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왜 반말 하십니까?
정권 임기말이면 되풀이되는 현상은 이명박 정권 5년차인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정권 고위 인사들이 온갖 비리로 줄줄이 쇠고랑을 차고, 민심이반(離反)으로 대통령과 정부·여당 지지율은 ‘날개도 없이’ 수직으로 추락한다. 여당과 여당 국회의원들은 다가오는 선거에서 살아나려고 몸부림을 친다. 아직도 깎을 뼈가 남아있는지 또다시 “뼈를 깎겠다”고 자기쇄신을 부르짖으면서 ‘공천혁명’에 ‘정책 공약’ 등 선심 보따리도 끝없이 풀어놓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임기말 현상이 어느때보다 심해서일까,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가 내놓는 쇄신책에는 ‘신기한’ 것들도 많다.
‘반말을 하지 않겠다’가 대표적이다. 얼마나 ‘새로운’ 메뉴가 절실했으면 ‘반말을 하지 않겠다’는 아이디어까지 냈을까, 동정심마저 간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니, 이 아이디어는 우리 사회의 매우 중요한 한 단면을 재확인시켜주고 있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반말을 쓰느냐, 존대말을 쓰느냐’는 문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이 지구상에는 현재 6000개의 언어가 있지만, 반말과 존대말을 구분하는 언어는 불과 10여개 언어뿐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어는 반말과 존대말을 확연하게 구별해 쓰는 언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반말과 존대말은 인간관계와 소통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언어관습이다. 사회·문화적 질서의 중요한 체계로 작용하는 것이다.
어느 집안, 어느 조직에서도 제 아무리 잘 생기고, 일을 잘하고, 성실한 사람이라 해도 만약 아무에게나 함부로 반말을 한다면 그의 사회적 생명은 그것으로 끝장이다. 그런가하면 우리 사회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싸움은 그 상당수가 반말이 원인이다.
만약 20대 택시 승객이 50대 택시 기사에게 반말을 했다면 두 사람이 아무리 ‘갑’과 ‘을’의 관계라 해도 충돌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택시 기사의 입에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반응이 나오기 십상이리라. “나이도 어린 사람이 엇다 대고 함부로 반말이냐” “택시를 몬다고 사람을 우습게 보는거냐?”
반말을 한다는 것은 곧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다. 동시에 존대말은 인격적으로 대우를 한다는 뜻이다. 이렇기 때문에 반말은 비단 우발적 싸움의 꼬투리가 될 뿐 아니라 많은 사회적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가정, 학교, 군대, 직장 등 많은 단위에서는 높은 위계에 있는 이의 나이가 더 적은 경우를 흔하게 본다.
이럴 때에 나이 적은 상위자가 반말을 한다면, 가령 나이어린 윗동서가 나이많은 아랫동서에게, 대학2학년생이 두 살많은 1학년생에게, 학교후배인 회사상급자가 선배인 하급자에게 마구 반말을 한다면 거기에서 갈등은 쌓이고 또 쌓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에 세계 어느 나라보다 엄격한 봉건사회 제도를 유지했다. 양반과 상인, 어른과 아이 등 상하구별이 매우 뚜렷한 수직적 계층 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는 계층간 구별 때문에 반말과 존대말이 유효하게 작용했다. (물론, 다른 나라들이 봉건적이고 수직적 계층사회라고 다 우리처럼 반말과 존대말을 엄격하게 구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서구화·현대화한 오늘날에도 우리사회에서는 반말과 존대말의 언어 사용 관습이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수직적 계층 구분이 과거와는 많이 다르다 해도 여전히 혈연·나이·지위 등 여러 가지 관계에 따라 반말과 존대말을 가려 쓰고 있는 것이다. 성인들은, 설사 상대방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직급이 낮은 사람일지라도 초면이라면 쉽게 반말을 하지 못하는게 우리말의 법도다. 이처럼 반말과 존대말을 가려쓰는 데에는 경우의 수가 매우 많아 복잡하고 까다롭기도 하다.
어찌됐거나 이같은 언어관습은 거부하기 어려운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말을 쓰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같은 언어관습을 따라야한다. 이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이 급증하는 요즘, 그들이 언어습득과정에서 가장 어렵다고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점이 바로 반말과 존대말의 구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함부로 반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판사·검사·의사·교수 같은 분들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런 분들의 일부다. 목사님·스님 중 일부, 신부님 중 일부도 마찬가지다. 그 밖에도 더 많은 직군(職群)의 사람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분들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무슨 까닭으로 함부로 반말을 하는 것일까. 이분들은 모두 권력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판사와 검사는 피고인과 피의자에게, 의사는 환자에게, 교수는 학생들에게 너무나 대하기 어려운 존재다. 판사는 피고인의 형량을 정하고, 검사는 피의자를 법정에 보낸다. 또 의사는 환자의 질병을 다스리며 교수는 학생의 학업을 지도하고 그 결과를 평가한다. 그런가하면 목사님과 스님, 신부님은 신자들이 영혼을 구원받을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 분들은 모두, 사람들이 잠시 잠깐 이 혹성의 흙 위에서 영육을 의탁하고 가는 동안 그 영육을 관리하고 바로 이끄는 일을 한다. 세상의 수많은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이 분들만큼 절대적인 ‘갑’도 드물다. 지푸라기도 붙잡고 싶은 심정인 피고인과 피의자, 환자, 학생, 신자들은 이 분들 앞에서 절대적인 약자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분들 중 대부분은 절대약자인 피고인과 피의자, 환자, 학생, 신자들 덕분에 현세에서 부족하지 않은 물질 생활을 누리는 처지다. 그럼에도 이들 중 어떤 분들은 마치 사람들에게 큰 채권자인양, 또는 영육(靈肉)에 관한 생사 여탈권을 갖고 있는 듯이 행세한다.
실례를 들어보자. 일부 판사들의 이야기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내놓은 ‘2011년도 법관 평가 결과’를 보면 요즘 세상에도 재판도중 피고인은 물론, 이혼소송중인 당사자, 심지어 변호사에게 반말을 하는 판사가 많다. 단순한 반말도 아니고 호통을 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식이다.
(이혼소송중인 여성에게) “20년동안 맞고 살았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 “이혼당할만 하네!”
(변호사에게) “모르면 좀 아는 사람한테 물어보고 서면(문건)을 내라. 내가 안된다고 했잖아?”
(참고인에게) “당신은 사기꾼이야!”
또 환자로서 병원에 가본 사람은, 그것도 중병으로 가본 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젊은 의사가 나이 많은 노인한테도 툭하면 반말투다. 다정한 것 같기도 한데 마치 아기를 어르듯 한다. 검사나 교수, 목사님, 스님의 사례까지 굳이 상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사목정보를 위한 책이므로 ‘일부 신부님’에 관해선 언급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생각한다. 경우를 가리지 않고 함부로 반말을 하는 신부님들을 보면 “신자들에게 ‘영적 독재권’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건가?”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6년 전, 다니던 본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본당에서 큰 야외행사가 있었고 많은 자매님들이 나와 일을 거들었다. 점심 때가 되어 자매님들이 준비해온 도시락을 자리에 풀어놓았는데 일부 자매님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수가 있었다. 아직 주임 신부님이 식전 기도를 하시지 않았던 것이다!!
곧 민망한 일이 벌어졌다. 주임 신부님이 화가 나서 “아니, 이것들이 ···” 라고 큰 소리로 자매님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리고 아직 덜 풀어놓은 도시락 상자를 구두발로 차기도 했다.
물론 자매님들은 실수를 했다. 그러나 위트로서 웃고 넘어갔으면 더 좋았을 일인데, 저마다 한 가정을 꾸리고 있고 사회적 역할이 있으며 양식도 있는 부인들의 인격을 사정없이 짓밟아버린 것이었다. 실상, 그날 망가진 것은 자매님들의 인격이 아니라 그 신부님의 인격이었다.
매우 친숙한 사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반말이 오히려 더 다정한 표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말을 해선 안되는 상대에게 함부로 반말을 하는 신부님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이런 모욕을 당하는데도 신자들은 왜 고분고분하게 순종하는가. 평소 신자들이 신부님과 교회에 대해 자주 하는 이야기중엔 이런 말이 있다. “신부님과 교회에서 한번 찍히면 헤어나기 어렵다”
혹시 함부로 반말을 하는 신부님들은 예수님을 닮으려고 그러시는걸까.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늘 반말로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이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반말과 존대말 중 어떤 말이 합당할까...하고 고민하다 반말로 번역하기로 원칙을 세웠던 것뿐이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나라에 나타나셨다면, 사랑의 예수님은 아마도 사람들에게 존대말을 쓰지지 않았을까. 이런 관점 때문에 지금도 예수님 말씀을 존대말로 번역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함부로 반말을 하는 신부님들은 오히려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 분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른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함부로 반말을 하는 신부님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즉, 속세에서 큰 권력이나 부를 가진 이들에게는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역시 예수님의 뜻과 다르지 않은가. 예수님은 권력을 가진 자나 재산이 많은 자보다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 소외당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병든 사람 등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사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우선 손을 내밀라고 가르쳤고 몸소 실천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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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올해는 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이 되는 해.
공의회 주제는 ‘아죠르나멘토’(Aggiornamento;교회의 현대화 운동), 즉 교회쇄신을 바탕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일치하도록 노력하자는 취지다. 이같은 주제 위에서 그 이전까지 유럽 중심주의 세계관에 따라 주변국 취급을 했던 아시아·아프리카 등 세계 여러나라의 민족도 똑같은 하느님의 자녀로 존중하게 됐다. 개별 민족이나 문화의 전통이 보편적 교회의 일치 안으로 통합하면서도 고유성을 지님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풍요한 보편성에 기여하도록 신앙의 토착화 작업을 장려하였다. 한복을 입은 요셉과 마리아 상, 금기에서 허용으로 바꾼 조상제사 등도 그 사례다.
그렇다면,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시기에 이 땅에서 사목활동을 하셨던 신부님들이라면 혹시 모르지만 오늘날 신부님들은 반말과 존대말을 가려 쓰는 한국의 전통적 언어체계에 맞게 말씀을 하셔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공의회 정신을 외면하는 일이며 공의회 이전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자세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신자들은 누구나 신부님들이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기를 원한다. 그래야 자신의 영성을 의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신자들의 기대때문에 신부님들은 인간적으로 더욱 고독하고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포기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그 어려운 길을 가는 신부님들에게 최근 드봉 주교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제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이다”
비슷한 말들이 또 있다.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악마가 깃드는 자존심···”(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그러므로 신부님들이(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지만) 경우를 가리지 않고 함부로 반말을 하는 것은 신부님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내 인격은 이 정도밖에 수양하지 못했습니다”하고 고백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다시 여쭈어봅니다. “신부님, 그런데도 왜 반말을 하십니까?”
* 이 칼럼은 사목정보 2012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