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맑음. 새벽에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다. 장문수(長門守)가 삼합(三榼)과 싱싱한 안주와 인동주(忍冬酒) 1병을 보내 왔는데, 술맛이 매우 감미롭고 독하여 참으로 천하에 좋은 술이었다. 일행 중 여러 사람들과 두어 잔씩 마셨는데 칭탄(稱歎)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자관(寫字官) 두 사람에게 각각 대연(大硯) 하나씩, 그리고 중연(中硯)ㆍ금전(金牋) 몇 장씩을 보내면서 글씨를 요청해 왔는데, 벼루는 매우 품질이 좋은 것이었다. 이는 모두 적관(赤關)에서 생산되는 돌로서 본래부터 진품(珍品)이라 칭하는 것이다.
그들은 또 세 사신의 필적을 얻고 싶은데, 감히 직접 요청할 수 없어 수역(首譯)을 통해 은밀히 그 뜻을 보여 오기에 모두 허락하고 7~8장을 써서 주었다. 영집(永集)은 삼합을 보냈고, 비중수(肥中守)는 삭면(索麪) 1권(卷)을 보냈으며, 장문수는 또 해삼[海鼠] 곧 해삼(海蔘)배[梨子] 등의 물건을 보내 왔다. 그리고 평방직(平方直)은 적관연(赤關硯) 하나를 보내 왔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날 장계(狀啓)와 가서(家書)를 지어 비선(飛船)편에 부쳤다.
들으니, 풍세와 조수가 다 순조로워 배를 띄우려 하는데, 평방직이 안덕사(安德祠)에 가 정사와 종사를 보고 떠나는 것을 늦추어 도주의 회보(回報)를 기다리자고 간청하므로 종사와 정사가 모두 허락하였다고 한다. 나는 처음부터 면대하여 허락한 일이 없기 때문에 먼저 가 배 위에서 기다리려 하였는데, 평방직이 교자 앞에 와 천천히 출발할 것을 요청하려 하되 언어가 바로 통하지 못하였다. 이때 교자가 중문(中門) 밖에 도착했는데 뭇 왜인(倭人)이 굳게 막고 나가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하졸배(下卒輩)와 다투고 있을 때에 반인(伴人) 최수해(崔壽海)가 잘못 직방(直方)과 부딪혀 땅에 넘어졌는데 그 종자(從者)가 을러대면서 칼을 뽑으려 하기에, 내가 교자를 멈추어 사실을 물었다. 그러나 그 곡절을 알 수 없었다. 도로 대청에 들어와 방직을 불러 물어본 결과 방직의 말이, ‘종인에게 봉변을 당하니 창피하고 분해서 죽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수해를 찾아내어 곤장 10여 대를 쳤다. 그러자 그의 분노가 약간 풀렸던지 손을 이마에까지 올리면서 사례하고 물러갔다. 수역(首譯)을 도주에게 보내어 그 곡절을 말하자, 도주는 공손히 사례하고 방직을 책망하더라고 한다.
얼마 후에 도주가 사람을 보내 승선(乘船)을 요청해 왔다. 돛을 달고 떠나가니 바람과 조수가 다 순조롭고 배의 속력은 몹시도 경쾌했다. 밤 2경(更)에 향이포(向伊浦)에 도착했는데 1백 80리나 된다고 한다. 장문수가 작은 배에다가 어채(魚菜) 등의 물건을 실어 보냈고, 얼마 뒤에 도주의 배가 뒤미처 도착하여 갈 것을 청해 왔으나 밤이 깊은 까닭에 사양하고 배 위에서 유숙했다.
2일
맑음. 해 뜰 무렵에 배를 띄웠으나 바람과 조수가 사나웠다. 노를 저어 가다가 입포(笠浦)를 지나는데, 장문수가 대관(代官)을 시켜 어채(魚菜)ㆍ시탄(柴炭) 등을 보내 왔다.
오후에 궁주(宮州)에 도착하니 포구(浦口)가 아늑하고, 흰 모래와 낙락장송이 닿는 곳마다 그림 같았다. 도주는 먼저 이곳에 이르러 기다리고 있다가 그대로 동행하였다.
날이 저물자 선실(船室) 모퉁이를 지나면서 보니 전후좌우 모든 호행선(護行船)의 찬란한 등불이 무수히 바다를 메우고 온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초경 후에 상관(上關)에 정박하여 관소(館所)에 들어가니 이는 장문태수(長門太守)의 다옥(茶屋)이라 한다. 해산(海山)의 경치가 한층 더 절승했다.
3일
흐림. 역풍이 크게 일어나고 파도가 몹시 사나운데다가 상사(上使 정사(正使)) 또한 미양(微恙)이 있어 정행(停行)할 뜻으로 도주에게 전언(傳言)했다.
그리고 종사관과 함께 관소 뒤 상관루(上關樓)에 올랐다. 누는 대개 2층에다 해산(海山)이 빙둘러 있고 기이한 수목이 푸르러 울창한데, 종일 구경하면서 읊조리다가 헤어졌다.
장문수(長門守)가 삼합(三榼)과 아울러 한 두름 고기와 술을 보내 왔고, 장문수의 기하(旗下) 길천 승지 조광규(吉川勝之助廣逵)가 전례에 의해 숙공(熟供)을 드린 다음, 다시 삼합ㆍ해삼ㆍ반국청주(盤國淸酒) 한 동이를 보내 왔다. 장문수가 또다시 태화시(太和柿)ㆍ건속자(乾
子) 등의 물건을 보내왔기에 일행들에게 나눠 주었다.
4일
비. 상관(上關)에 머물렀다. 도주가 하인을 보내어 문안하고 삼합과 연초(煙草) 3근(斤)을 보내 왔다. 저녁 뒤에 종사는 집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나와 정사는 고향 소식을 듣지 못하여 한없이 서운했다.
5일
내리던 비는 비록 갰으나 역풍이 불어 상관(上關)에 머물렀다. 장문수(長門守)가 한쇄 갈분(寒晒葛粉 얼린 칡가루) 한 상자, 운단(雲丹) 한 병을 보내 왔는데, 운단은 대개 바다에서 나는 밤송이 같이 생긴 물건 속에 들어 있는 붉은 진액으로 젓을 담근 것으로서 맛은 별로 아름답지 못하였다.
마도(馬島) 사람이 조그마한 종이 쪽지를 가지고 와 드리면서, 강호(江戶)에 머무는 봉행이 그 조의(朝儀 신하가 임금을 뵈는 의식)를 써서 보내는 것이라고 하니, 이는 대개 강호 문위사(問慰使)가 올 때 뜰에 내려서 영접하는 예절의 한 가지였다. 그가 인하여 누누이 그 나머지의 뜻을 말하기에 큰 소리로 물리쳤다.
6일
맑음. 도주가 ‘바람은 역풍이나 조수가 바야흐로 순조로우니 떠날 수 있다’고 기별하였기에, 사시(巳時) 초에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가 신시(申時)말에 하실(賀室)에 정박했는데, 장문 기하관(長門旗下官)이 배ㆍ밤ㆍ감 세 가지의 실과를 바쳤고, 본포 대관(本浦代官)이 또 소채(蔬菜)를 바쳤다. 밤이 되자 풍세가 매우 사나와 노를 재촉하여 배를 옮겨 5리쯤에서 머물러 잤는데, 여기는 내하실(內賀室)이라 이른다. 이날 70여 리를 갔다.
7일
새벽에 비가 내리다가 저녁에 개고, 좀 늦어 구름이 걷히면서 풍세가 매우 순조로웠다. 미시(未時) 초에 돛을 달고 진화가로도(津和加老渡)를 거쳐 저물 무렵에 겸예(鎌刈)에 이르렀다. 선창(船倉)에서 새로 지은 행각(行閣)에 이르기가 수백 여보나 되는데, 좌우 장랑에는 모두 비단 휘장을 드리웠으며, 온갖 물건이 모두 더없이 화려한가 하면 산이 둘리고 물이 돌아 경치 또한 절승하였으니 이는 안예주(安藝州) 지방이었다. 태수는 백리 밖에 있는데 이름은 송평수 길장(松平守吉長)이라 한다. 도주가 밤에 봉행을 보내 ‘내일 상의할 일이 있으니 정행(停行)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기에, 부득이 허락했다. 이날 1백 30리를 갔다.
8일
맑음. 선장(船將)들은 풍세가 매우 순조롭다고 말하는데, 도주는 정행을 청하면서 어제 한 말을 되풀이하는가 하면 봉행 4인을 보내 누누이 말하므로, 역관들을 시켜 큰 소리로 물리쳤다.
봉행들이 사신에게 친알(親謁)하기를 청했는데, 종사관은 대기(大忌)로 인해 오지 않았고, 나와 정사는 그들을 불러 보면서 엎치락뒤치락 언단(言端)을 바꾸며 다투어 힐문하여 야심할 때까지 이르렀으니 대개 그 말은,
“이번 사행의 모든 절차는 한결같이 임술년 예에 준하기로 이미 결정하였으니, 이제 중도에서 변개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마땅히 강호사자(江戶使者)와 결정할 것이니, 너희들은 수다스럽게 말할 필요 없다.”
하면서, 정색(正色)하며 거절하자 비로소 물러갔다. 안예수(安藝守)가 하인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어ㆍ주(魚酒), 그리고 홍시(紅柿)ㆍ갈분(葛粉)을 보내 왔다. 이날은 겸예(鎌刈)에서 묵었다.
9일
맑음. 안예수가 하인을 보내어 문안하고 어ㆍ주(魚酒) 등 몇 가지 찬물(饌物)을 보내 왔다.
도주가 사람을 보내 조수를 기다려 배 띄우기를 청하였다. 진시(辰時)에 배를 띄워 삼원(三原)을 지나면서 멀리 바라보니 분첩(粉堞)은 높이 솟았고 누대는 아득하다. 여기는 안예의 고관들이 사는 곳이었다. 미시(未時)에 도포(鞱浦) 10리 쯤에 이르러 바다 모퉁이를 보니 층봉(層峯)이 우뚝 서 있고 사면은 깎아지른 듯하였다. 위에는 초제(招提 관부(官府)에서 사액(賜額)한 절)가 있어 불등(佛燈)이 환하게 밝았고, 종소리 은은하여 반공에 있는 것 같았으니, 곧 해조산 반대사(海潮山盤臺寺)라고 한다. 전부터 행인들이 여기를 지날적에 반드시 곡부통(斛浮桶)에 쌀을 주고 가면 거승(居僧)들은 이를 가지고 생활한다 하기에 하인들을 시켜서 남은 쌀 두어 섬을 주게 했다.
2경(更) 말에 도포(鞱浦)에 도착했다. 여사(閭舍)가 매우 성대하고 점포[廛肆] 또한 많았다. 관소는 곧 해안 복선사(福禪寺)였는데, 바다를 임한 층계에 시야가 광활하고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나는 몸도 피곤하고 밤도 깊었기에 배에서 잤다. 정사와 종사는 누차 사람을 시켜 맞으려 하였으나 의관을 갖추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도주가 하인을 보내 문안하고, 어ㆍ주(魚酒)와 삭면(索麪) 등 찬물을 보내 왔다. 이날은 2백 리를 갔다.
10일
맑음. 아부비중수 정방(阿附備中守正邦)이 어ㆍ주와 병ㆍ와(餠果) 등 찬물을 보내 왔다. 대개 도포(鞱浦)는 그의 소관이 아니지만, 인근 지역인 까닭으로 이렇게 지공(支供)한다고 한다.
사시(巳時) 초에 도주가 배 띄우기를 청해 왔다. 중로에 이르러 비전수(備前守)가 하인을 보내어 문안했는데, 그 단자(單子) 속에,
“비전국수 원강정은 삼가 조선국 통훈대부 부사 임공의 비단 행차에 드립니다.[備前國守源綱政敬呈朝鮮國通訓大夫副使任公錦帆下]”
하였는데, 역시 출참관(出站官)은 아니었으나 보내온 어ㆍ주 등 찬물은 매우 많았다. 초경(初更 하오 8시, 술시) 말에 하진(下津)에 이르러 보니, 화성(火城)이 대해를 가로질러 그 수미(首尾)가 수십 리나 되어 참으로 장관이 이었다. 도주는 하인을 보내어 문안하고 아울러 내일 아침 떠나기를 청해 왔다. 이날은 1백 리를 갔다.
11일
맑음. 해가 뜨자 배를 띄웠는데, 좌우의 도서는 끊겼다 이어졌다 하였다. 남쪽에 찬기주(讚歧州)라 일컫는 섬 하나가 있는데 수목이 매우 울창하여, 일국의 선옥(船屋) 재목을 모두 여기에서 장만한다고 한다.
비전수(備前守)가 또 하인을 보내 문안하고 어ㆍ주와 과자 등의 찬물을 보내 왔다. 미시(未時) 말에 우창(牛窓)에 도착하여 다옥(茶屋)에 관소(館所)를 정했는데, 다옥은 새로 지었고 온갖 지공(支供)은 장문(長門)에 비해 더욱 성대하다. 관(館) 앞엔 바닷물에 뜰이 잠기는가 하면 산은 먹으로 그린 눈썹같이 둘러 있어 그 경지는 아주 아늑하고 경치 또한 절승하다. 그리고 여사(閭舍)도 도포(鞱浦)에 비해 더욱 성대했다.
평방직(平方直)이 내일 먼저 대판(大阪)으로 가겠다고 아뢰고 가기에 정사가 불러 보고 술을 권하니, 그는 자못 기뻐하면서 돌아갔다고 한다. 이날은 1백 리를 갔다.
12일
맑음. 조반 뒤에 배를 띄워 혹은 돛대로 혹은 노를 저어 60~70리를 가서 멀리 북쪽을 바라보니 적수(赤穗) 땅의 여염이 매우 성대한데, 번마주(幡摩州)의 봉행이 와서 지킨다고 한다.
신시(申時)에 실진(室津)에 이르니 항구가 깊어서 장선(藏船)하기에 아주 편리했다. 그리고 동쪽 언덕 암석 위에 2층 누각이 있어 경치가 절승하고 인가도 모두 화려하였다. 관사(館舍)는 물을 임하고 있어 배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가게 되어있는데, 협착하고 내다볼 곳이 없어 답답하였다. 번마수 신원정방(幡摩守神原正邦)이 하인을 보내어 문안하고 어ㆍ주와 경단 등의 찬물을 보내 왔다. 이날은 1백 리를 갔다.
13일
실진에서 묵었다. 역관을 보내어 도주에게 문안하고 아침 일찍 배 띄우기를 청했는데, 도주는 갈 길이 험한 곳이 많고 풍세가 불순하다는 것을 핑계로 배 띄우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정방은 또 오리 10마리와 견절(鰹節) 고도어(古道魚)ㆍ삭면(索麪) 등 물건을 보내 왔다.
14일
맑음. 도주가 밤중에 사람을 보내어 미리 배를 타고 조수를 기다렸다 갈 것을 청하기에, 인시(寅時) 쯤에 나와 배를 타고 날이 채 밝기 전에 떠나 수십 리를 지나서 녹송리(鹿松里)에 이르렀다. 인가 또한 번성하고 뒤에 5층루가 몇 군데 있는데, 이는 곧 번마주의 진(鎭)이라고 하며, 북쪽에는 담로주(淡路州)ㆍ오기성(烏崎城) 등지가 있다.
다시 70~80리를 가서 고사성(高沙城)에 이르렀다. 또 50리를 가서 명석포(明石浦)에 이르렀는데, 촌락이 매우 번성하고 층루(層樓) 또한 많다. 백사장과 낙락장송은 수십 리 바닷가를 빙 둘러 있는가 하면, 인가는 그 사이에 잇닿아 어른거리고 있다.
다시 50리를 가 병고(兵庫)에 도착하니 밤은 3경이 되어 가고 있었다. 등불은 바다를 메운데다가 관사 또한 웅장하여 공진(供進)하는 음식이 가장 풍성하였으니, 대개 이곳은 섭진주(攝津州)의 지경으로서 관백(關白)의 전장(田庄)이 들어 있기 때문에 강호 사인(江戶使人)이 나와 대기하고 마도사람은 감히 그 안에 있으면서 조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석(明石) 이후부터는 비로소 평야가 보이며 민가도 점점 많아졌다. 원강주수 송평충교(遠江州守松平忠喬)가 하인을 보내어 문안하고 담배와 어ㆍ주 등의 찬물을 보내 왔으며, 도주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내일 적하구(適河口)를 떠나 다음날 대판(大阪)에 들어갈 뜻을 통지해 왔다. 이날은 1백 80리를 갔는데, 남쪽으로는 대양과 접한 곳이 많았다.
15일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행하였다. 앞길에 물이 얕은 곳이 많아 도주가 기선(騎船)의 짐을 왜선 3척에 나눠 실을 것을 청하기에 임 비장(任裨將)으로 하여금 군량과 목물(木物)을 나누어 왜선으로 옮겼다. 충교(忠喬)는 또 삼합(三榼) 1조(組)를 보내 왔다.
사시(巳時) 말에 배를 띄웠다. 풍세가 약간 거슬리더니 조금 뒤에 순풍으로 변하였다. 포시(晡時 오후 신시(申時))에 서궁성(西宮城)을 지나 하구(河口) 10여 리를 못 미쳤는데, 물이 얕고 배가 가지 못하므로 조수를 기다려 하구에 들어가 정박했다. 바닷가 섬은 끊겼다 이어졌다 하였고 갈대는 끝없이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북쪽 언덕은 곧 대륙(大陸)으로서 송삼(松杉)의 한 길이 백여 리를 잇닿아 뻗쳤으며, 원근에서 모여드는 배 돛대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가 하면 등촉은 휘황찬란하여 백 갈래의 불꽃 성[火城]이 먼 하늘을 가로 질러 있다. 채선(彩船) 10여 척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개 여기서 대판까지는 하수의 얕은 곳이 많으므로, 전부터 여기에서 왜선에 옮겨 타고 갔다. 이날은 1백 리를 갔다.
16일
맑음. 대판성(大坂城)에 들어갔다. 사시(巳時)에 도주가 국서(國書)를 전도(前導)하여 누선(樓船)으로 옮겨 모시고 사신은 백방(白舫)에서 채선으로 옮겨 탔는데, 그 배는 밖에 붉은 칠을 하고 중간에 층루(層樓)를 만들었다. 뱃전에는 금작(金雀)과 익수(鷁首)를 만들어 나열했으며 키[舵尾] 부분은 금으로 용과 봉황의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로새긴 창문은 성긴 비단을 발랐으며, 비단으로 만든 휘장과 채색으로 단장한 처마의 휘황 찬란한 빛이 눈을 빼앗는다. 누상(樓上)에는 옻칠한 판자로 덮었고 양쪽 모서리를 금으로 덮어 씌웠다. 그리고 서까래 끝과 도리에 금벽(金碧)이 함께 비치는데다가 전후에는 푸른 수실을 드리우고 서로 신호하는 방울을 달았다.
수십 명이 황의(黃衣)를 입고 채색 노를 잡고 뱃노래를 부르는데 비록 슬프고 가냘픈 음조가 있었으나, 길게 뽑다가 갑자기 꺾어져 청상(淸商)의 음절과 합치되는 것 같았다.
좌선(坐船)에는 종사와 비장과 나의 비장 및 서기가 타고, 그 나머지 또 한 채선에 올랐다. 그리고 기고(旗鼓)와 나졸들은 작은 배에 나누어 타고 앞서가는데, 수역 이하 상통사가 탄 배에 이르기까지 심한 차등이 없었다. 대개 좌선(坐船)은 관백이 타는 것인데, 이번에는 특히 사신에게 빌려준다고 한다. 그리고 도중에 관백의 명령으로 매우 많은 주효(酒肴)를 보내 왔으니 모두 진찬(珍饌)이였다. 하인배 및 왜인 격군들에게 나눠 주었다.
하수의 너비는 60~70보에 깊이는 한 길 가량이나 되며, 양쪽 언덕은 높이가 겨우 2~3척 정도였으나 범람하는 폐단은 없다고 한다. 처음에는 판책(板柵)을 설치했다가 수십 리 뒤부터는 모두 석축(石築)으로 되어있으며, 판교(板橋)가 하수를 건너질렀는데, 바라보니 마치 나는 무지개와 같다. 그리고 흘러들어오는 큰 내 몇 곳에 긴 다리는 무려 백으로 헤아릴 수 있는데, 그 밑에는 모두 선박이 통행한다고 한다.
좌우에는 층루가 끊임없이 잇닿았고, 앞에는 대나무 난간을 만들어 각각 간가(間架)가 있게 하였다. 구경하는 남녀들이 겹겹이 둘러싸 가득 차 있었지만 정숙하여 조금도 난잡하지 않으며, 30여 리를 늘어선 사람이 몇 천만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리하여 문전의 좁은 땅도 모두 값을 퉁기며 빌려 준다고 한다. 그 여사(閭舍)의 크고 화려함과 인물의 번성함은 중국의 통도(通都 사방으로 통하는 도시)라도 자못 이보다 못할 듯싶다.
신시(申時)에 선창에 이르매 부마(夫馬)가 이미 정비, 기창(旗槍)ㆍ소고(簫鼓)로 선도한 뒤에 국서를 받들었고, 세 사신은 교자를 타고 뒤따랐다. 큰 거리를 지나노라니 거리의 너비는 겨우 수레가 용납할 정도에 요리점ㆍ주점과 온갖 점포는 길을 끼고 나열하였으며, 사녀(士女)들은 꽉 들어찼으나 한 사람도 감히 문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고, 길에 물을 뿌리며 비를 들고 대기하면서 조금도 떠드는 일이 없이 조용하였다.
날이 어둡자 관사 앞에 이르러 교자에서 내려 호상(胡床)에 늘어 앉았다. 관반(館伴) 미롱수 장태(美濃守長泰)가 문 밖에 나와 맞이하여 서로 읍하고 각각 다른 층계로 들어가서 대청에 이르자 그는 두 번 읍하고 대검(帶劍)을 풀고 맨발로 나왔는데, 그 예모가 매우 공손하였다.
관소(館所)는 곧 본원사(本願寺)였는데, 그 웅장함이 1천여 칸이나 되었다. 저녁 공궤(供饋)가 미처 준비되지 못하여 하졸배(下卒輩)들은 시장기가 많은 듯했다.
이곳은 섭진주(攝津州) 땅인데, 2분(分)은 관백(關白)의 전장에 들어 있고 나머지는 기이수 뇌은(歧伊守賴殷)이 지킨다고 한다. 대개 이번 사행은 관백이 특별히 우대하도록 하여, 나와 맞이하는 많은 채선이 모두 더없이 화려하고 이곳에 나와 맞이하는 관반 역시 전에 없던 바였다. 3천 리 풍파를 헤치고 온 끝에 하구(河口)에 도착해 보니 더없는 천하의 장관을 다했다. 일행 상하가 쾌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어 먼 길의 객고가 다소 위안되었다. 강호승 조연(江戶僧祖緣)도 와서 호행(護行)하였다.
17일
맑음. 역관을 보내어 도주(島主) 및 두 장로(長老)에게 문안했다. 평방직이 뵈러 왔고 관반이 문안하였으며, 조연(祖緣)은 앞앞이 율시(律詩) 1수(首)씩을 보냈기에 절구(絶句) 1수를 지어 화답했다. 선장들이 와서 이르기를,
“모든 배가 정박한 곳이 조수가 나간 뒤 물이 얕아 배가 기울어지고 틈으로 물이 새어들어 밤새도록 퍼냈습니다.”
하기에, 봉행에게 말하여 다른 곳에 옮겨 정박하도록 하였으나, 별로 변통할 길이 없어 드디어 배 안의 잡물을 모두 풀어 내린 다음 물을 따라 정박하여 다시 염려가 없도록 하였다.
전례로써 칭하되, 배를 빙 둘러 죽책(竹柵)을 설치하여 방비가 매우 주밀하다고 한다. 모든 봉행과 연장로(緣長老)가 함께 문안해 왔다.
18일
맑음. 집 장로(集長老)가 죽종(竹粽) 1백 묶음을 보냈는데, 이는 곧 흰 떡을 대나무 잎사귀에다가 싸서 찐 것이다. 강호 각남주마(角南主馬)라는 자가 공궤를 검찰하는 일로 왔으니 곧 횡목(橫目 수사관의 별칭)의 관리로서 어사(御史)와 같다고 하는데, 안부를 묻고 갔다. 대판 봉행안방수(安房守)란 자가 또 와서 문안했다.
미시(未時)에 큰 지진이 일어나 1천여 칸이나 되는 큰 집이 흔들려 쓰러지려 하니 실로 평생에 보지 못하던 일이었다. 대개 들으니 이 나라에는 자주 이런 변이 일어나는데 어떤 때에는 땅이 둘러 꺼지는 때도 있다고 한다. 봉행 이하가 몸소 일을 맡아 허둥지둥 설치면서 급히 나가 피신할 것을 청하므로 드디어 그 말을 따라 뜰에 나가 앉았는데, 모든 봉행과 두 장로(長老) 및 재판(裁判)이 다 줄지어 시립하였다. 관반(館伴)이 또 보러 왔는데 뜰에서 서로 읍하고 갔으며, 도주는 재차 하인을 보내 문안했다. 봉행 평진현(平眞賢)이 소귤(小橘) 한 상자를 보내 왔고, 연장로(緣長老)는 만94두 한 그릇을 보내 왔다.
밤에 여러 봉행이 예절에 관한 일로 당역들을 만나 밤새도록 서로 다투다가 심지어는 협박의 말까지 해왔다.
19일
맑음. 밤중에 또 지진이 있었으나 대단하지는 않았다. 관반이 하인을 보내어 문안하고, 삼합(三榼)을 보내 왔다. 그리고 토기이예수(土歧伊藝守)는 과자 1조(組), 평진홍(平眞弘)은 대귤(大橘) 2백개, 평방직은 매우 잘 핀 국화를 보내왔는데, 국화는 죽통(竹筒)에 꽂아 각각 1좌씩 보냈다. 그러나 나는 대기(大忌)의 재일(齋日)로 인해 받지 않고 종사의 방에다 두었다. 또 기이국주 중납언 향이(紀伊國主中納言鄕伊)는 절인 고래와 사슴을 매우 많이 보내 왔기에 하졸 및 왜인들에게 나눠 주었다. 수역들이 와서 말하기를,
“지금 봉행들이 또 와서 어제 하던 협박의 말을 다시 되풀이하여 형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서 다시 아뢰기를 청합니다.”
하기에, 역배로 하여금 큰 소리로 꾸짖어 보냈다.
20일
맑음. 관반이 문안하였고, 두 재판(裁判) 귤방고(橘方高)와 평방리(平方利)가 뵙기를 청해 왔는데, 구구한 그의 말이 협박의 의도가 아닌 것이 없으므로 변통할 수 없다는 말로 단정지어 큰 소리로 물리쳤다. 밤에 관반이 사자관(寫字官) 및 화원(畫員)을 보자 하기에 모두 허락했더니 극히 우대를 하더라고 한다. 봉행이 또 뵙기를 청해 왔으나 밤이 깊었다 하여 물리쳤다.
21일
맑음. 관반이 문안하였고, 오후에 도주 및 관반 그리고 두 장로가 보러 왔으니 이는 대개 예절에 관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대기(大忌)이므로 인해 같이 만나볼 수 없었으나, 저들이 누누이 말하는 것은,
“지금 관백의 대접이 전보다 특이하여 심지어는 관백이 타는 누선(樓船)으로 사신을 받드는가 하면 관반은 문밖에 지영(祗迎)하며, 세 곳의 위문과 다섯 곳의 연향, 그리고 강호에서 있었던 세 차례 주연과 모든 태수들의 행주(行酒)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문위사(問慰使)가 으195레 문안에서 교자를 내렸는데 지금은 특별히 대문 밖에서 교자를 내리며, 국서(國書)를 회답함에 있어서도 친히 전하려 하니, 이러한 예의는 모두 전례 밖에 나온 것으로 뜰에서 내리는 것이 결코 고례(古禮)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만약 끝까지 고집한다면 두 나라의 화친은 이로부터 틈이 생길 것입니다.……”
는 것이다. 정사와 종사는 이에 대해,
“이 일은 이미 전일의 규례가 아니고 또 절목(節目)을 정한 뒤 미처 조정에 품정(稟定)하지 못한 처지에 있으므로 결코 행하기 어렵다.”
고 대답하자, 그들은,
“이 일을 이미 강호(江戶)에 계품(啓稟)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으니, 큰 일이 일어나게 된다면 우리들은 반드시 죄책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행여나 가상히 여기어 건져 주옵소서.”
하고 말하기에 정사는 또,
“이 일이 지극히 중대한 것이어서 변통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또 부사가 대기(大忌)로 인해 자리에 있지 않으니 후일 다시 의논하자.”
하였다. 차를 한 순배 들고 헤어졌다.
22일
맑음. 예절에 관한 일로 서로 버틴지가 이미 석 달이 지났다. 그들은 《예경》의 뜻으로 항쟁하기를,
“예(禮 의례(儀禮))에 ‘빈(賓)이 근교에 이르게 되면 임금은 경(卿)으로 하여금 그를 위로하게하며, 빈은 사문(舍門) 밖에서 맞이하여 재배하되 위로하는 자는 답배하지 않는다.’ 하며,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는, ‘선위사(宣慰使)가 객관에 이를 때에는 중문(中門)으로부터 들어가고, 객사(客使)는 대문 밖에 나와 경건히 맞이한다.’고 하여 고례(古禮)가 모두 이와 같고 귀국의 전례 역시 이와 같은즉, 귀국 사신들의 지영도 마땅히 대문 밖에 있어야 할 것이나, 다만 하계(下階)만을 청하는 것은 실로 우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허다한 예절을 극히 융후(隆厚)하게 함은 모두 전례 이외에서 나온 것인데, 다만 이러한 소절(小節)을 가지고 귀 사신들은 어렵게 여기고 있으니, 이는 우리를 능멸히 여기는 것이며 비열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관백은 본래부터 경학(經學)을 좋아하여 날마다 강연(講筵)에 납시며 귀 사신을 흠앙하여 더없이 우대하고 있으니, 이 한 가지 절목(節目)만은 반드시 변통하시오.”
하므로, 우리들이 물리치려는 말은 끝내 구차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만약 한결같이 고집한다면 저들의 협박하는 말이 비록 믿을 것은 되지 못하나 끝내는 반드시 난처한 일이 생길 것이다. 이리하여 도주 및 관반(館伴)과 두 장로(長老)가 애걸할 때 허락하느니만 못하리라 하여, 삼사(三使)가 같이 의논하여 허락했으나, 앞날의 염려가 없지 않았다. 이러므로 수역(首譯)들로 하여금 봉행에게 알아듣게 타이르기를,
“이 일은 들어주기가 극히 어렵다. 도주(島主)가 살려 달라고까지 애걸하니 그 절박한 양상을 알 만하다. 우리 역시 변통하고 싶으나, 만약 이 일을 허락하게 되면 앞으로 또 어떤 들어주기 어려운 요청이 있을런지 모른다. 이 때문에 결코 허락하기 어렵다.”
하였더니 봉행 등은,
“이 일을 허락한다면 앞으로 강호(江戶)에 비록 다른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마땅히 도주와 함께 목숨을 걸고라도 관백 앞에 죽기로 간쟁하여 기필코 무사하게 할 것입니다. 이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청하건대, 수역들과 함께 도주가 있는 곳에 가서 직접 약속하고 오겠습니다.”
하기에, 드디어 수역들을 보내어 잘 처리하도록 했는데, 도주가 마침 병석에 누웠다가 억지로 일어나 와서 보고 말하기를,
“내 이제 살았습니다. 삼사의 은혜를 죽어도 잊기 어렵습니다. 이후 다른 염려가 없을 것을 보장하며, 비록 있다 하더라도 한 섬[一島]의 상하가 마땅히 죽기로 간쟁하여 결코 걱정을 끼치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곧 봉행들로 하여금 사례해 왔고, 관반과 두 장로도 함께 하인을 보내어 사례했다. 그리고 밤에는 평방직 및 재판 등이 모두 와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했다. 연향에 대해서는, 23일은 우리나라 국기(國忌)이고 24일은 또한 일본의 국기이므로 25일에 행한다고 한다.
23일
맑음. 대판(大阪)에서 묵었다. 평진홍이 금감(金柑)과 목분(木盆) 각각 1좌씩을 보내 왔고, 관반이 문안했다.
24일
맑음. 도주와 두 봉행, 두 재판에게 상례로 주는 예물 단자를 보냈다. 지난밤에 마도로부터 비선(飛船)이 도착하여 7월 21일에 보낸 가서(家書)를 전해 왔고, 김현문(金顯門)은 8월 20일에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세 사신 댁이 모두 평안하다고 한다. 이렇게 머나먼 타국에 와서 고향 소식을 보게 되니, 기쁘고 위안되는 마음을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25일
맑음. 사시(巳時)에 공복(公服)을 갖추고 나가 강호 사자(江戶使者)이예수 뇌은(伊豫守賴殷)을 영접하여 청사에서 서로 읍하고 길을 나눠 올라갔는데, 도주ㆍ관반ㆍ두 장로의 선도에 따라 연청(宴廳)에 도착하여 재읍례를 행하였다. 사자가 도주를 시켜 관백의 말을 전하기를,
“사신이 무사히 먼 길을 왔으니 기쁘다.……”
하기에, 전례대로 대답하고 차를 마신 뒤 사자와 헤어졌다. 도주가 다시 들어와 술자리를 벌였는데, 도주와 두 장로로 더불어 재읍례를 행하면서 잔치하기를 적간(赤間)에서 있었던 예와 같이 했다.
관반과 강호 횡목(江戶橫目)이 와 앉아 청사를 간검(看檢)하고 연회가 끝나자 도주 등은 퇴출했다. 관반 및 강호 봉행ㆍ갑비수(甲斐守)ㆍ상모수(相模守)가 보러 와 차를 마시면서 전례대로 문답하고 헤어지자, 왜인은 숙공(熟供 익은 음식으로써 공궤함)을 보내 왔다. 연장로(緣長老)가 있는 곳에 전례로 주는 예물단자를 보낸 다음 장계(狀啓) 및 집에 보내는 편지를 지어 마도로 가는 비선편에 부쳤다.
26일
흐리다가 밤에 큰 비가 내렸다. 식후에 출발했는데, 관반이 또 문밖에서 국서(國書)를 맞이하였다. 삼사는 서로 읍하고 작별하여 교자를 타고 선소(船所)에 도착하였는데, 관백의 명령으로 삼합(三榼)과 술을 보내 왔다.
일곱째 다리에 이르러 배를 띄워서 삼교(三橋)를 지나노라니, 좌우 여사(閭舍)와 인물이 지나온 곳과 다름이 없었다. 10여 리를 가서 비로소 대판(大坂)을 보니, 분첩과 층루는 눈이 모자라게 빙 둘려 있고, 하수 한 가닥은 성을 안고 남쪽으로 흐르는데, 또 한 가닥은 약간 얕고 좁아서 배가 가기에 몹시 어려웠다. 그래서 붉은 옷의 왜졸(倭卒) 근 1백 명이 뱃줄을 끌고 갔는데, 모래가 깔린 여울은 비록 많으나 굴포(堀浦)곳곳에 막히는 데가 있어 겨우 30리를 지나자 날이 저물고 비까지 내렸다.
지공선(支供船)이 먼저 참소(站所)에 갔기 때문에 일행은 모두 저녁밥을 굶었다. 밤이 깊은 뒤에 선인(船人)들이 변변치 못한 한 바리의 밥을 보내 왔으나 수저를 댈 수 없어, 정ㆍ임(鄭任 정찬구(鄭讚逑)ㆍ임도승(任道升)) 두 비장 및 엄 서기(嚴書記 엄한중(嚴漢重)을 이름)와 연거푸 대여섯 잔을 마셨는데, 삼합(三榼) 중에 메추리구이[鶉炙]가 요기를 할 만했다.
누선 위에 기름먹인 비단 장막을 치고 그 속에 촛불을 켜고 앉았으니 그 운치가 더할 수 없이 청절(淸絶)했다. 금옥(金屋) 속에 앉아 저녁밥을 굶었으니, 모든 일에 필시 성쇠의 이치가 있어서였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봉행이 사람을 보내 문안하고 약간의 과일을 보내 왔다.
27일
맑음. 해가 뜰 적에 지공선(支供船)이 밥을 지어 왔는데, 중ㆍ하관(中下官)은 평방(平方)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숙공을 받았다. 평방 이후에는 인가가 모두 언덕을 의지하고 하수를 임하고 있어 소나무와 대나무 사이에 은은하게 비치니 참으로 절경이었다. 도주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고, 청산하야수(靑山下野守)는 삼합(三榼)을 보냈다.
포시(晡時)에 정포(淀浦)에 이르니 분첩과 화려한 누대는 아득히 물에 임해 있고, 성밖 두 곳에는 나무를 쪼개어 수차(水車)를 만들었는데, 성을 뚫고 깊은 호참[濠]을 만들었다. 그리고 동남쪽 수리 쯤에 있는 허다한 사찰에 큰 무덤들이 있는데, 이는 대개 왜황(倭皇)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드디어 배에서 내려 교자를 타고 대판교(大阪僑)를 지나 관소(館所)에 이르렀다. 송평단파수 광통(松平丹波守光通)이 삼합(杉榼)을 보냈고, 도주가 문안했다. 대판에서 여기까지는 85리이다.
28일
맑음. 진시(辰時)에 도주가 선행(先行)하는데, 군용(軍容)을 성대히 베풀어 그의 무리가 10여 리를 뻗쳤다. 사람들이 모두 참새처럼 날뛰고 깃대를 들고 빙빙 돌면서 춤추는 그 모습이 몹시 해괴하였다.
삼사는 조금 뒤에 출발하여 비로소 옥교(屋轎)를 탔는데, 그 제도가 너무도 화려하고 사치하다. 상ㆍ중관(上中官)이 각각 다르나, 모두 금안(金鞍)에 준마(駿馬)를 메웠는데, 강호(江戶)에서 미리 건실한 사람을 선출하여 연습한 지 이미 오랬다고 한다.
여항(閭巷)은 몹시 번성하고 평원 광야에는 봇도랑[溝洫]이 서로 잇닿았는데 모두 조그마한 배가 통하며, 토란밭은 한없이 무성하였다. 그리고 촌가(村家)에서는 대부분 대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었으며, 점포 사이에는 귤유(橘柚)가 무더기를 이루었다.
10리를 가다가 동쪽을 바라보니 복견성(伏見城)이 산아래 수풀 사이로 은은히 비치고 있다. 이는 곧 수길(秀吉)의 미오(郿塢)였다. 실상사(實相寺)에 이르러 공복(公服)으로 갈아입고 왜경(倭京)에 들어갔다. 시가[闤闠]를 뚫고 지나노라니 길 왼쪽에 동□사(東□寺)가 있어 극히 웅장하고 화려하며, 또 5층루가 우뚝하게 하늘에 치솟아 있다. 길을 끼고 구경하는 자들이 몇만 명인지 알 수 없는데 숙연히 떠들지 않으며, 혹은 손을 모아 축원하는 자도 있었다. 그 부성(富盛)함은 대판에 비해 몇 곱절일 뿐만 아니었다.
본국사(本國寺) 앞에 관소(館所)를 정했는데, 좌우에 뻗쳐 있는 원찰(院刹)은 다 기록할 수 없었다. 관반(館伴) 본다은기수 등원강경(本多隱岐守藤原康慶)이 문밖에서 맞이하되 대판에서 있었던 의식과 같이 하였다. 저녁에 도주와 두 장로(長老)가 보러 와 한 차례 차를 들고 헤어졌다. 이 땅은 산성주(山城州)에 소속되었는데, 송평기이수 신용(松平紀伊守信庸)이 지공을 관장하여 건조(乾鯛 말린 도미)ㆍ곤포(昆布 다시마)ㆍ궐준(蕨尊) 등 물건을 드렸다. 이날은 40리를 갔다.
29일
맑음. 오시(午時)에 도주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좀 늦어 사자가 들어왔으니 곧 기이수(紀伊守)였다. 청하(廳下)에서 읍하고 맞이하였고, 도주 관반 등은 문밖에 나가 맞이하였다. 연청(宴廳)에 들어와서는 대판에서와 같이 행례하였다. 사자가 돌아간 뒤에 잔치를 벌였는데, 그 찬품(饌品)은 전에 비해 약간 나았으며, 기타 절차는 전과 같았다. 헤어져 돌아간 뒤에 익힌 음식을 내왔는데, 자못 정결하기에 억지로 먹었다. 관반이 죽종(竹粽)을 보냈고, 집장로(集長老)는 홍시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