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교회가 오고 있다>(피터와그너 플러신학교 교수)
김홍섭(인천시립대 교수) [ ihomer@hanmail.net ]
미국 훌러(Fuller)신학교에서 교수로 오래 후학을 가르쳤던 와그너 목사의 “일터교회가 오고 있다“((Peter C. Wagner, WLI Korea)란 책이 나왔다. 와그너 목사는 2007년 CBMC한국대회에 주강사로 와서 그의 최근의 생각과 저술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그는 당대의 최고의 신학자이자 목사요 교수의 한 사람으로 많은 후학을 가르쳐 온 목회자이기도 하다. 복음주의로 대표되는 그의 가르침은 세계의 많은 기독교 리더와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백발이 성성한 80이 넘은 노학자의 진솔한 신앙고백과 회개의 말씀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 40여년의 사역에 대하여 반성하고 회개한다고 말했다. 교회(nuclear church)와 성전 중심의 사역을 더 강조하여왔던 자신의 지난날을 반성하고 이제 새로운 확대교회(extended church)의 개념과 일터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먼저 우리 사회의 변화를 강조한다. 이 시대를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설명한다. 패러다임이란 우리의 관심을 끄는 어떤 실제를 해석하는 지적(知的) 체계를 일컫는다. 이런 전환은 사고 체계의 변화를 요구하며, 또 이것은 사회 변혁 도표에 있는 다른 요소들에 대해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듣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패러다임은 결국 우리의 생각이며,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 쓴 “너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mind: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라고 씀도 이 맥락이다.
와그너 목사는 이런 변화의 핵심으로 신앙의 이분법을 비판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분법이라고 불리는 사상의 기수로서 역사의 족적을 남겼다. 일터 사역 운동의 최고 지도자인 존 베켓(John Beckett)의 『즐거운 월요일 신나는 일주일』을 인용하며, 그는 헬라적인 이원론에서 히브리적인 일원론으로의 전환을 강조한다.
플라톤은 절대불변의 우주적 진리를 추구했고 그 진리를 두 차원 가운데 더 높은 차원으로 간주했다. 이 높은 차원을 플라톤은 영원불변한 이데아인“형상(form)”으로 불렀고, 낮은 차원을 “질료(matter)”라고 명명했다. 낮은 차원은 잠깐 있다 없어지는 것이요, 육적인 것이다. 플라톤의 관심은 놓은 차원에 있었다. 이 차원이 잠깐 있다가 없어질 영역보다 더 우수하다고 믿었다. 플라톤 사상은 자연계인 피조물과 엄격히 구별되는 영적인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반면 히브리인들은 모든 피조물과 그 위에 깃든 하나님의 임재를 믿는다. 히브리인들은 지금도 모든 삶과 일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보좌를 보며 산다.
히브리 세계관에서 이끌어낸 결론은 우리의 직업이 사역의 한 형태라는 사실이다. 직업은 성가대에서 찬양하는 것만큼이나 거룩하다. 그러나 이것은 헬라 사고방식에 익숙한 우리에게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히브리 세계관으로 전환할수록 일터 위의 교회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라는 표현을 좋아하는데, 이는 두 교회 모두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것을 잘 표현 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익숙한 핵가족과 확대 가족 개념에서 도출한 “핵교회(nuclear church)”와 “확대교회(extended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결론지었다. 여기서 핵교회란 건물을 포함한 기존의 교회 개념이라면, 확대교회란 일터사역자와 삶의 현장과 일터까지 확장된 교회를 의미한다.
성경적이며 히브리적인 인생관은 플라톤의 사상과는 전혀 다르다. 히브리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된다. 진리는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계시가 진리이다. 히브리인에겐 하나님만이 오직 가장 높은 차원에 계신다.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모든 것이 하나님 아래 존재한다. 와그너 목사는 마크 그린(Mark Green) 의 글을 인용한다.
일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것이다. 그리고 일은 마땅히 주님께 드려져야 한다. 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아보다(avodah)인데 이것은 예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와 어근이 같다. “서비 스”(service)라는 영어 단어는 이 맛을 담고 있는 최적의 단어이다. 일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service) 것이다. 이 하나의 깨달음 가지고 신학을 전개해 나가면 오해를 살지도 모르겠지만, 일 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중의 한 부분임을 성경 여기저기 서 말해주고 있다. 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한 모습이다. 그 분에 대한 섬김의 한 모습이다
‘교회’로 번역된 성경 용어는 에클레시아(ekkesia 또는 esslesia)라는 말이다. 헬라어인 “ekklesia”의 어원적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쓰인다. 때로 이 단어는 교회에 모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일컫는다. 데이비드 올리버(David Oliver)와 제임스 스웨이트(Janes Thwaites)는 그들의 저서 『일하는 교회(cherch that Works)』에서 새로이 취해야 할 교회의 다른 모습에 대해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우리의 교회 신학은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 모임의 성격만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에베소서에서는 에클에시아를 모임과 연결시켜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분명히 성도들이 한 가족처럼 모이는 것이 교회의 모임이지만, 모임이여야만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도들이 교회 자체이며 성도들이 모이면 교회가 되는 것이다.((D. Oliver. & J. Thwaites, 『일하는 교회(cherch that Works)』재인용)
교회가 두 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나는 매주일 지역교회에 모이는 회중 모임으로서의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주중 엿새 동안 일터에 흩어진 성도들의 몸으로서의 교회이다. 그들은 같은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이다. 히브리 세계관으로 보면 이 두 모습의 교회는 적대적이거나 경쟁적이 않고 조화롭게 존재하는 한 교회이다.
다원화된 오늘의 세계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전 삶과 우주에 펼쳐지는 피조의 세계에, 교회의 개념도 새로운 지경과 경계의 모색이 필요함을 느끼게 한다. 오랜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신앙의 체계에도 과감히 도전하여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노 목회자이자 스승의 큰 걸음이 가슴에 깊게 와 닿은 시간이었다.
[출처] 기독경영연구원 출처 자료 2 - 일터교회가 오고 있다
첫댓글 아멘!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나 사람들 모두가 교회이며 교회 공동체입니다