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맨발 걷기를 한다. 여섯시부터 일곱시 사이, 미명이 여명으로 바뀌는 동안, 학교 운동장을 다섯바퀴쯤 돈다. 걷기만 하는 건 아니고 중간 중간 철봉 앞에 서서 팔굽혀 펴기와 스쿼드, 그리고 국민학교 때 배운 국민체조 따위를 하고 다시 걷는다. 하는 종류는 많으나 다 하는 데 30분 정도 걸린다. 집에서 학교로 오가고, 준비하고 발을 씻는 시간을 합치면 거의 한 시간이 소요되는 것 같다. 맥주의 숙취를 이고 깨어나 두통과 갈증에 시달리는 아침에 비하면, 하루의 첫 한 시간은 천국과 다름 없다.
운동장에 나가보면, 대략 열에서 스무 사람쯤이 걷고 있다. 뛰는 사람은 거의 없거나 한 둘에 불과하다. 얼마 전 젊은 남자가 이를 악물고 앞만 보며 달리는 걸 본 적이 있다. 하루는 그가 비를 내처 맞으며 뜀박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실연당한 게 틀림없다고 여기고 관찰모드로 들어갔으나 이삼일 그러고는 그만이었다. 그 젊은 러너를 카운팅에서 제하면 운동장에서 남자 같이 생긴 사람은 나를 포함하여 다섯 손가락을 다 꼽지 못한다. 여자들, 특히 육십이 훨씬 넘어보이는,장년에서 노년으로 가는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운동장에 나와서, 이른 하루를 운동으로 시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여자라는 사실 하나로 성별간의 평균수명 차이를 다 설명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한쪽으로 급히 시소가 기운 성비 불균형은 남자로서의 내 모습을 그 풍경안에서 다시 보게 한다.
사람은 몸의 존재다. 하늘이 무너지고, 나는 이 사실을 눈으로 보았고, 살과 뼈가 깨지는 아픔으로 느꼈다. 그러나 몸의 존재는 몸 아닌 존재와 붙어 있다. 이 복합성은 해명되어야 한다. 대문자 A는 몸을 떠나며 나에게 새로운 물성, 그러니까 비물질계의 관련성 속에서만 존재를 정립하는 물질계의 본질을 일깨워주었다. 이것을 새로운 물성이라고 표현한다. 성(性)이라는 한자는 무한한 추상의 부채살로 뻗어나간다. 의미의 미끄러짐이나, 고른판 위에서의 탈주, 분열분석을 얘기하는 데리다나 들뢰즈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본성이나 본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주저함이 없다. 그것이 갇힌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성에서 성, 즉 본질은 물(物)에 대해서이다. 말장난하나? 아니, 말 그대로를 옮겨 적고 있을 뿐이다. 질감과 양감을 지니는 구체의 사물들 안에는 잠재성의 성질들이 들어 있고, 그것과 현실태 사이에는 무한의 가능성이 매개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대문자 A로 인하여 내게 들어온 이 물성은 다분히 유전적이다. 그래서 다시 몸으로 회귀한다.
오늘은 일찍 잠에서 깨어났고, 평소보다 30분 일찍 운동장에 나갔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에서 날씨를 확인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들고 학교로 나가는 길은 어둑신했고, 나는 비의 청신함 속에 습기를 타고 올라오는 땅의 푸석이는 냄새, 마른 냄새를 맡았다. 맨발 걷기를 하면서 새삼 흙의 맨몸 위를 덮고 있는 두꺼운 고체 거죽들을 본다. 맨발 걷기국민운동 본부(이런 단체가 있다니! 이런 단체는 용기를 준다. 어떤 무용한 일에 골몰하는 모임를 만들고 싶은 나 같은 사람에게!!!) 의 회장이라는 분은 신문 인터뷰에서 이 나라 산천의 걷기길을 뒤덮은 매트가 흙의 숨쉬기를 방해한다면서 당장 걷어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정말 그렇다면 시급히 그 사람의 주장대로 해야 한다.
맨발 걷기를 처음 권한 아내에 따르면 비오는 날의 걷기는 더욱 유익하며, 겨울에도 등산양말 바닥에 구멍을 내고 신으면 걷기가 가능하다고 한다. 아내는 나를 부시맨처럼 만들기로 작정했나 보다.
30분 동안의 걷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무렵 빗줄기는 조금 더 거세졌다. 미명은 사라지고 여명이 퍼지고 있었다. 비에 젖어있는 포도. 흙의 숨길을 막고 있는, 흐린 검정의 경도硬度를 축축하게, 짙은 검정으로 물들이고 있는 빗물을 보며 생각했다. 대문자 A가 떠난 저 세상에 가져다 주고 싶은 풍경. 비오는 날의 이 아침 길, 저 멀리 돌아나가는 작은 시냇물, 그 물가의 수초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어떤 사람의 옆 모습.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 밤 늦도록 푸르른 하늘에 맛닿아 있는 서해 바다, 그리고 흙땅을 밟고 가는 사람들의 맨발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