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의 시력 보호를 위해 원본에 없는 행 띄우기를 하였습니다.
임 그림자
권 예자
몇 해 전 어떤 송년회에서였다. 허물없는 모임에서 식사가 끝나고 가요주점에 들르게 되었다. 연말이어서 카페 측에선 작은 이벤트를 준비한 듯, 번호표를 하나씩 주면서 그것에 의하여 여흥을 진행한다고 한다. 실내에는 50여 명의 손님이 그룹별로 흥겨운 분위기에 젖어 있다. 작은 무대엔 전자오르간, 드럼, 기타연주자들이 가벼운 실내악을 연주 중이다.
여흥이 시작되었다. 입장 때 받은 번호표는 끝날 때 행운권 추첨에도 이용되지만, 여흥에서도 이용되었다. 사회자가 재치 있는 이야기와 함께 노래를 한 곡 부르더니, 상자에 담은 번호표를 뽑아서 그 사람에게 마이크를 넘긴다. 받은 사람은 자기 장기자랑을 하고 끝나면 또 다음 사람을 뽑는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언제 무대에 오르게 될지 모르니, 미리 준비하기보다는 즉흥적으로 나서게 되어 많은 웃음을 유발하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행운권은 잘 당첨되지 않는데 여흥에는 아주 잘 뽑힌다. 그날만 해도 몇 사람 건너지도 않았는데 내가 나서게 되었다. 나는 특별한 장기를 가진 것이 없으니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내 앞의 멤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곡 「임이 오시는지」를 부르는 게 아닌가. 그 감미로운 분위기를 내가 깨뜨리면 안 될 것 같아서 곡 선정이 애매했다. 얼결에 첫말 잇기처럼 「임 그림자」를 부른다고 하였다.
나는 폐활량이 적다. 그래서 남들이 편하게 부르는 노래도 내가 부르려면 호흡이 모자라서 절절맨다. 더구나 음정이 낮아서 높은음을 부르려면 소리가 바르르 떨려 나오기 일쑤다. 그날도 그랬다. 노사연의 노래는 내가 부르기엔 많이 벅찬 것이었으니까. 전주가 끝나자 나는 호흡을 아껴가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저만치 앞서가는 임 뒤로
그림자 길게 드린 밤
임의 그림자 밟으려 하니
서러움이 가슴 에이네
임은~
“어머나!” 갑자기 덩치 큰 누군가가 나를 와락 끌어안더니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 사람에 가려서 앞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정신이 하나도 없다. 무슨 일인지 감도 안 잡힌다. 그러나 퍽 당황스러우면서도 순간적인 판단이 왔다. 이 사람은 울고 있다. 그러니 절대 나를 해칠 사람은 아닐 것이다. 흐느낌이 잦아들 무렵에 나는 천천히 몸을 빼었다. 올려다보니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람기억을 잘하지 못한다. 남의 얼굴에 별 관심이 없어서 5분 전에 말다툼을 한 사람과도 길 하나만 건너서면 알아보질 못한다. 그저 아는 사람인 듯해서 공손히 인사를 할 정도다. 하지만 이분은 본 듯한 기억조차 없는 사람이다.
앞을 보니 뒤에 있던 남편이 어느새 무대 아래까지 와 있다. 그도 많이 놀란 모양이다. 나는 남편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고 그분에게 돌아섰다. 흐느낌은 멎어 있었다. 이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한다. 나는 그냥 내려가긴 민망할 터이니 노래를 부르라고 그분께 권했다. 그리고 밴드에 손을 들어 반주를 부탁했다.
반주가 흘러나오고 그 사람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너무 잘 부른다. 성량이 풍부하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노래하는 걸 보니 성악을 하는 분 같다. 박인수나 엄정행의 수제자라 해도 믿을 만한 대단한 미성이다.
실내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고 노래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앙코르가 연호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앙코르는 남편의 것이다. 나는 속으로 남편에게 눈을 흘겼다.
‘앙코르는 무슨? 나는 간 떨어질 뻔했는데. 어이구, 속도 좋지.’
우리는 같이 인사를 하고 무대를 내려왔다. 박수가 오랫동안 그치지 않는 거로 봐서, 관객들은 미리 약속된 이벤트로 아는 눈치다. 다행이다. 왜 울었는지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목소리가 너무 슬프고 가여워서요. 애처롭고….”
세상에, 생면부지 여인의 음성이 가엾다고, 그 많은 사람 앞에서 흐느껴 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놀랄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영혼이 참으로 맑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정도의 음감을 가져야 그런 행동이 유발되는지, 음악을 잘 모르는 내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날 이후 나는 여흥으로 노래를 부르게 되면 즐겁고 박자가 빠른 노래를 골라 부른다. 목소리가 가엾어서 남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잘못은 한 번으로 족하므로.
오늘 저녁에는 서울에서 수필 동인의 송년회가 있었다. 분위기가 따뜻하고 흥겨웠지만, 대전에 사는 나는 모임이 끝날 때까지 있기는 어렵다. 적당한 시간에 초겨울비가 내리는 서울을 등지고 기차에 올랐다. 대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잠도 설치고 늦은 밤에 마중 나온 남편은 내 표정이 밝다면서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다고 한다. 고맙고 미안해하며 내가 말했다.
“아주 좋았어요. 임은 있었지만 「임 그림자」는 안 불렀거든.”
남편은 허허 웃더니, 아쉬우면 지금 불러보란다. 나는 사양하지 않았다.
임은 나의 마음 헤일까
별만 헤듯 걷는 밤
휘황한 달빛 아래 임 뒤로
긴 그림자 밟을 날 없네
새벽 두 시에 「임 그림자」를 부르는 나를 보고 남편이 또 허허 웃는다.(2007)
첫댓글 아이고 언제 임그림자 한번 불러주세요
우는척 이라도 하면서 선생님 한번 안아보게ㅎㅎ
ㅎㅎ ㅎ,
선생님 댓글이 본문 컨셉과 찰떡입니다.
20년이나 지나서 지금은 그런 음성마저 안 나옵니다.
그때가 그나마 청춘이었던가 봅니다. ㅎ~~
어머 선생님. 저도 듣고싶어요. 언제 한번 여흥을 즐겨봐야겠는데요
ㅎㅎㅎ
전에도 그랬지만 요즘은 노래는 진짜 못 부르고 소리도 간신히 나옵니다.
판 벌렸다가는 여기저기서 소쿠리 들고 고기 사러 나올거예요.
돼지 잡는 줄 알고... ㅎㅎ.
@봄비 권예자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