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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ㆍ대림피정에 들어가면서
위무위.보조.지도사제 22.11.27 01:41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식구 여러분!
시간은 또 한 해를 돌아
2022년 대림절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의 영원한 오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예수님 오빠께서
2 천년 전,
인간의 '살덩어리(창세 6,12)',
'생가죽 옷' 속에 뜨거운 피를 가득 담으시고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들 속으로 들어 오셨음을 기뻐하고 기념하는 시기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왜 < 인간의 옷 >을 입고 찾아오셨는지요?
구약의 하느님께서는
타락한 살덩어리들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려 하셨지만 ㅡ
『 하느님께서 내려다보시니, 세상은 타락해 있었다.
정녕 모든 살덩어리가 세상에서 타락한 길을 걷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
나 이제 그들을 세상에서 없애 버리겠다.(창세 6,12-13) 』
ㅡ 신약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없애 버리시려던 그 살덩어리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려 이 세상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가죽부대(윤홍식 曰)'를 뒤집어 쓰시고 말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이
피조물과 똑같은 입장을 취하고 이 세상에 오신
< 가장 중요한 원인(이유) >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사랑,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랑!
『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마태 22, 34-36) 』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느님에 대한 사랑만이 답입니다, 답, 정답!
1 천년이 넘는 긴 세월을 통하여 만들어진
두꺼운 책 구약 성경을 단 <한 마디>로 축약하신 하느님의 아들,
인간의 육체를 취하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 답 입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2 천년 동안의 긴 세월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하느님의 말씀(계명)을 지키고 따르려 노력해 왔습니다.
오늘날도 지금도!
그러나, 그러나,,,,
사랑하는 식구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로,
정말로 하느님을 사랑하십니까?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 참으로,
참으로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이끌어주는 영성이라고 믿고 계십니까?
이 영성,
거내영이 <모든 영성의 최고봉>이라고 믿고 계십니까?
이 거내영이,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가 만들어 낸 영성이 아님>을 알고 계십니까?
이 거내영이,
<하느님 신앙의 가장 근본인 가톨릭 정통영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이곳 거룩한 무형의 성전에 남아 저를 비롯하여,
하느님을 죽도록 뜨겁게 사랑하는 이곳의 식구들과 함께 하십시오!
아니라면,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고
이곳보다 여러분 수준에 매우 걸 맞는 다른 곳으로 떠나십시오!
왜 가장 좋은 것을 만나서
언제까지 이곳저곳 기울이는 양다리 걸치는 영성생활을 하시려 합니까?
금광석(金鑛石)을 찾다가
금강석(金剛石다이마몬드)을 찾은 사람은
금광석(金)을 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하느님의 뜻 영성을 처음 한국에 전하신 이범주 신부님께서
하느님 뜻 영성을 만나신 후,
<숨겨진 보물을 찾았다.>하신 말씀이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하신 말씀입니까?
『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
수십 년을 성령쇄신을 위하여 온갖 열정을 기울여 오시던
이범주 신부님께서 왜 그런 표현을 하셨는지요?
천상의 책 예수님의 말씀,
『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은 맡김이다.
내 뜻에 자기를 맡기면
바로 그 맡김을 통하여 신적인 빛을 보게 되고,
이 빛이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을 죄다 흩어 없앤다.
그래서 하느님을 뵙게 되면 그분을 향유하고 싶어지고,
하느님을 향유하게 되면 그때에는 하느님을 먹고 있는 느낌이 된다.
그렇게 하느님이 완전히 그 자신으로 변하는 느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첫걸음을 내딛지 않는다면,
그 영혼은 하느님이 빈 상태로 있게 될 것이다.(천상의 책 6권 142장)" 』을
어떻게 이해 하셨는지요?
이 영성(신앙 단체)이,
저 영성이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크고 이름있는 영성이라 해도,
그 영성이 만일,
<하느님을 죽도록 뜨겁게 사랑하게 가르쳐 주지 못한다면>
그 영성은 죽은 영성에 불과하고 영성 놀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영성을 통하여,
영성생활의 목표이며
영성의 주체이신 하느님을 찾아 얻게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번 대림피정>에 들어가면서
제가 식구 여러분들께 가장 드리고 싶은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부족한 저와 보조교사들을 통하여 이곳에 <길어온 물들만>을
개 처럼 핥아 마시는 그런 <겸손한 영혼들>을 길러 낼 뿐입니다!
『 기드온이 군사들을 물가로 데리고 내려가니,
주님께서 기드온에게 분부하셨다.
“개가 핥듯이 물을 핥는 자를 모두 따로 세워라.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자들도 모두 따로 세워라.”
그렇게 하였더니 손으로 물을 떠서 입에 대고 혀로 핥는 자들의 수가 삼백이었고,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물을 마셨다.
주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물을 핥아 먹은 사람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고,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주겠다.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여라.”(판관 7,5-7) 』
지난 13년 거내영의 역사가 그러해 왔습니다.
이 번 대림피정을 통하여
사랑하는 식구 여러분께서 부디 <새로운 가죽부대>로 갈아 입으시길,
또한 여러분의 썩어 없어질 '살덩어리'만이 아니라
지금의 살덩어리를 통하여 <혼과 영>을 더욱 튼튼히 성장시켜
<영靈혼魂육肉 삼총사>가 다함께 하느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길 바라며,
그것마저도 사랑하는 아버지께 맡겨드립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이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신비.보조.기조실(SG)작성자 24.03.08 06:55
첫댓글
아버지께 내맡김으로 사랑하는 성모님의 따라쟁이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 살게 해 주신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복음은 마리아의 삶이 매우 단순하고 평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룩한위탁Re: 제3편 제14장 제4절 」① / 《하섭내 》 제4장 04
내맡김의 상태로 불림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무화.보조 21.07.02 01:35
그러한 사람들은
예수님, 성모님, 성 요셉의 생애를 닮은 삶을 사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삶은 하느님의 원하심에 완전히 의탁하여
그분의 뜻이 나타날 때 ★그 즉시 따를 마음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생애는 아주 특별한 것이지만,
밖에서 보면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종교상, 신분상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행하고 있는 것과 별반 차이점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때
거기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삶은 평범해 보입니다.
도대체 다른 사람과 아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안배해 주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내맡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끊임없는 순종을 약속하기에
하느님의 뜻은 영혼에게 완전한 지상권을 행사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뜻에 의식적으로 협력하든지 아니면
그 일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든지 간에
그것들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쓰시는 가운데
그들이 다른 영혼들을 도와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의 마음 상태는 고독하고 자유롭고 만사로부터 벗어나 있어
평화로운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또 그들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이 지금 바라시는 의무를 그 뜻대로 성실히 이루어 드리는 일에만★
골몰합니다.
반성이나 회고, 결과에 대한 숙고 또는 원인과 이유에는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뜻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들의 명백한 의무를 진실되게 끊임없이 이행하는 것으로
만족해 합니다.
지금이라는 이 순간은 마치 사막과도 같아
단순한 이 영혼들은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만을 즐기며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뜻하시는 것에만 마음을 씁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은 무시해 버리고 망각하며
주님의 섭리에 온전히 내맡깁니다.
이러한 영혼은
하느님이 하시고자 하는 목적에 수동적으로 이용되거나
아니면 하느님으로부터 지시 받는 외적인 활동에 따라 순응하거나
움직이는 도구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외적 활동에는 자유롭고 능동적인 협력이 뒤따르지만,
그것은 ★신비적이고 위로부터 주입되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이 이런 영혼 안에서 찾아보시는 것은
당신 자신의 활동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마음가짐 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영혼을 대신해서
그 영혼이 자신의 힘과 선의로 이룩해야 할 것을 해 주십니다.]
<지도사제 2016.06.30.
우리 신앙생활에서 고정화된 사고방식을 깨뜨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제가 누차 말씀드리지만. 별 것 아닙니다.
성인은 어렵게, 반드시 수도회에서만 탄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수도회에서 봉사하고 기도하고
면벽수도하고 봉쇄수도회에서 산다고 해서 성인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합니다.
성인을 어렵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인이 거룩한 것처럼,
여러분도 결혼하고 세상에서 경쟁하고 아이들 낳고 배우자와 함께,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충분히 살아있는 성인으로 살아갈 수 있어요.
…
어떻게 가능한가.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그렇게 이끌어 주셔요!!!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셔서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시어
집으로 들어가셨다, 라는 대목에서
예수님도 하느님이시면서,
우리가 사는 것처럼 집으로 들어가시고
우리랑 똑같이 생활하셨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아요.
그러니까 마을에서 제자들과 지지고 볶고 사신 거에요.
제자들을 도와주는 여인들도 있었겠지요.
예루살렘 부인이라고 하지요.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제들을 도와주는 여인들도
예루살렘 부인이라고 하지요.
거룩하다는 것은
로만칼라나 수도복이나 제의복 입었다고 거룩한 것이 아니에요.
제가 그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저는 말 할 수 있어요.
하느님 사랑하지 못하고 하느님 뜻대로 살지 못하면,
이 사제복이나 수도복이 거룩하게 지켜줍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안에 냉정하고 사랑 없고 차디찬 영혼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다 인간의 조건을 갖고 인간의 조건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어요.★
수도자나 사제보다 세상에서 방목되는,
죄 속에 던져진, 여러분이 더 거룩하게 살 수 있어요.
성인으로 살아갈 수 있어요.
내맡기면.. >
<지도사제 2019.12.25.14:58
이제 여러분은
저처럼 깊은 산 속 옹달샘을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토머스 머튼처럼 봉쇄관상수도원을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냐구요?
이제 여러분에게는
<끊임없는 화살기도>가 여러분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화살기도는 여러분에게 있어
깊은 산 속 옹달샘이요, 봉쇄관상수도원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화살기도는 여러분을 <홀로 있게>해 줍니다.
아니 <하느님과 단 둘이> 있게 해 줍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끊임없는 화살기도!
저희에게
그 기도를 선물해 주신 하느님의 뜻은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오, 감사하올 끊임없는 화살기도여!
오, 지극히 흠숭하올 하느님의 뜻이여!>
아멘, 아멘!!!
성모님의 삶은 자세히 성경에 드러나 있지 않아 잘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신학자들을 통하여 알려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단지 하느님 뜻에 순종하시고 하느님 뜻대로 사셨다고만 알고 있지
그 삶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일상의 의무를 통한 <현존의 성사>로 아버지께 내맡겨지고
봉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정말 사제나 수도자도 아니고 평범한 일상을 사는 평신도인 저에게는
산 속 깊은 데로 가지 않아도, 봉쇄 수도원을 가지 않아도,
뭐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매순간 주어지는 일을 아버지께서 주시는 일이라 생각하며
영혼육을 담아 기쁘고 즐겁게 살아도
성모님을 닮아 성인이 될 수 있구나 싶으니
더욱 거내영을 사랑하게 되었지요.
아버지께 내맡겨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사시니
내 노력과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받고 차지하신 아버지께서
당신 뜻대로 이루시고 당신 뜻대로 사용하실 테니까요.
우리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려야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살 수 있듯이
아버지 사랑이 빠진 기도와 미사와 전례행위와 선행 등을 강조하고
가르치는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을 내맡겨 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성모님을 통하여 일상의 신비를 살도록 모범을 세워주시니 감사합니다.
거내영과 성모님 따라쟁이들을 통하여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시고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매일 주어지는 만나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신앙을 살찌운 양식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현존(現存)의 성사였습니다.>
<오! 천사들의 빵이여, 하늘의 만나여, 복음의 값진 진주여,
현존의 성사여!>
[벌거벗은지금 1부 필요한 한 가지(1)
엄효선리나무화62.보조 21.09.21 07:16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41-42
앞의 유명한 말은 예수가 마르타에게 한 것이다.
예수는 지금 마리아, 마르타, 라자로의 집에 손님으로 와있다.
마르타는 청소, 집안 정리, 식사 준비, 손님 접대에 경황이 없다.
<마르타는 모든 일을 아주 잘했고 제대로 했다.
다만 한 가지, '지금 여기'에 있지를 못했다.
★'현존을 못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억울한 느낌에, 어쩌면 자신의 순교자 콤플렉스에,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자신의 욕구에
깨어 있지 못했다.
일종의 선하지 못한 선행이다!
<자기에게 깨어 있지 않으면
손님에게 깨어 있을 수 없고, 하느님께도 깨어 있을 수 없다.>
<현존이란 현재에 존재함이다.
다시 말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현존하느냐가 곧 모든 일을 어떻게 하느냐다.★>
예수는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마르타에게 도전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적 차원에서 어떠하냐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일상에 신적 차원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마르타가 '해야 하는 한 가지 일'이었다.★
너무나 많은 종교가 사람들에게
구원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번다하게 가르친다.
위대한 스승들은 중요한 일은 한 가지 뿐임을 알고 있다.
★순간을 어떻게 사느냐★가 그것이다.
그것만 잘 되면 다른 모든 일이 따라서 잘 된다.
이것이 진리다!
예수가 집주인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말을 거침없이 했어야 할 만큼
중요한 진리다.
예수는 이 점에서 분명히 마리아를 지지한다.
그녀가 순간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본 것이다.
<마리아는 그분에게,
그리고 추측건대 ★자기 자신에게 현존하는 법★을 알고 있다.
다른 모든 일을 더 깊은 차원에서 제대로 이루게 해주는
'한 가지 일'을 알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타에게 해당하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라고 예수는 말한다.
★당신이 '지금 여기'에 있다면,
마침내 그리고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토록 간단하지만 그만큼 가르치기 어려운 것이다.
그 경지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싸구려 약속처럼 들릴는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우리 모두 안에 있는 마르타에게 간곡히 권한다,
제발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자고.>
<지도사제 11.03.19. 14:30
하느님은 무시무종(無始無終), 즉 시간과 공간에 속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하느님과 "비슷"해져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당신과 비슷한 모습(창세1,26)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기도 저기"도 없습니다.
오직, "지금 여기에"를 살아가려 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 "하느님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
<지도사제 11.01.27. 00:33
"오늘"도 아니고,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합니다.
코사드의 요한 베드로 신부님의 말씀, "매순간"은 "現存의 聖事"입니다.
현존은 우주입니다.
우주는 聖事입니다.(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
우주는 7聖事를 포함하며 7聖事를 넘어섭니다.
"現存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며, 그러기에 하느님 實存이십니다.
하느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는 분이십니다.
"지금 여기"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다른 이름은 "지금 여기"입니다.
지금 여기를 "거룩히"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그 이름은 거룩하고 - 루카1,49 )
[ 지도사제 19.12.06. 02:14
사랑하는 아버지,
저희들의 지난 <과거>도 또 <미래>도
그 모든 것이 다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당신께 내맡긴 저희들에게 있어서의 그 모~~~든 것은,
오직 <지금 여기>밖에 그 어느곳(것)에도 없습니다!
지금 저희에게는,
오직 <당신을 죽도록 뜨겁게 사랑하는 것> 外에
다른 그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저희들의 그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
하섭내 제 4 장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따르는 것이 영성의 본질이다
04
내맡김의 상태로 불림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러한 사람들은
예수님, 성모님, 성 요셉의 생애를 닮은 삶을 사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삶은 하느님의 원하심에 완전히 의탁하여
그분의 뜻이 나타날 때 그 즉시 따를 마음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뜻에 대해 명시되어야 할 사항은
인간적인 표현으로는
하느님의 뜻이 작용할 때에는 그것이 뜻하지 않게
우연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나는 그것을
우리가 수행해야할 결정적인 의무들을 부과하는 하느님의 뜻의
다른 면과 구분하기 위해
순수한 섭리(攝理, Providentia)라 불리는 하느님의 뜻이라 부르고자 합니다.
여기서는 그러한 하느님의 명시된 뜻은 제쳐 놓고
대체로 하느님의 섭리적인 뜻에 의탁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합니다.
그들의 생애는 아주 특별한 것이지만,
밖에서 보면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종교상, 신분상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행하고 있는 것과 별반 차이점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가까이에서 들여다 볼 때
거기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삶은 평범해 보입니다.
도대체 다른 사람과 아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안배해 주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내맡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끊임없는 순종을 약속하기에
하느님의 뜻은 영혼에게 완전한 지상권을 행사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뜻에 의식적으로 협력하든지 아니면
그 일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든지 간에
그것들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쓰시는 가운데
그들이 다른 영혼들을 도와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의 마음 상태는 고독하고 자유롭고 만사로부터 벗어나 있어
평화로운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또 그들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이 지금 바라시는 의무를 그 뜻대로 성실히 이루어 드리는 일에만
골몰합니다.
반성이나 회고, 결과에 대한 숙고 또는 원인과 이유에는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뜻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들의 명백한 의무를 진실되게 끊임없이 이행하는 것으로 만족해합니다.
지금이라는 이 순간은 마치 사막과도 같아
단순한 이 영혼들은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만을 즐기며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뜻하시는 것에만 마음을 씁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은 무시해 버리고 망각하며
주님의 섭리에 온전히 내맡깁니다.
이러한 영혼은
하느님이 하시고자 하는 목적에 수동적으로 이용되거나
아니면 하느님으로부터 지시 받는 외적인 활동에 따라 순응하거나
움직이는 도구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외적 활동에는 자유롭고 능동적인 협력이 뒤따르지만,
그것은 신비적이고 위로부터 주입되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이 이런 영혼 안에서 찾아보시는 것은
당신 자신의 활동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마음가짐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로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영혼을 대신해서
그 영혼이 자신의 힘과 선의로 이룩해야 할 것을 해 주십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자기 대신에 여행을 떠나려 준비하는 친구를 보고
그의 모습을 빌려 여행을 떠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실제 여행은 다른 이가 한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 친구가 한 일은 여행을 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 것뿐입니다.
이 여행은
여비와 노고를 감수해야 할 친구를 돕고자 자유로이 결정한 결과였기에
강제적인 여행이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걸어가는 것으로 (당시 여행은 대부분 도보로 하는 것이었음)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친구 쪽에서는 아무런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내적인 것이며,
걸음을 걷게 하는 힘이 사람 눈에 띄지 않고 숨겨져 있는 까닭에
그것은 신비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상적인 여행은
은총에 협력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예증이지만,
일상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경우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일상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경우에는
아무것도 신비적인 것이 없고 위에서 오는 힘에 저촉되는 일도 없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자유롭고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내맡긴다고 하는 것은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입니다.
우리 자신을 포기하여 하느님께 내맡길 때,
자신의 의지는 전혀 따르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바라면서도 자신은 행동하지 않는 도구와도 같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가짐을 계속해서 지니게 됩니다.
도구는 숙련공의 손에 들어가자마자
본래 지니고 있는 성능과 특징이 나타나 모든 것에 사용됩니다.
이와는 달리
분명히 정해져서 나타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일반적 경계, 주의, 신중, 분별력을 포함합니다.
은총이 우리를 도와주시니
우리는 현 순간에 해야 할 일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다른 일에 대해서는 일체 하느님이 하시는 대로 맡겨 드려야 합니다.
이 사랑은 아주 참다운 행동이고 피해서는 안 될 의무입니다.
영혼은 이 사랑을 끊임없이 간직하고
하느님의 권고하심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영혼이 능동적으로 행위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긴박한 의무에 대한 재빠른 응답 역시 행위입니다.
비록 우리가 외적인 상황들 안에서 특별한 것을 마주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 외적인 상황들과 사건들로 명백해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행하는 행위에 입각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이 영혼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은
모든 것에 대한 법이고 최고의 기준이며 분명하고 확실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장소와 시간, 상황에 구애받지 않으며
모든 곳에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우리는
똑바른 길을 용기와 충실성을 가지고 탈선하지 말고 따라가야만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지금 현재 요청받고 있는 모든 것을 능동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 외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수동적으로 내맡겨 드리고
하느님이 권고하시는 대로 평화 중에 때를 기다리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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