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차일드는 카자르인이 아니다 국제유태자본론 연구회 소식 / 길을걸으면생각난다
2011/02/28 01:57
http://blog.naver.com/miavenus/70103966544
로스차일드는 아슈케나지이지만, 카자르인이 아니다.
안박 : 로스차일드가 영국에 갔을 때도 세파르딤계와 아쉬케나지가 따로 놀았고 로스차일드는 아쉬케나지계 시나고그에 다녔다고 알고 있어요, 따라서 로스차일드를 세파르딤계라고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보여집니다.
인드라 : 글 고맙습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안박님이 오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인드라가 올린 글을 봅니다.
"카르타고 유태인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세파르딤 유태인이다. 스페인어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둘, 아슈케나지 유태인이다. 독일어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허나, 혈통적으로는 이들은 동일한 카르타고 유태인들이다."
다시 말해, 둘 다 혈통적으로는 카르타고 유태인인데, 단지 스페인과 독일에 살고, 그 지역 언어와 결합된 방언을 사용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헌데, 안박님이 인드라가 로스차일드를 세파르딤계라고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왜일까요. 그런 주장은 인드라가 어느 댓글에 남긴 것을 안박님이 기억하고 말한 것입니다. 헌데, 그 맥락을 살펴보셔야 하는데, 거두절미하니 오해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음모론에서 주장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로스차일드는 아슈케나지 = 카자르인 = 가짜 유태인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인드라 주장은 로스차일드는 아슈케나지이다. 예서, 아슈케나지란 독일에서 살고, 독일어 방언을 구사한다는 의미 정도이지, 혈통적으로 카자르인이다,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서, 로스차일드는 카자르인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아슈케나지나 세파르딤이나 모두 카르타고 유태인이기에 카르타고 유태인이고, 그 성향으로 볼 때 세파르딤이 보다 전형적이니 그런 구분이라면 세파르딤이 더 가깝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해서, 역사적으로 지금껏 국유본 주도 세력 핵심은 카자르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면, 안박님이 이런 주장을 하시게 된 연유가 어디에 있을까를 잠시 고민해보았습니다.
혹 인월리에서 읽은 글이 힌트가 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사진은 우리 말로 쉽게 기원전 722년부터 시작된 디아스포라를 말하는 것인데요.
아시리아의 공격으로 BCE 722년 (여기서 BCE란 BC과 같은 것인데, 종교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에 북쪽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남쪽 유다만 남게 되어 멸망한 이들이 이후 세계로 떠돌았다는 그림을 표시한 것입니다. 기원후 8세기가 아닙니다.
예서, 인드라가 주목한 것은, 유태인들이 남쪽 유다가 남았음에도 이토록 중동을 떠나 세계를 떠돌 족속인가에 회의를 품었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인드라가 주목한 루트는 남쪽 루트입니다. 한국전쟁 때 피난민은 어디로 피난했습니까. 남쪽입니다. 그처럼 남으로의 피난을 추론할 수 있겠습니다. 남쪽 유다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면, 이들은 제 3의 망명지로 향했겠지요. 그들 중 하나는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카르타고로 갔고, 다른 하나는 아라비아, 예멘으로 해서 이디오피아로 갑니다. 여기서 인드라는 왜 알렉산드리아이고, 카르타고인가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또한 그렇다고 북쪽 이주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지중해 지역의 획기적인 유태인 인구 증가 원인을 분석하다 보니 아무래도 포에니 전쟁 외에는 다른 요인이 없었던 것입니다. 허나, 여기에는 많은 실증적 자료들이 필요합니다. 인드라가 이 분야에만 전력을 기울인다 해도 십수년 이상 걸립니다. 더군다나 국유본이 암묵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거론을 원치 않는다면, 더 어려운 분야이기도 합니다.
해서, 이 문제는 둘로 나눠집니다. 하나, 이태리에서 독일로 올라간 이들은 가나안에서 터키를 거쳐 그리스, 이태리로 해서 올라온 이들이다. 해서, 카르타고 유태인보다는 순혈 유태인에 가깝다. 둘, 물론 그리스 노예들이 로마에서 환영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전자의 설명은 금융 지식을 지닌 그리스 노예들이 유태인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인드라 추정과 대립된다. 중동에서 많은 이들이 상인 본능을 지녔지만, 페니키아(카르타고)인들이 대표적이다. 수메르인도 상업에 적극적이었으나, 적어도 유태인이 아니다. 목동과 노예 생활 뿐이던 유태인들이 예수 시절에 급격히 상인 이야기가 많아지는 것을 인드라는 주목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성경 기자들이 성경에 기록할 수밖에 없는 당대 역사적 격변을 암시적으로 이야기했던 것이라 보고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카르타고인들의 대규모 유대교로의 개종인 게다.
해서, 정리하면, 하나, 당대 여건상 카자르인의 독일을 포함한 서유럽 진입을 설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동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둘, 네덜란드 뿐만 아니라 서유럽 전반의 유태인 인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셋, 이질적인 유태인 집단간의 교합이 보고된 사례를 아직 접하지 못했다.
다만, 이를 전제하고, 안박님이 말한 시나고그 부분은 인드라가 접하지 않은 부분이니 안박님이 출처와 자신의 주장을 좀 더 많이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점은 귀담아 듣겠습니다. 참고로 유태인들은 파벌이 굉장히 강합니다. 아도르노가 유태인이란 개인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개인과 가문 위주입니다. 해서, 유태인들은 저마다의 랍비를 두고서 예배를 본다고 알고 있습니다.
안박 : 세파르딤과 카자르 유태인은 제가 알고 있는 바도 그러하지만 아쉬케나지는 좀 애매합니다. 렘블란트 당시 네덜란드 세파르딤이 만명에 불과했어요. 다른 지역보다 많은 스페인 이주자들이 살던 곳이 네덜란드인데 그 정도였던 거죠. 카자르유태인들이 동유럽으로 퍼져 들어간 건 몽골 침입으로 추정한다던데 일리 있다고 생각됩니다. 전에 로만틱 가도를 따라 이태리 유태인이 독일 지역으로 갔었을 거라고 하신 말도 생각나는데 물론 있었겠지만 아쉬케나지의 주류는 카자르였을 것같아요. 로스차일드가 네덜란드에서 교육받았다는 것이 그들이 세파르딤계엿을 것의 근거가 되기에는 좀 미약하지않나 싶어요. 또 스페인 이슬람의 세파르딤으로 재상이었던 인물이 카자르의 유태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서로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교류는 없었던 것을 알 수 있어요. 아쉬케나지엔 세파르딤이 섞여있었지만 메인은 카자르였을 것이다라고 생각됩니다.
인드라 : 안박님 말씀을 정리하면, 세파르딤이 쪽수에서 소수이기 때문에, 다수인 카자르가 메인이었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를 통해 로스차일드는 아슈케나지일 뿐만 아니라 카자르 혈통이 많이 개입되었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허나, 단지 인구수만을 가지고서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민족도 아니고, 유태인을 이야기하는데, 근거가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 유태인이 어느 혈통이든 불문하고 다 합쳐서 오늘날 천칠백만 명 정도되는데, 이들이 삼억 미국을 주도하고 있고,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 점에서 국유본론은 좀 더 엄밀하게 보자면, 현재 지배하고 있는 최상층은 유태인이 아니라 록펠러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메인이란 쪽수가 아니라 실제로 세계를 경영할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고, 그 만 명에 불과한,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네덜란드 유태인들이 영국혁명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영국 경제를 장악했고, 미국 초기 식민지 건설에서 뉴욕이란 명칭을 만들 만큼 큰 힘을 발휘하였으며, 루즈벨트 대통령 등 두 명의 대통령과 초기 연방준비은행 이사를 배출하였습니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을 빼고도 말할 수 있는 대목이 이 정도입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있겠습니다. 같은 유태인끼리 결혼하다 피가 섞이다 보면 카자르 혈통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겠느냐 이런 것이겠지요. 이것은 인드라가 주장하는 바가 아니라 안박님이 주장하는 바이므로 이런 점에 대해서 안박님이 보강해서 주장하시면 좋겠습니다. 출처도 같이 밝혀주시구요.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인드라 생각은 이렇습니다. 12세기부터 18세기까지는 오늘날 서유럽이라 부르는 지역에서 유태인이 굉장히 탄압받던 시절입니다. 영국 등 각 지역에서 추방령이 떨어지던 시기입니다. 이런 시기에 카자르인이 뭐 줏어먹을 것이 있다고 서유럽으로 기어들어오겠습니까. 지금과 달리 당대에는 일부 자유도시를 제외하고서는 이주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을 때입니다. 네덜란드 유태인 수가 적다고 하셨는데, 다른 서유럽 유태인 수도 굉장히 적었습니다. 예외적인 지역은 딱 하나입니다. 바로 폴란드서부터 러시아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19세기말 20세기초 미국으로 대거 이민한 유태인들 거의 절대 다수가 폴란드 출신이거나 러시아 출신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런 착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2차대전 때 유태인이 육백만 명 학살당했다, 이런 루머 때문인데요. 인드라가 이 대목에서 현재까지 파악한 바는 많아야 육십만명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히틀러의 인종청소를 무죄로 여기거나 과소평가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보지만, 국유본이 자신의 목적에 의해 뻥튀기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것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해서, 이러한 생각으로 중세에는 유럽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니, 그만큼 유태인도 많을 것이다, 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아시아와 달리 유럽은 인구 수가 매우 적었습니다. 하나, 지금과 달리 이전 유럽은 굉장히 추웠습니다. 십자군 전쟁 무렵 잠시 따뜻했던 때를 제외하고서 19세기 전반까지 사람 살기 어려울 정도로 추웠습니다. 둘, 페스트 등 각종 질병이 창궐하여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셋, 끊임없는 종교 영주 전쟁으로 인구가 급감했습니다. 이래서 역설적으로 유럽에서는 인권이 상대적으로 중시되었던 것입니다. 하도 죽어서 사람이 귀하니까.
이런 상황에서 로스차일드가 살던 프랑크푸르트 게토 인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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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대공국 인구 다 합쳐 삼십만명입니다. 오늘날 인구 면에서 제 2의 도시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프랑크푸르트시가 인구만 육십여만명인데, 대공국 인국에 비해 절반입니다. 허나, 그 내용을 봅시다. 프랑크푸르트 대공국은 프랑크푸르트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맑스 탄생지인 트리어를 포함해서 7개 지역을 통합한 것입니다. 존속기간이 나폴레옹 시대인 1810년부터 1813년입니다. 해서, 칠등분하면 약 사만명이지만, 아무래도 도시에는 더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므로 그렇지는 않겠지요. 해서, 넉넉잡고, 십만명으로 잡아도, 과연 십만명의 도시에서 기독교인의 적대자인 유태인을 1/10 이상으로 받아들였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손자병법에 보자면, 열 배 이상의 우위를 가져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동양적인 내용이지만, 인간 행동 양식을 보편적으로 드러낸다고 본다면,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만 명 이하의 유태인 인구가 있었을 것이다, 라고 추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서, 봅시다. 전후 유태인 인구는 유럽에서 가장 안전하고 로스차일드가 살던 영국에서조차도 삼십오만명에 불과합니다. 당시 영국 인구는 사천칠백여만명. 유태인 인구는 영국 전체 인구의 1%가 안 됩니다. 영국도 이러니 다른 유럽 국가는 더 하겠지요? 그렇다면, 독일은? 육천육백여만명 중 유태인은 팔만 오천명. 0.01%에 육박하는군요. 이차대전 때 모두 학살되어서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허나, 서유럽 지역들을 두루 살펴보았을 때, 각국에서 유태인 비율이 차지하는 것은 대체로 0.3~0.5% 사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영국처럼 유태인 중심도 아니면서 유럽 대륙에서처럼 박해를 받지 않은 아일랜드 지역을 고려했을 때 말입니다.
해서, 프랑크푸르트 공국이 삼십여만명이라면, 이 지역에서 살았던 유태인 수는 많게는 1%인 삼천여명에서 적게는 0.3%인 천여명 정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헌데, 유럽에 가본 분들은 알겠지만, 특정 동네를 천여 명의 동네로 만들었다면, 아파트도 아닌 만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입니다.
독일의 대표적인 게토 지역인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은 12세기부터 유태인들이 정착했다고 합니다. 이들 초기 유태인들은 몽고 침략과 무관합니다^^!
해서, 인드라 추론은 설사 극히 일부의 카자르인이 18세기에 극히 일부 카자르가 서유럽의 종교전쟁 탓으로 다소 자유로워진 상황에서 서유럽으로 잠입하더라도 이 시기 같은 유태교인이라 해서 쉽게 합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봅니다. 아직도 여러분이 잘 모르는데요. 이 시기 영주의 권한이 막강했을 뿐더러 종교적 엄단도 굉장했습니다. 이주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을 뿐더러 종교적 이단자들은 엄하게 처벌당하는 시대였습니다. 무단이탈하면 십중팔구 사형을 당합니다. 이걸 감수하고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이주한다?
특히 이는 유태인 기질과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개인주의와 가족주의를 매우 중시해서 같은 유태인이라고, 같은 유태교라고 화합하지 않습니다.
셋, 다음으로 언어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안박님 생각대로 독일에 카자르인이 많이 진출했다면, 그들이 메인이었다면, 이태리어에서 온 게토이니, 뱅크이니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대표적인 예로 체코 프라하를 들 수 있습니다. 이 프라하에는 5세기부터 유태인 정착촌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이 정착촌에 대해 게토라고 명칭을 부여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입니다. 정확히는 이태리에서 게토라고 한 이후라고 합니다. 인드라가 이 지역을 방문한 바 있습니다. 인드라가 유럽에서 가장 행복하게 지냈던 곳이기 때문에 잘 압니다. 만일 전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인드라가 첫번째로 태어난 곳은, 프라하요, 두번째는 바르셀로나이며, 세번째는 런던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정도로 참 마음에 드는 도시였습니다.
하면, 5세기에 아직 유대교로 개종하기 전인 카자르인이 오기에는 거리가 멉니다. 징기스칸 정벌로 한참 이후입니다. 다만, 어떤 유대인 가족 하나가 이 지역에 좀 살았나 봅니다. 유태인들은 이런 것 하나도 놓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고, 다들 좀 역사적으로 뻥을 치는 편이잖아요. 대표적인 예가 한국 족보입니다. 대체적인 한국 족보는 징기스칸 침입 이후에 활성화됩니다. 오늘날 보수적으로 통용되는 한국 족보와 달리 그 초기에는 침략자 원나라 족보와는 다른 한국의 전통을 내세우기 위한 독립군 개념이 한국 족보였습니다. 그 덕에 어지간하면, 다들 통일신라 왕씨 성인, 김씨를 내세운 것입니다. 물론 이는 원나라가 멸망하고 조선시대가 성립하니, 조선시대 세도가 위주로 족보가 재편되었을 것입니다. 즉, 가라 족보를 썼지만 조선왕조에 협력한 성씨는 보존하고, 가라 족보를 썼음에도 조선왕조에 대든 성씨는 삭제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유태인 사이에서도 일어났겠지요. 보편적인 현상이니까.
하여간 중요한 건 명칭입니다. 이것이 유태인 스스로 게토나 방크라고 부르지 않았다 해서 문제삼을 수 있는데, 인드라는 정반대인 것입니다. 즉, 당대 서양사회가 유태인 풍습에 대해 게토나 방크라고 불렀던 것은 그만큼 그 기원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국유본론 연구회 카페에는 다양한 기원을 지닌 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드라를 긍정하는 이들에 대해 적들은 인드라빠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당대 유태인 중에는 백번 양보해서 카자르인 혈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허나, 당대 서양 사회에나 서양 당국은 이들을 이태리에서 유래한 족속들로 보았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인드라는 최소한 카자르인이 아닐 것이라고 봅니다. 이들을 순혈 유태인으로 보느냐, 카르타고 유태인으로 보느냐 두 가지인데요. 예서, 인드라는 순혈 유태인이 장사 기질이 없었다는 점을 내세워 카르타고 유태인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안박 : 카르타고 유태인에 대하여도 좀 의견을 달리합니다. 이슬람 전성기에 바빌론이 그들 경제의 수도였고 그곳이 유태인의 본거지였으며 나름의 사법 종교적 독립을 누리며 자치를 누리고 있었죠. 이슬람이 스페인을 점령하자 기독교도들을 다스리는데 유태인이 많이 활용되었고 그곳의 800 년간 유태인들은 역사상 최대의 황금기를 누렸어요. 바빌론과 바그다드의 유태인들은 대거 스페인으로 이주하게됩니다. 이제 유태인들의 중심은 스페인이 된 거죠. 카르타고의 유태인이나 다른 산재했던 소수의 유태인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메인은 바빌론,바그다드 유태인이 스페인에 오면서 그들이 세파르딤의 주였어요. 물론 카르타고 유태인들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8~9 세기 당시 유태세계의 중심은 바빌론과 바그다드였다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인드라 : 오늘날 유태인들은 특정 지역에 몰려 삽니다. 심지어 카자르인 본산이라는 러시아에서도 유태인들은 도시에 주로 삽니다. 이런 이유로 인드라는 복어 계획이다, 신복어계획이다 하는 따위의 유태인 만주이주설을 부정합니다. 한마디로 헛것이고, 친일매국수구민주당 놈들이나 생각하는 망상이고, 국유본 따까리 병신색희 일본왕 따위나 꿈꾸는 프로젝트인 겁니다.
중세의 중심이 중동이나 중국이라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황금기를 누렸습니다. 그렇다면 반문합니다. 님의 말대로 바그다드가 중심이었다면, 그런 중심에 있던 유태인들 중 핵심그룹이 그들로 보았을 때, 변방인 스페인으로 왜 이동합니까. 이에 대해서 안박님의 설명은 근거가 부족합니다. 다시 말해, 유럽에서 미국으로의 유태인 이주를 고려할 만큼의 원인을 제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라면, 안박님 설명이 맞다면, 그 누구가 본사인 바그다드에서 지사인 스페인으로 전보 발령을 자청하겠습니까.
인드라 생각은 이렇습니다.
하나, 스페인의 유태인에 관한 것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 어차피 그리스로마 문명에 대항하는 성격의 유대교 신앙이었다면 8세기 이슬람 신앙이라면 일부 사람들은 저물어가는 유대교에서 떠오르는 회교도로 개종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이슬람 지도자들이 다른 종교에 비해 유대교에 관용적이지 않았나 싶다. 둘, 일부는 설사 그렇더라도 이슬람교 창건 이전 약 육백여년을 유대교를 믿으며 살아왔다면 이 전통을 쉽사리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둘, 포에니 전쟁 당시 본거지인 카르타고 이외에 가장 격렬하게 로마와 싸운 곳은 어디입니까. 스페인 지역입니다.
셋, 그럼에도 왜 국유본은 이 세파르딤 스페인 루트를 숨기려 하면서 대신 아슈케나지 카자르 루트를 오늘날 강조할까. 이는 국유본 현 권력이 빅터 로스차일드에서 데이비드 록펠러로 바뀌었기 때문이 아닌가 이렇게 보고 있다.
안박 : 또 이스라엘의 대부분은 아쉬케나지에요. 여기서 세파르딤은 소수이고 경제적 하류라고 합니다. 이들 세파르딤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스페인 출신 마라노가 아닌 거의 원주민 유태인을 세파르딤으로 분류하는 것 같아요. 로스차일드가 이스라엘 건국의 실질적 지도자였는데 그들의 많은 희생 끝에 이스라엘이 이루어졌고 아쉬케나지가 메인이되는 나라가 건설되었어요. 그런데 그를 세파르딤으로 분류하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구요.
인드라 : 안박님이 이스라엘 정치에 무식(?)하시다 보니 상기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인드라 과거 글, 한단고기는 동아시아판 시온의정서이다, 라는 글을 정독하시길 부탁드립니다. 하고, 인드라가 이번 기회가 확실하게 논란에 종지부를 찍겠습니다.
님이 예서 말씀하시는 세파르딤은 정확히 말하면 세파르딤이 아닙니다.
미즈라히 유태인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이들을 보통 중동, 이스라엘, 북아프리카에 사는 이들로 정의할 수 있으나, 인드라는 색다르게 규정한다. 유럽인종과의 혼혈을 멈춘 카르타고 유태인 종족을 미즈라히 유태인으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기존 세파르딤 유태인들은 스페인 추방령 이후 크게 두 갈래로 향했다. 하나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반면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헌데, 그 고향이 예루살렘이었나. 로마도 멸망한 때에 왜 이들은 예루살렘보다는, 카르타고인들의 고향으로 짐작되는 곳으로 각각으로 흩어졌을까.
오늘날 스페인 추방령 이후 바그다드로 돌아간 이들 중 크게 성공한 이들은 고작해야 로스차일드 도움을 받은 사순그룹 정도 뿐이다. 대다수 유태인 연구가들은 스페인 추방령으로 북아프리카나 중동으로 돌아간 다수는 기존 중동인들에 뒤섞여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보고 있다.
오늘날 이 연구가 매우 중요하다. 세파라딤과 미즈라히를 나누는 배경 말이다. 왜 세파라딤은 성공하고, 미즈라히는 실패했는가. 이는 고대사에서 디아스포라로 남하하여 카르타고로 간 이들은 성공하고, 예멘으로, 끝내는 이디오피아로 간 자는 결과론적이지만 왜 실패했는가 이런 질문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인 본능도 중요하지만, 지정학적인 요인이 상당히 중요함을 의미한다 하겠다. 같은 값이면, 지정학적 요인이 작동한다 할 수 있겠다. 같은 호남 출신이라도 해안 출신의 호남인들이 친일매국수구민주당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우연이겠는가.
이제 정리하자.
따로 아슈케나지에 대해서는 정리하지 않겠다.
세파라딤만 정리하자.
세파라딤, 이들은 오늘날 누구인가. 혈통적으로는 유럽인과 혼혈하여 겉보기에는 유럽인과 다를 바 없는 족속이다. 반면 미즈라히는 자기 전통을 고수하다 보니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강조한다면, 상기한 그림대로이다.
만일 당대 예수 초상화를 그렸다면, 단연코 전자 얼굴의 예수일 것이다. 이것이 미즈라히이다.
허나, 피가 많이 섞이면 어떻게 되나? 후자 얼굴의 예수가 된다.
이런 암셀 마이어 로스차일드가
빅터 로스차일드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세파라딤 유태인들은 유태인 자료들에 근거하면, 약 백오십만에서 이백만명입니다. 그럼에도 인드라는 왜 이들 세파라딤 유태인들을 백만명 정도로만 보고 있습니까.
이는 이스라엘, 프랑스, 미국, 아르헨티나, 캐나다, 브라질, 터키 등 주요 7개국 인구 합계가 약 백만명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라파딤 유태인들은 그 겉모양 때문에 아슈케나지 유태인으로 취급받기도 하고, 그 뿌리로는 미즈라히 유태인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
중요한 건 무엇인가. 그들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정보가 대중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부자가 겉보기에는 가난한 척구는 것과 같다.
물론 황제 록펠러의 정보는 자세하게 언급될 수 있다. 이는 동서고금 역사에서 확인된다. 반면 귀족들의 보고들은 드물다. 최근 리비아 사태 이전까지 리비아 각 부족에 대해 우리는 몰랐으며, 그 부족 귀족들 현황도 알기 힘들었다. 문제는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핵은 황제 록펠러가 아니라고 여기는 경우이다.
가다피가 아직까지 리비아의 핵이듯, 국유본 세상에서 핵은 여전히 록펠러이다. 허나, 가다피가 무너진 뒤 우리는 대안을 고민하고 있다. 이때 과도기적으로 꼭 등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국유본이다. 누군가를 목 조르면서 언제까지 할 거야, 라고 묻는 그룹. 이것이 이 글 포인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