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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으로 출발하며 ‘ 비가 곧 그칠 수도 있고, 거긴 비가 안 내리고 있을 수도 있겠지’하는 바람이었지만 오름이 가까워질수록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봄날, 소담스레 피어있을 들꽃을 기대했지만 비는 무심하게 계속 내렸다. 오늘만큼은 비가 반갑지 않았다.
‘뭐야 이 비 계속 올 건가 봐~!’
오름해설사 20기 6주차 수업 - 2024년 4월11일 목요일
오늘은 당오름과 정물오름에서 ‘오름과 들꽃’이라는 주제로 수업이 이루어지는 날이다. 하나둘 모인 사람들은 비가 곧 멈출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면서도 모두 우비를 단단히 챙기고 당오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름해설사의 소양
산담 앞에서 처음으로 발을 멈추신 교수님께서 고사리 길 잃음 사고에 대한 이야기로 운을 떼셨다. 지금 고사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습기인 것처럼, 그 필요성에 대하여 생각했을 때 비는 굉장히 감사하고 고맙고 은혜로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바람이 불면 당장 자신에게 필요한 기준을 따져가며 궂은 날씨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세상에 궂은 날씨는 없다. 비 오는 날은 ‘오늘은 비가 오는구나.’ 또 바람이 불면 ‘오늘은 바람이 부는구나.’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오름해설사라면 본인부터 긍정적인 마음으로 웃으며 참석한 모든 이에게 긍정심을 불러일으켜서 북돋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언제 비 맞으며 걸어보고, 오름을 가 보겠습니까? 오늘은 좋은 기회입니다.”
“그렇지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보전달자, 교육자, 프로그램기획자라는 해설사의 역할에 앞서, 해설사로서의 소양을 우선으로 갖춰야 한다는 것이지요. 유념하겠습니다~
제주 산담의 미적 가치
무덤이 없는 오름은 없다. 오름에 가면 곳곳에서 무덤들을 볼 수 있다. 오늘 오르는 당오름에도 진입로 바로 위 경사로에 아담한 무덤들이 두런두런 모여, 우리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다.
제주인들은 집이나 밭, 무덤의 경계를 돌을 쌓아 만들었다. 집 울타리의 돌담을 ‘집담’, 밭의 돌담을 ‘밭담’, 무덤의 돌담을 ‘산담’이라 일컬었다. 특히 산담을 두른 무덤은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미술평론가 김유정은 [제주도 산담 연구]에서 이 산담을 ‘대지미술’이라고 명명했다. 제주 산담이 영원을 꿈꾸는 공동체가 만든 영혼의 대지미술이라는 것이다. 한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20세기 최고의 설치미술가인 크리스토도 제주의 산담 앞에서는 오금을 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름과 더불어 살던 마을 공동체가 무수한 세월에 걸쳐 함께 만들어낸 산담의 가치를 알아주었으면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무덤과 함께 산담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제주 사람이 “산에 갔다 오마”라고 하면 등산을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제주 사람들은 무덤을 만드는 것을 ‘산을 쓴다’고 표현했다. 제주 사람이 산에 다녀온다면 등산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조상을 뵙고 온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덤을 ‘산’이라고 부르고 주변을 두른 돌담을 ‘산담’이라고 한다. 여기에 죽은 자를 위한 영혼이 드나드는 문인 ‘신문’을 산담의 측면에 만들기도 하였다. 산담은 방앳불*을 놓을 때 묘소로 불이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고, 오름이나 들판에서 방목하고 있던 소와 말 같은 가축들로부터 무덤이 망가지지 않도록 돌담을 쌓아서 무덤을 지킨 것에서 시작되었다. 산(묘)을 보호하기 위해 쌓아졌던 산담이 점차 가문의 위세와 재력을 과시하기 위한 의미가 들어가면서 산담은 점점 두껍고 크게 변하였다. 실제로 밭담이나 올렛담은 돌을 홑겹으로 쌓아 올린 외겹 형태지만, 산담은 외겹의 담을 겹겹이 쌓아 올린 두꺼운 형태(접담)로 전체적으로 네모난 장방형이나 사다리꼴 형태다. 제주 사람은 오름에서 태어나서 오름에서 살다가 오름으로 돌아간다.
*방애 : 소와 말들을 방목하면서, 해묵은 풀을 없애고, 진드기와 같은 해충을 없애기 위해 이른 봄에 마을별로 목장용지에 불을 놓았던 제주의 옛 목축문화이다. 매년 정월 대보름 새별오름에서 벌어지는 ‘들불축제’는 ‘방애’에서 비롯된 축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삶의 터전이자 신들의 집을 품었던 당오름
제주의 마을에는 본향당이 있다. 본향당은 마을을 지켜주는 신이 사는 집으로 마을의 당이 있었던 오름을 예로부터 당오름이라 불렀다. 1만 8천 신들의 땅답게 제주에는 당오름이 여러 개 있다. 그 예로 구좌읍 송당리에 당오름, 조천읍 와산리 당오름, 한경면 고산리와 용수리에 걸친 당산봉(당이 섰다) 등이 있다.
조선 시대 [탐라순력도]로 알려진 목사 이형상이 제주로 왔을 때는 ‘절오백당오백’이라고 해서 절이 오백 개, 신당이 오백 개라 했지만 모두 무속신앙을 섬기는 곳이었다. 당시 제주의 풍속도 매우 문란했다. 그는 제주 토속신앙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제주지역에 있는 모든 사찰과 신당을 없애고, 심방들을 귀촌시켰다. 하지만 그가 제주를 떠난 이후 토착 신앙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복원되어 이어졌다.
오늘 오르는 당오름이 있는 안덕면 동광리에는 화전민이 모여 살던 ‘무등이왓’이라는 큰 마을이 4.3의 광기에 휘말려 불길 속에 사라졌고, 현재 당오름에는 당의 흔적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당오름은 자신이 그냥 언덕이 아니라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화산체라는 사실을 증명하듯이 여기저기 패인 크고 작은 골짜기마다 붉은색의 화산송이(스코리아)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 오름은 파고 파도 송이만 나온다.”
송이가 흙으로 풍화되어 1cm 정도 쌓이기 위해서는 약 200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육지의 땅이 화강암이 풍화되어 만들어진 흙이라면, 제주의 땅은 송이와 현무암이 풍화되어 만들어진 흙이다. 당오름을 덮고 있는 흙은 매우 얇았고, 깊게 파여서 드러난 부분은 온통 붉은 송이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진과 같이 오름이 훼손되는 현상은 5000년 이내에 생긴 오름에서 많이 일어난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당오름보다 맞은 편에 있는 도너리오름(5000년 미만의 오름)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도너리오름에 자연휴식년제를 적용하여 15년째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오름 훼손 복원 작업과 동시에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한 결과 사진과 같은 훼손 현상이 오직 사람에 의해서 생겨난다기보다 소와 말과 같은 가축과 자연재해에 의해 생겨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오름의 이름은 도~ㄴ 워리, Don't Worry”
“ 뭐라고요?”
ㅎㅎㅎㅋㅋㅋ
“Don't worry, be happy~”
한경-안덕곶자왈의 어머니 도너리오름
‘도너리’는 제주어로 '입구(도)가 넓다(너리)'라는 뜻이다.
“제주어로 입구를 뜻하는 ‘도’가 사용된 유명한 폭포는 어디일까요?”
“도, 돈내코?!” ^^;; 하는 사람만 틀리고, 모두 ‘엉또’라고 정답을 정확히 맞힌다. 엉또폭포의 ‘엉’은 절벽, ‘또’는 도의 된소리로 입구를 뜻하는 것으로, 절벽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의미란다. 제주에서는 ‘도 어신 밭’이라는 표현을 쓴다. 도가 없다. 즉 입구가 없다는 뜻으로 ‘맹지’를 의미하니 도 어신 밭은 절대 사면 안 된단다.
당오름에서 바라보는 도너리오름은 원형분화구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북서쪽으로 터진 말굽형 분화구도 가지고 있는 복합형 오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도너리오름에서 솟아난 용암이 바다로 흘러야 하는데 처음에는 제자리에서 돌다가 높은 산 쪽으로 흐르지 못하고, 멀리 보이는 저지오름과 문도지오름, 남송이오름, 영어교육도시, 안덕과 한경, 대정 등으로 흘러가면서 드넓은 곶자왈을 만들었다. 이처럼 도너리오름이 뿜어낸 한경-안덕곶자왈은 마을의 진입로에 따라 무릉곶자왈, 청수곶자왈, 영락곶자왈 등으로 불린다. 당오름 정상에서 도너리오름의 분화구에서 터져나가 사방으로 펼쳐진 곶자왈과 오름들을 조망했다. 앞으로 교수님께서 오늘 하나씩 짚으며 가르쳐주신 오름들을 하나씩 모두 올라보고, 다시 이곳에서 그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겉에서 보는 모습과 속에서 보는 모습이 전혀 다른 것이 오름이다. 올라가서 보기 전에는 절대 그 오름을 알 수 없다. ”라는 교수님의 말씀처럼 도로에서 보면 평범한 외형에 특별할 것 없이 보였던 당오름이었지만 아담하고 아름다운 굼부리를 따라 걸을 때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광활한 곶자왈과 오름들을 볼 수 있는 특별함에 감동하여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았다.
형제처럼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당오름과 정물오름은 그 사이의 목장 경계선을 두고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나뉜다. 당오름은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에 정물오름은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에 각각 자리를 잡았다.
※ 오늘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오름(넙게오름, 원물오름, 느지리오름)
1.넙게오름(광해악)
안덕면 서광리에 있는 오름으로 산 모양이 '넓적한 게'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도 넓을 광, 게 해자를 써서 ‘광해악’으로 불린다. 말굽형 분화구를 가진 오름으로 분화구 안에 묘지와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다. 넙게오름은 낮고 넓게 펼쳐진 매우 늙은 오름으로 제주도 땅덩어리를 넓히는 데 영향을 미쳤다.
2.원물오름
원물이 있는 오름이라서 '원물오름'이다. 근처 동광육거리는 예전부터 교통이 발달한 곳으로 제주, 한림, 대정, 서귀포 등 각 방면으로 사통팔달하는 길목으로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 시대 원물오름 주변에 출장 가는 관원들을 위한 국영 숙식 장소인 ‘원’이 있어 사또가 대정현 등으로 넘어가는 길에 묵어, 말도 쉬어 가고 사람도 쉬어 갔다. 가까이에 '원물'이라는 샘물이 있어 ‘원수악’이라고도 한다.
3. 느지리 오름
한림읍 상명리에 있는 느지리오름 ‘만조봉’이라고도 한다. '느지리'는 상명리의 옛지명이다.
당오름에서 내려온 우리는 정물오름을 오르기 위해 서귀포시에서 제주시를 향하여 짧은 드라이브를 했다.
정물은 정물오름 입구에 있는 샘물로 두 개의 샘이 안경처럼 생겼다 하여 ‘안경샘이’라고도 한다. 정물은 6·25 동란 시 국군훈련병들과 4.3 당시 피난자, 금악리 인근 주민들을 포함한 이시돌 목장 초기에 주요한 식수원으로 사용될 만큼 풍부한 수량을 가졌다.
정물오름
정물이 있는 정물오름은 완전히 터진 말발굽형 분화구를 가진 오름으로 진입로 회귀형이라 초입에 있는 갈림길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완만한 경사로로 된 왼쪽으로 먼저 오를지, 가파른 계단이 있는 오른쪽으로 올라가서 천천히 내려올지 대하여 고민하다. 소중한 무릎을 보호하자는 의견에 맞춰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왼쪽 경사로로 내려오는 것으로 결정하고 출발했다.
정물오름에서 이시돌목장을 내려다보며
1960년대 아일랜드 출신의 신부가 ‘성 이시돌’의 이름을 따서 이시돌목장을 건립하고 중산간 지대의 황무지를 목초지로 개간하기 시작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의 간략한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의 가난한 주민들을 돕고, 이시돌 목장을 만든 신부의 별명이 ‘돼지신부님’이었던 것처럼 양돈업으로 시작했던 목장 사업의 영향인지 지금도 이곳엔 많은 양돈축사가 있다.
100만 마리의 돼지와 런던협약
“제주에 지금 약 60만 인구가 살고 있지요. 그러면 키우는 돼지의 수는 얼마나 될까요?”
질문을 시작으로 제주가 안고 있는 환경문제에 대한 설명이 시작됐다. 지금 제주의 인구는 약 60만, 기르는 돼지의 수는 100만이다. 사람들이 쏟아내는 생활 쓰레기 처리도 문제지만, 양돈장에서 나오는 폐기물 처리도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축사 옆에 비닐하우스를 축사보다 더 크게 지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돼지 분뇨를 모아두기 위해 만든 것이다. 배출되는 분뇨 폐기물을 도내에서 모두 처리하기 어렵기에 과거 양돈폐기물을 배에 실어서 멀리 바다로 나가서 버렸다. 지금도 이런 일이 암묵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제주의 환경을 지키기 위해 도에서도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얌체 양돈업자들이 환경법령을 어기고 돼지 분뇨를 처리해 제주 지하수를 비롯한 제주의 환경이 위협받고 있고, 기압이 낮으면 발생하는 심한 악취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무분별한 쓰레기의 투기로 인해 바다의 오염이 심각해지자, 해양오염을 지키기 위한 협약인 ‘런던 협약’이 1972년에 런던에서 체결되어 1975년에 발표됐다. 제주는 아직 이 협약을 지키지 못하는 실정이지만, 바다 환경과 지구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협약이다.
오늘의 주제 '오름과 들꽃'에서 오름을 살폈으니 지금부터는 오늘 본 들꽃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솜방망이(구설초, 천년애, 산방망이, 들솜쟁이)
꽃말(안전합니다)
한자 이름 ‘구설초’는 ‘개의 혓바닥처럼 생긴 풀’이라는 뜻으로, 솜털이 가득 난 넓적한 잎의 모양이 숨을 헐떡거리며 길게 내밀고 있는 개의 혓바닥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어린 순을 나물로 먹고, 꽃(구설초)은 거담제로 쓰인다.
할미꽃(노고초, 백두옹)
꽃말(사랑의 애환, 배신, 슬픈 추억, 공경, 충성)
흰 털로 덮인 열매의 덩어리가 할머니의 하얀 머리카락을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뿌리는 해열, 소염, 살균 등의 효능이 있어 한약재로 쓰인다.
제비꽃(오랑캐꽃, 가락지꽃, 앉은뱅이꽃)
꽃말(보라:겸손, 성실, 파랑:사랑, 흰색:순진무구한 사랑, 티 없는 소박함)
제비꽃은 806종이 있고 이 중 한국에서 종류만 50여 종이 넘고, 미확인 품종까지 확인하면 80종 이상이 될 거라고 한다. 제비꽃은 종 자체가 변이가 심하고 교잡이 쉽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꽃의 색과 무늬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다양한 품종 수 때문에 구분이 힘들다. 보통 잎의 모양을 많이 비교하는 편이지만 그마저도 잘 구분이 안 되는 경우 열매와 씨앗, 뿌리 모양까지 관찰한다.
양지꽃(제주어:소시랑개비)
꽃말(봄날, 행복, 사랑스러움)
어린 순을 나물로 먹고, 식물 전체(치자연)를 한약재로 사용하여, 잎과 줄기는 소화력을 높이고, 뿌리(치자연근)는 지혈제로 쓰인다.
각시붓꽃
꽃말(기별, 존경, 신비한 사람, 기쁜 소식)
‘하고현상’이라고 각시붓꽃은 기온이 오르면 땅속으로 사라진다. 옛 조상들은 붓꽃의 뿌리를 이용하여 솔수세미를 만들어 설거지하는 데 쓰거나, 베를 짤 때 틀을 닦는 용도로 사용하였단다. 솔수세미의 솔 모양이 붓 모양과 같아서 ‘붓꽃’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개구리발톱(개구리망, 천규자)
개구리는 발톱이 없지만, 열매가 개구리의 발 모양을 닮은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기후변화지표종
*지표종:환경 조건에 대해 극히 좁은 내성 조건을 갖는 종으로 서식 환경 조건을 잘 나타내는 민감한 종을 가리키며, 그 종의 존재를 통하여 서식 환경의 좁은 범위를 가리켜 볼 수 있다고 하여 지표종 또는 지표생물이라 한다.
산자고(까치무릇)
꽃말(봄처녀)
봉개 민오름에서 처음 만났을 때 교수님께 들었던 산자고에 관한 고부간의 애틋한 전설
"옛날 어느 산골에 장가를 못 간 가난한 총각이 있었다. 아들을 밤낮으로 걱정하던 어머니에게 한 처녀가 찾아와서 아들과 혼인하고 시어머니를 지극히 모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픈 며느리의 몸에선 욕창이 번졌고, 며느리의 병을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매일 산속을 헤매던 시어머니는 상서로운 식물을 발견하고 그 잎을 짓찧어서 며느리의 곪은 데에 발라주었더니 욕창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후 '산에 사는 자애로운 시어머니'라는 뜻으로 그 식물을 ’산자고‘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질경이(길경이, 차전초)
연한 잎을 나물로 먹고 씨(차전자)는 약용한다.
모든 생명체가 최적의 서식환경 조건에서 살아가길 원하지만, 질경이는 생태적으로 아무나 살 수 없는 밟히는 길을 선택하여 그곳에 적응하며 살고 있다.
자주괴불주머니
독성식물로 약재로 이용된다. 염색용으로 이용 가능하여 지상부만 잘라내어 잘게 썰어 염색액 내었다. 매염제를 쓰지 않고도 짙은 염색 가능하다.
왕도깨비가지
꽃은 가지 꽃을 닮았고 가시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나 말들이 기피하는 식물로 곶자왈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독성이 있다. 강한 가시와 질긴 근경은 잘리면 잘릴수록 개체수가 늘어난다. 2002년 환경부에서 생태계 교란식물로 지정했다. 도에서 해마다 많은 경비를 들여 생태교란종 퇴치를 위해 힘쓰고 있지만 불어나는 번식력을 따라잡긴 힘들다.
마지막으로 오늘 만난 세 그루의 나무를 소개하고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청미래덩굴(망개나무, 맹감나무, 제주어:멩게)
꽃말(장난)
암꽃과 수꽃이 각기 다른 나무에 피고, 순은 나물로 먹고, 잎으로 떡(망개떡)을 싸서 보관하면 찹쌀떡이 상하는 것을 막는다. 뿌리(토복령)는 한약재로 중금속 등의 독을 해독하고 혈압을 낮춘다.
윤노리나무(소코뚜레나무, 우비목)
꽃말(전통)
재질이 단단해서 윷을 만들기 좋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의 코뚜레를 만들기도 하여 ‘우비목’이라고도 불린다. 개발가치가 높은 수종으로 나무는 관상용, 꽃은 벌의 밀원, 목재는 농기구의 손잡이, 낫자루, 윷 등의 제조에 쓰인다. 열매는 직박구리의 주 먹이다.
참식나무
나무의 수형, 봄의 새순, 가을의 꽃, 겨울의 붉은 열매가 모두 아름다워서 최고의 조경수로 꼽힌다. 열매는 향수의 원료로 이용된다. 추위에 약한 난대관상수인 참식나무의 꽃말이 ‘못다한 사랑’이듯이 여기에는 슬픈 사랑의 전설이 담겨있다. 신라 시대 학덕이 높고 외모가 또한 뛰어났던 경운 스님이 인도로 유학을 떠났다. 인도의 공주는 경운 스님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왕은 그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고, 신라로 떠나는 경운 스님에게 공주는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저승에 가서라도 이루자는 증표로 참식나무를 주었고, 스님이 귀국하여 영광 불갑사에 그 나무를 심은 것이 현재의 숲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광의 불갑면의 참식나무 상록수림은 천연기념물(제11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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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비옷 입은 풍경이 오름에 덧칠을 하여
더욱 정겨운 표정으로 다가옵니다.
글맛도 좋고, 자료도 풍성하고
애쓴 흔적이 역력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진짜 정성스럽게 정리하여 기행문을 작성하였네요. 보면서 감동입니다. 대단히 수고많으셨습니다.
바람 불던 오름의 정취와 풍경이 다시 살아납니다
읽을수록 재미납니다
애쓰셨어요^^
노꼬메오름 후기 쓰는데 도움을 받아보고자 다시한번 읽어보았습니다. 이번주 수업이었나 싶을정도로 생생하네요 ㅎㅎ
참고 많이 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사진도 좋고 내용이 너무 자세히 정리되어 있어 안가본 분들도 마치 가본듯한 느낌이 들것 같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