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靜寺 誌
安靜寺誌 序
대개 이절은 초창 당시에 해동명구(孩童名區)라는 이름으로 지역을 특별히 정하여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옛 신라고찰(新羅古刹)에 얽힌 글은 모두 임진왜란 때에 병화(兵火)로 인하여 소실 또는 누실되어 없어졌음을 사실대로 고려(考慮)합니다. 늘 찾아오는 사람들과 혹은 상대자가 사적(寺蹟)을 물어오면 응답할 말이 분명하지 못하였음으로 이 또한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역사가 없는 고로 인하여 오랜 세월동안 길게 탄식하다가 지난 신축년(辛丑年) 1931년도 가을에 나와 대중들과 더불어 같이 사지(寺誌)를 편선(編選)하는 일에 모두 함께 찬성을 하였습니다.
사지편선(寺誌編選)하는 일의 전체를 월암노사(月庵老師)께 청탁하니 月庵께옵서 말씀하시기를 거칠고 우둔한 문필로 어찌 이 중대한 일을 저에게 맡겨 주시니 감사의 말씀을 무엇으로 보답할까 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성심성의를 다하여 옛 문헌 또는 상량문 등 타 사찰에 기록되어 안정사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는 것들을 탐사하여 찾아서 정확하고 내실 있는 本寺 본 사찰의 사적(寺蹟)을 편선(編選)할 준비하겠다! 하셨습니다.
月庵老師께서는 일찍이 유학하여 바다와 같은 많은 지식과 내, 외적인 지식을 겸비하여 그 재능이 허물없이 특별히 뛰어나기에 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후일에 오해 없는 바른 역사를 남길까 두려움 속에 노심초사 하다가 다시 이로써 이러한 절차를 올바르게 여겨 사지서(寺誌序)를 작성(作成)하는 일을 月庵老師께 허락받은 후에 부지런히 주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소생은 늘 사사로운 일에 머물러 있었으나 이때부터 영주삼방의 한 모퉁이에 머물면서 수개월 후에 돌아와 보니 본 사찰의 월암노사께서 그 기간에 안정사 사지를 완성하였습니다. 완성된 사지를 받들어보니 옛날과 지금의 사찰 사적을 밝고 역역하고 성실하게 되어있어 먼 훗날 후인에게 귀감이 될 것입니다. 만약 그 대가의 공은 일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이 된다면 이 기록이 바라건대 나와 같은 후인에게 전해져서 또다시 기록되어 만대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사적서 (寺蹟序)
나 일찍 들어보니 아는 것은 알지 아니하면 선이요 알아서 안 되는 것을 알면 병이라 하니 그 병 말씀이 늘 나에게 가히 마땅한 고로 어려움이 되고 어려움이 아니 될진대 그 병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감히 붓을 잡고 병필하여 선택하니 부처님의 말씀에 가로되 혹 먼저 사람의 문적이 있어 만일 도움이 되면 지난 일을 찾아본 후에 행하는 것이 이와 같다 하여서 그 때에 이 말씀이 생각나고 들리는 듯 하여 글을 찾아 함을 탐색하는 중에 다행히 옛 사람이 소유하고 정리하여 온 안정지(安靜誌) 한권의 책이 있어 받들어 보니 연대가 오래되어 좀벌레가 침입하여 지면이 잔결하고 훼손되어 글자 형태가 희미하고 사이가 버러진 곳이 있어 없는 글자는 보충하고 잘린 글자는 이었으며 잃어버린 글자는 찾아서 바르고 또 바르게 최선을 다하여 바르게 함이라.
슬프다 가까운 옛날에 본 사찰 및 각 암자 중건 중수 중즙 그 외에 입공자의 성씨 이름 연대 또 그 발자취가 밝지 못한 고로 각전의 상량관에 거재한 글을 일일이 찾아서 정교하게 뽑아 기입하였으나 그 또한 역시 있을 것이 없어 병폐하였습니다. 이로써 선한 의사의 성공적 수술이 끝남을 두 손 모아 분향근서 하노라(편자가 아는 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안정사 지(安靜寺 誌)
비구월암(比丘月庵) 김덕우(金德祐) 손 安靜寺는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 안정리 벽발산중(碧鉢山中)에 위치하고 있다. 대개 이 산은 스스로 고성군의 천왕산으로 남향 수십 리에 이르러 차이발지(此而拔地) 수천척(數千尺)하여 뾰족함이 일군을 크게 진압하니 그 이름을 벽발산이라 한다.
산 정상의 아래 좌우에 나누어져 울창한 숲이 서로 사귀는 듯 인접하여 좌측아래 가섭암이 있고 우측에 울창한 숲은 남향으로 곧게 뻗어 기이한 절벽과 다시 그 기틀이 어우러지니 曰 가로되 계족산이라 계족의 암맥이 스스로 동서로 뻗으니 벽발산 앞에 책상처럼 바로 되나 높은 것 둥근 고리와 같고 평범한 것은 병풍과 같아 우측 숲의 말미가 서로 접하니 또다시 전신이 남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오십 리 밖에 미륵산이라 하니라. 좌우양측 울창한 숲이 든든하고 환하게 둥근 범위 내에 밝고 길고 그리고 구부러진 계곡이 밝고 아름다우니 곧 사지 소재라 절 이름을 안정(安靜)이라 했으니 제석에 사천왕이 가섭불을 받들어 푸른 옥 바로 대하여 이로써 석가세존을 모셔 들이니 세존이 전지 가섭존자 시대 늘 존자가 그 발우를 품고 숨어있는 형상이 계족산이니 이곳이 비로소 미륵불을 기다리시는 곳이므로 이것으로 더불어 이미 우연히 서로 보람 있는 일이로다 하였다. 또 존자께서 닭발에 숨어 미륵을 기다리시니 이로써 그 기상이 안정을 옳게 생각한 고로 그 이름이 안정(安靜)이니라.
사지(寺誌) 초창은 신라 태종 무열왕 원년 갑인년하니 1308년 연대는 말고 오래되고 문자가 잔결되며 창시 연월과 중간 흥폐를 쫓아 없든 것을 실제로 사고하니 오직 하나뿐인 중수 기록이 있어 (옛 고승 송암) 선사가 뽑아놓은 중수기에서 숙묘 임오년에 게재하다.
그 글에서 말씀하시기를 원효는 계림인 이라 신라 진평왕 39년 정축년에 남양군 지금의 창녕군 불지촌에서 출생한다. 성은 설씨요, 소명은 서당이요, 법명은 원효라 초점이라 하나 대개 원효는 태종때 사람이요 또 더불어 의상 윤필도 이 산의 갖춤이 있어 수도하신 옛날 성지가 남아 있으니 송암의 말씀에 반드시 거처한 바 있고 용사(예고승 법명)스님이 말씀하시되 선묘 임진병란때 병화에 전․과․집․요사가 반쯤 이루어 졌으나 화재를 당하였음.
남아있는 바 대웅전의 몸체라 그때에 그 상량문을 개봉한 즉 고려 충선왕 원년 기유년에 회월(會月)선사가 준건이라 하다. 거금 653년(현재 726년) 그 후 효종(孝宗3년 임진년에 신행(信行), 의호(義浩) 두 비구가 중수하고 철종삼년 임자년에 정허(淨虛)가 중건 중수하다. 임진병란 후에 재건한 방(房)사는 송월요지 영월요지 승당현당 한산전지 함화당지, 광정당지, 용화당지, 동상실지, 동전지, 서전지, 벽변당지, 신경요지, 천왕문지, 대종각지 이상 십철처 요사가 즐비하였다. 그때에 현당은 지금 탐진당이 되고, 승당은 응향각이라 탐진당은 선조4년 신미년에 인찬 비구가 초창건하고, 거금 391년 라한전은 인조4년 병인년에 원민대사가 초창건하고, 거금 383년 명부전은 인조2년 갑자년에 여점비구가 초창건하고, 거금 276년(현재 349년)(가깝고 옛것을 순위 없이 기록한 것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통제영으로 종이 만드는 일을 본 사찰에서 설정하였거늘 이 일을 행함에 있어 수십 년을 지체하여 날짜가 더해감에 따라 공납 운영을 구하다가 사찰의 재정이 기울어져 어려움에 처해서, 이십 방사가 점점 탕진하고 수백 승려가 뿔뿔이 흩어지니 다시 이어 지탱할 길이 없어, 현종 경자년에 비로소 종이 만드는 원료(딱) 무자전 자금 이백량으로 본 사찰 각 승려에게 나누어 매 한량에 이자를 매겨서 한 딱(일인당) 여덟 근씩 하여 일만 근을 갚으므로서 무자전 이백 냥을 무마할 수 있는데 그러나 이 일을 시행한 지 수년이 지났으나 딱 무역할 날짜는 가까이 오고하여서 날짜를 연기하고 약속을 두텁게 하였으나 큰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어 그 후에 통제사 이석구가 그 뜻을 슬프게 여겨 그 일을 촉탁하여 구하니 스스로 이 일이 무마되었었다. 현종7년 신축년에 정허가 중수 만세루하고 철종3년 임자년에 어중수 대웅전하고 촐묘 계해년에 공숙이 시설 불양계사고(개금불사를 말함) 월 2년 해운어 탐진당을 중수하다. 병인년에 해용 추암 양사(兩師)가 또 열왕게를 설치하니 앞전에 일하여 놓은 것과 그때의 품삯이 많아졌기에 두 양개가 빨리 갈라서니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오래도록 사찰을 지키는 사람은 덕혜 추암 정담 셋 선사이니라. 월 13년 무인년에 인암이 만세루 지붕을 중수하고 이해에 원명이 다시 베푸는 모임을 하고 신묘년 가을에 해운이 명부전 및 응향각을 중수하다.
언전년에 탐진당을 보수하고 계혜년에 장등을 세우고 이때는 다원명이 추가(증인)되었다. 갑오년에 인암이 중건 나한전하고 정유년에 회산이 그림으로 명부전 나한전 양전에 치장하고 무술년에 취운 원명 양사(兩師)가 중설, 불양게하니 소이 대웅전에 바치는 사람이 이 앞전에 호랑이와 사자상을 짤라서 가지고 가니 결국 그 악이 심하여져 말기에는 안정 동민이 본 사찰을 탈취, 점령하고서 산의 경계를 다투어 소송한지 6년에 한송(漢松)이라는 사람이 성(姓)은 진양강씨이며 지금의 서울에서 화족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 지금의 세무담당을 일찍이 맡아서 통도사에 내려와서 임진년에 이 산에 들어와서 부지런히 일하며 공적의 일 때 근면 공산 십여 년 만에 본 사찰이 크게 부흥하다. 그리고 앞전에 있었던 소송문제에 누락된 것과 정정하는 일을 마무리하여 다투던 송사는 이겼으나 비용이 산적같이 쌓이었으나 취운이 반듯하게 사찰 경영을 공적으로 운영하여 이로써 그 비용을 부담하였습니다.
또한 이로써 호랑이와 사자상을 충당하였고 경자년에 스스로 가섭암으로부터 제답 이십 두락을 본 사찰에서 부치게 되니 늘 사찰의 살림이 어려운 가운데도 불구하고 이 해에 중수 만세루 및 요사를 중수하니 금성은 화주가 되고 한송은 감독을 하였습니다.
갑오년에 취운이 만수전을 세우고(지금의 칠성각) 거금 69년 취운이 이로써 돈 1200냥을 불사에 도우고 또 논 2두락을 사찰에 매입하여 들였으니 취운은 본관은 밀양박씨 본 사찰 수호 30년에 자상하고 두루 세밀하니 산과 들이 감사하다는 이름을 불렀습니다. 취운선사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먼저 환란 중에 똑바른 종루나 종각을 얻지 못함을 전하니 이에 이르러 무릇 약 일백 명은 점점 성취하였으나 나머지가 부족함이 많아서 대종을 갖추지 아니할 수 없어 이렇게 큰일을 이 한 해 동안에 시전(始錢) 보시 받은 돈 1400냥을 구하여 과거에 늘 무역하던 거래처인 전라도 담양군에 있는 용천사에서 실 신해가 주인으로 하고 금성스님과 월재스님이 서로 도와 일을 하였습니다.
슬프다. 단기 4255년 계해년에 장등 실화로 과 집에 갖추어져 놓은 불상이 모두 소실됨으로 늘 마음이 편치 못하여 당시 신해스님, 금성스님, 금남스님 셋 선사께서 화루가 되어 영남 각 사찰 및 단월 모든 집에서 모금 2000여원을 하여 입년(入年) 갑자년에 재건하나 어려움이 많아 불상을 조성하는데 근심하고 있던 차에 흐르는 소문에 의하여 전남 강진구에 위치한 정수사에 오래된 불상이 있다고 하니 이내 사금 상원사를 모시고 즉시 그 절에 가니 주지와 군수와 더불어 상의한 즉 허락이 되어 본 사찰에 편안히 옮겨 모시니 앞전과 같이 더불어 새로움과 기쁨이 넘처 배가 되도다. 그 당시의 주지는 김침송 화상이었습니다.
단기 4263년에 경오년에 대웅전 단청 및 삼존불상 도금을 하니 그때에 시주는 본군 정량리에 사시는 김씨 문중에 대각화원 화주승은 비구니 김사덕 스님이요, 도감스님은 김월암 스님이었습니다.
단기 4273년 경진년에 응향각을 중건하고 화주스님은 고진월 스님이요 도감스님은 황후암스님이었다.
단기 4282년 국가 재건 후에 국영으로 토지 개혁에 의하여 본 사찰 소유 토지 250여 두락을 매각처분을 당하고 지금은(그 당시에) 십여 두락 소유 답으로 유지하니 사찰의 살림이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이 또한 역시 산관 225여 정보에 산림이 울창하였는데 일제 해방 후에 도벌을 당하여 애처러울 정도로 잔흉하였는데 그 후에 식목 양림하여 전일과 같은 모습입니다.
가섭암 지 (迦葉庵 誌)
가섭 존자의 명호를 색임으로써 가섭암이라고 함. 암자의 초창(건설)은 신라 문무왕 9년 기사년에 봉진스님이 비로써 건설한다. 거금(距今) 1293년이 되었다. 오래된 가섭암의 암자 우측산 기슭 가운데 이르니 그 터가 불리한 고로 인하여 중간에 옮기게 되어 현재에 위치한다.
같은 산 기슭아래 수십의 건장한 땅을 택하였지만 그 연대는 가히 상세하지 아니하였으나 방패상에 유일하게 게판 하나가 있어 이것을 삼가히 물어본 바 중수기라, 그 글에 가로데 금년 병오년에 상량문을 열어 본 즉 인묘(년대를 말함) 을유년에 중수하다.(수리하다)
그때 수님을 거느리는 셋 우두머리의 스님들의 이름자는 없어져 멸실된 것을 알지 못하였으나 단 화주의 이름자를 받들어 세우는데 그치고 있어서 깊이 물어본 바 장노의 말씀인즉 그 때에 벽봉스님이 실제로 알선하여 이 일에 마음을 쓰는 노력이 두루 흩어짐이 없이 최선을 다하여 경영 수년에 많은 이득이 비로소 이루워짐으로 인하여 하던 일을 완성한다.
이때가 단기 4215년 태상(년대를 말함) 경인년에 추암스님 선사께서 계속해서 중수하며 공무(년대를 말함) 병오년에 또 이로써 취운선사가 동쪽으로 승방 셋칸을 세우다.
은봉암 지 (隱鳳庵 誌)
암자의 초창은 신라 성덕왕 3년 갑진년에 등파화상에 은봉암을 세운다. 거금(距今) 1258년 암자가 자리하고 있는 계족산정 지형이 봉이 알을 품고 있는 것 같음으로 이를 새김으로써 은봉암의 이름을 얻었다 한다.
대개 이 계족산은(방박) 마치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듯이 땅의 형세가 빼어나고 밝아서 실로 명승 법장이다. 일찍 귀의함이 많이 있어 암자 가까이 삼석이 일어서 있는 것이 높이 솟아있는 산의 준이 수십척이니 한 돌이 무너질 때 한 조사가 출언한다고 한다.
말씀드리자면 가까운 옛날에 혜월스님이 고성군 화당리에 노문규씨의 아들이라 종열 본군 내황리 영천아씨의 아들이 선묘 임진병란때 그 어머니가 조사(祖師)를 잉태하여 피난을 하던 중 제황리 바다 가운데에서 배를 세우고 조사(祖師)를 탄생하니 피난 가던 배와 행인 모두가 황이톤 마을에서 계족산이 서로 마주 보이는 땅에 이미 입산행열이 길게 이어져 축하하며 암자의 근본적인 힘으로 인하여 도를 깨달았습니다.
혜월과 종열 두 조사가 선후 먼저 또는 뒤에 도를 깨달을 시에 양석(兩石) 두 돌이 차례로 떨어졌다고 함. 지금 한 돌은 두루 몸을 이루니 장래의 조사(祖師)가 이곳 은봉암 암자에서 출생할 것이라 예언한 지 머지않아 조사가 출생한 것이라 모두들 탄봉하였다고 한다.
상고 중건 중수는 불가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상서롭게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철종 을묘년에 한번 우수하게 중수하고 태상, 병자년에 비구 광화스님이 중건한 바 있습니다. 거금(距今) 87년이라 그 후 무신년에 선방을 설치하나 오래가지 못하고 폐지한 바 있습니다. 동년(同年) 봄에 암자의 우측에 또 별도로 다섯칸 집을 세움을 끝으로 은봉암의 설명을 마칩니다.
의상암 지 (義湘庵 誌)
의상조사가 머물며 거주한 고로 인하여 의상암으로 이름하여 부른다. 이 의상 암자는 신라 문무왕 5년 을축년에 의상조사가 처음으로 창건한바 거금(距今) 1317년 전에 창건하여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세월이 흐름에 있어 글과 경을 통하여 결과에 이릅니다. 천이 있어야 그 백이 여유가 있듯이 본 암자의 지붕수리를 상세하게 고려하여 태상(년대를 말함) 계유년에 거금(距今) 89년 전에 보봉스님이 중수하고 그리고 그 후 24년 뒤에 병신년에 금성스님이 중수하고 또 다시 13년 후에 성명스님이 칠성각을 세우고 그 후에 법성스님이 본당을 중수하고 암자의 동쪽에 요사채 두칸을 세움을 끝으로 이상의 기록은 의상암이 년대 흐름을 문헌에 남아있는대로 열거하였습니다.
천개암 (天開庵)
천개암은 벽발산 안정사에 귀속되어 계족산 자락에 위치한다. 부르는 이름처럼 사방이 산에 둘러 쌓여 하늘만 열려있기에 이름하여 천개암이라 한다. 이 암자는 단기 4230년 정유년에 영해화상이 처음으로 창건하다. 지금으로부터 거금(距今) 66년
장의암 지 (藏義庵 誌)
장의암은 스스로 벽발산으로부터 북행십리에 산의 거대한 흐름이 있어 깎아 세운 듯이 뾰족하고 험하여 그 힘과 기운이 해상에까지 뻗혀있으며 특별한 한 작품을 보는 듯 한 구역의 장관을 이룬 곳이다. 이래서 장의암의 소재지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암자의 이름이 상세하지는 못하지만 그 후에 수룡스님이 살핀 바를 알고 보니 중수기에 기록되어 있어 태상 신묘년에 게재한 바에 있습니다. 曰 가로되 암자의 초창건은 당정관(唐貞觀) 6년으로 되어 있으니 신라 진평왕 53년 임진년에 초창건하다 거금(距今) 1330년이라 이를 따라 시간이 흘러옴으로써 응답할 수 있어서 중수하나 별도로 문적이 없는 연고로 부득이 표현하나 지난 을유년에 큰 수해가 있어 산사태로 장의암 전체가 매몰되어 홀연히 없어졌는데 밀려 떠내려진 한 자리에 불상 있어서 스스로 안정사 스님들과 전체와 성담스님이 이 암자에 점우하여 정해년 봄에 산사태 난 곳 좌측 언덕에 다시 창건하나 그 터가 불리하여 안정사 스님들과 호봉스님이 정사년 봄에 봄사지로 개수하여 법당 셋칸 열왕전 셋칸 요사체 셋칸을 다시 세우다. 그때에 임금은 각 보시하는 신도에게 모금하고 그리고 장의사로 승격한다. 그 후 경인년에 본사스님 김해경스님이 중수한다. 이상은 장의암에 대하여 남아있는 문헌대로 설명하였습니다.
원효암 지 (元曉庵 誌)
대개 원효는 옛 신라 조사의 이름이다. 원효대사와 같이 같은 길을 동행하던 의상조사와 의상조사의 동생 윤필거사와 함께 당분간 이 산에 거주하며 있으면서 각자 스스로 수도하여 크게 서로 존중하며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 원효암자는 이어 원효대사가 거치한 자리라 중간 흥폐는 가히 상세히 사고하지 못하였으나 광무 병신년에 원명화상이 스스로 책임 맡은 주인으로서 맨주먹으로 일을 구사하고 시자가하여 다섯칸 법당을 중건 중수 하였으나 풍상변역에 무수한 세월이 흘러 후인이 보전하기가 어려워서 지금은 폐지되어 그 발자취만 남아 있음을 문헌에 게재되어 있는 대로만 설명할 뿐입니다.
윤필암 지 (尹弼庵 址)
윤필은 대개 윤필거사라 부른다. 원효대사와 의상조사의 동시대의 사람이며 의상조사의 이복동생이라고 문헌에 나와 있음. 암자의 흥폐는 상세하지 못한 기록이므로 단 옛터가 있어 원효암의 수백보 아래 위치하고 있다. 이로써 옛 안정사 사지(寺誌)에 게재된 대로 설명합니다..
만리암 지 (萬里庵 址)
만리암은 암자의 흥폐는 또 그 기록이 상세하지 못함이요 단 그 사지는 벽발산의 최고 정상에 걸려 있으며 굽어보이는 푸른 암벽이 선요하고 기이하며 촉석이 나열하여 뒤로는 병풍을 두른 듯 아늑하며 절경을 이룬다. 앞에 있는 돌 사이로 험한 길로 이 암자에 오른다. 암자에서 동서남쪽으로 굽어보면 먼 바다와 하늘이 제한 없이 접해있는 고로 인하여 이로써 만리암이라 얻은 이름입니다.
백련암 지 (白蓮庵 址)
백연암 암자의 흥폐 또한 상세하지 못하나 단 그 사지는 분명하며 늘 있는 가섭암의 서쪽 수백보 아래 있는 땅이다. 만약 사람이 이 자리를 산세를 보고 기술 또는 형상을 풀이한다면 연꽃이 물위에 떠있는 형상을 눈으로 보는 고로 인하여 이로써 그 이름을 백연암이라고 불렀으며 그 사지 아직도 남아있음을 설명합니다.
옥지암 지 (玉池庵 址)
옥지암 암자의 흥폐 역시 그 상세함을 얻지 못함이요 단 그 발자취는 늘 있는 본 사찰의 북쪽 가섭안의 동쪽으로 인하여 산등성이의 땅이 아름답게 다듬어져 그 둘레를 이루고 오목하고 평화롭게 되어있음으로 인하여 이로써 옥지암이라 득명하였다. 옥지암의 사지가 남아있음.
망월암 지 (望月庵 址)
망월암 암자의 흥폐 역시 상세히 고려하지 못함이라 단 그 사지는 늘 있는 계족산과 벽발산 양쪽산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동해 앞바다에 달그림자가 비추어지면 가히 장관을 이룬다 하여 월인(月人) 금빛의 파도가 곳곳이 밝음이 있는 고로 인하여 망월암이라 이름을 얻었다고 하며 망월암 사지 역시 그 발자취가 남아있음.
소월암 지 (笑月庵 址)
소월암은 암자의 옛터라 태상(년도) 정해년에 비구니 선원스님이 처음으로 초가집으로 암자를 세움 그 후 정미년 가을에 도진스님과 선일스님 두 비구니가 다시 중수하였으나 그 후에 비구니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고로 지금은 폐지되어 빈터만 남아있을 뿐이다. 연대와 중건 중수의 기록이 상세하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후인이 이 문헌을 볼 것으로 생각하니 미비된 점이 너무 많아서 옛 선사님들의 문헌만 보고 짧은 실력으로 성심껏 정리하게 된 것을 감사히 여기며 먼 후일에 소생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곳 안정사에 와서 다시 정리하여 줄 것을 확실히 믿고 불전에 합장합니다.
본사찰 안정사(安靜寺) 상량문(上樑文)
안정사 상량문에 이르기를 강한 경계를 72구역으로 새롭게 나눔으로서 이렇게 단단한 성역은 영남일대의 가장 중요하고 성스럽고 웅장한 울타리 역할의 귀한 땅이기에 볏가리가 수천여소이니 안정(安靜)하다.
바다의 좌측에 보배로운 선문이 곳곳에 있으니 북쪽은 기이하고 높은 산등성이는 동쪽으로 임하였고 넓고 큰 바다는 옥구슬 꽃다발을 두른듯하고 저 멀리 동리는 떨어져 있고 멀리 가리켜 봉래산의 구름길에 태일이 우뚝 솟아 뛰어나니 평화롭고 멀리 방장의 높고 곱게 깔린 안개구름과 삼보와 하늘이 두루 도와 일천계례를 실고 갈 것을 민첩하게 도모하여 주시니 이미 고루 나눔이 두 번 있었고 이미 차고 가득차고 넘쳐서 일만 무리가 더불어 편안하다. 더불어 흥하고 흥함이 없어 폐하고 폐함과 더불어 흥한다.
지난날을 비추어 앞날을 살펴보면 임정의 난이 그치고 얼마 후 또 다시 호랑이 상을 수리한 후에 늘 폐하여 병진년의 재해 및 요사와 기로든 백양 내지 여러 지붕이 밝아 없어졌는데 늘 역사할 일을 게을리 하였다가 이번 기회에 기술이 뛰어난 전문 장인을 불러 짜임새 있게 일을 도모하고자 이집 주인의 아름다운 마음씨와 운이 일치하는 시기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앞서 어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의논하던 도중에 영문을 알 수 없는 한 물체가 돌연히 나타나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우뚝하게 튀어나오니 그 규모가 일백척이 스스로 하늘에 닿을 듯 하여 산중에서 푸른 금 한 근을 신전조성 수리하는데 쓰면 어떨까 하며 물어오기에 이미 대들보를 들어 올려서 짤라 수리하는 중에 있다고 마땅히 말씀을 떨처버리니 이때 갑자기 양동에 외로운 배가 바다에 출몰하여 조류 중에 있다가 어는 곳에 있는지 고요한 바다 가운데 알지 못하고 있는 중에 간송을 베어오다가 섬 정상에 버리니 그때에 양남에 사시던 (이공) 벼슬한 사람의 유첩(기록하여 놓은 책)을 살펴보니 나무에 대한 자비심이 있어(도벌꾼을 막기 위하여) 칼과 창을 가진 어른들로 하여금 변두리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단잠을 포기하면서 은봉암과 백운제에 백운이 머물러 있었기에 이 푸른 천하를 막을 수 있었다. 암자를 높게 이룰 것이 불가함으로 높이 올라감을 포기하고 양북 억장에 산이 높고 위험하여 이웃들과 정성을 다하여 이 땅을 휘어잡을까 하였습니다.
만약 이 높고 우러름을 깨달으면 마음에 품은 악을 버리게 됩니다.
양상의 밝은 물이 한 띠를 이루니 그 일대에 은파를 이루므로 산에 스님이 밤마다 임금님의 마음과 수명을 연장하는 축하함과 같다고 합니다. 이 물결을 옆으로 나누어 흘리는 것을 버리고 양하(동리이름)에 결집되어 있는 깊고 먼 거리를 차마 없이 소나무가 가득한 산을 맨발로 살아가니 사슴이 영문도 모르고 절규하며 심하게 웃었다고 한다.
그때 복원 상량 후에 깨달으니 나무숲이 더하니 상서스럽고 영광스러워 여러 대중들이 꿈틀거리고 다시 돌아와서 책역을 풀고 다시 힘을 결집하니 새소리가 나듯 대중이 영원무궁한 병기를 모으고 또 변두리에서는 우룡선사가 대중들을 거느리고 돌아와서 입실하니 그 기쁨이 가히 충만하였습니다. 홍유(泓宥)가 삼가히 봉합니다.
귀중품 조성 년대(貴重品 造成 年代)
대웅전 내 삼존불상 목조 고려 공민왕 7년 무술년에 인한 구비가 조성한 距今 604년
나한전 내 삼존불상 및 십육 존자(석조) 영조 17년에 의겸 선사가 조성한 바 距今 221년
명부전 내 불상 있는 불상은 상세하지 못함.
쾌불정(지포조) 현종 원년 경자년에 도환법사가 조성한 바 距今 302년
괘불은 그림족자를 걸어 장식하는 것으로 종이와 천으로 만듦.
원경진 진투제 효종 원년 경인년에 명희선사가 조성한 바 距今 312년
금강경 및 삼요경 목조 삼십일개 계해년 삼우러 距今 113년
대종 선조 30년 만력 18년 경진년에 백여유가 조성한 바 距今 455년
미술품 사자 호 상 용 각 목조 대웅전 중건 동시 석부도 9개 회우러당 영월당 등파당 무염당
화당당 용반당 나머지 2개는 현재에 각을 해 놓은 것이 없어서 기록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석비 아미타불비 시주는 공권수요 화주는 김월암 정해년에 세움 距今 89년
지장보상비 시주 황국동 화주 이치영 미타비 동시 세움
대방광불화엄경비 화주 송한태 지장비도 동시에 세움
팔경명소 만리창벽 옥지안암 은봉성석 인암망월 가섭모종 의상선대 계족약수 한산무송 등 팔경의 아름다움은 말로써 다 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안정사 산관정계 및 소유토지
북쪽 벽발산 벽발령 고개에서 남쪽으로 인암정까지이며 서쪽 사우재에서 동궁 안정리까지이며 동북으로 이르러 옥지암 사지이며 서북쪽으로 만리암 사지까지이며 동남쪽으로 기울어 양곡, 외붕까지이며, 동남쪽 천개암 뒷능선 포함하여 단위별 225정보이다.
안정사 본찰 대지 평수는 655평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