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학생과 목회자, 그리고 다른 직업
신학생과 목회자는 다른 직업을 가지면 안됩니까? 신학생도 지금부터 기도해야 할 문제이지만, 목회자가 목회 이외에 다른 직업을 갖는 것에 대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곱지 않는 시각으로 볼 것입니다. 목회자 자신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신학까지 공부 한 사람이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두말 할 필요가 없이 목회자가 교회 안에서 말씀을 준비하여 설교하고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심방을 하는 일은 지상에서 가장 신성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특권입니다. 목회는 다른 직업과는 달리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특별한 사명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부와 세리를 제자로 부르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각 교단 헌법에도 대체로 목사는‘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거행하며 교회를 다스리는 자로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유익한 직분이다.’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그래서 목사는 양 무리인 교인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고 설교하며, 찬송하는 일과 성례를 거행하고, 하나님을 대표하여 축복하고 어린이와 청년들을 교육하며, 성도를 심방하고 궁핍한 자와 병자와 환난 당한 자를 위로하고 장로와 협력하여 교회를 다스리는 직무를 수행합니다. 이와 같이 양들을 인도하는 부르심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그의 탁월한 저서 <설교와 설교자>(Preaching and Preachers)에서 설교하는 일이 세상에서 그 어떠한 일보다 높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소명이며, 설교한다는 것은 사람이 종사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경이롭고 가슴 벅찬 행위라고 갈파했습니다. 설교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도 모르고 조용한 절망 가운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들에게 인생의 의미와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놀라운 사명이므로 그 이상 중요한 일은 지상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 대학 교수의 강의는‘지상에서 지상으로’떨어지는 것이지만, 설교는 그야말로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어 주는 가장 고귀한 사명입니다. 새들백교회 릭 워렌 목사도 목회보다 귀한 사명이 있다면 그것을 택하겠다고 <새들백교회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역 교회 목사가 된다는 것은 위대한 특권이며 놀라운 책임이다. 내가 만일 이 세상에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가진 사람이 목사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추호도 나의 삶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리스도를 좇는 회중에게 목양을 하는 것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책임이며,, 가장 멋진 특권이요, 가장 큰 명예이다.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그의 교회 가족에게 인도하는 것, 그들을 성숙한 제자로 키우고 개인적인 사역을 위해서 힘을 키워 주고 준비시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삶의 사명을 이룩하도록 내 보내는 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목적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 죽을 가치가 있다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부르심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직업’을 영어나 독일어에서는 모두‘부르심’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어떤 의미로는 사회를 어지럽히고 인간을 타락시키는 일 외에는 모든 직업이 하나님께서 주신 건전하고 신성한 소명입니다. 칼빈이나 루터 같은 종교 개혁자들이 말한‘직업 소명설’(職業 召命說)이란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직업을 부르심이라고 믿는 서구에서는 직업에 귀천을 별로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직업을 천직(天職)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도 복음을 전하면서 천막을 만드는 일도 계속했습니다.
방선기 목사님이 미국에서 유학할 때에 커다란 빌딩에서 청소를 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힘들고 짜증이 나서 청소기를 집어던지고 하나님께 하소연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목사가 성경공부나 설교를 주께 하듯 하는 것처럼 청소하는 일도 주님께 하듯 해야 한다는 골로새서의 말씀을 들려 주셔서 일하는 자세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서‘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은, 바로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씀이며 성도가 직장에서 하는 그 일을 주께 하듯 하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전임 사역은 가장 고귀한 사명이지만, 직장 사역도 하나님의 일이며 지나치게 성과 속으로 차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그 일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유교 사회에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순서를 정해놓고 선비를 우대했지만 서구사회에서는 오랜 기독교의 영향으로 그런 구분이 별로 없다고 생각됩니다. 스위스 같은 나라에서는 굴뚝을 청소하는 직업을 몇 대 까지 계속하는 집안이 있는데 아들이 대학을 나와도 그 일을 하게 한다고 합니다. 호주 같은 나라도 석탄을 캐는 광원 같은 힘든 직종을 가진 사람의 봉급도 많고 그 일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삼미그룹 부회장까지 지낸 서상록 씨가 그룹이 부도가 나고 직장을 잃게 되자, 롯데 호텔의 프랑스 식당에서 웨이터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청교도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미국 생활을 오래하지 않았다면 과연 쉽게 웨이터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인의 사고방식도 서구의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어느 일본 사람이 호텔에 투숙해서 안마사를 불렀습니다. 얼마 후에 들어온 안마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들어온 안마사는 자기가 옛날에 다니던 항공학교 교장으로 당시 위풍당당하던 3성 장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장군님, 죄송합니다. 안마를 하고 다니시는 줄은 몰랐습니다.”하고 안마 받기를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장군은 거북해 할 것 없다면서 기왕이면 옛날 사랑했던 후배를 안마해 주면서 그 옛날의 추억담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동경대를 나와 힘든 사법시험을 합격하고도 대대로 이어온 만두집을 물려받아 일한다고 합니다.
전에 있던 어느 교회에 육군 장교 출신의 건장한 30대의 남자가 있었는데 이른바‘백수’로서 몇 년 동안 직장도 구하지 않고 집에서 놀고 있으면서 형제들의 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노인이나 장애자들도 불편한 몸을 끌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물건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남의 신세만 지지 말고 직장을 구하든지 안정된 직장을 찾을 때까지라도 그 당시 서울대학교를 나온 사람도 하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세일즈를 하든지, 우선 건축 현장에 나가서 노동이라도 하면 일당은 벌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하다가 좋은 직장이 생기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대한민국 육군 장교’출신 체면에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도리어 기분 나빠했습니다.
전에 작은 트럭에 배추나 수박 등을 싣고 다니면서 파는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잘 될 때에는 열심히 하면 한 달에 수백만 원을 버는데 여생에 어느 정도 지낼만한 재물을 모아놓았다고 합니다. 50대가 넘은 지금은 열심히 일하고 여름에는 부부가 한 달 간 주로 동해안으로 여행을 한다고 합니다.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것보다는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에게는 남을 죄짓게 하고 타락시키는 직업 외에는 모든 직업이 귀천이 없는 건전한 직업이라는 바른 직업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신학교를 나오면 무조건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까? 해마다 판, 검사나 변호사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법대에 다니고, 실제로 사법시험에 응시하지만 실제로 시험에 합격하여 법조인이 되는 숫자는 법대생 전체의 숫자에 비해 극소수입니다. 법대를 나왔으니 누가 뭐라 해도 기어코 판사나 검사가 되려고 9년, 10년씩 고시에 도전해서 성공하는 분도 간혹 있고 그분들의 도전 정신과 인내심에 존경을 표하지만, 너무 오랜 세월 도전하다가 포기하고 주저앉아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젊음과 세월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천재적인 두뇌와 노력으로 몇 번 도전해서 안되면 다른 길을 찾는 것이 현명한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의 뛰어난 두뇌로 대기업이나 언론계, 교육계 등 다른 방면으로 진출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학에서 자기 전공을 하고도 전공과는 전혀 다른 분야로 나가서 일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사회에서는 오히려 전공과는 무관한 분야로 진출해서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안철수씨는 의학박사요 전문의이지만 의사로서의 적성과 흥미 보다는 컴퓨터에 관심이 있어서 의사 일을 과감히 포기하고 지금은 적성에 맞고 흥미가 있는 컴퓨터 바이러스 전문가와 경영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부인도 의사지만 미국 로스쿨에서 법을 전공하여 법조인이 되었습니다. <싫은 일은 절대로 하지 마라>라는 책을 보면 일본의 산부인과 의사가 의사라는 좋은 직업을 버리고 바둑 기사로 변신한 사례가 나옵니다. 예외이지만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자기가 지금 하는 일과 다른 일을 시도하고자 하는 데는 여러가지 난관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 관해서는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책> 같은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오늘날 신학생이 엄청나게 많은데 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반드시 목회자가 되라는 법칙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목회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고한 사명을 받은 사람도 있지만, 신학생 중에는 성령님의 불같은 은혜를 체험하지도 않았거나 사명감도 별로 없이 신학교에 들어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가 신학교에 들어온 후 주님께 영적인 소명을 받았으면 다행이지만, 졸업할 때까지 전혀 영적인 사명감을 느끼지 못하고 목회적 재능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회자로 부르셨는지 다른 일로 부르셨는지 한 번 깊이 생각하고 기도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뜨거운 성령의 체험이 있고 분명한 부르심을 받고도 힘든 일이 생기면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은데 사명감도 없이 막연하게 목회를 한다면 더 힘듭니다. 물론 때로는 소명의식이 별로 없어도 목회를 하는 가운데 어떤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주님께서 소명을 주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명의식이 없다면 먼저 소명의식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체험과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더라도 기질과 성격상 목회와 설교가 너무 힘들고 어려우면, 교회 목회의 은사보다는 다른 방면에 은사가 있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신학생은 설교하기가 너무 힘들어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언어에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성경번역선교회에 들어가서 평생을 성경이 없는 부족언어로 성경을 번역해 주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목사 안수를 받기 전에 금식 철야 기도하며 목회의 사명을 확인해보라고 하는데, 시험도 쳐봐야 점수를 알 수 있듯이 누구나 교회 목회를 처음 시작 할 때는 기도도 하고 목회를 의욕적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개척 교회를 하거나 목회를 하는 가운데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목회가 너무 힘들고 교인들은 날개 달고 훨훨 떠나버리고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 인하여 탈진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기도가 부족하든지 아니면 목회의 은사보다는 다른 은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목회를 하든 다른 일을 하든 진정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목사와 설교>(혹은 '설교와 설교자')에서 로이드-존스 목사는, 진정한 영적 소명은 잃어버린 영혼들의 타락과 멸망을 뼈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그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여 영원한 구원의 길을 알려주어야겠다는 간절한 소원이라고 말합니다. 즉 잃어버린 영혼, 지옥 갈 한 영혼이라도 복음을 전하여 천국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열망과 하나님 말씀으로 세상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분명히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이 복음주의의 전통적인 신앙이요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최근 이단이 아닌 정통 기독교 안에서도 이런 전통적인 지옥관은 많은 도전을 받고 있고, 견고하게 보이던 지옥문은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특히 복음주의자로 알려진 클라크 피녹, 마이클 그린 같은 학자나 심지어 저명한 존 스토트 목사까지도 지옥 불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영혼 멸절설(annihilationism)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이들 영혼 멸절론자들은 지옥에 관한 여러 가지 이미지 가운데,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지옥 불'(마5:22; 18:9),'영원한 불'(마 18:8; 25:41),'불 못'(계20:14-15) 등의 표현에서 불이라는 이미지는 영원한 고통을 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다 태워서 없애버리고 소멸시킨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지 않고 죽어서 지옥에 들어간 영혼의 운명은 지옥에서의 영원한 고통이 아니라 태워져 없어지고 소멸되어 버린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복음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서는 지옥이 실제로 불이 타는 못이 아니라 지옥은 단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나타낸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영혼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인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다고 했으면 그대로 믿고 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옥의 교리가 희미해지면 복음 전파의 시급성과 열정도 식어질 것은 자명합니다.
제가 신학대학에 다닐 때 경기고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나오신 부산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님이 개강 수련회를 인도하셨는데, 정 목사님은“나의 평생 사명은 부산과 전국에 사는 수많은 지옥 갈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은근히 지옥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을 꺼려하는 시대에 특히 엘리트 목사님에게서 분명한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들은 것은 아마 신학교에 들어간 후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주안장로교회 나겸일목사님도 지옥불에 대한 강력한 설교를 하시는 분으로 유명합니다. 일부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 가운데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하는 목사를 강하게 비판하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정필도 목사님이나 나겸일 목사님같이 영혼구원의 간절한 열망과 분명한 사명감을 가진 목회자를 통하여 구름같이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에 들어 쓰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 19:1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참된 영적 소명을 받은 사람은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던 주님의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주시는 영원한 구원을 거부한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통곡하시며,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함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롬9:3), 동포인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받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는 십자가 은혜에 빚 진자의 마음으로 온 세상 잃어버린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모든 세상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오로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한 평생을 바쳤습니다. 소명자는 바울 사도처럼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은 교회와 성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적인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목회를 하든지 출판 선교를 하든지 고아원 같은 사회사업을 하든지 문화 선교를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저 사도 바울이나 허드슨 테일러 혹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선교사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영원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잃어버린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영적인 아픔과 무거운 짐이 있다면, 그는 진정 영적인 부르심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이나 천국이나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이, 그저 목회자라는 신분이 의사나 판사, 검사만큼 혹독하고 힘든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도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대우를 받는 '사'자 돌림인 지위인 것 같아서 신분 상승을 위하여 직업적으로만 선택했다면 그런 사람은 진정한 소명의식이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런 분도 들어 쓰시는 것은 그분의 주권이지만 말입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은 성령님의 능력도 모르고 사명감이 없이도 큰 교회에서 목회를 했다고 고백한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 후에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한 후 은혜를 받고 바울처럼 주님과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염려로 마음으로 목회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드문 일이겠지만 때로는 말 잘하고 실력 있는 입시 학원 강사가 많은 학생을 모으는 것처럼, 성령님의 능력도 별로 체험하지 않고 비성경적인 신학을 가지고도 인간적인 능력과 지도력으로 큰 교회에서 목회하는 분도 간혹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어디서 목회를 하고 있더라도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고 그저 직업적으로만 일하고 있다면 영적 사명감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이는 숫자가 반드시 영적인 능력이나 소명감의 척도가 아닌 것은, 비성경적인 교회나 이단이나 사이비 종파도 인간적인 방법과 열정과 술수로도 얼마든지 수천, 수만 명의 군중을 모을 수 있고, 적은 수의 성도를 모시고 목회 하는 분 중에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을 위하는 마음으로 신실하고 소박한 목회 하는 분도 많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도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책망만 받을 교회가 있고 작은 교회도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칭찬 받은 교회가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와 사모님 수천 명이 모이는 수원 근교의 어떤 기도원 세미나 강사 목사님은 작은 교회 목사는 무조건 목회에 실패하고 무능한 목사인 것처럼 야단칩니다. 교회 개척 3년만에 교인이 30명이 안되면 목회를 때려치우라고 호통을 칩니다. 그리고 그런 세미나와 훈련에 계속 참석하여 기도하여 능력을 받으면 큰 교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 말씀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작은 교회에서 천 명 이상 된 교회의 목회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은 수천 명의 참가자에 비하면 극소수일 것이고 나머지 대다수는 5년 혹은 10년 이상 그런 집회와 세미나에 매 주 마다 다니고 아무리 울고불고 밤새워 금식하며 기도해도 교인 수가 그대로이거나 약간 더 부흥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제가 아는 분도 그런 집회에 몇 년을 참석하고 매주마다 훈련을 받고 기도도 많이 하지만 교인 수는 열 손가락 곱을 정도 입니다. 그런 집회에 참석하여 크게 부흥된 소수의 목회자는 큰 교회 목회를 할 만한 숨어있던 목회의 달란트와 지도력이 발휘된 것이고, 나머지 대다수는 아무리 기도하고 금식하며 몸부림쳐도 교회가 성장이 별로 안 되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들이 다 무능하고 목회 실패자입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달란트의 차이요 그릇의 크기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집회에 가서 다 큰 남자와 여자들이, 여간해서 남의 설교에 은혜 받지 못하는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닭똥 같은 굵은 눈물을 흘리며 비둘기같이 애통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 집회에 자주 참석하여 큰 은혜와 도전을 받고 재충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대로 꾸준히 기도하고 성실하게 말씀대로 목회를 할 수 있다면 큰 수확일 것입니다. 그리고 40일 금식기도를 몇 번해도 교회 성장 안 되고 평생 작은 교회를 하는 분도 여러 명 보았습니다.
작은 교회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동네 구멍가게들이 없어진다면, 라면 하나, 계란 한판, 콩나물 한 줌 사러 차를 타고 이마트 같은 대형 할인 마트나 백화점까지 차를 타고 가야 하니 얼마나 불편합니까? 작은 구멍가게도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게으름을 변명하면 안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작은 교회를 더 많이 만드신 것은 작은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흔히 큰 교회 목사만이 성령충만과 능력 받은 목사이고 시골교회나 개척교회 목사는 성령충만하지 못하고 능력 받지 못한 목회자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교회가 크고 교인이 많으면 오히려 낙심하지 않고 잘 되지만, 교인도 적고 힘들거나 시골이나 개척교회에서 평생 목회를 하는 것은 성령충만의 체험이나 소명감이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돈 많이 버는 직업도 많고 얼마든지 더 좋은 공무원이나 다른 직장이나 사업의 기회가 많은데 소명감이 없다면 누가 고생을 사서합니까?
어느 명문대를 나온 젊은 집사가 지방 대도시에서 가장 큰 교회에 다닐 때는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인도로 교인 3명인 개척 교회에 다니면서 목사님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얼마나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 집사님의 글을 보니 어지간한 신학생들을 뺨칠 정도로 영적인 통찰력과 성경 지식이 있었습니다. 2년이 지나 아직도 교인이 10명 정도 되는 작은 교회지만 그 교회 목사님의 말씀은 큰 교회보다 성경적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작은 교회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작은 교회는 다음과 같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혹은 사회 구원의 신학을 가진 목회자의 신학 때문에 작은 교회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목회자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죽어서는 천국 간다는 믿음이 없고, 지옥의 존재도 부인하는 목회자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오로지 세상을 개혁하든지 혁명을 일으켜서 세상을 지상낙원으로 만드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을 신봉하거나 종교다원주의를 신봉하는 목회자들 가운데 이런 목회자가 많을 것입니다. 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게 전도하여 천국가게 한다는 신앙과 신학이 거의 없으므로, 당연히 복음 전도가 아니라 사회나 정치 활동 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신학을 가진 목회자들 가운데는 대형교회는 무조건 나쁘고 작은 교회만이 아름다운 것처럼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목회자들 가운데는 구원의 확신이나 성령님의 뜨거운 체험이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둘째로, 목회자가 복음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어서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믿지 않으면 멸망 길로 간다는 신앙이 있지만, 소명 의식이나 뜨거운 성령 체험이 없고 말씀과 기도 생활과 전도나 독서나 여러 가지 면에서 게을러서 작은 교회로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 직장이나 사업을 하는 사람은 최소한 오전 9시경부터 오후 6시경까지 자기 생업에 충실합니다. 대개 큰 교회 부교역자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심방하고 많은 일을 합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 목회자가 게으르기 시작하면 새벽기도 핑계로 오전에 늦잠을 자고 하루 종일 어영부영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개척교회 가운데 새벽 기도회도 하지 않고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잠자는 목회자가 점점 늘어갑니다. 목회자가 세상 기준에 따르더라도 오전 9시부터 6시경까지는 하다못해 책이라도 읽고 성경연구를 해야 하는데, 새벽기도 10분 한 뒤 2시간 테니스 치고 축구를 하고 피곤해서 오전 내내 늦잠을 자기도 하고,‘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가 아니라, 목사들끼리 모여 ‘오늘은 이 사우나, 내일은 저 보신탕 집 먹회를 잘 하리’하면서 여기저기 전전하기도 합니다.
신학생 시절에 이른바 노가다라고 하는 건축 현장 일당 잡부 일을 조금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하루 일당을 받으려고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경까지 기진맥진하도록 땀 흘려 일합니다. 한번은 2층에서 일을 하다가 너무 진이 빠지고 힘들어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 아래로 떨어져 죽을까봐 걱정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일당 3만원 받았습니다.
세상 직장, 특히 미국 등 외국 회사에 근무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엄정하면서도 예외가 없는 회사 규율과 높은 업무 강도에 대해 곧잘 이야기합니다. 근무 시간 중에는 신문을 본다거나 개인적인 일 또는 사적인 목적의 전화사용 등이 금지된다고 합니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점심시간에 일하는 경우도 잦고, 점심 시간이 30분에 불과한 회사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처럼 근무 시간에 사우나를 하거나 개인적인 볼일을 보러 다니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무 시간이 끝나면 하던 일을 그대로 멈추고 칼같이 퇴근합니다. 자연히 그들의 업무 강도는 높을 수밖에 없고, 집중해서 일을 하다 보니 단위 시간당 생산성도 매우 높습니다. 미국인 회사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중에는 오직 일본인만이 미국인보다 더 철저하게 근무 시간에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노동 생산성이 미국에 비해 49% 밖에 되지 않는다는 통계는 수년 째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일과 휴식을 철저히 구분하여 열심히 일하고 휴가도 잘 보냅니다.
우리나라 일반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선진국 사람들만큼은 아니지만 근무 시간에는 성실하게 일한 결과 이만한 경제 대국을 이루었습니다. 북한에서 넘어온 탈북자가 하는 말이, 남한 사람들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새벽부터 밤중까지 엄청나게 일하는데 북한 사람들은 그만큼 힘들게 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니 남한 사회가 이만큼 잘 산다고 감탄했습니다. 지금도 밤 12시 넘어도 얼마나 많은 자동차가 다닙니까? 참으로 열심히 삽니다. 그렇게 주어진 하루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하루 삯을 받은 만큼 일한다고 해서 삯군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삯군은 삯을 받은 만큼은 일하는데,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TV 드라마에 통달하고, 컴퓨터 게임 전문가가 되고, 취미 정도가 아니라 밤낮 줄기차게 바둑이나 장기를 두거나, 사람 낚는 어부하라고 불렀더니, 날마다 강이나 바다에서 사람 대신‘물고기만 낚으러 다니는’목회자는 삯군이 아니라 날도둑이요 날강도라고 야단치는 어느 목사님의 말씀은 일리가 있습니다. 바둑에 심취했던 어느 목사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다리!' 했다고 합니다. 김삼환 목사님도 시골 목회를 할 때 바둑에 심취하여 밤늦도록 바둑 뜨다가 새벽에 교회에 가서 교인들의 머리를 내려다보면 검은머리는 검은 바둑돌, 흰머리는 흰 바둑돌처럼 보여 설교하면서도 속으로‘아다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크게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바둑판을 도끼로 찍어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물론 바둑이든 무엇이든 오락도 조금은 즐겨야 하겠지만 무엇이든지 도가 지나치면 목회에 방해되는 중독입니다. 건전한 오락이든 스포츠든 컴퓨터든 무엇이든지 중독이 되고 목회에 방해되면 단호히 근절해야 합니다. 큰 교회 보조받으며 날마다 빈둥거리며 세월을 허송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돈 버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건설 현장에 가서 일당 잡부라도 해 보아야 합니다. 요즘 신학생 가운데 등록금이 없어서 공부를 그만두는 신학생들도 있는데, 방학 동안에 얼마든지 노가다를 하든지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면 학비를 어느 정도는 충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일해 봐야 교인들이 헌금이 얼마나 피땀 어린 돈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월을 허송하는 목회자들에게 한 달란트를 묻어 둔 종에게 하시듯이“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책망하십니다. (저도 이 부류에 속한 것 같아서 항상 주님 앞에 송구스럽습니다.)
셋째로, 복음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목회자가 세월을 허송하지 않고 성실하게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며 독서를 하고, 전도와 심방을 하고 성도를 양육하지만 작은 교회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비록 눈에 띠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조금씩 성장시켜 주시기도 하고, 드문 경우지만 강해 설교로 유명한 정근두 목사님이나 김서택 목사님처럼 갑자기 수천 명 모이는 큰 교회에서 납치(?)해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이고 대부분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적으므로 믿음의 분량에 맞게 목회 합니다. 뜨거운 영적인 체험도 있고 구령의 열정은 있지만 자기의 그릇이 작은 것을 알고 과욕을 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목회 합니다. 자기는 황소나 코끼리가 아니라 사슴이나 토끼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욕심 많은 개구리처럼 황소 흉내를 내려고 억지로 배를 불리려고 하다가‘빵!’하고 터지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세계를 가슴에 품은‘월드 크리스천’으로서 세상 모든 영혼이 구원받기 위하여 늘 기도합니다. 그런 교회와 목회자를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충성한 교회로 기억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최고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목회를 하기 원합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란 바로 이런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와 목회자가 한국 교회에는 무수히 많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7천명의 선지자를 남겨 놓으신 것처럼 오늘도 명예와 정치와 부귀에 한눈 팔지 않고 묵묵히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시는 이런 목사님들 덕분에 우리나라 교회가 이만큼 성장했고 전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선교 국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두 달란트를 받은 종에게 말씀하신 칭찬의 말씀을 하십니다.“잘 하였도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지어다.”
큰 교회도 잃어버린 영혼 구원보다는 기성 교인 쟁탈전을 벌여 '인정사정 볼 것 없다'면서 '총동원 전도주일'이라는 미명하에 주변의 개척 교회 신자를 모조리 흡수하고, 그저 몸집 불리기에 급급하여 살쪄서 뒤뚱거리고 동맥 경화에 걸리거나 중풍에 걸려 몸이 마비되어 있는 사데 교회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책망 받는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제자입니까?>라는 책에서는 그런 교회를 성장했다고 하지 않고 비만증에 걸렸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미국 새들백 교회나 윌로우 크릭 교회나 부산 풍성한교회나 서울 동선교회처럼 진정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는 크게 칭찬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소명감도 없고 영혼구원의 열망도 없고 게을러서 교인이 없는 것을 가지고 '작은 교회는 아름답다.'라고 한다면 슬픈 일 입니다. 그런 교회가 아름답다면 극단적으로 말하면, 목회자 혼자 있거나 목회자도 교인도 없고 텅 빈 건물만 있는 교회가 지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교회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지구상에 66억 인류 대다수가 예수 그리스도 없이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우리 남한에만 해도 5천만 동포 중에서 기독교인이 860만이므로 (2006년 인구조사결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여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 4천만 명이나 있는데, 게을러서 작은 교회는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부터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목회자의 본업인‘말씀과 기도’보다는 중요하지 않은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게을러 열심히 주님의 일을 못할 때가 많아 늘 주님 앞에 송구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우리가 지난 날 성령님이 주시는 영적인 특별한 체험을 했든지, 아니면 그런 체험이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영광과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잃어버린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하여 특별히 부르셨다는 확신과 소명이 있다면, 우리가 목회 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 무슨 직업을 가지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신학도나 목회자는 모든 건전한 직업이 부르심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의 선교 명령을 순종하는 차원이 부르심이 되어야 합니다.
창 2:28의‘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과 바울과 모든 사도가 일관되게 강조하고 몸소 행했던 마태복음 28:19-20의‘선교 명령’혹은‘전도 명령(Evagelical Mandate)’이 더욱 중요한 주님의 명령이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모든 성도가 행해야할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결코 복음 전파와 세상 직업이 동일한 가치가 있는 거룩한 소명이라고도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복음 전파나 세상 직업이 동일한 소명이라고 한다면, 자기가 맡은 직장의 일과 사업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전자 제품이나 자동차 하나도 놀랄 정도로 ‘6 시그마 정신’으로 정성스럽고 철저하게 잘 만들며, 환경 의식이나 질서 의식 등 모든 분야에 다른 나라보다 앞서가고,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을 창작한 음악가나 고전적인 소설이나 시를 지은 문학가를 배출한 서부 유럽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 사람들이 소명을 더 잘 감당한다는 말이 됩니다. 문화명령의 관점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선교명령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원한 생명과 천국복음 전파에 관계가 없다면, 그들이 넓은 의미에서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우리 기독교인들과 동일한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문화 명령에만 순종하여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기는 하지만, 하나님 나라와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환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삼성 애니콜이나 소니 워크맨과 렉서스 자동차를 열심히 만드는 등 세상 일만 열심히 하는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직장 일이나 사업에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돈 벌어 복음 사업을 위해 바치는 것도 선교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본인도 복음 증거를 통하여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목회를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 전파를 최우선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그는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남가주 세리토스장로교회에서 목회하시는 영감있는 설교자 김한요목사님의 간절한 절규처럼, '영혼을 얻는 일과 관계되지 않으면' 우리의 직업은 결코 소명이 아닙니다. 영혼을 얻는 일과 관계되면 세탁소를 하든지 파출부를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거룩한 소명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특히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훈련받은 사람들 가운데 자기 직장에서 직장 복음화를 위하여 전도와 제자훈련을 통한 재생산을 하지 않고, 오로지 직장 일에 충실한 것이 소명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영혼 구원을 하지 않는 직장 생활은 신약적 의미의 소명이라고 하기 힙듭니다. 모든 직장이나 사업은 오로지 복음 증거와 관계될 때 예수님과 사도들이 말한 참된 소명입니다.
순수한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 나가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때 문화 명령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은 기독교가 많이 약해졌지만, 종교개혁의 본거지였던 독일과 스위스나 개혁파 교회인 루터교 국가들인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덴마크 같은 서부 유럽이나 북 유럽 국가들에서 아름다운 고전 음악이나 미술과 문학작품이 많이 나오고, 민주주의와 사회복지 등에서 선진국이 되고, 존 웨슬레 부흥 운동 당시에 영국 사회의 많은 술집이 문 닫고 도덕적으로 정화된 것이나 미국의 무디의 대각성 운동 시대에 놀라운 발명품이 무수히 나오고 인류 역사상 전무한 놀라운 문명이 발달한 것이 그런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국주의로서 잘못된 일도 많이 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바울 사도 같은 신약의 사도들은 문화 명령보다는 무엇보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고자 한평생 복음을 널리 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난 교회와 성도가 참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세상이 밝아지고 변화되는 문화명령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글에서 신학도와 목회자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러 가지 직업을 제시했습니다. 여기서는‘문화 명령’에 순종하여 이 땅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고 각자의 직업에 충실함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는 모든 직업과 소명을 통해서,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최후의 유언처럼 남겨주신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고 하신‘선교 명령’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부름 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대부분 교단의 헌법에는 목사의 주된 사명은‘말씀 전파’라고 했는데 반드시 교회 안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만이 말씀 전파가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여러 가지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구원의 말씀을 널리 전한다면 목회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책이나 영화를 통해서 복음을 널리 전하는 것도 말씀 전파입니다. 루터나 칼빈이 인쇄술과 책의 도움이 없었다면 바른 복음의 말씀이 그렇게 널리 전파되어 종교개혁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나 <예수> 영화처럼 말씀을 영상으로 만들어 전할 때 셀 수 없는 많은 영혼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교회 강대상에서 전해지는 말씀만이 유일한 목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혜로 주신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말씀이 전파된다면 그것이 넓은 의미에서 목회요, 부름 받은 자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가장 중요한 명령이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잃어버린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 ‘지상에서 영원으로’이어지는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요즘은 신학생이나 목회자들이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골라 가며’가오리다”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신학생들이 주로 서울, 부산 등 대도시를 선호하고 농어촌이나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에는 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들도 기회만 있으면 살기 좋은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나라에 가서 목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어디든지 가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하는 고백은 소명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지리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만이 아니라 복음 전파를 위해서 주님께서‘무슨 일을 하라고 명령하시든지’ 순종하리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신학생이나 목회자 치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에서 수십 만 명의 성도를 모시고 목회 하면서 오대양 육대주를 안방 드나들 듯이 선교 집회를 다니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이나, 강남 일번지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과 풍요로운 환경을 가진 엘리트 성도들을 모시고 목회를 하시던 소망교회 곽선희 원로목사님, 희망찬 젊은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사자후를 토하는 설교를 하며 알찬 제자훈련 목회를 하시던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님이나 후임자 오정현 목사님, 일대일 양육과 두란노서원 사역을 통해서 전국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처럼 웅장한 교회에서 구름 같이 많은 성도를 모시고 신나게 한 번 목회를 해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한소망교회 류영모 목사님은 전도사 시절 종로를 지나다가 수많은 인파를 보고 자기 교회 교인처럼 생각되어 전봇대를 붙들고 울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른이 수백 명 모이고 대학부가 유명한 종로 내수동 교회 원로이신 박희천 목사님은 평생 가장 한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숫자!!”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수백 명 모이는 교회 목사님도 교인 수에 신경 쓰고 있으니, 작은 교회 목사님들 가운데는 교인수가 적어 한이 맺혀 가슴이 시퍼렇다못해 시커멓게 피멍든 동역자들이 구름같이 많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수적 성장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숫자를 갈망하면 성경적이지만, 특히 교인이 많고 경제적으로도 충분히 안정된 교회 목회자가 수평이동에 의한 숫자와 교세 확장만 신경 쓰면 그는‘양 도둑놈’에 불과합니다. 양도둑질을 너무 많이 하면 아마 천국에 가서, 가난한 집 양을 빼앗았다고 다윗을 책망했던 나단 선지자에게 귀싸대기를 맞을지 모릅니다. 일산 은혜교회 주보를 보니 다른 교회에서 수평이동하는 신자는 받지 않겠다고 명시했습니다. 구역을 통해서 전도한 새 신자만 받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입니가? 분당 지구촌교회도 앞으로 수평이동 성장을 중지하겠다고 했는데 솔직히 너무 때늦은 감이 있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반면에 어떤 신학생들은 '나는 평생 교인 100명 정도 데리고 소박하게 목회 하는 게 꿈이다'라고 하는데, (조용기 목사님같이 위대한 목사님이 되고자 하는 꿈에 부푼 많은 신학생들은 웃겠지만, 막상 목회를 해보면 100명도 많은 교인입니다.) 정말 천국과 지옥을 믿는다면 지구상에 수십억의 인구가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데 교인 숫자를 제한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교인 많으면 신경 쓸 일 많아서 귀찮으니까 먹고 살만큼 숫자를 자기가 제한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직업적인 생각입니다. 감당할 능력만 있다면 주님께서 영혼을 많이 주시면 주시는 대로 목회를 해야 할 것입니다. 작은 교인이라도 기도와 말씀으로 잘 먹이는 것이 주님의 뜻이고, 그릇이 더욱 커져서 잃어버린 영혼 10만 명이라도 주시면, 부교역자를 그만큼 많이 두고 감당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목사님, 사모님 우리끼리 솔직히 이야기 해 봅시다. 우리가 성령의 뜨거운 능력을 체험하고 은혜 받고 사명감이 있다 해도 퀴퀴한 곰팡이 냄새나고 생쥐와 바퀴벌레가 왔다 갔다 하고, 여름만 되면 바가지로 물을 퍼내야 하는 좁은 지하 개척교회에서 평생 고생하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가며 목회하고 싶어서 목회자나 사모님이 되신 분은 한번 손 번쩍 들어보세요. 저기 두 분 빼놓고 아무도 손 안드시네요. 저 두 분도 졸다가 손을 잘못 드셨나 봅니다. 제발 졸지 마세요. 이 귀한 시간에 졸고 있으면 이 강사 억장이 무너집니다. 여러분 가운데 평생을 도시 교회의 보조를 받으면서, 노래기와 지네가 기어 들어오고 이름 모를 벌레가 소리 없이 기어 들어오는 다 쓰러져 가는 농어촌이나 낙도의 교회에서 자원해서 평생 고생하려고 신학을 하신 분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세상의 욕심이 없고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 희생하려는 바울 사도나 손양원 목사님이나 김요석 목사님, 그밖에 농어촌과 낙도 교회 목회자나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열악한 나라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들, 대학 캠퍼스에서 잃어버린 젊은 영혼들을 위하여 생계 유지가 곤란할 정도로 힘들게 사시며 사명감 하나로 복음을 전하시는 선교단체 간사님들, 그리고 장애인이나 출소자를 위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목회를 하시는 고귀한 꿈을 가진 존경할 만한 분들 외에는, 수만 명 모이는 교회에서 신바람 나는 목회를 하시는 김삼환 목사님 같은 분만큼은 못 되더라도, 적어도 수백 명 정도는 모이는 교회의 목회자나 사모님이 되시기를 원해서 이 길을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목회자가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우리나라 교회 가운데 100명 이하의 교인을 가진 교회가 70%-80%라고 합니다. 그리고 개척교회 중 소수의 개척교회만 성장하고 나머지 90% 이상은 평생 다른 교회의 보조를 받고 운영해야 할 영구 미자립 교회로 남아 있을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교인 수 30명 이하의 교회가 무려 3만 교회라고 합니다.
신학생 가운데 80% 이상은 도시에서 목회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시에서 일단 전세라도 건물을 얻어서 개척 교회라도 하여 자립하고 있는 분들은 그나마 다행인데, 수많은 목회자가 교인이 적어 자립을 하기 어렵고, 여러 가지 사정상 목회 할 교회가 없어 고민합니다. 그래서 사모님 가운데서는 학교 선생님이나 유치원을 운영하고, 피아노 학원을 하는 사모님들도 계시는데, 그런 분들은 그나마 경제적으로 좀 괜찮고, 내일의 기약도 없이 발이 부르트고 지치도록 땀을 흘리며 성경, 찬송 카세트 전집이나 화장품 혹은 보험 설계사, 식당 일이나 파출부를 하며 많은 고생을 하시는 사모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변호사나 의사 자격증을 가진 사모님은 전문직이니 자격증 귀하고 아까워서 일해야 하고 그보다 더 어려운 개척교회 사모님은 나가서 부업으로 허드렛일이라도 큰 잘못입니까? 물론 어느 사모님처럼 몇 백 명을 전도한 분도 있지만 그런 분은 특별한 분이고 대다수는 그저 남편만 바라보는 보통 사모님들입니다.
그러면 목회 할 임지가 없는 목회자는 목회 이외에 다른 일을 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까봐 목회 할 교회가 생길 때까지 할 일없이 무위도식하며 앉아 있어야 합니까?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한 주님의 특별한 계획과 부르신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성격과 재능과 은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하나님께서 주신 문화 명령과 선교 명령에 부합하면서 내가 잘 하는 일과 정말 밤을 세워서 해도 피곤을 느끼지 않고 내가 기쁨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나에게 주신 부르심에 열매가 많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달란트가 많고 적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우리는 그저 감사하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큰 그릇 이라도 시골 푸세식 화장실의 변기통으로 쓰이는 단지가 있고 작은 그릇이라도 보물단지나 간장종지가 있으며, 개도 도사견이나 셰퍼드처럼 크고 우락부락하며 집을 잘 지키거나 사냥을 잘하는 것도 있지만 손바닥만하고 귀여운 치와와처럼 주인 품에 안겨서 사랑을 받고 재롱도 부리며 주인을 즐겁게 하는 개가 있듯이, 누구나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많든지 적든지 그 달란트를 최선을 다해 사용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보다 최선을 원하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사명감이 있다면 무엇을 하려고 하든지 말씀을 묵상하고 깊은 기도를 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신중하게 찾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세상일을 오랫동안 하다가 하나님께 심한 매를 맞아 사업에 실패하고 죽을 병들어 이제 겨우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의 길로 들어섰는데 또 다시 다른 일을 하면 더 크게 징계를 받으라는 말이냐고 항변하실지 모릅니다. 그런 분은 목회의 사명감을 가지고 맡은 바 목회 일을 일평생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세상일에 얽매어서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 구원의 사명을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세상 물질에 대한 욕심과 세상일만 즐기며 호의호식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은사를 더욱 살려서 일반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히려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더 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다른 일을 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하여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목회 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기도하고 더 영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목사나 선교사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세상일을 하다가 본인이나 자녀가 죽는 등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있는데, 또 무슨 큰일 날 말을 하려고 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목회나 선교로 부르심을 외면하고 오로지 세상적인 욕심과 유혹에 도취하여 하나님의 일을 포기해버리고 세상으로 나간다면 하나님께 엄한 징계의 매를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부르심을 받았지만 목회에 은사가 부족하다고 절실히 느끼고 다른 방면으로 나가면 더 많은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주님과 복음을 위해 헌신한다면 하나님은 분별없이 엄하게 징계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악인도 건강하게 장수하는 경우도 있고 의인도 일찍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수도 있습니다. 저명한 신학자 김명혁 목사님이나 제가 아는 교회의 목사님처럼 목회에 충성하고 계시는 목사님의 아들이나 선교사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신비하신 섭리 가운데 세상 고생 안하고 천국의 행복을 누리게 하시려고 먼저 하늘나라로 불러 가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찬송가 431장‘내 주여 뜻대로’의 작사자인 슈몰크 목사나 470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의 작사자인 스패포드 목사님 같은 분도 성실한 목회자들이었지만 여러 명의 자녀를 잃는 큰 슬픔을 당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충실히 하고 있는 목사나 선교사 자신도 젊은 나이에 병이나 교통사고로 선교지에서 소천하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미국의 짐 엘리어트와 그의 동료 선교사들은 남미의 선교지에 도착하자마자 원주민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도 하나님의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세상으로 떠나 세속 가운데 빠진 사람의 경우 외에는, 목회든지 다른 일을 하든지 간에 본인이나 자녀의 죽음 문제나 질병이나 사업 실패 등의 문제로 함부로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의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사려가 깊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재능과 은사를 평가해 본 후 일생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적어보고, 기도하는 가운데 평가하고 시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위대한 성업을 이루는 과정에서, 나의 헌신적인 생애를 통해 어떠한 장소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최선의 사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목적이 분명할 때 우리는 방황치 않고 사명감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릭 워렌은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삶의 목적을 다섯 가지 말합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고, 그래서 우리의 목적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섬김을 위해 지음을 받았고, 그래서 우리의 목적은 사역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래서 우리의 목적은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이다.
넷째,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목적은 교제를 통해 그분의 교회와 하나 되는 것이다.
다섯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지음 받았고, 그래서 우리의 목적은 제자도를 통해 성숙한 성도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시작하든지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
둘째,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예수님의 최후의 명령인 잃어버린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도움이 되겠는가?
셋째,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인가?
넷째,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나의 재능과 은사와 물질을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다섯째,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우리 사회와 세상이 더 밝아지겠는가?
여섯째,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내 가족과 나 자신에게도 행복과 보람이 있겠는가?
일곱째,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한평생 후회할 것 같은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가?
우리가 성경을 날마다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게리 프리슨 박사의 <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 이나 제럴드 싯처 박사의 <하나님의 뜻>이나 그밖에 하나님의 뜻에 관한 여러 책을 읽는 것도 필요합니다. 직업과 적성 등에 관해서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위한 소명찾기>같은 책을 비롯하여, 리처드 볼스가 지은 책으로 미국 의회 도서관에서 1995년도에 “사람들의 삶을 바꾼 25권의 책”으로 선정된 바 있는 <당신의 파라슈트는 어떤 색깔입니까?>를 추천합니다. 그밖에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는 기술 101가지>나 <위대한 나의 발견*강점 혁명>, <나에게 꼭 맞는 직업을 찾는 책>, <싫은 일은 절대로 하지 마라>,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책> 등 도움이 될 많은 책이 서점에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이 많이 기도하면서 주위의 신앙의 지도자와 진출하고자 하는 방면의 경험자나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욕심보다는 진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혼구원의 열망이 더 간절해지고 나에게 보람이 있다면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무임목사님께 드리는 글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작성자 주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