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사슴시인’ 노천명
한국경제 2013년 8월 31일 토요일 A2 백승현 기자
1912년 황해도 장연 출생 1930년 진명여고 졸업 1932년 시 ‘밤의 찬미’로 등단 1934년 조선중앙일보 입사 1938년 시 ‘사슴’ 발표 1950년 전쟁 중 부역 혐의로 투옥 1957년 서울 종로에서 별세
“내가 거지로 보이니?” 죽음을 눈앞에 둔 시인 노천명이 치료비를 건네는 친구들에게 내뱉은 말이다. 노천명은 곧 쓰러질지언정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사람이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그는 대표작 ‘사슴’에서도 스스로를 슬픈 짐승으로 표현했다.
노천명은 1912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기선’이었으나 어려서 홍역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천명(天命)’으로 개명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7세 때 상경해 진명보통학교와 이화여전(현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학창시절 남다른 문재(文才)를 보여 대학 3학년 때 ‘신동아’에 시 ‘밤의 찬미’, 수필 ‘신록’, 소설 ‘닭쫓던 개’들을 잇따라 발표하며 등단했다. 졸업 뒤엔 왕성한 시작(詩作)을 통해 당대 대표적인 여류시인으로 자리잡았다. 대표작 ‘사슴’은 1938년에 49편을 묶어 내놓은 시집의 한 편이었다.
그의 작품을 꿰뚫는 키워드는 ‘고독과 슬픔’이었다. 삶의 본질에 대한 응시와 성찰로 당대 여류시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은다. 또 다른 키워드는 현실을 초연한 비(非)정치성 이었다. 그래서 였을까, 대학 졸업 뒤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일제 말기 ‘친일(親日)’과 6.25전쟁 중의 좌파 문학가동맹에 참여한 ‘부역(附逆)’이라는 ‘주홍글씨’도 새겼다. 평생을 독신으로 산 그는 1957년 3월, 대학 강의를 위해 이동하다 길에서 쓰러진 뒤 9개월 만에 눈을 감았다. 병명은 재생불능성 빈혈이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친일 여류 시인 노천명의 시
湧? 감상해 보자. 일본에 대한 충성심이 잘 나와 있다. 남자로 태어 나지 않아서 일본 황군에 들어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대단한 충성심이다. (정신대에 왜 지원을 안했는지?)
이런 시를 읽고 역겨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한국인이라 불리울 자격이 없다. 이런 시를 보고도 친일 타령하는 것이 듣기 싫다는둥, 친일파 후손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는둥 하는 자의 소감이 어떨지 궁금해 진다.
군신송(軍神頌)
싸움 하는 나라의 거리다운 어뢰를 안고 몸으로
싱가폴 함락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승전의날
기원
안해의 간절한 기원
|
출처: 시나브로 원문보기 글쓴이: Simon
첫댓글 얄팍한 글솜씨로 변절하고 변절하는 사람들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현실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