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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 옛길에 스민 釜山 사람들의 哀歡 |
영어의미역 | Joys and sorrows of the Busan people reflected in the old streets of Busan |
분야 | 생활·민속/생활,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부산 옛길에 스민 역사적 숨결]
부산의 옛길을 더듬기 위해서는 까마득한 옛날인 구석기, 신석기, 철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지만, 옛길의 자취를 확인하고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애환을 더듬기 위해서는 근세, 근대의 족적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옛길은 역사와 문화의 보고이다. 지역사의 절반 이상이 길에 녹아 있다. 옛길에 길이 있는 것이다.나라의 동남쪽 변방이자, 대일 외교 및 교류의 거점이었던 부산은 일찍이 서울[한양]을 잇는 영남 대로[황산도]가 트여 길을 통한 교통이 활발했다. 영남 대로의 시·종착지가 동래읍성이었고, 이곳에서 뻗어 나간 길이 기장으로, 범어사로, 경상 좌수영으로, 초량 왜관[오늘날 용두산 일대]으로, 다대포 등지로 열려 있었다.부산 옛길에는 한민족의 파노라마 같은 역사가 새겨져 있고, 부산의 중세, 근현대사가 녹아 흐른다. 이 길을 밟고 임진왜란 때 왜군이 진격해 왔고, 이 길을 통해 한일 외교 사절인 조선 통신사가 일본으로 떠났다. 동래부의 일상적 업무와 외교 역시 이들 길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부산의 옛길은 범어사나 기장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원형이나 옛 자취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가까스로 남은 옛길들도 개발 압력을 받거나 무관심 속에 잊혀져 가고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지난 역사에서 배우려면 옛길을 되살려야 하고, 옛길의 지혜를 교육 문화 자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혜의 옛길 다시 보기]
고루하고 답답한 옛길이 문화 관광 자원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시대적 역설이다. 걷기 열풍이 옛길을 다시 불러낸 측면도 있다. 모두가 큰 길, 새 길, 빠른 길, 편리한 길을 좇고 있는 때에 느리고, 좁고, 불편하고, 귀찮은 옛길이 각광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옛길에 선인들의 지혜, 역사의 숨결, 미래적 삶의 가치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옛길에는 묘한 생명력이 흐른다. 도시 계획이 옛길을 깔아뭉개고 콘크리트가 옛길을 덮어도 옛길은 자체의 정체성을 잃기는커녕 질경이 같은 생명력으로 과거와 현재, 자연과 문명의 공존을 얘기하며 골목을 지키고 있다. 공간이 바뀌어도 장소에 대한 집단의 기억은 흐르므로 옛길이 이어지는 것이다. 옛길에는 일정한 코드가 존재한다. 길 위 또는 주변에 관공서가 있거나, 역원과 역촌이 있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을 끼고 있다. 그런가 하면 비석걸이나 우물, 다리, 장승 등의 표식을 갖는다. 옛길을 찾는 데 이러한 표식은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동래부의 옛 간선 도로[동래 부사 왜관 행차길]를 보면, 황산도의 속역인 휴산역을 필두로, 다리[광제교, 이섭교]가 있고, 비석이 있으며, 부산진 시장[부산진성, 자성대, 영가대], 수정 시장[두모포 왜관], 영주 시장[초량 왜관 초입] 등 시장을 끼고 있다. 사람살이와 길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옛길은 찾기가 쉽지 않다. 기초 조사 자료가 거의 없는데다, 옛길을 알리는 표식들이 대부분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지자체나 학계 연구자들조차 옛길을 챙기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큰 길, 넓은 길, 빠른 길, 편리한 길에 한눈이 팔려 있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옛길을 천대하고 훼손하는 것은 문화 말살과 다름없다. 옛길을 다시 보고, 그 속에 감춰진 의미와 가치를 읽는 것은 길의 시대, 문화 창조 도시를 만드는 첩경이 될 수 있다.
[황산도 옛길을 찾아서]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동래읍성 동헌 앞. 동래 시장 들머리인 이곳에서 장사하는 한 노점 할머니가 걱정스레 묻는다.“어데 갈라카능교?”“황산도 걸어볼라 캅니더. 옛날 영남 대로라 캤지예. 양산, 삼랑진, 밀양까지 이어집니더.”“아이고 그 먼데를 우째 갈랑교? 그 길을 걸어 간다꼬?“”“옛길을 찾아가는데 걸어가야죠. 옛날엔 차가 어디 있었습니꺼.”“고생하것네. 그런데 뭔다꼬 옛길을 찾는다카노?”노점 할머니에게 옛길의 의미를 설명하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할머니에게 옛길이란 흘러간 옛이야기일 뿐, 현대적 의미로 해석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을 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 같다. 옛길은 우리 생활 속에서 이미 쫓겨나 있었다. 배낭을 고쳐 메고 워킹화 끈을 동여맨다. 한민족의 옛길 영남 대로[황산도]를 찾아가는 길이다.
1. 대낫들이 길에 흐르는 사연황산도(黃山道)는 문헌에만 존재하는 옛길이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 시작되고 영남 대로 등 우리 옛길들에 철로와 신작로가 깔리고 있을 때, 황산도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역사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후 100년이 넘게 우리는 황산도를 찾지 않았다. 아니, 찾으려 하지 않았고, 찾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옛길에 역사의 사연이 줄줄이 꿰어 있는 데도, 개발과 속도주의에 취해 외면해 왔던 것이다. 그런 황산도가 조용히 깨어나고 있다. 몇몇 지역학자들이 애쓰고 연구한 덕분이다. 주영택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원장은 부산 동래에서 양산~삼랑진~밀양을 잇는 황산도 옛길을 재조명해 실체를 밝혀낸 향토 사학자다. 그를 만나 황산도의 현대적 의미에 대해 물어보았다.“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을 흔히 ‘영남 대로’라고 부르지만, 동래~밀양 구간은 황산도가 원래 명칭이라. 황산도를 알아야 영남 지역의 길과 물류(物流), 인류(人流), 문류(文流)를 알 수 있어요.”영남 대로는 조선 시대에 한양[서울]~동래[부산]를 오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문헌에는 ‘경상 충청 대로’, ‘경상 대로’ ‘동남지동래사대로(東南至東萊四大路)’ 등으로 나온다. 한양의 남대문에서 출발해 문경새재를 넘는 중로(中路)를 택하면, 용인~안성~충주~문경~상주~칠곡~대구~청도~밀양~양산~동래까지 걸어서 15~16일이 걸렸다. 총 연장은 960리[약 380㎞]. 지금의 경부 국도나 경부선 철도보다 거리상으로 70~80㎞가 짧았다는 점에서, 조상들의 지리적 혜안을 엿볼 수 있다.길의 폭은 넓은 곳이 10m, 좁은 곳이 3m 정도였고, 역(驛)은 30리[약 11.8㎞]마다 설치된 듯하다. 장국밥 한 그릇 먹고 짚신 신은 길손이 한 번 쉴 때쯤을 표시하는 ‘일식(一息)’ 또는 ‘참(站)’의 거리가 30리였다. ‘한참 간다’는 거리 개념이 여기서 나왔다. 지역 별로 10여 개의 역을 한데 묶어 종육품 관직의 찰방(察訪)이 관리했다.주 원장은 황산도 답사를 위해 필자의 동행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칠순을 넘긴 나이지만, 노학자의 몸은 단단하고 가벼워 보였다. 출발지는 동래읍성 동헌. 동래 시장, 동래 향교, 명륜초등학교 앞을 지나 마안산을 바라보며 온천 입구 사거리로 향한다. 동래읍성 암문에서 온천 입구 사거리까지는 ‘대낫들이 길’로 불리는 곳. 조선 시대 동래 부사가 이·취임할 때 기치창검을 세운 늠름한 행렬이 자못 장엄하여 ‘큰[대] 나들이’라 했다는 것이다. 명륜초등학교 뒤편 파리바케트 빵집 앞에 작달막한 표지석이 서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다. 대낫들이 길에 사연이 없을 수 없다.“1836년 대흉년 때 민영훈 동래 부사가 천 포대의 곡식을 풀어 만민구명(萬民救命)을 했어. 굶어 죽게 된 백성을 살린 거야. 이에 탄복한 두구·작장·남산 마을 주민들은 이듬해 민 부사 이임 때 대낫들이 길에 적삼을 벗어 밟고 걸어가게 했다는 거야.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장면 아닌가.”[주영택 원장]대낫들이 길을 벗어나면서 1592년 임진왜란 때 장렬하게 싸웠던 사나이들을 떠올린다. 부산진과 다대진의 첨사 정발(鄭撥)과 윤흥신(尹興信)을 차례로 죽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 선봉대는 동래성을 겹겹이 포위했다.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은 “왜적에게 한양 가는 길을 내줄 수 없다”며 목숨을 버렸고, 경상 좌도 군사 책임자인 이각[경상 좌부사]은 지레 겁을 먹고 북문지기를 죽인 후 도망쳤다. 송상현[당시 나이 42세]은 짧게 살고 불멸의 충신으로 부활했지만, 이각은 목숨을 부지했으나 역사의 비겁자로 전락했다. 길에서 빚어진 순간적인 판단의 결과가 이처럼 무섭다.
2. 소산역에서 사배 고개까지 온천 입구 사거리에서 명륜로로 직진하면 공수물 마을[금정구 부곡 2동]의 소공원에 다다른다. 공수물 마을은 동래부의 각종 공수물을 조달하는 공수전(公須田)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소공원에 있는 ‘부사 민영훈 거사단’이 눈길을 끈다. 민영훈(府使閔) 동래 부사의 만민 구명의 덕을 잊지 않은 두구·작장·남산 마을 주민들이 세운 공덕비다. 원래 황산도 길목인 지경 고개[금정구 노포동 녹동 마을]에 있던 것을 1993년 이곳으로 옮겼다.공수물 마을에서 조금 더 가면 부곡 3동 기찰(譏察)이다. 고지도에는 ‘십휴정 기찰(十休亭譏察)’이라 표기되어 있다. 요즘으로 치면 검문소인데, 기찰 포교(捕校)를 주재시켜 통행자나 신분, 물품 등을 검문검색했다. 지금의 금정농협 기찰지점이 그 자리다. 인근의 한 슈퍼 주인은 “여기가 기찰 맞아. 저기 보라고. 기찰 맨션, 기찰 목욕탕 같은 간판이 아직도 남아 있잖아”라고 말했다.동래여자고등학교 앞 체육공원로를 따라가면 왼쪽 편에 태광산업이 들어서 있다. 조선 시대에는 ‘역들’이라 불린 곳이다. 소산역의 경비 조달을 위해 지급된 역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브니엘중고등학교를 지나자 소산 고개가 나온다. 고개 너머에 소산역이 있었다. 지금의 금정구 하정 마을이 그곳이다. 소산 고개는 임진왜란 때 아군이 방어선을 치고 전투를 벌인 곳으로, 동래성에서 빠져나온 경상 좌부사 이각이 도주한 길이다. 관군의 방어선이 무너진 곳에 지역의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 싸웠다. 이것이 소산 전투다.동래성 함락 후 아군의 전열이 흐트러진 상황에서 상현 마을 출신의 김정서(金廷瑞)[1562~1592] 의병장이 나타났다. 그는 기장의 김일덕(金一德)·오흥 의병장 등과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소산역 일대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큰 전과를 올렸다. 전란 후 동래부는 동래 출신의 임진왜란 공신 중 공적이 현저한 24인을 가려 별전공신(別典功臣)이라 칭하고 특별 예우를 하였는데, 김정서는 이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그로 인해 강릉 김씨 집안도 크게 일어났다. 임진왜란이 조선 역사의 큰 분수령이었듯이, 한 집안의 흥기에도 분수령을 이룬 것이 임진왜란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주 원장은 “김정서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이었고, 소산 고개는 조선 의병의 발상지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계에서 깊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개를 넘어 상현 마을 입구 사거리에서 좌회전, 경부 고속 도로 굴다리를 지나면 하정 마을이다. 마을 입구 신일 농원 가는 길이 황산도 옛길이다. 옛길을 따라 노포동 고분길~팔송 경찰초소~작장 마을~대룡 마을~지경 고개까지 이르는 길가엔 영세불망비, 신도비 등이 즐비하다.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면서 옛길을 증언하고 있는 비석들이다. 여러 공덕비 중 하정 마을에 남아 있는 암행어사 이만직 영세불망비는 흥미로운 스토리를 갖고 있다. 때는 1887년(고종 15). 암행어사 이만직(李萬稙)은 영남 대로의 황산역[양산시 물금]과 소산역[부산 금정구 하정 마을]을 거쳐 부산포를 시찰한다. 부산포의 실정을 파악한 그는 조정에 해관 설치를 건의한다. “부산포 개항[1876년] 이후 교역이 늘어남에 따라 일본 수입품에 대해 15~30%의 관세를 물려 국고를 확충해야 합니다.” 이에 고종은 ‘마땅한 조치’라며 윤허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관세 제도의 시발점이 됐다.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 마을 비석걸에 있는 ‘수의상국 이공만직 영세불망비(繡衣相國李公萬稙永世不忘碑)’에는 이만직이 소산역의 세금 삭감과 역원 복지를 위해 애쓰고 조정에 해관 설치를 건의한 내용이 실려 있다. 말하자면, 이만직은 ‘통상 무역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하정 마을에 있는 ‘황산이방 최연수 애휼 역졸비(黃山吏房崔延壽愛恤驛卒碑)’는 상관이 부하를 위해 세운 이색 송덕비다. 내용인즉, 이방 최연수(崔延壽)가 역졸을 아끼고 보살피는 인격과 덕망이 높아 이방으로 있기에 아깝다는 뜻에서, 소산역과 휴산역의 도장·수리 상관이 1697년(숙종 23)에 세웠다는 것이다. 이 두 기의 비석은 원래 하정 마을 비석걸에 쓰러져 나뒹굴고 있던 것을 주 원장이 발견했고, 2007년 12월 금정구청에서 하정 마을 들머리에 설명판과 함께 복원해 놓았다.하정 마을의 노인정이 역 터, 개울가가 마방 터였다고 하고, 지금의 당산 나무 옆에서 거릿대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현장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적막하기만 하다. 오히려 경부 고속 도로가 생기면서 40여 호의 변두리 마을이 더욱 고립된 형국이다. 길로 번성한 역촌이 길로 인해 고립돼 버렸으니 길의 무정이다. 하정 마을에서 다시 체육공원로로 나와 영락 공원 가는 굴다리를 지나면 금정 도서관 길이 나온다. 이 길이 황산도이다. 도로 교통이 발달하기 전까지 영남의 선비나 장꾼들, 일반 민초들은 이 길을 따라 밀양이나 대구, 더 멀리는 한양까지 갔다. 민초들의 삶의 애환이 가득 배어 있을 길이건만, 지금은 마을 주민들 외엔 인적이 끊기다시피 했다.부산 톨게이트 옆 갈록산 기슭 길섶에 이상한 형태의 불망비 2기가 서 있다. 18세기 중엽 동래 부사를 지낸 정이검(鄭履儉)과 조재민(趙載敏)을 기리는 불망비다. 원래 한 개의 자연석 바위에 나란히 새겨진 마애비였으나, 도로 개설 과정에서 분리되어 600m가량 위쪽으로 옮겨져 따로 복원되었다. 정이검 비석은 머리 부분에 금이 가 있다. 2010년 11월 비석을 트럭으로 옮기다가 부주의로 땅바닥에 떨어뜨려 석두가 깨졌다고 한다. 이나마 살아남은 게 다행이다. 애처로운 황산도의 이정표들을 뒤로 하고 계속 오르면 부산과 양산의 경계인 사배 고개[지경 고개]에 이른다. 황산도는 양산을 지나 삼랑진, 밀양까지 이어진다.
[범어사 옛길을 따라]
범어사[678년 창건] 옛길도 온정 가는 길 못지않게 오래 됐다. 황산도[영남 대로]에서 가려면 십휴정 기찰[검문소, 현 금정구 부곡 3동]을 지나 구서 마을~두실~남산교~서거덤 마을~남중 마을~팔송정을 거치게 된다. 소나무 여덟 그루와 정자가 있었다는 팔송정은 도시 철도 범어사역 7번 출구 바로 위쪽[현 현대 자동차 운전 학원 자리]이다. 바로 위쪽이 팔송진이고 큰길 건너편이 포구산이라고 하는데, 지명에 수영강의 뱃길 역사가 포개져 있다. 답사에 동행한 주영택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은 저간의 역사를 이렇게 설명했다.“임진왜란 때 좌수영을 무너뜨린 왜적이 수영강을 따라 팔송진에서 범어사를 공격해 왔어. 3·1 운동 때 범어사 스님들은 범어사 옛길~팔송~포구산의 길을 따라 동래 장터로 가서 만세를 불렀고……. 팔송진, 포구산은 수영강 때문에 붙은 지명이야.”범어사 옛길은 범어 정수장[1932년 준공]을 지나 경동 아파트를 거쳐 계명봉 오솔길로 이어진다. 계명봉과 양산 사송리로 나뉘는 갈림길에서 범어사 방향으로 300여m 오르면 ‘금어동천(金魚洞天)’[신선이 사는 절경]이라 새겨진 큼직한 바위를 만난다. 바윗면에 동래 부사 정현덕(鄭顯德)·윤필은(尹弼殷)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조금 더 가면 ‘부사 정공현덕 영세불망비(府使鄭公顯德永世不忘碑)’[1872] 등 5기의 비석이 자리한 비석걸에 이른다. 동래부와 범어사의 내밀한 교류를 말해주는 역사 현장이다.범어사 옛길은 범어사가 창건된 신라 시대 이래 수많은 학승들과 승려들, 그곳을 드나든 신도들, 그리고 주변 민초들이 실생활 속에서 이용하던 길이다. 그 길이 천년이란 세월을 딛고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범어사 조계문(曹溪門)[일주문의 다른 이름]을 지나 계곡 길을 오르면서 주 원장이 묻는다.“범어사 물레방아 이야기 들어봤소?”“그런 게 있었습니까…….”범어사 성보박물관 뒤편 주차장 옆의 범어천 계곡. 흩어진 자연석 속에서 돌확과 원주(圓柱) 형태의 다듬돌을 찾아낸 주 원장이 또박또박 얘기했다.“이게 물레방아 흔적이야. 쌀을 도정하는 데 쓰는 절구나 방아를 걸었던 돌이거든. 이곳에 물레방앗간이 12채나 있었다잖아.”주 원장의 자료 조사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때 범어사는 사유답(寺有沓)이 5,000마지기에 이를 정도로 대지주였다. 동래, 금정, 양산 등에서 걷는 소작료만 1만 석이 넘었다. 1924년 소작인은 1,456명. 이들은 가을 추수가 끝나면 소질메와 지게에 나락[소작료]을 싣고 범어사 옛길을 따라서 운반했다. 이것을 도정하려다 보니 물레방앗간이 필요했고, 수량이 풍부한 범어천이 적지였다. 이 물레방앗간은 광복 직후까지 돌아갔다고 한다. 이 물레방앗간은 범어사의 자립 경제 시절의 추억을 말해주는 풍물이다. 복원을 하면 이색적인 관광 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범어사 물레방아는 ‘흘러간 물’이 아니라 되돌려야 할 추억 같았다.
[동래부 옛 간선로-초량 왜관 가는 길]
1. 부산 대로 재조명 부산은 두 개의 신·구 도시 중심이 있다. 고도심으로 불리는 동래부[동래읍성]와 원도심으로 일컬어지는 부산부[중구, 동구, 서구 일대]가 그것이다. 부산 도시축의 출발점을 고도심인 동래읍성으로 잡고 종착지를 부산진성 또는 초량 왜관으로 설정하면 ‘부산 대로(釜山大路)’라는 근대의 큰길이 나타난다. 이 큰길이 조선 통신사를 비롯해 동래부의 군사, 외교, 행정 업무가 이뤄지던 길이다. 부산 대로를 따라가면 부산의 근현대사가 고구마 줄기처럼 엮이게 되고, 부산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조선 후기 부산은 크게는 조선과 일본이라는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서, 작게는 부산과 대마도라는 지역 대 지역의 관계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일본으로 통신사라는 사절단을 파견하였고, 일본은 조선으로 차왜 및 연례 송사를 파견하여 양국 간, 그리고 지방의 업무 및 교섭 상황에 대해 논의하는 통로로 이용하였다.왜관은 조선 시대 대일 교역 창구로서, 외교·통상·사회 다방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부산포[현 범일동 일대]~절영도[영도]~두모포[동구 수정 시장 부근]~초량 왜관[용두산 일대]을 거치며 430여 년간 존속했으며, 1872년 일제의 전관 거류지로 전환되었다. 왜관 역사 중 가장 비중 있는 것이 초량 왜관이다. 초량 왜관은 1678~1872년 약 200년간 부산 용두산 일대 약 33만 580㎡[10만여 평]에 자리했던 대규모 왜인촌이다. 동래부에서도 초량 왜관의 운영 관리에 바짝 신경을 썼다. 그러다 보니 자연 인적·물적 교류가 많았고, 도로가 발달하게 되었다.고도심인 동래읍성은 일본 등 바깥에서 보면 ‘대륙 문화’의 관문이다. 반면 부산진성을 중심으로 한 부산항 일대는 ‘해양 문화’가 대륙으로 유입되는 길목이다. 따라서 부산 대로는 해양과 대륙 문화가 서로 어우러지고 소통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도시 정비를 명분으로 의도적으로 고도심을 파괴하고 고도심과 원도심의 연결 축을 단절시켰다. 부산 대로의 의미를 폄훼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동래 고도심 재창조 사업과 원도심의 산복 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가 활발히 추진되면서 부산 대로가 재조명되고 있다. 부산 대로가 도시 재생의 중심 축선이 될 수 있고, 지역의 정체성 회복은 물론 스토리텔링을 통한 관광 자원화도 가능하다는 것이다.부산 대로의 흔적과 자취는 문헌과 고지도 등에서 어느 정도 살필 수 있다. 19세기 초에 그려진 『동래 부사 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에 나타나 있는 ‘동래 부사 왜관 행차길’이 지금으로선 가장 좋은 문헌 자료다. 여기에 나타난 부산 대로의 노정을 보면, 동래읍성 남문~세병교~교대역 앞~남문구 앞~하마정~송공 삼거리~서면~광무교~부산진 시장 앞[부산진성]~정공단 앞[좌천동]~고관 입구~상해 거리 홍성방 신관 앞[설문]~봉래초등학교[객사]~광일초등학교[연향 대청]까지 약 11.8㎞[약 30리]다. 20세기 들어오면서 부산의 길 지도는 부산항과 부산부가 새로운 핵심 거점으로 부상한다.
2. 부산 대로 루트를 따라『동래 부사 접왜사도』에는 어렴풋하게나마 옛길이 표시되어 있어 문헌적 가치를 더한다. 이른바 부산의 길, 부산 대로의 존재이다. 이제 옛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본다.길은, 제1폭에 그려진 것처럼 동래읍성에서 시작된다. 동래읍성 남문 터[현 동래경찰서 뒤편 충렬로 일대]는 만감이 교차한다. 충렬로와 만나는 동래 시장 들머리에 자리했던 거대한 남문은 온데간데없고 단출한 표지석 하나가 서 있다. 동래경찰서 앞을 지나면 세병교다. 고지도에는 광제교(廣濟橋)라 나온다.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사처석교비(四處石橋碑)에 따르면, 광제교는 원래 나무다리였는데, 1781년(정조 5)에 돌다리로 교체된 것으로 되어 있다.길은 교대앞역을 지나 동해 남부선 철도를 끼고 남문구로 향한다. 법조 타운 입구인 도시 철도 3호선 거제역이 있는 남문구는 말 그대로 ‘동래읍성 남문(南門)의 들머리[口]’다. 1909년 12월 부산진~동래 남문~온천장 간 궤도 선로가 놓일 때 남문구 정차장이 자리한 곳이기도 하다. 거제 현대 아파트 앞은 횃바지 고개라 불린다. 옛날 부산진 시장은 4, 9일장으로 큰 시장이었는데, 동래 쪽 사람들이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족들이 횃불을 들고 마중 나온 고갯마루라 하여 횃바지[횃불맞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부산교육청 입구 사거리는 하마비(下馬碑)가 있어 하마정(下馬亭)이라 불리는 곳. 화지산 자락에 동래 정씨 2대인 정문도 공의 묘지가 있으니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아무튼 하마비가 옛길임을 일러준다. 이어지는 곳은 송공 삼거리다.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송상현 동래 부사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긴 어렵다’는 말이 귓전에 맴돈다. 일제 때는 이곳을 ‘모너머 고개’라 칭했다. 1910년대 이전까지 화지산과 황령산이 이어지는 능선의 가파른 고개로, 마비현(馬飛峴)[말 나는 고개], 신좌수영 등으로 불리다가 ‘모너머 고개’란 별칭을 얻었다. 1875년 부산항 개항 이후에 붙은 것인데, 개항이 된 부산포 일대에 일본인이 많이 살면서 동래 사람들이 일본인들을 경계하여 붙인 지명이란 말도 있다. 그러니까 ‘못 넘어가는 고개’라는 말이 일본인은 발음이 되지 않아 ‘모너머 고개’가 됐다는 것이다.
3. 부산진성 찍고 고관으로서면 로터리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고지도에는 서면 부근에서 부산진성[자성대]을 비껴 개운포~두모포~왜관 쪽으로 길이 열려 있다. 어떤 코스를 택하든 부산진성[자성대]을 놓칠 수 없다는 점에서, 서면 부산진 시장 앞에서 자성대를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다. 「1872 군현 지도 동래부 지도」에도 그렇게 그려져 있다. 이렇게 보면, 동래 부사 행차 경로는 서면~광무교~부산진 시장 앞~진시장로~철길[지하도]~좌천동 정공단 방향이었을 개연성이 가장 높다.증산 자락에 위치한 정공단은 조선 전기 부산진성 남문 자리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순절한 부산 첨사 정발(鄭撥)을 비롯해, 그의 막료 이정헌(李庭憲), 첩 애향(愛香), 충노 용월(龍月) 및 무명의 순절자들이 함께 배향되어 있다. 이제 왜관 권역이다. 도시 철도 좌천역 2번 출구 쪽에 ‘영가대·부산포 왜관 표지판’이 있다. 부산진성 해안 선착장에 자리했던 영가대는 조선 통신사가 배를 탄 곳이었고, 부산포 왜관은 1407년(태종 7) 부산진 시장 부근에 설치됐던 최초의 왜관이었다. 고관 입구는 두모포 왜관이 있었던 곳으로, 삼거리 공원에 표지판이 있다. 1607년(선조 40)에 설치된 두모포 왜관은 1678년(숙종 4) 초량 왜관으로 임무를 넘기면서 고관(古館) 혹은 구관(舊館)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고관이란 지명은 여기서 유래한다.동구청 주변의 옛길은 어디로 나 있었던 걸까.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 2동 다인 식당 앞의 고관로 101번길에 자리한 조선 시대 우물이 하나의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우선 우물의 형태가 가로×세로 약 250㎝ 크기로 형태가 정확히 ‘우물 정(井)’ 자다. 지역 어른들은 ‘최소한 몇 백 년은 된 조선 시대 우물’이라고 말한다. 두모포 왜관[1607~1678년] 자리가 현재의 동구청 아래쪽 수정 시장 일대 약 3만 3,058㎡[약 1만 평]라고 하니, 동구청 옹벽 아래의 고관로 101번길을 옛길로 보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여기서 초량동 상해 거리까지는 옛길과 근대길이 겹친다. 고관 입구에서 세일병원 뒷길을 따라 경남여자중학교를 끼고 초량중로를 따라가면 상해 거리다. 상해 거리의 중심부인 중국 음식점 홍성방 신관 앞이 왜관의 설문(設門) 자리다. 동래 부사는 여기서 한숨을 고르면서 작전 숙의를 했을 것이다. 사신 접대와 외교 협상을 앞두고 자못 긴장했을 것도 같다. 여기까지의 행로를 인터넷 다음 지도를 이용해 재보니, 거리가 11.2㎞, 도보 시간은 2시간 40분이었다.
4. 설문 지나면 왜관 영역 설문에서 한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러본다. 설문은 1710년(숙종 36) 동래 부사 권이진(權以鎭)이 왜인들의 난출을 막고 왜관 통제를 위해 설치했다. 위치는 복병산에서 해안으로 돌출된 쌍산 산등성이를 넘어 밖으로 나오는 자리다. 『동래부지(東萊府誌)』에는 규모가 삼간이고 산등성이에서 해안가를 가로지르는 성을 쌓았으며, 설치 당시 설문 안쪽에 있는 조선인 민가를 성 밖으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다. 『동래 부사 접왜사도』 제7폭에 설문을 지나는 행렬이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다. 이후 설문은 초량 왜관과 동래부를 구분하는 지리적 경계가 됐다. 두 나라의 사람들이 서로의 낯을 보며 경계를 서고 외교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이 선하다. 남북한 병사가 한 자리에서 대치, 경계를 서는 판문점의 풍경이 이와 유사할까.설문이 들어섰다는 상해 거리의 홍성방 신관 앞은 1936년 부산 동부 지도에 ‘초량정 571번지’로 나온다. 이곳은 초량 1동 571번지로 지번이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초대 부산해관장을 지낸 영국인 넬슨 로벗이 1885년 찍은 사진에는 ‘초량 해안의 큰 나무가 일본인 통과가 허락되지 않았던 옛날 경계를 표시한다’는 메모가 돼 있다. 옛 지도와 사진, 메모가 거의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현장엔 설문에 대한 안내판 하나 없어 아쉽다.설문을 지나 영주 고가로 앞 육교를 건너면 영주동 봉래초등학교다. 교정에 부산시가 세운 초량 객사 터 표지석이 있다. 객사는 조선의 역대 국왕 전패를 모신 곳으로 지방관이 숙배를 올리던 곳이다. 초량 객사에서는 부산에 온 일본 사신들이 들러 반드시 숙배식을 갖도록 했다. 왜관 통제를 위한 외교적 조치였다. 설문을 지나면 초량 왜관이다. 1783년에 동래부 화원 변박(卞璞)이 그린 「왜관도(倭館圖)」에는 초량 왜관의 전체 규모와 건물 구조, 명칭, 도로까지 세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초량 왜관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다.
5. 「왜관도」 속에 나타난 원도심 옛길「왜관도」에 나타난 길은 오늘날 원도심 옛길이다. 지형 변화가 심해 답사가 간단치 않다. 먼저, 초량 객사가 있었다는 봉래초등학교 옆 영주 시장 윗길을 걸어 나와 주성 약국 앞에서 영선 고개로 접어든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적 여관으로 알려져 있던 영주동 장춘 여관은 최근 뜯겨 주차장으로 변했다. 이어 가파른 영선 고개에서 골목길로 들어간다. 토요코 인 호텔 뒤쪽으로 난 중구로 172번 골목길을 따라 힐사이드 호텔을 끼고 미로 같은 계단을 오르면 코모도 호텔 앞이다. 코모도 호텔 일대는 1940년 초 일본군 요새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메리놀병원을 지나 부산 중구청 앞의 복병산 자락 중구로를 따라서 대청 떡 방앗간 사잇길[대청로 99번길]을 내려오면 연향 대청이 자리한 광일초등학교에 닿는다. 설문~연향 대청 간 거리는 약 1.5㎞. 짧은 거리지만 골목 구석구석 흐르는 역사는 의미심장하다. 지금의 대청동이란 지명은 왜관 시절의 연향 대청에서 유래한다. 연향 대청에서 행사가 열리면, 동래 부사 등 조선의 관리, 일본 사신, 두 나라의 통역관과 비서진들이 모두 모여 조선의 음식과 조선의 음악, 조선의 춤을 즐겼다.연향 대청의 문은 아마 대청동 대한성공회 부산주교좌성당 앞쪽에 있었을 것 같고, 대청로 건너편에는 약 2m 높이의 왜관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은 “대청동 동광동 일대에는 왜관 시절 담장이나 축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석축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면서 왜관 위치 비정 작업을 거쳐 역사관이나 자료관을 만들어 역사 문화 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동래 부사 접왜사도』와 「왜관도」에 나타난 길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가다 보면 부산의 길, 부산 대로에 내재된 부산 사람들의 삶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동래부의 관심사와 고민, 주민들의 일상을 접하게 되고, 이웃과 다를 바 없는 외국인[일본인]을 만나게 된다. 물론 초량 왜관 시절 일본인들은 용두산 일대에 갇혀 지냈지만, 동래부민들과 일본인들은 조시(朝市)를 통해 제한된 공간에서 수시로 접촉할 수 있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어떻게 상행위를 할 수 있었을까. 이런 과정을 통해 한일 양국민은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고 국제 감각을 키워갔을 것이다.조선 후기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없었다고는 하나 그것이 곧 평화, 교류, 우호를 뜻하진 않는다. 조일 간에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 쉼 없이 전개되었으며, 일본의 음흉한 마수는 한반도를 강점, 식민지로 만들었다. 부산 대로의 의미와 그 속에 흐르는 역사를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다. 이는 부산 대로를 재현하거나 복원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부산 대로가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란 길처럼 과거를 정리하고 새 역사를 만드는 이정표가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좌수영 길]
동래읍성에서 좌수영 가는 길은 나그네의 발길을 먹먹하게 한다. 길은 있으나 옛길은 없고, 선혈을 머금은 역사는 성에 갇혀 있거나 성돌에 짓눌린 채 잠자고 있다. 옛 지도에 희미하게 그어진 실선 한 가닥이 옛길과 새 길의 유일한 교신이다. 무심한 역사다. 길 위에서 만난 잃어버린 지역사와 전설 같은 의용담(義勇談)이 마음을 흔든다. 동래읍성에서 좌수영까지 10리 길. 부산 지역사는 여태껏 이 짧은 길 하나를 조명하지 못했다. 토현(兎峴)[현 토곡] 너머 좌수영성 문루에서 북소리가 둥둥 울리는 듯하다.
1. 잊혀진 휴산역출발지는 동래읍성 남문[동래경찰서 뒤 충렬로 일원]. 좌수영 가는 길은 고지도 상에 휴산역(休山驛)을 거치는 것으로 나와 있다. 휴산역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 동래경찰서[옛 농주산 자리] 일대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동해 남부선 철길 건너 동래구 낙민동의 동래 패총 일대로 보는 사람, 현 낙민초등학교 부근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곳은 조선 시대 황산도의 기·종착점으로 부산 옛길의 원형이 되는 역참이지만, 자취는커녕 실체가 오리무중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동래현[읍성]의 남쪽 1리[약 400m]에 있다고 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중마 2필, 짐말 5필, 역리 166인, 남자 종 30구가 배속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규모가 컸음을 짐작케 한다. 군사적·지리적으로 휴산역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좌수영에서 오면 이섭교[현 연안교 아래]를, 부산진에서 오면 광제교[현 세병교]를 지난다. 따라서 휴산역에서 해안 포구를 거쳐 해외로 나갈 수 있고, 동남해안의 역로로 울산·경주 쪽으로 갈 수 있다. 휴산역의 위치를 규명해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한다.휴산역의 파발을 상상하며 충렬대로~낙민로~동해 남부선 동래역으로 간다. 철로가 좌수영 길을 막고 있다. 할 수 없이 철길을 거슬러 올라 동해 남부선 수민 건널목을 건넌다. 온천천로 319번길을 따라 들어가자 동래 패총 터가 나온다. 동래 패총은 초기 철기 시대 유적이다. 철 생산 유구를 비롯해, 골각기류, 토기류, 동물 유체, 패류 등이 발견되어 2,000여 년 전 온천천 일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동래 패총에서 수안로 8번길을 따라 나오면 온천천이다. 생태 하천으로 변모해 있는 온천천의 잘 정비된 산책로가 옛길을 좇는 발걸음을 머쓱하게 한다. 눈앞에 장산과 배산이 펼쳐져 있어야 하는데, 고층 아파트들이 시야를 방해한다. 연안교를 지나자, 낙민치안센터 앞에 콘크리트 인도교가 기다린다. 다리 입구에 작달막한 비석이 서 있다. 이섭교비 모형이다. 원형은 사라졌으나 다행히 이섭교비[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3호]가 남아 건립 경위를 알 수 있다.“…옷을 걷어 올리고 건너다니던 냇물에 나무다리를 놓았지만 나무가 쉬 썩어 해마다 다리를 고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몇 사람이 뜻을 모아 돌다리를 놓기로 하고 돈을 모아 조선 숙종 21년[1695]에 다리를 놓았다……”.이섭교는 글자 그대로 ‘건너기 편리하도록[利涉] 가설한 다리[橋]’로, 동래읍성에서 좌수영으로 가는 행정·군사상의 중요 교통로였다. 사진만 남아 있는데 형태가 아주 걸작이다. 아치형 홍예교 4개를 쌍안경처럼 연결해 튼튼하고 조형미가 돋보인다. 민가에선 독특한 형태를 빗대 안경다리, 동래 한다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멋진 다리는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 말 영문도 모르게 유실되고 말았다. 남아 있었더라면 문화재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섭교의 원형을 복원해 스토리를 입힐 경우 훌륭한 문화 관광 자원이 될 수 있다. 이는 곧 조상들의 지혜로운 삶을 이해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2. 좌수영, 민초들의 전쟁짝퉁 이섭교를 건너 연제구 쪽으로 접어든다. 눈앞에 배산이 둥그런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부터는 고지도에 나타난 한 가닥 선을 토대로 현대 도시의 미로를 파고들어야 한다. 몇 차례 답사를 통해 찾아낸 추정 루트는, 안연로~과정로 225번길~토곡 사거리~토곡 고개[토현]~망미 주공 입구~과정로 55~56번 사잇길[부산은행 망미지점 앞]~수영 사적 공원[좌수영 북문 터]이다. 답사 포인트는 고지도에 표시된 이섭교와 토현(兎峴)[토곡 고개], 배산(盃山)[254m]의 겸효대(謙孝臺), 수영강변의 과정(瓜亭) 정도다.겸효대는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산 38-1번지 일대로, 주변에 배산 성지가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동래현 남쪽 5리[약 2㎞]에 있다 하고 고려 말에 활동한 선인인 김겸효(金謙孝)가 노닐 던 바 있어 그리 이름하였다’라고 하였다. 배산 성지는 삼한 시대 거칠산국(居漆山國)의 존재를 말해 주는 의미 있는 유적지다. 과정은 고려 의종 때 내시 낭중(內侍郎中)을 지낸 정서(鄭敍)가 동래 땅에 귀양 와서 붙은 지명이다. 정서는 왕실 외척과 혼인 관계를 맺어 인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의종이 즉위하자 모함을 받아 그의 고향인 동래로 추방되었다. 다시 소환하겠다던 의종의 약속이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자 수영강변에서 거문고를 타며 애틋하게 불렀다는 노래가 「정과정곡(鄭瓜亭曲)」이다. 겸효대와 과정은 경유지에서 약간 벗어나지만 짚고 가야 할 유적지다.토곡 고개를 넘으면 수영 사적 공원 들머리 안내판이 나타난다. 경상 좌수영(慶尙左水營)은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의 약칭. 경상 좌수영이 현재의 부산 수영 지역에 처음 자리 잡은 것은 조선 선조 때였다. 이후 감만이포[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로 옮겨졌던 10여 년을 제외하고 경상 좌수영은 약 300년간 지금의 수영 지역에 존속했다. 우두머리는 좌수사[일명 水使, 정3품 무관]로서 낙동강 이동에서 경주까지의 해상 방위를 책임졌다.좌수영성지는 도시화로 원형을 거의 잃었다. 동문·서문·남문·북문을 갖추고 성곽 길이만 1,480m에 달했다고 하나, 지금은 옛 서문 터 좌우로 620여m가 남았다. 좌수영은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다. 참혹한 임진왜란은 놀랍게도, 경상 좌수사가 도망치는 것으로 시작된다.“왜병이 부산포를 함락시키자 경상 좌수사 박홍은 적의 세력이 너무 큰 것을 보고 감히 출병하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중]당시 좌수영에는 100여 척의 전함과 3,000여 명의 수군이 있었다고 하나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그 후 좌수영은 약 7년 간 왜군들의 점령지로 떨어져 왜군의 갖은 만행이 저질러진다. 일부 지휘관과 수군의 패주에도 불구하고, 민초들은 자체 의병을 모아 게릴라 전법으로 끈질기게 왜적에 맞서 싸웠다. 뒤늦게 행적이 드러난 ‘25의용(義勇)’이 바로 그들이다. 수영의 잔존 주민과 수병들로 구성된 ‘25의용’은 좌수사 박홍이 달아난 후 혼란에 빠진 좌수영성에서 약 7년간 게릴라전을 펼쳤다. 밤에 나다니는 왜군을 쇠스랑과 도끼로 공격하고, 지나가는 왜선을 습격했으며, 정박한 왜선에 구멍을 뚫고 닻줄을 끊었다.‘25의용’이 왜적과 맞서 싸울 작전 계획을 수립한 곳이 수영 사적 공원 내 무민사 뒤편의 큰 바위[일명 선서 바위]였다. 이곳을 선서 바위라 부르는 것은 25의용이 이 바위 앞에서 죽음을 선서로 맹세했기 때문. 언제부터인가 그 자리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다. 수영 주민들은 이를 ‘가림 나무’라 불렀다. 25의용이 왜적에 맞서 비밀리에 작전 계획을 짠 장소를 ‘가려준’ 나무라는 뜻이다. 왜구를 무찔러 남해안을 지킨 최영 장군과 그를 받드는 사당, 그 뒤편의 바위 앞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저항을 맹세한 25의용의 선서, 그 장소를 지켜준 가림 나무……. 모두 스토리텔링 감이다.수영 사적 공원의 무민사(武愍祠)도 의용의 행적을 지원한다. 무민사는 고려 말 왜구를 크게 무찌른 최영(崔瑩)[1316~1388]의 영신을 모신 사당으로, 좌수영성 동문 터 바깥 왼편의 큰 바위 앞에 있다. 최영은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반대하다 참형당한 고려의 충신이다. 이성계는 개국 6년 만에 무민(武愍)[장군을 위로한다는 뜻]이란 시호를 내려 넋을 달랜다.원래 이곳의 강신 무녀가 최영의 영정을 모시고 살던 오두막집을 1963년 주민들이 사당으로 만들어 매년 제를 지내고 있다. 사당은 4.3㎡ 정도로 볼품없지만 그 정신은 호국의 숨결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25명의 ‘붉은 의용단’이 끝까지 저항한 정신적 힘도 이런 데서 비롯된다. 이런 무용담이 있어 임진왜란 때 좌수영의 쓰라린 패배는 패배로만 기록되지 않는다.
[기장 옛길]
기장 옛길은, 부산의 여타 옛길들이 동래읍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공식을 깨고 기장읍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삼국 시대 때부터 기장읍성에서 동래와 양산, 울산·경주 방면으로 통하는 길들이 열렸다. 자체 중심을 갖는다는 건 기장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이 실하다는 의미다. 신라의 한낱 변방인 갑화량곡(甲火良谷)이 757년(경덕왕 16년) 기장(機張)이란 이름을 얻어 오늘날 ‘새벽을 여는 도시’로 발전한 배경에는 유구한 전통을 갖는 사통팔달의 길이 있었다.
1. 바위에 새겨진 공덕비“1892년 동학 혁명 시기, 기장 고을에서도 청년들의 봉기가 있었다. 기장 청년들은 포악무도한 ‘손 현감’을 붙잡아 상여 틀에 묶은 뒤 가시나무로 덮어 용소 고갯길을 넘어갔다. ‘살려 달라!’는 현감의 애원을 뒷전으로 흘리면서 청년들은 주거니 받거니 상여 소리를 내질렀다. 용소 고갯길을 지난 청년들은 손 현감을 읍성 바깥인 안평리 벌판에 갖다버렸다고 한다. 그 후 사건 주동자들이 잡혀갔으나, 손 현감이 원인 제공자로 드러나 그가 파직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공태도, 『기장 향토지-남기고 싶은 글』 중]이 글에 등장하는 용소 고갯길은 기장읍 서부리에 있는 유서 깊은 옛길로, 기장의 관문에 해당한다. 기장이 갑화량곡이라 불리기 전부터 있던 길이라고 하니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는다. 답사에 동행한 기장향토문화원 공태도 소장이 차근차근 이 길의 의미를 설명한다.“기장현으로 부임·이임하는 현감과 군수, 관찰사, 어사들이 모두 이 길을 오갔다고 하지. 기장을 드나든 상인과 장꾼, 나그네, 농민들도 이 길을 이용했을 테고. 계곡 바윗면에 새겨진 공덕비, 선정비가 7개야. 바위가 거짓말할 리는 없을 거라. 근대에 와서는 소장수나 등짐장수·봇짐장수들이 이고 지고 동래, 양산 장터로 가던 눈물 고개였고, 일제 강점기 때는 애국 지사들이 일경의 추격을 피해 넘던 한 서린 길이었어. 기장 역사의 파노라마 같은 곳이지.”우리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차성로 299번길의 옛 기장읍성 남문에서 출발해 용소천을 거슬러 옥곡~윗등부~참샘 앞~이내터로 올라갔다. 용소골 웰빙 공원을 지나자 ‘기장 옛길’ 표지석과 함께 원두막 쉼터가 나왔다. 표지석은 1996년 공태도 소장 등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공 소장은 “옛길의 개념조차 희미한 때 딴에는 ‘멀리 보고’ 옛길을 살려 놓았는데, 개발을 막는다 하여 원성도 들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술회한다. 원두막 쉼터를 지나자 계곡 바위에 글을 새긴 선정비가 하나둘씩 나타났다. 스스로 공덕을 칭송하는 모습이 달갑지는 않지만 옛길의 표지임에는 틀림없다. 험한 경사지엔 잔도(棧道)[험로에 사닥다리를 달아 낸 길]를 놓은 흔적도 드러나 있다.“저길 봐, 여근석(女根石)이야. 여자의 그 부분을 닮았지 않나? 이곳을 오가던 나그네들이 저 바위 아래에 돌을 던지면서 소원을 빌었다고 해.”[공태도 소장]자세히 보니 여근석 바윗면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다. ‘縣監孫庚鉉永世不忘(현감손경현영세불망)’. 여근석에 불망비를 음각한 건 무슨 의미일까. 이곳에 온전히 남은 옛길은 200m 정도지만, 앞뒤를 다듬으면 2~3㎞는 연장될 수 있을 것 같다. 기장군은 지난 2007년 문화재청에 국가 문화재 지정을 신청하기도 했다. 문화재 지정 여부와 관계없이 스토리텔링을 가해 테마 옛길로 다듬을 경우 이곳은 훌륭한 역사 관광·교육 자원이 될 수 있다.
2. 기장~동래길 기장 읍내에서 용소 고갯길을 넘어가면 기장읍 만화리 이내터 마을에 이른다. 고지도에 등장하는 이천현(伊川峴)이다. 마을을 지나면 독립운동가인 이명순(李明淳) 의사 추모비가 있고,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철마면 안평 저수지 삼거리가 나온다. 문헌에는 이곳에 쌍교(雙轎)가 있었다고 하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이 쌍교에서 동래와 양산 가는 길이 나누어진다.동래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철마면 안평리, 고촌리를 지나 반송~명장동~시시골~동래읍성으로 이어진다. 안평리는 조선 시대 신명역(新明驛)[고려 시대엔 기장역]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부산 도시 철도 4호선 안평역과 차량 기지가 들어서 역촌의 맥을 잇고 있다. 조금 아래쪽의 고촌리는 1,400여 년 전의 도로 유구가 발굴됐던 곳이다. 지난 2007년 고촌리 택지 개발 과정에서 확인된 도로 유구는 길이 300여m, 노폭 2.2~6m이며, 폭 2~2.5m의 잔자갈을 평평하게 깔아 노면을 조성했다. 도로 중앙부엔 폭 1.7m의 차륜흔[수레바퀴 자국]이 뚜렷했다. 이 도로 유구는 국내에서 희귀한 유적으로 삼국 시대 갑화량곡현[기장]과 거칠산군[동래]을 잇는 길이었고, 이후에도 기장과 동래를 잇는 중요 교통로로 기능했다.
3. 양산·울산 가는 옛길 쌍교에서 방향을 갈치재[蘆峴]로 잡으면 날음재[飛音峴]를 넘어 철마면 송정리에 닿는다. 송정(送亭)은 송별 정자(送別亭子)의 약칭. 옛날 이곳을 지나던 관원과 장사꾼, 나그네들이 석별의 정을 나누던 정자나무가 있었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철마산 서남 기슭[대우정밀 일대]에 위치하며 양산, 동래로 통하는 큰 길목으로 아직도 5일장이 선다. 송정에서 남쪽으로 가면 동래, 서쪽으로 가면 양산, 북쪽으로 가면 울산이다. 이러한 입지 때문에 『해동 지도(海東地圖)』에는 네 갈래 길을 의미하는 ‘구로(衢路)’로 표현하고 있다. 양산을 경유해 송정~쌍교~기장으로 가는 길은 관도로서 최단 코스였기 때문에 지방관들이 주로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철마면 송정에서 국도 제7호선을 따라 울산 쪽으로 가면 월평이다. 월평 역시 예로부터 교통 요충지였다. 학계 일각에선 『삼국사기』 「거도(居道) 열전」에 나오는 ‘장토지야(張吐之野)’를 월평으로 비정한다. 신라 초기 거도 장군이 장토지야에 군사를 모아놓고 말놀이[馬技]를 하고, 병마를 출동시켜 거칠산국[동래]과 장산국 등을 정복할 때 월평을 군사 거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월평은 조선 시대 때 아월역(阿月驛)이 자리했던 곳이다. 사료에도 나오지만 월평리에는 반월성(半月城)이란 토성 흔적과 장군대(將軍臺) 설화, 진치재(陳峙峴) 같은 지명이 남아 있다. 월평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정관~좌광천~좌천~문중리 바닷가로 이어진다. 기장읍성에서 씨줄 날줄로 뻗어나간 기장 옛길들은 무심코 지나쳐온 지역사의 뿌리와 줄기를 새롭게 들여다보게 한다.예나 지금이나 길은 인간 생활은 물론 문화 이동의 통로였다. 도시화 산업화로 인해 옛길이 사라져가는 시점에서 영남 대로의 골격을 이루는 황산도나 범어사 옛길, 기장 옛길 등이 남아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를 통해 선인들의 숨결을 만나고, 잊혀진 생활사 한 자락을 만나는 것도 다행스런 일이다. 시대를 건너뛰어 그 길을 오고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 지역사를 바로 알고 전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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