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일 목요일 가을 날씨 서늘하고 건조. 맑음.
날이 밝았다. 아침 7시다. 누룽지를 끓여서 아침을 먹는다. 고추장에 마른 멸치가 제법 어울린다. 어제 먹던 치킨 2 조각도 곁들였고 복숭아도 후식으로 먹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덥다. 에어컨이 없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창문을 여니 좀 시원하다. 생각보다 모기는 없다. 창 밖에는 마가목 붉은 열매가 햇살에 빛이 난다. 조용한 아침이다.
짐을 챙겨 나온다. 체크아웃을 했다. 하친 마을을 가려고 물어보니 발음이 서툴러서인지 잘 모른다. 지하철을 타고 역으로 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Niamiha역으로 간다. 강가로 걸어간다. 강가의 빌딩이 아주 깨끗하게 보인다. 하늘이 파랗다. 깔끔하고 단정하고 고요한 분위기다. 다리를 걸어가면서 뒤돌아보니 우리가 묵던 삼위일체 마을의 예쁜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은 아주 깨끗하고 저렴했다. 전철 비용이 두당 0.6루블(360원)이다. 아주 튼튼해 보이고 속도는 엄청 빠르게 느껴진다. 우리는 지하철을 많이 이용하지 않았기에 그때그때 줴돈(동전모양 플라스틱)을 구입해서 탑승을 했다.
많이 사용할 사람들은 정기 이용권을 구입하는 것 이 좋을 것 같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민스크 내 지하철에서 표를 끊어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모든 촬영이 금지된다. 그것도 모르고 사진을 찍으면 바로 잡혀간다. 각종 테러와 같은 위험 때문에 지하철 내부를 비공개로 전환했다고 한다. 2011년 4월 11일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 한 지하철역에서 퇴근 무렵 폭발이 일어나 최소 11명이 사망하고 126명이 부상했다고 한다. 현재 이용하는 역은 초록색으로, 나머지 역들은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표시되어있다.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반씩 표시된 역들이 환승 가능한 역이다. 크게 두 개의 노선으로 되어있어 이용하기 편리했다. 역에 도착하니 나가는 출구가 많다. 광장으로 나왔다.
일단 역으로 들어가 Luggage Office에 가서 짐을 맡겼다. 어깨가 가벼워졌다. 광장으로 나오니 민스크 게이트가 또 반겨준다. 민스크 게이트 꼭대기에는 군인과 여인 등의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하틴 마을을 찾아가는 교통편을 알아보았다. 버스터미널에도 알 수 없었다. 거리에 멈추는 마슈르카 기사에게 물어봐도 모두 고개를 젓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다. 택시를 알아보니 70루블(42,000원)을 내란다. 좀 비싸다.
하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대량학살이 있던 곳이다. 1943년 봄, 독일군은 하틴 마을에서 6km정도 떨어진 곳에서 게릴라로부터 공격을 당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이자 히틀러와 친분이 있는 대위 등이 사살 당한다. 독일군은 1943년 3월 22일 그 주변 하틴을 찾아가 무고한 마을 사람들을 모아 불을 질러 대량학살 한다. 불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들에겐 총기를 난사한다. 아이 75명을 포함한 149명이 사망했다. 가장 어린아이는 생후 7주된 아기였다고 한다. 잔혹한 집단 학살 속에서 두 아이와 어른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아이 손을 잡고 도망치려다 부상을 입고 쓰러진 엄마 품에서 살아남은 7살 소년 빅토르 젤레브코비치, 폭발하는 탄환에 다리 부상을 입어 죽은 것으로 오인 받았던 12살 소년 안톤 바라놉스키, 56살의 남성 이오시프 카민스키, 그는 부상 입은 자신의 아들을 찾았지만 결국 그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인구의 1/4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벨라루스에서는 한 마을이 사라져버린 비극적인 상황은 그 당시 의도된 수없이 많은 대량학살의 한 예였다고 한다. 433개의 벨라루스 마을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세 명의 생존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버린 마을, 비록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고 마을은 폐허가 되었지만 하틴을 기념함으로써 절대 굴복하지 않는 벨라루스 인들의 모습을 기념하고 있는 마을이다.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포기하기로 했다.
그냥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역 주변에 있는 공원을 찾아간다. 인물상들이 많이 있는 공원에 갔다. Jefrasinnia Polackaja, Mikołaj Hussowczyk 등의 인물상들이 있는 공원이다. 공사 중으로 들어가질 못했다. 지하철을 타고 승리의 탑을 찾아가기로 했다. 레닌 광장에 있는 메트로(Lienina역)를 만났다. 우리는 Jakuba Kolasa역으로 나왔다. 쇼핑센타가 있다. 그 앞에는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동상이 있다. 거리에 만들어졌는데 부모와 자녀 둘이 자연스럽게 세워져 있다. 거울을 보고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재미있다. 커다란 쇼핑센타 옆에는 굼 백화점도 보인다. 지하도를 통해 건너편으로 간다.
오륜기가 붙어있는 건물이 있다. 스포츠 박물관이다(Physical Culture & Sport Museum) 분수를 갖고 있는 길게 펼쳐진 광장에는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출생한 시인이자 작가인 Yakub Kolas(1882–1956)의 동상이 길게 자리 잡고 있다. 이 광장의 이름도, 메트로의 역 이름도 그에게서 따왔다. 동상 모양이 레닌을 닮아서 레닌인줄 알았다. 소년 병사와 바이올린 연주자 및 소년의 동상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큰 길 건너편에는 하프 모양을 갖고 있는 음악당 건물이 있다. 광장 서쪽에는 그림들이 전시되어있다. 벨라루스의 농촌 풍경과 겨울의 풍경이 두껍게 그려져 있다. 미끄럼을 타는 사람들과 잔뜩 움츠린 초가들이 무척 을씨년스럽게 보이지만 정겨움도 느껴지는 그림이다.
이 대로를 따라 동쪽으로 더 가면 벨라루스 국립도서관이 있다. 건물 외형이 다이아몬드 형상을 띄고 있어서 일면 다이아몬드 도서관이라고도 불리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대식 도서관으로 선정 되었다고 한다. 이는 지식의 보화를 보관하는 장소라는 루카센카 현 대통령의 아이디어에 기초하여 건립된 도서관이다. 전 국민이 참여하여 4년간의 공사 기간을 마치고 2006년 6월 개관 했다. 높이는 72.6m, 연면적 112,600제곱미터, 이것이 벨라루스 내 최초의 공공 도서관이자 나라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라고 한다. 지하부터 지상까지 독서실, 열람실, 식당, 전망대, 박물관 등 없는 게 없다고 한다. 22층에는 카페도 있다. 동상이 도서관 앞을 지키고 있다. 벨라루스 15세기 대표적인 학자로서 처음 벨라루스어로 책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대로를 걸어오다가 성 로코코 로망 카톨릭 교회가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걸어간다. 공동묘지가 나타난다. 오래되 보이는 묘지공원이다. 동상과 흉상들, 그리고 다양한 묘비 석들이 많이 보인다. 유명인들이 많이 묻혀있는 것 같다. 묘지로 들어서니 빨갛고 예쁜 러시아 정교회(Alexander Nevsky Church)건물이 있다. 보수중인 인부들이 부지런히 일하고 있다. 묘지를 청소하는 사람도 있다. 전에 러시아의 성 페테스부르크를 방문해서 도이토예프스키와 차이코프스키, 무소르그스키 등이 묻혀있는 네프스키 수도원을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러시아의 공동묘지와 형태가 비슷하다. 묘지는 묘지다. 습하고 그늘진 것이 어두침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묘지를 둘러본 후 다시 큰 길로 나왔다.
승리의 광장으로 간다. 높게 세워진 기념비(The Victory Monument)가 눈에 들어온다. 승리의 광장(Victory Square)이다. 벨라루스는 2차 대전시 전체국민의 30%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로 인하여 많은 기념비가 산재해 있는데 그중에 승리의 광장은 가장 중요한 기념비에 속한다. 독립대로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전승기념비와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는 영원한 불, 러시아 주변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목숨을 잃은 용사들에게‘그대의 공훈은 영원하다’라는 문구가 있다. 주말이면 구 소련식 전통에 따라 신혼부부들이 예식을 마치고 기념비에 헌화한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경축일 때는 절도 있는 군인들의 근무 교대식이 민스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주위의 스비슬러치 강이 흐르며 아름다운 고리끼 공원과 얀끼꾸빨라 공원이 있어 잠시 마음의 여유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준다.
우리는 둘러본 후 점심을 먹기로 했다. 승리의 탑 바로 옆에 있는 식당을 들어갔다. 고급스러운 식당이다. 아내는 샐러드와 고기를 주문했고 소세지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구수한 커피와 함께 식사가 나왔다. 질적으로 좋아 보이는 식사지만 양적으로 좀 부족해 보였다. 창밖으로 승리의 탑이 보이는 전망이 좋은 식당이다. 맛도 훌륭했다. 식사비는 저렴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출발이다. 고리끼 공원으로 들어갔다. 막심 고리끼와 카르네프 동상이 있다.
막심 고리키(1868년 ~ 1936년)는 러시아의 작가로,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시코프이다. 24세 때인 1892년 첫 단편소설 〈마카르추드라〉를 타플라스 지역 신문인 〈캅카스〉 지에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러시아 민간 전설을 토대로 하여 두 늙은 집시를 통해 자유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묘사한 작품으로, 이때 '막심 고리키(Maksim Gor'kii, 가장 고통 받는 사람)'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볼가 강 연안에 있는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하여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사환·접시닦이·제빵 기술자 등 온갖 일을 하였다.
1895년 《러시아의 부》 지에 《체르카시》를 발표하여 크게 절찬을 받았고 이어서 〈오를로프 부부〉 등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1905년 사회 민주당에 가입하였으나 제정 러시아 군대의 민중 학살 사건에 항의한 것 등으로 인해 회원에서 제명되었고 곧 투옥된다. 1906년 세계 지식인들의 석방 요청에 의해 석방된 후 이탈리아 카프리 섬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다. 1913년 귀국하여 《유년 시대》 등을 집필하는 한편, 무산 계급 작가 양성 지도에 힘을 쏟았다. 1932년 소련 작가 동맹 제1회 대회 의장에 취임, 후진 작가의 육성과 노동자 지식인들을 위해 일하다가 사망하였다. 그는 공산주의 리얼리즘 문학을 창조한 최초의 사람으로서, 소련 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공원은 스비슬러치 강과 이어지는 운하들이 있다. 놀이시설도 공원에 있다. 강에서 보트를 타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운하 위에 설치된 작은 다리를 건너가니 서커스 홀이 나온다. 얀끼꾸빨라 공원을 또 만난다. 어제 만났던 거대한 동상은 얀끼 꾸빨라라는 인물이다. Yanka Kupala(쿠팔라) '쿠팔라'라는 필명은 민중의 축제일인 세례 요한(이반 쿠팔라)의 탄생일(하지)의 다음날 태어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쿠팔라는 현대 벨라루스 문학의 기초를 닦았다. 가난한 소작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다운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05년 처녀작인 〈백성〉을 발표한 뒤 애국적 정열에 넘치는 민중시를 지어 막심 고리키에게서 좋은 평을 받았다.
이후 벨라루스의 민요에서 오는 토속적인 음악성을 바탕으로, 농민의 피폐한 생활을 풍부한 비유로써 담아낸 시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그는 10월 혁명 이후에는 사회주의 건설에 앞장서서 벨라루스의 국민적인 시인으로 추앙받았다. 소비에트 체제를 옹호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전에 자살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유산〉·〈무명 無名〉·〈1918년에서 1928년까지〉의 시집과 벨라루스 농민의 궁핍한 생활을 그린 서사시 〈영원의 노래〉, 장시 〈오레사의 강변에서〉, 희곡 〈황폐한 둥지〉 등이 있다.
계속 걸어 눈물의 섬과 삼위일체 마을이 건너다보이는 대로를 걸어간다. 높은 빌딩들이 싱싱하고 길에는 젊은이들이 많다. 역동적인 모습으로 만들어진 동상들이 이어진다. 스포츠 궁전을 비롯해서 관공서와 은행, 호텔, 쇼핑센터 등 높은 빌딩들이 많다. 우리는 승리 공원(Victory Park)을 향해 걸어간다. 작은 슈퍼에 들러서 아이스크림과 케피르를 샀다. 입이 즐거우니 발걸음도 가볍다. 대로변에는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다. 참 깨끗하다. 꼭 골프장을 걷는 기분이다.
멀리 여신상이 보인다. 영웅의 도시 민스크(Minsk-the Hero City)를 기념해서 세운 조형물 승전 탑이다. 계단으로 만들어진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계단 아래에서는 꼬마들이 킥보드를 타고 있다. 날씨는 무척 뜨겁다. 계단 난간에 걸터앉아 아내는 케피르를 마신다. 계단에 올라 뒤돌아 본 도시풍경도 멋지다. 전쟁 박물관(Great Patriotic War Museum)이 뒤에 붙어있다. Great Patriotic War Museum은 2차 세계 대전을 기리기 때문에 만들었을까?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튼 2017년에 소련 국기가 나부끼는 것을 본다는 것은 퍽 많이 놀랍다. 주변국들과는 달리 확실히 벨라루스는 친 러시아 국가인 것이 분명하다.
이 박물관의 주제는 2차 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이 지역에서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 2차 대전 간 핀란드와 일어난 전쟁을 담고 있다. 근데 이건 솔직히 소련이 먼저 핀란드로부터 겨울전쟁 일으켜서 발발한 것이다. 역사란 승자에 의한 것일 뿐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는 관점으로 그려내고 있다. 침략자 소련은 지우고, 애꿎은 핀란드만 나쁘다고 한다. 나치독일 점령기간 희생당한 유대인의 수. 민스크에서 88,000여 명이나 희생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공원방향으로 계단을 내려오니 군인과 여인상이 분수대 앞에 만들어져 있다. 이동상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도 본 적이 있다. 공원은 넓다. 고목들과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있다. 신혼부부 한 쌍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벤치가 잘 만들어져 있다. 벤치에 앉아서 좀 쉬려니 모기가 왱왱거린다. 서둘러 일어났다. 분수대가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공원을 벗어나 다리를 건너 벨라루스 호텔이 있는 곳으로 간다. 다리 옆 수로에서는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다. 높게 솟은 호텔 건물을 끼고 돈다. 푸쉬킨의 동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동상을 발견하니 반갑다. 가로수로 사과나무가 심어져 있다. 스비슬러치 강을 등지고 걸어간다.
우크라이나, 독일, 미국 대사관이 있다. 예쁜 교회당이 있다. 성 막달라 마리아 기념 정교회다. 정원에는 여러 가지 화려한 꽃이 참 많다. 교회가 깔끔하고 아주 잘 가꾸어져 있다. 강을 따라 걸어가니 쉐비첸코 동상이 있다. 유대인 시나고그도 보인다. 강변을 따라 쭉 걸어간다.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빠르다. 미녀들이 당당하게 걸어간다. 거리는 깨끗하다. 동양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다리가 아프다.
성령성당이 있는 언덕에 다시 도착했다. 저울과 추를 들고 있는 동상도 만나고 시청 뒤편의 마차 조형물과 인형들이 유난히 돋보이는 예쁜 가게들도 다시 만났다. 누군지 모르는 흉상도 만났다. 이제 민스크 역을 향해 걸어간다. 잠시 쉬면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본다. 언제 또 이곳에 올까? 벨라루스의 지형은 대체로 평탄하며 낮은 언덕과 구릉으로 나뉜다. 가장 높은 지대는 제르진스카야로 해발 345m밖에 되지 않는다. 산림지대가 전체 면적의 1/3을 차지한다.
산림지대가 전체 면적의 1/3을 차지한다. 폴란드와의 국경에 걸쳐 있는 벨로베주스카야푸슈차는 희귀한 유럽 들소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남부에는 프리페트 습지대가 자리 잡고 있다. 드네프르 강과 그 지류인 베레지나·프리페트 강이 남부와 중부지방을 흐르며, 서(西)드비나 강은 북부를 지난다. 대륙성기후이고 대서양의 영향을 받아 겨울은 춥고 여름은 온화하며 강수량은 적당한 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동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벨라루스인이 인구의 3/4 이상을 차지한다. 소수민족 가운데는 러시아인이 가장 많고 우크라이나인과 폴란드인도 있다. 공업화의 영향으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전체 인구의 1/5을 차지하던 도시인구가 1990년에는 2/3로 늘어났으며 이로 인해 몇몇 교외 지역의 인구는 감소했다. 주요도시로는 수도인 민스크가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부터 1991년 독립할 때까지 소련에서 인구성장이 가장 빠른 도시 중 하나였다.
토지의 대부분은 작물재배, 특히 사료작물을 재배하기에 알맞다. 주요 농산물은 곡물(호밀·귀리), 아마, 감자, 사탕무, 유제품이며 주요 산업은 중화학공업과 방직산업이다. 소·돼지 사육, 민스크 근교의 낙농업, 채소농업 등도 중요하다. 광물자원은 빈약한 편이지만 상당량의 칼륨염이 민스크 남쪽의 솔리고르스크에 매장되어 있으며, 그곳에서 비료로 가공해 유럽 국가에 수출한다.
국가 수입의 반 이상을 공업부문에서 충당하고 있고 화학비료·정유·석유 화학물을 생산하기 위해 원자재와 탄화수소 연료를 수입하고 있다. 중공업단지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고 대형트럭·트랙터·덤프트럭 등을 생산한다. 이외에도 공작 기계와 텔레비전·라디오·시계·자전거·컴퓨터 등과 같은 소비재도 생산한다. 러시아로부터 공급받는 원유와 천연가스를 이용해 대부분의 전력을 생산한다. 2010년 러시아, 벨로루스, 카자흐스탄은 유라시아경제공동체 회원국으로 관세 동맹을 체결했다.
벨라루스의 정치제도는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의 몰락 및 소련의 붕괴, 1991년 독립이라는 변화과정을 거쳤다. 1994년 제정된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가와 행정부의 수반이며 5년 임기의 직접선거제로 선출된다. 최고인민회의라고 불리는 단원제 의회 역시 5년 임기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직접 선출된다.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은 무상 의무교육이며 약 30여 개의 고등교육기관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도시지역 주택 중 3/4이 파괴되었고 공업시설은 거의 전부 못쓰게 되었다. 전쟁 이후 빠른 속도로 조립식 주택을 보급했지만 여전히 주택공급이 부족한 실정이다.
벨라루스에는 선사시대의 주거흔적이 남아 있다. 6∼8세기에 슬라브족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 여러 작은 공국을 이루다가 9세기 중반에는 키예프의 속국이 되었다. 1240년 몽골족들이 키예프를 전복시켰고 실질적인 자치권은 벨라루스인에게 있었지만 영토는 대부분이 리투아니아로 넘어갔다. 1386년 야기에우오 왕조의 통치하에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합쳐지면서 벨라루스에는 폴란드어를 국어로 사용하고 로마 가톨릭교를 국교로 하는 지주계층이 성립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농민들은 동방정교회를 믿었으며 16세기 들어 농노화되었다.
18세기 후반 폴란드가 3지역으로 분할될 때 벨라루스 전체를 러시아가 차지했다(벨라루스는 러시아어로 '백러시아'라는 뜻). 이 지역은 19세기 초에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경제성장 속도가 느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1918∼21년 벨라루스는 독일, 볼세비키 정부가 들어선 러시아, 그리고 재수립된 폴란드와 전쟁을 치렀고, 그 결과 서부지역이 볼세비키에 의해 폴란드로 양도되었다. 1919년 러시아 혁명을 통해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이 건국되었고 1922년에는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이 되었다.
1930, 1940년대 소비에트 정부 하에서 급격한 산업화가 추진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입었다. 전쟁 말엽에는 소비에트 정부가 1921년부터 폴란드가 차지하고 있던 벨라루스 서부지역을 되찾았다. 전후 복구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으며, 더욱 급속도로 산업화를 진행해 민스크는 소련 극서부의 산업화 중심도시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은 1990년 7월 독립국임을 선언했고, 1991년 8월 실질적으로 독립했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자 벨라루스는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고, 국가명도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벨라루스로 바꾸었다. 1997년 5월 러시아와 합병조약을 체결해 '러시아-벨라루스 연방'이 되었다.
여기에 앉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치안은 걱정이 없었다. 일단 대통령이 유럽 최후의 독재자인지라 치안은 굿이다. 길거리에서 술을 마시며 다니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며 밤에 으슥한 곳으로 다니지 않는 이상 밤길 걱정은 접어두셔도 되겠다. 스킨헤드집단 또한 없다. 간혹 스킨헤드 같은 사람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저 스타일만 그렇게 꾸몄을 뿐이다. 러시아와는 달리 경찰의 길거리 검문 또한 없었으며 뒷돈을 요구하는 이들도 없었다. 종교 활동 역시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활동은 러시아정교를 제외하고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슬람 세력의 테러위협 걱정도 접으셔도 된다. 생활비는 한 달에 평균 20만 원 정도 든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좌우간 물가는 저렴하다.
국립 미술 박물관(National Art Museum of Republic of Belarus)앞이다. 벨라루스 최대 미술 박물관으로 현재 2만 6천점의 소장품을 소유하고 있다. 중세와 근대에 걸친 화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있고 카톨릭과 러시아 정교회의 성상과 성화들이 많이 소장되어있다. 현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화가들을 위한 전시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시간을 넘나들며 예술 관람을 즐길 수 있는 좋은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2009년 5.18일 국립박물관내 한국관이 개설되어 벨라루스 국민들에게 한국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 있다. 만나고 싶은 화가 샤갈이 태어난 곳이 바로 이 벨라루스다. 그가 탄생한 마을이 있는데 가보지 못해 아쉽다.
길을 걷다가 미녀가 벤치가 앉아있는 조형물을 만났다. 아내가 옆에 앉아서 사진을 찍는다. 걷다보니 시티 게이트가 눈앞에 보인다. 작은 피자집에서 구수한 냄새가 흘러나온다. 들어가서 피자를 한 조각씩 스프라이트와 함께 먹었다. 커다란 피자 한 조각이 1.5루블(900원)이다. 참 싸다. 직원의 표정은 무뚝뚝하고 친절하지는 않지만 착해 보인다. 슈퍼에 들러서 남은 돈으로 물건을 샀다. 가스가 들어있는 물을 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영어로 표시된 어느 생수에는 carbonated라는 단어가 기록되어 구분하기 쉬웠다. 대부분 러시아 말만 기록되어있어 눌러보고 구분했다.
역에 들어가 짐을 찾았다. 저녁 7시 30분이다. 역사 안에서 짐을 정리하며 기다린다. 이제 밤기차를 타고 벨라루스를 벗어나 러시아 모스크바로 간다. 우리는 21시 40분 기차다. 러시아 철도 사이트에서 기차표를 예매했기에 여기서는 기차표로 교환이 안 된다. 기차를 타러간다. 4번 플랫폼, 7번 트랙이다. 갑자기 비가 내린다. 2번 차량에 올라탔다. 차장 아가씨가 들고 있는 메모지에 이미 우리의 기록들이 적혀있다. 여권을 보여주고 얼굴을 이름과 확인하고 탑승시켜준다. 31번, 32번 자리다. 6인실인데 깔끔하다. 흰색 침대 커버와 베게 커버를 준다. 이 기차는 21시 25분에 도착해서 21시 40분에 출발한다. 기차표에 기록된 러시아 문자를 힘들게 공부한다. 피곤해서 잠자리를 정리하고 바로 누웠다. 이렇게 벨라루스를 스쳐간다.
*8월 3일 경비- 짐 보관 2, 지하철 2.4, 자두 1,8, 점심 19, 아이스크림 캐피르 등 2.5
피자, 사이다 5, 슈퍼 10.(기차 비 118,183원)
계 42.7루블 *600. 총계=143,803원.(기차 비 포함)
누계 1,720,000원.
첫댓글
러시아군가 - 슬라브 여인의 작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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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어울리는 곡이네요. 군가도 클래식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