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致逺, 字孤雲[或云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 不知其丗系.
최치원, 자고운[혹운해운], 왕경사량부인야. 사전민멸, 부지기세계.
[解釋] 崔致遠의 字는 孤雲[혹은 海雲이라고도 하였다.]인데, 서울 沙梁部 사람이다. 역사에 전하는 기록이 없어져, 그 世系를 알 수 없다.
致逺少精敏好學, 至年十二, 將隨海舶入唐求學. 其父謂曰 : 「十年不第, 卽非吾子也. 行矣勉之.」 致逺至唐, 追師學問, 無怠.
치원소정민호학, 지년십이, 장수해박입당구학. 기부위왈 : 「십년부제, 즉비오자야. 행의면지.」 치원지당, 추사학문, 무태.
[解釋] 致遠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가 되자, 장차 배를 타고 唐나라에 들어가 배움의 길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 아버지가 일러 말하기를, 「십 년 안에 及第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부지런히 힘쓰라.」고 하였다. 致遠이 唐나라에 이르러, 스승을 좇아 공부하였는데, 게으름이 없었다.
乾符元年甲午①, 禮部侍郎裴瓉下, 一舉及第. 調授宣州溧水縣尉, 考績爲承務②郎、侍御史内供奉, 賜紫金魚袋.
건부원년갑오①, 예부시랑배찬하, 일거급제. 조수선주률수현위, 고적위승무②랑、시어사내공봉, 사자금어대.
[解釋] 乾符 元年 甲午에, 禮部侍郎 裴瓚 아래에서, 한 번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宣州 溧水縣尉에 임명하였고,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承務郞、侍御史內供奉으로 삼았으며, 紫金魚袋를 하사하였다
[註解] ①乾符元年甲午 : 乾符는 唐僖宗의 年號. 元年甲午는 景文王 14年, 西紀 874年. ②務 : 정덕본의 오각이다. 성암본·을해목활자본에 의거하여 務로 표기함이 옳다.
時黄巢叛, 髙騈爲諸道行營兵馬都統以討之, 辟致逺爲從事, 以姿①書記之任. 其表、狀、書、啓, 傳之至今.
시황소반, 고병위제도행영병마도통이토지, 벽치원위종사, 이자①서기지임. 기표、상、서、계, 전지지금.
[解釋] 그때 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高騈이 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토벌하였는데, 致遠을 추천하여 종사관을 삼고, 書記의 임무를 맡겼다. 그가 지은 表、狀、書、啓가 지금까지 전하여 온다.
[註解] ①姿 : 성암본에는 委로 되어 있다. 을해목활자본에는 資라 나온다.
及年二十八歳, 有歸寧之志. 僖宗知之, 光啓元年①, 使將詔書來聘. 留爲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②.
급년이십팔세, 유귀녕지지. 희종지지, 광계원년①, 사장조서래빙. 유위시독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사②.
[解釋] 나이 28세에 이르러, 귀국할 뜻을 가졌다. 僖宗이 이를 알고, 光啓 元年에, 使臣으로 詔書를 갖고 가도록 하였다. 머물러 侍讀 겸 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가 되었다.
[註解] ①光啓元年 : 光啓는 僖宗 年號. 憲康王 11年, 西紀 885年. ②事 : 정덕본에는 없으나 성암본·≪三國史節要≫에 의거하여 추가하였다.
致逺自以西學多所得, 及來將行己志, 而衰季①多疑忌, 不能容, 出爲大②山郡太守.
치원자이서학다소득, 급래장행기지, 이쇠계①다의기, 불능용, 출위대②산군태수.
[解釋] 致遠이 스스로 서쪽에 유학하여 얻은 바가 많았다고 생각하여서, 돌아와서는 자기의 뜻을 실행하려고 하였으나, 末世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않으니, 나가 太山郡 太守가 되었다.
[註解] ①衰季 : 쇠퇴한 말기. ②大 : ≪三國史節要≫·을해목활자본에는 太로 되어 있다.
唐昭宗景福二年①, 納旌節使兵部侍郎金處誨, 没於海, 卽差橻城郡大②守金峻, 爲告奏使. 時致逺爲富城郡大②守, 祗召爲賀正使. 以比歳饑荒, 因之盗賊交午③, 道梗不果行.
당소종경복이년①, 납정절사병부시랑금처회, 몰어해, 즉차추성군대②수금준, 위고주사. 시치원위부성군대②수, 지소위하정사. 이비세기황, 인지도적교오③, 도경불과행.
[解釋] 唐나라 昭宗 景福 2年에, 納旌節使 兵部侍郎 金處誨가, 바다에 빠져 죽으니, 곧 橻城郡 太守 金峻을 차출하여, 告奏使로 삼았다. 당시 致遠은 富城郡 太守로 있었는데, 때마침 불러 賀正使로 삼았다. 매해 기근이 들었고, 그로 말미암아 도적이 많이 일어나니, 길이 막혀 마침내 가지 못하였다.
[註解] ①景福二年 : 眞聖女王 7年, 西紀 893年. ②大 : ≪三國史節要≫·을해목활자본에는 太로 되어 있다. ③交午 : 가로와 세로로 엇갈림.
其後致逺亦甞奉使如①唐, 伹不知其歳月耳. 故其文集有上大②師、侍中狀云,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髙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기후치원역상봉사여①당, 저부지기세월이. 고기문집유상대②사、시중상운, 「복문동해지외유삼국, 기명마한、변한、진한. 마한즉고려, 변한즉백제, 진한즉신라야.
[解釋] 그 후에 致遠은 또한 일찍이 사신의 명령을 받들어 당나라에 간 적이 있었는데, 단 그때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문집에 太師、侍中에게 올린 편지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듣건대 동쪽 바다 밖에 三國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馬韓、卞韓、辰韓이었습니다. 馬韓은 高句麗, 卞韓은 百濟, 辰韓은 新羅입니다.
[註解] ①如 : 가다. ②大 : ≪舊唐書≫ 職官志와 ≪三國史節要≫에는 太로 되어 있다.
髙麗、百濟全盛之時, 強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隋皇失馭, 由於征遼.
고려、백제전성지시, 강병백만. 남침오、월, 북요유、연、제、노, 위중국거두. 수황실어, 유어정료.
[解釋] 高句麗와 百濟의 全盛 시에는, 강한 군사가 百萬이었습니다. 南으로는 吳、越을 침공하였고, 북으로는 幽의 燕、齊、魯의 지역을 어지럽혀, 中國의 커다란 해충이 되었습니다. 隋나라 황제가 나라를 그르친 것도, 요동정벌에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貞觀中, 我唐大①宗皇帝, 親統六軍, 渡海恭行天罰. 髙麗畏威請和, 文皇受降迴蹕.
정관중, 아당대①종황제, 친통륙군, 도해공행천벌. 고려외위청화, 문황수항회필.
[解釋] 貞觀 연간에, 우리 唐나라 太宗皇帝가, 몸소 6개 부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삼가 天罰을 집행하였습니다. 高句麗가 위세를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였으므로, 文皇이 항복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註解] ①大 : ≪新唐書≫·≪舊唐書≫와 ≪三國史節要≫·주자본에는 太로 되어 있다.
此際我武列①大王, 請以犬馬之誠, 助定②一方之難, 入唐朝謁, 自此而始. 後以髙麗、百濟踵前造惡, 武烈七③朝, 請爲郷導.
차제아무렬①대왕, 청이견마지성, 조정②일방지난, 입당조알, 자차이시. 후이고려、백제종전조악, 무렬칠③조, 청위향도.
[解釋] 이때 저희 武烈大王께서, 犬馬의 정성으로 한쪽의 難을 助定하고자, 唐에 들어가 朝謁하기는, 이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高句麗와 百濟가 이전처럼 나쁜 짓을 하자, 武烈王은 入朝하여, 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습니다.
[註解] ①列 : 성암본·≪三國史節要≫·을해목활자본에는 烈로 되어 있다. ②助定 : 協助平定③七 : 성암본·주자본에는 七로 되어 있다. ≪三國史節要≫에는 入으로 되어 있다.
至髙宗皇帝顯慶五年①, 勑②蘇定方, 統十道強兵、樓舡萬隻, 大破百濟. 乃於其地, 置扶餘都督府, 招緝遺氓, 蒞以漢官. 以臭味不同, 屢聞離叛, 遂徙其人於河南.
지고종황제현경오년①, 칙②소정방, 통십도강병、누강만척, 대파백제. 내어기지, 치부여도독부, 초집유맹, 이이한관. 이취미불동, 누문리반, 수사기인어하남.
[解釋] 高宗皇帝 顯慶 5년에 이르러, 蘇定方에게 명하여, 10道의 강한 군사와 다락을 얹은 배 만 척을 거느리고, 百濟를 大破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어 그 땅에, 扶餘都督府를 두고, 유민을 불러 모아, 중국 관리에게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풍속이 서로 달라, 여러 차례 반란의 소식이 들리므로, 드디어 그 사람들을 河南지방으로 옮겼습니다.
[註解] ①高宗皇帝顯慶五年 : 太宗武烈王 7년, 西紀 660년. ②勑 : 勅과 同字.
揔章元年①, 命英公徐②勣, 破髙句麗, 置安東都督府. 至儀鳳三年, 徙其人於河南、隴右.
양장원년①, 명영공서②적, 파고구려, 치안동도독부. 지의봉삼년, 사기인어하남、농우.
[解釋] 摠章 元年, 英公 徐勣에게 명하여, 高句麗를 깨뜨리고 安東都督府를 두었습니다. 儀鳳 3년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하남과 隴右지방으로 이주시켰습니다.
[註解] ①摠章元年 : 文武王 8년, 西紀 668年. ②徐 : 본래의 성이 徐氏였으나 당 고조에 의하여 李氏로 사성되었다.
髙句麗殘孽類聚, 北依大①白山下, 囯號爲渤海. 開元二十年②, 怨恨天朝, 將兵掩襲登州, 殺刺史韋俊. 於是, 明皇帝③大怒, 命内史髙品、何行成、大④僕卿金思蘭, 發兵過海攻討.
고구려잔얼류취, 북의대①백산하, 국호위발해. 개원이십년②, 원한천조, 장병엄습등주, 살자사위준. 어시, 명황제③대노, 명내사고품、하행성、대④복경김사란, 발병과해공토.
[解釋] 高句麗의 殘民들이 서로 모여, 北으로 太白山 아래에 의지하여, 나라 이름을 渤海라고 하였습니다. 開元 20년에, 천자의 조정을 원망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登州를 갑자기 습격하여, 刺史 韋俊을 살해하였습니다. 이에 明皇帝께서 크게 노하여, 內史 高品、何行成과 太僕卿 金思蘭에게 명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공격하여 토벌하도록 하였습니다.
[註解] ①大 : 성암본에는 大로 되어 있다. ≪三國史節要≫·을해목활자본에는 太로 되어 있다. ②開元二十年 : 渤海 武王 14年, 西紀 732年. ③明皇帝 : 玄宗. ④大 : 성암본·주자본에는 大로 되어 있다. ≪三國史節要≫에는 太로 되어 있다.
仍就加我王金某①, 爲正大尉持節充寧海軍事雞林州大都督. 以冬深雪厚, 蕃、漢苦寒, 勑命迴軍. 至今三百餘年, 一方無事, 滄海晏然, 此乃我武烈大王之功也.
잉취가아왕김모①, 위정대위지절충녕해군사계림주대도독. 이동심설후, 번、한고한, 칙명회군. 지금삼백여년, 일방무사, 창해안연, 차내아무렬대왕지공야.
[解釋] 이에 저희 왕 金某에게 더하여, 正大尉持節充寧海軍事鷄林州大都督으로 삼았습니다. 겨울이 깊고 눈이 많이 내려, 蕃、漢 兩軍이 추위에 시달리므로, 勅命으로 迴軍하도록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3백여 년 동안, 한 쪽 지방이 무사하고, 넓은 바다가 편안하니, 이는 곧 저희 武烈大王의 功입니다.
[註解] ①金某 : 聖德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