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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문화탐방지도사 과정 중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의 주제로 시간 여행을 떠날 차례이다.
화창한 가을 하늘의 정취를 감상하면서, 봄엔 유채꽃, 가을엔 억세가 유혹하는 시간을 더하는 마을 가시리(加時里)를 찾았다.
“가시리지”의 마을 약사를 보면 서기 1392년 고려 충신 한천이 이조 개국에 불복 제주에 유배되고 가시리에 정착 설촌하였다는 설과 이보다 약100년전에 안좌동에 있는 속칭 "와개위연"에서 변자위가 설촌 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먼저 가벼운 인사와 함께 스트레칭 후 큰사슴이오름(大鹿山)으로 향하였다
대록산(표고474m, 비고 125m, 원형분화구를 가진 육성화산)은 사슴을 닮아서라기 보단 사슴이 많이 서식하여 붙여진 이름이라한다. 갑마장길(20Km)을 단축시킨 쫄븐갑마장길(10Km) 중 일부인 대록산을 탐방하므로서 제주의 말과 관련된 흥미로운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사름을 나건 서울에 보내고, 말이랑 나건 제주에 보내라”
라는 말이 예로부터 있을 정도로 제주는 관설목장, 즉 나라에서 운영하는 목장으로 조선시대에는 섬 전체가 목장의 역할을 했을 정도로 제주는 '말의 고장'이다.
탐방 도중 교수님으로부터 제주말 관련 얘기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 제주의 목장 역사
- 헌마공신 김만일
- 제주마
1. 제주의 목장역사
가. 고려 탐라목장
탐라에서 말이 본격적으로 사육되고 목장이 형성된 것은 몽고가 고려를 복속시키고 탐라를 자치령으로 만든 때로부터 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원종 때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몽고인들은 탐라의 넓은 평원과 겨울철 한파를 동반하는 조드(Dzud)와 같은 자연재해가 없고 온화한 기후와 초지가 발달한 자연환경이 말을 방목하기에는 매우 적절하다고 판단했고, 더욱이 일본과 남송을 공략할 전진기지로 탐라를 직할령으로 만들었고 원사(元史)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충렬왕 2년(1276)에 탐라의 동쪽 수산리 수산평(대왕상~좌보미~궁대악~후곡악 일대)에 제주 최초의 목장인 탐라목장을 설치하고 160마리의 몽고말을 방목하여 운영하였다,
또한 말들을 감독하기 위하여 몽고인으로 목호(牧胡)를 두었으며 그 후 11년간 탐라목장을 원나라 14개 황가(皇家)목장 가운데 하나로 성장시켰다. 이곳에서 이루어진 거세술을 위시한 몽골식 목축방식은 제주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처음에 몽고에서 들여온 말들이 증산을 거듭하면서 목장의 말은 기하급수로 늘어나 한때 40,000마리를 능가했다.
나. 조선시대 국마장
1) 제주한라산목장(1430)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외교용으로 보낼 제주마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제주 해안지역의 목초부족 문제등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한라산 중턱에 국마장 설치를 국책사업으로 추진했다. 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제주츨신 고득종이었다. 세종 11년(1429) 상호군(정3품) 고득종이 한라산에 돌담을 쌓아 목장을 설치하자고 건의함에 따라 세종이 “제주한라산목장”을 개축하라고 윤허했다. 그 결과 제주목사는 1430년부터 주민들을 동원해 목장 경계용돌담(잣성)을 쌓고 국마장 예정지 내에 있던 344호 주민들을 국마장 예정지 밖으로 옮기면서 국영목장을 설치하였다.
3) 산마장(1659)
산마장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지역에만 설치되었던 목장이었다. 이 목장이 등장함에 있어서 토대를 놓은 인물은 김만일이었다. 산마장은 조천읍 중산간과 표선면 중산간에 설치되었으며 산마를 기르는 목장이었다. 숙종때를 전후하여 침장, 상장, 녹산장으로 재편되었다. 또한 녹산장 부근에 가시리의 따라비오름, 큰사슴이오름, 번널오름을 연결하는 초지대에 설치된 갑마장은 말중에서 품질이 가장 우수했던 말인 갑마(甲馬)를 선정하여 사육한 마장으로 1794년에서 1899년까지 100년 가량 유지되었다. 송정규목사의 “해외견문록”에 따르면 산마장은 효종10년(1659)에 처음 등장했다. 당시 산마장 설치를 주도했던 인물은 제주목사 이괴였다. 산마장의 산마들은 튼튼하고 야성을 지녔기 때문에 전마로 적합했다.
2) 십소장(1705)
조선후기 국마장의 대명사인 십소장(十所場)은 숙종 연간에 제주목사를 역임했던 송정규가 1705년 목장재정비정책 즉 규모가 작은 목장을 큰 목장에 편입시키며 한라산을 정점으로 해발 200-400m의 중산간을 빙 둘러 펼쳐진 넓은 평원에 10개의 목구를 설치하여 국마목장을 만들었고, 이를 10소장이라 불렀다. 10개 소장은 후에 제주의 행정구역과 비슷하게 되었다. 1소장은 구좌에, 2소장은 조천에, 3소장은 제주성 인근에, 4소장은 제주성 서쪽 주변과 애월에, 5소장은 애월에, 6소장은 한림과 한경에, 7소장은 대정에, 8소장은 안덕에, 9소장은 서귀포와 남원에, 10소장은 표선과 성산포에 각각 설치되었다. 이들 소장은 지세와 지형에 따라 그 규모가 천차만별이지만 평균으로 칠 때 각 목장의 둘레가 약 50리에 달한다.
각 소장에는 적게는 500마리, 많게는 1,500마리를 능가하는 말을 방목했고 또한 소도 키웠다. 각 소장은 여러개의 자목장(字牧場)으로 구성되었는데 말에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천자문을 낙인하여 관리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자목장마다 대략 암말 100마리, 수말 15마리로 군을 이루고 있었다.
제주의 목장은 제주 목사가 총괄·관리하였고 소장마다 한두 명의 감목관 또는 마감을 두었으며 자목장에는 한 명의 군두(群頭), 두 명의 군부(群副), 4명의 테우리라 불리는 목자(牧者)를 두었다. 목자는 최하위 직급으로 말의 양육과 생산을 담당하였는데 토착민 중 양인으로 채워졌다.
4) 마을공동목장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마제도가 폐지되며 10소장 제도도 없어졌는데 일본강점기 때 마을별로 분할하여 마을공동조합을 만들어 관리하게 되었다.
그 동안 많은 곳이 골프장이나 리조트로 개발되었지만 가시리 마을은 220만평을 팔지않고 마을공동목장으로 남아 있어 마을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문화예술인들에게 빈집에 들어와 살면서 창작활동하고 그 대신 주민들에게 재능기부를 하도록 하는 레지던스사업의 성공사례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그 중 조랑말 박물관은 리립(里立) 박물관이다.
2. 헌마공신 김만일
김만일(1550~1642)의 조상은 태종2년(1402) 감목관으로 제수되어 제주도로 온 김검룡(입도시조)의 7대 손의 정의현 의귀리 출신으로 탁월한 목축기술과 위기극복 능력으로 수많은 양마를 길러 임진왜란 등 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수천 필의 전마 등을 도맡아 감당해내며, 국난극복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김만일이 성장하던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나 김만일이 수망리 문서봉의 딸과 혼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김만일의 처가는 수망리에서 사설목장을 경영했고 김만일의 말이 그 목장을 들르자 100마리의 암말이 그 수말을 따라왔고 김만일이 그 말들을 처가로 돌려보냈지만 다시 암말 100마리가 따라오는 지경에 이르자 마침내 장인은 아예 김만일에게 그 말들을 건네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김만일은 그 말들을 끌고 한라산 동쪽의 대평원으로 잡목과 가시덩굴, 돌들이 나뒹구는 황폐한 지역임에도.불구하고 김만일은 거기에서 말을 키우기 시작했고 지속적인 종자 개량과 각고의 노력으로 말들을 번식시켜 나중에는 10,000마리가 뛰노는 대목장으로 만들었다.
당시 제주에 부임한 수령들과 군관들은 허우대 좋은 산마를 얻기 위하여 김만일의 산마장에 몰려왔고 회유와 협박으로 김만일의 산마를 갈취하여 육지의 고관들에게 뇌물로 바치거나 사복을 채우려 했고 심지어는 종마마저도 끌어가려 했다. 김만일은 이에 과감히 맞섰고 종마의 보존을 위하여 애지중지하는 종마의 눈을 송곳으로 찌르고 귀를 찢고 잔등을 칼로 그으면서까지도 종마를 지켜 산마의 맥을 이어갔다.
조선후기에 들면서 임진왜란 등으로 말사육에 큰 혼란에 빠지게되고 자연적으로 목장관리가 소홀해지며 황폐화되었으나 제주도 목장은 직접적인 큰 피해를 보지않았다. 이에 전쟁 후 목장관리를 위해 제주말을 전국으로 확대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제주마의 중요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김만일은 선조 27년, 선조 33년, 광해군 12년, 인조 5년 등에 모두 1천300마리가 넘는 말을 조정에 바쳤다.
- 시대별 말 진상 연혁
가. 선조때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하자 온 강토는 쑥대밭이 되고 더욱이 전국에 산재해 있던 말들은 씨가 말라 군사물자
이송이나 파발마도 없을 지경에 김만일은 500마리의 전마를 바침에 따라 임금은 김만일의 의기와 충성심에 크게 감동하여 종2품인 중추부동지사 겸 가선대부로 임명하였다. 또한 임란 후 산마 2,000마리를 요구해왔으나 김만일은 1,000마리의 산
마만 올려보냈다.
나. 광해군 매입 말
광해군은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여 김만일의 산마를 사서 전쟁에 대비할 결단을 내렸고 조정에서는 말 한 필당 쌀 20석 또는
목면 1동을 쳐주고 수천 필의 말을 사서 수년간(광해군4년-10년) 변방에 배치하였다. 명나라 경략(주둔군사령관)이 김만일
의 산마를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해 왔고 그에게도 100-200필을 준 기록이 있다.
다. 광해군 오위도총관 제수
광해군 12년, 김만일이 전마 500마리를 끌고 도성에 나타났다. 낙담해 있던 광해군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날듯이 기뻐했다. 임금은 김만일을 정2품의 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임명함과 아울러 헌마공신의 칭호도 제수하였다.
그러나 신료 들의 시기와 질투로 김만일은 3개월 정도 그 자리에 머물다가 사직하고 제주로 돌아왔다.
라. 인조 숭정대부 서훈
인조 5년 청나라의 요구에 산마 240마리를 진상했다. 청군이 물러가고 인조가 강화도에서 환궁하니 도성에는 전마는커녕 파
발마나 운송마도 남아있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김만일에게 아무 대가 없이 500마리를 올려보내도록 지시했다. 인조는 그 대
가로 78세의 김만일에게 명예직인 종1품의 숭정대부를 서훈했다.
* 조선시대 공마제도
- 세공마(嵗貢馬) : 해마다 정기적으로 바치는 말(200필),
- 식년공마 : 3년마다 바치는 말
- 3명일(名日) 진상마' :임금의 생일등 기념일에 바치는 말.
- 기타 어승별마(御乘別馬) :관리가 교체될때마다 바치는 말
제주풍토기에 의하면 김만일과 그 후손들에게 벼슬을 수여하면서 이들이 관리들의 횡포에 벗어나고 산마장 말들을 관리하여 안정적인 말 수급과 위해 김만일 가문을 보호할 필요가 있어 전국에서 오직 제주도에만 있었던 종6품 산마감목관(현감과 동급)이란 특설관직을 김만일 후손들에게 임명하였다. 초대 산마감목관은 김만일의 3남인 김대길이었으며 그 후 230여년간(1659~1895, 83명) 지속되어 왕이 타는 어승마와 전마는 물론, 양마 산출에 진력함으로써, 국가 전마의 공급처로서의 기능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가문의 보호(?)를 위해 김만일은 선조때 인목대비 폐위사건에 비판의 상소를 올렸다 제주로 유배 온 간옹 이익을 사위로 삼았다. 이익은 일찍이 상처해 있었다. 그들은 광해군 11년에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 아들 인제를 낳았다. 이익은 유배에서 풀려나 처자를 뒤에 두고 상경하였다. 제주를 떠난 지 11개월만에 제주로 올려던 중 달리는 말에 치어 목숨을 잃었다. 인제는 서울로 올라가 이복형 인실의 보살핌을 받아 과거에 합격하고 정4품 훈련원 판관을 지내다 제주로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다.
김만일의 묘역은 의귀리에있으며 제주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2009)되었는데, 제주도 최초의 석상인 동자석과 문인석 등으로 인한 문화재적 가치와 함께 위기에 처한 나라에 말을 바쳐 국난극복에 기여했다는 역사성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김만일의 생가 와 묘역이 있는 의귀리 이름은 조선조 임진왜란 당시 김만일이 국난의 어려움을 인식하여 병마 500필, 이후 그의 아들 대길이 매년 500여 필의 병마를 조정에 헌납했고 1724년 제주의 기근에 대길의 손자 남헌이 비축미 1,340석을 풀어 구휼한 공을 찬양하여 1752년 영조왕이 비단옷 한 벌을 하사하여, 이에 임금이 하사한 옷을 받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 제주마
한라산 중턱이나 초원에서 말이 떼를 지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을 조선말 지식인 매계 이한우는 '영주십경'(瀛州十景)의 하나로 고수목마(古數牧馬)를 꼽았으며, 탐라순력도에는 43개의 그림 중 산장구마, 공마봉진 등 16개가 말과 관련된 그림으로 제주마는 제주의 상징이다.
제주에서의 말의 역사는 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신화〉에 의하면 태초에 탐라에 처음 정착한 삼을나가 오곡을 파종하고 말과 소를 길렀다하고 제주 애월읍 곽지리 패총, 월령리 한들굴 등에서 출토된 말의 치아 및 사계리 해안의 말 발자국 화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 이전부터 제주지역에서 말이 서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으로는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선사시대부터 야생우마가 한라산 밀림지대에서 농경민들과 더불어 유목생활을 하였으며 고려 문종 27년(1073)에 제주의 명마(名馬)를 진상하였다는 기록과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아끼는 8마리 말 가운데 위화도 회군때 탔던 '응상백'은 제주에서 태어난 대표적인 말이다.
제주마의 탄생
고려 때 몽고가 탐라를 100년간 지배하던 시절, 몽고는 달단마(몽고마)와 서역의 대완국에서 탈취한 대완마를 탐라에 보내어 사육하였다. 몽고마는 키가 120~135츠쯤 되고 몸집이 통통하고 목이 짧으며 다리는 대원마보다 짧았다. 대완마는 키가 180~210cm쯤 되고 다리가 길고 몸집이 날렵한 말이다. 탐라에서는 이 두 종류의 말이 사육되면서 자연스럽게 교잡이 이루어졌고 여기서 태어난 말이 조랑말이다. 조랑말은 상하의 진동 없이 매끄럽게 달리는 주법을 의미하는 몽고어 조로모리에서 유래한 말이며 다른 말로 제주마, 삼척마, 과하마 또는 탐라마라 부르기도 한다. 조랑말은 몽고마의 우량유전인자 영향으로 하루 32㎞씩 22일간 연일 행군이 가능할 정도로 강인한 체질과 인내심을 가지고 있고 온순하며 특히 발굽이 치밀하고 견고하여 암석이 많은 제주도에 오래 적응되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에 따른 농기계 보급, 운송수단 발달로 인한 활용도 저하로 1980년대 중반에 1,300여 마리로 감소함에 따라, 제주마의 멸종방지를 위하여 ‘제주마 혈통정립 및 보존에 관한 학술연구 용역(1985년)’을 실시하였고, 연구용역 결과에 따라 순수혈통으로 인정된 제주마 64마리(암말 55, 수말 9)를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347호‘제주의 제주마’로 지정(1986.2.8)하여 보호구역(6필지·133ha)에서 보존관리하고 있으며, 적정 사육두수(150마리) 초과 마필에 대해서는 문화재 지정해제 후 공개경매를 통해 도내 사육 희망자에게 분양하고 있다.
제주마는 이른 봄부터 여름철(3월∼7월)까지 짝짓기를 하고 다음 해 봄과 여름에 망아지를 낳으며, 임신기간은 평균 335일이다
망아지를 낳은 어미 말은 보통 9∼10개월까지 약 5∼6개월간 망아지에게 포유한다. 암말은 대부분 4세 때 처음 망아지를 낳기 시작하고 평균 20세까지 망아지를 분만한다. 수말은 일반적으로 5세∼15세까지 번식에 활용되고 있고, 일반적으로만 5세가 되면 성장·발육(체고 ; 수말 125∼128cm, 암말 118∼125cm, 체중 270∼300kg)이 완료된다.
현재 제주도는 동절기(11~4월)에 축산진흥원 내 방목지에서 관리하던 제주마를 하절기(4월 중순~10월)에 5·16 도로에 있는 제주마방목지로 보내 '고수목마'를 재현하고 있다.
참고) 국내 등록말수는 총 39,396두로 내륙에 15,947마리(48%), 제주에 20,449마리(52%)가 사육중이며
이중 제주마는 8,324마리로 제주등록수의 41%를 차지하고 있다. (말산업정보포털 2023.10.12기준)
4. 대록산에서 마주한 식물과 선인들
* 야고는 엽록소가 없어 억새나 생강에 기생하는 기생식물로 이번 탐방에서는 볼 수 없었다.
그외 교수님의 여러 설명들이 있었으나 본인 기억의 한계와 이글을 읽는이의 인내심의 고통을 덜어드리고자 이만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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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생하셨습니다 . 많은 공부가 되겠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완벽한 리포트를 작성하셨군요.ㅎㅎ
우리 원우들께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오늘 복습차 지인들과 갔었는데 기억나는게 별로 없더군요 ㅎㅎ 자세한 후기 읽으니 다시 기억나네요~~감사합니다~^^
다행히 길은 안 헤매고 잘 올라갔네요
헉! 너무 하십니다.
다음이 접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살을 많이도 붙여주셨어요
기억 재생에 도움 받습니다.
제주목마와 관련한 소논문 수준의 훌륭한 후기입니다.
답사에 불창하며 아쉬움이 컷는데 후기를 통해 제주의 목마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며 이해하는 시간이 되어 감사를 드립니나.
와우~~자세하고 정성 가득한 후기 잘 읽었어요 수업 내용을 정리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이제는 기억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고딩때 국사책을 읽은 느낌입니다. 괄호에 연도 표기까지. 저는 샘들이 쓰신 후기들을 타이핑해서 문서화해 놓기로 결심. 수업은 매번 재밌지만 돌아서면 기억 안 나는 내용들도 많고 해서 아쉬웠는데 수준 높은 후기들이 있어서 마음이 놓인답니다. 뭔가를 공부하긴 했었다라고 남겨놓을 수 있을 듯 해서요. 감사합니다^^
와우 복습 노트로 ~~~
너무나 잘 정리 해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제주말의 역사를 잘 이해할수 있도록 내용 정리를 자세하게 해주셨네요
수고많으셨습니다 ~~
공을 얼마나 들이셨나요? 대단하십니다. 조랑말에 대한 궁금증을 말끔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작년에 대록산 간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 주시고 좋은 정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을 얼마나 들이셨나요? 대단하십니다. 조랑말에 대한 궁금증을 말끔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작년에 대록산 간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 주시고 좋은 정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쩌다가 제가 이중 가입이 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논문수준의 글입니다.
학계에 내어놔도 될듯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