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령재~천마산~향적산~멘재
백제의 운명이 걸려있는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황산벌을 당시의 대전 방면에서 출발했다면
지금 호남고속도로가 통과하는 덕목재와 역시 천안-논산간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루트가
주요 통과지점이 되지 않았을까.당시 신라 원정군의 병력이 5만을 넘었다고하니
침투방면은 여러갈래로 나누어서 병력이동이 이루어졌을 것이고,계절은 7월을 D-데이로 잡았으니
무더위도 변수로 한 몫을 했을 것이고,또한 주전장(主戰場)이 들판인 관계로 이동의 어려움도
예상이 되었을 것이다.그 중의 주요 침투지점으로 거론되는 곳 중의 하나로 지목되는 곳이 황령재다.
지금은 벌곡과 연산을 넘나드는 2차선 차도가 닦여있는 황령재,분주히 오가는 차량들의
무심한 엔진소음만이 고갯길에 울려퍼진다.
황산벌은 지금의 충청남도 연산지방이다. 7세기 중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력이
가중되자 당(唐)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하고,당(唐) 역시 여러차례의 고구려 원정에서 실패하자
백제를 선제 공격하기로 하여 당과 신라 사이에 군사동맹이 체결된다.
그리하여 660년 3월 당 고종과 소정방을 시켜 13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백제를 공격하게 한다.이에 호응하여 신라 무열왕은 그해 5월에 김유신 등의 장군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경주를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南川停: 지금의 이천)에 머무른다.
그리고 태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 100여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지금의 덕적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한다.이때 당군과 신라군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서 합세하여 공격할
계획을 정한다.태자가 돌아오자 무열왕은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품일(品日),흠춘(欽春)등과
함께 정예군사 5만명을 거느리고 사비성(지금의 부여)으로 향하게 한다.
당시 백제 조정에서는 방비책을 강구 하던 중 당군이 백강(지금의 금강)에 상륙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지금의 충남 대덕)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흥수(興首)의
견해를 묵살한다.그리하여 백제군은 백강에 상륙한 당군에게 대패하고,신라군은 이미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한다.의자왕은 계백(階伯)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주어 이를
막게 한다.계백은 가족을 죽인 뒤 비장한 각오로 출전하여 황산벌에 먼저 도착하고
세 근데에 진영을 설치한다.신라군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들은 지친다.이때 신라의 장군인 흠춘이 아들 반굴(盤屈)을 적진으로
보내 힘껏 싸우다 죽게 한다.그러자 장군 품일 역시 관창(官昌)을 내보내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게 하여 결국 죽게 한다.반굴과 관창의 용감한 모습에 감격한 신라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진격하여 크게 승리한다.백제군은 중과부족으로 대패하여 계백이 전사하고 좌평(佐平),
충상(忠常),상영(常永)등 20여명이 사로 잡힌다.그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군과 합세하기로
약속한 기일이 늦었다고 하여 당군과 신라군 사이에 마찰이 생긴다.
이 패전으로 백제는 마지막 희망마저 잃고 나당 연합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됨으로써
멸망하고 만다.백제의 멸망은 결과적으로 고구려를 고립시켰으며 고구려의 멸망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나라를 위해 장렬한 죽음을 택한 계백의 생애는 후대인들에게
높이 칭송되었고,특히 조선시대 유학자 서거정(徐巨正)은 백제가 망할 때 홀로
절개를 지킨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여 "나라와 더불어 죽은 자"라고 칭송했다.
부여 의열사(義烈祠),연산 충곡서원(忠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기압의 영향으로 파란하늘은 이미 잿빛으로 어두운 기색이 역력하다. 가라앉은 분위기 탓인가,
습한기운이 무겁게 드리워있고 수목들의 이파리를 희롱하던 실바람조차 기동을 멈춘 숲길은
헐떡거리는 산꾼들의 가뿐 숨소리만이 정적을 허문다.
삼거리 이정표가 연이어 모습을 내보이고 PP로프가 수시로 비탈길에 매여있다.
계룡시민들의 휴식공간이기도 하고 체력단련장 역할도 함께하는 장소이기에 세세한 부분까지
배려한 흔적이 엿보인다.소나무들이 주로 산길을 안내한다.다갈색의 솔가리와 솔방울이
뒹구는 숲길,솔가지 사이로 연산들판이 시원하게 조망이 된다.금남의 산줄기는 계룡시와
연산뜰을 가르면서 북쪽을 향해 달린다.정자가 세워져있는 쉼터봉이 진땀을 흘리며 헐떡이는
산객들을 기다린다.소나무 숲으로 둘러쳐진 정자마루,소나무 우듬지너머 연산의 푸른 들판이
시원스럽고 평화스럽다.주책없이 흐르기만 하는 땀을 연신 훔쳐가며 정자를 뒤로하면 산길은 급한
내리막으로 변해버린다.로프가 인도하는 내리막을 지나면 이내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삼거리가 나온다.이 곳에서 좌측의 천마산3.65km를 알리는 방향을 따르면 된다.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공격하려는 신라가 마지막으로 맞닥뜨리는 장애물은 아마 지금 걷고있는
산줄기인 금남정맥이 아니었을까,이 산줄기를 넘으면 사비성까지는 고속도로나 진배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제군은 남은 전력을 다해서 이 곳 금남정맥을 단단히 틀어막아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적군인 당나라군의 침투가 예상되는 금강하류나 서해안 상륙지점에는 상대적으로
우위를 보이는 해상전력을 모두 투입하는 방안이 우선했을 것이다.
그러나 똘똘 뭉쳐도 힘든 상황에서 국론은 분열이 되어가고 민심은 혼란에 빠져들어 수습에
어려움이 가중되니 종묘사직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에 놓여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산줄기 여기저기 크고작은 돌부스러기와 흙을 이용한 성곽의 흔적이 눈에 자주 띤다.
백제의 수도를 방위하는 최후의 보루인 산줄기에 방어벽을 구축하는 사업을 그리 소홀하게
수행했을리는 없을 것이다.
정수리 부분의 잡목을 베어버리고 삼각점을 박아놓은 무명봉을 뒤로하면 네거리가 나온다.
대목재라고 씌어있다.산줄기는 줄창 북쪽으로 이어지고 갈랫길마다 마주치는 친절한
이정표 덕분에 길을 잘못들어설 일은 없지 싶다.경사가 조금만 가파르다고 생각이 되면 어김없이
로프가 기다리고 갈랫길이 나타났다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정표가 손짓을 한다.
소나무가 잔뜩 자리를 잡고있는 무명봉을 넘어서면 이내 천호산 정수리에 닿게된다.
삼거리 갈랫길이 나있는 봉우리에는 계룡시 방면으로의 숲길이 있고 천마산으로의 정맥은
맞은쪽 직진방향을 가리키고 있다.하늘을 찌르는 송전탑아래를 지나고 나면 이윽고
감나무 작은가지에 초록빛깔 작으만 감들이 주렁주렁 열린 과수원을 경유하게 되고
그 곳을 내려서면 을씨년스럽게 폐허가 된 창고 좌측으로 나있는 숲길을 따른다.
허름한 묘지를 뒤로하고 작은 봉우리를 넘어서면 도로 개설중인 절개지 삼거리를 만난다.
맞은쪽 길옆으로는 공사관계 사무실 용도인 듯한 컨테이너박스도 보인다.
그 곳 직전 우측의 오르막 산길을 이어나가면 로프가 매여있는 오르막을 거쳐야 하고
이내 활엽수 그늘이 기다리는 두리봉에 닿게된다.
피곤하고 힘이 드시거든 쉬었다 가시라,벤치 하나가 짐짓 묻는다.
그동안의 연회색 잿빛구름이 차츰 어두운 구석을 늘려나가는가 했더니 빗방울을 하나 둘씩
떨어뜨리기 시작한다.후둑후둑 빗방울을 맞아 가락을 맞추는 수목들의 장단이 산객의 심사를 흔든다.
고층아파트와 계룡시 시가지가 훤히 조망되는 송전탑을 지나면 통나무 계단이 기다리고
계단을 오르면 지척에서 팔각정 한 채가 산객을 기다린다."天馬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정자 옆으로는 뭉툭하고 고래등같기도 한 바위가 수굿하다.바위앞에 바위에 대한 구구한
유래가 빼곡하게 적혀있다.
금바위에 대한 유래를 옮겨보면,연산 개태사 주변에 도술이 비상한 도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도술로 좋은 일을 하기는 커녕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선량한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다.
마을 사람들은 도술로 어찌나 괴롭히는지 도저히 마음놓고 편히 살아갈 수 없었고,항의라도 할라치면
도술로써 해를 끼쳤기 때문에 하는 수없이 조정에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잡아들이기로 하고 군사를 풀었으나 군사들이 개태사 주위에 모이자
그 도인은 도술을 부려 군사들의 눈앞을 구름과 안개로 한 치의 앞도 못 보게 하였다.
군사들을 이끌고 온 장군은 "과연 듣던대로 도술이 비상하구나"하면서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물러갔다. 장군은 치욕감마저 느꼈으나 그 도인의 도술 때문에 쉽사리 쳐들어 갈 수도 없었다.
"다 늙은 도인 때문에 이 많은 군사들이 이런 곤욕을 당하다니" 장군은 안절부절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군사들을 다시 이끌고 언덕위에 오르자 또 구름과 안개가 앞을 가려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다.그렇다고 또 다시 군사들을 이끌고 되돌아 갈 수는 없는 일 이었다.
장군은 "에잇"하며 장검을 빼어들고 안개 속을 내리쳤다.그런대 이상하게도 안개가 가두어 지고
앞이 훤하게 트인 것이 아닌가,자세히 앞을 바라보니 눈 앞에는 큰 바위가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장군은 개태사를 점령하고 그 도인을 잡아 중벌을 내려 닷,렸다고 한다.
그때 동강 난 바위를 "암소바위"라고 한다.또한 암소바위 뒤 탕건바위 굴에는 하씨(河氏)들이
피난하였다고 한다.용이 바위를 통과한 용의 흔적도 있고 사람의 시신처럼 보인다고 하여
"송장바위"라고 부르는 바위도 있다.이와같이 여러가지 바위들이 있다 하여 "금암(金岩)"또는
"금바위(금이 간 바위)"라고도 부른다고.
금바위를 벗어나면 체육시설을 갖춘 쉼터를 지나게 되고 삼각점이 2개씩이나 박혀있는 286m봉을
넘게된다.숲길은 논산경찰서 계룡지구대 앞마당으로 내려선다.오가는 차량으로 분주한 도로 좌측을
따르다가 신호등이 있는 곳에서 맞은편 "양정슈퍼"우측 도로를 따라야 한다.
고가도로 밑을 지나기도 하고 암사초교 옆을 지나가는가 하면 오가는 차량이 뜸한 네거리도
무단 횡단하게 된다.조용한 주택가를 벗어나면 식당과 까페 그리고 주점들이 손님을 기다리는
상업지구도 경유하게 된다.산중턱까지 들어 선 위락시설 끝자락에 정맥을 잇는 산길이
팔을 벌리고 산객을 맞는다.향적산등산 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그 옆으로는 금남정맥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문도 눈에 띤다.그리고 인근의 계룡시민으로 보이는 입산객들의 모습도 간간이
만나게 된다.바람구경을 할 수 없는 후텁지근한 날씨 탓에 몸에 걸친 옷가지는 이미 물속에 빠졌다
나온 몰골이다.인근의 계룡시민들의 잦은 방문으로 산길은 여느 대도시 근교의 산림공원을
방불할 정도로 이정표와 휴식을 위한 편의시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다.
향적산 안내도가 세워져 있는 입구에서 정상까지는 대략 4km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니
정상까지는 1시간이상의 발품을 들여야 닿을 수 있다.울창한 수목으로 드리운 어둑한 그늘과
찌푸린 날씨는 숲길을 더욱 음울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로 내몬다.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갈림길에는 여지없이 이정표가 세워져있어서 입산객들의 동요를 막아준다.
좌측으로 무성사로의 하산로가 보이는 사거리 안부,그늘막 쉼터와 벤치 그리고 안내를 맡은
이정표가 반듯하다.오늘의 날머리는 이 곳에서 무성사 방면으로 하산을 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에 향적산의 멧부리가 있으니 시간도 여유가 있고하니 다녀 올 참이다.
사거리 안부에서 맞은 쪽 통나무 계단으로 시작이 되는 오르막으로 발길을 내딛는다.
산등성이 조금 못 미쳐 삼거리가 나온다.계속되는 오르막길은 능선 상의 헬기장으로 이어지고
헬기장 우측으로 정맥은 이어지게 된다.
향적산 정상으로 향하는 수월한 지름길은 삼거리에서 좌측의 산사면으로 나 있다.
20여분만에 도착한 장군암이라는 작은 민가 입구의 약수터에서 마른 목을 적시고 가파른 비탈길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면 목재로 만들어 놓은 전망데크에 이른다.광활하게 펼쳐있는
연산뜰이 시원하게 조망이 되고 등뒤로는 계룡산의 위용이 천지사방을 호령하는 듯 위엄을 보인다.
사각기둥의 빗돌 두 개가 나란히 서 있고,그 뒤로 검은 오석에 이 곳이 향적산(574m)의 정상임을
알린다.두 개의 빗돌 각 면 마다 음각되어있는 한자(漢字)가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지 궁금증만 안고
멧부리를 뒤로한다.이제는 무성사 주차장으로 하산하는 일이 남아있다.
조금 전의 장군암으로 내려서면 그 곳에서 바로 무성사 방면으로의 하산길이 뚜렷하게 나 있다.
가파른 산길을 십여 분 이어가면 임도로 내려서게 된다.그러나 임도로 내려섰다고 해서 산길 이동이
한가하고 용이한 것만은 아니다.가파르고 마사토를 닯은 토질에 흙과 자갈이 발길에
잦은 태클을 가해온다.내리막 임도 경사가 가파른 관계로 무성사 주차장이 빤히 내려다 보이고
우리를 기다리는 빨간색 버스도 마치 미니어처의 소품인 양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201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