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막의 여우
요아힘 뮌히버그의 7중대가 몰타의 하늘을 장악하며 맹위를 떨치고 있는 동안, 영국군이 일방적인 우세를 보여왔던 북아프리카의 전황도 사막의 여우 롬멜의 등장에 따라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 사막의 여우, 롬멜 중장 - 적이 상상조차하지 못하는 방법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만전술과 현대식 기동전술의 달인이었다. ]
북아프리카에 도착한 롬멜 중장은 본국의 사령부로부터 현지의 이탈리아군과 협력하여 영국의 공격으로부터 트리폴리를 방어하는데 전념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사실 이때까지도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는 북아프리카 전선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독일군의 역할은 단지 이탈리아군을 보조하여 북아프리카 전체가 영국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방해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롬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현지에 도착한후 이탈리아군이 장성부터 말단의 병사까지 철저하게 패배의식에 빠져있는 것을 보자 이탈리아군은 전혀 희망이 없으며 독일군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롬멜은 방어에 전념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트리폴리에 도착하자마자 본격적인 공격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치밀한 항공정찰과 정보수집을 통해 영국군이 먼 거리를 진격해오는 동안 상당히 전력이 떨어진 상태이며 보급선도 길어지고 병력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심지어 롬멜은 직접 정찰기에 탑승하여 최전선의 영국군 진영을 날아다니면서 상황을 살피기도 했다. 롬멜은 비록 독일군의 전력이 아직은 전면적인 공격을 추진하는데는 충분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영국군의 약점을 간파한 이상 적의 공격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끄는 것보다는 이 약점을 파고들어 즉각적인 공격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 이탈리아군의 이탈로 가리볼디 원수의 환영을 받고 있는 롬멜, 편제상으로는 롬멜의 상전이었지만 롬멜은 가리볼디의 의견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고 무시해 버렸다. ]
그러나 아직 북아프리카에 보내지기로했던 전차들이 모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군의 전력이 영국군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정도가 되지 못했으므로 롬멜은 영국군을 철저하게 속여 독일군의 전력을 과대 평가하게 만드는 몇 가지 계략을 준비한후 즉시 실행에 들어갔다.
롬멜이 구상한 기만작전의 첫 번째 단계는 전차부대를 동원한 대대적인 군사 퍼레이드였다. 독일군이 도착한지 한달째인 3월 12일, 트리볼리의 중앙광장에서는 대대적인 광고와 함께 독일군의 참전을 기념하는 군사퍼레이드가 열렸다. 전차부대가 퍼레이드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 좋은 구경거리를 보기위해 광장에 몰려든 수많은 군중들은 독일 전차들이 끝이 안보일 정도로 계속 중앙광장을 통과하는 것을 보면서 탄성을 질렀다. 요란한 엔진음과 함께 광장을 통과하는 전차부대의 행열이 너무나 길어 도대체 독일군의 전차가 몇 대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 군중속에 섞여 독일군의 전력을 염탐하고 있었던 영국 스파이들은 이 광경을 보면서 기가질려 '독일군이 적어도 수백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다'는 첩보를 허겁지겁 사령부로 보냈다. 그러나 사실 이 엄청난 수의 전차들은 중형전차 80대와 경전차 70대로 구성된 1개 전차연대 병력에 불과했다. 롬멜은 전차장들에게 시내를 빙빙 돌아 광장을 여러번 반복해서 통과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 롬멜의 명령으로 트리폴리 광장을 행진하는 독일 전차들 ]
그의 두 번째 기만작전은 이른 바 '널빤지 사단'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롬멜은 휘하의 장병들에게 굴러다니는 차량을 총동원해서 멀리서 보면 전차처럼 보이도록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며칠만에 수백대의 가짜 전차가 탄생했다. 이 전차 (?)들은 폭스바겐 자동차등에 널빤지나 캔버스를 부착해서 급조한 것들이었다. 롬멜은 직접 이 가짜 전차사단을 둘러본후 상당히 흡족한 표정으로 부관에게 농담을 던졌다.
"이거 생각보더 훨씬 잘 만들었군, 정말 그럴 듯한데! 영국놈들이 이 전차들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구만... 뭐 작전중에 귀관이 이 전차들을 몇 대 잃는다고 해서 귀관의 지휘권을 빼았지는 않겠네.. 하하"
1941년 3월 24일, 어느정도 공격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롬멜은 가차없이 공격명령을 내렸다. 동이 트기도전에 새벽의 어둠속에서 독일 제 5 경장갑사단의 진짜 전차들과 가짜 전차들이 일제히 시동을 걸고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첫 번째 공격목표지역인 엘 아게일라의 영국군의 진영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사막의 여우가 이끄는 독일 아프리카군단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 롬멜의 초기 공세에 동원된 널빤지 전차들 - 멀리서보면 마치 전차들로 보인다. ]
* 허수아비의 공격에 무너지는 영국군
[ 정찰기에 탑승한 롬멜, 그는 이 비행기를 타고 적군의 상황을 직접 정찰하거나 아군의 선도부대 상공을 날면서 전황을 파악하곤 했다. 물론 직접 조종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실제로 롬멜은 상당한 조종실력을 가진 아마추어 비행사였다고 한다. ]
이무렵 영국군은 보급선이 길어진데다가 최전선의 정예 병력중에서 2개사단을 그리스 전선으로 차출하는 등 전력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다. 영국 사령부는 제아무리 독일군이라도 본격적인 전력을 갖추려면 앞으로도 한두달은 족히 걸릴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지만, 얼마전 독일군의 전차들이 수백대에 이른다는 첩보로 인해서 약간 뒤숭숭한 상태였다.
이날 새벽 갑자기 사막의 저편에 나타난 엄청난 모래먼지를 목격한 병사들은 망원경으로 이 모래먼지의 정체를 살피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모래먼지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수백대의 독일 전차들이 관측된 것이다. 며칠전부터 독일군이 엄청난 수량의 전차를 가지고 있으며 곧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아 상당히 겁을 먹고 있는 상태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한 영국군은 장교로부터 말단의 병사들까지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최전방에 배치된 영국군들은 이 엄청난 규모의 독일 전차군단과 싸우는 것이 '달걀로 바위치기'라고 생각하고는 마치 얼마전의 이탈리아군이 그랬던 것처럼 변변한 저항조차 포기하고 일제히 교두보에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약 2주간의 기간동안 공포에 질려 무질서하게 줄행랑치는 영국군과 이들을 추격하는 독일전차 (?) 군단의 기묘한 경주가 벌어지게 된다.
사실 영국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던 엄청난 모래먼지는 롬멜이 사용한 세 번째의 기만전술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이것은 이른 바 '모래먼지 작전'으로 롬멜이 부하들에게 움직이는 차량의 뒤에 커다란 나무조각이나 쇳조각을 끈으로 매달아 끌고다니면서 최대한 모래먼지를 많이 일으키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따라서 모래먼지가 훨씬 많이 날리게 되었고 이 장면을 멀리서 볼 때는 어마어마한 대군이 진격해 온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누가뭐래도 북아프리카 전투의 주인공은 지상의 왕자 전차였다. 아프리카 군단의 주력이었던 3호전차가 모래먼지를 휘날리며 돌진하는 장면 ]
독일군의 기만전술에 영국군이 예상보다도 훨씬 쉽게 속아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롬멜은 더욱 과감해졌다. 그는 이왕 허세를 부리면서 대도박을 시작한 이상 적이 뒤를 돌아보고 낌새를 알아차릴 틈을 주면 안 된다는 판단을 했다.
마침내 롬멜은 이 도박판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올-인'하기로 했다. 그는 휘하의 모든 부대를 동원한후 이들을 3개 방면으로 나누어 산개시키면서 모든 전선에서 영국군을 계속 밀어붙였다. 때때로 궁지에 몰린 영국군이 필사적으로 저항해오기도 했지만 롬멜은 그때마다 뛰어난 전술로 영국군을 격파했다. 계속되는 후퇴와 패전의 소식은 더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패주하는 영국군을 더욱 혼란과 공황에 빠져들 게 했으며 그들은 대오조차 갖추지 못한채 오합지졸이되어 무질서하게 도주하기만 했다. 최초의 1주일간 영국군은 그들이 이탈리아군을 몰아붙이며 진격해왔던 무려 800km가 넘는 거리를 그무렵의 이탈리아군 처럼 줄행랑 치기에 바빴던 것이다. 훗날 영국군은 이 기간을 '치욕의 1주일'이라고 전사에 기록했으며 병사들은 이 꼴사나운 패주의 행열을 가리켜 '토브룩 더비'라고 부르며 한탄했다.
"우리는 그야말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만쳤다. 끝까지 싸우라는 명령도 없었으며, 혼자서 뒤쳐져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는 것이 두려워서 움직이는 것이라면 아무것에라도 몸을 싣고 동쪽으로 도주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훗날 독일전차들이 나무로 만든 가짜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 최선봉에서 부대를 지휘하는 롬멜장군, 그의 상징과도 같은 커다란 사막용 방진안경은 노획한 것이다. ]
1941년 4월 8일 드디어 독일군의 선봉부대가 토브룩을 포위했으며 토브룩에 고립된 영국 수비대를 제외한 나머지 영국군은 4월중순경까지 리비아 국경밖으로 내몰렸다. 롬멜은 불과 2주만에 이탈리아가 빼았긴 모든 지역을 회복했으며 보너스로 영국장성 3명을 포로로 만들어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는데, 이중에는 영국의 반격작전을 지휘하면서 이탈리아군을 일방적으로 격파하여 명성을 얻었던 오코너 중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 2주간 롬멜이 구사한 적의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전술은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가리켜 '사막의 여우'라는 전설적인 별명을 붙이도록 만들었다.
* 토브룩, 여우의 발목을 잡다
[ 해안도로를 따라 전속력으로 진격하는 독일 전차대, 그러나 이런 일방적인 전진도 토브룩에서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
그러나 동쪽으로 쉴새없이 달려가던 독일군도 커다란 암초를 만났으니 그것이 바로 리비아의 요항 '토브룩'이었다. 롬멜의 쾌속진격으로 토브룩에 고립된 3만 5천명의 영국 수비대는 이 항구도시만은 절대로 빼았겨서는 안된다는 웨이벌장군의 명령을 받고 모처럼 용전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이 토브룩은 이 일대의 유일한 항구도시로서 보급선이 길어진 롬멜에게도 궁지에 몰린 영국군에게도 반드시 차지해야만 하는 북아프리카의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계속 도망가던 영국군도 토브룩에서만은 죽을때까지 싸우겠다는 투지에 불타고 있었다. 게다가 요새화된 토브룩은 방어측에게 유리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 롬멜의 초기 공세를 보여주는 상황도, 거침없는 돌격으로 영국군을 궁지에 몰아넣고 리비아 국경밖까지 쫒아냈으나 포위된 토브룩을 함락시키지 못해 더 이상의 전진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
롬멜은 부하들에게 시체로 산을 쌓는 한이 있더라도 토브룩을 반드시 점령하라는 엄명을 내렸으며 4월 11일부터 4월 말까지 새롭게 도착한 독일공군의 항공지원을 받으면서 여러차례 대대적인 공세를 퍼부었지만 그때마다 결사적인 방어전을 펼치는 영국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그동안 승승장구하던 독일군도 이 토브룩 포위전에서는 전례없는 큰 피해를 입었다. 완전히 포위되어 곧 굴복할 것 같았던 토브룩의 영국 수비대는 난관속에서도 꾿꾿하게 버티었고, 영국군으로 하여금 '사막의 여우 롬멜에게도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희망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거칠 것이 없었던 롬멜의 진격이 토브룩에서 발목을 잡힌 것이다. 토브룩을 함락하지 못하는 이상은 더 이상의 동진을 할 수가 없었으며 그가 시작한 사막의 전격전은 토브룩에서 끝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롬멜은 토브룩을 점령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토브룩이 사막의 여우에게 눈엣가시나 다름없는 존재로 부상한 것이다.
[ 참호를 파고 기관총좌를 설치한 아프리카 군단의 병사들, 토브룩을 기점으로 이제 그들은 열악한 아프리카의 사막에서 고달픈 유목민 생활을 하게된다. ]
독일군의 전면적인 공세가 리비아 국경지대에서 멈추고 전황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이때까지 정신없이 내몰리던 영국군도 웨이벌장군의 지휘하에 군세를 재정비하고 반격을 위한 준비를 했다. 그들에게도 토브룩에 포위된 우군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해야한다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사막의 전투는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었으니, 이후 북아프리카에서는 최대의 격전지 토브룩을 둘러싸고 앞으로 2년여의 기간동안 독-영 양군이 사막의 모래를 피로 물들이며 서로 밀고 밀리는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 벌어지게 될 잔혹한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 토브룩 하늘에 나타난 튜튼기사단
한편, 롬멜장군의 기갑사단을 지원하기 위해서 사막의 하늘에도 새로운 독일공군이 파견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북아프리카에 도착한 전투기 부대는 JG 27 전투비행단의 1 연대 (gruppe) - I./JG 27로서 이들은 1941년 3월경에 뮌히버그의 슐라게터 7 중대 (staffel)와 합류하여 잠시 몰타 공습작전에 참가하여 몸을 푼후에 롬멜 장군의 작전을 항공지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시칠리를 떠나 지중해를 건너서 1941년 4월초에 리비아의 아인 엘 가잘라에 도착했다.
[ 이탈리아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로 파견된 ZG 26 3연대 소속의 Bf 110 전폭기, 북아프리카에서는 공중전보다는 지상군의 근접지원을 위한 전폭기로서 맹활약하게 된다. 사막용 방서 헬멧을 착용한 부대원들의 모습이 이색적이다. ]
사실 1941년 3월 24일부터 2주간동안 진행된 롬멜의 전격적인 기습공세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항공전력이 제대로 편성되기도 전에 급작스럽게 시작되었으므로 롬멜이 4월 15일 토브룩을 완전 포위할 때 까지는 제대로된 항공지원이 없었다. 아니, 사실상 이때까지는 변변한 지상전도 없었고 영국공군의 항공기들도 거의 전선에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항공지원의 필요성도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토브룩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멈추게되면서 요새화된 토브룩을 정면으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독일공군의 항공지원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제 10 항공군단은 몰타 공습을 잠시 늦추고 전력의 상당수를 황급히 북아프리카로 파견했다. 이 파견부대는 Bf 110으로 구성된 중전투기대 2개중대와 슈투카 폭격기 2개 연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들은 시칠리를 떠나 지중해를 건너서 리비아의 엘 가잘라로 날아왔다. 그리고 미리 파견되어 있었던 JG 27 1연대의 전투기들과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