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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단편 소설
보고도 못 가는 고향
조 흥 제
나는 가끔 도라산 전망대에 간다. 도라산 너머가 내 고향으로 남방한계선에 들어 있어 사람이 갈 수 없는 지역이다.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이었다. 기차역이 있고 경찰서, 군청, 면 사무소, 금융조합(은행) 등 중요한 기관들이 있지만 이웃에 있는 두루메까지 합하여도 800여호 밖에 안 되는 소읍이어서 장단(長湍)역 혹은 시루리(기차역이 오기 전 지명)라고 불렀다. 가운데 자그마한 동산이 있는데 그 산을 깎아 내고 학교를 지었다. 장단국민학교다. 각 한년 4개 반씩 1600여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큰 학교로 목조 단층이었다. 장단국민학교는 운동회 때는 꼭 비가 왔다. 학교 지으려고 터를 닦을 때 공사 책임자 꿈에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이사 가야 하는데 옮길 데를 못구했다고 했다. 꿈을 깨고 그는 대수럽지 않게 생각하고 공사를 진행했는데 기둥만한 흰 구렁이가 토막나서 죽었다. 그래서 운동회날에는 꼭 비가 오는데 백구렁이가 훼방을 놓아서 그렇다는 전설이 있다.
우리집은 도라산 기슭에 있어 시간이 나면 자주 가서 놀았다. 도라산은 195m의 작은 산인데 근방에 산이 없어 멀리까지 보였다. 북쪽에는 16㎞ 밖에 개성 송악산(488)이 보이고, 서쪽에는 덕물산(288), 동쪽에는 백학산(229), 남쪽에는 길고 푸른 임진강이 보였다. 도라산 정상에는 큰 바위가 있고 그 밑에 절이 있었다. 절 입구에 시원한 석간수가 있어 뛰어놀다 목이 마르면 와서 마시던 샘물이었다.
2000년 김대중 정부시절 남북이 철도를 연결하기로 합의하고 우리는 도라산역까지, 북한은 도라산역에서 철로를 이어가기로 했다. 우리는 약속대로 문산에서 도라산까지 철로를 부설했다. 도라산역 준공 때 김대중 대통령과 삼부 요인들이 참석하여 철도 침목에 축하하는 글씨를 써서 전시하고 그 무렵 한국을 벙문했던 미국 부시대통령의 친필 침목도 있다. 하지만 북한은 약속을 지키지 않아 도라산 역은 관광지가 되었다.
도라산 역에서 도라산 전망대와 제3땅굴, 통일촌을 일주하는 셔틀버스가 있어 도라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정상에는 넓은 광장이 있다. 그 곳의 높이가 150여 m이니 40여 m가 깎여 나간 것이다. 전망대 안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북쪽 모형이 있다. 멀지 않은 곳에 하천이 있는데 사천내라고 하고 동강이라고도 하는 큰 하천이다. 그 곳이 남북의 경계선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름에 학교 갔다 오면 사천내로 멱(수영)감으러 갔었다. 2㎞ 정도 거리다. 다리 위에서 뛰어 내리면 길이 넘는 깊은 곳도 있다.
제3 땅굴은 북한군이 기습하려고 국군 몰래 파 놓은 굴인데 국군에게 발각되어 그 실체가 드러났다. 한 시간에 사단 병력(1만5000)이 통과할 수 있는 규모다. 터널 끝에 다섯 갈래의 통로가 있다. 침투할 때 여러군데로 벌떼같이 쏟아져 나와 국군의 공격을 분산시키게 설계했다. 그런 땅굴이 발견된 것만 네 곳이라고 한다.
도라산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고려에 신라를 헌납하고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경순왕은 도라산에 별장을 짓고 살면서 경주 하늘을 바라보고 ‘경주로 돌아 가고 싶다’고 했다. 그도 사람인데 1000년 사직(社稷)을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특히 세자 마의태자-이 반대하는 것을 뿌리치고 나라를 공짜로 고려에 주었으니 속이 편할리는 없었을 것이다. 경순왕이 죽으면서 시신을 경주에 묻어 달라고 했다. 상여가 장단 고랑포에 이르렸을 때 경주에서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있다고 하여 근방 산에 허겁지겁 묻었다. 그곳이 경순왕릉으로 관광지가 되었다. 사천 내 건너 덕물산은 3학년 때 소풍 갔던 곳이다. 산 위에 마을이 있는데 무당 마을이다. 옆에 최영장군 사당이 있고, 가운데 큰 칼을 어깨에 메고 일어선 관운장의 목상(木像)이 있다. 무속에서는 관운장을 높이 받드는가 보다.
우리는 장단역에서 아버지가 목공소를 차리시고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여동생은 2학년에 다녔다.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갑자기 침범해 와 우리는 당일 피란 나와 임진강을 건너다 사람은 많고 배는 몇 척 안 되어 가족들이 흩어졌다. 밤에 어렵게 강을 건너 이튿날 어머니를 만났으나 아버지는 안 계셨다. 피란 가다 전쟁이 앞서 가 고향에 들어가 북한군 치하에서 살았다. 학생들은 학교에 나오라고 하여 갔더니 공부는 안 가르치고 노래만 가르쳤다. 김일성 찬양 노래, 애국가가 조금 생각난다. 수복 후 아버지에게서 편지가 왔다. 충청도 옥천에 계신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수복되었으니 오시라는 답장을 보냈으나 오시지 않았다.
먹을 양식이 없어서 어머니는 행상을 하셨다. 개성 가서 생필품을 사다가 인근 마을에 다니면서 팔았다. 고랑포 동북쪽에 있는 작은 누님 댁에 많이 갔었다. 우리는 해방되기 전까지 거기서 살았다. 작은 누님은 할아버지들의 합의에 의해서 부모의 동의도 없이 결혼날짜를 잡았다. 어머니는 반대하셨으나 어른들이 결정한 것을 뒤집을 수도 없어 16세에 이웃 마을로 시집 갔다. 큰 누님은 해방되기 전에 일본군 처녀들 잡으러 온다기에 제대로 예식도 치르지 못하고 멀리 시집 갔고, 작은 누님은 해방 후 할아버지들의 계약에 의해서 어린 나이에 시집 갔다. 나와 작은누님과는 6살 차이지만 그 사이에 두 형이 홍역으로 죽어 싸우면서 자랐다. 시집 갈 날짜를 받아 놓고는 ‘내가 시집 가면 누님이라고 불러라.’고 하였다. ‘그래, 누나도 나한테 잘 해야 돼.’ 했다. 싸우고 나서는
“누나 시집 가도 누님이라고 안 부를거야.”
했더니
“부르지 말아라.”
고 톡 쏘았다.
밤낮 싸우던 누님이 하루 아침에 없어지니 한 팔 떨어져 나간 것 같이 허전했다. 꿈속에서까지 보여 ‘누나, 이제 누님이라고 부를게 와.’했더니 활짝 웃었다. 어느 날 건장한 청년이 왔다. 누님의 남편인 매형이라고 했다. 키가 훤칠하니 잘 생겼다. 그만하면 누님을 맡겨도 될 것 같았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하는데 할 말이 없었던지
“우리 옥순이 잘 있어요?”
하고 물었던가 보다. 누님의 이름이 옥순이다. 매형은 누님에게 처남이 그렇게 철이 없더라고 하더란다. 나는 전연 생각나지 않았다.
해방 후 우리는 고향에서 50리 떨어진 장단역으로 이사 갔다. 큰누님 댁이 4㎞밖에 안 되어 자주 놀러 갔다. 사변 후 행상 하는 어머니를 따라 작은 누님 댁에 자주 갔다. 가는 길 가에 부서진 트럭이 있었댜. 북한군의 포화를 맞고 부서진 트럭이다, 6.25 날 새벽 북한군이 갑자기 38선을 넘어 와 국군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했고 북한군은 고랑포 지서에 와서 본서인 장단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38선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니 지원을 바란다고 했다. 본서에서는 자주 있었던 일이어서 사이렌을 불어 비번인 경찰관들을 소집하여 20여 명을 트럭에 태워 보냈다. 중간에 북한군 탱크에서 쏘는 포탄을 정통으로 맞고 트럭은 공중 분해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유가족은 시신 수습도 못하고 피난 가야 했으니 얼마나 울었을까? 수복 후에도 작은 누님댁에 많이 갔었는데 그 때 들려 오는 소식은 중공군이 밀고 내려와 또 피난 가야 한다고 했다. 어느 날 밤에 후퇴하던 국군들이 누님 네 동네에서 자다가 밤중에 짐을 싸 황급히 떠났다. 중공군이 가까이 왔다는 첩보부대의 연락을 받은 것이다.
6․25 사변은 한민족끼리 싸워서 전쟁이라고 하지 않고 사변이라고 불렀는데 외국에서는 한국전쟁이라고 했다. 유엔 산하 16개국이 와서 싸우고 4개국이 의료 등 간접 지원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국에서도 한국 전쟁이라고 공식적으로 부르기로 했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하였으나 38선을 넘어 북진할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공정부가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서 전쟁을 멈출 수도 없어 10월 초 북진을 결정하였다. 그때 서부전선은 미군이 주력이고 한국군이 보조였으나 동부전선은 한국군 단독으로 활동하여 유엔군이 북진을 결정하기 전에 벌써 6사단은 38선 넘어 북한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있었다. 6사단 장병들은 10월27일 압록강에 도착하였다. 사단장 김종오는 찦차를 타고 가다 차가 뒤집혀 턱이 깨졌다. 하지만 다친 몸으로 압록강까지 가서 수통 두 개에 물을 담았다. 하나는 이승만대통령에게, 하나는 육군본부에 보내고 병원으로 갔다. 김종오 장군이 퇴원하여 9사단을 맡아 한국전 최고의 전투인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미군이 군신(軍神)이라고 부르던 장군이다.
유엔군의 북진을 보고 중공군은 밤에 몰래 압록강을 건너 산악지방으로 숨었다. 그들의 군복은 누런 색이고, 안은 하얀 색이었다. 뒤집어 입고 눈 쌓인 산 속에 있으면 눈에 띄지 않았다. 국군에게는 중공군 포로가 잡혔다. 미군에게 보고해도 미군은 첩보부대 정도로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평북 운산에서 밤에 자다가 꽹과리를 두드리면서 벌떼같이 덤벼드는 중공군을 당하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미군들은 차 타고 임진강 이남까지 후퇴했다. 그때 중국 정부는 대만이 중국을 대표하여 공산 중국은 중공이라고 표시했다. 중공은 의용군이라고 했지만 정규군이었다. 걸어서 오는 중공군이 차를 타고 후퇴하는 미군을 따라 잡지 못했지만 한국군은 싸우면서 후퇴했던가 보다.
국군들이 잠 자다가 짐을 싸서 황급히 철수하자 마을 사람들도 피난 가려고 떠들썩 하였다. 동네에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해소기가 있어 기침을 몹시 하여 누워만 있었다. 그 집 가족들도 피난 가야 하는데 할아버지를 모시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두고 갈 수도 없어 안절부절 못했다. 다음 날 아침 그 노인이 행방불명 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찾아보니 임진강 가 20 여m에 이르는 석벽 밑에 노인이 신던 검정 고무신이 있었다. 바위 밑의 물은 깊고 회전하여 거기에 휩싸이면 천하장사도 못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 여름에 장정들도 가지 않는 험지다. 할아버지는 얼음을 깨고 들어 갔다.
누님은 나와 여동생을 불러 ‘너희 집으로 가라’고 했다. 어머니가 집에 계시기 때문이었다. 아홉 살 먹은 여동생의 손을 잡고 점심도 굶고 밤 늦게 집에 오니 우리집에는 피난민으로 꽉 차고 어머니는 안 계셨다. 어리둥절하고 섰으니
“너희 어머니는 붐베 큰 누님네 집에 가시면서 너희들이 오면 그리로 오라고 하셨다.”
고 집이 폭격 맞아 임시로 우리 집에 살던 사람이 일러 주었다. 생전 처음 밥을 해 먹고 거기서 10리나 더 가는 큰 누님댁에 밤 늦게 갔다. 우리는 충청도에 계시는 아버지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때 큰누님은 혼자 있었다. 다른 가족들은 임진강 이남으로 옮기고 누님은 타작한 농산물을 정리하느라 혼자 있다고 했다. 어린 남매도 임진강 이남으로 갔다고 했다. 매형은 누님이 모아 놓은 곡식을 다 나르고 마지막에 누님을 데리고 나올 예정이었다. 이튿날 아침 먹고 나오는데 누님도 뒷동산 고개까지 따라 나왔다. 그때 눈보라가 스산스럽게 날렸다. 모녀는 손을 붙잡고 한참 바라보다가 부등켜 안고 울었다. 나는 안타까워했다. 한시가 급한데 언제 울 시간이 있나. 멀찌감치 서서 떨어지길 기다렸지만 한이 없었다.
“이제 그만 가요. 또 만나게 되겠지, 아주 이별인가 뭐.”
하고 메떨어지게 한 마디 했다. 그러자 모녀는 떨어져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어서 가세요. 아버지 만나면 꼭 편지해야 해요.”
“ 그래, 너도 피난 나오게 되면 아버지 계신 데로 오너라.”
“예.”
“너 아버지 계신 곳 주소 아냐?”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 하동리 마구실.”
“그래 맞다.”
우리가 언덕을 내려와 결빙된 임진강에 들어설 때까지 누님은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이 누님과의 마지막이었다.
임진강 얼음으로 수 많은 피란민이 건넜다. 소에 짐을 잔뜩 실은 피란민이 철교 교각 근방으로 지나다 얼음이 깨지면서 황소가 물에 빠졌다. 발은 물 속에 잠기고 몸은 얼음에 걸쳐 있어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콧김을 씩씩 내뿜으면서 발버둥쳤다. 주인이 다가서자 얼음이 ‘으지직’거리면서 깨지려 해 접근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 ‘어지간히 싣지’하고 주인을 나무랐다. 짐을 너무 많이 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피난민은 가능하면 많은 것을 가지고 나오려다 목숨을 잃기도 하고 죽을 고생도 한다. 전쟁 때에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목숨과 재물, 두 가지를 챙기려다간 다 잃게 되는 것을 많이 보아 왔다.
강을 건너자 피란민들이 논둑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저들이 또 넘어 오면 큰일인데.”
하고 한 장년의 남자가 말하자
“어제 강 건너에 갔었는데 어떤 사람이 미군이 강 이남에 있더냐고 물어서 많다고 했지요.”
하고 옆에 있던 청년이 맞장구쳤다.
“허, 큰일인데.”
그들이 북한 측 선동자들은 아니었는지.
문산으로 나오는 철로 옆 길에 돈이 수 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헌데 돈을 주우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 돈은 붉은 색의 김일성 사진이 들어 있는 북한 돈이었다. 북한에서 피란 나오던 사람들이 대한민국 땅을 밟는 순간 버린 것이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니니 길에는 수 없이 많은 돈이 흩날리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비상시국에 재산이 될 수 있는 것은 금붙이다. 돈은 쓰기는 편하지만 그 화폐가 통용도지 않는 곳에서는 휴지가 된다. 북한 어느 지방 사람은 대대로 보관 해 오던 금괴를 가지고 나와 청주에서 대학교를 세웠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돈을 버린 사람의 심정은 어땠을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유! 그들은 자유를 택한 것이다. 자유를 찾아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건너다 추락하면서도, 흥나부두에서 배를 타려다 바다에 떨어져 죽으면서도, 아는 사람 없는 낯선 타향으로 가려는 것이다.
그 후퇴를 1․4 후퇴라고 한다. 51년 1월4일 서울을 중공군에게 내 주었다고 해서 그런 명칭을 붙였다. 그때 평양 대동강에서는 국군 장교가 수많은 사람을 살렸다. 국군 정훈국 분실장으로 평양에 머물러 있던 선우휘 대위는 유엔군이 대동강을 건너 후퇴한 후 자신이 자란 평양 시내를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돌아보려고 나섰다. 대동강으로 발길을 옮기자 사람들이 철교를 건너는데 미군 비행기가 오더니 다리를 폭격하여 끊어버렸다. 많이 파괴되지 않았던지 피란민들은 위험한 다리 난간에 매달려 건너다 떨어져 죽는 사람도 무수히 많았다. 선우휘 대위는 현장에 가서 그들을 설득했다.
‘여러분, 여러분 앞에는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내 말을 들으면 살고, 안 들으면 다 죽습니다.’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피난민들도 현역 군 장교의 말에는 귀를 기울였다. ‘여러 분, 끊어진 다리를 이읍시다. 힘을 합하면 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흩어져 널빤지, 통나무, 쇠붙이 등 손에 잡히는 대로 가져왔다. 그들 중엔 목수도 있고, 철공도 있고, 별별 기술자들이 다 있어 거뜬히 다리를 보수하여 안전하게 건넜다. 선우휘 대위는 휴전 후 작가겸 신문기자가 되어 단독 강화, 불꽃, 노다지 등 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썼다.
직장 후배네가 평안도 부자였다. 해방 후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저들은 땅을 빼앗고 백리 밖에 나가 살라고 내쫓았다. 후배 아버지는 그들이 보기 싫어서 대한민국으로 오려고 처녀 포대기 솜 속에 돈을 넣고 실로 누벼서 아기를 업고 와 러시아군의 수없이 많은 검문을 받고서도 빼앗기지 않았다. 38선에서 안내자를 사서 대한민국 땅을 밟는 순간 그에게 돈으로 누빈 처녀 포대기를 주었다. 자유를 찾게 해 준 사람에게 전 재산을 서슴지 않고 준 것이다. 자유를 구속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그 소중함을 어떻게 알랴.
북풍한설을 안고 얼마쯤 갔더니 미군들이 피난민의 보따리에 잠자리채 같은 둥그런 쇠붙이를 대 보았다. 거기에 자석 기운이 있었던지 쇠붙이가 있으면 붙었다. 우리 짐도 검색해 보았다. 어머니는 큰 보따리를 이셨고 나는 이불보따리를 지고 왔다. 이상이 없었던지 통과시켜 주었다. 조금 가니 국군들이 같은 방법으로 조사하였다. 우리 짐에 대 보더니 어머니가 이고 가시던 보따리를 풀어 보라고 했다. 어머니는
“쇠붙이가 없는데”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 하시면서 보따리를 풀어 보니 가위가 있었다. 미군이 똑같은 물건으로 탐지하지 못한 것을 국군은 찾아 낸 것이다. 미군은 힘들여 싸우려하지 않는다는 말을 국군들은 수없이 했다. 국군은 한치의 땅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싸우는데 미군은 세 불리하면 차를 타고 후퇴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우리 뒤에 고추장 항아리를 이고 오던 중년여성도 탐지기에 걸렸다. 막대기로 찔러보니 딱딱한 것이 있어 꺼내보니 수류탄이 많이 들어 있었다. 북한군은 피란민을 가장하여 보따리 속에 무전기나 무기를 숨겨 와서 미군의 뒤에다 대고 총을 쏘아 큰 피해를 주었다. 그 후에 피란민을 절대 뒤에 세우지 않았다. 국군들은 그 여자를 한쪽으로 세워 놓고 다른 사람들을 조사하였다. 그 여자는 피난민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븍한군은 미군에게 쇠붙이를 찾아내는 기술이 있는지를 몰랐던가 보다.
그때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작은 누님네에서 집에 왔을 때 어머니는 큰누님네 집에 가셨다고 일러 준 그 아주머니 가족이었다. 두 부부와 어린 딸이었다. 그들은 6.25 때 피난 갔다 들어왔더니 비행기 폭격을 맞아 동네가 부서졌다. 우리가 몇 년 전 그 집에서 살았어서 우리 집으로 임시 거처로 삼았다가 또 피란 나오게 된 것이다. 그 집 가족들과 같이 갔다. 문산 시내에 들어서자 집들은 텅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그 중 좋은 집에서 자려고 들어갔다. 저녁을 지어 먹으려고 하니 땔 나무가 없었다. 그 아저씨와 같이 들에 나가서 논에 쌓아 놓은 볏짚을 들고 왔다.
다음날 서울로 오다가 우리는 예정에 없던 양주 외갓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먼 훗날 어머니께
“왜 그때 바로 아버지에게로 가지 않았느냐.”
고 여쭈어 보았더니
“여자의 몸으로 돈 한 푼 없이 먼 길을 가기가 두려워서 친정에 가서 노자를 얻어 가지고 가려고 했다.”
고 하셨다.
중간에서 날이 저물어 어느 집에 들어가 자고 가자고 했다. 젊은 여자 혼자 있는 집이었다. 우리가 좁쌀로 노란 밥을 하려고 하자 좁쌀로만 하면 깔깔하다면서 쌀을 조금 주었다. 쌀을 넣고 한 밥은 한결 부드러웠다. 그 마을에 후퇴하던 국군들이 들어 있었는데 국군들끼리 싸움이 붙었다. 소대장은 싸움을 말리느라 진땀을 흘렸고, 주인 여자는 천주교 신자였더니 성모상 앞에 합장 하면서 기도했다. 소대장도 천주교 신자라면서 반가워하였다.
이튿날 양주 외갓집에 갔다. 큰 기와집이었다. 큰외숙이 그 마을 면장으로 있어서 잘 살았던가 보다. 거기에 작은 누님과 매형이 와 있었다. 우리를 보내 놓고 바로 나왔다고 했다. 누님에게 어떻게 알고 외갓집에 왔느냐고 물으니 임진강 건너에 8촌 오빠가 살아 거기 갔더니 먹고 살기가 어렵다면서 네 외삼촌이 잘 살으니 거기로 가라고 하여 왔다고 했다. 얼굴도 모르지만 생질조카딸이라고 하니 외삼촌은 받아 주었다.
어머니는 수원백씨로 양반이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 백인걸(1497~1579)선생의 후예로 400년 이상 그 지방에서 살아서 일가도 많았지만 가난하게 살았다. 어머니는 1910년 태어나시어 13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어렵게 자라 19세에 30리 떨어진 우리집으로 시집 오셨다. 신혼 초에 남편은 서울로 돈 벌러 가고 완고한 시부모와 극성스런 시동생 사이에서 마음 고생이 많으셨다. 부모 형제가 얼마나 보고 싶고 고향산천이 그리웠으랴. 어느날 밖에서
“이리 오나라.”
하는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친정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시부모가 계시니 뛰어 나갈 수도 없어 가슴만 태우셨다. 결혼한 지 3년만에 큰딸을 업고 친정에 가셨다니 지금 신부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며칠 후 큰 외숙은 작은 외숙에게
“나는 면장으로 있었고 아버님이 연로하시기 때문에 급하면 못갈지도 몰라 용인 친척 댁으로 먼저 갈터이니 너희들은 급하면 오너라.”
고 하였다. 작은 외숙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어머니와 누님도 작은 외숙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했다. 매형은 큰외숙 댁 짐을 고개 너머까지 바래다준다고 가더니 오지 않았다. 그들의 권유로 따라 간 것이다.
어느 날 국군 두 명이 꿩을 들고 왔다. 어머니가 볶아 주었더니 맛있게 먹으면서
“날아가는 놈을 카빈총으로 쏴서 잡았는데 단번에 맞추었다.”
고 어깨를 으쓱했다. 국군이 아직까지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10여 호 마을에는 젊은 남자들은 다 나가고 부녀자들과 노약자들만 있었다. 언제 중공군이 들이닥칠지 몰라 여차하면 나가려고 보따리를 싸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을 실향민이라고 한다. 그들은 북한 멀리 고향을 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임진각 망배단에 가서 고향 하늘을 보고 명절때면 제사를 지낸다. 하지만 우리 장단군민들은 눈 앞에 고향을 두고서도 가지 못한다. 장단이라는 군명도 없어졌고 땅도 파주군, 연천군, 북한에 2개 군에 쪼개 주고 사람도 살지 못하는 비운의 땅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단초등학교 출신들은 도라산 전망대에 올라 다시 산이 된 학교 터를 보고 교가를 불렀다.
높이 솟아 푸른 선 저 도라산
이 맑은 정신을 몸에 지니고
험한 파도 헤치며 닦아 나가서
영원한 이 마을에 일꾼이 되리
맑고 길이 흐르는 저 임진강
……
여기까지 부를 땐 목이 메어 정상적으로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전에는 50여 명 모이더니 이제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그 모임도 중단되었다
나도 몸이 불편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도라산 행을 결행하였다. 도라산 전망대에 서서 내려다 보고 거기서 살때를 하나하나 그려 본다. 마을 넓은 마당에서 친구들이 딱지칙, 구슬치기, 자치기를 하면서 더들썩하던 장면이 떠오르고, 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점심시간에 뛰어 놀다 시작 종을 땡땡 치니 교실로 썰물 밀려 가듯 뛰어 들어가고 넓은 운동장은 적막하더니 다시 산이 되었다.
조흥제 약력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저서
삶의 여울에 서서, 광화문의 가을, 연탄의 공 외 다수
수상
소월문학상, 한국문인상, 탐미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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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비운의 땅, 절절한 가슴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소설이라고 썼는데 서툴러서 수기 냄새가 납니다.
그리운 고향을 향한
계속되는 희망을 봅니다
전철이 계통 되고 그리 오래지 않아
임진각역에서 도라산 역에 도착할 때의 그 마음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오후 시간 도라산역에서 견학을 위해
우리 부부 두 사람 때문에 또 관광버스 한 대 내어준
관계자분들 너무 감사했어요
임진각
도라산
장단콩
파주
모두 저도 그리운 이름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채린 선생도 가셨었군요. 장단콩으로 만든 제품은 맛있답니다. 작은 누님이 거기 살아 된장은 대 놓고 주는데 맛있어요.
단편소설 1) 조흥제 자문위원님, 안녕하세요
소중한 단편소설을 잘 읽었습니다
늘 건행하세요~~ㅎ
조흥제 자문위원님,
귀한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 하세요!
소설이군요. 정신없이 내리 읽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고향을 떠나시고 다시 갈 수 없는 마음 어찌 다 헤아릴까요.
우리의 비극을 실감나게 그려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