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7 저희가 우리를 살려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
아람의 벤하닷 2세가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성을 포위하고 봉쇄작전을 펼쳤다.
물과 식량이 떨어져 굶어 죽을 상황이 되면 스스로 백기를 들고 나오게 하려는 것이다.
왕하 6장의 내용을 보면 벤하닷 2세의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을 한 것 같이 보인다.
사마리아성안에서는 썩은 나귀 머리도 없어 비둘기 똥으로 연명하다가 급기야 죽은 자식의 시체를 삶아 먹으며 생존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
내일은...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어떻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쌀한톨도 없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삶아 먹고 연명하는 처지에 어떻게 당장 내일 고운 가루와 보리를 얻게 된단 말인가?
현실은 내일은 더 암담하게 될게 뻔하지 않은가?
이제 곧 아람이 쳐들어와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을 다 도륙하여 죽일게 뻔하지 않은가?
너무나 암담하고 참혹하지만 너무나 확실한 상황앞에서 내일은 고운 가루와 보리를 얻게 될거란 하나님의 말씀은 조롱하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니 하나님이라고 한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무슨 수로 반전 시킬수 있단 말이요? (2절)
왕의 군대장관이란 사람이 한 말이다.
지금까지 한 행태를 보면 왕인 요람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막상 성경을 볼때는 이들의 행동을 비난하지만 현실의 상황앞에서는 우리 대부분이 다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합리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우리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은 황당하고 과대망상적인 이야기로 들릴때가 많다.
비록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래서 남의 이야기같이 들을때나 옛날 이야기로 들을때에는 아멘~ 믿습니다~라고 화답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의 이야기는 다르지 않냐고... 그건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냐고~ 그건 상식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할때가 많다.
내 눈앞의 현실에서 홍해가 갈라지는 걸 믿을수 있겠는가?
내 눈앞의 현실에서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걸 믿을수 있겠는가?
내 힘으로 내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실 일이 없다.
사마리아 성내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문어귀에 사는 4명의 문둥병자가 있었다.
멀쩡한 사람들도 자식이 굶어 죽어 나갈때 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데 이 4명의 문둥병자들은 아람진영으로 들어갈 생각을 했다.
어차피 여기서 굶어죽느니 아람진영에 들어가면 목숨을 건질수도 있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죽이면 죽으면 되는 것이고 혹시 아나 살려줄지....
'더 합리적'인 생각 아닌가?
뛰어내리는 것이 두려워 그 자리에서 불에 타 죽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들이 있다.
뛰어내리다가 다리가 부러질수도 있고 죽을수도 있지만 그 자리에서 연기를 마시고 불에 타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또 다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아람진영에 들어간 4명의 문둥병자들앞에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다.
아람진영에 아무도 없고 텅텅 비어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사연은 이러했다.
하나님이 아람진영에 병거 소리와 군대의 소리가 들리게 하셨고 그것이 이스라엘을 도우기 위해서 온 애굽과 가나안 헷 족속의 군대라고 생각한 아람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퇴각한 것이었다. (6절)
하나님이 하늘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얻었다. (16절)
아쁠사.... 이럴줄 알았으면 진작에 싸워나 볼걸....
차라리 자식이 죽기전에 4명의 문둥병자들 처럼 아람군대에 들어가 항복이라도 해볼걸....
왜 그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하여 우리를 돕기 위해 하나님의 군대가 이미 우리뒤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여주셨는데도 말이다.
듣기 좋은 말에 말로만 아멘~ 하면 되는게 믿음이 아니다.
죽으면 죽으려니와 살리면 살리라....
행동하지 않으면 믿음은 아무 일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무턱대고 하면된다~고 덤비라는 말이 아니다.
영적 실체는 그런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들고 나가 블레셋과 맞서 싸우다가 처절하게 패배하고 둘다 죽었던 것을 생각해보라.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이 그런 무대뽀적인 적극성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자라야 내가 나갈 때와 잠잠할때를 분별할수 있게 된다.
영적인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실존의 세계다.
질서가 있고 원리가 있다.
날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앞에 나아가 그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지 않고서는 영적 세계를 이해할수가 없다.
우리의 합리적인 생각이 결코 홍해앞에 서고 여리고 성앞에 서는 그 황당한 일을 하도록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안에 들어오고 이해되어질때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헛점 투성이의 비합리적인 생각들인지 깨닫게 하시고
'더 합리'적인 하나님의 생각으로 우리를 납득하여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상황들을 해석해주신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
내 생각보다 '더 합리'적인 하나님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눈의 비늘을 떨어내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실존하고 있는 영적 실체들을 보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러 그들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군대를 이미 우리 가운데 보내주신 것을 믿으며 죽으면 죽으리라~ 는 믿음으로 세상과 맞서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