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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바람 불어 너도나도바람꽃 외 9편
이원규
밤의 휘파람을 부니 밤바람이 분다
간절히 바라니 봄바람이 불어온다
파풍破風의 대숲에 깃들어 성난 깃털을 쓰다듬더니
수다쟁이 봄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오래 잊었던 눈짓 손짓들의 살가운 부채질
그날 밤 돌담 살구나무 아래 꼴깍 침 넘어가던 소리
하릴없이 손가락 관절을 꺾던 소리
캄캄해도 부끄러워 눈썹까지 이불을 끌어올리던
신열의 달뜬 너도바람꽃
삼십 년 전의 봄바람이 불어온다
입술 닿은 자리마다 후끈 열꽃이 피어난다
지천명을 넘어서야 속살 깊이 되새기는
변산바람 풍도바람 너도바람 나도바람
만주바람 꿩의바람 홀아비바람 조선남바람
회리바람 태백바람 세바람 들바람
하많은 내 생의 바람꽃들에게
그래, 나쁜 놈이야, 나는, 두 무릎을 꿇는다
간절히 바라니 다시 봄바람이 분다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의 자작나무
그 숲 속에서 불던 흙피리 소리 이제야 당도한다
저 바람이 데려오다 흘린 낙엽 하나
오늘 밤은 또 어디에서 잠드는지
흰 목덜미를 돌아온 옛 바람들에게
이미 푹 젖은 낙엽의 혀로 안부를 묻는다
네가 바라니 나도 바라는 너도나도바람꽃
죽을 때까지 제발, 죽지 마
애타게 밤의 휘파람을 부니 봄바람이 불어온다
늦잠꾸러기 복수초
그녀는 오전 11시 5분에야 일어난다
한겨울의 햇살 환한 알약을 삼키며 잠시 눈을 떴다가
그예 황금 술잔을 내밀며
무슨 말이라도 할 듯 말 듯하다가
오후 3시부터 슬그머니 혀를 말아 넣는다
틀니 낀 입술을 꽉 오므리고
다시 언 땅바닥에 스무 시간의 잠을 청한다
밤새 덜덜 떨면서도
온몸의 미열로 세상 눈밭을 허위허위 열어젖히더니
영하의 칼바람 이불을 덮어쓰고 누웠다
새벽 4시부터 하루 스무 시간 일만 하더니
문경병원에 입원한 해소 천식의 청상과부 어머니
막내야, 네가 왔구나, 틀니 환하게 웃다가
노란 알약에 취해 금방 잠이 들었다
19년 전의 늦잠꾸러기 복수초
어머니, 이제 그만 일어나셔야지요
지리산 팔베개
그런 날이 있었다
심심산중에서 길을 잃어도
산비탈에서 구르고 벼랑의 나뭇가지가 부러져도
도무지 죽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날이 있었다
칡덤불 다래덤불이 내 몸을 받아주고
바위 솔이끼가 푸른 요를 깔고
신갈나무 가지들이 두 손을 내밀어
반달가슴곰의 신혼방 같은 석실로 안내하던
그런 저녁이 있었다
이따금 생의 패가 풀리지 않아
꺼억꺽 목울대를 조르다 잠이 들면
어느새 노고단 마고할미가
스리슬쩍 유장한 능선의 왼팔을 내밀어
팔베개를 해주던 그런 밤이 있었다
푹신한 낙엽요를 깔고
함박눈 이불을 눈썹까지 끌어올리던
지리산 화개동천의 새벽
팔베개는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그리하여 나 또한 밤새
마구 뛰는 심장을 맷돌로 누르고
저린 팔 그대로 코끝에 침을 바르며
단 하룻밤만이라도 그대의 곤한 잠을 지켜주고 싶었다
슬픈 기도
공중화장실 벽에 몰래 쓰고
암실 같은 다방 커피 잔 속의 각설탕을 녹이며
티스푼으로 그 이름을 썼다
최루의 거리에선 온몸 혈서의 깃발로 허공에 쓰고
만리포 백사장과
지리산 실상사 허허 눈밭에선
발자국 발자국들을 이어서 쓰고
지리산 둘레길 850리를 걷고 걸어
겨우 한 글자 거대한 동그라미 하나 그리며
바람 불 때마다 팽팽한 활이었다 화살이었다
비로소 내 이름을 쓴다
남원 곡성 구례 하동 섬진강변을 달리며
오프로드 모터사이클을 타고
전국 오지의 잊혀진 비포장 길 위에 내 이름을 새긴다
산길 둑방길에 처박고 나자빠지며
자음 ㄱ자에 발목을, 모음 ㅠ자에 어깨를 다치며
산마을 강마을 3만 리를 걸어도
오토바이로 지구 열일곱 바퀴 거리를 질주해도
대체 무슨 불립문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그저 아무런 뜻도 없으려니
나이 쉰을 넘기며 주문처럼 슬픈 기도처럼
전국지도 위에 비뚤비뚤 내 이름을 쓴다
단 세 글자의 길,
다 걸으려면 다시 석삼년은 걸리리라
동강할미꽃
섬진강 매화가 피고 질 때면
나는야 봄바람 난 유목민의 아들
말안장 위에 야영 장비를 단단히 묶고
북상하는 꽃들을 따라 먼 길 나선다
막 겨울잠에서 깨어난 오토바이 시동을 걸고
채찍으로 허벅지를 때리며
강원도를 향하여 108마력의 슬픔으로 내달린다
지리산 마고할미의 품을 벗어나
내 고향 문경의 할미산성까지 육백 리 길
사과밭 옆의 어머님께 큰절 두 번 올리고
다시 정선과 영월의 석회암 절벽
뼝대 위의 동강할미꽃까지 오백 리 길
채 녹지 않은 눈길을 엉금엉금
첫돌배기 아이처럼 두 무릎이 까지도록 달려간다
아슬아슬한 뼝대 위로 손발톱이 빠지도록 기어오른다
바로 그곳에 돌아가신 어머님 계신다
길도 없는 벼랑 끝에 외할머님 계신다
아직 어린 소녀처럼 솜털 보송보송한 얼굴들
일평생 기역자로 굽은 허리 모처럼 꼿꼿하게 세우고
청보라 홍보라 연분홍 하얀 수건을 덮어쓰고
아리랑 아라리요 동강을 내려다본다
나는야 돌아온 탕자가 되어 허위허위 뼝대를 기어오르면
아서라 얘야, 다칠라, 여긴 길이 없다, 아무 길도
네 마음 다 알겠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천 리 먼 길 달려와도 끝끝내 가닿을 수가 없다
외할머니 시름시름 먼 길 가시며
고구마 수수 참깨 밭 귓속골 가는 길을 지우더니
수절 삼십 년의 어머니는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이어진
세상의 마지막 길마저 지워버렸다
강아지풀 며느리밥풀꽃 하나 못 자라는
고속도로 인터넷은 뻥뻥 뚫리는데
수천 년 이어온 길들은 저절로 무덤이 되었다
우리들의 어머니 할머니는 지구의 마지막 인류
논두렁 밭두렁 고갯길 다 지워버리고는
낭떠러지 뼝대 위에 올라가
아리랑 아라리요 동강을 내려다 본다
죽어 다시 피어도 길 없는 곳을 자처하는 토종꽃
일평생 주기만 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동강할미꽃
아서라, 얘야, 그만 돌아가거라
그예 동강의 동강할미꽃들이 지고 나면
나는야 여전히 철이 없는 유목민의 아들
불효막심한 고아가 되어 오토바이 시동을 건다
바람의 채찍으로 등짝을 후려치며
지리산을 향하여 108마력의 슬픔으로 내달린다
시인만세
아직 젊을 때는 몰랐다
몸이 많이 아픈 뒤에야 야생화가 보였다
지천명이 지나도록
민들레 진달래 목련 앵두 복사꽃에 마음 주다가
3만 리 순례 길에 면역력이 무너지고
결핵성늑막염으로 870ml 흉수를 뽑아낸 뒤에야
키 낮은 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9개월 동안 날마다 세 줌 알약을 먹고
공중화장실을 피해 다니며 피오줌을 싸면서
동강할미 금강초롱 한계령풀
칠보치마 조선남바람 청노루귀 깽깽이풀
대대손손 자생하는 희귀야생화들을 찾아다녔다
3년 기도의 야생화들이 나를 살렸다
해오라비난초 석란 자란 지네발란 소경불알
잘 안 보여도 곳곳에 잘도 살아 있었다
도대체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꽃들
가는 곳마다 제 빛깔 제 향기로 피어난
얼핏 보면 잘 안 보이는 천연기념물의 얼굴들!
봄은 분명코 봄이로다
마침내 때가 무르익어 갠-지겡
상쇠가 꽹과리를 치자 저 하늘의 문이 열리듯
섬진강변 첫 매화가 눈을 뜬다
봄은 분명코 봄이로다 덩실덩실 하늘이 응답하고
너울너울 땅이 화답하는 천지신명의 봄이로다
덩기닥 장구소리에 어깨춤 추며 꽃바람이 불고
징소리, 징소리 파문들이 물수제비를 뜨는 강물 속으로
황어 떼들이 거슬러 오르면
지상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단전에서
좌심방 우심실까지 둥두둥 북소리가 울린다
아아, 그러나 봄은 분명코 봄이로되 아직은
환장할 분단과 자본독재의 봄
역천의 봄, 한반도 역주행의 봄이로다
안 되겠다, 못 참겠다 굴려라 다시 굴림뿐이다
꽹과리를 쳐라 징소리 북소리를 울려라
꽃샘추위에 피던 꽃이 지더냐
장구를 치고 나발을 불어라 오던 봄이 돌아가더냐
갠-지겡 삼진박에 첫눈을 뜨는 매화꽃들을 보아라
징소리 입에 물고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황어 떼와
장구소리에 날갯짓하는 벌 나비들을 보아라
터질 듯 심장의 북을 치는 보름달
그 북소리를 받아먹고 파릇파릇해진 보리 냉이 쑥을 보아라
오늘은 저 하늘의 별들도 모두 내려와
지상의 풀꽃으로 피어난다 더불어 촛불이다
마침내 촛불의 은하수다
굴려라 삼진박 풍물을 치듯이 다시 한반도를 굴려라
굴림뿐이다 들숨 날숨의 한 호흡
또 하루 날마다 지구를 굴리고
일하며 놀며, 싸울 때는 제대로 싸우며
우주 상생의 기운을 굴려라
마침내 때가 왔으니 갠-지겡 상쇠가 꽹과리를 치자
덩실덩실 하늘이 응답하고 너울너울 땅이 화답하는
천지인, 천지인 신명의 봄이 왔다
상고대
정신의 흰 뼈, 겨울 산이 부른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스승
차고 매운 회초리를 들고 어서 오너라, 기다린다
정신줄 놓고 앞만 보고 달리다가
어질어질 코피 쏟으며 고개를 들면
‘높고 외롭고 쓸쓸한’ 겨울 산이 기다리고 있다
히말라야는 아니더라도 아주 가까이
눈 덮인 겨울 산의 초대에 화답할 때가 온 것이다
다만 등산登山이 아닌 입산入山의 자세
누구나 정복해야할 산은 욕망의 화산火山이니
설화 빙화 상고대가 추우면 나도 춥고
겨울나목이 배고프고 목마르니 나 또한 고프고 마르고
생의 인감도장을 찍듯이 발자국을 새기며
산 아래의 내가 산꼭대기의 나를 찾아가는 길
입산의 내가 하산의 나를 만나 꺼이꺼이 악수하는 길
영혼의 희디흰 밥, 무욕의 겨울 산이 부른다
철없는 내 사랑 무정란이어도 좋았다
마치 씨암탉이 알을 품듯이
천둥벼락이 쳐도 누군가를 품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만한 일
닭벼슬에 철철 피가 흐르던 사랑마저
이미 오래 전에 끝장났지만
우리 집 암탉은 진신사리 여섯 개의 유정란을 낳았다
행여 줄탁동기의 때를 놓칠 새라
스무하루 결가부좌를 하더니
다섯 마리 병아리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
새가 아닌 닭의 운명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열리지 않은 문 앞에는
달걀인가 새의 알인가 폐사한 알이 하나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날마다 누군가를 품는다는 것은
지구 알에서 태어나 날마다 밤마다
해 품고 달 품고 다시 알을 품는다는 것은
유정란을 포기한 동성애자처럼
천둥벼락이 쳐도 일단 품어본다는 것은
아무래도 또다시 닭벼슬에 철철 피가 흐르는 일
철없는 내 사랑은 무정란이어도 좋았다
나는 칠불사로 간다
살다 지쳐 입술을 깨물어도 갈 곳이 없었지요
머리 풀고 대성통곡 하고파도 울 곳조차 없었지요
도대체 내 마음도 내 맘 같지 않은 날
섬진강 물안개가 차오르면
오리무중의 나를 만나러 칠불사 영지를 찾아갑니다
굽이굽이 삼십 리 벚꽃 길을 따라
지리산 반야봉 토끼봉의 혈 자리
동국제일선원 계단 아래 호두나무 은행나무를 뵈러갑니다
안개가 몰려와도 이미 안개 너머 피안의 집
구름이 몰려와도 이미 구름 위의 그 절집
운상원 벽안당 아자방을 찾아갑니다
너무 가까워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
나의 두 눈썹을 보려고
칠불사 영지 맑은 물에 내 얼굴을 들이밀었지요
황달 얼굴에 백태 낀 눈동자만 떠올랐습니다
두 무릎 꿇고 밤새 부엉이처럼 울다보니
이미 내가 아닌 나마저 사라지고
천 년 전 또 천 년 전의 한 여인
그녀의 간절한 눈빛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자방 창문 너머 오래오래 들여다보니
좌불안석의 나, 병든 짐승 한 마리 누워 있더니
이미 내가 아닌 나마저 사라지고
슬그머니 흰 소 한 마리가 나를 쳐다보았지요
선미선약仙味仙藥이라 천년의 젖샘물로
전통 발효차를 우려내니
찻잔 속엔 봄의 기억들이 환한 가을빛으로 피어나고
문득 금강산 마하연이 떠올랐지요
마시고 또 마시니 아랫배 아래 단전에서
큰 산이 우는 듯 거문고 소리가 울려왔지요
야생 멧돼지들도 내려와 달빛 춤을 추었습니다
그랬지요 예전에 예전에는
살다 지쳐 혀를 깨물어도 갈 곳 하나 없었지요
머리 풀고 대성통곡하더라도 잠시 기댈 곳조차 없었지요
산문
아직 돌아가지 못한 탕자
어머님 돌아가신 지 어느새 19년째가 되었다. 지리산 입산 19년이라는 얘기다. 그동안 참으로 먼 길, 여러 길을 돌고 돌아서 지리산까지 왔지만 어머님께로 가는 길은 언제나 직통의 외길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한순간에 가닿을 수 있는 길은 세상도처에 이 길밖에 없다.
정월 대보름에 태어난 어머님의 기구한 팔자를 어찌 필설로 다 말할 수 있을까. 수절 30년의 세월을 진통제인 ‘뇌신’으로 견디고, 전쟁 직후 산속으로 도망친 아버지를 기다리며 밤마다 달빛을 깨물고 깨물던 날들이었다. 뇌신, 그 쓰디쓴 정신의 흰밥이 없는 나는 어머님 돌아가시자마자 사표를 내고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삼우제 때 무덤에 큰절을 올리며 “어머님, 발목을 잡던 손을 놓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야 저도 아버지처럼 떠날 수 있습니다” 하고 불효막심한 하직인사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입산 19년을 맞는 동안 나 또한 어머니처럼 밤마다 달빛을 자근자근 깨물어야했다. 그리하여 겨우「달빛을 깨물다」라는 추모시를 쓰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아버님과 막내인 나는 어머니에게 천적天敵 같은 것이었다. 다섯 살 때 얼굴을 처음 본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사흘 만에 먼 길을 떠나고, 나 또한 민주화운동을 한다거나 시를 쓴답시고 어머니에게 노심초사 마음고생만 시켰다. 남편과 자식이 기댈 언덕은커녕 일생의 천적이었다니!
오늘도 지리산 피아산방의 컴퓨터를 켠다. 지도를 검색해서 어머님 무덤이 있는 경북 문경군 마성면 신현리 고모산성 주변의 사과밭을 띄운다. 인공위성의 눈으로 최대한 확대하면 그 사과밭 옆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무덤이 희미하게나마 다 보인다. 녹차 한 잔을 올리고 큰절을 올린다.
이원규 경북 문경 출생. 1989년『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강물도 목이 마르다』 외. 육필시집『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평화인권문학상 외 수상.
순천대 문창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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