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12.4(토)~5(일) 전남 화순군 북면 금호화순리조트에서 (사)한국지역문학인협회가 주최하고, 광주시, 전라남도,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전국 16개 시·도 문학인 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박 2일의 “대한민국 제10회 지역문학 전국 시ㆍ도 문학인 교류대회”를 개최했다. 이 날 황하택 (사단법인 한국지역문학인협회 이사장)은 대회사에서 대한민국 문학의 메카의 땅에서 “문학입국을 우뚝 세우자며, 미래는 우리가 해낼 수 있는 것이고, 볼 수도 있고, 우리문학인들이 창조해 가는 것이라며 급속한 경제평창으로 야기된 경제만능주의로 인해 저속문화에 편승하는 대세로 말미암아 문학이 쇠퇴하게 되었다며 인간의 진솔한 예술의 장자인 문학은 영원히 존재해야하고 존재할 것이라며 칼 힐티의 행복론[서로 그리워하는 것, 서로 마주 보는 것, 서로 자신을 주는 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이라 예찬하였다. 박영준(전라남도 도지사)은 축사에서 우리는 지금 문화의 고부가가치시대에 살고 있으며 문화예술 자원이 국가의 이미지제고와 경제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산업으로 부각하고 있다며 새로운 문화 자원을 발굴하는데 힘쓰고 있으며, 이러한 고유 유산을 활용한 문화상품 노력과 함께 남도 마당에서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고자 특색 있는 국제행사를 추진하고 있다며, 올해 10월 영암에서 열렸던 “2010F1 코리아 그랑프리”를 시작으로 “2012여수 세계박람회“와 ”국제 농업박람회“가 열리며, 이듬해에는 ”2013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가 선을 보이게 된다며, 이를 통해 전남은 물론 대한민국의 문화적 위상을 격상시키면서 관련 산업의 활발한 활동과 집중적인 육성으로 지역 경제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고 하였다. 김년균(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은 축사에서 “문학이 없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며 문학은 문화의 꽃이자 중심이라며 문학이 그 나라와 그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 때, 그 나라와 그 사회가 건실하게 발전할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하였으며. 성기조(한국문학진흥재단 이사장)은 축사에서 “문학은 삶의 기록”며 문학은 삶의 기록인 인 동시에 한 민족, 한 국가의 대표적 예술로 자리 잡아 인류의 영혼을 맑게 해주고 우리들의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경북문인협회 전 시분과위원장 강상률시인의 대한민국 문학메카 선언문 낭독[내용 줄거리] 우리나라의 지세와 풍광을 일컬어 금수강산이라 하듯 그의 상응한 호남의 남부 우리고장은 빼어난 천혜의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고,남한 최대의 명산 지리산의 봉우리와 비단처럼 펼쳐간 노령의 산줄기등은 화공의 붓끝에 아롱진 산수화 병풍처럼 동과 북이 질퍽이 펼쳐있고 서와 남은 쪽빛바다 물결위에 벙그는 동백꽃을 피우며동당이는 다도해의 올망졸망한 섬들과 소곤거리는 저 별빛 물결 위에 아롱진 보성,섬진,탐진,영상강 줄기를 감돌아 어머니의 다사로운 가슴인양 너른 평야를 젖먹여오곡이 여무는... 이 천혜의 자연이 무르익은 정감으로 이어져 그것을 모태로 문학창작의 산실이 된바,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가 시와 그림 아닌 것이 없다고 하며 고대 기록이 말하듯 태생학적으로 예술과 리듬이 같이하고 있음을 말한다며 현재 전승되고 있는 전남의 민족놀이나 숱한 농요의 사설속에서 그 잔영을 엿볼 수 있는 고싸움놀이,강강수월래,진도아리랑, 판소리,육자배기,무등산가, 방등산가,고려말기 장생포곡, 조선조에 이르러 시조,가사,시,등 남도출신 해남 윤선도의 오우가,어부사시등 시조문학의 겨벽이요 사미인고,관동별곡,성산별곡등의 남긴 정철은 가사문학의 큰 별이고,담양 송순의 면양정가, 장흥 백광홍의 고나서별곡,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의 18년간의 강진 유배중에 지어진 목민섬서,애정량등 수 많은 농민 시편이 있고, 구한말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한 구례의 매천황현의 절명시,남한 의병 봉기시이 고장에서 전사한 수많은 의병들의 활동과 그 애국적 비분을 담은 애국가사등은 구국의 열정과 서정문학의 만남이 혼이 일체를 이룬 것이라며, 근자에 속속 그 배경설화가 등장하고 있는 장성의 홍길동 태생지,곡성의 심청마을 발견 등은우리 문학의 산실이 이 고장이였음을 말해주는 근거가 아닐 수 없다 하며 이러한 풍부한 문학적 자산을 이어받은 남도의 고장은 예로부터 예향으로 자리매김하였다며, 고려의 해동제일 문장가였던 광양출신 김황원,이고 이수광이 저술했던 지봉유설에 조선조 10대시인 광주,전남인으로 천하 공인된 사실이라며(이하 중략..) 이곳은 대한민국 문학의 메카이며 만인의 가슴을 맞대 전통과 그 계승 발전을 지향하는 창조정신의 만남을 통해 대한민국 문학의 메카로서의 그 뿌리와 연원을 밝혀 민족중흥을 위한 백년대계의 이정표를 밝히면서 이에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 라고 선언문을 낭송하였는데 문화의 대하여 한없이 부족한 이 작은 가슴에 뜨거운 전율이 느껴지는 것은.... 2010 매천황현문학대상 (서울) 구인환소설가, 대한민국 향토문학상 (광주) 오재열시조시인, (대구) 박해수시인, 향토문학 공로상 (서울)김장현시인, 원로시인 전 소파 백수칭옹의 꽃다발 증정식이 있었다, <제2부> 문학 심포지엄에서 좌장인 최원규 시인(충남대학교 전 인문대학장을 비롯하여 이명재 평론가(중앙대 명예교수), 김춘섭 문학박사(전남대 명예교수), 정광수(해동문인협회 회장)을 비롯하여 지역문학과 세계문학과 Locality'주제로 열띤 토론이 펼쳐졌는데 토론자석의 정광수시인(해동문인협회 회장)은 평소 좋고·싫고 보다, 옳고·그르다에 있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 성품이라는데 이 날도 어김없이 분위기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직언을 쏟아 놓아 한바탕 폭소와 함께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박은영(문학메카 시낭송포럼회장)은 '새아리랑'(문정희 작품)을 낭송하였으며<제3부> 만찬과 함께 국악한마당, 시와 음악이 있는 문학인의 밤이 열렸다. <제4부> 한·일·중 “시가 만나는 아침”행사에 이어,(제5부> 정영자 교수(부산문협회장, 한국문협 부이사장)의 ‘지역문학의 현실과 문학인의 역할’이라는 주제의 문학특별강좌와 <제6부>황하택(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의 ‘지역문학 교류대회 10년 결산 및 추진방향’이라는 주제발표와 자유토론등을 끝으로 전국 16개 시, 도 참여문학인전원은 각 지역별 문학기행을 떠났다. 우리 서울 경기지역 일행은 고향 마을에서 공적비를 세워주셨다는 원로작가 오남식시인님께서 베풀어주신 따뜻한 한우 곰탕으로 식사를 하고 동복명소 방랑시인 김삿갓도 매료되어 방랑생활을 멈추게 했다는 적벽 강을 돌아 방랑의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던 “난고 김병연(김삿갓)선생 운명 하신집”을 찾았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호는 난고蘭皐, (1807년)경기도 양주에서 양반가문인 김안근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5살 때인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의 조부(祖父)이자 선천부사(선천방어사)였던 김익순이 반란군 수괴 홍경래에게 항복-원래 咸興中軍(함흥군관)으로 전관되어 온지 불과 서너 달 되었다. 신임지에 와서 몇 달 동안 어수선한 일을 대충 정돈하고 겨우 한가한 틈을 얻어 숨을 돌리고 그 시골의 저명한 선비들을 모아 글도 짓고 술도 마시며 수일 동안 즐겁게 지내고 있었는데 새벽에 돌연히 반란군이 쳐들어와서 술에 취해 있는 防禦使(방어사) 김익순을 결박해놓고 안비막개(眼鼻莫開)로 항복하라 다그치니 갑자기 이런 지경을 당해서 얼떨결에 항복을 했던 것이다.(참고문헌: 안동김씨문헌록)하는 바람에 가문이 몰락되었다. 김익순은 그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참수를 당하였다 당시 반역으로 인한 죄는 “연좌죄” 가문의 3대를 멸족하는 것이 통례였으나 이들 모자가 처벌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실권세력이 안동김씨 이었기 때문이라고, 목숨은 건지게 되었으나 떳떳한 사대부로는 지낼 수 없었다. 그 후 황해도 곡산에서 가문에서 종노릇을 하던 사람의 집으로 가족이 피신하였으나 아버지는 도중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만이 살아남아 3형제를 키웠으며 양반가의 기풍을 갖춘 김병연의 어머니는 인적이 드문 산골에 은거하면서 아이들에게 틈틈이 글을 가르쳤다. 김병연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다는 정평을 받아 신동(神童)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후 강원도 영월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과거에 응시했을 때 시제가 공교롭게도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행위를 비판하는 내용[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牛天]“ 논전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홍경대의 난 때 순절한 가산군수 정공의 충심을 논하고 항복한 김익순의 죄를 규탄하라) 그가 자신의 가족과 아무관계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여 서슴지 않고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뛰어난 글 솜씨로 장원하였다. 병연은 할아버지 김익순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어머니가 그들의 할아버지가 적장 앞에 무릎 끓은 대가로 역적으로 몰린 사실을 아이들이 알지 못하도록 숨겨왔던 것이었다. 또한 아이들마저 역적의 손자로 낙인 되면 조정과 세상으로부터 불신과 비난 등은 물론 목숨도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장원을 하게 된 병연은 그 후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이자 자신이 그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어머니로부터 집안내력에 대해 전해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과 “폐족의 자손”이라는 충격을 받고 20세때 처자식을 둔 채 삿갓을 쓰고 전국 유랑을 떠나게 되었고, 이때부터 병연은 죄인으로서 푸른 하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하여 이름도 '병연' 이라는 본명 대신 '삿갓' 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전국 방랑길을 떠난 것은 20세 때 어머니가 할아버지 김익순의 존재를 해명한 후부터였으며 그는 방랑길을 떠나기 전에 갓을 파는 집으로 가서 크기가 큼지막한 삿갓을 주문하고 집에서 긴 지팡이와 동국여지승람 등 지도책 등을 소지하고 떠났다는 일설이 있다. 그에게는 충청남도 홍성에 외가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는 어머니와 처(妻)에게는 홍성의 외가에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자신은 사실상 정반대 북쪽의 금강산으로 첫 방랑을 떠난 후 한때 잠시 집을 들렀던 것을 제외하곤 사실상 가족들과 일체 연락을 끊은 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었다. 금강산을 시작으로 전국 8도를 떠돌았으며 도산서원 근처와 황해도 곡산 등지에서는 훈장생활을 하기도 했다. 한때 유랑 도중 집 안에 잠시 들렀다가 그 후로는 돌아오지 않았다가 전라도 화순군 동복명소인 적벽에 매료되어 이곳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1863년)이렇듯 그의 생애는 시대에 대한 恨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가 남긴 여러 편의 詩에서 이러한 그의 심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蘭皐平生詩 / 金炳淵 (1807~1863) 난고평생시 / 김병연
鳥巢獸穴皆有居(조소수혈개유거)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는데 顧我平生獨自傷(고아평생독자상)내 평생은 혼자 슬프게 살아 왔구나. 芒鞋竹杖路千里(망혜죽장로천리)짚신신고 지팡이로 천 리 길을 다니며 水性雲心家四方(수성운심가사방)물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이었지 尤人不可怨天難(우인불가원천난)남을 탓할 수도 하늘을 원망할 수고 없고 歲暮悲懷餘寸腸(세모비회여촌장)해마다 해가 저물면 서러운 마음에 슬퍼했다.
初年自謂得樂地(초년자위득락지)어려서는 이른바 넉넉한 집에 태어나 漢北知吾生長鄕(한북지오생장향)한강가 이름 있는 고향에서 자랐다. 簪纓先世富貴人(잠영선세부귀인)조상은 부귀영화를 누려 왔던 사람들 花柳長安名勝庄(화류장안명승장)장안에서도 이름 높은 가문이었다.
隣人也賀弄璋慶(인인야하농장경)이웃 사람들 득남했다 축하해 주며 早晩前期冠蓋場(조만전기관개장)언젠가는 출세하리라 기대 했건만 髮毛稍長命漸奇(발모초장명점기)자랄수록 운명이 자꾸만 기구하여 灰劫殘門飜海桑(회겁잔문번해상)오래잖아 상전이 벽해처럼 변했다.
依無親戚世情薄(의무친척세정박)의지할 친척 없고 인심도 각박한데 哭盡爺孃家事荒(곡진야양가사황)부모 마져 돌아가셔 집안이 망했도다 終南曉鍾一納履(종남효종일납리)새벽 종소리 들으며 방랑길에 오르니 風土東邦心細量(풍토동방심세양)생소한 객지라서 마음 애달팠노라
心猶異域首丘狐(심유이역수구호)마음은 고향 그리는 떠돌이 여호 같고 勢亦窮途觸藩羊(세역궁도촉번양)신세는 궁지에 몰린 양같은 나로다 南州從古過客多(남주종고과객다)남쪽 지방은 자고로 과객이 많은 곳 轉蓬浮萍經幾霜(전봉부평경기상)부평초 처럼 떠돌아가기 몇 해던고
搖頭行勢豈本習(요두행세기본습)머리 굽신거림이 어찌 내 본성이리오 口圖生惟所長(구도생유소장)먹고 살아가기 위해 버릇이 되었도다 光陰漸向此中失(광음점향차중실)그런 중에도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가 三角靑山何渺茫(삼각청산하묘망)삼각산 푸른 모습 생각할수록 아득하네
江山乞號慣千門(강산걸호관천문)떠돌며 구걸한 집 수없이 많았으나 風月行裝空一囊(풍월행장공일낭)풍월을 읊는 사랑방은 언제나 비었도다 千金之子萬石君(천금지자만석군)큰 부자 작은 부자 고루 찾아다니며 厚薄家風均試嘗(후박가풍균시상)후하고 박한 가풍 모조리 맛보았노라 身窮每遇俗眼白(신궁매우속안백)신세가 기구해 남의 눈총만 받다 보니 歲去偏傷빈髮蒼(세거편상빈발창)흐르는 세월 속에 머리만 희었도다 歸兮亦難佇亦難(귀혜역난저역난)돌아가자니 어렵고 머무르기도 어려워 幾日彷徨中路傍(기일방황중로방)노상에서 방황하기 몇 날 몇 해이던고..
蘭皐(난고)김삿갓은 이 시를 마지막으로 지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20세에 방랑을 시작한 후로 가족과 연락을 일체 취하지 않았으나 한때 그의 아들 익균을 만나 귀가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거절하고 방랑을 계속했다. 그 후 사실상 마지막 방문지인 전라남도 화순에 들렀던 중 그 곳에서 죽었는데 아들 익균이 부고(訃告)를 듣고 화순으로 달려가 아버지의 시신을 강원도 영월로 운구하여 그 곳에서 안장되었다. 조선후기 방랑시인 김삿갓(1807-1863)이 생전에 사망직전까지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서 6년간 생활한 곳이며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 647번지 창원 정씨의 사랑채 1863년 3월29일 사망) 5억원을 들여 동복면 구암리에 김삿갓 유적지 정비사업을 완료한 화순군은 김삿갓이 1857년부터 1863년 3월29일 사망할 때까지 구암리에 기거했다고 9월9일 밝혔다. 한편 김삿갓의 작품 속엔 동복과 관련한 시가 전해져 온다. 화순군에 따르면 그는 1841년 무등산~장불재~적벽을 지나 동복에 도착해 시를 남겼다.
김삿갓은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 가지 아래에 있고/적벽 강이 깊다더니 모래위에 흐르는구나' 라며 적벽의 아름다운 풍광에 감탄했다. 1850년 정치업이라는 선비의 사랑채에 머물던 김삿갓은 동복 관아의 협선루에서 시상을 얻어 작품을 남겼다. 그 때 썼던 시는 동복면사무소 앞 시비에 남아 있다. 김삿갓은 1857년 정치업 선비의 집 앞에서 쓰러져 반년여동안 머물다가 다시 지리산 등지로 떠났으며, 3년만에 정 선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와 1863년(철종14년) 3월29일 세상을 뜬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동복 구암리 마을 뒷산에 묻혔던 김삿갓은 3년 후 가족들에 의해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마대산으로 이장됐다고 한다.
하늘을 삿갓으로 가린 채 서러운 나그네로서 정처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다고 해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졌다. 전국을 돌며 독특한 풍자와 해학으로 권력을 풍자하고 세상을 개탄해 민중 시인으로 불렸다 이 시는 김삿갓이 방랑 생활 중에 한 농가에서 하게 된 식사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시인에게 멀건 죽 한 그릇밖에 대접 못하는 농민의 어려운 처지를 목격하였을 때 오히려 그 죽사발 안에 거꾸로 비친 청산을 구경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 시인의 기발한 해학은 그 한 예이다
無題 (무제) /김삿갓 (김병연)
四脚松盤粥一器(사각송반죽일기) 네 다리 소반 위에 멀건 죽 한 그릇 天光雲影共排徊(천광운영공배회) 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가 그 속에서 함께 떠도네. 主人莫道無顔色(주인막도무안색) 주인이여, 면목이 없다고 말하지 마오. 吾愛靑山倒水來(오애청산도수래) 물속에 비치는 청산을 내 좋아한다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