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바라보고 있는 마을
-관호리를 찾아서-
이 혁 순
우리지역은 예로부터 낙동강과 인연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약목면 관호리(觀湖里)는 이름부터 ‘강물이 바라보이는 마을’이라니 얼마나 낭만적이고 드라마틱한 이름인가?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강호(江湖)에 봄이드니 미친 흥이 절로난다
탁료계변(濁醪溪邊)에 금린어 안주로다
이 봄이 한가(閑暇)해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강호(江湖)에 녀름이 드니 초당에 일이 업다
유신(有信)한 강파(江波)는 보내나니 바람이다
이 몸이 서날해옴도 역군은(亦君恩) 이샷다.
강호(江湖)에 가알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잇다
소정(小艇)에 그물 시러 흘러 띄여 더뎌 두고
이 몸이 소일(消日)해옴도 역군은(亦君恩) 이샷다
강호(江湖)에 겨월이 드니 눈 기픠 자희 남다
삿갓 빗겨 쓰고 누역으로 오슬 삼아
이 몸이 칩지 아니해옴도 역군은(亦君恩) 이샷다
이 시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시조로서 조선 세종때 청백리이자 재상인 맹사성이 만년에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가 한가한 세월을 보내며 자연을 즐기고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내용을 계절에 따라 노래한 것이다. 나는 이 시조에서 관호리의 옛 풍경을 어렴풋이나마 상상으로 떠올리게 된다. 관호(觀湖), 관수(觀水)라는 지명은 이처럼 자연으로 돌아가 유유자적 하면서 달관한 삶을 살고 있는 성현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벼이삭 춤추며 반기는 마을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날씨 때문인지 여기 저기 황금빛 물결로 익어가는 과일과 벼이삭은 풍성한 수확을 예고하는 듯 했다
추석을 막 지난 들판은 그야말로 풍요롭고 아름답다. 마을로 들어서는 어귀부터 열병하듯 고개를 숙이고 나그네를 맞는 벼이삭들을 보면서 이호우가 살구꽃 피는 마을은 어디든 고향 같다고 했다면 나는 벼이삭 춤추며 반기는 마을은 어디든 고향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약목면은 본래 신라의 대목현 또는 칠촌이라고도 하며 곤산이라는 이름도 있다. 신동국여지승람에는 성현(成俔)이라는 사람이 약목현을 배경으로 지은 시 한수가 전한다.
옛 고을은 숲 기슭에 의지해 있고
집들은 언덕을 끼고 나누어져 있네
정자 향나무는 푸른 그림자 퍼져 있는 듯
언덕위의 보리는 누른 구름이 떠 있는 듯
집이 고요하니 새소리 요란하고
높은 누각은 저녁 햇살 마주했네
밥상에 게와 자라 놓인 것 같고
비로소 여기가 강촌인 줄 알았네
약목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관호리는 현재 5개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쪽으로는 국도와 경부선철로가 평행하면서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는데 그 동편으로 마당들․장평들․대문달개등이 형성되어 남류하는 낙동강과 인접하고 있다. 서북쪽으로는 갓골(冠谷山)을 사이에 두고 무림리와 접하며 동북쪽으로는 백포산을 경계로 약목평야와 접하고 있다. 서편으로는 흙고개․동문골을 경계로 기산면 평복리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봉산(鳳山)을 사이에 두고 기산면 죽전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지도상으로 보면 백포산성에서 시작하여 낙동강 서안을 끼고 왜관철교까지 이어지는 선을 축으로 역삼각형 모양을 보이고 있다.
관호리는 본래 인동군 약목면의 지역으로서 무림(茂林)이라 하였는데 일제시대인 1914년 행정구역 개ㆍ폐합 때 내야동(內冶洞)ㆍ외야동(外冶洞)ㆍ왜관동(倭館洞)ㆍ무림동(茂林洞)ㆍ백평동(栢坪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관호동(觀湖洞)이라 불리게 되었다.
관호리의 면적은 5.8㎢으로 약목면에서 복성리 다음으로 인구가 많아서 통계에 의하면 1,530가구, 3,659명(남 1,890명, 여 1,769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관호리에는 새터, 임강(臨江), 구왜관, 불미골, 반상골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관호1리를 찾아서
제일 먼저 찾은 관호1리는 새터(新基) 또는 백평리(栢坪里)라고 불리우던 곳으로 약 170년 전 수원 백씨가 이곳에 새로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해서 ‘새터’라고도 한다.
(관호1리 새터마을 전경)
수원백씨가 이곳으로 입향한 경위에 대해 알려진 바로는 백수화(白受和) 라는 분이 처음 이곳으로 이거 하였는데 그의 후손들이 관호1리를 중심으로 많이 세거하고 있다.
관호1리에는 설강 백수화의 추모지소인 숭의재가 있는데 마을 북쪽 산기슭에 자리한 숭의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지붕은 골기와로 팔작지붕을 이은 겹처마집으로 마을 어귀에서도 잘 보인다.
(설강 백수화의 추모지소인 숭의재)
한편 당시 이 골짜기에 잣나무(栢)가 많았다 하여 백평(栢坪)이라고도 불리며, 옛날엔 「돗자리」생산지로 이름났다. 현재 거주 인구는 78세대 227명이 살고 있는데 수원백씨가 가장 많고 함양박씨, 김씨, 이씨등 각 성씨가 살고 있다.
관호2리로 가다
관호2리는 경부선 철로와 국도 33호선을 사이에 두고 관호1리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에는 관호1리 마을입구에서 철로를 건너는 건널목이 있어 바로 연결되었으나 구미로 가는 강변도로와 관호대교가 생기면서 북쪽 100미터지점의 관호대교 아래 통로를 지나 돌아서 관호2리에 들어가게 된다. 마을은 두 개의 자연부락으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구 왜관이고 하나는 임강마을이다
(관호2리 입구 표지석)
구 왜관(旧倭館)
관호2리 입구 표지석이 있는 자리에서 시작해서 임강마을로 가는 길 좌우에 옹기종기 자리한 마을이 구왜관이다.
문헌기록이나 사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왜관이란 고려말기 이후 조선전기까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그 회유책으로 삼포를 개설해 일본인들이 조선을 왕래하면서 무역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왜관을 설치해 교역, 접대, 숙박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게 하였는데 이렇게 한말까지 내려오던 왜관은, 고종 13년에 강화도조약으로 인천, 부산, 원산이 개항되면서 문을 닫았다.
또한 우리나라가 일본과 교역을 개시하면서 낙동강의 수로를 이용했기 때문에 낙동강 연안에 임시로 먹고 쉬어갈수 있는 중로숙소(中路宿所) 즉 소왜관(小倭館)이 낙동강 연안 여러 곳에 설치되기도 했다.중로숙소는 김해 왜관지, 창원 왜관지, 화원창 왜물고(倭物庫), 칠곡 금산동 왜관지, 칠곡약목 관호동 왜관지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약목면 관호리 왜관지(구 왜관)도 당시 낙동강을 소항(溯航)해 상경하는 중로의 지점으로서 왜사(倭使)의 유숙 및 통상을 위한 소공관(小公館)으로 설치되었다가 다른 지역의 왜관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데 왜 하필 우리지역에서만 왜관이란 지명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그 연유는 바로 이렇다. 1904년 일제는 경부선을 부설하면서 석전리 앞 허허벌판의 모래밭에다 역을 세우고 관호리의 왜관지에서 가까운 이곳을「왜관역」이라고 부르게 되면서 왜관이 하나의 지명으로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전래된 것이다. 아픈 역사도 기억하고 되세겨야 한다지만 해방 후 70년이 다되어가는 오늘까지도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왜관이란 지명을 쓰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관호산성(백포산성)
구왜관 마을에서 동쪽 낙동강을 끼고 있는 임강마을로 가다가 북쪽에 야트막한 야산이 있는데 이곳을 예로부터 백포산성이라 불러왔다. 이 성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축성된 토성(土城)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발굴에서 석축성으로 밝혀져 화재가 되고 있다.
(관호산성 발굴사진)
2013년 3월 칠곡군청에서 열린 ‘관호산성의 학술조사 용역 보고회’에 의하면 관호산성은 약목면 관호리 일원에 위치한 산성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위해 북진하던 6~7세기에 축조된 석축성이라 한다. 성벽 일부가 자연구릉과 절벽을 이용해 축성된 것으로 보아 군사적·전략적 요충지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관호산성은 이 지역의 거점성이자 치소성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무엇보다 가장 큰 특징은 낙동강변에 인접하고 있는 산성이라는 점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는 왜군들이 점령해 군사요충지와 군량미를 보관하고 산성밑 강포구에 영남지역 교역이 이뤄졌다고 한다.
학술조사를 통해 관호산성(일명 백포산성)은 완벽한 보존상태로 남아 있음을 확인했으며, 전체 둘레가 약 1.8㎞의 웅장한 규모를 가진 삼국시대 석성으로 판명됐다.
특히 관호산성은 지리적으로 낙동강의 물류 흐름과 주변 지역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산성의 성곽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더욱 클 것으로 기대된다.
관호산성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낙동강변에 인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매우 드문 사례로 이와 유사한 특징을 가진 성으로는 공주의 공산성(사적 제12호), 부여의 부소산성(사적 제5호)이 있는데 모두 사적으로 지정돼 있어 이미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관호산성은 신라 북진시기(6~7세기)에 축조된 석축성으로 경기도 화성의 당항성(사적 제217호), 충주 남산성(충북기념물 제31호)과 동일한 시기에 축조된 산성으로 추정되어 관호산성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산성은 60년대 제방공사와 70년대 새마을사업 과정에서 많이 허물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방공사에 사용된 돌 대다수가 이 산성터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는 “산성에 돌이 많았는데, 산마루에서 밑으로 굴려가지고, 소달구지에 실어다가 돈 벌었지. 공사현장에 실어 주면 그 돌로 방천을 쌓았다고. 돈 준다 카니까 너나없이 다 몰려서 돌을 뽑았지”라고 말했다.
관호산성(백포산성)은 그렇게 삼국시대 토성에서 조선시대 왜인들의 군사거점과 왜관의 상품 보관창고, 근대 낙동강 제방의 골재로 활용되면서 1천500여년을 이어왔다.
왜성모퉁이, 침류대와 귀신바위
낙동강과 함께 구왜관의 대표적 상징인 관호산성(백포산성)은 왜성모퉁이와 침류대, 귀신바위 등의 흔적과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주민들은 백포산 동쪽 끝 지점과 낙동강 양수장이 맞닿은 곳의 가파른 절벽 모서리를 ‘왜성모퉁이’라고 한다. ‘왜가 쌓은 성의 모퉁이’란 뜻이다.
왜성모퉁이 절벽 위 소나무 옆에 크고 평평한 바위가 침류대 인데 마을 어른들이 낮에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절벽 위 넓은 공터에서 마을 훈장과 어른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귀신바위는 왜성모퉁이 절벽에서 밤이면 귀신이 보인다고 마을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관호산성은 최근에 둘레길이 조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데 정상에는 백포산성비가 세워져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면 북으로는 약목평야와 금오산이 동으로는 낙동강건너 석적 포남과 중지리의 황금들판과 그 너머 유학산, 소학산, 황학산이 비단결처럼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낙동강은 남북으로 족히 삼사십리는 되어 보이는데 낙동강안을 끼고 수많은 명소와 누대가 있지만 이처럼 탁월한 전망을 가진 곳은 드물 것이다. 더구나 그 옛날 소금배가 떠다니던 풍경을 상상하면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그냥 지나 쳤을 리 없다.
백포산곡 / 이혁순
백포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은
남으로 금남나루 북으로 말구리나루
사공의 뱃노래소리 들릴 듯 말듯
경호천 젖줄처럼 휘감아 돌아가는
황금빛 약목평야 서산아랜 두만골
금오산 큰 바위 얼굴 병풍처럼 서있네
동으로 삼학산에 남으로 금무봉에
백학은 비단처럼 바람결에 춤추고
청향은 낙홍을따라 칠백리를 가누나
(관호산성 정상에 있는 백포산성비와 낙동강)
관호산성이 백포산성으로 불리워진 것은 조선시대 백포(柏浦) 채무(蔡楙, 1588∼1670)가 정계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 지역에 있다 하여 일명 '백포산성'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조선환여승람 칠곡군편에는 백포산성에서 지은 백포 채무시가 전하고 있다.
능허대
높은 누대 우뚝 솟아 강위의 하늘을 누르는 듯
종일토록 올라서 내려다보니 경치는 곱기도 하구나
십리에 노니는 사람들은 향기로운 풀 밖이요
줄지어 나르는 백로는 노을 가에 떨어진다
더딘 돛대의 서늘한 그림자는 앞 여울에 비요
저녁의 차가운 피리소리는 북쪽 물가의 연기로다
홀로 앉아 읊조리고 홀로 잔질하는데
물빛과 산색은 스스로 한가롭기만 하다
(능허대 자리로 추정되는 곳)
이 시의 배경이 된 능허대 자리는 지금은 알 길 없으나 관호산성 동사면 낙동강과 맞닿는 취수장 바로위쪽 절벽위에 있었을 것이라 추정해 본다. (앞서 말한 왜성모퉁이 절벽 위 침류대라는 곳과 동일지역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낙동강 연안에서 이처럼 탁월한 조망을 가진 곳도 흔치 않을 것이니 하루 빨리 옛 능허대 자리를 찾아 아담한 정자라도 지어 놓는다면 지역의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능허대 바로 아래는 칠곡보가 물길을 가로 막고 떡하니 버티고 서있다. 물막이로 호수가 된 강은 멀리 인동대교 아래 여차정까지 다리를 뻗치고 누워 몸살을 앓고 있다. 굽이와 흐름을 잃어버린 강은 부영양화와 녹조현상으로 물고기마저 떼죽음을 당하는 죽음의 강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수천년을 이어온 맑고 아름다운 강을 우리세대가 지켜내지는 못할망정 물고기도 살지 못하는 죽음의 강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후손들에게 무슨 원망을 들을 것인가?
임강(臨江)
임강은 새터 동쪽 철길 건너에 있는 구왜관을 지나 강쪽으로 가다보면 나오는 마을인데 역시 백포산 남쪽 산록에 위치하고 있고 낙동강안에 인접하고 있다 해서 임강(臨江)이라 했다.
(외야제에서 바라본 임강마을)
임강마을은 최근에 완공된 칠곡보로 건너편 석적읍 중지리 창마와 연결되게 되었으며 외야제를 따라 포장도로가 생겨 사람들의 왕래가 늘어나고 있다. 임강 남쪽에는 마당들․장평들․대문달개 등이 형성되어 남류하는 낙동강과 인접하고 있다.
구 왜관나루터
임강마을 남쪽 낙동강의 왜관철교 인근에는 옛날부터 나루가 있었다. 구왜관나루터는 예부터 사람들의 이동수단, 소금배를 비롯한 물자 교역 등 교통물류의 핵심 통로로 활용됐다.
칠곡 지역에는 낙동강이 칠곡군의 중앙을 남류하고 있어 나루터와 관련된 애환이 많이 서려있는 고장으로 나루터 또한 그 어느 지역보다 많이 있다. 칠곡군의 중앙을 가로질러 남류하고 있는 강의 총 24.5㎞ 구간에 위치하고 있는 나루를 보면 석적읍의 밤실나루, 개내미나루, 북삼읍의 말구리나루, 약목면의 구왜관나루, 기산면의 강정나루, 흰돌나루, 노실나루, 왜관읍의 왜관나루, 공암나루, 강창나루, 가실나루, 금남나루 등 12곳에 이른다.
하지만 1930년대 중앙선과 경북선이 개통되면서 경북 북부지역 화물량이 줄고, 1941년 기존 경부선 왜관철교가 국도(왜관교)로 바뀌면서 나루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1904년 부설된 경부선이 41년 복선화되면서 왜관철교가 상류 100m 지점으로 옮겨 가설되고, 기존 왜관철교는 사람과 차량이 다닐 수 있는 왜관교(현 호국의 다리)로 활용됐던 것이다. 뱃길 대신 이동이 편리한 다리가 생기면서 나루는 자연스럽게 이용률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왜와의 교역통로로, 부산 소금배 및 강 건너 마을과의 교통로로 기능했던 구왜관나루터는 해방 이후 고기잡이배의 통로로만 활용됐다. 80년대 후반까지 구왜관에는 배를 활용해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꽤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맥이 끊어진 상태이다. 구미공단이 점차 확대되면서 80년대 후반 물이 크게 나빠진 탓도 있다.
구왜관나루터의 대안나루터는 공암진 나루터인데 인근 고을 선비들이 해마다 7월 16일이면 공암진나루에 모여 배를 타고 소요음영을 하며 즐겼던 곳이다.
뱃전에 세운 긴 막대기 끝에 3,40센티미터 정도의 꽃등을 달았으며 낙화등이라고도 하는 꽃등에는 참나무숯가루와 소금을 섞어 둥글게 싼 부싯깃을 달고, 부시를 쳐 불을 붙이면 숯가루와 소금이 타면서 그 불꽃 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한 시간 반 정도 떠다니다 달이 뜨면 지금 기산면 행정리 앞 자라산에 있던 영귀대에 도착하여 지은 시를 음송하고 강평도 하는 등 고을선비들이 운치 있는 풍류를 즐기거나 일본의 압제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관호2리에는 구왜관마을과 임강마을을 합하여 현재 88세대 236명이 살고 있는데 성씨별로는 해주오씨, 김해김씨, 남양홍씨를 비롯해 다양한 성씨가 살고 있다
관호3리를 찾아서
관호3리는 안불미골, 바깥불미골, 반상골등 3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불미골(내야)는 약 400년 전에 임씨들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그 후 200년 전에 인동 장씨들이 입주하면거 임씨들은 차차 다른 곳으로 이주해 나가고 현재는 장씨들이 주성을 이루고 있다. 옛날 이곳에 병기(兵器)를 만들었던 대장간 《풀무간ㆍ불미간ㆍ야로(冶爐)》이 있었다고 해서 마을 이름도 《불미골》이라 했는데 지금도 그 대장간 자리를 주민들은 「불미등」이라 부르고 있다.
안불미골로 들어가다 보면 왼쪽 경사면에 짖다만 아파트가 흉물스럽게 서 있다. 한창 아파트 경기가 좋을 때 한적한 이곳까지 아파트 붐이 일어난 모양인데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공사가 중단되고 십여년가까이 방치되어 마을입구의 모습을 살풍경스럽게 만들고 있다.
안불미골 마을 뒤를 돌아가면 임도가 닦여 있는데 이 길을 따라 꾸불꾸불 올라가면 산 정상 부근에서 배식이 고개와 만나게 된다. 옛날 기산면 각․봉산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약목장을 보러 다녔는데 배를 닮은 큰 돌이 있었다고 하여 배석고개라 하였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가사막골 입구에서 북동쪽 약목방향으로 300미터쯤 올라가다 동쪽산록에 큰 바위들이 있는데 마치 갓을 벗어 놓은 것 같다하여 갓바위로 불렀다고 한다. 가사막골에 살고 있는 전재하 어르신의 말에 의하면 갓바위 아래쪽에 고갯길이 있었고 길가에 큰 배모양의 바위가 있었으나 몇년전 밭을 일구면서 포크레인으로 바위를 부숴버렸다고 한다. 그 바위가 배석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우리는 역사의 징표 하나를 잃어버렸다.
(안불미골 마을입구)
안불미골에는 하동댁 국수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옛날 안불미골(內冶)에 하동현감을 지낸 인동 장씨 가문이 있었는데 택호를 하동댁이라 했다. 당시 하동댁에서 손님이 오면 맛있는 국수를 만들어 대접했는데 그 국수 만드는 과정이 특이하여 다음과 같이 전해 오고 있다.
밀을 디딜방아로 빻아 채로 친 다음 그것을 정결한 국수방(밀가루를 골라내기 위해 전용으로 사용하는 작은 방)에다 부어 놓고 휘추리(木草)로 가루를 쳐서 벽에 날아가 붙은 밀가루만을 모아 이것으로 반죽을 해서 국수를 만들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음식하나에도 이처럼 정성을 다했던 접빈문화를 보면서 성리학의 성과 경의 정신이 작은 산골마을에서도 실천되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안불미골에는 현재 인동장씨 뿐만 아니라 김녕김씨, 전주이씨를 비롯해 다양한 성씨가 살고 있다.
바깥불미골(外冶)은 안불미골 바깥쪽 지금의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인데 이 마을 역시 인동 장씨들이 주성이다. 2005년 칠곡경찰서가 이곳으로 옮겨 왔다.
(바깥불미골 마을전경)
반상골(盤床谷)은 바깥불미골 남쪽 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 지형이 마치 반상처럼 반듯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왜관에서 낙동강 인도교를 건너 김천행 국도와 성주행 국도가 갈라지는 5거리에 위치한다. 성씨들은 경주최씨를 비롯해 각 성씨들이 다양하게 살고 있다.
(반상골 마을입구)
반상골에는 관호 구터널이 있다. 일제는 이를 반상곡수로(盤床谷隧路)라 하였는데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단선(單線)일 때 기차가 지나다닌 터널인데 1939년 복선화되면서 빈 굴로 남아 있다. 6.25전쟁 때 북한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싸울 때 이 굴 안에다 야전병원을 차려 놓고 부상병들을 치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서울~부산을 하루에도 수 없이 다니는 경부선 철도가 원래부터 복선철도가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1941년까지는 단선이었고, 또, 경부선 개통 후에도 끊임없는 선로 변경과 철도의 복선화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니 당연한 얘기다. 경부선의 단선철도시절 철길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지만, 앞으로도 낙동강 구철교가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왜관지역에서 그 흔적을 추정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사실 왜관지역의 지나간 흔적들은 좀 더 역사적 배경지식을 가지고 답사하는 것이 바람직 해 보인다.가깝게는 6.25 때 폭파되었다는 낙동강철교에 관한 것, 좀 더 멀게는 일제시대 단선-복선화 된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당시 낙동강 철교의 기능에 대한 것도 알아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왜관 석전4리 애국동산 지하에 있는 왜관 구터널에서 출발하여 낙동강 구철교(舊鐵橋)를 지나 여기서 서북방향으로 관호리 삼주아파트 언덕밑으로 약 3백미터 지점에 이르는 곳에서 반상골(관호3리)북쪽 끝자락 야산 언덕받이에 관호 구터널 입구가 있다.
평생을 왜관에서 살아오면서도 이곳에 터널 입구가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경부선 단선철도의 흔적으로 인도교는 남아있지만 그것과 이어진 이곳은 용도폐기와 함께 잊혀진 왜관의 역사적 과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터널은 입구 정면에서 약 5미터 바로 앞에서 한 노파가 살고 있는 주택건물이 터널 앞을 가리고 서있어 외부에서는 집에 가려 잘 볼 수가 없다. 터널을 들어가려면 이 집 대문을 통해서 들어가야만 한다. 터널에는 입구에서 약 200미터정도 들어가면 막혀있어 대낮에도 캄캄한데 예전에는 입구부근에 물이 많이 세어나와 웅덩이가 있었으나 현재는 바닥을 1.5m정도 흙으로 덮어 웅덩이는 보이지 않는다.
(관호 구터널 -반상곡수로 입구)
이 터널은 여기서 동북방향으로 약 2백미터 쯤 지금의 4번국도 언덕 밑으로 경부선 복선 철로와 맞닿는 곳에서 터널의 출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파괴되어 매워져서 없어졌다. 지금 성모병원 진입도로가 된 곳이다. 1970년대 4번국도 확장공사를 하면서 도로 높이를 약 3미터 정도 낮추면서 터널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금의 경부선 복선철로를 동으로 가로질러 동북방향인 구왜관(舊倭館) 쪽으로 들어가는 포장도로가 바로 당시의 구철로(舊鐵路)이다. 지금의 임강(臨江)마을 앞에서 좌회전 하여 현재의 복선 철로와 약목면 무림1리에서 합쳐짐으로 단선철로의 길이는 왜관 구 터널에서 합쳐지는 무림리까지의 총길이는 약 4Km 정도이다.
( 경부선 단선철로 추상도 )
관호3리에는 안불미골, 바깥불미골, 반상골을 합쳐 현재 189세대 408명이 살고 있는데 시골 지역의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해마다 인구수가 줄어 들고 있다.
관호4,5리 아파트지역
관호4리는 반상골 남쪽 산등에 조성된 성재APT단지인데 이 APT는 1989년 4월 1일 서울에 있는 성재산업(주)에서 대지 약 7천평에 건평 7,440평으로 서민민영APT를 11평형 240세대, 14평형 240세대, 15평형 96세대, 총 576세대로서 상가와 유치원, 놀이터, 배구장 등을 구비하고 있다. 준공은 1990년 7월 20일로서 입주인구는 약 2천명에 달한다. 1991년 1월 1일부로 관호 3리에서 관호 4리로 분동되었다. 현재는 407세대 80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관호5리는 삼주아파트 단지로서 반상골 남쪽 산등에 조성된 성재아파트 옆에 위치하고 있다. 두 아파트가 낙동강을 조망하는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어 경치가 좋은 곳이다. 1994년 12월에 입주하여 현재는 769세대 2,035명이 살고 있다
관호리 융단폭격
6.25 발발 후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다가 낙동강전선에서 진격을 저지당하자 전력을 재정비 한 후 8월초에 전 낙동강 방어선에서 일제히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8월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주공격 방향을 왜관-대구 축선으로 정하고 이곳에 전력을 집중투입 하였다. 북한군이 대구를 공격하기위해 왜관지역에 전략을 집결했다는 보고를 받은 맥아드는 왜관지역에 융단폭격을 지시하게 되었다.
1950년 8월 16일 오전11시58분. 일본 요코다(橫田)와 가네나(嘉手納) 공군기지에서 발진한 B-29 5개 편대 98대가 호박 덩어리만한 폭탄 3,234개(무게 960t)를 관호리의 정수리에 퍼부었다. 낙동강 서쪽 약목과 구미 사이 가로 5.6km, 세로 12km의 직사각형 구역이 쑥대밭이 됐다. 폭격은 정확히 26분간 계속됐다. 이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연합군이 생로(Saint Lo) 지역에 퍼부은 융단폭격 (carpet bombing)의 재판이었다.
융단폭격이란 적 병력이 밀집해 있거나 탄약과 보급품이 쌓여 있는 지역을 골라 지역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공격이다. 그날 관호리 부근 하늘에 떨어진 폭탄이 무려 3,234개였다니 그 위력을 지상군대포로 환산하면 약30,000발과 맞먹는 화력이었다.
이 공격의 효과는 확인되지 않았다. 적의 주력부대는 이때 이미 낙동강을 도하했기 때문에 치명적 타격은 피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얼마 후 포로 신문 결과, 적의 사기는 이를 계기로 결정적으로 꺾였다는 진술을 들을 수 있었다. 보급부대에게 치명타를 날렸기 때문이었다.
그해 여름은 잔인했네 / 이혁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고기압과 저기압이 전선을 형성했다
팔월의 뙤약볕이 정수리를 겨냥하듯
갑자기 마른 하늘에 벼락이 친다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쿠르릉 쿠르릉
천둥소리가 난다
호박 덩어리만한 폭탄 삼천이백삼십네개가
관호리의 하늘을 새카맣게 덮어버린 날
이 땅의 산천초목들은 영문도 모른채
흙먼지와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
흔적 없이 사라져 갔다
강대국의 야욕으로 시작된 전쟁은
광란의 폭풍으로 국토를 휩쓸고
동족끼리의 무자비한 총칼질로
금수강산을 시산혈해로 만들었다
공산주의도 자유주의도 모르는
이 땅의 산천초목들은
세계 공산주의의 자유세계에 대한 위협을
낙동강 전선에서 성공적으로 봉쇄하라는 명령에 의해
떨어지는 포탄의 이불을 쓰고
장렬히 산화하였다.
낙동강 가에 평화롭게 피었다
영문도 모른 채 사라져야 했던
망초 꽃 한 송이의 죽음을 설명하기에도
그해 여름은 너무나 잔인했네
(관호리 융단폭격 현장)
2013년 9월 ‘낙동강세계평화문화대축전’이 관호리 맞은 편 낙동강변에서 열렸다. 이 축제는 6ㆍ25전쟁의 마지막 보루로써 반전의 기틀을 마련하고 평화정착의 계기가 된 낙동강 칠곡지구에서 정전 60주년을 기념하고 지구촌과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염원하기 위해 열렸다. 또한 전쟁의 상흔을 딛고 세계를 향해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한 의미도 가지고 있다. 또한 관호리 맞은편 낙동강가인 석적읍 중지리 현 왜관지구전적기념관 뒤편에는 ‘낙동강 호국평화공원’이 조성중인데 앞으로 관호산성, 칠곡보 주변 수변공원과 연계하여 이 지역을 호국브랜드화 함으로써 많은 관광객이 찾을 것으로 예상된다.
시와 강이 흐르는 마을
관호리 기행을 마치며
관호리는 낙동강이 바라다 보이는 다소 드라마틱한 장소에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단순히 강에 기대고 살아온 것이 아니라 강과 자연을 완상하고 경영하면서 살아왔으리라. 역사적으로도 관호리는 낙동강과 함께 많은 질곡을 견뎌왔다. 관호산성(백포산성), 구왜관, 불미골, 관호 구터널의 역사가 그렇고, 6.25전쟁시 융단폭격의 현장이기도 한 것이 그렇다.
그러나 이제 관호리는 과거의 관호리가 아니다. 왜관에서 김천, 구미방향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약목의 관문이고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삼주, 성재아파트 등에는 많은 인구가 거주하기 시작했다. 또한 교통이 편리한 이곳에는 많은 중소기업체들이 입주하게 되어 조용한 강변마을의 옛 모습은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풍속이 변한다 해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곳에 터잡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애환과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마을의 정체성은 더욱 소중히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산천에 붙여진 이름하나, 구전되어오는 전설들, 잡초속에 묻혀있는 돌비석 하나도 모두 이 마을의 역사이자 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 것을 바로 안다는 것은 나를 정화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논어》에는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라는 구절이 있다. 나는 강을 바라보는 관호리가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처럼 지혜롭고, 활력있고, 평화로운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외야제를 천천히 걸어서 나왔다.
〈참고문헌〉〉
1) 「칠곡문화」6호지, 박호만 논문 「선초왜관설치에 대한 고찰」
2)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3) 칠곡향지 1~11집
4) 향토문화대전
5) 두산백과
6)한민족문화대백과
7)칠곡지
8)칠곡문화유적총람
9)경상북도 마을지(칠곡편)
첫댓글 고생하셨습니다. 기대했던대로 매우 좋은 기행지침서입니다.
아이쿠 써보니 장난이 아닙니다. 홍종빈, 김태수 선생님의 노고가 생각났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원본은 파일이 너무커서 첨부가 되지 않습니다. 회장님께 직접 전해드리겠습니다
참 고생이 많았네요 박수 짝짝
홍선생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도 박수를 보냅니다
고생한 만큼 글이 다채롭고 옛시가 많아 참 좋으네요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