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다대포(多大浦)를 구슬피 떠도는
임란진혼곡(壬亂鎭魂曲)
[제5회]
왜적의 침략을 대비하다
1
다대포영은 원래 장림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산포절제사영 휘하의 만호영(萬戶營)에 불과할 만큼 그 규모도 작았다. 그러나 다대포지역이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섬과 직선거리로 불과 일백이십 여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일찍이 왜구의 출몰과 그들로 인한 노략질이 잦았다. 몇 년 전부터 왜국의 침략기미를 전해들은 조선 조정은 3년 전인 1589년 2월 다대포영을 진(鎭)으로 승격하면서 지금의 다대포구 근처로 자리를 옮기고 다른 진보다 2배나 많은 수군들과 병선들을 배치하여 경상좌수영의 관할에 속하게 하였다.
그로써 다대포진은 부산포진 서평포진(西平浦鎭) 포이포진(包伊浦鎭) 개운포진(開雲浦鎭) 두모포진(豆毛浦鎭) 서생포진(西生浦鎭) 등 경상좌도의 7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후 다대포진은 군사전략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평안도 북경(北境) 압록강변의 만포진(滿浦鎭)과 함께 조선에서는 단 두 곳 밖에 없는 수군전문무장고을로 지정되었으며 통수자(統帥者) 또한 격상하여 정3품 당상무관(堂上武官) 절충장군이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로 부임했다. 이는 동래도호부 부사와 동급임은 물론 지휘계통에 있어서 직속 상급기관인 경상좌수영의 수사와도 동급이었으니 그만큼 다대포진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할 것이다.
다대포진첨사는 평림리 대티리 목장리 감천리 독지리 장림리 다대리 등 7개의 만호부락을 통치했으며 그 외에 별도로 목장리 군마사육장을 관리하는 감목관의 역할까지 겸했다.
2
나는 압록강과 인접한 함경도 변방 회령부(會寧府)에 1년여 부사로 근무하다가 1592년 임진년 1월23일부로 임금의 교서(敎書)를 받들고 다대포진의 수군첨절제사 즉 첨사가 되어 다대포진으로 옮겨왔다.
그때 처 권화옥(權花玉)과 소실(小室) 만경이 그리고 만경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열두 살 난 아들 경섭(慶燮)이와 열 살 난 딸 소련(素蓮)이 등 직계가족 외에도 충직한 심복 서만복과 하인 돌박이 막쇠 흔줄이, 그리고 하녀 섭섭이 어동이 삼실네 등을 대동하였고 며칠 후 제주에서 건너온 이복동생 윤흥제와 그의 딸 윤어진이 다대포진영을 찾아와 합류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온 식솔들이 다대만에 펼쳐진 황금빛 백사장하며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수많은 섬들의 모습 그리고 온갖 철새들의 군무 등 그 아름다운 정경에 넋을 빼앗기다시피 했다. 그간 우리가 거쳐 온 함경도나 평안도 변방의 풍경들이 하나같이 회색빛 일색으로 우중충했다면 다대포의 풍경은 넋을 빼앗기기에 족할 만큼 청록(靑綠)의 영롱한 빛깔인 것이다.
아이들은 한동안 다대포 개펄에 나가 조개도 줍고 게도 잡았다. 그리고 백사장에서 모래성을 쌓거나 철새들의 비상을 구경하며 해가 저물도록 놀다왔다.
“바다가 신기해요. 썰물 땐 조개와 게가 엄청 많구요, 밀물 땐 바닷물이 겁나게 들어와요.”
경섭이나 소련이는 바다를 처음 봤기에 마냥 신기하게 여겼다. 조개와 게를 잡는다며 온종일 개펄을 뒤지다보니 집에 돌아올 땐 온몸이 뻘흙으로 칠갑을 했다.
내가 다대포진영을 처음 둘러봤을 때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첨사청 뒤뜰에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장작들과 장정 둘이 껴안아야 그 둘레를 감싸리만큼 커다란 독 1백여 개가 가지런히 줄을 지어 놓여있는 장면이었다. 얼마나 많은 나무들을 베어다가 장작으로 팼으면 긴 겨울을 나고도 장작이 그리 많이 남았다 할 수 있겠으며 그 많은 독들은 어떤 연유로 관사도 아닌 청사 뒤뜰에 그렇게 놓여있는지 그 까닭이 궁금했다.
부사맹(副司猛) 박형신(朴衡信)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다대포진영내에는 벌채가 일절 금지된 터라 땔감이 늘 부족하옵지요. 미리 많은 장작을 쌓아놓은 것은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함이옵니다. 그리고 큰 독들은 자고로 멸치젓이 다대포의 특산물인지라 해마다 진상품으로 한양에 올려 보낼 멸치 등의 젓갈을 삭히기 위해 담아두는 것이옵니다.”
“전임첨사들이 참으로 부질없는 짓을 했소이다.”
나는 박형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쌓여있던 장작들을 모두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고 독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남김없이 나누어주었다. 장작을 얻어가는 백성들은 모처럼 화력이 좋은 땔감을 얻게 되었다며 좋아하였고 독을 얻어가는 백성들도 젓갈을 삭힐 수 있는 큼직한 독을 얻었다며 좋아들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임첨사들은 장작과 젓갈을 팔아 상당한 부수입을 올렸다. 그 때문에 상당수의 수군들이 훈련보다는 벌목에 동원되었고 선주들로부터는 상당량의 멸치 등을 상습적으로 상납을 받아온 것이다.
3
나는 다대포진첨사로 부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송상현 못지않게 왜국의 움직임이 의외로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무성하게 들려왔던 왜국의 침략에 대해 막연하게 느껴왔던 불안감이 현실로서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처음 한동안은 속았다는 생각에 마치 천 길 낭떠러지로 내몰린 기분에 휩싸였으며 매사 의욕이 떨어져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자포자기상태에 빠져 골을 싸매고 드러누웠다. 그 모든 정황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에 가슴을 짓누르듯 극도의 불안감이 엄습했고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맨 발등에 떨어진 뜨거운 불똥이었다.
다대포진첨사로 부임한지 열흘이 지났다. 끝 모를 나락에 빠져 허덕이던 심신을 겨우 수습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먼저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어떤 것들인지 그것부터 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해가 뉘엿해진 저녁 무렵 조방장(助防將) 서필공(徐弼孔)과 부사맹 박형신을 비롯하여 우위장(右衛將) 최석근(崔錫根), 좌위장(左衛將) 박개연(朴价連), 단련판관 이익제, 종사관(從事官) 허언개(許彦蓋), 부장(部將) 권수덕(權水德) 박만세(朴萬世) 송전원(宋箭元) 등 휘하의 주요참모군관들과 서평포(西平浦) 만호인 좌초관(左哨官) 구세휘(具世輝), 서평포진(西平浦鎭) 권관(權官) 조을석(趙乙石) 그리고 평림리 대티리 목장리 감천리 독지리 장림리 다대리 등을 다스리는 일곱 만호(萬戶)들까지 모두 서헌 사랑채로 불러들였다. 3간 남짓의 사랑채는 스무 명 가까운 사람들로 붐볐다.
“첨사영감, 회의라면 넓은 아헌(衙軒)에서 하질 않고 굳이 서헌으로 불러 모은 연유라도 있사온지요?”
서필공이 하필 비좁은 사랑채로 참모들을 불러 모은 까닭이 궁금하다는 듯 질문했다.
“비록 서헌이 비좁을지라도 이렇게 서로간의 거리가 없어야 보다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아니겠소. 앞으론 매일 저녁마다 서헌에서 회의를 주재할 터이니 그리들 아시오.”
나는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왜국의 침략이 기우(杞憂)가 아닌 머잖아 실제로 닥쳐올 재난임을 거듭 밝혔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비만큼은 철저히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처음엔 몇몇 군관들이 그러한 다짐에 대해 지나친 걱정이라며 반발을 보였으나 그렇다고 내 위엄을 정면으로 거스르지는 못했다.
“본관이 부임해온지 불과 열흘밖에 되지 않은 터라 아직 다대포진영내의 살림에 어둡소이다. 때문에 여러분의 도움이 진실로 절실하오. 먼저 군사의 수효부터 늘려야 할 것이고 훈련도 강화해야 할 것이요. 그리고 무기도 생산해내야 하고 성벽도 허술한 부분을 보완해야 할 것이요. 그 모든 것을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서둘러 준비해야 할 것이요.”
박형신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첨사영감, 그런 일들을 하기위해서는 먼저 자금이 충분히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 보옵니다. 다대진영에는 병력을 증강할 자금도 무기를 생산할 자금도 따로 준비된바 없사옵니다. 그렇다하여 백성들로부터 조세(租稅)를 더 우려내기도 어려운 것이 근자에 들어 백성들 살림살이가 더욱 어려운 실정이옵니다.”
“내 그런 사정을 모르는바 아니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느니 왜란을 미리 미리 대비하자는 것이외다. 본관 또한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가진 재물을 모두 내놓겠소이다. 내 추후 여러분의 은공을 결코 잊지 않을 터이니 여러분들 또한 재물을 거두어 본관을 도와주시오. 그리고 다대포지역의 선주들과 지주들도 설득을 하여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도록 하시오.”
나부터 지닌 모든 재산을 내놓겠다고 공언하자 참석자 대개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재산을 내놓는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들과의 약속대로 그 다음날 모든 재물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그들로부터도 기대 이상의 제법 많은 재물이 모여졌다.
4
왜국의 도발을 막기 위해 무엇보다 화급(火急)한 것은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군사부터 증원(增員)하는 것이다.
5
군사를 증원하기위해 남자의 징발연령제한을 낮추고 젊은 여자까지 동원했다. 가혹하다 여겨질지언정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진영 내의 만 15세 이상의 사내애들과 만 18세에서 30세 미만의 여자들 가운데 두 살 미만의 젖먹이가 없는 여자들 그리고 사내의 경우 그 나이의 범주(範疇)에 속하지 않더라도 체격이 크고 건강해 뵈면 모두 차출(差出)하였다. 그렇게 뽑힌 그들에겐 유사시에 동원할 수 있는 가병(假兵)으로서의 역할을 부여하고 그에 걸맞은 훈련을 실시했다. 결국 코흘리개와 부녀자까지 동원한다며 심한 반발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임첨사가 재임시절 제 소임을 어떻게 다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다대포진영의 병기고를 점검한 결과 예상했던 바와 같이 그 부실함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비치된 병기는 그 수량이 턱도 없이 부족할뿐더러 그나마 병기로서의 흠결(欠缺)이 많았다. 녹이 잔뜩 슬어있는 낡은 화포(火砲) 7문에 철환(鐵丸) 36발, 조총(鳥銃) 42자루와 탄환 8박스가 고작이고 그 외에 활과 창, 검 등도 턱없이 부족했다.
병선(兵船) 또한 경상좌수사영에 등재되기론 열 척이었다. 그러나 두 척이라던 판옥선은 단지 한척에 불과하고 협선(挾船)이나 포작선(鮑作船), 사후선은커녕 해상전(海上戰)에 별 소용이 닿지 않는 낡은 소맹선이 네 척이고 그 외에 나머지는 어선을 징발(徵發)하여 겉보기론 병선처럼 대충 개조했기에 실제 해상전에 투입하기론 불가능한 것들이다.
조선의 병력이 육군과 수군으로 나뉜 것은 적이 쳐들어왔을 때 수군은 해상전을 맡고 육군은 육지전(陸地戰)을 맡도록 한 것이다. 육군은 육상에 근무하게 되어 있지만 수군은 군량과 군용품을 배에 싣고 배위에서만 근무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자니 배위에서 계속되는 근무로 배의 훼손이 심하고 수군들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그런 형식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전선 관리 또한 엉망이었다.
“참으로 한심하구나. 이러고도 조선에서는 유일한 수군(水軍)전문무장고을이라니….”
다대포지역이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섬과 가장 인접한 지역이라 호시탐탐 왜구의 출몰이 잦고 군사적 위치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다대포진을 만포진과 함께 수군전문무장고을로 지정했다. 그리고 첨사의 지위도 종3품이 아닌 정3품 당상무관을 배치했다. 그럼에도 병선이란 것들이 모두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전시용(展示用)에 불과하니 나로서는 절로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모든 병기들을 유사시에 사용가능하도록 모두 끄집어내어 손질하게 했다. 그리고 부산이나 김해 등지의 대장장이들을 모두 불러들여 화살이나 창 등 큰 비용부담 없이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무기들을 최대한 많이 만들도록 지시했다. 집집마다 철이란 철은 모두 징발하였고 그 외 사들인 철 2만근을 합쳐 3만4천근이 넘는 철이 창이며 화살로 만들어져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이제 창이 3천2백 개에 화살이 1만3천개가 넘사옵니다.”
종사관 허언개가 자랑스럽게 보고를 올렸다.
“창은 이제 그만 만들어도 되겠소. 대신 화살은 3만개를 채우도록 하시오.”
“3만개씩이나요?”
“그렇소. 화살은 곧 다대포진영 내 모든 사람들의 목숨을 지켜줄 유일한 무기라 할 수 있소. 그러니 최소한 3만개는 만들어야 하오.”
“하오나…, 이제 그럴만한 여력이 없사옵니다.”
“무슨 이유라도 있소이까?”
“이미 철은 바닥이 났사옵니다.”
“달리 조달할 방법도 없소이까?”
“예, 자금도 바닥이 났고… 집집마다 솥이며 숟가락이며 문고리까지 철이란 철은 모두 징발해온 터라….”
“그럼, 내가 철을 직접 구해볼 터이니 너무 걱정 마시오.”
비록 큰 소리는 쳤지만 나 역시 철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마땅히 손 벌릴 데도 없었고 관할지역내의 지주나 선주들한테서도 물질적 지원을 받아낼 만큼 이미 받아냈기에 아무리 궁리해 봐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선주 최필달을 찾아갔다. 최필달은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맞았다.
“영감께서 한번만 더 도와주시구료. 내 그 은혜는 결코 잊지 않으리다.”
“지도 이미 도와드릴 만큼 도와드렸는디 또 도와달라고카면 갤국 지더러 알거지되란 말밖엔 더 되겠수.”
영감은 말을 퉁명스럽게 내뱉으면서도 의외로 철 1만근을 더 내놓았다.
“참 재주가 신통하오. 철 1만근을 은밀히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소.”
“아니 첨사영감, 사실 철 말고는 보관하기 마땅한게 어디 있겠수. 고이쩍은 눈으로 보덜마소.”
“영감, 고맙다는 뜻으루다 하는 말이오. 다른데 더 감춰둔게 있으면….”
“첨사영감, 더 보채봐야 내놀게 증말 업승게 고만하슈.”
6
다대포진성은 높이 열세 척에 둘레가 일천팔백육 척의 석성(石城)이다. 동서남북에 각기 성문이 있어 군사훈련장인 연병장(練兵場)과 통하는 동문을 패인루(沛仁樓)라 했고 서문을 영상루(迎爽樓) 남문을 장관루(壯觀樓) 북문을 숙위루(肅威樓)라 했다. 그 성곽(城郭)을 몇 번씩 둘러보며 세세히 점검하기를 낡거나 허물어진 부분을 보수토록 했다. 그리고 성벽 안쪽으로는 석대(席帶)를 구축하여 화살을 쏘기에 적합하게 했다.
나는 목장리의 군마사육장에도 수시로 들렀다. 내 관할 하에 있는 군마사육장은 부산지역에서는 부산포진영에서 관리하는 절영도의 군마사육장 다음가는 규모였다. 목장리사육장은 주민들이 국마성(國馬城)이라고 부를 만큼 높다란 성벽으로 둘러싸여있다. 성벽의 길이는 솔티재에서 초량리 뒷산까지 약 1천1백장(丈)에 이르고 벽의 두께는 30촌(寸)에 높이는 8척(尺)에서 12척에 이르렀다. 말을 키우는데 왜 이런 견고한 성벽이 필요한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사육장은 별장 방사룡(方師龍)이 관리했는데 망아지 12필을 포함한 70여 필의 말들 가운데 다리를 저는 말 두 필을 제외하고는 병들거나 허약한 말 10여 필을 따로 가려내어 특별히 보살피도록 했다.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마음먹은 대로 손쉽게 증식할 수 없는 것이 말이고 보니 말 한 필조차 아쉬운 때라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이다.
다대포구 한켠에 몰려있는 함선들도 함선 건조경험이 있는 임해봉(林海峰)이란 사람을 대목장(大木匠)에 임명하고 목수 다섯을 붙여 그중에 쓸 만한 배를 가려 수리하도록 지시했다.
첨사로 부임한 이래 왜국의 도발에 대비하여 소홀함이 없도록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힘을 쏟긴 했다. 그러나 조정차원에서의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터라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200자 원고지 63매 분량)
- 제6회에 계속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