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영감을 준 여행지
정상혁, 정유진 기자
편집 =뉴스큐레이션팀
입력 2017.04.28 08:07 | 수정 2017.04.2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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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면 황금 주간이 펼쳐진다. 5월 첫째 주 석가탄신일과 어린이날이 낀 '골든 위크' 연휴다. 징검다리 근무일을 쉬면 열흘 가까이 긴 휴가를 즐길 수 있다. 봄의 복판, 어디로 갈 것인가. 여행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문학·예술계 인사 여섯 사람에게 물었다.
소설가 정유정·김탁환, 시인 김중식, 서양화가 황주리, 동양화가 사석원, 시각미술 작가 한성필이 작품에 영감을 준 국내·국외 여행지를 각각 한 곳씩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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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공주 갑사 계곡에 있는 용문폭포. ②신안 증도.
공주 갑사 -김중식 시인
청년 시절, 인도나 중국 등 방대한 지역으로 자주 여행 다니곤 했다. 그리고 귀국하면 국내의 왜소함에 극심한 열등감을 느꼈다. 지방 어디를 가더라도 시큰둥했다. ‘도대체 우리나라에 볼 데가 있어?’ 이런 마음이었다. 그러다 1993년, 별 기대 않고 충남 계룡산에 들렀다가 갑사에 갔다. 굉장히 조그마한 절이었으나 아름다운 목조건물, 스케일과 무관한 미(美)를 보면서 비로소 열등감에서 해방됐다.
손을 댄듯 안 댄듯 질감 고유의 물성을 살린 조형미. 만리장성이나 인도의 거대한 석탑에 비하면 사소해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자연과 어울리면서 소박하지만 최대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가. 오성급 호텔도 다 봤고, 세계 여행도 많이 가봤던 분들, 속도나 규모 같은 것에 더 이상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여행객들에게 추천한다.
신안 증도 -정유정 소설가
사람들에게 지친 마음을 위무받고 싶을 때, 혼자서 가만히 침잠하고 싶을 때, 섬으로 간다. 나는 서해였다. 전남 신안에 있는 증도(曾島). 2012년, 혼자 내려가 소설 ‘28’ 초고를 거기서 썼다. 절벽 위에서 바다가 발밑으로 내려다보이는 펜션에서 4개월간 묵으며 홀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서해 특유의 해무(海霧)가 올라온다. 그것이 섬과 겹쳐지면서 한 폭 산수화를 만들어낸다. 연륙교로 연결돼 있는데, 섬 전체가 트레킹 코스라 운동화 하나만 있으면 다 둘러볼 수 있다.
관광지로 활성화된 곳이 아니라 유흥업소도 없고 조용하다. 글을 쓰고자 한다면 정말 좋다. 누구 하나 건드리는 사람도 없고 오로지 바다뿐이다. 소설 ‘종의 기원’의 주인공 유진 얘기를 쓸 때도 그런 고립된 느낌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다. 게다가 전라도 음식에 대해선 어찌 불만을 제기하랴. 5월엔 민어와 숭어가 좋다. 거기서 먹었던 회가 잊히지 않는다. 펄에서 자라는 세발낙지도 추천. 힐링하고 싶다면, 이곳으로 가시길.
③청산도. 산·바다·꽃이 어우러진 우리 고향의 원형이다. ④서귀포 엉또폭포.
[정유정 '7년의 밤' 7주년 기념, 한정판 출간]
[다도해의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완도'로 떠나볼까?]
완도 청산도 -황주리 화가
전남 완도에서 청산도를 가려면 배로 50여 분 들어가야 한다. 청산도의 봄은 유채꽃 내음 가득한 바다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낡은 돌담길과 유채꽃, 산과 바다와 꽃의 색이 섞이고 섞여 풍경화를 그려낸다.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청산여수(靑山麗水), 신선들이 노닐 정도로 아름답다 해 선산, 선원이라고도 불렀다. 영화 ‘서편제’를 촬영한 곳이자 슬로 시티(slow city) 가운데 하나. 정해놓은 방향 없이, 어느 쪽으로 걷든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청보리밭을 보면서 한없이 걸으니 해바라기 줄기 사이로 한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던 옛 시인 함형수의 시가 떠올랐다.
탁 트인 바다와 꽃 풍경을 뒤로하고 낡은 집이 죽 이어져 있는 ‘미로길’ 골목으로 들어섰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여 있어 붙은 이름이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다. 어쩌면 이곳이 우리 고향의 원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그런 섬 말이다.
서귀포 엉또폭포 -사석원 화가
폭포 소리를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 몇 해 전 ‘폭포 화첩 기행’을 시작했다. 제주도의 폭포를 담기 위해 서귀포로 갔다. 엉또폭포는 매일 볼 수 있는 폭포가 아니다. 흠뻑 비에 젖은 한라산이 바다처럼 누우면 비로소 그 자태가 드러난다. ‘엉또’란 제주 말로 ‘작은 굴로 들어가는 입구’란 뜻이다. 평소에는 메마른 절벽이지만 비가 70㎜ 이상 내리면 절벽이 곧 폭포로 뒤바뀐다.
거대한 폭포는 비가 그친 뒤 대략 이틀 정도 있으면 그 자태를 감춘다. 모든 것을 삼킬 만큼 에너지가 크다. 이곳에서 영감을 받아 ‘토끼와 폭포’ ‘부엉이와 매화’ ‘가을 달밤의 수탉’을 그렸다. 50m 높이의 물줄기와 굉음이 어우러진 신비로운 장관을 화폭에 그린 후엔 꽤나 뿌듯했다.
⑤벚꽃 핀 진해. ⑥연천 주상절리 재인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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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진해 -김탁환 소설가
흑백다방, 경화역(驛), 군항반점, 이발소 군항이용원…. 고향 진해의 다른 이름. 1995년 해군 장교로 입대해 습작했고, 첫 장편 ‘열두 마리 고래의 사랑 이야기’를 냈고, ‘불멸의 이순신’ 초고 4500장을 품고 1998년 제대한 곳. 소설이 막힐 때마다 ‘흑백다방’에 가서 앉았다. 1955년 문 연 진해에서 가장 오래된 찻집이다. 온종일 앉아 음악을 듣고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는 시간이었다. 충의동 옛 유곽 건물과 북원로터리에 우뚝 선 충무공 동상을 지나 일본식 가옥이 늘어선 장옥거리로 가보자. 일제강점기 지어진 근대 초기 주상 복합 건물을 구경할 수 있다.
안민고개에 오르면 진해만을 조망할 수 있다. 배가 고플 땐 중국집 원해루가 있다. 6·25전쟁 때 포로로 잡힌 중공군이 귀국하지 않고 남아 개업했다. 진해엔 엄마가 살고 있다. 사계절의 진해를 엄마와 함께 걸으며 얼마 전 책 한 권 쓰기도 했다. ‘엄마의 골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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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연천 -한성필 시각미술 작가
2016년 작업을 하기 위해 경기도 연천에서 몇 달을 지냈다. 연천은 경기도 최북단에 있다. 북한 접경 지역이다. 연천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잠재적 전쟁 위험 속에 놓인 심리적 고립의 장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연천에선 때 묻지 않은 숨겨진 비경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겸재 정선이 66세에 임진강 주변의 정취를 무릉도원으로 생각하고 화폭 ‘연강임술첩’에 풍광을 남긴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희귀 동식물과 두루미 서식지는 물론, 새벽에 임진강과 한탄강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도 볼 수 있다. 국내 유일의 현무암 협곡인 적벽과 주상절리도 있다. 제주도 주상절리와는 달리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가까이에서 세밀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시간이 만들어 놓은 대자연의 장엄한 ‘역학적 숭고’의 풍광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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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프랑스 마르세유. ②모로코 탕헤르.
프랑스 마르세유 -정유정 소설가
신작 구상을 위해 지난해 10월부터 두 달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 있었다. 집이 미라보 거리에 있었는데, 버스정류장 바로 앞이었다. 버스를 타고 40분쯤 가면 마르세유(Marseille)가 나온다. 아름다운 항구 도시. 프랑스 제2의 도시라 하는데, 항구를 따라 걷다 보면 하루 만에 도시 전체를 다 둘러볼 수 있다. 항구도시 특유의 고풍스러운 맛이 있다. 거의 매일같이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우리가 흔히 유럽에서 기대하는 길가에 늘어선 의자와 여유로운 풍경은 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가 경계를 맞대고 섞여 있다. 그 거리를 산책하면 세상만사 근심을 다 놓아버리게 된다.
특히 아름다운 건 성당. 노트르담 성당에 가면 꼭대기에 금으로 된 성모 마리아 상(像)이 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화려하면서 압도하는 게 아니라 동화적인 느낌을 준다. 반면 생 빅토르 수도원은 적막하다. 차갑고 스산하고 섬뜩하면서도 장엄함을 지닌 소박한 석조 건물에서 소설적 영감을 얻었다. 구(舊) 항구를 따라 맛집과 카페 수백 개가 주르르 있다. 어느 점심에 ‘비스트로 13B’라는 곳에 들러 프랑스 가정식을 먹었다. 담백한 음식, 감미로운 하우스 와인, 그리고 맛있는 빵! 지난 3월 다시 마르세유를 찾았을 때, 아예 걷자고 작정하고 배낭을 메고 헤맸던 이유다.
[당신의 하늘 끝, 프랑스 마르세유]
모로코 탕헤르 -김탁환 소설가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들어가는 관문 모로코 탕헤르(Tanger). 2006년 낸 소설 ‘리심, 파리의 조선 궁녀’의 주인공이 여기까지 간다. 그해 리심의 행로를 따라 이 역사적인 곳으로 답사를 간 적이 있다. 파리 마르세유에서 비행기를 타고 탕헤르에 내렸다. 과거 화려하게 빛나던 도시는 약간 쇠락해 있었으나 여전히 아름다웠다. 마치 옛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프랑스 시인 랭보는 아프리카를 드나들며 무역상을 했다.
프랑스와 유럽의 자유로운 인간들이 아프리카로 들어설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대서양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음식도 입에 잘 맞는다. 양고기찜, 파스타 종류인 쿠스쿠스(couscous), 전통 스튜 타진(tajine)…. 옛 프랑스 식민지였던 까닭에 음식도 프랑스풍이었다. 다만 동양인이 적어 눈에 잘 띄니 행동에 주의해야겠다.
③이란 야즈드. ④일본 나라 도다이지.
이란 야즈드 -김중식 시인
모래를 구워 만든 벽돌과 담, 굴뚝과 지붕…. 도시 전체가 모래 색깔이다. 이란 야즈드(Yazd)는 인간이 가장 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곳이었지만 1만년 전부터 이곳에 터전을 일궜다. 누군가를 이기고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도망쳐 남 해치지 않고도 안전하게 사는 삶의 방식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도시. 자연에 순응하는 순한 사람들이 산다. 척박하지만 마음이 푸근해진다.
2012년부터 3년간 주이란 한국대사관에서 문화홍보관으로 일했다. 이란 음식은 대개 양고기로 수렴하는 것 같다. 시실리크(Shishilik)를 먹어보라. 양갈비 여섯 대(1인분)가 나온다. 양을 한 마리 잡으면 4인분의 시실리크가 나온다. 뜻밖에 야채나 과일이 많다. 카스피해 근처의 엄청난 곡창 지대에서 들어오는 것들이다. 이란은 이슬람국가라 술을 마실 수 없다. 구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위험 부담이 크다. 욕심을 버리기 좋은 도시다.
일본 나라 -사석원 화가
유서 깊은 고도 일본의 나라(奈良)현은 사슴이 유명하다. 공원에서 사슴을 방목한다. 동물원에서나 마주할 법한 사슴들이 길가에 다니는 모습은 신기할 따름이다. 약 1500마리가 있다고 하는데, 사람에게 먼저 다가올 정도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사슴의 눈을 보고 있으면 고즈넉함과도 같은 여러 정서가 느껴진다.
이 사슴들을 따라 걷다 보면 웅장한 자태의 도다이지(東大寺)가 나타난다. 745년에 창건한 것으로, 거대한 청동 불상과 목조 건축이 유명하다. 세계 최대 목조 건물인 대불전(大佛殿)은 익숙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신령스러우면서도 고졸한 매력이 발길마다 서려 있다. 최대 청동 불상인 비로자나불은 앉은 키만 16m, 얼굴 길이만 5m다. 이 외에도 십여 점 이상의 국보급 문화재가 있다. 우리나라의 조각 기법과는 달리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 조각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⑤중국 둔황 막고굴. ⑥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
[옛길 따라 추억 파는 사슴과 당나귀]
['아리랑'서 느끼는 민족의 혼 고스란히…]
중국 둔황 -황주리 화가
중국 우루무치에서 밤 기차를 타고 고비 사막을 넘어 둔황(敦煌)에 도착했다. 둔황의 실크로드, 명사산을 가기 위해서다. 모래와 암반으로 이루어진 산인 명사산은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이 바뀐다. 걷거나 낙타를 타고 산을 오른다. 관광객들은 모래산을 몇 번이고 오르내리며 모래 썰매를 탄다. 명사산에서 사막을 내려다보니 관광객들과 그곳에서 삶을 이어가는 원주민들의 삶이 한 장면에 등장하는 그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명사산은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으면서도 고요하다. 마음이 평안해진다. 달나라 같은 고적한 풍경 속에 옛날과 오늘이 함께 공존한다. 사람이 있으면 잊을 수 없는 풍경이 되고 살아가는 무대가 되는 명사산의 모래 사막은 내 그림 속에서 그대 안의 풍경으로 남았다. 둔황을 방문한다면 양꼬치는 꼭 한번 먹어봐야 한다.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 -한성필 시각미술 작가
‘시간과 숭고’를 주제로 새로운 작업을 하기 위해 북위 79도의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로 향했다. 한국의 북극연구소인 다산기지가 있는 곳이다. 북극을 떠올렸을 땐 탐험가들의 험난한 고난의 이야기 탓인지 추위 속에서 눈과 얼음으로만 황량하게 뒤덮여 있는 오지가 생각났다. 그러나 막상 가본 북극은 정보와 교통수단의 발달로 여행과 연구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자 자연 풍경과 개발이 접점을 이루는 곳이었다.
과거 아열대 기후로 석탄이 생산됐던 스발바르 제도는 현실과 상상이 공존한다. 눈이 녹은 지역에선 이따금 오래된 낙엽 모양의 화석도 발견된다.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된 빙하의 침식과 퇴적으로 만들어진 대자연의 장엄한 풍경. 그리고 빙하시대 이전부터 있던 석탄을 증거 삼아 북극의 아열대 기후를 상상하다 보면 이곳에서의 시간이 비현실적이게 느껴진다.
이곳에서 채취한 얼음을 컵에 넣고 위스키를 따랐다. 내린 눈이 겹겹이 쌓여 생겨 만들어진 얼음층이 위스키와 만나니 수많은 기포가 올라오며 ‘톡톡’ 방울 터지는 소리가 났다. 응고된 세월의 시간을 알려주는 듯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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