2060년에서 2070년 사이에 원자력발전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가동되거나 완공된 원자력발전소는 20개이다. 그리고 7개가 건설중이거나 계획중이다.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은 30-40년이다. 40년으로 잡을 경우 현재 가동중이거나 가동준비중인 원전 20개는 2045년까지 폐쇄된다. 나머지 7개는 2015년까지 완공될 예정이므로 이것도 2055년에는 수명이 끝난다. 약간의 가동연한 연장이 주어진다 해도 원자력발전소를 현재 가동중인 것과 건설중, 계획중인 것으로만 한정하고, 그 이상은 확대하지 않기로 하면 2060년 경에는 원자력발전수가 모두 폐쇄될 수 있는 것이다.

 

 

* 세계풍력

   풍력발전은 전세계에서 대단히 빠르게 퍼져가고 있다. 연간 30%씩 성장하고 있는데, 가장 많은 곳이 독일, 스페인, 미국, 덴마크 등지이다. 독일에 세워져 있는 풍력발전기의 발전용량은 18000MW이고, 갯수는 17500개이다. 이것은 원자력발전소 6개에 해당한다. 원자력발전소는 보통 1000MW인데, 풍력발전기 18000MW가 원자력발전소 6개 즉 6000MW와 맞먹는 이유는 풍력발전기의 가동률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때만 돌아가면서 전기를 생산하기 때문에 가동률은 25%밖에 안된다. 반면에 원자력발전소의 가동률은 80% 정도나 되기 때문에 풍력발전기 용량이 원자력발전소 용량의 3배가 되어야 맞먹게 되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풍력발전으로 전체 전기의 5%를 공급한다. 20분의 1밖에 안되는 양이지만, 원자력발전소 6개에 해당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히 많은 것임을 알 수 있다. 2005년 생산량은 265kWh였다. 한국에 원자력발전소가 20개 가동되고 여기서 40%의 전기가 생산된다는 것을 계산하면, 6개의 원자력발전소는 우리나라 전력생산량의 약 10%에 해당하는 양일 것이다. 풍력발전 산업에서 종사하는 사람의 수도 매우 많다. 65000명이나 된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풍력발전을 많이 하는 국가는 스페인이다. 용량은 8400MW이다. 전체 전력생산에서 풍력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많은 국가는 덴마크이다. 덴마크의 풍력발전 용량은 3400MW이고, 전체 전력소비의 약 20%를 풍력발전에서 공급한다. 한국에는 풍력발전이 거의 보급되지 않았다. 제주도 등지에서 수십개가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 풍력발전기 종류

풍력발전기는 아주 작은 수십 와트급에서 수천 킬로와트까지 크기가 매우 다양하다. 소형은 손쉽게 들고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가볍고 작다. 반면에 대형 풍력발전기는 기둥과 날개의 크이가 100미터나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가지고 있다. 용량은 6000kW까지 개발되어 있는데, 이것을 하나 세우면 약 3000가구가 전기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풍력발전기 몇 개만 세우면 작은 소도시에 필요한 전기는 모두 공급할 수 있는 것이다.

 

풍력발전기의 날개는 바람을 가장 잘 받아서 전기로 바꿀 수 있도록 특수한 형태로 휘어져 있다. 바람은 어떤 때는 강하게 불다가 곧 약하게 불고, 계속해서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그래서 통 위의 뒤쪽에 작은 풍향계와 측정기기가 붙어 있는데, 이것들은 바람이 어떤 방향에서 불어오고 얼마나 강한지를 감지해서 통 속의 컴퓨터에 전달한다. 그러면 컴퓨터는 이 데이터들을 처리해서, 발전기 통이 항상 바람부는 방향을 향하도록 하고, 날개가 바람의 에너지를 가장 잘 전기로 변환할 수 있도록 날개의 위치를 조종한다. 날개는 바람의 세기에 따라 평평한 부분이 앞뒤로 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바람 속 공기의 흐름으로부터 힘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이다. 바람이 아주 강하게 불면 날개의 평평한 부분은 바람 방향과 수평으로 서게 되는데, 이때는 날개가 바람을 조금도 받지 않기 때문에 돌지 않고 정지한다. 태풍이 불 때 날개가 계속해서 돌아가면 날개가 부서져나간다. 이를 막기 위해서 날개가 바람을 받지 않도록 조정해서 풍력발전기의 회전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풍력발전기를 세우려면 먼저 발전기를 세우려 하는 후보 지역에서 부는 바람의 세기와 성질을 조사해야 한다. 이것은 풍력자원 측정기기를 이용해서 1년 동안 실시한다. 보통 20미터 높이에 세우지만, 더 정확한 결과를 얻기 위해 풍력발전기 기둥높이까지 측정기기를 올리는 경우도 있다. 1년 동안 조사한 결과 풍향이나 풍속이 적합한 것으로 나오면, 이에 따라 그곳에 가장 적합한 풍력발전기의 형태와 크기 그리고 여러개를 설치할 경우에는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일반적으로 바람의 세기가 연평균 약 4m/s 이상인 곳에는 풍력발전기를 세울 수 있다. 바람은 공중으로 올라갈수록 강하게 불기 때문에, 바람이 강하지 않은 곳에도 풍력발전기를 높게 세우면 전기를 생산하기에 충분한 바람을 얻을 수 있다. 풍력발전기가 내는 힘(전기)은 바람 속도의 3제곱에 비례한다. 풍속이 4미터인 경우와 6미터인 경우 바람의 세기는 6미터가 1.5배지만, 여기서 얻어지는 전기의 양은 5배 가까이 된다. 그러므로 풍력발전기를 세울 때 1년간 풍속을 측정하는 등 가능한 한 적합한 입지를 선정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풍력발전기를 세우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1메가와트급의 경우 약 15억원이 든다. 여러개를 한꺼번에 세울 경우에는 13억원 이하로 떨어진다. 소형 풍력발전기는 형태에 따라서 가격 차이가 크게 난다. 1kW급의 경우는 5백만원에서 1000만원, 10kW급은 2000만원부터 4000만원까지 편차가 크다. 여기서 풍력발전의 경제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풍력발전에 대해서 들리는 부정적인 이야기중의 하나는 풍력발전이 비싸다는 것이다. 그런데 풍력발전기를 건설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만 가지고 따져도 풍력발전은 그다지 비싸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다른 화력발전이나 원자력발전 방식의 경우 외부비용을 고려해서 생산단가를 계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외부비용이란 예를들어서 화력발전을 함으로써 발생하는 잘 발견되지 않는 비용이다. 화력발전을 하면 이산화탄소가 발생하고, 대기오염이 일어나고, 산성비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서 비용이 발생하는데, 이러한 것을 외부비용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외부비용을 정확하게 계산하기는 매우 어렵다. 대기오염이 병에 걸리게 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다른 요인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화력발전이나 원자력발전의 외부비용이 매우 크다는 사실이고 이러한 비용까지 고려하면 풍력발전이 이들 발전방식보다 비싸지 않다는 것이다. 풍력발전도 처음에는 매우 비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단가는 떨어져서 지난 15년동안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지금은 화력발전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앞으로도 계속 떨어질 것으로 예측되지만 지금까지와 같이 가파르게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에 석유나 가스, 석탄, 우라늄의 가격은 계속 상승하고 있다. 이러한 자원을 이용하는 발전소의 발전단가는 계속 비싸질 것이다. 그러나 풍력발전의 발전단가는 계속 떨어진다. 풍력발전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로는 소음, 새에 대한 피해 등이 있다. 그러나 소음은 무시할 정도이다. 새나 야생동물에 대한 피해도 크지 않다. 오히려 정지해 있는 대형 건물이 새들에게는 더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해마다 매우 많은 수의 새가 대형 건물에 부딪쳐서 죽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풍력발전기를 설치할 때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항상 고려해야 한다.

 

풍력발전기가 경관을 해친다는 이야기도 있다. 철저한 환경보존주의자들은 다른 발전시설과 마찬가지로 환경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풍력발전기가 가져오는 손상은 화력발전소나 원자력발전소의 건설로 파괴되는 것과 비교하면 결코 심한 것이 아니다. 이들 발전소는 땅을 뒤엎고 그 위의 자연을 모조리 없앰으로써 환경을 손상하고 자연경관을 완전히 바꾸어버린다. 갈탄광산의 경우에는 수십킬로미터의 숲과 마을을 뒤엎는다. 그리고 땅속으로 300미터 가까이 파들어가기 때문에, 광산이 차지한 면적보다 훨씬 넓은 땅의 지하수를 고갈시켜 생태계를 파괴한다. 화력발전소는 많은 양의 온실기체와 오염물질을 방출하고 원자력발전소는 끊임없이 핵폐기물을 내놓는다. 반면에 풍력발전기 몇대를 밭 가운데나 언덕 위의 좁은 땅 위에 세울 경우 이로 인해 파괴되는 것은 거의 없다. 풍력발전기가 세워지면 나무 몇그루 정도만 손상을 입을 뿐이다.

 

풍력발전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풍력으로 필요한 전기를 얻어 쓰려면 우리나라 땅 전체에 풍력발전기를 세워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풍력단지를 조성해서 전기를 생산할 때 단지의 면적 전체를 계산하면 그런 주장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안의 땅은 쓸모없는 땅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땅 위에다 얼마든지 가축을 방목하거나 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 풍력발전기를 서너개만 세울 때는 밭이나 논 가운데에도 세울 수 있다. 농사짓는 땅은 그대로 두고 그 중에서 약간의 면적만을 풍력발전기가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풍력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아주 넓은 땅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터무니없이 과정된 것이다.

 

전세계 육지에서의 풍력발전 잠재량 - 기술적으로 개발가능한 - 은 연간 2-5만 테라와트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999년 현재 풍력발전기의 전체 용량은 13600메가와트였고, 발전량은 24테라와트시에 지나지 않았다. 잠재량의 1000분의 1도 이용하지 못한 셈이다. 이와 같이 엄청난 풍력발전 잠재량이 존재하고 생산비용도 시간이 갈수록 내려가고 있기 때문에, 전세계의 풍력발전기 시장은 급속하게 확대되고 있다. 1994년부터 1999년까지의 연간 증가율은 약 30% 이상이었는데, 이러한 증가추세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와 같은 추세대로 풍력발전 시장이 확대되면 20여년 후면 전세계 전기수요의 10% 이상이 풍력발전으로 충당될 것이 예상된다.


10강 바이오매스, 수력, 조력 등

생태적인 에너지수급에는 조력발전을 이용해서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도 들어갈 것이다. 한국에서는 수십년 전에 서해안의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곳에 댐을 건설해서 조력발전을 하겠다는 계획이 세워진 적이 있었다. 이러한 방식의 댐을 건설해서 조력발전을 하는 발전소가 프랑스 랑스라는 지방에 존재한다. 여기서는 밀물이 들어올 때는 댐의 수문을 열어서 물을 가두고, 썰물 때는 수문을 열어서 물을 내보내면서 발전을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조력발전을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댐을 건설해서 조력발전을 하면 많은 환경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육지에서도 대형댐을 건설해서 수력발전을 하는데, 이때도 여러 가지 환경문제가 발생한다. 주변의 미세기후를 변화시키고 안개가 자주 발생하게 하고 중국이나 이집트의 대형댐의 경우에는 물의 무게가 지각을 흔들어서 작은 지진을 유발한다는 보고도 나와 있다. 그러므로 대형 댐은 생태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조력발전도 이렇게 바다에 큰 댐을 건설하는 것은 생태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조력발전은 그렇기 때문에 건설방식에 따라서 생태적인 것이냐 아니냐를 구분할 수 있다. 수력발전도 마찬가지다. 대형 댐을 이용해서 발전을 하는 것은 생태적인 것이 아니다. 반면에 완벽하게 생태적인 방식의 수력발전도 있다. 이러한 발전방식은 댐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강물은 그대로 흘러가게 하면서 발전을 하는 것인데, 이때는 댐을 건설하지 않기 때문에 대량의 전기를 생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러한 수력발전을 소수력발전이라고 부른다. 소수력 발전방식도 여러 가지가 있다. 작은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려서 작은 발전기를 돌릴 수도 있고, 물길을 돌려서 작은 웅덩이에 고이게 한 다음에 이 물을 뽑아내서 전기를 생산하는 것도 있다. 소수력 발전소는 큰 댐을 건설하지 않기 때문에 아주 많은 수를 건설할 수 있다. 대형댐은 많이 건설할 수는 없다. 이렇게 소수력 발전기를 여기저기 많이 건설하면 대형댐을 건설해서 생산한 전기의 양만큼 많은 양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생태적인 방식으로 에너지를 얻으려면 소수력 발전기를 많이 설치해야 할 것이다.

 

소수력 발전은 자가용으로 작은 규모로도 설치할 수 있다. 개인 차원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개인 차원에서 생태적인 방식으로 에너지를 얻겠다고 할 경우, 집 옆에서 물이 흘러간다면 물레방아 방식의 발전기를 설치해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신자유주의가 생태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배웠는데, 만일 개개인이 이렇게 소수력발전기를 설치해서 에너지를 얻는다면 이러한 에너지생산방식을 통해서도 반생태적인 신자유주의를 막는 데 기여하는 셈이다. 신자유주의는 전세계가 단일시장으로 설정한다. 무역과 금융이 자유롭게 전세계 시장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신자유주의를 반대만 해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수 없다. 대안적인 시스템, 식량생산, 에너지생산, 지역적 소비 등 대안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에너지를 자기가 자기 지역에서 생산하고 지역에서 쓸 수 있게 된다면 에너지 측면에서는 신자유주의 대항방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에너지를 이렇게 소수력으로 조금씩 얻어서 수급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생태계 파괴를 막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조력발전도 수력발전과 바찬가지로 댐을 건설하지 않고도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이 있다. 댐을 건설하지 않는 조력발전기는 풍력발전기를 거꾸로 세운 형태를 하고 있다. 날개는 물이 들어오고 나갈 때 돌아가고 이때 발전기가 함께 돌아가서 전기가 생산된다. 이러한 조력발전 방식은 바다 생태계를 거의 파괴하지 않는 방식이다. 이러한 발전기는 이미 파일럿 플랜트가 나와 있다. 영국 근해에 설치되어 있는데, 한국에서는 서해안에 이러한 발전기를 아주 많이 설치할 수 있을 것이다. 조력을 이용해서도 많은 에너지를 얻고 생태계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바이오매스는 나무가 주된 에너지원이던 19세기까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에너지원이다. 지금도 저개발국가에서는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바이오매스가 공급하고 있다. 현재 전세계의 일차 에너지 소비 중에서 바이오매스로부터 얻어지는 에너지의 비율은 약 10%에 달한다. 바이오매스는 아직도 풍부하게 존재하는데, 나무뿐만 아니라 곡물, 식물, 농작물 찌꺼기, 가축의 분뇨, 음식 쓰레기 등이 모두 바이오매스로서 에너지 생산에 이용될 수 있다. 가축의 분뇨는 그것을 그대로 태워서도 난방이나 요리에 이용한다. 또한 발효시키면 가스를 얻을 수 있다. 바이오매스는 이렇게 다양하게 존재하고,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다.

 

바이오매스는 나무처럼 가공하지 않은 형태로 손쉽게 열을 생산하는 데 이용될 수 있지만, 가공하면 자동차 연료나 전기를 생산하는 데에도 이용된다. 자동차 연료로 이용되는 것은 브라질에서 대규모로 재배되는 사탕수수를 들 수 있다. 사탕수수는 발효공장에서 발효를 거쳐 에탄올로 변환되는데, 에탄올은 휘발유와 혼합되거나 단독으로 자동차의 연료로 투입될 수 있다. 바이오 디젤이라 불리는 식물성 기름의 변형체는 주로 유채기름을 이용해서 얻는데, 이것은 디젤 엔진의 연료나 난방용.발전용 연료 또는 전기생산용으로 사용된다. 식용유를 직접 태워서 달리는 자동차도 있다. 바이오매스로 주목을 받는 식물들은 대기중의 이산화탄소를 빠르게 흡수해서 성장하는 것들이다. 이 식물들은 빨리 자라나기 때문에 해마다 일정한 양을 거두어들여 직접 이용하거나 가스로 만들어서 전기생산에 이용할 수 있다.

 

바이오매스를 가공하면 메탄올, 에탄올, 바이오디젤유 등의 액체 연료와 수소나 메탄 같은 기체 연료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연료를 바이오연료(biofuel)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대부분 수송용 연료나 발전용.난방용 연료로 이용될 수 있다. 바이오매스는 열화학적 변환, 생화학적 변환, 직접적인 기름 추출 방식을 통해서 가공하여 직접 에너지를 얻거나 연료로 변환할 수 있다. 열화학적 가공방식으로는 직접적인 연소, 가스화, 열분해가 있는데, 직접 연소를 통해서는 나무찌꺼기나 농작물 찌꺼기를 태워서 직접 열을 얻거나 연소열로 증기를 만들어서 난방열과 전기에너지를 얻는다. 바이오매스를 산소가 소량 공급되는 상태에서 가열하면 중질의 가스가 만들어진다. 이 가스는 정화한 후 열병합 발전기를 통해 난방열과 전기를 생산하는 데 이용할 수 있다. 바이오매스를 공기를 완전히 차단한 상태에서 섭씨 500 정도의 고온으로 가열하면 열분해가 일어난다. 열분해를 거치면 바이오기름, 가스, 목탄이 나오는데, 가스와 기름은 전기와 열을 생산하는 데, 목탄은 연료로 이용된다.

 

가축의 분뇨를 이용해서 에너지를 얻는 방식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것을 발효시켜서 가스를 얻는 것이다. 발효에는 혐기성 발효와 호기성 발효가 있다. 호기성 발효는 공기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발효가 일어나는 것으로 이때는 이산화탄소가 발생한다. 바이오매스를 가지고 가스를 만들 경우에는 혐기성 발효를 이용한다. 혐기성 분해는 박테리아를 이용한 소화와 유사한 것으로, 음식 찌꺼기, 가축 분뇨 같은 유기질 쓰레기를 공기를 차단한 상태에서 박테리아를 이용해서 분해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로 메탄이 50% 이상 함유된 가스가 생성되는데, 이것은 정화과정에서 수분 등을 제거한 후 열병합 발전기에서 전기와 열을 생산하는 데 이용한다. 발효는 사탕수수, 사탕무, 옥수수 등에 함유된 당을 에탄올로 변환하기 위해서 이용된다. 액체 바이오연료 중에서 가장 일찍 개발되어서 수송용으로 사용되는 것은 에탄올이다. 에탄올은 바이오매스에 함유되어 있는 탄수화물을 당으로 변환한 다음 이것을 알코올 발효시켜서 얻는다. 사탕수수나 사탕무의 경우에는 직접 당을 추출하여 알코올 발효를 시킨다. 바이오디젤은 최근에 개발된 것이지만 전력생산이나 난방용 또는 수송용으로 점차 이용범위를 넓혀가고 있는데, 이것은 메주콩, 유채씨앗, 동물성 지방, 폐 식물성 기름 등의 바이오매스로부터 유기질 기름을 직접 추출하여 촉매의 작용 하에서 에탄올이나 메탄올과 결합시켜 에스테르로 변환시켜서 얻는다.

 

바이오매스를 직접 태워서 에너지를 얻는 방식은 벽난로, 온돌, 화로를 이용한 난방이나 오븐을 이용한 요리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최근에는 조금 큰 규모의 정교한 장치를 통해서 바이오매스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시설들이 보급되고 있다. 현재 이들 시설에 연료로 들어가는 바이오매스는 나무를 벌채할 때나 목재를 가공할 때 나오는 나무찌꺼기를 대부분 이용한다. 유럽의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지에서는 나무 찌꺼기를 이용해서 만든 펠렛 난방기가 보급되고 있다. 펠렛은 찌꺼기 나무를 이용하고 다루기도 쉽고 자동적으로 투입될 수 있으며 게다가 가격도 비싼 편이 아니기 때문에, 석유나 가스가 아닌 재생가능 에너지로 난방을 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다.

 

바이오매스는 공기중의 이산화탄소가 축적되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에너지로 사용될 경우 이산화탄소는 단지 순환할 뿐 추가적으로 배출되는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산화탄소는 단지 설비를 제조하기 위해 투입된 에너지로부터 방출되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오매스는 대규모로 경작할 경우나 대규모 가공하는 과정에서 환경적인 측면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예를들어 토양의 침식, 물 사용, 비료나 농약의 투입, 생물 다양성, 자연경관 등의 면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바이오매스의 잠재량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바이오매스를 따로 경작하지 않더라도 음식물 쓰레기, 축산분료, 식품산업으로부터 나오는 찌꺼기, 도시에서 폐기되는 나무찌꺼기, 농촌의 짚 등만 잘 이용해도 상당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할 방도를 찾지 못해 야단들이고 음식물 쓰레기 대란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이것을 파묻거나 태우려 하지만 말고 에너지 자원으로 이용하면 대란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음식물 쓰레기를 발효시켜서 비료로 만드는 일은 하고 있지만, 아직 에너지를 얻는 시도는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유럽 등지에는 음식물 쓰레기나 축산분뇨를 이용해서 전기와 열을 생산하는 시설이 매우 많이 보급되어 있다. 독일의 프라이부르크시에서는 도시의 음식물 쓰레기를 모두 모아서 발효기에 넣어 가스를 생산하고, 이것을 가지고 전기와 열을 생산하는 시설을 돌리고 있다. 여기서 생산되는 전기의 양은 650만 킬로와트시이고, 열의 양은 1200만 킬로와트시 정도 된다. 유럽의 축산 농가에서는 분뇨를 발효시켜 가스를 얻고 이것으로 전기와 난방열을 생산하여 자체 소비하거나 전력망에 보내기도 한다. 발효기 속에서 남는 찌꺼기는 숲의 부엽토나 다름없는 고품질의 퇴비로 된다.

 

축산분뇨를 이용해서 가스를 만들어서 열병합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생산하고 열을 생산하는 것은 농촌에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줄 수 있고, 신자유주의로 인한 농촌의 피폐화에도 대항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농촌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생산해서 공급하면 지역의 자립 기반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쉽게 휩쓸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농촌에서 신자유주의 농산물 개방에 대해 크게 저항하는데, 이러한 기반을 마련하면서 저항을 하면 신자유주의에도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11강 현대문명과 교통

현대사회는 이동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동의 의미는 전에 비해서 훨씬 더 중요해졌다. 예를들어서 한국에서 100년 전 이동의 의미는 현재보다는 훨씬 떨어졌다. 사람의 이동, 물자의 이동이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유럽에서는 100년 전에도 물자와 사람의 이동이 매우 활발했기 때문에 이동의 중요성, 교통의 중요도는 매우 컸다. 그래도 지금보다는 물자와 사람의 이동은 훨씬 적었다. 지금은 유럽에서 거의 모든 사람과 물자가 유럽 전역을 움직이며 다닌다. 그러나 100년 전에는 유럽에서 기차와 배가 다니면서 사람과 물자를 실어날랐지만 서민들이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필수적인 생활용품까지도 대량으로 이동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대사회에서 사람과 물자와 정보의 움직임이 매우 활발해졌기 때문에 현대문명에서 교통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교통은 사람, 물자, 정보 이동의 핵심 인프라로 작용하고 있다. 이 교통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현대문명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토록 경쟁을 하고 전쟁까지 치르는 것이다. 석유는 교통망이라는 핏줄에 공급되는 혈액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혈액을 확보해서 교통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 한 국가 시스템, 세계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혈액이 사라지면 사람이 죽는다. 마차가지로 석유라는 혈액이 없으면 현대문명도 붕괴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석유를 확보하려는 분쟁이 일어나고, 가격이 크게 올라가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교통의 중요성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서 더욱 커졌다. 전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되어버렸고, 물자와 금융, 사람의 이동이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에 교통이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이 연결망 속에서 자동차, 비행기, 기차, 선박, 자전거가 움직여가는 것이다.

 

그런데 교통은 현대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지만 교통으로 인해서 많은 생태적 문제가 발생한다. 교통망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땅을 도로로 덮고, 활주로를 놓고, 공항을 건설하기 위해 숲을 없애고 땅을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뒤덥는 것이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숲 한가운데를 도로가 지나가면 생태계를 분리하는 일이 발생하고 어떤 경우에는 마을을 두동강내기도 한다. 생태적인 손상뿐만 아니라 마을을 분할한다는 면에서는 문화적인 손상까지도 유발하는 것이다. 지상뿐만 아니라 지하에 건설하는 터널도 손상을 가져온다. 늪지를 훼손하거나 지하수를 훼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도로를 건설할 때 또 한가지 유의해야 할 손상은 도로가 빗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빗물은 보통 땅속으로 스며들고 남은 것이 지상으로 흘러간다. 스며든 물은 지하수를 형성한다. 그러나 도로를 뒤덮어버리면 지하로 스며들어가는 물의 양이 적어지기 때문에 지하수가 형성되기 어렵다. 넓은 들판에 도로를 놓는 것은 지하수 형성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한다. 넓은 땅에 빗물을 막는 선 하나가 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도로를 놓는 것이 지하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도시에서는 땅을 건물로 대부분 덮은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에 도로를 더 많이 건설하면 더 많은 땅이 막혀버리기 때문이다.

 

교통이 가져오는 손상에는 대기오염도 포함된다. 교통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오염물질들이 공기중에 퍼져서 대기의 질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이들 오염물질 중에는 미세먼지도 포함되어 있다. 미세먼지의 위험에 대한 연구는 요즈음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미세먼지가 생명에 위험하다는 연구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다. 지상에서뿐만 아니라 해상에서도 교통은 많은 환경손상을 일으킨다. 배에서 사고가 발생하여 기름이 누출되면 바다 생태계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엑손발데즈호의 난파사건이다. 이 배는 유조선인데, 알래스카 근해를 지나가다가 난파하여 알래스카 해안에 많은 기름을 쏟아냈다. 아주 넓은 지역이 기름으로 오염되었다. 해안을 따라 700킬로미터, 3만 킬로미터가 기름으로 오염되었다. 남한의 면적이 약 9만 킬로미터이니까 남한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면적이 기름으로 오염된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바다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선박이 모두 석유를 연료로 사용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약간의 사고나 고장이 나도 기름이 바다로 누출되는 일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엑손발데즈호의 사고는 20년 전에 일어난 것이지만 오염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따라서 복원작업도 계속 수행되고 있고, 얼마만큼 복원되었는지 조사하는 연구작업도 계속되고 있다. 항공운송도 환경파괴를 낳는다. 항공을 통한 교통의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나 파괴의 정도는 작지 않다. 비행기는 높은 하늘, 성층권 가까운 곳을 움직인다. 비행기가 움직이면 많은 배기가스가 발생한다. 이들 배기가스 중에는 탄화수소, 질소산화물, 이산화탄소, 에어로졸이 있다. 이것들 중에서 질소산화물은 성층권에 들어가면 오존층을 파괴하는 작용을 한다. 이산화탄소와 에어로졸은 지구온난화를 일으키는 데 기여한다.

 

교통은 문화적인 부작용도 가져온다.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사람들의 이동거리가 길어졌다. 이로 인해 도시의 발달이 전과 다른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전에는 이동이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승용차를 이용해서 멀리 짧은 시간에 갈 수 있게 됨에 따라 도시가 넓어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전에는 빠른 이동이 어려웠기 때문에 도시는 집중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일터, 주거지, 상가 등이 한곳에 섞여서 몰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러한 것들이 섞여 있지 않고 여기저기 퍼져 있다. 서울에서 그러한 모습을 금방 볼 수 있는데, 분당이나 일산, 상계동은 주거지가 대부분이고 서울 도심에는 주로 사무실이 몰려 있다. 분당이나 일산에서 서울 도심으로 사람들이 오가는데, 이것이 바로 교통수단이 매우 발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통은 에너지를 많이 소비한다. 교통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는 대부분 석유이다. 미국의 경우 대부분의 석유가 교통수단으로 들어간다. 현재 교통시스템을 유지하는 수단은 대부분 화석에너지이다. 현대문명에서 교통시스템은 대단히 중요하다. 유지하는 것이 현대문명의 존속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스템이 지금처럼 계속 유지되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앞으로 이러한 화석에너지에 의존하고 땅을 계속 뒤덮는 도로에 의존하는 교통시스템은 지속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이 수백년 지속될 수 있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화석에너지원의 고갈, 기후변화, 대기오염 등은 현재의 교통시스템이 오래 지속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교통시스템이 생태적인 것이 되어야만 지속이 가능할 것이다.

 

12강 생태적인 교통시스템

교통은 현대문명의 이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고도 교통을 유지할 수는 없다. 수십년간 희생을 감내할 수 있다면 시스템은 수십년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후 시스템이 붕괴된다면 현대문명은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교통시스템을 생태적으로 바꾸는 일은 수십년이 아니라 백년을 내다보며 접근해야 한다. 예를들어서 도로가 차로 막힌다고 해보자.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손쉬운 방법으로 택하는 것이 도로를 넓히는 것이다. 그러면 도로가 넓어졌기 때문에 더 많은 자동차가 나와서 달릴 것이고, 도로는 곧 전과 같아질 것이다. 이것은 매우 단기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이다. 수년간은 도로를 넓혀서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그후에는 어떻게 될지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가서 또 도로를 넓힌다면 다시 수년간은 교통이 괜찮아지겠지만 그 다음에 다시 교통이 막힌다고 해서 도로를 또 넓힐 수는 없다. 그때는 도로를 넓힐 수 있는 땅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땅이 모두 도로에 먹힐 것이다.

 

서울에서는 모자라는 땅을 이용하기 위해 수십층 이상의 고층아파트 단지를 건설하고 아파트단지 사이에는 넓은 도로를 건설하는 방식으로 도시계획을 한다. 뉴타운 건설도 이러한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주거공간을 확보하고 교통도 해결하자는 것이다. 최근에는 백층 가까운 아파트를 건설하고 아파트 동 사이에는 넓은 녹지공간을 만들어서 녹지를 확보하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녹지공간이 더 많이 확보될 수 있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방식의 주거지 건설방식보다 훨씬 환경친화적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그러나 생태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때 이러한 방식의 도로와 주거단지의 건설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단지를 단독주택단지와 비교하면 하늘에서 바라보면 아파트단지가 많은 녹지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단지는 땅속에서 바라보면 콘크리트로 뒤덮여 있다. 콘크리트만 발견되지 나무뿌리나 지렁이나 미생물 같은 생태적인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지하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땅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독주택단지에는 주택마다 마당이 있고, 이 마당에서 빗물이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땅 속 깊숙한 곳까지 나무뿌리가 들어가고, 그 땅에는 지렁이와 미생물들이 산다. 수십년 후 도시를 좀더 생태적인 곳으로 만들려고 할 때 고층아파트 단지는 크게 변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에 단독주택 단지는 조금만 변형해도 생태적인 곳을 만들 수 있다.

 

도시계획의 측면과 주거방식이라는 측면에서 교통시스템을 생태적인 것으로 바꾸려 한다면 수십년 이상의 장기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시스템이 오랫동안 잘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교통시스템을 생태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땅을 적게 덮으면서도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서울을 예로들어보면 지금까지 서울의 교통시스템은 주로 도로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말할 수 있다. 교통량이 늘어나면 도로를 확장하고,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서 또 도로를 확장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대중교통 시스템도 존재하고 대중교통을 확충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중교통보다는 자동차를 위한 도로를 건설하는 쪽에 치중했던 것이 사실이다. 대중교통을 훨씬 편리하고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도로를 확장하지 않으면서도 이동을 손쉽게 만드는 방식이 중심이 되지 못한 것이다.


교통시스템이 생태적인 것이 되려면 대중교통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서울같은 대도시에서는 특히 대중교통이 중심이 되어야만 도시가 생태적인 곳이 될 수 있다. 서울시에서는 2004년에 대중교통 시스템을 개선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내용은 한번 요금을 내면 버스와 지하철을 자유롭게 갈아탈 수 있도록 하고, 버스전용차선을 연장하고 버스노선을 정비한 것이다. 시청과 광화문에는 보행자를 위해서 횡단보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서 대중교통을 전보다 조금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대중교통 이용자가 크게 늘어나지는 않았다. 대중교통이 조금 편리해지기는 했지만 자가용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대중교통으로 많이 옮겨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가용 이용자들의 자가용에 대한 집착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직 편리하고 생태적인 대중교통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서울시의 교통 시스템을 진정으로 생태적인 것으로 만들려 한다면 대중교통을 더 편리하게 만들어야 하고, 승용차 이용을 불편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를들어 지하철과 버스를 지금보다 훨씬 쉽게 갈아탈 수 있도록 하고, 매우 불편하게 되어 있는 지하철 갈아타는 것도 편리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지하철은 매우 깊다. 계단이 아주 많아서 내려가고 올라오기가 쉽지 않다. 만일 계단 곳곳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한다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일이 훨씬 편리해질 것이다. 지하철에 자전거를 싣고 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면 자전거 이용자의 수도 늘어날 것이고 많은 사람을 대중교통으로 끌어올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자전거 길을 제대로 만들고 연결해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전거는 도시에서 매우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오염물질을 만들어내지도 않기 때문에 깨끗하기도 하지만, 석유를 소비하지도 않는 매우 생태적인 교통수단이다. 자전거 도로를 제대로 연결해서 자전거 교통을 늘리는 것은 교통시스템을 생태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필수적인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생태적인 삶을 추구하려 한다면 승용차 대신 대중교통수단, 자전거, 기차 등을 이용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승용차가 꼭 필요한 때가 있다. 이때는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 외국에서 시민들이 운영하고 있는 자동차 공유하기도 ?은 예이다. 자동차공유하기는 수십명이 자동차 몇 대를 함께 이용하는 것이다. 이들은 보통 때 도시에서 생활할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그러나 어디 먼데 가족들과 함께 나갈 때나 특별히 필요할 때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자동차를 이용한다. 이것은 매우 경제적이기도 하고 생태적 교통시스템을 위해서도 좋다. 불필요한 자동차 이용을 크게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13. 현대문명과 농업

현대사회엣 농업은 산업이 되었다. 농업이 산업이라는 것은 지금은 어느정도 상식적인 이야기에 속한다. 그러나 현대 이전의 농업은 산업은 아니었다. 어떤 상품을 만들듯이 상품생산업은 아니었던 것이다. 세계 어디에서나 농업은 주로 가족에 의해서 영위되고 가족의 먹을거리도 상당부분 조달하는 가족농업이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농업은 상품을 생산하는 산업이다. 대부분의 농업은 곡물생산이든 축산이든 판매를 위한 식품생산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무역협정을 맺는다고 할 때 농민들이 크게 반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농산물이 상품으로 취급되고 있고, 이것이 외국에서 값싸게 들어온다면 농업이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농업은 미국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으로 산업적으로 이루어진다. 미국에서는 곡물을 아주 넓은 영토에서 생산한다. 한 사람이 수십만평의 경지를 몇 명의 농업노동자를 고용해서 경작으로 한다. 이때 필수적인 것은 많은 농약, 많은 비료, 커다란 기계이다. 트랙터, 콤바인, 비행기를 이용해서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고 농약과 비료를 뿌리면서 하는 것이 미국의 대표적인 농업방식이다. 여기서 생산된 곡물은 상품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대량생산된 것이기 때문에 그 지역을 넘어서 미국 전역과 전세계로 팔려가는 것이다.

 

곡물생산뿐만 아니라 축산업도 마찬가지다. 전에는 농가에서 가축을 한두마리 길러서 잡아먹거나 시장에 나가서 팔았다. 손익계산도 하지 않았다. 음식찌꺼기를 주며 몇 년동안 키워서 내다 팔아 약간의 목돈을 얻는 것 정도였을 뿐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축산업에서는 수십, 수백마리의 가축을 키우기 때문에 상업적인 계산을 철저하게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 농업은 산업, 기업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축산업의 축사를 보면 가축 한 마리에게 돌아가는 공간이 아주 좁다. 그 이유는 공간을 넓게 줄수록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축산업에서는 소비자가 매력적으로 느끼는 고기들을 키우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시장에서 상품성이 아주 높은 것을 생산하는 것이 더 많은 이윤을 남기게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한약 소고기, 인삼 소고기, 약초 소고기를 만드는 것도 바로 잘 팔리는 상품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소고기로 가장 유명한 것이 고베 소고기이다. 이것은 시장에서 보통 소고기보다 3-4배 이상 비싸게 팔린다. 상품성이 대단히 높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특별한 방식으로 소를 사육하기 때문이다. 고베 소고기는 곡식, , 감자로 만들어진 사료를 먹이고, 맥주를 먹이고, 특히 여름에는 식욕을 돋구기 위해 맥주를 자주 마시게 한다. 고베 소고기에서 가장 특별한 것은 주인이 매일 소를 두세시간씩 마사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주 부드럽고 특별한 소고기가 만들어진다.

 

고베 소고기는 축산이 산업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전에는 가축을 길렀던 이유가 반드시 고기를 얻어야만 했기 때문은 아니다. 고기를 얻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 주목적은 퇴비를 얻기 위함이었다. 고기는 부산물이고 분뇨를 썩힌 퇴비가 주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가축 분뇨 속에는 질소나 유기질 성분이 많이 들어 있다. 이것을 작물에게 주면 훌륭한 비료성분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 농업에서는 축산분뇨는 처치곤란한 쓰레기이다.

 

전통적으로 농업에서 가축을 길렀던 이유는 고기를 얻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작물 재배에 필요한 질소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고기는 이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이었을 뿐이다. 재래 농업에서 작물 재배와 가축사육은 하나의 순환고리 속에 들어 있었다. 이 고리 속에서 가축들은 농토에서 나오는 부산물과 풀을 먹고 질소를 축적했고, 질소는 배설물의 형태로 농토로 돌아가 작물의 성장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현대 농업에서 이러한 순환고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축산은 고기 자체를 생산하여 이윤을 얻기 위한 것으로 바뀌었고, 가축의 배설물은 처치 곤란한 폐기물이 되었으며, 가축 배설물로부터 얻던 질소는 질소 비료가 대신하게 되었다. 질소 비료는 공기 중의 질소를 암모니아의 형태로 고정해서 만드는데, 암모니아 생산은 높은 온도와 앞력을 요하기 때문에 많은 양의 에너지가 투입된다. 질소 1톤을 생산하는 데 석유로 환산한 에너지가 1.9톤이 들어간다는 것을 고려하면 현대 농업이 얼마나 에너지 집중적이고, 에너지 면에서 비효율적인가를 알 수 있다.

 

전세계의 농업, 특히 선진국에서 사용되는 에너지는 일차 에너지의 20% 이상을 차지한다. 아주 많은 양의 에너지가 농업 전체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건물에서 소비되는 에너지가 25%이고 교통의 경우도 25%인데 농업에 들어가는 에너지도 상당한 것이다. 농업이 이토록 산업이 되었다면 농업도 세계화 속에 들어가 있는 셈이다. 지역적으로 생산물이 분화되어 있고, 이 상품들이 전세계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열대성 식품은 구경하기 어려웠다. 바나나를 구경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아주 귀한 식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식품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전세계에서 농업의 분업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식량자급률이 20% 조금 넘는데, 이는 대부분의 식량을 수입한다는 것이다. 공산품을 수출해서 식량을 얻는 것이다.

 

이렇게 식품이 전세계에서 이동하게 됨에 따라 음식문화도 크게 달라졌다. 음식문화도 세계화된 것이다. 전에 한국에서는 쌀이 매우 중요한 식품이었다. 모든 사람이 쌀밥을 제대로 먹는 것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과제였다. 쌀 증산을 위해서 대통령까지 나서서 독려하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많은 식품이 값싸게 들어올 수 있게 되었고 음식문화가 바뀌어서 쌀소비가 줄었기 때문에 이제는 논을 놀리는 것을 권장할 정도가 되었다. 지금은 쌀이 남아돌아가고 해마다 쌀소비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 음식문화가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전에는 하루 세끼 쌀이 주성분인 밥을 먹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침에 우유와 빵을 먹고 점심에 국수나 양식을 먹고 저녁에만 밥을 먹는 가정도 꽤 많을 것이다. 이렇게 음식문화가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한 지역에서 음식문화가 바뀌는 것은 그 지역 문명의 변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어느 지역에서 음식문화가 오랫동안 크게 바뀌지 않았다면 그 문명은 이 기간 동안 계속 이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국의 밥, , 김치 중심의 음식문화는 천년 이상 계속된 것이다. 이는 한반도의 문명이 한번도 붕괴되지 않고 이어져왔음을 뜻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문명이 완전히 붕괴되는 일이 없었고, 음식문화도 마찬가지로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바뀐 경우도 있다. 반면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음식문화가 변화를 겪고 끝내는 음식문화 자체가 사라진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문명도 당연히 붕괴되었다. 대표적인 예는 이스터섬 문명이다. 이스터섬에 사람들이 처음으로 섬에 들어온 때는 1000여년 전이다. 그후 섬에서는 1500년 경까지 약 2만명의 사람이 소규모의 문명을 만들어 번성하다가 붕괴를 맞고 말았다.

 

이스터섬의 자연환경은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사람들이 처음 정착했을 때 섬은 거대한 야자나무 등의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불어나는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한 농토의 개간이 늘어나고, 거대 석상을 세우기 위한 나무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숲은 점점 사라져갔다. 이스터섬의 숲이 사라지고 자연환경이 바뀜에 따라 섬 주민들의 음식문화도 달라져갔다. 음식으로 사용된 동물뼈의 집적층을 조사한 과학자들은 초기의 뼈와 후기의 뼈가 커다란 차이를 보임을 발견했다. 뼈층의 아래 쪽에서는 돌고래나 참치 같은 큰 물고기의 뼈, 그리고 큰 조류의 뼈가 많이 발견되었다. 이는 사람들이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음을 의미하는데, 아마 섬 주민들은 지름이 2미터나 되는 야자나무를 이용해서 커다란 카누를 만들 수 있었고, 이 카누로 꽤 먼 바다로 가서 돌고래, 참치, 물개 등을 잡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위의 층에서는 이러한 큰 바다생물들의 뼈가 거의 사라져버렸는데, 이는 숲의 파괴가 진행됨에 따라 배를 제작할 수 있는 야자나무도 점차 없어져갔기 때문이다. 이스터섬의 숲은 17세기에는 완전히 사라져버려서 18세기 초 유럽의 항해자가 최초로 남긴 이스터섬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큰 나무는 한 그루도 남아있지 않았다. 당연히 음식문화도 사라져버려서 17세기경의 뼈 중에서는 쥐의 뼈는 물론이고 사람의 뼈까지 발견된다. 이때는 이스터섬 문명이 지속불가능한 지경을 넘어 붕괴 상태였으므로, 붕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식인까지 해야만 했던 것이다.

 

지구화가 진행되고 국제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음식문화가 변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한국의 경우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쌀 소비가 줄어든다고 우려하는 목소리, 고기와 피자 같은 외래 음식에 길들여져서 김치와 된장 같은 전통음식을 싫어하게 된 청소년들이 민족정체성을 잃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농업의 파산으로 식량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의 도래에 대한 걱정 등 다양한 소리가 많다. 일본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우려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리들은 모두 타당한 것이기는 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민족주의적인 시각이나 식량안보의 차원에서 접근하기보다는 지속가능성의 차원에서 접근해야만 본질에 가까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음식문화의 변화는 그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멸망해 없어진 이스터섬이나 마야문명에서는 멸망이 진행됨에 따라 식단도 점차 초라해져갔다. 현대사회 선진국의 식단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변화되어 왔다. , 감자, , 국 중심의 식단에서 고기, 과일, 채소, 유제품이 풍성해지는 쪽으로 바뀌어갔다. (south)의 국가들이 추구하는 바도 다르지 않다. 개발을 통해서 풍부한 식단을 얻겠다는 것이 발전에 대한 남의 생각이다. 한국은 개발에 성공했고, 고기가 많이 들어가고 풍부한 식단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식단이 지속가능성을 보장해주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깊이 따지지 않는다. 지구화시대에 발전이나 융성은 지역이라는 좁은 차원, 그리고 수십년의 시간을 기준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어느 지역의 발전이라는 것이 다른 지역의 착취를 수반하는 것이고, 수십년의 발전이 그 다음 수십, 수백년의 발전기반을 파먹는 것이라면 이 경우 발전은 붕괴의 조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음식문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풍부한 식단이 다른 지역을 파괴하고 후손들의 삶의 기반을 파먹는 것이라면, 음식문화의 번성은 결국 붕괴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화 시대 현재의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음식문화는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 어떤 지역의 착취를 기반으로 한 것이고, 후손들의 생존터전을 파괴함으로써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쇠고기 소비를 살펴보자. 한국과 일본에서 쇠고기의 소비는 10여년 전에 비해 2배 가량 늘어났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50여년 전과 비교하면 100배 가량 늘었을지 모른다. 일년에 한두번 식단에 올라가던 것이 이제는 일년에 100일 이상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쇠고기는 대부분 지역의 산물이 아니다. 수입된 것이거나, 지역 생산물처럼 것으로 보이지만 수입된 사료를 이용해서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수입된 것인가? 대부분 북미, 남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수입된 것이다. 남미에서 수입된 것은 아마존 밀림을 파괴한 대가로 얻어진 것이고, 북미에서 온 것은 고기의 형태든 사료의 형태든 화석연료를 대량으로 사용한 대가로 얻어진 것이다.

 

얼마 전 아마존 지역에서 미국인 수녀 도로시 스탱(Dorothy Stang)이 살해되었는데, 올해 2월에만 1200명의 농부가 이 지역에서 죽었다. 목장을 넓히려는 목장주들에게 저항한 대가인데, 전세계의 브라질산 쇠고기 소비가 해마다 크게 늘어나기 때문이다. 2004년에만 목장확장 작업에 의해서 사라진 아마존 밀림은 26000제곱킬로미터나 된다. 세계의 쇠고기 소비 증가가 아마존 밀림을 대규모로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브라질에서는 소 사육은 열대우림이라는 에너지 생산자를 파괴하지만, 북미의 쇠고기 생산은 화석연료라는 에너지원을 파괴한다. 북미에서는 석유로 만든 비료, 농약 그리고 석유로 움직이는 트랙터, 자동차 등의 영농기구를 이용해서 사료를 생산하고, 전기와 석유를 대량으로 소비하는 대규모 축사에서 사료를 이용해서 고기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쇠고기 소비의 증가는 아마존 숲을 파괴하고 화석연료를 대량으로 소모함으로써 지구환경을 파괴하는데, 동시에 온실가스 방출을 크게 늘림으로써 기후변화를 더욱 악화시킨다. 아마존 숲은 온실가스 고정장치이다. 대량의 이산화탄소가 숲의 나무 속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숲이 파괴되면 숲의 나무에 고정되어 있던 이산화탄소가 대기 속으로 들어가고 대기중 온실가스 농도가 증가한다. 북미의 화석연료의존 소 사육이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증가시킨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외에 소 사육은 다른 형태의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내놓는다. 소의 위장 속에서 많은 양의 메탄가스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20배나 강한 온실가스이다. 그러므로 쇠고기 소비증가는 대기중 온실가스 농도를 증가시키고, 그 결과 기후변화를 더 악화시키는 것이다.

 

14강의 생태적 농업과 생태적 식습관

현대사회에서 농업의 현상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상품생산으로서의 농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식문화까지 크게 바뀌고 있다. 새로운 음식이 크게 유행하고, 퓨전음식도 유행하는 것이 현상이다. 이러한 농업을 생태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는지, 어떠한 것이 생태적인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 농업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이것을 에너지를 적게 쓰는 쪽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유기농이 이런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것인데, 유기농 식품이 반드시 생태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유기농 방식이 어느정도는 생태적인 농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엄격하게 구분해서 진정으로 생태적인 유기농이라면 농약과 비료도 쓰지 않고 기계도 가능한 한 쓰지 않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생태적 농사방식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농사를 짓느냐고 반론을 펴는 것이다. 물론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농사를 짓는 것이 쉽지는 않다. 약간의 기계를 투입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처럼 기계를 대량으로 투입하는 것은 생태적인 농업과 아주 거리가 멀다.

 

유기농, 생태농을 국가적으로 대대적으로 벌이는 곳도 있다. 쿠바나 유럽의 오스트리아를 들 수 있는데, 쿠바는 국가 전체가 대부분 유기농을 하고, 오스트리아는 전체 농업의 15% 가량이 유기농을 한다. 1990년대 초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무너졌을 때 전세계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나라는 쿠바였을 것이다. 쿠바는 소련의 적대국 미국의 코앞에 있는 맹방이었기 때문에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거의 무상으로 엄청난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이들 원조물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석유였다. 소련의 석유원조로 쿠바는 석유를 최대로 낭비하는 산업구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농업분야에서 쿠바는 세계에서 단위면적당 석유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국가에 속했는데, 기계농업, 비료와 농약에 의존하는 석유의존 농업이 쿠바의 전형적인 농업형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자 소련에서 오던 석유가 갑자기 끊어졌다. 적응의 기간도 전혀 없었다. 석유에 의존하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멈추어섰고, 쿠바의 경제, 쿠바의 농업생산은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바 사람들의 평균체중은 10킬로그램 이상 줄어들었고, 1인당 칼로리섭취는 35% 이상 감소했다. 수천명이 영양실조로 장님이 되는 일도 벌어졌다. GDP85% 감소했고, 석유소비는 50% 감소했으며, 쿠바의 경제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우리 시각에서 보기에 이 시점에서 쿠바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을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속으로 편입되어 달러를 빌려서 석유를 사오고 이것으로 기존의 석유의존 산업생산시스템을 계속해가는 길 정도가 선택할 길이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쿠바는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의, 석유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다. 현재 쿠바는 세계 최고, 최대의 유기농 국가로 평가받고, 최상의 도시농업 국가로 평가받는다. 농업생산량은 유기농을 통해서도 현재 소련붕괴 전의 90%수준을 회복했다. 농업에서의 에너지소비는 대략 90% 가량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유기농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쿠바의 유기농 실태를 견학하러 가는데, 쿠바의 유기농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석유로부터 벗어나려는 부단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노력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쿠바는 석유의존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대규모 농장은 소농으로, 화학농은 유기농으로 바뀌었고, 도시농업이 번성하게 되었다. 쿠바에서 도시농업은 쿠바의 전체 채소 소비의 60%를 공급하며, 수도 아바나의 경우 식품소비의 절반이 도시농업을 통해서 생산된 것이다.

 

쿠바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쿠바는 석유의존에서 벗어나기가 가능하다는 것, 그렇게 하고도 부족함없이 어느정도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것, 진정한 지역화가 어떤 것이라는 것, 분산적인 식량생산, 분산적인 에너지수급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쿠바와 달리 북한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쿠바나 북한은 미국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고 있고, 경제봉쇄를 겪고 있고, 소련의 붕괴후에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는 점에서 아주 비슷한 처지이다.


그런데 북한은 쿠바와 달리 여전히 석유로 대표되는 화석연료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벗어나려 생각조차 하지 않고, 비료와 농약에 의존하는 농업을 고집하고 있고, 중앙집중적인 방식으로 생산체제를 끌어가려 하고 있다. 물론 자연환경의 측면에서 북한은 쿠바보다 훨씬 조건이 좋지 않다. 쿠바처럼 석유에서 벗어나 분산적인 유기농으로 나아가는 것이 훨씬 어려울지 모른다. 그렇다고 가능성까지 닫아놓을 수는 없을 터인데, 북한은 석유와 원자력에 의존하는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거의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 댓가는 엄청나다. 수백만이 굶어죽은 기근이라는 내부의 파탄과 국제정치적으로는 북핵위기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쿠바와 북한의 사례는 화석연료 의존, 거기에 더해서 원자력 의존이 평화를 가져오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쿠바에서는 도시농업도 매우 성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텃밭을 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도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도시 밖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텃밭이 진정으로 도시농업의 형태를 가지고 이것이 도시를 생태적으로 바꾸는 의미를 가지려면 도시 안에 많은 텃밭이 생겨야 한다. 서울의 경우 도시 안에 많은 텃밭이 생겨야 하고 여기서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서울에 도로와 주차장이 매우 많은데 대중교통을 크게 정비하고 남는 도로를 텃밭으로 돌리면 도시 내부에 많은 텃밭이 생겨나고 여기서 상당한 양의 식품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농업은 에너지 대차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비효율적이라 할 수 있다. 투입된 에너지의 양에 비해 뽑아내는 에너지의 양이 아주 적기 때문이다. 많은 양의 석유를 투입해서 수확을 한 쌀이나 옥수수를 에너지로 환산하면 에너지 대차가 얻어지는데, 미국의 경우 1945년에는 1칼로리를 투입해서 3.70칼로리의 옥수수를 수확했지만, 1970년에는 1칼로리에 2.82 칼로리만을 얻었을 뿐이다.


 이는 에너지 사용량은 313%나 증가했지만, 수확량은 238%밖에 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가축은 광합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에너지원인 곡식 등을 먹고 성장하기 때문에 에너지 대차가 부정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래의 사육 방식과 현대 산업축산을 비교하면 그 부정적 대차의 정도는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방목만을 통해서 소를 사육할 경우 1칼로리를 얻기 위해 투입하는 에너지는 1칼로리가 채 못된다. 에너지 대차가 아직은 흑자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에 미국에서 산업축산의 경우 1칼로리를 얻기 위해 투입해야 했던 에너지는 9.6 칼로리에 달했다

 

생태적인 식습관이란 두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생태적인 방식으로 농사를 지은 농산물을 먹는 것이 생태적인 식습관이라 할 수 있고, 또한 육식을 가능한 한 피하는 것이 생태적인 식습관이라 할 수 있다. 육식은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고기를 생산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이다. 육식은 농산물의 세계적인 이동에 크게 의존하거나 조장한다. 그러므로 지역의 유기농 식품을 먹는 것과 채식을 위주로 하는 식습관은 농업의 세계화에 저항하고, 거대농업자본에 대항하고, 에너지위기와 기후변화에 대항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육류 1그램을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곡물의 양은 약 10그램이다. 곡물 생산 때 들어가는 에너지나 물의 10배나 많은 에너지와 물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류를 많이 먹는 것은 비생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15강 생태적인 농업: 사례

생태적인 농업의 사례로서 소개할 만한 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매우 다양하게 존재한다. 도시에서 노인이나 아이들이 일구는 작은 텃밭도 생태적인 농업의 사례에 들어갈 수 있고, 유럽의 오스트리아나 독일 등지의 꽤 넓은 농토에서 기업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유기농도 생태적인 농업에 속한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족이 중심이 되어 경영하는 소농만이 생태적인 농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생태적인 농업이 반드시 소농 위주의 농업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자기자신만을 위한, 농약으로 오염되지 않은 푸성귀를 얻기 위해 텃밭을 가꾼다는 아주 소극적인 의미의 유기농을 하는 경우라도, 현대농업의 농약오염이라는 문제에 대한 인식이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생태적인 농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일꾼을 수십명 또는 수백명 고용하여 기업적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유기농법을 도입하는 경우도 그것이 단지 돈을 더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면 생태적인 농업의 좋은 사례에 속할 수 있다.


농사란 땅을 일구어서 먹을거리를 얻는 행위이다. 이 행위는 땅 한뙈기를 이용해서 할 수도 있고, 넓은 땅을 이용해서 할 수도 있다. 산비탈을 이용할 수도, 넓은 평지를 이용할 수도 있다. 이렇게 농사 행위가 다양하기 때문에 생태적 농업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이들 농업의 형태 중에서 기업농은 생태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기업농을 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기계에 의존해야 하고 농약과 비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않겠느냐는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기업농으로 유명한 현대아산의 서산농장을 떠올리면 그런 생각을 하기 십상이다. 서산 농장에서는 대단히 넓은 간척지에 논을 조성하여 벼농사를 하고 있는데, 이곳은 비행기로 농약을 치고 콤바인으로 추수를 한다. 농약, 비료, 기계 세가지가 빠져서는 안되는 곳이 바로 서산의 대규모 농장이다. 한국에서의 기업농에서 바로 이러한 형태의 농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업농은 생태적이 아니라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퍼지게 된 것이다.


소농에 기반을 둔 농업형태가 생태적 농업에 적합하고 특히 한국에서 가장 바람직한 농업 형태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기업농이 생태적이 될 수 있음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에는 생태적인 기업농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기업농이라 할 만한 농장에서 유기농을 하는 사례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유럽의 농장은 한국의 농장보다 규모가 크다. 가족농이라 해도 경작하는 농토의 면적은 한국에서 한 가족이 경작하는 면적의 수십배에 달하기도 한다. 게다가 여러 명의 인부를 상시적으로 고용하기도 한다. 영국의 평균 농장면적이 70ha, 독일 36ha라는 것을 고려하면, 가족뿐만 아니라 인부도 고용해야 농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농장도 한국의 기준으로는 기업농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들 농장 중에서도 생태적인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곳도 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농장에서도 생태적인 농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에서 생태적인 농업은 시작단계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러한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꽤 존재한다.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과 농업 공동체가 전국 여기저기에 퍼져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유기농 비율은 높지 않다. 2004년 국제농업기구(FAO)의 통계에 따르면 0.05%에 불과하다. 오스트리아의 14%, 독일의 4%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것이다. 그래도 수천개의 농가에서 유기농을 하고 있으니 전국에 널리 퍼져있는 셈이다.

 

한국 사례 1

한국에서 유기농을 처음으로 도입해서 시작한 곳은 정농회라 할 수 있다. 정농회는 원경선 목사가 기독교 신앙에 입각하여 창시한 곳으로 처음부터 유기농에 기반한 바른 농사를 추구했다. 정농회에서 생태적인 농사를 배우고나서 자기 농사를 시작한 사람들도 많다. 이들 중에서 한국 농업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고 있고, 그 해결책이 유기농이라고 생각하면서 전북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다. 그는 20년이 넘게 유기농으로만 농사를 지어왔다. 그가 그동안 고집했던 농업방식은 유기농에 기반한 자립농이라 할 수 있다. 가족에게 필요한 식량의 상당한 부분은 직접 농사를 지어서 얻고, 먹고 남는 것을 판매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의 농사방식에 대한 철학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이 어떻게 잡초나 벌레를 이길 수 있는가? 잡초는 인간이 먹으려고 농사 짓는 작물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농사가 1만년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잡초는 어쩌면 인류보다 더 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 손이 가야 자라는 농작물과 달리 잡초는 스스로 오랫동안 자신의 생명을 이어왔기 때문에 잡초와의 전쟁에서 사람이 이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벌레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멸망해도 벌레와 잡초는 살아남는다. 인간은 벌레를 익충과 해충으로 구별하지만 사실 이러한 구분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익충과 해충은 없다. 이런 구별이 생긴 이유는 바로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 자신만 편리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다. 자연에는 그런 구별이 전혀 없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농사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바로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 속에서 농사가 한쪽에 조화롭게 존재하는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다. 그의 농사에는 농약, 비료가 사용되지 않는다. 그는 돈이 되고 경작이 쉬운 한가지 작물만을 재배하는 단일경작도 하지 않는다. 그의 농장에는 벌레와 잡초가 농작물과 함께 존재한다. 농작물도 농토에 한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혼재한다. 예를들어 옥수수와 콩을 섞어서 심는 것이다. 그리고 추수를 하면 열매와 필요한 부분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농토에 남겨둔다. 잡초도 베어낸 다음에 그 자리에 그대로 둔다. 소변과 대변도 재래식 변소에서 잘 썩힌 다음에 논밭으로 돌려준다. 그러므로 그의 농사는 섞어짓기, 돌려주기 등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작물을 섞어서 재배하는 섞어짓기, 그리고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농토에 놓아두고, 추수한 것을 먹은 다음에 나오는 대소변을 다시 농토로 돌려주는 순환농업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땅에서 나온 것은 땅으로 돌려주고 또한 땅에서 살아가는 잡초나 벌레와도 어느정도 조화를 꾀하면서 농사를 짓는 공생농법, 순환농법은 생태적인 농업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으면 수확이 줄어든다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다. 병충해를 완전히 방지하지 못하고, 비료를 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전북의 유기농사꾼으로 잘 알려진 그도 20여년 전 처음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몇해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병충해에 시달렸고, 이상한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농약을 치고 싶은 유혹에 질 뻔한 일도 있었다. 수확도 처음에 땅이 살아나지 않은 상태여서 다른 농토에 비해 크게 적었다. 그러나 몇 년 간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이겨낸 후에는 수확이 계속 늘어났고, 3년 후에는 농약을 주며 농사를 짓는 농토의 수확과 비슷한 수준의 수확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유기농도 어느 정도 단계에 올라서면 충분한 수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례 2: 문당리

문당리는 충남 홍성군에 있다. 이곳은 다른 농촌마을과 달리 젊은이가 꽤 있다. 한국의 농촌은 거의 고령의 농민들만 남아 있다. 젊은이는 간혹 볼 수 있을 뿐이고, 젊다고 해도 40대가 고작이다. 특히 젊은 여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젊은이 중에는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 동남아 처녀를 만나서 결혼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1960년대 말 한국에서 산업화가 시작된 이래 농촌의 인구는 계속 줄어들었다. 농촌에서 젊은 사람들은 도시의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도시로 빠져나갔다.


농촌은 산업노동력을 제공하는 기지였던 셈이다. 농촌에서 젊은이들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수도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초기 산업화 단계에서 농촌의 농업생산력이 크게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농촌에 농기계가 조금씩 도입되고, 새로운 품종이 보급되었기 때문에 농업생산력은 어느정도 유지될 수 있었다. 농업생산력의 유지는 산업화를 저돌적으로 추진했던 정부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농촌으로부터 들어온 값싼 노동인력에게 값싼 식량을 공급할 수 있어야만 산업화가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촌은 산업화를 위한 값싼 노동력과 값싼 식량의 공급처였던 것이다.


산업화를 지원해주는 배후기지로서의 농촌은 산업화가 어느정도 달성된 현재 그 기운을 거의 상실하고 말았다. 농촌인구는 크게 줄어들었고, 그나마 농촌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노인들이 되었다. 경작되지 않고 놀고 있는 농토의 면적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농촌이 살아나고 발전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노인들도 사망으로 인해 줄어들어가고 있으니 농촌의 사멸이 점점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당리에서는 이러한 사정과는 달리 비교적 젊은 농민들이 많다. 젊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는 이유는 농촌에서 희망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당리에는 젊은이들이 그나마 어느정도 남아있다는 사실은 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당리의 희망의 근거는 아마 생태적인 농업, 생태적인 농업을 통해서도 그런대로, 깨끗하고 오염되지 않은 농촌에서 농약에 중독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문당리에서는 모든 농가가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다. 한국에서 오리농법을 최초로 도입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서 20년 가까이 농사를 짓고 있는 주형로씨가 1993년 오리농법을 도입한 후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고, 최근에는 우렁이를 이용한 논농사도 겸하고 있다. 주형로씨는 홍성에 있는 풀무학교 졸업생으로 1978년부터 유기농을 해왔다.


그러나 농약과 제초제를 쓰지 않은 탓에 잡초를 제거하기가 쉽지 않았고, 이로 인해 소출도 보통 농법의 경우보다 적게 나왔다. 그런데 모내기 후 오리를 논에 풀어놓는 오리농법을 도입하고 나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벼농사짓기가 훨씬 수월해진 것이다. 오리는 벼 사이를 헤엄쳐 다니면서 잡초를 뜯어먹고 똥을 싸는데 똥은 거름이 된다. 오리농법의 장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오리들은 입으로 벌레와 유충들을 잡아먹고, 벼 사이를 누비며 벼의 뿌리와 날개를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벼포기들의 간격도 적당히 벌여주어 통풍과 채광도 잘되게 하는 일도 한다.

 

이렇게 잡초도 없애주고 거름도 주는 오리를 이용한 농법의 효과가 확인되자 그 마을의 다른 농민들도 오리농법을 받아들여서 모두 유기농을 하게 된 것이다. 문당리 사람들은 그저 각자 유기농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좀더 나은 농촌을 만들기 위해서 마을 차원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하고 있다. 공동체적 정신이 살아있는 생태마을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벼 한가마 값에서 1000원씩 뗀 돈으로 마을환경기금을 만들었고, 이 기금으로 흙건축 방식으로 환경농업교육관을 지었다. 여기서 마을 주민들은 회합 등의 마을단위 행사를 가지고 도시에서 온 방문객들은 생태농업 체험을 하기도 한다.

 

외국의 사례 1: 독일 헤르만스도르프의 슈바이스푸르트 농장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에 있는 헤르만스도르프의 슈바이스푸르트 농장은 생태농업을 하는 기업농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수는 수백명이 넘는다.

농장의 주인은 농장을 하기 전에 유럽 최대의 소시지 제조회사의 사장이었다. 그는 소시지 공장 경영자이던 시절 그의 회사에서 사용하는 고기가 어디에서 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축산업자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수천마리의 소와 돼지가 축산업자의 비좁은 우리에서 꼼짝 못하고 사료만 받아먹고, 우리 안은 암모니아 냄새가 코와 눈을 찌르고, 그 자극으로 뺨 위로는 눈물이 흐르는 곳이 바로 고기의 생산지였다.


그곳에서 가축들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주는 대로 먹기만 하다가 살이 붙으면 차에 실려 도살장으로 끌려간다. 어떤 돼지는 도살장에 가기도 전에 심장이 멎어 차에서 죽어 자빠진다. 죽으러 가는 마당에 잔뜩 겁에 질리고 흥분해 있다가 심장마비를 겪기도 하는 것이다. 도살장에서 죽은 소와 돼지의 고기는 냉동창고로 들어가고 얼마 후 냉동차에 실려 소시지공장으로 넘겨진다. 공장에서 고기는 냉동보관 중에 파괴된 맛을 보완하기 위해 몇가지 조미료가 첨가된다. 그후 분쇄기계를 거친 후 소시지 완제품으로 변신해 콘베이어 벨트 위로 굴러 쏟아진다. 우리 입 속으로 들어가는 소시지는 대부분 잘 일어서지도 못하는 살찐 소나 돼지가 긴 차량여행, 도살장, 냉동창고, 소시지공장이라는 여정을 거쳐서 나온 것이다.


슈바이스푸르트는 축산업자의 축사에서 받은 충격으로 결국 회사를 처분했다. 그후 그는 회사를 처분하고 마련한 돈으로 대안농업 재단을 설립하고 대안 농장을 만들었다. 그는 대안이란 우리의 식품생산 전반을 변혁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존의 관행농법과 식품가공은 수백만년에 걸쳐서 형성된 화석에너지를 집어삼키는 구조를 하고 있다. 빵이 우리 입 안에 들어가기까지는 농기계를 이용한 파종과 물대기, 성장기의 비료와 농약 투입, 농기계에 의한 수확, 자동장치 속에서의 도정과 분쇄, 그리고 전기오븐에서 굽는 단계를 거친다.


이 모든 단계에 석유와 전기가 투입되는데, 이것은 대부분 수십년이나 수백년이면 없어지고 마는 화석에너지로부터 온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물도 멀리서 끌어온 것이고, 쓰고 나면 그대로 버려진다. 고기가 얻어지는 과정은 이것보다 더 복잡하고 더 많은 에너지와 물을 잡아먹는다. 이런 방식으로라면 식량생산이 아마 백년도 못가서 끝장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렇게 가다가는 지구표면 위 수십센티미터밖에 쌓여있지 않은 부식토의 땅기운이 비료와 농약에 먹혀버리고, 기계사용과 산업축산으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와 메탄가스로 기후 혼란이 초래되고, 물은 점점 말라버린다.


관행농법은 아무래도 지속가능한 것이 못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수백, 수천년이 지속되어도 여전히 부식토층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고, 지구의 에너지 흐름과 물의 순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농사여야 한다. 결국 순환농법만이 유일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순환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고 해서 기술이 배제되라는 법은 없다. 기술은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생존의 도구로 발명된 것이다. 순환을 해치지 않는 기술이라면, 더욱이 순환을 진작할 수 있는 기술이라면 적극 활용해야 한다.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바이오가스 발효기를 설치하고 여기서 얻어진 가스로 열병합발전기를 돌려 전기와 열을 얻는 기술, 폐수를 정화하기 위해 박테리아를 이용하는 기술은 순환농법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돕는 것이다.


슈바이스푸르트가 택한 길은 바로 순환농법이었다. 그는 에너지와 물이 거의 완벽하게 순환하는 농장을 만들었다. 그 속에는 순환고리를 잇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밭과 축사, 육고기 가공공장과 제빵공장, 바이오가스 발효기와 이것을 이용한 열병합발전기, 수로와 폐수정화 연못, 그리고 마지막으로 맥주 발효기가 갖추어진 최고 맛의 음식을 내놓는 레스토랑, 그리고 유기농 식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다. 레스토랑에서는 그날 갓구워낸 빵과 바로 잡은 가축의 고기로 만든 소시지와 고기가 제공된다.


그의 농장에서는 비료와 농약 대신 퇴비가 뿌려지고, 가축은 풀밭에서 마음껏 놀면서 성장한다. 밭에 주어지는 퇴비는 대부분 농장 안에서 나온다. 농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유기질 '쓰레기'는 다른 부문의 원료로 활용된다. 치즈 만들 때 부산물로 얻어지는 치즈물, 맥주발효 찌꺼기는 곧바로 가축사료로 이용된다. 소시지 만들 때나 밀가루 만들 때, 레스토랑, 살림집 같은 데에서 나오는 찌꺼기들은 모두 사료나 비료, 바이오가스로 재활용된다. 살림집이나 도살장, 육고기 가공방에서 흘러나오는 폐수도 농장 안의 식물 하수처리장에서 정화된 후 재사용된다. 동물의 분뇨는 바이오가스 장치에서 처리되는데, 이때 발생하는 메탄가스는 열병합발전기로 보내져서 전기와 난방?온수열로 변환된다.

 

16강 현대문명과 물

우리는 물을 소비하지만 지구상에서 물은 다른 지하자원과 달리 사라지지 않는다. 지구에서 물은 흘러가고, 증발하고, 땅으로 떨어져내릴 뿐 소모되어 없어지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지구에서는 일정한 양의 물의 항상 순환하는 물의 순환이 있을 뿐이다. 물은 인류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조심스럽게 이용했다. 물이 생존에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을 인간 생활에 맞춘 것이 아니라, 생활을 물에 맞추어서 영위했다. 물을 잘 얻을 수 있는 곳에 집을 짓고 모여 살면서 농사를 지었고, 강이 흐르는 곳이 물자를 수송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에 강을 끼고 도시가 발달했다.


물론 생활을 물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물을 인간에게 맞게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멀리서 물을 끌어와서 농사를 짓는 관개농업이 발달했고, 중국에서도 농사용 물을 끌어오기 위해 긴 운하를 파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다. 고대 로마에서는 음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도시 전역에 상수도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와 통제는 일부 지역에서 일부 역사시간대에서만 이루어졌을 뿐 전세계적으로 물을 관리하는 일은 자연을 통제하는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현대문명이 성립한 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현대문명에서는 인간생활을 물에 맞추는 일은 거의 없다. 물이 많은 곳으로 사람들이 찾아가지고 않거니와 물이 조금도 나오지 않는 곳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가고 농사를 짓는다. 물을 많이 사용하는 산업단지도 물과 관련없는 곳에 건설된다. 먹을 물을 지하 수천미터를 뚫고 지하수로 공급할 정도로, 그리고 이스라엘이나 캘리포니아 같이 사막에서도 물을 끌어다가 풍성하게 농사를 짓는 것이 현대의 상황이다. 물이 전적으로 사람들의 생활에 맞추어지고 있는 것이다. 먹을 물도 거의 대부분 상수도를 통해서 공급되고, 생수까지도 멀리 바다 건너편에서 오고 있고, 바다의 짠물을 가공해서 식수로 쓰는 것이 바로 현대문명의 물 상황이다.


사막에서도 물을 끌어와서 농사를 짓고 바닷물을 식수로 가공할 정도이니 현대사회는 역사상의 어느 시기보다 물을 풍족하게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은 일정하기 때문에 어느 누가 물을 풍족하게 사용하면 다른 곳에서는 물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상수도가 들어가지 않는 곳에 아파트단지를 건설하면 깊은 지하에서 물을 뽑아서 음용수로 이용한다. 지하수를 개발하는 업자와 아파트업자는 심층 지하수는 고갈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지하수 개발로 다른 곳에 물이 부족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러나 한곳에서 지하수를 개발하면 주변 지역의 지하수가 말라버리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골프장이 건설되면 그 아래 지역에서는 지하수가 줄어드는 일도 있다. 이때 물을 둘러싼 분쟁이 시작된다. 골프장에서 잔디를 유지하기 위해 물을 풍족하게 사용하면 바로 옆에 사는 사람들이 물을 풍족하게 쓰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고, 이것이 분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물의 양이 일정하기 때문이다. 심층 지하수든 하늘에서 내리는 비나 눈이든 일정한 양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골프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실 많은 물이 필요하다. 우리가 골프장 건설이 여러 가지 환경문제를 일으킨다고 알고 있는데, 물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몇해전 영국의 연구소에서 물부족국가와 물낭비국가를 국가별로 분류해서 발표한 일이 있다. 여기서 미국은 물이 풍족한 국가지만 물을 가장 많이 낭비하는 국가로 지목되었다. 그 이유는 미국에 있는 수천개의 골프장을 유지하기 위해 대단히 많은 양의 물이 소모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골프장은 물 낭비의 주범으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정부에서는 앞으로 물이 부족할 것이기 때문에 댐을 많이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골프장 건설도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있다. 골프장이 물을 가장 많이 낭비하는 곳인데, 물 부족을 걱정한다면 골프장 건설도 억제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물 분쟁은 아주 작은 것이지만, 물 분쟁이 대규모로 일어나는 일도 벌어진다. 물을 차지하려는 국가간의 분쟁이 바로 그것인데, 역사상 많은 물 분쟁이 있었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유엔에서는 21세기 분쟁의 큰 원인이 물이 될 것이라고 전망할 정도로 물을 둘러싼 분쟁은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특히 유엔에서 물부족 국가로 지목한 나라들, 여러 나라를 통과하며 흘러가는 강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심각한 물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20세기 물분쟁의 대표적인 사례는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통제하려는 터키와 그것에 반대하는 시리아.이라크 사이의 분쟁이다. 터키는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있고, 시리아와 이라크로는 강의 하류가 지나간다. 터키에서는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아타튀르크란 이름의 거대한 댐을 건설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시리아와 이라크가 항의했지만 터키는 건설을 강행했고, 1990년 완공했다.


그런데 1990년 완공 후 유프라테스강은 한달간 물이 흐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댐에 물을 채우는 과정에서 물이 하류로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이 흐르지 않음으로써 시리아와 이라크가 피해를 본 것은 분명하다.

터키에서는 또한 시리아에 대해 물을 내려보내지 않겠다는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이유는 터키의 쿠르드족 게릴라들을 시리아가 지원해준다는 것이었다. 만일 지원을 끊지 않으면 댐의 수문을 막아서 시리아에 물 공급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위협이 현실이 되었다면 전쟁까지도 벌어졌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이 남한에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기 위함이라는 정치적 선전이 있었고, 이에 대항해서 아래에 또다른 댐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섰던 것도 물을 둘러싼 분쟁의 하나였다.


물은 또한 산업적인 개발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물을 확보하려는 과정에서 많은 충돌이 벌어진다. 한국에서의 대표적인 사례는 한탄강댐 건설계획이다. 외국에서는 인도와 중국의 대형댐 건설을 둘러싸고 많은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인도에서는 전국 곳곳에서 거대한 댐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이 자기 땅과 자기 마을을 잃게 된다. 저항과 희생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도의 대표적인 저술가인 아룬다티 로이도 이 저항운동에 참여하고 인도의 댐건설과 이로인한 농촌과 농민의 파괴를 고발하고 있다. 중국의 싼샤댐도 아주 넓은 지역을 물로 덮어버렸기 때문에 주민들의 저항과 충돌이 있었다.


현대문명에서 물은 대량으로 공급되기 때문에 국가간의 위협수단이 되기도 하고 또한 테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상수도원을 폭파한다거나 약물을 주입함으로써 물을 오염시키는 일도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상수원을 오염시킨다는 협박은 세계에서 여러차례 있었고, 그러한 일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간 상황도 있었다.

 

17. 생태적인 물수급

앞으로 강물을 공유하는 국가들 사이에서는 물을 차지하기 위한 분쟁이 점점 더 격화될 것으로 예측된다. 한국은 강물을 북한과 공유하기는 하지만 북한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물확보를 위한 분쟁에 말려들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충분한 양의 식수와 산업용 물을 확보하는 것이 손쉽게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한국은 유엔에 의해 물부족 국가로 분류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학자들이 내놓은 물부족지수 분석에서도 한국은 물이 부족한 국가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물이 아주 풍족한 국가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한국의 환경부, 특히 댐건설을 담당하는 건설교통부에서는 유엔의 물부족 국가 분류를 받아들여 한국의 물 상황을 종종 심각한 것으로 이야기한다. 반면에 환경단체에서는 물부족이 그다지 심각한 것이 아니며, 물 수요관리를 적절하게 해주기만 하면 충분한 양의 물을 확보해서 쓸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환경단체는 이렇게 주장하지만 건설교통부에서는 앞으로 전국적으로 2006년에 1억톤, 2011년에 18억톤의 물이 모자랄 것으로 보고 물을 확보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130여개의 대형 댐을 건설하고 있다. 대형댐이란 국제댐위원회의 기준에 따르면, 댐의 높이가 15미터 이상인 것을 말한다. 그러나 높이가 10-15미터밖에 안돼도 길이가 500미터 이상이거나 담수량이 300만톤 이상, 또는 초당 방류량이 2000톤 이상인 댐도 대형댐으로 분류된다.

 

한국에서 물을 확보하는 데 있어 지금까지 정부 정책의 중심은 대형 댐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댐을 건설해서 홍수를 예방하고 필요한 물을 저장해두자는 것이 정부의 정책 기조였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현재 한국에는 765개의 대형 댐이 들어섰다. 이것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나 많은 것이고, 한국의 면적이 작기 때문에 단위면적당 댐의 수로 따지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댐을 건설하여 물을 확보하면 필요할 때 언제나 손댈 수 있는 물을 얻는다는 가시적인 성과는 거둘 수 있다. 물이 가두어져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물을 쓰려 할 때 항상 마음대로 물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형댐은 환경파괴를 비롯한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숲을 파괴하고, 역사가 깃든 지역공동체를 없애고, 미시 기후의 변화를 일으키고 경우에 따라서는 작은 지진도 일으킨다. 또한 댐은 장기적으로 물확보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다. 오히려 댐을 건설하지 않고 삼림을 잘 보존하는 것이 물 저장 효과가 더 크다는 분석도 나온다.

 

삼림에는 부엽토가 쌓여있고, 나무들의 뿌리가 엉켜 있고, 땅 속에 벌레들이 살면서 땅을 부드럽게 만들기 때문에 물을 품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삼림을 잘 관리하면 물도 관리할 수 있는 것이다. 삼림이 이렇게 많은 물을 품었다가 흘려보내기 때문에 삼림은 녹색댐이라고도 불린다. 댐을 건설하는 것은 삼림을 파괴하는 것이다. 골프장이나 스키장도 삼림을 파괴하고 건설된다. 이로 인해서 녹색댐이 파괴되고 물 저장고가 사라진다. 자연의 물 저장고가 사라져버렸으니 물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댐을 더 건설해야 하는 결과가 발생한다. 녹색댐을 없애면 이런 식의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골프장이나 스키장을 건설하는 대신 삼림을 전국 곳곳에서 잘 가꾸면 댐을 최소로 건설하면서도 물을 생태적인 방식으로 얻을 수 있다.

 

필요한 물의 절대량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물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수질이 좋아야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물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하천이나 호수의 물은 그 질에 따라 1등급에서 5등급으로 나뉜다. 1등급은 간이정수 후에 식수로 쓸 수 있는 물이고, 5등급은 농업용수로도 쓸 수 없는 물이다. 전국의 하천 중하류의 수질 등급은 대체로 3급수 정도이다. 4급수인 경우도 있다. 한국 하천의 수질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주로 공장 폐수와 축산 폐수에 기인한다. 특히 농촌에서 나오는 축산 폐수는 공장 폐수에 비해 감독과 단속이 어렵기 때문에 앞으로 하천의 수질 관리에서 심각한 장애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하천이나 지하수 또는 토양을 오염하는 것으로 무시할 수 없는 부문은 농업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농업을 통한 식량생산은 대부분 농약, 비료, 농기계를 이용해서 하고 있다. 농약과 비료는 토양을 척박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지하수와 하천을 화학물질로 오염한다. 특히 질소비료의 과도한 사용은 토양과 지하수의 질산염 농도를 증가시켜 심각한 환경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이렇게 물이 오염되어 있으면 생태적으로 물을 수급하는 일은 아주 어려워진다. 이 물들을 정화하는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만 하고, 이 과정에서 또한 생태계에 해가 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물을 정화할 때 보통 화학약품을 대량으로 사용하는 데 이 약품들의 일부는 다시 강물로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이렇게 수질이 좋지 않은 물을 정수해서 공급할 경우, 그 물이 소독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전염병 등을 유발하지는 않지만 마시는 물로서는 좋은 느낌을 줄 수 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마실 물은 생수를 사다먹게 된다. 생수는 지하수를 퍼올려서 만드는 것이다. 생수의 수요가 늘어나면 지하수 개발이 많아질 것이고, 이 과정에서 지하수원이 파괴되고 환경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태적인 물 수급에는 처음부터 대량축산이나 화학농업을 대신할 수 있는 축산과 농업방식을 도입하여 물의 질을 좋게 유지하는 노력도 포함되어야 한다.

 

화학농업은 또한 토양을 단단하게 만들기 때문에 토양의 함수능력을 크게 떨어뜨린다. 밭도 땅이기 때문에 물을 품는 능력이 작지 않다. 그런데 밭의 함수능력은 어떤 방식의 농업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생태적인 농업과 화학농업의 차이가 함수능력의 차이를 크게 가져오기 때문이다. 생태적 농업을 하는 땅은 땅 속에 지렁이 같은 벌레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땅이 부드럽다. 땅 속에 물이 스며들어가서 머물 수 있는 공간들이 많은 것이다. 이러한 땅은 당연히 물을 품을 수 있는 능력도 매우 크다. 그러나 농약과 비료에 의존하는 화학농업이 이루어지는 땅은 땅 속에 벌레들이 많지 않다. 따라서 땅도 단단하고 땅 속에 물도 별로 담겨지지 못한다. 물을 확보하기 위해 환경친화적이 아닌 댐을 많이 건설할 건설할 것이 아니라 땅이 물을 더 많이 품을 수 있게 농법을 바꾸고, 도시계획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생태적인 물 수급이란 간단히 말하면 물을 생태계를 가능한 한 적게 교란하는 생태적인 방식으로 저장하고, 사용한 후 흘러가는 물을 정화해서 여러차례 다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대형 댐은 생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40년 정도 물을 저장하는 용도로 쓸 수 있을 뿐이고, 이 기간 동안 많은 환경문제를 유발한다. 댐에는 끊임없이 토사가 흘러들어온다. 토사가 쌓임으로 인해 댐은 40년 정도 지나면 담수 능력이 거의 사라지고 마는데,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토사를 퍼내거나 댐을 다시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가지 방법 모두 많은 비용이 들고, 이 과정에서 더 많은 환경문제를 낳을 수 있다. 세계은행과 세계자연보전연맹에서 만든 세계 댐위원회는 2000112년여의 연구결과를 정리한 보고서를 내놓았는데, 보고서는 대형 댐이 생태계와 지역주민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물 확보는 대형 댐의 건설이 아니라 함수능력이 뛰어난 삼림의 보호와 관리, 논과 밭의 유기농으로의 전환에 의한 토양의 함수능력 증대, 지하수가 고갈되지 않도록 퍼내는 수량을 조절함으로써 지속가능하게 이용하는 것, 물 절약 및 물 재활용 설비 보급, 그리고 빗물이용 시설의 확대를 통해서 해야 한다. 골프장도 물 확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골프장은 산림을 파괴함으로써 물 저장고를 크게 훼손한다. 또한 골프장의 유지를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물이 사용된다. 2003년 교토에서 열린 세계 물포럼에서는 미국이 물을 가장 많이 낭비하는 국가로 발표했는데, 그 이유는 미국에서 수많은 골프장이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골프장은 물 저장고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물을 허비하는 것이다.

 

물 관리에서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요소는 지구온난화로 초래된 기후변화이다. 기후변화로 강수패턴이 달라지고 기온이 올라가면 물의 흐름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20년 동안 강수량은 조금 늘어난 반면 강수 강도가 크게 높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물 관리가 어려워졌음을 의미한다. 산림을 조성하거나 개발할 때, 택지와 도로를 만들 때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18. 생태적인 물처리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물을 한번 쓰고 버리는 것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세수를 하거나 몸을 씻고 난 후 물을 모두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쌀을 씻고 난 쌀뜨물이나 먹을거리를 씻은 물도 모두 하수구에 버린다. 게다가 한번 씻을 때 많은 물을 사용한다. 물 공급이 백년 전 또는 수십년 전에 비해 매우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 전 한반도에서 살던 사람들은 물을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물론 쓰고 나서 버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쌀뜨물이나 먹을거리를 씻은 물은 모두 한곳에 모여졌다.


이것들은 여물통에서 소의 여물에 섞여서 소의 먹이로 들어가거나 돼지 같은 가축의 먹이로 이용되었다. 한번 씻을 때 사용된 물의 양도 한꺼번에 많은 양이 아니라 가능한 한 소량이 사용되었다. 물을 조심스럽게 다루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물이 귀했기 때문이고, 물을 쓰기 편한 집으로 날라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수도가 없었다. 물은 모두 우물에서 길어오거나 샘에서 퍼와야만 했다. 이렇게 물을 얻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물 사용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백년 전에 비하면 지금의 물 사용은 낭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서 물을 사용하는 행태를 분석하면 낭비라는 표현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예를들어서 아파트 계단이나 아파트 단지 또는 길거리를 청소할 때 소위 물청소를 하게 되면 엄청난 양의 물이 투입된다. 물을 이용하면 청소가 수월해진다. 많은 양의 물을 세차게 흘려보내면 먼지와 쓰레기가 쓸려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물이 필요하다. 백년 전이라면 또는 물의 귀중함에 대해서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식의 물청소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아파트 계단을 청소한다면 먼저 먼지가 흩날리지 않게 물뿌리개로 약간의 물을 뿌린 다음 비로 먼지와 쓰레기를 쓸 것이다. 그 후에 물걸레로 닦아서 청소를 마무리 할 것이다. 두 방식의 청소에 들어가는 물의 투입량을 비교하면 정말 엄청난 차이가 날 것이다. 비로 닦은 후에 걸레로 마무리하는 방식에 들어가는 물의 양이 아마 물청소에 들어가는 양의 100분의 1도 채 안될 것이다.

 

사실 물청소는 유럽 국가에서는 잘 하지 않는 청소방식이다. 이들 나라는 한국에 비해 물의 가격이 비싸기도 하지만 물의 귀중함이 그나마 어느정도 자각되고 있기 때문에 물청소는 잘 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먼저 비로 쓸고 물걸레로 닦는 방식으로 청소를 한다. 그렇다고 청소 결과가 물청소 때보다 나쁜 것도 아니다. 이렇게 청소를 해도 청결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청소방식이 바람직한지는 분명히 드러난다. 물청소도 물을 대단히 많이 낭비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 물을 가장 낭비하는 때는 대변과 소변을 처리할 때이다.

 

현대인은 화장실에서 대변이나 소변을 보고 물로 청소한다. 물을 부어서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눈에 보이는 곳에서는 아주 깨끗하게 청소가 된다. 대변과 소변이 물에 쓸려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들어가는 물의 양은 조금만 계산해보아도 엄청나게 많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변기에서 꼭지를 한번 누를 때 쏟아지는 물의 양은 대변기의 종류에 따라 9-15리터쯤 된다.


소변기에서 한번에 내려가는 물의 양은 약 5리터이다. 남성 한사람이 하루에 열 번쯤 소변을 본다면, 그는 하루에 대소변을 치우기 위해서만 60리터의 물을 사용한 셈이 된다. 60리터라면 2리터짜리 생수 30병에 해당하는 양이고, 작은 둥근물통 4통에 해당하는 양이다. 여성과 아이들은 대소변을 치우기 위해서 더 많은 양의 물을 사용한다. 모두 큰 양변기의 물을 내리기 때문인데, 여성이나 아이 한사람이 하루에 대소변을 처리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물의 양은 약 130리터가 될 것이다. 생수 65병에 해당하는 양인데, 이 정도의 물이라면 웬만큰 커다란 욕조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 하루에 사용하는 물의 양 중에서 대소변을 처리하는 데 들어가는 물의 비율이 아마 가장 많을 것이다.

 

대소변을 물로 처리하는 것은 도시의 청결이나 위생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물 사용이나 자연속의 순환이란 측면에서 보면 대단한 낭비이다. 수세식 변기가 도입되기 전 사람들은 대소변을 재래식 화장실에 모았고, 이것을 썩혔다가 퇴비로 이용했다. 농사의 귀중한 영양물질로 쓰였던 것이다. 한사람이 하루에 내놓은 소변에는 질소가 약 1g, 인이  4g이 들어 있다.


대변에는 질소가 4.g, 인이 0.5g 들어 있다. 모두 농사를 지을 때 반드시 필요한 영양 성분이다. 그런데 이 양은 가정에서 한사람이 배출하는 총 질소와 인의 75% 차지하는 양이다. 대변과 소변에 이렇게 중요한 영양물질이 많이 들어 있다면 이것을 그대로 물로 씻어내버리는 것은 물 낭비일 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순환을 망가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축산분뇨도 물로 씻어내거나 비가 올 때 쏟아버리는 사례도 많은데, 이것도 분뇨처리 과정에서의 물낭비, 오염, 영양물질 상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소변이나 쓰레기를 이렇게 물로 처리한 후 이 물은 하수처리장에서 미생물과 화학물질을 사용해서 정화하는 과정을 거친 후 강물로 들어간다.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것들을 처리하는 데 들어가는 물이 많을수록 정화시설은 커야 하고 더 많은 화학물질이 투입되어야 한다. 반생태적인 일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처리를 생태적으로 하려면 대소변을 처리하거나 쓰레기를 청소할 때 물을 적게 쓰는 것이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 거대한 정화시설을 건설해서 처리하는 것은 생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수된 물을 적게 사용하는 방법은 많다. 수세식 화장실의 변기도 물절약용이 나와 있다. 변기 물통에 벽돌을 한 장 넣는 것은 매우 원시적인 방법이고, 물통이 작지만 효율적인 변기, 대변과 소변을 구분해서 조절된 양의 물을 내려보낼 수 있는 변기도 나와 있다. 물을 아주 적게 쓰는 비행기의 변기가 보급되면 화장실에서의 물 사용량은 크게 줄 것이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비행기에서와 같이 진공을 이용해서 대소변을 처리하는 변기가 조금씩이나마 보급되고 있다. 또한 유럽에서는 재래식 변소와 같이 물을 사용하지 않고 대소변을 모으는 방식의 화장실도 꽤 보급되고 있다. 이러한 화장실은 실내에 있고, 매우 위생적이다. 지하실에 통이 있고, 이 통에서 수년동안 대소변이 썩는데 썩은 후에는 부식토와 같은 완전한 퇴비가 된다. 냄새는 지붕 위로 연결된 환풍장치를 통해서 빠져나가기 때문에 실내에 냄새가 들어오는 일도 없다. 이렇게 하면 변기에서의 물 사용량은 크게 줄어든다.

 

하수도 하수관을 통해서 하수처리장으로 보내지 않고 자연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시설도 늘어나고 있다. 집 근처에 갈대밭 같은 것을 만들고 하수를 이곳으로 보내서 정화되게 한 후 이 물은 개울로 그대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거대한 하수관을 묻을 필요도 없고 거대한 하수처리장을 건설할 필요도 없다.

 

한국에서는 아파트문화가 성행하지만 아파트에서는 빗물이 땅으로 조금도 스며들지 못한다. 지하수가 전혀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물의 생태적인 이용과 처리에서 아파트식 주거형태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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