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대형 (The Big Boss)
제작/배급 가화전영공사
골든하베스트 1971.10.03 공개
제작 : 레이몬드 쵸
감독 : 로 웨이
무술지도 : 한영걸
음악 북경어판 : 원후린
영문판 : 고가휘
캐스트 : 이소룡, 마리아 리, 전준, 한영걸, 묘가수
이소룡이 홍콩에 돌아와 주연으로 촬영한 첫 작품.
정조안(이소룡)은 태국의 마을에 와서 제빙공장에 취직한다. 그런데 이 공장은 그늘에서 마약 매매를 하는 악인이 경영하는 공장이라서 그것을 우연히 알게된 동료가 죽임을 당하고, 이에 정조안의 복수가 시작된다는 내용.
전통적인 복수극 입니다만, 여기서 보이는 이소룡의 모습은 후의 ‘용쟁호투’ 의 살기등등한 모습은 아니고, 온화하고 천진난만한 얼굴이 인상적입니다.
미국에서의 성공을 꿈꾸고 있었던 이소룡 이었지만, 생각한 데로 풀려나가지 않아 낙심하고 있던 그는 홍콩에 돌아갈까… 라고 생각합니다. 홍콩의 영화계에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 보려고 귀국을 했다가 모국에서는 어느새인가 자신이 유명인이 되어있고 굉장한 환영을 받는것에 놀랍니다.
당시 홍콩에서는 이소룡이 이전 출연했던 ‘그린호넷’ 이 방영되어 큰 화재를 모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눈독을 들였던 것이 골든하베스트를 설립한 직후의 프로듀서 레이몬드 쵸로 이소룡과 두편의 영화출연 계약을 한 것이 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출연료로 이소룡과 계약했지만, 영화제작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던 관계로, 태국의 과자 메이커 등에서 도움을 받아 촬영을 했습니다. 그 결과, 이 작품은 당시의 홍콩 영화의 모든 기록을 갱신하는 대히트작이 되어, 이소룡(그리고 골든하베스트)의 처지를 크게 바꾸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공개되었을 당시의 타이틀은 좀 심하네요. 본래는 당시 미국에서 대히트한 영화 ‘프렌치 커넥션’ (시카고의 형사가 프랑스 루트의 마약 밀매 조직을 수사하는 이야기) 를 본따 ‘차이니즈 커넥션’ 이라고 하는 타이틀로 공개하려 했지만, 누군가의 실수로 ‘분노의 철권’ 이라는 타이틀로 공개해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Fists of Fury’ 의 제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이소룡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괴조음” 이라는 기합도 없고 (광동어판은 나중에 더빙한 것. – 화면상의 이소룡의 입모양을 잘 보면 촬영했을 당시에는 외치고 있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쌍절곤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홍콩의 쿵푸물에서는 킥이 그만큼 사용되어진 액션은 없었기 때문에 홍콩에서도 참신한 액션으로서 생각되어 진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무술지도는 이소룡이 아니고 보스를 연기한 한영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 후의 영화로 볼 수 있는 이소룡의 액션과는 약간 스타일이 다르고, 어떤 면으로는 초기의 성룡의 타입을 닮아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룡의 아크로바트적인 느낌을 주는 액션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투지에 넘치는 이소룡의 액션이 사실적인 박력을 낳고 있습니다.
영화의 스틸사진 중에서는 이소룡이 톱으로 적의 머리를 내리치는 사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재빙 공장에서의 사투장면에 들어있어야 할 장면입니다만, 본 영화에는 이 장면이 없네요. (그 장면과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이소룡이 톱을 휘두르는 장면은 있습니다.)
홍콩에서 처음 공개 되었을 때에는 있었다고 합니다만, 잔혹한 장면이라고 생각되어 그 후 편집된 것 같습니다.
액션영화, 특히 폭력물과 에로틱한 장면은 한 세트라고 생각하는 감독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로 웨이가 그런 사람 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많은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정력이 강해야 한다는 뜻모르는 이유로 이 베드씬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그가 촬영한 장면중 반만을 영화에서 보게 됩니다. 모두 검열로 삭제 되었어야 할 장면이었지만 반은 남았습니다. 잘려나간 나머지 반은 이소룡이 매춘부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인데, 이소룡과 그 여성과의 성교가 너무 격렬해 그 소음으로 근처의 방에있던 다른 커플들도 신경이 쓰여, 거기있던 여성이 그것을 엿본다 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이러한 포르노 장면은, 당산대형이 홍콩에서 공개된 후 삭제 시키라는 요청이 빗발쳤다고 합니다.
당산대형의 라스트씬 최후의 결투를 하러가는 장면에서 이소룡은 센베과자 같은것을 먹고 있습니다. 친구, 친척들이 몰살을 당해 그 복수를 하러가는 이소룡이 왜 센베과자 같은것을 먹으면서 보스의 집에 나타났을까요?
복수를 맹세한 이소룡이 자신의 짐을 모두 강에 던져버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소룡은 다음과 같은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각오를 하고 보스의 집에 난입하는 것이니까 가진것을 전부 버리고 가자.” 이소룡은 곧바로 매춘굴로 향합니다. 이 전 동침했던 매춘부를 찾아간 것이지요. 만나려고 했던 그 매춘부는 벌써 보스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누구라도 좋다’ 는 생각으로 근처에 있던 매춘부를 데리고 방에 들어갑니다. 여자를 침대에 쓰러뜨리고, 이소룡도 옷을 벗고 알몸이 됩니다.
여자는 이소룡의 육체미에 넋이 나가고, 동료(죽임을 당한 매춘부)로부터 들었던 이소룡의 대단한 정력에 마음을 부풀이며 알몸이 됩니다. 침대에 밀어 넘어뜨려진 매춘부는, 정조안의 훌륭한 육체미에 정신없이 보는 것과 동시에, 동료로 부터 들고있던 정조안의 대단함에 기대하며 기뻐해 알몸이 됩니다. 매춘굴에서 나온 이소룡은 그러고도 잔돈이 남자 그것을 몽땅털어 센베를 삽니다. 그리고 보스의 저택으로 향하지요.
천만다행으로, 이 장면은 삭제 되었습니다. 도대체 로 웨이 감독이란 사람은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홍콩 영화의 수준 낮음이 여실히 느껴지는 에피소드 였습니다.
현장에서 이소룡은 감독 로 웨이가 시나리오도 없이 촬영을 진행시키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빈번하게 충돌했습니다. 출연자들과 스탭들의 대우는 극단적으로 나빴고, 이소룡의 임시 거처도 상상 이상으로 나빴습니다. 스탭들은 세상으로 부터 완전히 격리가 된 상태가 되어, 편지 이외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없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촬영중에는 식료품도 부족하고, 고기등은 구경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총제작비 약9만달러, 처음에는 그 자금조차 조달되지 못하였는데, 태국의 과자 메이커를 스폰서로 간신히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덧붙여서 흥행 성적은 3197416.50 홍콩달러 였다고 합니다. 이소룡의 개런티는 당시 환산으로 2작품에 1만 5천달러 였다고 전해집니다.
최초, 이 영화의 주연은 이소룡이 아닌 전준 (제임스 티엔) 으로 캐스팅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촬영중 이소룡으로 바뀌게 되었지요. 태국에서 알게 된 전 무에타이 챔피언 체르사이와 글러브를 착용하고서 시합을 해 승리를 거두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본작 촬영의 약 1년전, 이소룡은 어깨에 57Kg의 바벨을 얹고 허리를 굽히는 트레이닝을 하다가 허리가 심하게 손상되었고, 진료한 의사들로부터 “평생 낮지 않을 것입니다. 쿵후는 잊어 버리세요.” 라는 충고를 받았습니다. 3개월간을 침대에 송장처럼 누워 불편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의 촬영시 까지도 허리에 약간의 통증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산대형을 보면, 전반부의 이소룡은 단독 주연으로 보기에는 왠지 어색합니다. 당시 골든하베스트는 쇼브라더즈사로부터 분기해 자신의 회사를 궤도에 올리려고 온갖 고생을 하고 있던 상황 이었습니다. 레이몬드 쵸도 이소룡에게 사운을 걸고 있던 것이겠지요.
이소룡은 홍콩 영화로는 신인이었고, 그것에 대한 일말의 불안이 2명 공동주연으로 설정 되어지게 합니다. 당산대형에서는 전준이 전반부를 이끄는 형태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대본이 없는 홍콩 영화로 감독이 마구 바뀌는 실상을 고려해도, 이 영화의 도중까지는 기존의 스타였던 전준에게 주역으로 비중을 둔 것이겠지요. 그러나 도중에서 주역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전준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 이 작품의 잔혹함을 주장하고 있는듯이 생각됩니다.
당시의 홍콩 영화는, 일본 영화의 영향을 크게 받아 잔혹한 장면을 많이 묘사하는 것으로 관객을 끌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소룡의 영화중에서 가장 출혈 장면이 많은 영화였지요.
당산대형 기자회견 중에
홍콩의 기자 Chin Kang이 기록한 ‘당산대형’ 개봉시의 기자회견 입니다. 1971년 9월 3일 오후 3시 50분 이소룡은 홍콩의 Kai Tak 공항에 도착했다.
나를 포함한 40명 이상의 홍콩 기자와 외국인 기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소룡은 붉은 셔츠를 입고 우리의 앞에 나타났다. 대환성과 함께 플래시가 터졌다. 이소룡과 그의 영화를 제작한 레이몬드 쵸, 묘가수, 마리아 리, 로 웨이 감독도 함께였다. 공항의 레스토랑이 기자회견장으로서 준비되어 있었다. 기자회견이 시작되어, 이소룡은 모든 질문에 한개씩 대답해 주었다.
어떤 여성 기자가 이소룡에게 질문했다. “태국에서의 촬영시에 당신은, 로 웨이 감독에게 의의를 주장하고 있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정말인가요?
이소룡은 미소지었다. 그리고 로 웨이 감독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네” 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기술적인 문제로 말다툼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영화를 보다 좋은 것으로 완성시킨다라고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서로 그것에 관해서 약간의 논쟁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들은 단편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친구로서 일을 계속 할 수 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절권도는 지미 웡씨의 가라데에 필적할 만큼 강합니까?
이 질문은 이소룡에게 있어 매우 난처하고, 게다가 대답하지 않으면 안되는 질문이었다.
이소룡은 온화하게 말했다. “나는 그를 잘 모릅니다. 그가 출연한 영화를 몇 편 보았을 뿐이지요. 가라데는 인기가 높고, 무도로서의 공적도 큽니다. 나의 절권도가 가라데에 필적할지 어떨지, 지미의 영화와 나의 영화를 보고, 그것을 당신이 판단해 보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가장 공평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회답은 충분하였다. 회견장에 있던 전원이 박수 갈채를 보냈다.
이소룡은 홍콩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경위를 간단하게 이야기 하였다.
나는 “사일런트 플롯” 의 촬영장소를 찾기위해, 1970년의 10월 인도와 파키스탄에 갔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은 중국적인 색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촬영을 단념 했습니다. 그 사이에 나의 친구 유니콘 챵이 나를 위해 쇼브라더즈에서 일할 수 있도록 교섭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의 교섭은 의견이 맞지 않았고, 나는 골든하베스트사와 교섭하게 되어, 우리는 합의 했습니다.
이소룡은 골든하베스트와 두편의 영화를 찍기로 계약했는데, 첫번째가 ‘당산대형’ 이다.
서양인이 만드는 중국 무술의 이미지는, 매우 왜곡되어 있습니다.
파라마운트나 워너브라더스는 나에게 중국 건달의 역을 하도록 요구해 왔습니다. 그리고 중국 쿵후를 쓸떼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모든 서양 영화는 서양인이 중국 무도인을 이기는 것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매우 화가 났었습니다.
이소룡은 중국 무술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이소룡의 인터뷰는 20분간 행해졌다. 마지막에 있던 기자가 그의 쿵후를 보여 주기를 끊임없이 요청했다. 이소룡은 미소 지으면서 일어서 킥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몹시 강력한 것이었으므로, 전원이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나는, 그가 그의 희망대로, 성공하면 좋다고 생각했다. 이 후 그는 ‘당산대형’ 으로 정말로 유명해졌다.
그 후의 3개의 영화는, 대단한 인기작이 되었고, 그는 몹시 유명한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다.
그의 약속은 정말로 완수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