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은 군위군 의흥의 옛 이름이다. 구산 박씨 시조 박천朴蕆은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의 아들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忱의 15세손이다. 호는 석보碩輔, 본관은 밀양이다. 대제학 박광후朴光厚의 아들이며 충의백忠義伯 박위朴葳의 아우이다.
1388년 우왕 14 대마도의 왜구가 침입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하였다. 이에 주민이 불안에 떨고 생활이 도탄에 빠져 조정에서 크게 근심하였다. 당시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인 형 박위와 함께 전함 100여 척을 인솔, 대마도를 쳐서 평정하여 공을 세웠다. 공양왕으로부터 구산군龜山君으로 봉군되고 구산현군위군 의흥면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조선 태조 때 개국좌명공신으로 관직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으로 재임하다가 도원수 김종연金宗衍의 옥사가 터져 이때 관직을 청산하고 구산현의흥으로 낙향하였다.
1396년태조 5년에 벼슬이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아들 인해공仁海公에게도 안동 판관이 추천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 박천은 향리에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력하였으며 뒤에 구음서원龜陰書院에 향사되었고, 현재는 충북 원덕사遠德祠에 밀성대군密成大君과 함께 배향되고 있다.
후손들은 밀양에서 구산으로 분관分貫하여 박천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구산 박씨는 두드러지게 활동한 인물은 별로 없으나 임진왜란 때 창의倡儀했거나 문장으로 추앙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박경장朴景章은 한성부 판관을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망우당 곽재우와 함께 화왕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의흥면 수북리 북동마을 입구에는 1459년에 심은 은행나무가 지금도 시원한 그늘을 지어주는 이 마을은 구산 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또한 무검舞劍아래무리미에는 구산 박씨 무검재舞劍齋가 있다. 구산군이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 와 살면서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하여 검무儉懋로 부르기도 하였다. 마을 안에는 시조 박천의 위패를 모신 구음서원과 쌍무헌雙務軒, 수각水閣, 무검재懋儉齋 등 많은 재각齋閣이 산재해 있다.
무검재 상량문懋儉齋 上樑文에 “옛날에 우리 선조인 구산부원군께서는 작위爵位는 상태上台이고 원훈元勳에 책록되었으나, 청검淸儉으로 덕을 삼고 살고 있는 동쪽에 무검동茂儉洞이 있었으니 산에는 기이한 초목의 사치스러움이 없고, 물에도 아름다운 돌들의 화려함이 없었으니, 산도 또한 검소하고 물도 또한 검소하였는데 부군께서는 그 산수의 검소함을 사랑하였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검소하였다. 그래서 지명을 고쳐서 무검懋儉이라 하였다. 부군께서 돌아가시기에 임박하여 남기신 유명이 있었는데, 비갈碑碣을 세우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이것도 역시 검소한 덕 가운데 한 가지 일이 아니겠는가. 부군의 묘소가 무검동懋儉洞의 남쪽 기슭에 있고, 묘소 아래 재실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묘소는 무검재 건너편 산길을 따라 5백여 미터 올라가면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구산군龜山君은 검소함을 생활신조로 삼아 죽으면서까지 묘비를 세우지 못하도록 유훈을 남겼으나 지금은 묘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구산군 박공지묘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龜山君朴公之墓라 쓰여 있다.
두 개의 비석 옆에는 상석과 장명등이 가운데를 차지하고, 석사자·무인석·망주석이 각각 한 쌍식 놓여있다. 특히 망주석望柱石이 훤칠하여 눈에 뜨인다. 망주석은 무덤 앞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인데 돌 받침대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위에 둥근 대가리가 얹히어 있다. 다른 말로는 망두석望頭石·망주석표望柱石表·화표석華表石이라고 한다.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전해진 망주석은 통일신라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후 왕릉의 석물에 배치되었고 곧 이어 서민의 무덤까지 확대되었다. 맨 위의 둥근 대가리를 원수圓首라 한다. 그 아래 한자정도 되게 운두雲頭에 염의簾衣을 새기고, 다시 그 밑에 여덟모 진 기둥을 만들어 받침대에 끼우도록 되어 있다. 기둥가운데 다람쥐 닮은 모양의 양각된 것은 세호細虎라 한다.
망주석의 역할은 문헌상 기록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대략의 추론은 전한다.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나눠지는데, 백은 음陰에 속하여 체백이 되어 무덤 속에 있으나, 혼은 양陽이 되어 체백과 분리된다. 혼은 무덤 앞 혼유석魂遊石에 나와 놀기도 하고 때로는 멀리까지 외출하였다가 돌아온다. 이 때 망주석이 등대 역할을 한다.
바랄망‘望’자의 자원은 ‘죽은 사람亡이 외출하여 돌아오기를 달月을 바라보듯 기다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망주석은 외출한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역할과, 멀리 있는 혼이 돌아갈 위치를 가르쳐주는 역할을 하는 의미가 된다.
망주석을 일명 화표석華表石이라 하는 것은 혈처의 등대역할을 하는 수구사의 높은 봉우리가 화표석이듯이 망주석이 그러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화표석은 수구가 벌어지는 것을 막고, 유속을 완화시키며, 동시에 외부로부터 바람을 막아줌으로써 명당과 혈처의 기를 갈무리해 준다.
비갈은 세우지 말라고 유명을 남겼으나최근에 많은 석물로 치장하였다.
구산군의 묘가 있는 수북리는 한 성씨의 시조가 될 만한 국세가 갖춰진 곳이다. 용맥은 전체적으로 가지가 많은 목성이 주류를 이루는 산들이다. 수북리 입구에서 묘지를 향해 들어가다 보면 아래무리미 마을 입구의 길옆에 있는 길쭉하게 생긴 산들을 만날 수 있다.
이것들을 두고 옛날 사람들은 무검懋儉을 일명 무검舞劍이라 하여 칼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하였다. 칼같이 길쭉한 산들이기 때문이다. 위무리미 마을 뒤에서 더욱 속으로 들어가면 무검지라는 작은 저수지가 나오고 그 뒷산이 국세의 주산이 된다.
거기서 좌우로 가지를 벌려 수많은 지각을 거느린 용맥이 되는데 국세의 왼쪽 바깥은 의흥면 소재지가 있는 마을이 되고, 오른쪽은 의성군 가음면 순호리의 순호 저수지가 된다.
그 사이는 모두 하나의 보국이 된다. 이렇듯 큰 국세를 한곳으로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용맥의 출처를 거슬러 가보면 알 수 있다. 선암산879m 아래에서 과협을 만난다. 선암산에서 또 다시 과협을 거쳐 올라가면 결국 보현산1124m을 지나 낙동정맥을 만난다. 용맥이 계속 과협을 거치며 크게 성봉하여 벌렸다가, 낙맥하여 오므려놓은 형세가 반복되었기 때문에 박천의 묘 주위에서 큰 국세를 발견 할 수 있다.
가지가 쓸데없이 너무 많은 목성은 전지剪枝하여야 비로소 쓰임새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이곳과 같이 가지 많은 산들로 구성되었다면 제 아무리 국세가 넓어도 전지에 필요한 도구인 금성金星의 산을 발견하여야 된다. 그런 의미로 간산看山하면 결국 수북리 마을 깊숙한 골짜기에서 발걸음이 멈춰질 수밖에 없다. 거기까지 들어가야 비로소 금성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박천의 묘가 있는 곳은 골짜기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중간쯤 되는 아래무리미에 위치한다. 국세의 보국에 협조하는 역할을 하는 용맥에 자리 잡았다. 묘지가 있는 용맥은 정미丁未내룡이다. 동서사택東西四宅이 갈라지는 어간에 용맥이 지나므로 쓰기가 무척 까다로운 곳이다. 제대로 된 국세의 본신룡이 아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묘지에서 둘러보면 아름다운 나성羅城으로 둘러싸여 보기는 좋다. 당판은 용맥이 묘지를 지나 길게 내려가며 위로 쳐들은 ‘기룡혈騎龍穴’이다. 말 탄 장수가 변방에서 공을 세운 모습에 어울리는 자리다. 그러나 좌향까지 돌아앉아 곤좌간향坤坐艮向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말머리를 향해 똑바로 안장위에 걸터앉아야 할 곳을 옆으로 조금 돌아앉아 있으니, 오랜 세월 동안 마냥 편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