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르실료 운동의 도입
오늘날 꾸르실료 운동이 한국 교회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교회 운동으로 자리잡은 것은 사실 이지만 그 출발은 아주 작은 겨자씨가 싹을 내미는 것과 같았다. 그 사연은 이렇다.
1966년을 전후해서 '케빈 오도넬(Kevin O'donnell)' 이라는 미국인이 주한 평화봉사단 단장으로 서울에 머문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나 한국인의 신앙 생활을 경험했고 또 한국인의 토속 신앙 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무렵, 필리핀에서는 꾸르실료 운동이 매우 열성적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필리핀의 꾸르실료 운동에 깊이 참여하고 있던 '에드문도 카이모(Edmundo F. Kaimo)' 씨가 서울에 등장한다. 사업차 서울을 여러 번 방문한 바 있었던 그는 성령의 도움 으로 케빈 오도넬 씨를 만난다. 에드문도 카이모 씨가 말했다.
"한국 교회에는 아직도 꾸르실료 운동이 일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케빈 오드넬 씨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 동안 한국에서 꾸르실료 운동에 대해 알고 있는 교우를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 이런 대화가 오가면서 두 사람은 한국 교회에 꾸르실료 운동을 전개시 켜 보자는 합의를 하였다. 그 후 케빈 오도넬 씨는 혜화동 본당 교우였던 한양대학교 이해남 교 수와 문창준 씨 등 몇 사람과 만나 꾸르실료 운동의 내용과 참뜻을 전하였다.
이 때가 1966년 9월의 일이다. 당시 혜화동 본당 유수철 주임신부와 청파동 본당 김정수 주임신 부, 그리고 몇몇 신자들과 여러 차례 회합을 가졌지만 한국측 신자들은 꾸르실료 운동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다만 신선한 느낌과 기대감과 얼마간의 불안한 느낌이 있을 뿐이었다. 이 회합은 그 후로도 여러 차례 계속되어 드디어 한국 교회에서도 꾸르실료 운동을 시도해 보기 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 결론 후, 꾸르실료 임원이 한국에 와야 하는데 일행의 여비 문제 가 대두되었다. 에드문도 카이모 씨가 또 나섰다.
"그분을 보내겠다"(요한 16, 8)더니 마침내 필리핀에서 은인이 나타났다. 그는 꾸르실료를 경험 한 후 꾸르실료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공헌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비문 제가 떠오른 것이다. "기꺼이 제가 부담하겠습니다"라는 대답과 함께 두 차례에 걸친 필리핀 임 원단의 여비가 마련된다.
① 제1차 꾸르실료
1967년 5월 4일, 그 동안 유수철 신부와 이해남 교수는 당시 서울대교구장 서리였던 윤공희 주 교에게 꾸르실료 실시를 승인받았고 윤공희 주교는 서울대교구장 명의로 필리핀 마닐라의 교구 장에게 꾸르실료를 지도해 달라고 서신을 보냈다.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이다. 한국 최초로 서울 성수동 본당에서 영어로된 꾸르실료가 실시된다. 에드문도 카이모씨를 비롯해 12명의 필리핀 신 자들이 봉사를 했고, 윤공희 주교를 비롯해서 메리놀회, 예수 고난회, 골롬반회, 과달루페회 소 속 신부 6명이 지도신부와 강의를 맡았다.
이 때의 지도신부는 메리놀회의 손 신부(Edward Richardson)였다. 회장으로는 에드문도 카이모 씨, 부회장에는 미국인 케빈 오도넬 씨가 봉사했다. 수강자는 유수철 신부,김정수 신부와 메리 놀회 소속 신부 2명, 그리고 이해남, 문창준, 장진, 현석호, 김정진, 유석진, 김원경 형제등 모 두 21명이었다. 제1차 꾸르실료를 경험한 바 있는 현석호 회장은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아주 생소했습니다. 처음엔 우리 모두 어리둥절했습니다. 독특한 피정 방법이라는 생각은 했 지만 몹시 궁금한 것도 있었습니다. 헌데 시간이 흐를수록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소가 민가에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 봉사 악대(?)들의 신나는 가락에 주민들이 놀라기도 했을 겁니다. 한편 악대소리에 이끌려서 몰래 구경 나온 사람들도 있었구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성 당에서도 서양굿을 한다고들 수군거렸답니다.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때 한국 최초의 꾸르 실료가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간간히 통역도 있었지만 영어 때문에 상당한 이질감을 느낀 가운데 필리핀 지도팀은 또 한 번의 봉사를 다짐해 주었습니 다. 참으로 성령이 충만한 순간순간이었습니다. "김정진 박사는 그날을 이렇게 추억하고 있다.
"1967년 4월 20일경이었을 겁니다. 명륜동의 어느 형제집에서 회합을 끝내고 귀가하는데 자동 차 속에서 유수철 신부님이'5월 초에 무슨 특별한 약속이 있느냐?'고 말씀하시더군요. 난 즉석 에서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유 신부님 설명이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필리핀 사람들이 와서 피정 지도를 한다는데 영어로 3박 4일 동안이나 한답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나는 영어에는 별로 자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한번 받아 보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4월 말쯤되었을까, 서울 성수동 성당 약도와 휴대해야 할 물품 목록을 적은 편지 가 날아왔어요. 참 별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편지 내용은 오는 5월 4일 오후 6시 전까지 피정 장소인 성수동 성당으로 도착하라는 겁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유수철 신부님께서 자동차 속 에서 '5월 초에 특별한 약속이 있느냐?'고 물으시던 말씀을 전혀 기억하고 있질 못했습니다.
물론 그게 그런가 보다고 지냈다는 뜻입니다. 5월 4일날입니다. 퇴근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한잔 거나하게 됐지요. 밤 10시경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10시 40분쯤 되었을까요. 이해남 박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어요. '피정에 온다더니 지금 뭘하고 있어? 지금 당장 뛰어 오게나!' 아차 싶었습니다. 난 건성으로 지내고 있었던 겁니다. 허겁지겁 챙겨 가지고 성수동 성당으로 향했는데 도착하니까 11시가 넘었더라구요! 한밤중에 성당 경내에 들어서니까 저쪽 어 둠 속에서 누군가 날더러 '미스터 문!'이냐고 묻기에 아니라고 대답했죠. 그로부터 10여 분 후 에 진짜로 문창준 형제가 도착했어요. 헌데 그때 회장과 부회장이란 사람이 따로따로 한 분씩 계셨는데 뒤늦게 온 문창준 형제와 나를 나란히 앉혀 놓고 영어로 꽤나 길게 일장훈시를 하더니 만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바치라는 거예요. 한 잔 마신 데다가 졸음도 쏟아지고 영어도 잘 모 르는데 부회장이란 사람의 말이 상당히 장황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양반 은 회장의 환영사를 간추려서 우리한테 전하면서 부회장으로서 본 피정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서 한바탕 연설을 했는데 알 수가 있어야지! 좌우간 졸음이 쏟아지는 나를 문창준 형제가 쿡쿡 찌 르는 바람에 간신히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바치는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해놓고 조용 해지면 쿡 찌르고'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합송하다가 또 조용해지면 문창준 형제가 꼬집 듯이 찌르면서 눈치를 주는 겁니다. 졸음의 은총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 요 . 드디어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더군요. 그 순간 난'사람 살았다' 싶었 더니 웬걸 또 성당으로 이끌고 들어가는 겁니다. 할 수가 있나. 그래도 내심 성체 조배 정도 로 끝내겠지 했더니 아이쿠야! 그때부터 십자가의 길을 시작하네! 어이가 없더구만요. 할 수 없 이 우리는 길잡이에 있는 저녁 기도까지 다 끝내고서 시계를 보니까 밤 1시, 겨우 침실로 안내 해 주어서 잠자리에 들게 되었는데 침실에서 시계를 거두어 가더라구요. 이상하기도 하고 걱 정도 되었고 또 뭔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이 들면서 그렇게 정신없이 쏟아지던 졸음은 싹 없어 져 버렸지요.
침실은 싸늘한 시멘트 바닥에 담요 두 장을 주었는데 베개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어디에선가 연 탄 가스 냄새가 나더라구요. 그땐 연탄 가스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여서 이대로 잔다는 게 은근히 겁도 나고 허망함을 느꼈습니다. 물론 아침에야 알았지만 취사장 아주머니가 연탄불 을 두 개씩이나 복도 끝에 놔두었더랍니다. 밤 사이에 비가 오면 연탄을 버리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자다 말고 구공탄 냄새 때문에 한바탕 소동도 있었지만 신발도 그대로 신고 양복도 입은 채 잠을 청하니 잠이 오겠습니까? 사실은 밤 11시가 넘어서 들어온 지각 수강생??주는 벌칙 같은 것이었습니다. 수강자가 모두 21명이었는데 4개 분단으로 빠듯하게 나누어졌습니다.
우리 '성 바오로 분단'의 분단장은 문창준 회장이었는데 지도신부 1명에 신자 4명이었죠. 금요일은 그럭저럭 지냈는데 토요일이 되니까 우리 '성 바오로 분단'에 있던 지도신부인 미국인 신부가 종적을 감췄어요. 담요 두 장으로 이틀 밤을 지샜는데 매운 한국 음식을 먹은 탓에 그만 쓰러져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후에야 그 신부는 핼쑥한 얼굴로 다시 나왔습니다. 은근히 미안했지 만 그런 마음을 전할 수가 있어야지요. 당장 영어가 짧은데 어떻게 합니까.
사실 지도신부와 한 조가 된 것은 어쩔 수 없이 분단을 나누어야 하니까 특별 조치로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필리핀에서 온 봉사팀은 나름대로 전전긍긍했을 겁니다. 불비한 시설을 두고 불 평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도중에 포기할 수도 없었으니까. 사실 나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따라하기만 하다가 그만 신심 강의에서 여지없이 허를 찔리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성체 조배도 하고 노래도 여러 곡 배우다 보니 '다음에는 무엇을 하나?' 하고 기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말 하자면 그 순간부터 꾸르실료 프로그램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한 셈입니다. 인상적인 것은 크리 스찬 정신의 노래와 춤이었습니다. 처음엔 겸연쩍어 따라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기쁨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한다는 데 어떻게 합니까요. 억지로라도 따라서 하다 보니 기쁨이 찾아왔습 니다. 드디어 수료증을 받았습니다. '이제 집으로 가는구나' 했더니만 그게 아니였어요. 춤판이 벌어진 겁니다. 일종의 뒷풀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뜨거운 포옹과 한바탕 노래와 춤이 성당 마 당에서 벌어졌는데 그때의 기쁨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어느 형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난 반(半) 신부가 된 기분이야'라고… 나도 바로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김원경 교수는 제1차 꾸르실료 당시의 음악과 '서양굿'에 관한 내력을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
"꾸르실료 개회식 날이었습니다. 난데없이 트럼펫, 클라리넷, 아코디언, 바이올린, 드럼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안이 벙벙했었죠. 필리핀에서 온 임원들은 열대 지방의 열기를 여지없이 내뿜고 있었지만 우리는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특유한 몸짓으로 악기 를 연주하면서 데 꼴로레스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래도 불렀구요. 그때 어느 형제가 이렇 게 말했습니다. '이거이거 박장로파보다 더 심하구만.' 당시 개신교의 박장로파에 대한 사회적 인 비난이 많았을 때입니다. 특히 트럼펫을 불던 형제는 신명나게 궁둥이 춤까지 추었습니다.
몹시 낯선 서양 영화에서나 보았던 장면을 연상하면 됩니다. 클라리넷을 부는 사람은 왔다갔다 했고, 북을 치는 친구도 신나게 궁둥이 짓을 하면서 두들겼습니다. 백발노인인 바이올린 연주 자만이 우리네 정서에 맞게 약간 점잖게 활을 움직일 뿐, 전체가 흡사 곡마단의 악대처럼 출렁 이며 연주를 했습니다. 게다가 연주를 안하는 친구들은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우는데 잠시 후 우리도 조금은 흥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열광적이었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폐회 식 후, 악단은 성당 마당으로 나왔고 이웃 주민들도 구름처럼 몰려들었죠. 악단의 연주는 더 더 욱 열광적으로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열광적인 춤을 추면서 괴성을 지르니까 더욱 춤판 은 "活潔享윱求"그들은 아직도 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우리를 춤판에 끌어들였습니다. 손에 손을 잡고 빙빙 돌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야말로 함께 뒤범벅이 되어 춤을 추었지요. 고고나 트위스트 춤 이상으로 난장을 이루었습니다. 사실 어떤 형제는 트위스트 춤을 추기도 했구요.
이미 주위는 구경하기 위해 모인 이웃 주민들로 들썩대기 시작했고 그들은 한결같이 생전 처음 보는 서양굿에 넋을 잃고 있었습니다. '거 참! 서양굿도 구경할 만하이 그려!' 이렇게 말하면서 손뼉을 치는 구경꾼들도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누군가 서양굿이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렸던 것이 오늘날 '서양굿'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동기였습니다. 그 후입니다. 우리끼리 꾸르실료를 할 때였어요. 우리도 필리핀 형제들을 본떠서 폐회식 때 악단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유석진 형 제의 플루트 연주에다 유승모 형제의 섹스폰 연주와 가끔은 아코디언 연주를 곁들였고 나의 만 돌린 연주로 합세했으나 지금처럼 악기를 다룰 줄 아는 형제분들이 적어서 큰 효과는 없는 듯했 습니다. 말하자면 3인조가 서양굿을 하니 별로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엔 아코디언으로만 처리했습니다. 아마 그게 오늘날의 꾸르실료 음악의 효시일 겁니다. 아 무튼 첫번째 꾸르실료의 음악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우리가 처음 대하는 음악 형태였으며 꾸르실 료 교육을 받은 형제들 가슴속에 깊은 감동을 심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② 최초의 우리말 꾸르실료
제1차 꾸르실료를 경험한 형제들은 우리 나라에 본격적으로 꾸르실료를 도입하기 위해서 몇 차 례 모임을 갖고 필리핀 임원단을 다시 초청해서 영어 꾸르실료를 실시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 하여 1967년 8월 17일 서울 정동 명도원에서 외국인을 위한 제2차 꾸르실료를 실시했다. 지도신 부로는 미국에서 이미 꾸르실료를 경험한 예수 고난회의 박도세(Justin Bartoszek) 신부가 맡았 고, 회장은 도밍고(Melecio A. Domingo Jr) 형제였다. 이 때 한국인 형제들은 필리핀 임원들을 도우면서 일주일 후에 실시하게 될 한국어 꾸르실료를 위한 준비를 했다. 이해남 교수 등 10여 명의 한국어 꾸르실료 준비팀은 이미 3개월 전부터 우리말 꾸르실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름방 학을 이용해 '길잡이'를 번역했고 담화 자료도 번역해서 참고해야 했으며 노래도 새롭게 편성하 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몇 수십 차례의 회합도 계속 되었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기울인 한여름이었다.
1967년 8월 24일, 서울 정동 명도원에서 한국어 꾸르실료가 실시되었다. 지도신부로?유수철 신부가 맡았고 회장에는 이해남 형제가 봉사했다. 사실 우리말 꾸르실료인 제3차 꾸르실료는 장 차 한국에서 꾸르실료 운동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하는 것이었기에 매우 중 요했다. 임원진은 그야말로 목숨을 다한다는 각오 아래 봉사했다. 그 모습은 "누가 나에게서 목 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요한 10, 18)이었다. 마침내 "하느님께 서 기쁜 마음으로" (2고린 9, 7) 우리말 꾸르실료를 축복해 주셨다. 예상 외로 우리말 꾸르실료 는 대성공이었다. 앞으로 이 땅에 꾸르실료 운동의 초석이 되어지는 그 어떤 순간이기도 했다.
제3차 꾸르실료를 통해 꾸르실리스따 33인이 새롭게 탄생했다. 이렇듯 우리 나라에 꾸르실료가 도입되기까지는 필리핀 형제들의 아낌없는 사랑과 봉사가 씨를 뿌렸으며 그 씨앗을 받아 유수철 신부, 김정수 신부 그리고 이해남 형제 등등 초창기 꾸르실리스따들의 피나는 노력이 또 다른 열매가 되었다.
출처: 마석성당 울뜨레야 원문보기 글쓴이: 이창환(서-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